데스미션 - 죽어야 하는 남자들
야쿠마루 가쿠 지음, 민경욱 옮김 / 크로스로드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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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여자를 죽이고 싶다―. 온몸의 혈관에 매혹적인 독소가 내달리기 시작한 듯, 몸도 마음도 그 욕망에 매였다. 지금이라면…… 이 욕망을 풀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더는 주저할 게 없다. 자신은 곧 죽는다. 경찰에 잡히는 것은 두렵지 않다. 와카쓰키학원 아이들의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으나 욕망에 저항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곧 자신은 죽는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내내 봉인해 왔던 욕망을 풀어버리고 싶었다.    p.50~51

사카키는 데이 트레이더로 젊은 나이에 주식으로 큰 돈을 벌어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위암 말기라는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고, 절망하기 보다는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래 전부터 살인에 대한 욕망이 있었는데, 여자를 안을 때면 결정적인 순간에 여자를 죽이고 싶다는 강렬한 살인 충동을 느꼈던 것이다. 그 동안은 그러한 욕망을 억지로 누르면서 살아 왔지만, 어차피 이제 자신은 곧 죽게 된다. 그러니 경찰에 잡히는 것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봉인해 왔던 욕망을 풀어 버리기로 마음 먹게 되고, 살인에 대한 욕망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형사 아오이는 3년 전에 조기 위암 판정을 받고 수술해 회복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위 상태가 좋지 않았고, 병원에서 암이 재발했고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된다. 일 때문에 위독한 아내를 돌보지도 못했고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주지도 못했던 그였다. 그 이후로 자녀들과의 관계도 틀어져 버린 중년의 형사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시간을 살인범의 체포에 바치겠다고 다짐한다. 이제 곧 두 자녀들은 부모 없이 세상에 홀로 남겨질 테고, 이런 경우 남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울 텐데 말이다. 그렇게 비슷한 시기에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된 두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 남자는 남은 시간 동안 연쇄 살인을 시작하고, 나머지 한 남자는 자신의 남은 목숨을 걸고 범인을 체포하려고 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동일한 운명 속에서 상반된 선택을 향해 달려가는 두 남자의 최후의 대결은 놀라운 흡입력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재미있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오랜 바람을 이룬 자신과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 범인을 잡으려고 하는 형사라. 이토록 재미있는 만남이 또 있을까. 사카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이 눈으로 범인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싶어. 언젠가 사형대에 매달릴 그 녀석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 그 형사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자신이 사형대에 매달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쯤 자신은 이미 죽어 버렸을 테니까.    p.261

사회파 추리의 강자 야쿠마루 가쿠는 매번 묵직한 미스터리를 그려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용서와 복수라는 다소 어둡고 무거운 주제가 이렇게 술술 읽혀도 되나 싶을 만큼 쉽게 읽히고,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이 그의 작품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었다. 또한 사회성 짙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장황한 설교를 늘어 놓아 지루하게 만들지 않고, 미스터리와 추리적 요소와 스릴러적인 템포로 이야기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점도 야쿠마루 가쿠만의 장점이다. 한마디로 '한번 읽기 시작하면 절대로 쉽게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번 작품 역시 가독성은 나무랄 데 없이 뛰어났다. 다만, 다소 작위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개연성이 떨어지는 전개들이 눈에 띄어 아쉬웠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애초에 연쇄 살인을 시작한 남자와 그를 체포하려는 형사를 같은 병원에 다니는, 말기 위암 시한부 환자로 설정한 것부터 지나치게 작위적인 설정이었음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 결정적으로 남자 친구의 비밀스러운 삶을 알아낸 여자가 그를 신고하려는 찰나에 갑자기 교통 사고를 당해 죽어 버린다는 설정 또한 너무 뜬금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오이가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낼 때마다 그저 '형사의 감'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표현되고 있어 그 맥락없음에 의아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지만 말이다. 이렇게 아쉬운 부분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쉽게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독성이 뛰어나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적인 한 방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죽음을 앞둔 범인에게 형사처벌 보다 더한 대가를 치르게 한 것이니 말이다. 야쿠마루 가쿠는 '범인을 잡는 과정보다 잡은 후 형사처벌 이외의 요소로 어떻게 대가를 치르게 할지에 중점을 두었다'고 말했는데, 그래서인지 마지막 결말 부분은 짧게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매우 임팩트있는 여운을 남겨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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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마스터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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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당신은 내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놨어. 당신 때문에 내 삶은 끔찍한 지옥이 돼 버렸어. 당신 때문에 난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불행 속에서 지내야 했어. 내 열정을 포기해야 했고,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야 했어. 당신은 그게 어땠는지 상상도 못 할 거야. 그러다 결국, 난 죽음을 맞이하게 됐어. 당신이 날 죽인 거야.    p.56~57

유명 여배우 모르간 아고스티니는 어느 날 생면부지 남자의 상속인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고인의 가족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변호사는 유언장을 낭독하고, 고인은 여동생에게 아파트 한 채와 오래된 자동차 한대, 형에게는 카메라와 컴퓨터 장비, 어머니에게는 물질적인 값어치가 거의 없어보이는 장비들을 남겼다. 그리고 모르간에게는 아르데슈에 있는 주택 한 채를 남겼다. 보잘 것 없는 유산을 받은 고인의 형은 분노가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고, 그녀는 당황스러웠지만 아들이 남긴 마지막 유언을 존중해야 한다는 고인의 어머니의 말에 결국 그 집을 받기로 한다.

고인이 남긴 편지에는 당신의 영화 인생을 쭉 지켜봐 왔으며, 당신이 내게 준 감동에 대한 대가로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아르데슈의 집에 당신을 위한 깜짝 선물을 준비해뒀으니 직접 가서 보라고 되어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숲으로 둘러싸인 낡은 빈집으로 향하고, 고인이 그녀를 위해 준비한 복도 맨 끝에 있는 방에 가게 된다. 어두컴컴한 집 안에 있는 방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대체 뭘까. 모르간은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이고, 그녀는 그 집으로 향하면서 이유 없이 불안해했다. 과연 고인이 된 남자는 단순히 여배우의 팬이라서 그녀에게 유언을 남긴 것일까. 그가 남겨준 마지막 선물은 무엇일까. 짧은 이야기였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임팩트 있는 한 방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모두의 눈에 내가 보이기 시작한 것 같더라고. 그때부터 난 인간인 '누군가'가 될 수는 없었지만 괴물 같은 '무언가'가 될 수 있었어.

내가 바로 공포라는 존재란다.   p.148

이 책은 국내에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카린 지에벨의 단편 소설집으로, <죽음 뒤에> <사랑스러운 공포> 단 두 편이 수록되어 있다. 국내에 출간된 카린 지에벨의 작품들을 대부분 읽어 보았기 때문에 단편은 어떨지 너무 궁금했다. 소설집이라 여러 편이 수록되어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단 두 편의 짧은 이야기만으로 그녀의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한 편당 100쪽 남짓한 분량으로 딱 필요한 이야기만 군더더기 없이 쓰여 있는 데다, 단편만이 줄 수 있는 결말의 여운까지 인상적인 이야기였다.

카린 지에벨 하면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심리적 요소들을 끄집어 내어 복잡다단한 심리변화를 포착해내는 작가로 유명한데, 그래서인지 기존 장편 소설들은 분량이 꽤나 두꺼운 편이었다. 아무래도 '심리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 상 각각의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하다 보니, 빠른 전개보다는 풍부한 내면의 목소리를 통한 갈등을 부각시키는 부분들이 많았고, 그래서 다소 루즈하고 지루한 면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욕망, 불안, 집착, 죄의식, 피해의식, 열등감 등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심리적 요소들을 끄집어내어 실력만큼은 탁월한 작가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말이다. 이번에 그녀의 작품을 단편으로 만나 보니, 기존 작품들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를 만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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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나답게 - 인생은 느슨하게 매일은 성실하게, 개정판
한수희 지음 / 인디고(글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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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기로에 서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사실은 언제나 그랬다. 인생은 결국 선택의 문제고, 어느 쪽을 선택하건 선택하지 않은 쪽을 책임지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는데 그게 맞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인생이 선택의 문제라면 인생은 이를테면 자장면과 짬뽕처럼 중국집의 메뉴 같은 것이 되어 버리는데, 살아 보면 알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인생은 그냥 닥치는 건지도 모른다. 닥치고, 수습하는 일의 반복이다.   p.99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나가려고 하는 한 사람의 솔직하고 유쾌한 이야기가 <온전히 나답게>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온지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이대로 살아도 좋을지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자신감을 심어 준 이 책이 개정판으로 재출간되었다. 다시 한 번 세심하게 책 속의 문장을 매만지고,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변화한 작가의 생활과 생각을 새롭게 담았다고 한다. 우선 쳅터의 구성과 차례의 변화를 주었고, '그 후의 이야기'라는 새로운 글이 추가되었다.

나답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나다운 것은 무엇이고, 나답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저자 역시 말한다. 3년 전에도 그랬지만 자신은 여전히 나답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고. 지금의 나, 있는 그대로의 나로는 부족하다는 뜻인지, 사람은 누구나 어딘가에 있는 나다운 나, 진짜 나를 찾아내야만 하는 것인지 말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 역시 온전히 나다운 상태라는 건 어떤 것일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가끔은 내가 마음에 들고 가끔은 내가 싫고, 가끔은 이대로는 안 될 것 같고, 가끔은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드는, 아마도 누구나 다 그럴 테지만 말이다.

살다 보면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누가 아주 작은 돌만 하나 던져도 우리 삶을 떠받친 토대는 삐걱거릴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약하게 만들어진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인생의 결과 같은 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관심을 쏟을 만한 일도 아니다. 그런데 신경을 쓰고 살면 너무 피곤해진다. 그러므로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것만이 최선이다.     p.265~266

이 책은 저자의 시시콜콜하고 사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오롯한 '생활'과 일상의 풍경들이 모여 누군가의 인생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소소한 일들이 쌓이고,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어 삶이라는 거대한 풍경을 구성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매일 겪게 되는 인생의 하찮은 것들을 자주 놓치고 산다. 그 하찮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인생이 즐거워질 수도 비참해질 수도 있는 것인데 말이다. 저자는 가끔 좀 비싼 빵집에 가서 갓 구운 단팥빵을 산다고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단팥빵을 야금야금 다 먹어 치운다. 그녀는 갓 구운 단팥빵 안에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말한다. 열량, 따뜻함, 부드러움, 달콤함, 기쁨, 배려, 다정함, 담백함... 나는 그녀가 산 종이 봉투 안의 단팥빵을 상상해 본다. 어쩐지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듯한 기분이다. 나 역시 갓 구운 빵을 너무 좋아하는데, 그 별 거 아닌 빵 하나가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고, 배려가 되고, 사랑이 되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 세상에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알아주든 말든, 룰루랄라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종종 그런 생각만으로 기분이 좋아진다고 썼다.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꽤 살 만한 곳인 것만 같다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세상의 한구석에서, 남들이 뭐라고 하든 즐겁게,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나다운 삶이라는 것이 어쩌면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고. 느긋한 마음으로 매일매일을 성실하게, 일상의 하찮은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산책하듯 가볍고 즐겁게 살아가고 싶어졌다. 저자가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태도, 그리고 담담하지만 통찰력 있는 문장들이 인상적인 책이었다. 그녀는 어깨에 힘을 빼고 최대한 가볍게 쓰려고 노력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내일을 위해 사느라 오늘을 잊어버렸다면, '내일'을 위해 사는 대신 '오늘'을 살아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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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요, 라흐마니노프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2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정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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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음악이 마법을 보여 줄 때가 있다. 그 마법은 최고의 연주자와 최고의 곡목, 최고의 상황이 우연히 맞아떨어지는 기적적인 순간에만 일어난다. 그 흔치 않은 기적이 지금 일어났다. 기적을 보여 준 연주자에게 청중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이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하쓰네를 신경 쓰면서도 하염없이 박수를 쳤다.  p.18

시가 2억 엔인 첼로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완전한 밀실에서 홀연히 사라진다. 세계적인 라흐마니노프 연주자인 쓰게 학장의 손녀인 쓰게 하쓰네는 며칠 전부터 매일 스트라디바리의 첼로로 연습 중이었다. 어제도 저녁 6시까지 연주를 하고 첼로를 케이스에 넣은 채 보관실에 들어가 지정된 보관대에 되돌려 놓았다. 경비도 틀림없이 확인한 사항이었고, 입퇴실을 기록하는 카드판독기와 CCTV로 확인해도 어제 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보관실에 입실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출입구도 문 하나였고, 창문도 없었고, 은행 금고나 마찬가지인 보관실에 접근한 사람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어린아이 크기만 한 악기가 사라진 걸까. 아무도 침입할 수 없고 탈출할 수도 없는 실내에서 말이다. 사건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어진다. 피아노를 못 쓰게 만들고, 학장을 해치겠다는 경고장이 날아들고... 오케스트라 멤버들은 서로를 의심하느라 연습에 집중하지 못하는데.. 과연 이들은 정기 연주회를 무사히 치를 수 있을까.

주인공 아키라는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지만,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이 유복해서 넉넉히 지원을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고민이 많다. 학비를 마련하느라 아르바이트 덕분에 정작 연습에 소홀해지는 주객전도가 된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느라 콩쿠르는 꿈도 못 꿨는데, 이번 정기 연주회 무대에 오르게 된다면 밀린 학비 문제도 해결되고, 졸업 후 오케스트라에 입단할 가능성도 생길 수 있는 기회였다. 이야기는 아키라가 가을 정기 연주회에서 콘서트마스터를 맡게 되는 과정으로 시작해, 불길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는 상황에서 오케스트라 멤버들을 이끌게 되는 성장 드라마로도 읽을 수 있다. 경기 침체와 구직난, 그리고 꿈을 방해하는 얄팍한 주머니 사정 등은 우리의 현실 속 평범한 대학생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일련의 사건들에 숨겨진 트릭을 찾아내 범인을 밝혀내고 반전을 넘어 진실에 도달하는 미스터리로서의 이야기도 여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는 취사선택의 연속이거든. 몇 시에 일어날지. 뭘 먹을지. 뭘 하며 지낼지. 그리고 뭘 목표로 할지. 수많은 선택이 쌓여서 지금에 이른 거야. 사람들은 대부분 서툴러서 뭔가를 선택하면 그 외의 것을 버려야 해. 버린 것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선택한 것을 소중히 해야만 하지."    p.214

<안녕, 드뷔시>의 뒤를 잇는 나카야마 시치리의 음악 미스터리인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그 두 번째 작품이다. 꿈과 현실 속에서 고민하는 음대생들의 리얼한 이야기 속에서 미스터리한 사건과 그것을 밝히기 위해 전작에 이어 놀라운 기지를 발휘하는 피아니스트 탐정 미사키 요스케의 활약이 이어진다. 무엇보다 이 시리즈만의 장점은 굉장히 치밀하고 유려한 음악적인 묘사에 있다. 실제로 음악이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아름답고 놀랍게 표현된 단어들은 새삼스럽게 나카야마 시치리라는 작가에게 감탄하게 만든다. 송곳 같은 첫 음이 하늘을 가르고, 애수와 비애가 응축되어 있는 소절이 이어지며, 마치 망치로 두드리듯 강하고 또렷한 음이 연주되고, 활이 뱀처럼 구불거리며 오르내린다. 완만한 음울함이 가슴속 깊이 숨어들었다가,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긴박감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등등.. 음악에 관한 묘사들은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든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플롯과 반전, 캐릭터 모두 좋아하지만, 음악을 글로 들려주는 경지는 단연코 최고가 아닐까 싶다.

음악 미스터리인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는 <언제까지나 쇼팽>, <어디선가 베토벤>, 그리고 <다시 한번 베토벤>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나카야마 시치리는 48세에 늦깎이로 등단해서, 그 후 7년간 작품을 28편이나 써내는 왕성한 집필 속도를 자랑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 모든 작품들을 신속히 국내에 소개해주고 있는 출판사가 있어서, 독자 입장에서 매우 반갑게 기다리고 있다. 곧 출간될 나카야마 시치리의 신작은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 네 번째 작품 <악덕의 윤무곡> 과 시즈카 할머니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시즈카 할머니와 휠체어 탐정>이라고 하니 기대가 된다. 참 이렇게 다양한 시리즈의 작품을 한 꺼번에 가지고 있는 작가도 드문데, 나카야마 시치리는 각기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모두 완성도가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점인 것 같다. 그의 놀라운 집필 속도를 응원하며, 다음 작품도 빨리 만나보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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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스
워푸 지음, 유카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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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는 명확하게총격 현장을 언급했다. ‘이 자식이 정말 아직 출간도 되지 않은 『나무 두드리기』를 읽기라도 했단 말이야? 아니면 그냥 우연히 때려 맞춘 건가?’

그는 재빨리 자신의 메모와 소설 내용을 다시 읽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 추리가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아귀가 정말로 책을 읽어봤다 한들, 이 부분 어디에 문제가 있단 말인가?    p.28

문단에서 꽤 이름을 떨치는 작가인 그는 대작 발표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순문학계의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그가 이번 신작은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추리소설을 발표할 예정이었기에, 모든 독자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소설 출간 전에 이미 각종 프로모션 이벤트가 잡혀 있었고, 예약 판매 일정과 언론 인터뷰도 일찌감치 이야기가 끝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익명의 독자로부터 온 메일 한 통 때문에 그는 도무지 웃음이 나지 않았다. 아직 출간도 되지 않은 작품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며 대놓고 지적하는가 하면, 이 소설은 좋은 작품 축에 끼지도 못한다고 혹평하는 메일이었던 것이다. 아귀라는 서명을 쓰는 그 독자는 대체 원고를 어떻게 읽어본 것이며, 대체 무슨 목적으로 작품 속 추리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지적을 하는 것일까. 분노한 작가는 메일로 독자와 설전을 벌이게 되는데, 어이없게도 아귀가 지적한 부분들이 모두 실제로 수정을 요하는 문제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출간 일정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작가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아귀의 정체는 누구인가.

일곱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각각의 이야기에서 한 명의 작가와 그가 쓴 하나의 추리소설, 그리고 아귀라는 네티즌이 등장한다. 모든 단편이작가와 네티즌이 미발표 추리소설을 놓고 소설 속의 누가 진범인지 토론을 벌인다라는 불가사의한 구조를 띠고 있는데, 매우 흥미진진하다. 작가와 네티즌이 작품 속 설정과 추리 과정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과정도 재미있고, 작가가 쓴 추리소설이 마치 액자소설처럼 교차로 보여지고 있어 재미를 두 배로 안겨준다.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문제가 돌고 돌아온 거다. 타이 행성 탐정은 나 행성 경찰이 제공한 단서가 정확하다고 어떻게 확신할 것인가? 그녀가 머릿속으로 그린 이 두 정권의 최고 형벌은 사형이었다. 비록 이야기에 써넣을 필요는 없겠지만, 다섯 명을 죽인 타이 행성 사람 셋은 분명 사형당하리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만일 이 세 사람이 진범이 아니라면, 함부로 세 사람의 목숨을 빼앗게 되는 것 아닌가? 그녀는 돌연 소설을 쓰는 데서 오는 중압감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p.197~198

사실 이 작품은 '작가와 네티즌이 아직 출간되지도 않은 추리소설을 놓고 소설 속의 누가 진범인지 토론을 벌인다'는 설정도 흥미롭지만, 일곱 편의 이야기가 지난 30년간 타이완에서 일어난 유명 범죄 사건 7건을 모티브로 삼아 재구성한 소설이라는 점이 정말 의미가 있다. 게다가 그 실제 사건에서 범인으로 체포됐던 이들이 모두 무고하게 누명을 쓴 것임을 탄탄한 추리의 과정을 보여주며 밝혀내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인 워푸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건이 마치 엉터리로 쓴 추리소설 같다'고 말한다. 게다가 현실 속 억울한 누명 사건 속의 '범인'은 결코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 너무도 끔찍하다고 말이다. 누군가 자신이 받아서는 안 될 어떤 형벌을 마주하게 되면, 그의 실제 삶인 파괴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그는 실제 그렇게 억울한 누명 사건들을 접하고는 자신이 '소설 형식으로 사건의 의문점에 대해 감식 증거 분실이나 추리 부분의 문제 같은 것을 묘사하는 것'으로 그들을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책이 그 결과물이다.

저자는 이 책을 '가볍고 흥미로운 단편소설집이고, 소설의 형식으로 창작 기법을 설명하는 소설집이며, 한 권의 추리소설'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작가들은 아귀와 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마치 창작 강의안 같다', '문예 창작 수업의 강의안처럼 보인다'라고 생각한다. 아귀는 이야기의 구성 요소인 전제, 주제, 인물, 플롯과 설정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의 잘못된 추리로 인해 누군가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할 수도 있다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인픽스FIX’라는 단어에는 이처럼 잘못 쓰인 작품을고치고’ ‘바로잡고’ ‘보완하며동시에 이 이야기들을마음 깊이 기억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니,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마지막 작가 후기에 이르면 실제로 벌어진 사건에 대한 무게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설 창작의 세계와 타이완의 30년 사회 현실, 그리고 원죄 사건과 그것을 풀어내는 특별한 추리소설을 통해서 새삼 이야기가 가진 의의와 대체 불가능한 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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