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맨 모중석 스릴러 클럽 45
로버트 포비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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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는 실재하는 '초능력'을 수량화한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여지껏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그러니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뻔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다. 이미 여러 차례 과학적 실험을 통해 초능력은 극단적인 관찰 기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것이 밝혀졌다. 또한 이 기술이 바로 제이크가 잘 쓰는 방법이다. 그는 죽은 사람과 대화하거나 영적인 세계와 소통하지 않는다. 단지 관찰할 뿐이다. 가만히 지켜보면서 계산하고 수수께끼를 푼다. 초능력자인 척 행세하는 사기꾼들은 이런 걸 '콜드 리딩'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현실적인 행위였다.   p.137

FBI 특별 수사관 제이크 콜은 삼십 삼 년 만에 고향에 있는 아버지의 집을 찾아 간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유명한 화가인 아버지와는 전혀 왕래 없이 지내다가, 아버지가 화재를 내고 병원에 입원했고 알츠하이머 증세를 보인다는 연락을 받게 된 것이다. 철저한 은둔자이자 완벽주의자였던 아버지가, 이제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노인이 된 상태에서 그 뒷수습을 하게 된 것이 제이크는 편하지가 않다. 뉴욕주의 외딴섬인 그곳 몬탁에는 곧 허리케인이 올라오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고, 아버지의 집은 디킨스의 소설에서 막 튀어나온 무대처럼 시간이 멈춰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집을 둘러보고 있는 제이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현지의 보안관으로부터 살인 사건이 벌어졌으니 최대한 빨리 와달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그 사람들, 어떻게 죽었습니까?"

"살가죽이 벗겨진 채로요."

 

그 말을 듣자마자 제이크의 머리가 얼어붙으면서, 잊고 있었던 오래 전의 그 빌어먹을 공포가 다시 되살아 나는 것을 느낀다. 제이크의 어머니는 그가 열두 살 때 살해당했다. 당시 그녀는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져 죽임을 당했고, 범인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 놈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사건 현장을 찾은 제이크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분노를 느낀다. 모든 것이 삼십여 년 전과 너무도 비슷했다. 제이크는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으로 놈의 흔적을 뒤쫓기 시작한다. 제이크는 머릿속으로 기상천외한 작업을 할 수 있었는데, 바로 사람들이 죽기 전 마지막 순간을 그리는 능력이었다. 그 괴상하고 섬뜩한 재능은 괴물들을 사냥하는 데 빛을 발했고, 그는 그 능력으로 피해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간 광기의 현장에 홀로 남아 범인이 남긴 미세한 특징을 잡아내고, 그들의 시그니처를 해독했다.

 

아드레날린이 한꺼번에 솟구쳐 가슴을 옥죄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가슴의 감각이 점차 차가워졌다. 액자가 손가락에서 빠져나가 카펫에 탁 하고 떨어졌다.

'우연 같은 건 없어.'

스펜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리고 모든 것이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빠져나가 싸늘해졌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에 대자로 누워 있는 여자는 제이크가 잘 아는 여자였다.   p.227~228

현장을 한 번 둘러보면 머릿속에 디지털 녹화 장치가 든 것처럼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전부 기억해내는 남자, 사진처럼 완벽하게 현장을 떠올려 머릿속으로 외과수술을 하듯 피살자의 비밀을 닳고 반질반질해지도록 돌이켜보는 일을 하는 남자. 그는 과연 오래 전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바로 그놈을 잡을 수 있을까. 그가 놈을 뒤쫒을 수록 제이크의 주변 사람들이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진 채로 살해당하고, 아버지가 집안 곳곳에 남겨 둔 그림 조각들이 단서들로 연결되려는 순간, 제이크의 아내와 어린 아들이 사라진다. 제이크는 과연 사랑하는 가족을 무시무시한 살인마로부터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 두툼한 페이지가 무색하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만드는 마력으로, 이야기가 폭발한다.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긴장감과 등골이 서늘하게 만드는 오싹함으로 달려가던 이야기는, 후반부의 반전에 이르게 되면 그야말로 악마적인 한 방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정말 소름끼치도록 무섭고, 으스스하고, 충격적인 작품이다.

로버트 포비는 '다음 세대의 스티븐 킹'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이 작품으로 데뷔했다. 그는 존 더글러스의 논픽션 <마인드헌터>를 비롯해 실제 범죄 사례와 영상 자료, 인터뷰 기사 등 폭넓은 자료를 섭렵해 주인공 제이크 콜의 캐릭터를 구상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살가죽을 벗겨서 죽인다는 끔찍한 설정과 잔혹한 묘사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그보다는 독특한 캐릭터의 특별한 수사 방식에 더 눈길이 가는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사실 추리, 스릴러 장르의 책들을 많이 보는 편이지만, 유혈이 낭자한 잔인한 묘사가 많은 작품은 개인적으로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작품도 워낙 잔혹한 걸로 소문난 소설이라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어야 했는데, 포인트가 끔찍함 자체를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 보니 그 외의 부분들이 더 인상적인 작품이었던 것 같다. 서사 자체가 탄탄하고, 후반부의 반전은 그야말로 전체 이야기를 쥐고 흔들어버릴 정도로 강력하고, 사건 현장과 범행 수법, 수사 과정 등이 매우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어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긴장감이 놀라운 스릴을 안겨주는 작품이었다.

 

그놈이 돌아왔어. 이봐 친구, 넌 이제 끝장이야.

 

세상에 우연 같은 건 없다. 수많은 복선들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이 겹겹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하나의 퍼즐로 완성이 되어야 이 모든 비극의 이유가 밝혀진다. '괴물 같은 작가의 악랄한 데뷔작'이라는 평가가 저절로 수긍이 될 만큼, 역대 가장 충격적인 반전을 만날 수 잇었던 작품이었다. , 이제 당신 차례이다. 괴물 같은 작가의 놀라운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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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지만, 오늘은 내 인생이 먼저예요
이진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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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너무 평범할지도 몰라요.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하루를 살아요.

가끔은 이 평범함에 대해서도 잘 살고 있는 거라고 누가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내 인생. 최선을 다했다고는 못 해도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이런 나를 세상은 이해해줄까요? 별이 되지 않으면 어때요. 반짝이지 않으면 어때요.   p.51

한 동안 '열심히 살아라!'고 외치는 책들이 인기였는데, 요즘은 세상 신경 쓰지 말도 '나대로 쿨하게 살라'고들 한다. 그런데, 쿨하지도 않고, 신경도 많이 쓰고 예민하기만 하다면.. 남들이 말하는 편하고 자존감 높은 인생처럼 살자니 내 불안한 성격들에 구멍들만 더 크게 보일 것 같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어떻게 살라고 나로 태어난 걸까?'를 매일 고민하는 이진이 작가의 이번 책에서는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게 덜 피곤하지 않을까, 라고 이야기한다. 그냥 나답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말이다. 그녀는 가끔 너무 예민해서 스스로가 힘들고, 너무 배려하려다가 피곤해지기도 하고, 인간관계도 좁은데다, 한 번에 두 가지를 못하는 성격이지만, 그럼에도 이런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고 말한다.

살다 보면 주위에서, 참 이래라 해, 저래야 해, 잘해야 해. 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될 것이다. 그게 때로는 참견일 수도 있고, 때로는 정말 걱정해서 일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지키면서 행복하게 사는 법이 아닐까 싶다. 집착과 예민함, 불안함, 부족함 등등을 이겨내고 고친다면 물론 좋겠지만, 그러다 한평생 노력만 하다 인생이 끝나 버릴 것 같다면.. 그렇다면 전쟁처럼 살아가는 대신에 그냥 조금 더 손해보고, 남들보다 성처 받고, 조금 더 힘들게 살면 어떠냐는 거다. 다 그렇게 산다는 말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기를 바라는 저자의 글들 속에는 사소한 실수나 서투름도 보이지만, 소소하고 평범한 행복들도 많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특별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하루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서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좋은 것들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는 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앞에 두고 걱정만 열심히 하고는 자신 있게 말한다고 한다.

"난 최선을 다 했어. 뭘 더 어쩌라는 거야?"

잘 생각해보자.

당신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고민만 했을 뿐이다.

고민은 노력이 아니다.    p.288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런데 가끔,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해 보이는 삶 말고 내가 행복해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 때가 있다. ‘B형에 다혈질 성격을 가졌으나 A형의 소심함도 넘쳐나는 다소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저자의 글은 어릴 적 화상을 입은 경험, 가난한 집안환경, 성격에서 비롯된 어렵기만 한 인간관계 등등... 많은 이들이 공감할 만한 에피소드들이 많았다. 어린 시절의 환경이 성인이 되어서도 성격과 인간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나도 주변에서 그런 경우를 많이 봐왔고 말이다. 싫으면 싫다고 표현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짜증이 나면 짜증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저자는 어른이 된 지금에야 그걸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러니 우리 역시 한 번씩 돌아보며 살아야 한다. 진짜 괜찮은 것인지, 아니면 괜찮은 척하며 살고 있는 것인지 말이다.

언니랑 통화를 하다가 무슨 일 때문인지 너무 힘이 없어 보여서 "힘 좀 내..."라고 말했더니 언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너 하나 기분 좋으라고 힘을 내야겠냐?" 이 솔직한 대답에서 속이 시원했던 사람이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살아보니 "힘내"라는 말을 듣는다고 힘이 나진 않는 게 사실인데, 사람들은 평소에 별 생각 없이 힘내라는 말을 참 자주, 아무렇게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언니처럼 저렇게, 내키는 대로 막 던지면서 살고 싶다고 말하는 저자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소심한 작가의 대범한 고백이 유쾌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공감도 되고, 이해도 되는, 그리하여 누군가에게는 작은 용기도 되고, 누군가에게는 애틋한 위로도 되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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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7
정용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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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죽여본 적 있습니까?

불현듯 떠오른 장면. 서서히 꺼져가는 강아지의 까만 눈동자와, 아스팔트와 흙에 스며드는 검붉은 피. 죽인 것과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둔 것은 질적으로 얼마나 차이가 나는 걸까? 윤은 잠시 생각했다. 윤은 잠자코 그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그는 푸석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p.116

정부의 고위급 인사들과 현직 국회의원들 열두 명이 죽었다. 그날은 전당대회가 있었고 식사를 마친 의원들은 온천에 갔다. 경찰이 도착했을 땐 타일 바닥 곳곳에 피가 실개천처럼 흐르고 있었고, 붉게 변한 탕 속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고 있는 고요한 표정의 남자, 그는 저항하지 않고 체포되었다. 수사관들은 의도와 배후 세력을 물었고, 의사들은 그의 정신 상태를 감정하려고 했지만, 그의 답은 간결했다.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개인적인 원한이나 정치적 의도는 없다고. 게다가 그의 지문은 등록되어 있지 않았고 주민번호도 없었으니, 당연히 그는 존재하지 않는 자였다. 그는 사이코가 아니었고,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지도 않았다. 수사는 난항이었고, 방송에서는 연일 미스터리한 그의 존재에 대해 방영했고, 사건을 다각도로 분석해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그는 항소하지 않았으며 대법원까지 가지 않고 1심에서 판결을 받아들였다. 형은 확정되었고 교도소로 이송되어 사형수를 지칭하는 붉은색 명찰을 붙였고, 474번을 부여 받았다.

그렇게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수감번호 474번과 그의 담당 교도관 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474번이라는 캐릭터는 범행 동기는 전혀 알 수 없고, 죄를 받아들이고 모두 인정하지만, 뉘우치고 반성하는 태도는 아닌, 지나치게 여유롭고, 너무도 깔끔한, 기묘한 인물이었다. 교도관들은 그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찜찜하고, 불안했고, 언론에서도 그와 관련되어 색다른 사실 하나라도 잡아 보려고 주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윤은 474번의 담당 교도관으로서 그를 매일 만났다. 가까이에서 느낀 건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성실하고 착실한 수형자라는 거였다. 그럼에도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속이 전혀 보이지 않는 그에게서 뭐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그의 작은 행동과 표정 속에서 작은 기미라도 찾으려 애를 썼지만, 겉으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고 있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많습니다. 그는 죽이고 싶은 사람이 없지만 사람을 죽입니다. 어떤 이는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지만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못합니다. 그는 그런 이들을 대신해 손이 되고 칼이 되었습니다. 원하지 않고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했지요. 그는 지금도 스스로를 죄인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법은 일어난 일의 결과로 죄를 판단합니다만 사실 인간은 결과로 죄를 짓는 게 아닙니다. 의도가 죄죠.   p.127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일곱 번째 책이다. 정용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악은 타고나는 것이며악에는 이유가 없다고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절대 악과 절대선은 무엇이며 과연 그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극중 474번은 사수의 운명을 갖고 태어나 어려서부터 사냥을 잘했다고 한다. 그는 살면서 많은 것들을 죽였는데, 생명을 빼앗는 일을 좋아하거나 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누구보다 그걸 잘했기 때문에 일로서 하게 되었다는 거다. 그는 뛰어난 사냥꾼이었기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고, 맡은 일을 실패한 적도 없었다. 문제는 그에게 죄의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사람을 죽였는데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 남자는 괴물인 걸까? 애초에 사람을 죽이는 데 이유 같은 게 없다면, 의도도, 목적도, 욕망이나 쾌감도 아니었다면.. 그리하여 그것이 그저 본성이었다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일까.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무통각증 환자이자 죄책감이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청부살인업자, 그리고 주민등록번호도 없이 존재 없는 비존재인 유령으로 살았던 그를 접견하겠다고 찾아온 한 여자. 자신을 고아라고 말했던 그의 실재하는 가족인 누나가 나타나면서 그에게 존재성이 부여된다. 그리고 474, 신해준은 자신의 사형을 집행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도관들과 수형자들을 죽이겠다고. 사형의 딜레마는 혹시 있을 오판과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길 원하는 인간의 인권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니 형 집행을 미룰 근거가 없다. 문제는 그를 사형시킨다면 사형 폐지 국가라는 잠재적 위상을 무너뜨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므로 다른 사형수들에게도 당연히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살인을 저지른 죄인의 요구를 들어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모두가 합심하여, 마치 공범처럼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괴물처럼 등장했던 474번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고, 그의 존재성이 구체화되면서 악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낯설고 혐오스럽지만, 어떤 부분에선 익숙하고 이해할 만한 지점의 끝에 ''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악에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악에는 너무도 많은 이유가 있다'라는 생각도 든다. 악과 악인,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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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호기심 공룡 대백과 생생 과학 1
히라야마 렌 감수 / 글송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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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은 아득한 옛날인 '중생대'에 살았어요. 2 4800만 년 전부터 약 6500만 년 전까지 이어진 중생대는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로 나눌 수 있어요. 공룡들은 이 시대에 맞춰 여러 가지 모습으로 진화했지요.   p.10

오래 전에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이라는 소설을 너무 재미있게 읽고는 한동안 공룡에 푹 빠져 있던 시기가 있었다. 이 책은 영화화 되어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았는데, 덕분에 공룡에 관련된 여러 책이나 캐릭터 상품들도 인기였었고 말이다. 특히나 원작 소설은 유전자공학 등 전문적인 과학지식들로 공룡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를 설득력 있게 느껴지도록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에야 공룡 정보를 담은 DNA가 그렇게 오랜 시간 보존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야기의 시작부터 완전한 '허구'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지만 말이다.

<쥬라기 공원> 이후로는 사실 공룡이라는 것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는데, 아이가 생기면서부터 자연스레 다시 공룡과 함께 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섯 살 아이가 그 복잡하고도, 긴 이름들을 어떻게 다 외우는지 신기할 정도로... 시대별, 종류별 공룡 이름들을 다 꿰고 있는 탓에... 매번 감탄하면서 말이다. 사실 공룡이 살았던 시기가 꽤 길어서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 전기, 백악기 후기 등으로 시대를 나눠서 있었던 공룡의 종류가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공룡이라는 캐릭터를 소비하는 주 연령층이 아이들이다 보니, 시대가 전혀 다른 공룡들이 함께 등장하기도 하고, 재미를 위해서 공존하는 것처럼 연출되기도 한다.

이 책은 '공룡 대백과'라는 제목처럼 시대별로 대표하는 공룡 117종이 소개되어 있는 상세한 공룡 대백과 사전이다. 판형이 작고, 종이도 잘 찢어지지 않는 두툼한 두께라 아이들이 자주 읽기에도 딱 좋을 것 같다. 생생한 공룡 그림과 함께 각각의 특징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 공격, 빠르기, 지능, 방어, 체격의 항목으로 된 능력치라는 항목이 특히 흥미롭다. 마치 공룡들이 게임 캐릭터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공룡 피규어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의 특성 상 각 공룡의 성격을 한 눈에 파악하기 쉽기 때문이다.

 

영화 <쥬라기 공원> 시리즈를 본 적이 있나요? 이 영화에는 사라진 공룡들을 살리려는 욕심을 가진 사람들이 나와요. 그들은 되살린 공룡들로 테마파크를 만들려고도 하지요...영화에서는 공룡 시대에 피를 빨아먹었던 모기에게서 공룡 정보를 담은 DNA를 뽑아 공룡을 되살리려고 해요. 사실 DNA에 있는 정보는 약 500년이 지날 때마다 반이 망가지거든요. 이 때문에 영화와 같은 방법으로 공룡을 되살리기는 어렵답니다.   p.268

이 책에는 흥미로운 공룡에 관한 정보들도 많이 담겨 있다. 공룡과 파충류는 어떻게 다른지 파충류의 계통도도 소개되어 있고, 언제부터 공룡을 연구했는지, 공룡의 이름은 어떻게 지었는지에 대한 정보도 담겨 있다. 공룡 시대는 왜 끝이 난 건지, 만약 공룡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리고 오늘날 공룡이 되살아난다면 또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상상도 해볼 수 있어 재미있다.

 

시대별 공룡에 대한 소개가 끝나면, 후반부에는 공룡 화석이 발견된 지역별로 지도가 있다.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그리고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등 지역별로 발견된 공룡의 종류가 많이 달라서 매우 흥미진진했다. 아직 공룡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이 책에 나오는 어려운 단어들의 뜻을 풀이해주는 공룡 용어 사전도 있다. 각룡류, 골판, 양치식물, 후두류 등등.. 단어의 뜻이 소개되어 있다.

아이 덕분에 나도 공룡 이름 수십 개쯤은 거뜬히 외우고, 모습을 보면 누구인지 어느 시대에 살았던 공룡인지 대충 아는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이 책도 아이와 함께 읽기 전에 내가 먼저 보았는데, 아는 공룡들이 많아서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아주 도움이 되는, 꼭 필요한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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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헤어지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F 지음, 송아람 그림, 이홍이 옮김 / 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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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는 "어른이란, 배신당한 청년의 모습이다"란 말을 남겼지만, 어쩌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른이란, 목숨을 걸었던 첫사랑에 마음을 찢긴 소년 소녀라고. 길에 널린 행복한 커플들에게 배신당한 첫사랑의 복수를 대신해줄 악의로 똘똘 뭉친 운석과도 같은 악녀는 더없이 상쾌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배신당한 우리를 대표해 세상을 속이고 남자에게 맞선다. 버림받은 입장에선 기립 박수를 쳐주고 싶은 존재다.    p.71~72

출간 직후 아마존 재팬 에세이 분야 1위에 오르며 전국 서점에 품귀 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일본에서 화제가 된 책이다. 저자 F는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익명의 작가로, 10~20대 독자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팬덤이 형성되었다. 사랑, 연애, 섹스, 인간관계, 외로움 등의 주제를 독특한 시선과 문장으로 풀어낸 65편의 에세이와 송아람 작가의 일러스트 만화가 함께 실려 있는데, 짧은 에피소드 속에 날카로운 진심이 담겨 있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저자인 F '외롭다'라는 말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라고, 그런 말을 쉽게 뱉을 수 없어진, 모든 사람들의 밤에 이 책을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게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종종 내 마음 같지가 않아서 외롭고, 가족들과 함께 있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서운하고, 회사에서도 동료들과도, 학교에서 친구들과도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잠 못 들고 뒤척거리는 밤이 생기고, 세상에 나 혼자만 남겨진 것 같은 기분에 쓸쓸해지는 그런 날에,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어른스럽지 못한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우리에겐 위로가 필요하다. 비슷한 감정을 함께 풀어내고, 공감해 주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아마도 그래서 F는 이 책을 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깊은 밤에 딱 하나 바라는 게 있다. 꿈을 포기했을 때나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딱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한다. 의논을 하지도 않고, 상담을 받는 것도 아니고.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깎아 내리지도 않고. 그냥 조용히 둘 중 하나가 부서질 때까지 얘기만 하는, 들어주기만 하는 밤이, 앞으로 살면서 몇 번 찾아올까? 그날 밤만을 위해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p.156

이 책에는 사랑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들이 솔직하고 담백하게 담겨 있다. 사람은 이유를 좋아하는 생물이라, 무엇이 됐든 누가 됐든 이유를 원하게 마련이지만, 누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이유가 필요 없다. 그래서 좋아진 것이 아니라, 그저 문득 좋아진 것이니까.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잘 몰라도 된다. 그 어느 누구와도 서로 잘 모르는 채로, 입 다물고 그냥 사랑하고 싶다, 라고 말하는 저자의 글을 보며 나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어떠했나 돌아보게 되었다. 언제나 모든 일에 이유를 대고, 스스로에게 합리화를 시키곤 했던 나였기에, 왠지 모르게 뜨끔해져서 말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으니까 좋아진 것이 바로 사랑인데 말이다. 사랑과 연애뿐만 아니라 우정, 인간관계, 이별, 취업, 사회 생활 등에 대해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솔직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청춘은 어마어마하게 잘못된 선택의 연속이라고, 외로울 때는 실컷 외로워하고, 누군가를 만나서 투정을 부렸어야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추억이란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며, 그때 더 부끄러운 짓을 했었더라면 지금보다 덜 후회하고 살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고, 나를 돌아보게 만들기도 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했던 그런 책이었다. 이유 따위는 묻지 않고, 남들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무엇보다도 나의 감정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익명의 작가로 책을 출간해야 할 필요가 있었나 싶을 만큼 문장력도 탄탄하고, 감성적이지만 현실에 발을 단단히 딛고 서있는 글들이라 더 좋았던 것 같다. 거기다 그래픽 노블 <자꾸 생각나>로 청춘들의 삶과 연애를 적나라하게 담아내 공감을 불러일으킨 송아람 작가가 원고를 읽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하여 그린 에피소드들 또한 원래 이 책에 포함되었던 만화들이라고 느껴질 만큼 착착 달라붙어 있어 더욱 흥미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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