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병 속 지옥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6
유메노 큐사쿠 지음, 이현희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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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천지에 이런 기묘한 집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꿈속에서 일어난 일처럼 기묘한 일들로 가득하고 하나하나가 악몽보다 더 오싹하고, 두렵고, 기쁘고, 슬펐다... 저 화려한 화장실, 어쩐지 으스스한 병실, 가죽 채찍, '기괴한 북' - 어쩌면 이렇게도 수수께끼 같은 세계가 있을 수 있는가. 어쩌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집이 있단 말인가. 내 눈으로 분명히 보았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다 -.    p.48~49

악기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얼마큼 사로잡을 수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교토에 기괴한 북이 있었다. 보통 북을 치면 둥 둥 둥 하는 맑은소리가 나는데 비해, 이 북은 음산하고 여음이 없는 두... .. .. 하는 소리가 난다. 이 북소리 때문에 예닐곱 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북을 만드는 장인인 구노는 자신의 거래처 가운데 한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갸씨 역시 구노에게 호의적으로 대했으나, 그녀는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었고 당시 숨겨둔 자식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녀는 재상의 부인이 되었고, 구노는 아가씨가 시집갈 때 가지고 갈 혼수품으로 자신이 만든 북을 선물로 준다. 그리고 그 일가에게 불길한 일이 생기기 시작한다.

무섭고도 음산하지만 조용하면서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그 북은 '기괴한 북'이라 불리기 시작한다. 구노 자신은 아무런 뜻이 없었다고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원망과 저주가 북에 스며들었던 것이다. 하여 그 북을 치거나 북소리를 듣는 사람은 모두 죽거나 불행한 일을 겪게 되었다. 구노는 이를 알고 죽어가며 누구라도 좋으니 그 북을 되찾아 다시는 북을 치지 못하도록 찢어 버려달라고 유언을 남기지만, 그 누구도 북을 되찾아오려는 자가 없었다. 그 이야기는 전설처럼, 거짓말처럼 세상에 남겨졌고, 세대를 거치고 거쳐 백년 후 구노의 손자, 그의 아들에게로 내려 온다. 영겁으로도 사라지지 않은 원망의 울림, 인간의 힘으로는 지우기 힘든 슬픈 집념, 무간지옥의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죽어도 죽음으로 얻을 수 없는 영혼의 탄식이 담겨 있다는 그 북소리는 또 누구의 마음을 빼앗고, 목숨을 가져갈 것인가. 여름 밤에 읽기에 오싹하면서도 신비로운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유메노 규사쿠의 1926년 데뷔작인 <기괴한 북>이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요상한 것일까요? 이 숲에는 적도 아군도 없고..... 완벽한 허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왠지 안심과 동시에 평상시의 심약한 내 모습이 한꺼번에 되살아났습니다. 이런 기분 나쁜, 요괴라도 나올 것 같은 숲 속으로 왜 혼자 온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습니다. 군인답지 않은 성격으로 군인이 되어 초원 한가운데서부터 오랜 시간을 기어와 놓고는 홀로 상처 입고 쓰러져 있는 제 운명을 이제야 절절히 되돌아보고 공포심에 참을 수 없게 되자 지금 당장이라도 숲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p.184

1880년대 후반 일본에 처음 서양 추리소설이 유입되었을 당시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의 주요 추리소설을 엄선하여 연대순으로 기획한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그 여섯 번째 작품이다. 가능한 한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을 선정하여 번역하고자 했다는 취지에 맞게 이번 작품 역시 다소 낯선 작가이다. 유메노 규사쿠는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낮지만 일본의 대표적인 미스터리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1926년에 첫 작품을 낸 이후 1936년에 타계할 때까지 그의 작품 활동 기간은 불과 10여 년에 그쳤지만 이 기간에 그는 에세이를 비롯하여 단편, 중편, 장편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이 책에는 유메노 규사쿠의 작품 세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12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편지 글 형식과 자백하는 형식으로 서술되는 이야기가 많고, 추리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탐정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첫 번째 수록작인 <기괴한 북>도 그러하고 주로 이상한 일을 겪은 인물이 1인칭 화자로 등장해 본인이 겪은 사건이나 경험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천재, 정신병자, 소년, 소녀 등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범죄에 휘말리거나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그의 작품은 '탐정소설이라기보다 괴기 소설적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다'는 평처럼 추리소설이지만 미스터리보다는 인간 내면의 어둠을 탐구하는 괴기스러운 면이 부각되어 있다. 나름 추리, 미스터리 장르의 책들을 많이 읽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만나게 된 일본의 초창기 추리 소설들을 읽게 되니 굉장히 신선하고, 색다른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오래 전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치하다거나 고루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에서 벗어나면서도 그 틀 안에서 멋지게 비틀기를 해내고 있어 흥미로웠다. 일본 추리소설의 원류를 이해하고 시대별 흐름을 알 수 있다는 점도 이 시리즈만의 매력이지만, 그냥 작품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아 일본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적극 추천하고 싶은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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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모험 - 인간과 나무가 걸어온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정
맥스 애덤스 지음, 김희정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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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하기 그지없는 자작나무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단순명료하다. 영광의 순간을 누리기 위해서는 다소 힘이 들지라도 기초를 다져야 하며, 작고 사소한 인무를 잘해내는 게 큰 무대에서 주목받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자작나무는 우리가 활동하는 무대 세트를 설치하는 일꾼이다. 인류 역사라는 커다란 무대에 자작나무가 해낸 가장 비범하고 눈에 띄는 역할은 하워드 휴스의 악명 높은 '스프루스구스'일 것이다. 나무로 만든 이 비행기는 재료의 95퍼센트가 자작나무였다.   p.48~49

 

이 책의 서두를 읽는데, 어린 시절 읽었던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책이 떠올랐다. 누구나 다 기억하는 작품이겠지만, 다시 떠올려 보자면 나무가 사랑하는 소년에게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며 행복해하다, 더 이상 줄 게 없을 만큼 세월이 지난 뒤 자신의 나무 밑동을 내어 주며 쉴 수 있게 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인생의 참된 가치, 진정한 사랑과 베품의 의미를 보여주는 작품이었지만, 실제 역사를 돌이켜보더라도 나무는 인간과 늘 공존해왔고,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제공해왔다. 인류 문화사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무와 숲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낌없이 베풀었고 무지를 일깨워 왔다.

 

 

저자인 맥스 애덤스는 세계 곳곳의 유적지를 누비고 다닌 영국의 고고학자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더럼주에 위치한 16만 제곱미터 크기의 삼림지를 사들이고 숲 속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숲에서 나무들을 관찰하고 숯을 굽고 온갖 물건들을 뚝딱뚝딱 만들어내면서, 나무야말로 인간에게 물질적 풍요와 지혜를 선사한 원천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절감하게 된다. 이 책은 바로 그가 수년간 숲사람으로 살면서 보고 느끼고 겪은 것을 생생하게 담은 수기이자, 고고학자의 눈으로 밝혀낸 인간과 나무가 함께 쓴 발전과 진보의 기록이다.

 

 

나는 종이를 더 많이 소비하라고 권하고 싶다...숲은 유용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종이와 성냥을 만들기 위해 조성된 숲에는 베어지는 나무보다 더 많은 나무가 새로 심어진다. 나무가 가진 경제적 가치를 보지 못하고 나무의 경제학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감상적으로만 나무를 대하고 숲을 갈아엎어 특용 작물을 기르거나 초원으로 바꾸는 순간, 숲의 운명은 끝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보며 펄프가 된 나무를 위해 눈물 흘리지 말자. 책 한 권을 더 사는 것이 숲을 구하는 길이다.    p.344~345

 

봄이 되면 새로 태어난 벌레들이 첫 비행을 하고, 새들은 마치 내일 세상이 끝나기라도 할 듯 짝짓기를 하고 둥지를 튼다. 목질의 구근들이 힘을 모아 초록빛 싹을 틔우려고 애쓰고, 개암나무 가지에선 붉은색 꽃이 피기 시작한다. 여름이 되면 수액 냄새가 줄어들고 송진과 밀랍 향이 짙어진다. 푸르른 녹음과 울긋불긋한 꽃들을 배경으로 곤충들이 웅웅거리며 바삐 날아다니고, 과실은 날로 커간다. 가을이 되면 대자연이 가진 팔레트를 총동원해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땅에 가득한 낙엽들은 노랑부터, 갈색, 빨강, 보라, 빛 바랜 초록, 주황에 이르기까지 온갖 색체가 마구 뒤섞여 향연을 벌인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눈이 내리고 숲의 땅이 보이지 않게 되며, 사위가 조용해진다. 하얀 배경에 까맣게 나무들의 모양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시간이 지나 눈이 녹으면 숲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숲의 사계절을 묘사하는 대목이었다. 역사와 과학, 예술을 넘나들며 지식의 숲을 탐험하는 중간 중간, '숲의 사색'이라는 테마로 숲의 정경들이 펼쳐지는데 너무도 근사했다. 숲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볼 수 있었던,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숲이 내쉬는 숨소리, 숲에서 용솟음치는 생명력 등을 글로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각 장의 말미에 달린 '나무 이야기' 또한 너무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12종의 나무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아름다운 세밀화가 곁들여져 있고, 꽃말, 용도, 특징 등과 함께 각각 나무들의 생태학적인 특징을 비롯해 여러 문헌과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일화들이 매우 재미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나무는 기적에 가까운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다. 햇빛과 물, 이산화탄소만으로 산소와 영양분을 만들어내고, 이를 뿌리에서 잎사귀까지 자유자재로 이동시킨다. 가시를 돋우고 나무껍질을 벗겨내어 천적에 대항하기도 하고, 뿌리에 공생하는 균을 통해 동료 나무들에게 비상경보를 울리기도 한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마지막으로 조금은 독특한 저자만의 숲과 나무를 아끼고 사랑하는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톱에 잘려나간 나무토막을 보고 감상에 젖어 안타까워하기보다, 그 자원을 어떻게 쓸모 있게 활용할 수 있을지 궁리하는 것이다. 그는 종이 사용을 중지하고 숲을 보호하자는 사람들의 취지에 대해서, 반대로 종이를 더 많이 소비하라고 권한다. 나무의 쓸모가 사라지지 않아야, 사람들이 숲을 가꾸고 관리하려는 노력이 줄어들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책을 한 권 더 사고 종이를 소비하는 것이 숲을 구하는 길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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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 - 삶의 모든 마디에 자리했던 음식에 관하여
정동현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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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이 내리면 빨간 낙지볶음만 당기는 것이 아니라 눈을 닮은 맛이 나는 맑은 사케에 절로 입이 간다. 추운 겨울날, 따끈히 데운 잔에 튀긴 복어 지느러미를 넣어 나른히 비릿한 맛이 나는 히레사케는 물론이요, 작은 잔이 어울리는 아릿하게 맑고 차가운 것도 좋다. 흰쌀을 깎고 또 깎아 하얀 중심만 남기고 50퍼센트 이상 깎아낸 다이긴조는 입안에 탁 털어 넣으면 무섭게 시퍼런 하늘이 나를 덮치고, 박하사탕처럼 청량한 바람이 나를 감아 돌며, 저 멀리에서는 그 바람에 실린 벚꽃 향이 하늘거리는 듯하다.   p.84~85

돌아보면 삶의 중요한 모든 순간에 음식이 함께 했다. 어린 시절 처음 가족끼리 외식이라는 걸 했던 동네의 경양식 집, 동생은 느끼하다고 했지만 나는 너무 맛있었던 돈까스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 처음으로 독립했을 때, 첫 직장에서 첫 번째 월급을 받았을 때, 첫 남자친구와 근사한 데이트를 했을 때 등등... 뭔가 기념할 만한 일이 생기거나, 오래 기억해두고 싶은 순간에 우리는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걸 먹으러 간다. 그래서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다시 그 순간을 떠올리게 되면, 항상 그 날의 풍경과 사람과 공기 속에 그날 먹은 음식에 대한 맛과 향기와 분위기가 같이 기억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삶의 모든 순간에는 저마다의 고유한 맛이 자리하게 된다. 마치 이 책 속 글들처럼 말이다.

 

대기업을 다니다 서른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겠다는 생각에 사표를 던지고 영국 요리학교로 훌쩍 떠나 요리사가 되었다. 그는 늦깎이 셰프로 일하며 전쟁터 같은 주방 풍경, 음악과 영화와 문학으로 버무린 요리 이야기를 글로 쓰는 칼럼니스트이자 작가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가 써낸 한 그릇에 담긴 사람과 시간에 대한 이야기와 삶의 모든 마디에 자리했던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술술 에세이처럼 편하게 읽히는 글들이지만, 저자가 셰프이기 때문에 요리 과정과 재료와 맛에 대한 묘사가 매우 리얼하고 자세하다. 이야기 속에는 간단한 레시피도 포함되어 있고, 독특한 조리법이나 재료에 대한 팁도 소개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다음 날이 되면 다시 똑같은 시간에 눈을 떴다.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한기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나는 침대 밖으로 나갈 것이고 다시 빵을 구울 것이며 갓 국운 빵을 물고 학교에 갈 것이다. 아침을 여는 나만의 신성한 의식이었다. 마치 기도를 하듯 매일 일어나 반죽을 빚을 때면 사위가 조용해지고 신경이 예민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눈을 감아도 오븐 속에서 익어가는 빵이 보였다. 작은 질감의 차이를 손끝으로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직접 만든 빵, 아무것도 들어가 있지 않은 하얀 빵을 먹으면 나는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듯했다.    p.182~184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부터 뜨끈한 국물 요리가 생각나기 시작한다.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면 시원한 수박과 빙수부터 먹고 싶어 지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홈파티 음식들을 떠올리며 메뉴를 구상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음식들은 우리의 일상과 고스란히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음식은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지난 시절을 불러오게 만들기도 한다. 쓸쓸하고 외로운 날 엄마가 보고 싶으면, 어린 시절 엄마가 해주던 집밥이 생각나고, 지나가다 도시락집을 발견하면 혼자 자취하던 시절 홀로 밥을 먹던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순전히 생존을 위한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웠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값싼 빵이나 라면도 있고, 근사하게 분위기 내고 싶은 날 먹었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가 생각나는 날도 있다.

어떤 음식은 나의 지나온 한 시절을 기억나게 만들고, 또 어떤 음식은 함께했던 누군가를 떠오르게 만드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먹어온 음식만큼, 내가 지나온 시간만큼의 추억들이 쌓이고 쌓여서 나라는 한 사람을 이루게 되는 것일 테고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사람들을 낯선 곳까지 오게 하고 밤을 지새우게 하는 것은 그리움이라고. 그들이 먹는 것은 단지 고기뿐만 아니라 불꽃이고 그 불꽃이 이끌어낸 것은 감춰져 있던 기억이라고 말이다. 그는 날이 춥고 속이 헛헛할 때, 하늘은 흐리고 바람은 찰 때 매운 음식이 당긴다고 말한다. 그럴 때 발걸음이 닿을 곳은 정해져 있다고 무교동의 식당들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낸다. 그리고 다른 집의 것과는 다르게 매서운 직구처럼 매운맛이 강했던 어머니의 비빔국수, 할아버지를 보내고 먹었던 장례식장의 육개장이 슬픔을 견디게 했던 기억도 그려 낸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영국에서 요리학교에 다니던 시절, 난방을 거의 하지 않아 추웠던 오래된 단독주택에서 새벽 마다 일어나서 빵을 만들었던 일화였다. 수업은 아홉 시에 있었고, 그는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여섯 시에 매번 일어나 주방으로 내려 갔다. 밀가루와 우유, , 소금, 버터, 이스트를 준비하고 계량하고, 반죽하고, 숙성해서 모양을 빚어 틀에 집어 넣고 오븐에 굽는다. 재료 준비에서 완성까지 정확히 1시간 40분이 걸려, 완성된 빵 하나를 입에 물고 문밖을 나선다. 노란 자전거 위에 올라 달리면서 먹던 그 빵 맛을 상상해 보았다. 구수하고, 쌉쌀하고, 고소하고, 부드러운 하얀 식빵. 산뜻한 산미와 달콤한 풍미가 섞여 식욕을 자극하는 그 맛. 학교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빵의 그윽한 향이 몸에 남아 있고, 매끄럽고 부드러운 살결 같은 반죽의 촉감이 남아 있는 그 순간들이 너무도 행복해 보였다. 마음을 쌓는 것같이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는 큼지막한 식빵 한 조각에 담긴 그 생의 기쁨을 이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같은 하늘을 지고 사는, 저 멀리, 혹은 가까이에서 숨 쉬는 당신, 당신이 씹어 삼키는 작디작은 한 숟가락에 담긴 세상'이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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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관으로 간 뇌과학자 - 실험실에 갇혀 살던 중년 뇌과학자의 엉뚱하고 유쾌한 셀프 두뇌 실험기
웬디 스즈키 지음, 조은아 옮김 / 북라이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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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아름다운 뇌가소성의 한 가지 예일 뿐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 그리고 그것의 기간과 강도가 뇌에 영향을 준다. 탐조 전문가가 되면 뇌의 시각 체계가 변하여 아주 작은 새들까지 구분할 수 있게 된다. 탱고를 매일 추면 정확한 발놀림을 수용할 수 있도록 운동 체계가 변한다. 몇 년간 다이아몬드 교수의 강의실에서 배운 인생의 교훈은 내가 매일 뇌의 형태를 빚고 있으며 당신도 그렇다는 것이었다.   p.34

신경과학자로서 권위 있는 상을 여러 차례 수상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종신 교수 자격까지 얻었으며, 여성 과학자들의 롤 모델이기도 한 웬디 스즈키는 어느 날 문득 아주 놀라운 깨달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꿈에 그리던 경력을 쌓느라 사회생활과 연애를 멀리했고, 사람들과도 잘 지내지 못했으며, 오로지 일만 하느라 다른데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다. 몸은 정상 체중보다 9킬로그램이 더 나갔으며, 과학 외에 일상생활은 엉망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자신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보기로 결심하게 된다. 신경과학에 관한 자신의 모든 지식을 삶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뇌 전체를 균형 있게 사용해야 할 뿐 아니라 뇌와 몸을 연결해야 했다. 그녀가 번아웃을 극복하고 새로운 뇌 영역과 몸 전체를 깨우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어떤 것일까.

그녀는 스스로 운동과 뇌가소성의 관계를 증명하기 위한 표본이 되어 셀프 두뇌 실험을 했고, 그 과정에서 얻게 된 결론으로 운동하는 뇌의 잠재력을 주제로 한 테드(TED)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 강연은 640만 이상 조회 수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화제를 모았는데, 바로 그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화제의 강의를 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운동과 뇌가소성의 관계를 이해하고 뇌를 활성화하면 누구나 스스로 행복한 삶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밝혀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완벽한 허구다. 현실 세계에서 운동은 에디 모라의 알약이나 윌 로드먼의 가스처럼 엄청난 효력을 발휘하지는 않겠지만, 내가 직접 경험했던 것처럼 의식적인 운동은 매일 사용하는 다양한 뇌 기능에 명확하고 두드러진 효과를 제공할 수 있다. 확인해본 바에 따르면, 운동이 청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나는 '운동이 뇌를 바꿀 수 있을까?' 수업을 통해 그것을 다뤄볼 완벽한 기회를 잡았다.    p.144

뇌가소성이란 인간의 뇌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지식이나 경험이 쌓일 때 두뇌 신경 연결망이 더해져 변화하는 성질을 말한다. 저자는 신경과학자로서 뇌가소성, 즉 경험을 통해 변화할 수 있는 뇌의 능력에 주목했고 번아웃 극복의 핵심이 황폐해진 뇌를 쉬게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뇌 전체를 균형 있게 사용하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두뇌에 치우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신체와 두뇌의 균형을 맞추자 새로운 뇌 영역이 깨어나고, 일상에도 변화가 찾아왔다는 점이 가장 흥미로웠다. 체중 감량, 운동의 중요성이야 누구나 다 알고 있겠지만, 실제로 그것을 몸으로 체감하고, 직접 실천하는 경우는 아는 것에 비해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뇌과학이라는 매우 논리적인 이론을 통해 실제로 몸을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건강의 중요성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것을 체감하게 만든 다는 점에서 매우 놀라웠다. 아인슈타인도 사는 게 복잡할 땐 몸을 움직였다고 하니 가히 뇌를 깨우는 브레인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실 '운동은 당신을 더 똑똑하게 만들 수 있다'라는 것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거의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몸을 쓰는 것이 두뇌 활동에 도움이 된다니.. 어쩐지 이해가 안될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의식적인 운동은 다양한 뇌 영역을 활성화한다. 운동이 어렵다면 오감과 인지기능을 자극하는 방법도 있다며 몇 가지 직접 해볼 수 있는 것들을 소개해주고 있다. 신경과학, 뇌과학.. 이라고 하면 뭔가 더 복잡하고 어렵게만 느껴질 수 있는데, 저자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서술되어 있는 이야기라 누구라도 쉽고 재미있게 과학적인 여러 지식들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신경과학 분야 최신 연구로 밝혀낸 '운동하는 뇌'의 비밀에 대한 과학 입문서로도 훌륭하고, 우리의 운동 습관, 생활 방식에 관해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 특별한 자기 계발서로도 유익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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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강아지 웅진 모두의 그림책 10
박정섭 지음 / 웅진주니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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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지? 여기서 기다려. 곧 데리러 올게.

어쩌면 그 날도 여느 때와 같은 산책길이었을 것이다. 강아지에게 뼈다귀 하나 물려 주고,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주인은 어디론가 가 버린다. 남겨진 강아지는 주인이 시킨 대로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주인이 오기를 기다린다.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주인이 나를 데리러 올 테니까, 그렇게 나와 약속했으니까, 그런 믿음으로 강아지는 기다림을 멈추지 않는다.

반짝이던 하얀 털이 온갖 먼지와 매연에 숯검정이 될 때까지, 그리하여 검은 강아지가 되어 버릴 때까지 말이다.

 

강아지는 의리의 동물이다. 실제로 병원에 입원한 할아버지를 하염없이 같은 자리에서 기다린 강아지의 사연이 방송되었던 적도 있고, 주인이 먼저 죽고 나서 매일 같이 주인의 무덤에 가서 시간을 보내던 강아지의 이야기가 뉴스에 나온 적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반려견이라는 존재가 가족이 아닌 악세사리나 장난감처럼 취급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어릴 때는 예쁘니까 쉽게 키우려고 하지만, 키우다가 병이 들거나, 귀찮아지면 너무도 쉽게 버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말이다. 언젠가는 멀쩡한 강아지를 쓰레기 봉투에 담아서 버렸다는 사람의 행동에 누군지도 모르는 그를 향해 너무 화가 났던 기억도 난다. 그렇게 생명이 가지는 무게감을, 소중함을 종종 잊어 버리고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그림책을 읽게 하고 싶다. 그럼 최소한 자신이 쉽게 버린 그 생명이 어떤 생각을 했을 지, 어떤 마음으로 주인을 기다렸을 지 알게 될테니 말이다.

 

예전에 방송에서 가수 이적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라는 노래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내용이 아니라 자신을 버린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감정을 표현한 거라는 걸 알고 가슴이 먹먹해졌던 적이 있다. 다시 돌아올 거라고, 잠깐이면 될 거라고, 여기 서 있으라고 그렇게 말한 대상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이 이 그림책 속에서 돌아오지 않을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의 마음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이 책은 강아지가 버려졌다는 사실보다 버려진 후 강아지의 삶에 대해 그리고 있어 더욱 뭉클했다. 검은 강아지가 되어 버린 강아지가 자신과 똑 닮은 친구를 발견해, 주인이 올 때까지 함께 놀기로 하고 시간을 보낸다. 다행히 그런 순간들 속에서는 검은 강아지가 덜 외로워 보여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아마도 반려견을 키운 적이 있다면, 혹은 지금도 함께 하고 있다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한 번쯤, 돌아오지 않을 무언가를 기다려 본 적이 있다면 아마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에는 특별한 부록이 숨겨져 있는데, 바로 그림책 작가 박정섭과 뮤지션 슌의 <검은 강아지> CD이다. 책의 첫 번째 페이지에 있는 집의 문을 열면 보이는 QR코드로도 애니메이션과 음악을 만나볼 수 있다. 그림책에는 담기지 않은 검은 강아지의 회상, 주인과의 추억들이 뮤직 비디오로도 제작되어 담겨 있으니 놓치지 말고 봐야 한다.

그림책과 음악, 영상 분야의 컬래버레이션이 신선했는데, 하나의 작품을 이렇게 다채로운 방식으로 읽고 보고 듣게 되는 체험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사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검은 강아지의 모델은 실제 박정섭 작가와 오래도록 함께했던 강아지 공주라고 한다. 책이 출간되기 3년 전 공주가 갑자기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말았는데, 공주가 그에게 주고 간 소중한 선물들을 추억하며 만들어진 그림책인 셈이다. 그래서 강아지의 움직임이나 표정 등에 모두 반려견 공주에 대한 작가의 추억과 시간이 쌓여 있는 것 같아서 더욱 생생한 서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해 버려지는 유기견의 수가 10만 마리를 넘는다고 하는 충격적인 보도를 들었다. 대체 그들이 뭘 잘못한 걸까. 남겨진 동물들은 죄가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주인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날 잃어버린 걸까? 아니면 잊어버린걸까.. 버린 건 아닐거야."

너무 예쁜 그림책이었지만 짧은 이야기 속에 담긴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아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한참 먹먹한 기분이 드는 책이었다. 아이와 함께 읽어도 좋겠지만, 어른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고 싶은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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