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요리노트 -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요리사였다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 지음, 김현철 옮김 / 노마드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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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선생은 벽에 식탁 하나와 기둥 몇 개만 달랑 그려놓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선생 주변에는 심부름꾼들이 여럿 부지런을 떨고 있었는데,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물감을 탄다, '요리'를 나른다, 포도주통을 나른다 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선생은 그림을 그리기 전에 이것들을 이리저리 놓아보고는 한 장면을 그리고 나면 얼른 먹어치웠다. 수도원장은 애초부터 이런 식이었다고 성질을 부렸다. 레오나르도 선생은 오로지 상 위에 올린 '요리'에 관심을 보였지 상을 둘러앉은 인물들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p.58

올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서거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5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과 그의 삶은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관한 책들이 꽤 많이 나왔는데, 이번에 만난 책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의 요리 노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요리사였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198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코덱스 로마노프'라는 노트가 발견되었다. 이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요리에 대한 단상을 적어놓은 유일한 노트로, 천재의 지칠 줄 모르는 창의력이 고스란히 엿보이는 노트였다. 물론, 일반적인 의미의 레시피 노트나 요리에 관련된 팁을 적어 둔 노트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지만 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하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것이 바로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라는 작품일 것이다. 이 책에는 그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당시의 상황들도 수록되어 있는데, 사람들에게 몇 세기에 걸쳐 깊은 감명을 주고 있는 걸작의 탄생 배경에 그의 요리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숨겨져 있었다는 걸 알게 되어 굉장히 놀랐다. 다양한 분야에 걸친 상상력과 창의성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라 그저 '천재'라는 수식어에 걸 맞는 매우 진지한 인물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그는 매우 인간적인 식도락가이자 지칠 줄 모르는 요리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나 주방, 조리기구, 요리법, 식이요법 등에 관한 그의 세심한 관찰과 기존의 조리기구를 개선하고 새로운 장치를 발명하는 점은 굉장히 탁월했다.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공학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계획가 등으로 활약했던 천재답게, 주방에서도 그는 절대 평범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언제 어디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프랑스 왕은 식도락가로서의 레오나르도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부응하느라 레오나르도는 '스파게티'를 발명했다. 그야말로 콜럼버스의 달걀이었다. 200년도 전에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스파게티와 비슷하게 생긴 것을 가져왔다. 바로 국수였다. 마르코 폴로는 국수가 먹거리라는 사실을 빼먹고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수를 식탁 장식용으로 사용해오던 중이었다. 우리가 지금 파스타로 알고 있는 것도 아주 오래 전부터 나폴리와 이탈리아 남부 지방에 알려져 있었다. 물론 요즘처럼 국숫발이 가는 것이 아니라 빈대떡처럼 넓적한 것이었다. 레오나르도는 단지 모양새를 조금 바꾼 것이다.   p.65

이 책은 분명 요리 레시피들을 기록한 노트인데, 실제로 그걸 토대로 요리를 해볼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500년 전에 만들어 먹던 음식들이라 현대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가 나고, 그 중에는 정말 엽기적인 재료들도 꽤 많았다. 초에 담근 새 요리, 구멍 뚫린 돼지 귀때기 요리, 꿀과 크림을 곁들인 새끼 양 불알 요리, 빵가루 입힌 닭 볏 요리, 온갖 발가락 모둠 요리, 양 머리 케이크, 뱀 등심 요리 등 이름만 들어도 그다지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엽기 발랄한 요리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당시에는 조리기구가 오늘날처럼 다양하지 않았기에, 각각의 요리에 필요한 기상천외한 조리기구들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대부분 뛰어난 창의력과 세심한 집념으로 발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조리기구들 또한 현대의 시선으로 바라보기엔 다소 난해하거나, 괜히 더 손이 많이 가게 만들게 보이는 것들이었다. 그는 많은 기구를 도안해 삽화로 남겼고, 시제품을 만들어 사용해보기도 하는 등 호기심과 탐구정신이 넘쳐 흘러 주체를 못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양 한 마리, 돼지 한 마리, 소 한 마리의 발가락을 모두 잘라내어 후추와 올리브유를 섞은 레몬즙에 하루 동안 재어두었다가 만드는 '온갖 발가락 모둠 요리'. 양 머리를 세로로 둘로 쪼개어 당근, 파슬리, 가지와 함께 삶고 국물과 푸른색 소스를 곁들여 먹는 '양 머리 케이크'. .. 뭔가 설명만 들어도 그다지 보기 좋은 비주얼은 떠오르지 않아 별로 먹고 싶지 않은 요리들이지만... 세심한 관찰과 창의성만큼은 전문 요리사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에는 그의 요리들을 사람들이 즐겨 먹었을 지 궁금해진다. 이 책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실제로 기록한 요리 노트의 메모들과 그가 발명했던 다양한 조리 기구들의 삽화들로 인해 매우 생생하게 당시의 요리들을 만나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나만의 엽기발랄 레시피'를 기재할 수 있는 노트도 마련되어 있으니, 요리를 하다가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메모를 해둘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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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문의 비극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5
고사카이 후보쿠 외 지음, 엄인경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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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렇게 물어보면 자네도 대답하기 망설여질 텐데, 요즘 민중의 힘이라는 것이 자주 주장되지만, 적어도 과학 영역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몇 만 명 있은들 한 사람의 천재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자네는 인정할 걸세"

"인정합니다."

"그러면 과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복리를 증진하는 것인 이상 과학적 천재가 벌인 일이 비인도적일지라도 자네는 그것을 용서할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p.60

2천 평도 더 되는 넓은 정원을 소유하고, 한눈에도 돈을 상당히 들인 것임을 알 수 있는 서양식 저택에서 거액 자산가가 권총으로 피격되었다. 이 저택에는 피해자인 주인 고헤이, 이혼 후 친정으로 돌아온 여동생 아오시마 가쓰에, 그리고 들어온 지 반년 정도 되는 하녀 야마시로 유코, 일한 지 겨우 4일째인 이토 쿄코, 이렇게 딱 네 명이 살았다. 다카기 가문의 자산은 대략 천만 정도, 원래 자작 신분을 내세웠는데, 고헤이의 아버지 대 그 작위를 박탈당하고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고헤이는 자신의 방에는 사치를 부려 놓았으면서 여동생과 하녀들의 방은 마치 거지의 집처럼 초라하게 만들어 놓았다. 게다가 고헤이의 아내는 8년 전에 미쳐서 자살했고, 그것도 고헤이의 학대를 견디지 못해서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권총이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기에 타살임이 분명했는데, 유력한 용의자이자 그의 유산 상속인인 네 명에게는 범행시각인 3시에 모두 알리바이가 있었다.

 

여동생, 사촌 동생, 조카, 아들.. 네 사람 모두 고헤이를 미워했다고 한다. 그들 모두 기회만 있었다면 그를 죽였을 거라고 하니, 동기는 거의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고헤이 자신도 이들 네 사람을 증오했고, 네 명 중 누군가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죽은 뒤 막대한 유산을 그들 넷에게 분할 양도할 것을 유언장에 명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묘한 단서를 달았다. '나를 살해하고, 또는 살해하려고 계획하거나 혹은 그러한 혐의가 인정되는 자는 다음의 권리를 상실한다' 라고. 이 무슨 기묘하기 짝이 없는 일족이란 말이다. 마치 미치광이와 범죄자 집합과도 같았다. 가가미 과장은 사건의 핵심이 다카기 가문의 역사 안에 있는 비밀에 있다고 생각하고 수사를 해 나간다. 이 작품은 본격 추리물의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쓰노다 기쿠오의 <어느 가문의 비극>이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이 무슨 이상한 분위기인지. 가가미는 이 건물 안으로 한 걸음 들여놓은 순간에 이미 그것을 알아차렸는데, 그것은 살인 현장이라는 조건을 제외하더라도 그 전에 이미 이 건물 안에 배어 있는 듯한 이상함이었다.

여기 살고 있는 인간의 광기 어린 기묘한 무언가 어느새 건물벽이나 가구에 배어들어 버린 - 만약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이 저택이야말로 분명 그런 사례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가가미는 복도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p.251

얼마 전에 <유리병 속 지옥>이라는 작품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 시리즈가 일본 추리소설의 원류를 이해하고 시대별 흐름을 알 수 있다는 점과 함께 오래 전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치하다거나 고루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는 1880년대 후반 일본에 처음 서양 추리소설이 유입되었을 당시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의 주요 추리소설을 엄선하여 연대순으로 기획한 시리즈이다. 이번에 만난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은 「신청년」이라는 잡지를 무대로 쇼와 시대 초기에 창작분야에서 활발히 활약한 추리소설 작가 네 명의 여섯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 추리소설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에도가와 란포의 스승인 고사카이 후보쿠, 란포와 더불어 당시 탐정문단의 3대 거성으로 일컬어진 고가 사부로와 오시타 우다루, 그리고 일본 쇼와 시대의 매력적인 명탐정 '가가미 게이스케'를 창조한 쓰노다 기쿠오, 이렇게 네 명의 작가들이 저마다 개성 넘치는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고사카이 후보쿠의 두 작품이 분량을 짧았지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작가가 의학부 출신이고 생리학자이자 법의학자로 명망이 높았기에 과학적 이성의 냉철함과 작가로서의 분방한 상상력이 만난 작품을 그려낸 게 아닐까 싶다. 과학자가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한다는 설정과 연애라는 감정의 극치를 심장의 혈류를 통해 연애 곡선으로 만들어 보인다는 정말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놀라웠다. 게다가 실연의 비통함이 극에 달한 과학자가 선택한 마지막 실험이란 매우 충격적인 결말로 이어져 인상적인 여운을 남겨 준다. 나름 추리, 미스터리 장르의 책들을 많이 읽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일본의 초창기 추리 소설들에 대해서 너무 무지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요즘이다.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를 통해서 처음 만나게 되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아마도 현대의 미스터리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일본 추리소설 하면,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밖에 몰랐다면, 그들의 작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시간이 되기도 할 것이다. 과학과 추리가 절묘하게 만나고, 본격과 변격이 투쟁하는 추리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다양한 시대의 작품들을 통해 그 기발한 내용과 독특한 형식에 놀라고, 현대의 익숙한 추리소설의 틀에서 벗어나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될 테니 말이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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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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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를 존중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사회에 사는 사람 중에 유년기를 이해하고 가치 있게 여기고 심지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좋아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은 참으로 행운아이다. 노년을 공경하는 법을 배우지 않은 아이들은 늙음을 두려워하게 되고 어쩌다 운이 따라야만 노인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발견한다... 그냥 척척 해내던 일상생활, 하는 줄도 모르고 늘 해왔던 너무나 쉬운 일들이 노년이 되면서 점차 어려워지더니 결국은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진정한 용기가 필요할 때가 온다. 노년은 대개 고통과 위험, 사망이라는 불가피한 종말을 수반한다. 그걸 인정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존경받아 마땅한 용기이다.   P.31~32

하루에 알람을 열 개는 맞춰 두고, 그때 그때 필요한 일들을 해치우며 살고 있는 내게 언제나 시간은 쫓아가기 바쁜 것이었다. 그래서 여든을 넘긴 노년의 작가가 생애 마지막 에세이를 써내며 '내게는 남겨둘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이 책이 너무도 뭉클하게 다가왔다. 이 책을 쓰는 동안에도 여전히 남는 시간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내 시간은 전부 할 일로 바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노작가의 푸념이, 어쩐지 미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세계 3대 판타지 문학의 거장인 작가의 삶과 평범한 독자인 내 삶을 감히 비교하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이 책은 어슐러 르 귄이 2010년부터 5년 동안 블로그를 통해 남긴 글 40여 편을 담고 있다. 책이 2017 12월 출간되고 나서, 작가는 2018 1 22 88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누구에게나 노년은 찾아 오게 마련이지만, 그러한 육체적인 노화가 스러져감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이 책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존 스타인벡과의 에피소드, 미국의 도덕성과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적인 비유, 흥미로운 독자들의 편지와 욕설 문화에 관한 노작가의 세심하고 담백한 유머, 늙음과 삶에 대한 사려 깊은 사색들이 예리하면서도 편안하게 펼쳐진다.

내가 어릴 때 다른 아이들이 '산타의 진실을 알아냈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불신은 사랑받지 못하는 법이니까. 지금 이렇게 입을 열어 말하는 이유는 사랑 받기엔 너무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 어른들이! - 산타클로스가 진짜가 아님을 알게 된 끔찍한 날을 애도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여전히 반신반의한다. 내가 끔찍하게 여기는 것은 일반적인 '믿음의 상실'이다. 아이들에게 거짓을 믿으라거나 믿는 척하라고 요구하는 처사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P.291~292

노년의 삶과 현대의 문학 산업 등에 관한 글들도 매우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것은 르 귄의 마지막 반려묘 파드와의 에피소드들이었다. '파드 연대기'라고 해서 파드와의 만남과 소소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대목이 세 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영리하고 모험을 즐기며 고집이 센 파드와의 첫 만남부터 소소한 일상들, 그리고 인간과 동물 간의 조화에 대한 고민에 이르기까지 여타의 고양이가 등장하는 에세이와는 확연하게 다른 느낌이라 더 좋았다. 가볍게 읽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묵직한 주제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하지만 결코 무겁지만은 않는 느낌이랄까. 세상을 오래 살아온 그 시간만큼의 사유와 고뇌와 혜안이 모두 드러나 있는 그런 글들이었다.

글쓰기는 그 무엇도 보장되지 않는 위험한 입찰이다. 작가는 자신의 글이 오독되고 오해 받고 오역되더라도, 그저 운에 맡겨야 한다. 내가 아이들의 팬레터를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면 놀라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판타지 소설의 기본이 되는 전쟁과 여행 이야기가 모두 호머의 저서 두 권에 들어 있다. 위대한 미국 문학을 쓰고자 하는 작가라면 반드시 스스로를 다른 작가들과 동등한 입장에 놓아야 한다. 예술은 경마가 아니며, 문학은 올림픽이 아니다.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판타지 소설이 하고자 하는 말은 바로 이것이다... 등등.. 개인적으로 2장 문학 산업에 대한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르 귄의 판타지 소설들을 좋아했던 독자들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테지만 말이다. '우리가 태어난 날과 마지막 날 사이에, 말들의 삶에서부터 별의 기원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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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9-07-24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보관함에 쏙!
 
280일 : 누가 임신을 아름답다 했던가
전혜진 지음 / 구픽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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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 안 태어나서 국가적인 큰 문제면, 좀 더 본질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거 아냐!"

지원은 씩씩거리며 걸었다. 정환은 손에 짐을 든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뒤따라갔다.

정말, 재주는 곰이 넘고 뭐는 엉뚱한 놈이 챙긴다고.

임신을 하는 것도, 앞으로 수많은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여자인데, 죄다 엉뚱한 것들이 화를 내고, 생색을 내고, 탁상공론을 세워 가며 개인 정보를 요구하고 난리야.

 

"아주 떼로 삽질하고 자빠졌어!"    p.93

 

은주, 지원, 재희, 선경은 20년을 꾸준히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그들이 서로 알게 된 것이 무려 지난 세기의 일이니, 굉장하다면 굉장한 인연이다. 이들은 넷 중에 가장 늦게 결혼을 하게 된 은주의 결혼식장에서 만난다. 형사인 지원은 임신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얼마 전 젊은 여자만 노리는 퍽치기 사건을 해결해 경위로 승진을 앞두고 있었고, 꿈꾸던 강력계로 갈 수 있는 기회까지 생긴 참이었다. 임신을 간절히 바라는 선경은 난임 치료 중이었다. 열심히 일하다 회사에서 쓰러져 첫 아이를 유산한 것이 5년 전, 겨우 성공해서 심장 소리를 들었던 둘째 아이를 또다시 잃은 것이 3년 전이었다. 프리랜서 작가인 재희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남성 난임 검사까지 받아가며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남편 때문에 인공수정 시술을 시작하려던 참이다. 성공한 1인 기업가인 은주는 자신의 나이가 많다는 것에 대한 부담과 회사 운영 사이에서 고민이 많다.

만 나이로 서른다섯만 넘으면 노산이라고, 늙어서 애 낳으면 애가 머리가 나빠진다고들 말하고, 요즘 젊은 사람들이 애를 안 낳아서 큰일이라며,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애를 낳아야 한다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은 무심코 말한다. 사실 그 노산의 기준은, 아직 한참 일할 나이이고, 여자들은 국가를 위해 아이를 낳아 줄 생산 자원이 아니라 자기 일이 있고, 자기 인생이 있는 하나의 인격체라는 걸 그들은 왜 모를까. 고용불안, 불황과 저성장, 환경오염.. 이런 사회 문제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아이를 낳을 결심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시대에, 아이를 낳는다는 건 대체 어떤 의미일까. 이 험난한 세상에 아이를 낳아도 되는 것일까. 혹시, 굉장히 무책임한 일인 것은 아닐까. 이 작품은 사전조사를 바탕으로 한 팩트를 기반으로 한 소설이지만, 마치 르포르타주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리얼하게 현실을 페이지 위로 불러온다.

 

정말 이런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큰일이라고, 아이가 태어나는 게 행복이라고 말할 뿐. 하다못해 몸이 아플 때에도, 임신 기간 내내 현대 의학에 외면당한 것처럼 약도, 파스 한 장도 마음 놓고 쓸 수 없다는 것을. 아이가 희망이 라고 말하면서, 그 아이를 임신한 여자는 사회로부터 반쪽짜리 취급을 당하며 멸시당한다는 것을. 몸이 무겁고 지켜야 할 존재가 있는 약자가 되어 버려, 손쉽게 공격 대상이 된다는 것을.

"... 이런 것들을 다들 안다면, 그래도 임신을 할까요?"    p.413~414

 

승진을 앞두고 예상치 않았던 임신을 하게 된 지원은 강력계에 대한 꿈은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팀 일에서도 배제되어 지구대로 옮기게 된다. 인공수정 시술을 시작한 재희는 난소 과자극 증후군으로 고통을 받는다. 선경은 여러 번 시험관을 시도한 끝에 마침내쌍둥이를 임신하게 되고, 회사에서는 눈치를 받다 결국 쫓겨나듯이 그만두게 된다. 은주도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하게 되는데,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면서 지금의 사업들을 건사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각자의 상황과 생각들은 모두 다르지만, 모두에게 임신이라는 경험이 삶을 크게 바꿀 거라는 건 자명한 현실이다. 이렇게 여자들이 돈 축나고, 몸 축나고, 경력까지 틀어질 걸 각오하면서 임신을 하고 있는데.. 여자들이 아이를 안 낳아서 나라가 당장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떠들어 대면서, 대체 나라에서 임신한 여자들에게 해 주는 게 뭘까. 작가는 출산율 저하로 인한 인구 감소가 이슈가 되는 한국에서 임신한 여성들이 어떤 수난에 처해 있는지 실제 두 아이의 엄마이자 워킹맘의 입장에서 사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마치 나의 이야기인 듯, 내 친구의 이야기인 듯 공감하고, 이해하고, 같이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출산율 저하로 인한 인구 감소가 어쩌고를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 임신한 여성들이 어떤 수난을 겪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임신을 하게 되면 갑자기 약자가 되어 버린다. 몸이 아프고, 뱃속에는 지켜야 할 태아가 존재하게 되니까. 그 상태로 집 밖으로 나서면, 사회는 임산부를 투명인간 취급하거나 오히려 윽박지르고 멸시한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이야기, 하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하는 그런 이야기이다. 임신과 출산을 아직 겪어 보지 못한 미혼 여성들에게,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겪어 보지 못할 남성들이 꼭 읽어 봤으면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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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하는 삶 - 여성의 몸, 욕망, 쾌락, 그리고 주체적으로 사랑하는 방식에 관하여
에이미 조 고다드 지음, 이유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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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성적으로 자신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강박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여러 요소들 중에서 젠더, 나이, 체격, , 매력, 당신의 정체성이나 인식되는 정체성, 인종, 사회적 지위, 가족에서의 역할 등을 바탕으로 당신이 성적으로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미지를 내면화하고 있다.   p.81

이 책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배운 적 없는 여성의 몸, 욕망, 쾌락, 그리고 주체적으로 사랑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뉴욕대에서 성교육학 공부를 하고, 20년간 섹슈얼리티 교육을 해온 저자 에이미 조 고다드는 여성들이 가슴에 담아둔 비밀들을 접하며 결국 같은 것을 원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성적 수치심을 치유하고 싶은 20대 초반의 여성들부터 무언가 해소되지 않는 불만족감을 가진 30대 여성들, 섹스에서의 결핍이 가득 차오른 40대 여성들, 너무 늦기 전에 뭔가를 시도해보고 싶은 50~70대 여성들까지 섹스라는 공통의 고민을 가진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을 코칭해왔다.

사회적, 문화적 인식의 그늘 속에서 스스로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성에 대한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리면서 보다 충만한 삶을 이끌어나갈 것을 끊임없이 제안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성적 결함이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섹스가 만족스럽지 않아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는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결국 같은 것을 원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여성들은 성적으로 보다 강한 자신감을 갖고 싶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고 싶어 한다. 이 책은 성에 무지하고, 두려움까지 갖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성에 관한 매우 건강하고 긍정적인 조언을 하고 있다.

욕망은 섹슈얼리티, 그리고 삶 자체의 근본적인 부분이다. 내면의 꿈틀대는 욕망이 없다면 당신은 아침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의 욕망은 당신이 인생을 향해, 삶을 향해, 관계를 향해, 창조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 당신의 욕망은 당신을 성장으로 이끌고 동기를 부여한다. 더 커지고, 더 많이 갖고, 더 온전히 삶을 경험하겠다는 약속을 행동으로 옮기라고 촉구한다.    p.186

65세 케이티는 대학 졸업 후 수녀가 되었고, 수도원에서 20년을 보낸 후 행복하지도 충만감을 느끼지도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곳을 떠나 평범한 삶을 시작한다. 그녀는 여태껏 성 경험이 전혀 없었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늘 비웃음을 사게 되어 수치심만 늘어 갔다. 50세 앤은 세 번째 이혼을 했고, 네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평생토록 종교적인 수치심 때문에 성적으로 충족되지 못한 삶을 살아 왔다. 24세 나오미는 총명하고 재능 있는 사업가였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마음 속으로 수치심을 품고 있다. 10대 시절 엄마에게 자신의 퀴어 성향을 고백했을 때의 수치심과 아이들이 그녀에게 레즈비언이라며 손가락질을 해댔던 모욕감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성적 학대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여성, 18년간 남편과 섹스리스 결혼 생활을 해온 여성, 오랜 세월 자신의 욕망을 부끄러워했던 여성 등등.. 다양한 여성들이 성적 임파워먼트를 위해 저자를 찾아 온다. 

이들의 사연들이 내 이야기 같다고 느끼는 여성들이 생각보다 많을 것 같다. 대부분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부족하고, 자신의 몸, 에로티시즘, 욕망으로부터 거의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이 흥미로웠단 것은 여성들이 자아를 찾고 성적인 힘을 가진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두려움 없이 내면의 욕망을 온전히 끌어안을 수 있도록, 외부의 압력에 떠밀려 자신을 규정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가 삶을 긍정한다는 증거라면, 성적 에너지가 삶의 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삶을 보다 활기차고 유쾌하게 해주는 열정을 가지고 당신의 섹슈얼리티를 표현해보자. 삶에는 때때로 격렬한 불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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