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디테일 - 고객의 감각을 깨우는 아주 작은 차이에 대하여
생각노트 지음 / 북바이퍼블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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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마음이 흔들려야 호감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도 브랜드 정체성을 알리고 충성도를 끌어낼 수 있는 카테고리가 문구입니다. 또 오프라인 매장에 들어와 비용이 크게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무언가를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이기도 하죠. 아무 것도 구매하지 않은 채 구경만 하고 매장에서 나오는 것과 무언가를 구매해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문구는 찾아온 고객을 조금 더 쉽게 자사 브랜드의 진짜 소비자로 만들 수 있는 핵심 카테고리인 셈입니다.   p.57

이 책은 최신 트렌드를 가장 먼저 전달하는 콘텐츠나 여행을 위한 지침서가 아니다. 책에 실린 장소와 요소, 문화와 트렌드는 이미 독자들이 방문했거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노트는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정보를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알 만하거나 들어봄직한 도시 곳곳을 경험하고, 도시의 면면을 한 걸음 더 들어가 살폈다. 바로 그 한 걸음의 차이로 일상에서 갑자기 감각이 트이고, 깨달음이나 통찰이 반짝이는 찰나를 의미하는 에피파니를 마주하게 된다. 저자는 2017 12 2일부터 6일까지 4 5일 동안 도쿄를 여행하며 기록했던, 여행에서 이뤄진 모든 발견과 영감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

저자는 평소에 메모 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메모하는 기준은 딱 세 가지이다.

1.기존에 보지 못했던 기발한 아이디어나 디테일

2.아이디어나 디테일을 기반으로 떠올린 영감과 인사이트

3.영감과 인사이트를 공유했을 때 정보 가치가 생기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일으킬 수 있는 것

그리하여 젊은 마케터이자 기획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일본, 그 중에서도 도쿄의 모습을 소개하게 된 것이다. 저자의 상상을 바탕으로 비즈니스에 접목 가능한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디테일 여행은 매우 흥미롭고, 새로웠다.

 

무지 북스는 작가들과 작품들이 묻히는 안타까운 상황을 바꿔보고자 서거한 작가의 작품 중 꼭 한번 읽어볼 만한 것들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This Month's Features' '이달의 특집'이라고 제목을 붙인 단독 매대를 마련했습니다. 여기에 놓은 책들이 잘 팔린다는 보장은 없지만, 'This Month's Features' 매대는 무지 북스가 묵묵히 추진하고 있는 작업입니다. 고객은 이 섹션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요? 무인양품이 책을 대하는 태도, 단순히 책을 많이 팔기 위함이 아니라 책에 대한 진정성과 발견성을 높이고자 노력한 진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p.311

'디테일'이란 무엇일까. 사전에서는세부 사항이라 번역하는데 디테일이란 발음이 품은 예리한 맛, 애정과 집착 사이를 유영하는 단어의 뉘앙스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저자가 유독 일본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소한 디테일 때문이었다고 한다. 누군가에겐 보잘것없는 부분일 수 있지만, 누군가는 오로지 그것때문에 비행기 티켓을 끊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편의점에서 파는 도시락 속에 들어 있는 일회용 물티슈와 이쑤시개, 운전자와 보행자 모두의 안전을 위한 배려인 초록불 신호 연장 버튼, 자일리톨 껌 통 안에 함께 들어 있는 껌 종이 등.. 소비자로서 돈과 시간을 써야만 배울 수 있는 디테일들이 가득 소개되어 있다. 디테일의 감각은 몸으로 직접 경험해보는 것이라는 걸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나리타 공항에서 시작된 생각 노트의 여정은 저가 항공사의 차별화 전략과 나리타 익스프레스에 설치된 캐리어 셀프 잠금 시스템을 살펴보고, 고객의 마음을 흔드는 문구 백화점 이토야에서 발견한 아이디어들을 짚어 본다. 그리고 하카타역 근처에 있는 키테라는 쇼핑몰에서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지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오모테산도에 있는 모마 디자인 스토어로 향한다.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선정한 디자인 제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늘 새로움을 원하는 고객을 위한 선물 같은 곳이다. 그 외에도 푸드트럭이 모여 핫 플레이스가 된 커뮨 세컨드, 도심 속 문화 공간인 히카리에 쇼핑몰, 디자인 전문 미술관 21_21 디자인 사이트, 롯폰기 힐스에 있는 아카데미 힐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간과 그 속의 디테일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부록으로 실려 있는 '마케터를 위한 생각노트', '기획자를 위한 생각노트', '디자이너를 위한 생각노트'도 매우 흥미로웠다. 마케팅의 관점에서 보지 않더라도, 이 책의 일정 그대로 떠나는 여행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재미있는 부분이 많은 책이었다. 마케터, 기획자, 디자이너 그리고 업무에 필요한 디테일 감각과 기록하는 습관을 높이길 원하는 독자들에게도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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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녀와
톤 텔레헨 지음, 김소라 그림, 정유정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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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는 땅을 내려다보며 힘없이 말했다. "후회하고 있어."

"아악, 후회라니...." 달팽이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건 서두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내가 떨고 있는 거 보이지?" 그는 부르르 떨었다. 그런 다음 말을 이었다. "나는 원래 절대 떨지 않아! 너의 후회 때문에 지금 이러는 거야. , 난 당장만큼이나 후회가 싫어."   p.40

<고슴도치의 소원>, <코끼리의 마음>에 이은 톤 텔레헨의 어른을 위한 소설 시리즈이다. 혼자 사는 외로운 고슴도치, 대책 없이 무모한 코끼리를 통해 작은 숲 속 세상으로 우리를 초대했던 톤 텔레헨은 이번 작품에서는 언젠가 숲 속 일상을 떠나볼 생각을 품고 있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번에는 또 어떤 동물들이, 우리와 같은 일상의 고민들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어느 날 코끼리가 사막으로 떠나겠다고 다람쥐에게 선언한다. 언제 돌아올지는 나도 잘 모르겠고, 떠나는 이유도 모르겠지만, 여행을 떠나 보면 이유를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코끼리는 광활하고 텅 빈 사막에 도착해 걷고 또 걷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기진맥진해진다. 그러다 숲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이유를 찾게 된다. 어디론가 영원히 떠나 버린 까치가 그리워진 개미는 심란해진다. 친구들 모두 까치를 찾아 나서고, 세상 곳곳이 까치를 찾아 헤매는 동물들로 가득해진다. 그러다 이제 그만 마음을 접어야겠다고 하는 순간, 까치가 다시 돌아온다. 개미와 다람쥐가 해변으로 떠나고, 달팽이와 거북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먼 곳이 너무 궁금했던 개구리는 길을 떠나지만, 사실 먼 곳은 실망스러웠다. 뭔가 특별한 걸 본 것도 아니었고, 사실 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먼 곳에 가 봤다는 것만으로도 개구리는 기쁨을 느끼게 된다.

 

 

다람쥐는 생각했다. 만약 그곳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여기가 전부라는 말이네. 그는 하늘과 평야, 멀리 있는 숲, 옆에 있는 개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게 전부야. 더 이상은 뭐가 없는 거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알아낸 것에 만족했다. 더 이상 뭔가 있어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p.64

여행을 떠나야겠어. 라고 다짐했다가, 그냥 가지 말까.를 고민하는 다람쥐를 비롯해서 이 책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모두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실행을 하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실망하고, 그저 가봤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기도 하고, 끝내 떠난 여행에서 마주한 벽 앞에서 절망하기도 한다. 숲 밖의 여정이란 만만치 않다. 그냥 집에 있는 게 세상에서 가장 편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환상이란 누구나 품어볼 수 있는 꿈같은 것 아닌가. 어쩌면 그저 떠나보는 것만으로도 내 삶이, 내 일상이, 내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누구나 해봤을 것이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나를 기다리는 또 다른 생이 있는 건 아닐까. 이곳이 아닌 저곳에서라면 내가 꿈꾸던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아. 라는 생각을 한번쯤 해본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은 선물처럼 다가온다. 여행을 꿈꾸고, 망설이고, 떠나는 모든 이들에게 말이다.

 

톤 텔레헨의 작품들은 어른을 위한 동화 소설답게 사랑스러운 그림과 함께해서 더욱 좋다. 특히나 원서에는 없는 일러스트들이 국내 출간 버전에만 추가된 것이라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엉뚱하지만 사랑스러운, 진지하지만 너무도 귀여운 동물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잔잔하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든다.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지만, 막상 낯선 곳에서 뭔가 잘 안 풀리면 다시 아늑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고, 떠나려고 하니 이런 저런 걸리는 일들이 많아 망설이게 되는데, 떠나고 보니 내가 기대했던 그것과는 전혀 달라 실망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톤 텔레헨은 동물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러한 마음 모두가 여행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 사소한 순간들과 작은 마음들에 귀를 기울여주는 이야기라 뭔가 위로를 받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나 역시 매일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채 일상을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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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니
톤 텔레헨 지음, 김소라 그림, 정유정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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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불로 들어서며 귀뚜라미는 생각했다. 이제부터 슬픔은 끝나는 즉시 없애 버려야겠어. 그나마 분노 상자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것도 버리려던 참이었는데, 만약 실수로 사자가 그 상자를 받았다면....

귀뚜라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오래된 분노 상자를 가져와 열고, 그 속에 담긴 분노를 수천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어 하나하나 땅에 묻었다.   p.25~26

동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인들의 복잡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톤 텔레헨의 신간이다. <고슴도치의 소원>, <코끼리의 마음>에 이은 어른을 위한 소설 시리즈이다. 전작들을 읽으면서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그랬어.' 라고. 토닥토닥 위로해주고 싶은 기분도 들고, 안쓰러워 보듬어 주고 싶은 기분도 들고, 다들 그런 거라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톤 텔레헨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동물들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겪어 봤을 법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람쥐는 우울했다. 반가운 편지 같은 건 전혀 오지 않았고, 아무도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외로웠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두운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부엉이였다. 부엉이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내 생각을 전혀 안 하니까 난 그다지 잘 지내는 것 같지 않다고. 어느 날 하마는 회색인 데다 거추장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자신의 모습이 지겨워 메뚜기에게 서로 몸을 바꿔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몸이 가벼워져서 사뿐히 춤을 추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지지만, 다른 친구들이 자신을 하마가 아니라 메뚜기라고 생각하고 말을 건네자 갑자기 우울해진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에 빠지게 된 것이다.

 

다람쥐는 다시 생각했다. 나는 바로 지금 존재할 뿐인데, 나중으로는 가 본 적이 없고,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 다람쥐는 항상 자기 자신보다 앞서 나갔던 생각들을 더 이상 좇을 수가 없게 되자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그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지금이 아니면 아무 때도 아닌 거야." 그러고는 곧바로 잠이 들었다.   p.67

생일을 맞은 사자가 귀뚜라미에게 슬픔이 가득 담긴 상자를 선물로 받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받고 싶은 외로운 고슴도치에게 다람쥐가 편지를 보내게 되고, 모든 게 불필요하고 쓸모 없다고 생각한 흰개미는 누워서 보이는 태양과 하늘마저도 내다 버리고 싶어 진다. 그러다 하나도 쓸모 없는 자신의 생일에 동물 친구들이 찾아오고, 진심으로 쓸 데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눈이 오고, 얼어붙고, 폭풍이 불고, 춥고, 끔찍하고, 으스스한 곳에서 사는 펭귄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생일을 맞이 한다. 혼자 얼음 케이크를 먹고, 눈을 맞고, 코를 얼리며 점차 생일을 즐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런 순간이 가끔은 좋을 때도 있다고. 바로 지금처럼.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해서 엉뚱한 고민을 시작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타인과의 소통에 대해. 누구나 삶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 고민해봤을 법한, 철학적이며 보편적인 질문들은 소소하고 불필요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가장 근본적인 고민들이다. 앞선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원서에는 없는 일러스트가 포함되어 사랑스러운 그림을 보는 재미가 더해져 더욱 따뜻하게 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잘 지내니. 요즘 별 일은 없니. 애정 어린 마음을 담아 누군가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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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나다
모리 에토 지음, 김난주 옮김 / 무소의뿔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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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나이를 먹는다는 것도 참 재미있네. 나리키요 씨와의 만남, 헤어짐, 다시 만남, 또 헤어짐. 그 일련의 과정을 대충 더듬으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같은 사람을 몇 번이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만날 때마다 낯선 얼굴을 보이면서 사람은 입체적이 된다. 길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녹아드는 나리키요 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눈물이 핑 돌 만큼 재미있다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 '다시, 만나다' 중에서, p.39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는 사와다는 이번에 첫 번째 개인전을 열면서 오래 전 출판사에서 근무했던 편집자 나리키요 씨와의 인연을 떠올린다.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이기에 초대장을 보낸다고 설마 와줄까 싶긴 했지만, 그는 정말로 전시장에 나타난다. 그렇게 두 사람은 7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이 사랑하는 사이였다거나,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일러스트레이터로 일을 시작하게 되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도 모르는 채 정신 없이 그리면서 스스로의 재능을 의심할 때 자신에게 일을 의뢰했던 편집자로, 그녀가 처음으로 타인과 함께 일하는 것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 사람이었다.

표제작인 '다시 만나다'라는 이야기는 이렇게 담백하고, 별다른 사건 없이 흘러간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만나 따로 식사하는 자리도 갖지 못했던 이들의 만남이 그녀에게 오랜 시간 남아 있는 이유를 나는 알 것도 같았다. 나도 그런 사람들이 몇몇 있었으니 말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모두 숱하게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멀어지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만남이 일시적인 것이든, 여전히 지속되는 것이든 간에 그 인연이라는 순회 고리 속에서 벌어지는 회한과 아쉬움, 그리움과 애틋함, 오해와 미움 등의 감정들이 우리를 성장시키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준다. 모리 에토는 일상 속에 자리한 만나고 헤어짐, 그리고 다시 만남을 주제로 여섯 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다시 얽힌 손. 그것으로 충분했다. 주저 없이 악수해준 그의 축축한 손바닥에 15년 전의 진실이 담겨 있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세월도 있다. 사람은 산 시간만큼 과거에서 반드시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돌아갈 수 있는 장소도 있다. 맞닿은 손끝의 따스한 열기를 느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 '매듭' 중에서, p.155

고토는 15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으로 향한다. 이제는 어깨에 책가방을 멘 소녀가 아니라, 재킷을 입고 커리어 우먼 다운 영업용 미소도 지을 수 있는 어엿한 성인 여성이 되었지만, 친구들을 만나기 직전 여지없이 겁쟁이 열세 살 시절로 돌아가고 만다. 누구나 기억할 수밖에 없는 6학년 2반의 최대의 추억이, 그녀에겐 여전히 어두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를 가르는 15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녀는 과거의 친구들과 다시 만나, 과거의 그 시간 속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매듭'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다시 만난 그 시절의 친구들과 오래 전 기억 속에 있는 매듭을 조금씩 풀어내기 시작한다. 같은 상황도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체험되기에, 시간이 지난 뒤에 각자에게 남겨진 그 순간의 기억은 모두 다르게 마련이다.

 

여섯 편의 이야기 모두 일상 속에서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러한 관계를 떠올릴 때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사랑과 이별이 아니라서 더욱 흥미로웠던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어린 시절 잃어서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상상 속에서 마치 실재했던 것처럼 완벽하게 만들어낸 남자의 이야기, 저녁 시간에 우연히 부딪친 낯선 남자를 뉴스에서 총기 발사 사건의 범인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여자의 이야기, 고속도로에서 위험한 사고가 나려던 순간 죽은 아내의 환영을 다시 만나게 되는 남자와 아들의 이야기 등... 지금의 삶과 다음 세상을 오가며 만남의 가치에 대해 그리고 있어 뭉클했다. 짧은 단편들이지만, 인생의 특별한 순간을 예리하게 포착해내고 있어 여느 장편 못지 않게 깊은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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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라, 내 얼굴 슬로북 Slow Book 4
김종광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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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 소설이니 수필이니 이름 붙이기가 애매한 잡스러운 얘기들. 하지만 뭔가 있는 듯한. 가슴을 울리거나,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거나, 낄낄대고 싶거나, 통쾌하거나, 애틋하거나, 뭉클하거나.... 그런 소소한 얘기들을 야담이라고 하자.

지금도 타고난 야담가들이 있다. 어느 조직이나 꼭 한두 명은 있다. 한 사람이 없어지면 다른 누가 나타나 좌중의 이목을 붙들고 동료의 이성과 감성을 들었다 놓는 이야기꾼을 자처하기 마련이다.   p.74

작가정신의 새로운 산문집 시리즈인슬로북, 네 번째 책이다. 슬로북은마음의 속도로 읽는 책으로, 자신의 속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능동적인 삶의 방식이자 일상의 혁명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획된 에세이 시리즈이다. 백민석의 쿠바 여행 에세이 <아바나의 시민들>, 박상의 본격 뮤직 에세이 <사랑은 달아서 끈적한 것>, 함정임이 들려주는 치유의 산문집 <괜찮다는 말은 차마 못했어도>에 이어, 데뷔 20년차 생계형 소설가 김종광의 에세이 <웃어라, 내 얼굴>이 출간되었다. 속도지상주의 시대에느려질 수 있음의 가능성을 발견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시리즈라 그런지, 출간되는 책들마다 특별한 분위기와 색깔을 지니고 있어 이번 책도 기대가 되었다.

이 책은 올해로 데뷔 20년차를 맞는 소설가 김종광이 그 동안 쓴 1500여 개의 산문 가운데 가려 뽑은 126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페이지 수가 두툼한 편은 아니니, 각각의 글은 두 세 페이지 정도의 아주 짧은 분량이다. 가족이야기부터 소소한 일상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개인적인 생활과 삶이 모두 담겨 있는 글이다. 진지한 이야기도 있고, 뭉클한 이야기도 있고, 애처로운 이야기도 있고, 공감되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공통점은 하나같이 유쾌하고, 재미있다는 것이다. 짧지만 임팩트 강한 한 방이 거의 모든 글에 담겨 있어서, 페이지가 아주 쓱쓱 빠르게 넘어가는 책이다.

 

 

 

내가 존경하는 선배가 늘 하는 소리가 있다. "언제쯤 내가 20쪽 이상 재미있게 읽는 소설을 쓸 것이냐?" 그토록 재미없는 소설만 써온 내가 이런 말 하기는 좀 뻔뻔하지만, 어떻게 먹고 살려고, 이토록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으로, 도무지 뭔 스토리인지 종잡을 수 없는 소설을 쓴 것일까? 소설 좀 읽었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도 이해 불가능한 소설들이 있다. 소설만 읽고 써왔다는 소설가들끼리도 서로 공유가 안 되는 것이 재미라는 거다. 그러니 모든 독자들을 아우르는 재미라는 건 있을 수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p.259

나는 어느 날 아내에게 묻는다. "대출 언제부터 가능해? 아내가 대책 없는 얼굴로 대답한다. "기약 없지. 무리해서 대출할 필요 없잖아." 사실 그들은 인근 도서관에서 책을 열심히 빌려보던 중, 바빠서 반납일을 넘기고, 책을 한 권 잃어버려 장기간 연체를 한 대가로 한 달도 넘는 대출 정지를 당한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원래 목적했던 말을 꺼낸다. "그럼 살까?" 도서관에서 대출을 할 수 없으니 책을 사서 보자는 거였다. 그런데 아내의 대답은 "우리 형편에 어떻게 사?" 나는 요새 벌어다 준 돈이 부족해서 그러나 싶어 서운하고, 울컥해서 말한다. 우리가 책 몇 권 살 형편은 되지 않냐고. 갑자기 아내가 깔깔대고 웃기 시작한다. 아내는 대출해서 전세를 가든 집을 사든 하자는 얘기로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주공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수록작 중에 '대출 세계관'이라는 에피소드의 내용이다. 모든 글들이 다 이런 분위기라고 보면 되다. 소소해 보이지만 누구나 겪어 봤을 법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공감을 그리고 있고, 현실은 결코 가볍지 않지만 이야기의 어조는 가볍고 유쾌하다. 그래서 종종 피식 웃게 되고, 어느 순간은 깔깔거리고 배를 잡게 되는 기분 좋은 책이었다.

저자는 극중 에피소드에서 '시니 소설이니 수필이니 이름 붙이기가 애매한 잡스러운 얘기들. 하지만 뭔가 있는 듯한' 소소한 얘기들을 야담이라고 할 때, 세상 모든 어머니들은 이야기꾼에 야담가라고 말한다. 그런데 독자 입장에서 김종광의 산문이 딱 그런 느낌이다. 소소하지만 의미 심장하고, 애틋하지만 유머스럽고, 뭔가 가벼워 보이지만 결국 뭉클한 잔상을 남기는 그런 글들이었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이야기꾼'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맛깔 나는 책이다. '왜 우스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웃기는, 겉으로 웃지 않아도 속으로 웃게 만드는, 꼭 웃음으로 표현되지 않아도 뭔가 즐거움이 느껴지는, 이 모든 것이 재미'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재미들을 독자들이 오롯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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