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마더
에이미 몰로이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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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지금은 모르겠지요. 아기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선물이랍니다."

노부인이 사라지자 콜레트가 말했다. "감동적이네요."

"그렇게 생각해요?" 위니는 콜레트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러면서 콜레트 뒤쪽에 있는 돌벽 너머 공원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왜 사람들은 임신한 여자가 어떤 축복을 받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 드는 걸까요? 왜 우리가 입는 손해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거죠?"     p.118

퍼펙트 마더라니, 제목부터 무시무시하다. 물론 '엄마'라는 존재가 직접 되어 보지 못한 이들이라면 그게 뭐 대단한가 싶은 단어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나 역시 처음엔 그랬다. 뭐든지 최선을 다해, 하나도 놓치지 않고, 내 아이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만 해줘야 하고, 그 어떤 해로운 것도 가까이 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또 기울였다. 그럴 때마다 지인들에게 듣는 얘기는 한결 같았다. 너무 완벽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엄마라는 것이 그렇게 몇 년 잠깐 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매사에 완벽을 기하려고 하면 금새 지쳐서 나가떨어질 거라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나서 이제 나는 생각한다. 세상에 '완벽한 엄마'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엄마가 된다는 것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지만,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끌어 안고 살아야 한다는 굴레와도 같다. 자신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많은 것을 포기하고 감수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매 순간 자신이 잘 하고 있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돈과 경력을 포기할 수 없어 눈물겨운 워킹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엄마도, 종일 집에서 아이만 돌봐야 하는 전업 주부인 엄마에게도 육아란 결코 수월할 수 없는 일이다. 에이미 몰로이의 첫 작품은 '현대사회가 모성에게 주는 압박감'을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5월에 첫 아기를 낳은 초보 엄마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가입해 '5월맘'이라는 엄마들의 모임을 만든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 유모차를 끌고 공원 잔디밭에 모여 이런 저런 육아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교환하고, 고된 일상 속에서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준다. 출산하기 한참 전부터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아 왔고, 출산 후에는 새로 얻은 엄마라는 삶에 대해서, 현실 친구라면 절대로 참고 들어주지 않을 수준의 이야기를 낱낱이 나눈다.

콜레트의 가슴속에 공포가 밀려들었다. 포피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날 밤 젖을 먹이며 보았던 아이의 얼굴. 진한 푸른 눈동자에 순전한 사랑을 담고서 콜레트를 보던 딸의 얼굴. 이토록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콜레트의 가슴이 죄어들었다. 이토록 바닥이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니. 어릴 적 보았던 버려진 채석장이 떠올랐다. 너무 무서워서 뛰어들 수 없었던 그곳. 좀 더 자라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어떤 남자아이가 그곳에 떨어졌었다. 끝내 시체를 찾을 수 없었을 정도로 깊은 곳이었다.    p.404~405

모임의 멤버들은 싱글맘 위니가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우울해 보이는 것 같아, 그녀를 좀 쉴 수 있게 해주자는 계획을 세운다. 하룻밤이라도 아기 보는 일에서 잠깐 벗어나 동네 술집에 모여 간단하게 한잔하기로 한 것이다. 넬은 자신의 베이비시터 알마를 위니에게 소개시켜주고, 그들은 그렇게 고된 육아에서 벗어나 단 몇 시간, 딱 한 잔, 한 줌의 자유를 누린다. 그리고 그날 밤 위니의 아기가 그녀의 집에서 베이비시터가 잠든 사이 요람에서 증발한 듯 사라져 버린다. 완벽한 엄마들의 단 하룻밤 일탈은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악몽으로 바뀌어 버린다. 이 납치 사건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는데, 이유는 사라진 아기의 엄마가 한때 유명 배우였기 때문이다. 물론 5월맘 모임의 멤버들은 아무도 위니의 과거를 알지 못했다. 위니는 10대 시절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1990년대 초반 드라마 스타였던 것이다. 유괴된 부잣집 아기, 한때 유명 배우였던 아기 엄마는 싱글맘이었으니 방송에서 좋아할 수밖에 없는 소재였다.

그리고, 아기가 사라진 그날 밤, 아무것도 모른 채 술에 취해 웃고 노래 부르던 엄마들의 사진이 뉴스 1면을 장식하면서, ‘자격 없는 엄마들이란 꼬리표가 붙은 악몽이 시작된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하룻밤, 아기를 맡겨 두고 외출했을 뿐이다. 그 몇 시간의 일탈 때문에 그간의 갖은 노력과 고생과 마음들을 다 싸잡아서 '엄마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이들을 비난해도 되는 것일까. 사라진 아기를 찾는 과정과 범인을 추적하는 플롯에 대한 긴장감과 반전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육아휴직, 상급 권력자와 부하 여직원의 미투, 낙태 등 여성의 삶에 직면한 사회적 이슈들을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어 현실감 있게 표현해내고 있다는 점이 더욱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언론과 사회의 편견, 모성이라는 신화, 각각의 엄마들이 간직한 비밀과 거짓말, 내 아기도 잃어 버릴 지 모른다는 실체 없는 공포까지.. 읽을 수록 빠져드는 속도감이 인상적인 작품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케리 워싱턴 주연으로 곧 영화화될 예정이기도 하니, 스크린에서 펼쳐질 이야기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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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인간 - 부와 권력을 지배하는 인공지능의 보이지 않는 공포가 온다
해나 프라이 지음, 김정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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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은 유죄 여부를 판정하지 못한다. 피고와 검찰의 주장을 저울질하지도, 증거를 분석하지도, 피고가 진심으로 뉘우치는지 판단하지도 못한다. 그러니 머지않아 알고리즘이 판사를 대체하리라는 기대는 접으시라. 그렇지만 믿기 힘들게도 알고리즘은 개인정보를 이용해 재범 위험률을 계산할 줄 안다. 게다가 많은 판사가 재범 가능성을 고려해 판결을 내리므로, 따지고 보면 알고리즘의 그런 능력이 꽤 쓸모 있다.    P.92

문명이 발달할 수록 인간과 기계는 동반자가 되어 간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알고리즘의 권력은 점차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렇다면 알고리즘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로는 '주어진 문제를 논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 방법, 명령어들을 모아놓은 것'을 말한다. 넷플릭스가 취향 별로 추천하는 영화를 자연스레 선택하게 되고, 핸드폰에서 검색한 키워드는 원하든 원치 않든 웹사이트의 배너 광고로 마주하게 되고,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른 페이지로 사용자의 취향을 예측해 맞춤형 광고를 붙이는 식이다. 이런 기술의 뒷면을 보면 언제나 알고리즘이 숨어 있다. 이렇게 기계 시대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부품인 알고리즘은 오늘날 소셜 미디어부터 검색엔진, 의료, 법원, 마케팅 등의 분야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 책은 경제, 데이터, 의료, 예술 전반을 뒤흔드는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주도권을 확보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단순히 알고리즘이란 무엇인가로 시작해 그 기능과 힘을 살펴보는 데 그치지 않고, 알고리즘이 아직 풀지 못한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어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경찰이 체포할 용의자를 결정할 때 쓰는 알고리즘에서는 범죄 피해자와 결백한 피고인 중 누구를 보호할 것인지, 판사가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의 형량을 정할 때 쓰는 알고리즘에서는 사법 제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느냐는 물음을, 무인 자동차를 움직이는 알고리즘에서는 도덕률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앞으로 몇 년 뒤, 당신이 자율주행 자동차를 타고 도심 거리를 신나게 달리고 있다고 해보자. 교통 신호가 빨간 불로 바뀌었는데 자동차에 이상이 생겨 차를 멈출 수가 없다.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차는 선택을 해야 한다. 도로에서 벗어나 콘크리트 벽을 들이받아 탑승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달려 탑승자는 살리되,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를 칠 것인가? 우리는 이때 자율주행 알고리즘이 어떻게 작동하도록 설계해야 할까? 누가 죽을지를 어떻게 결정할까?    P.191~192

만약 당신이 폭주하는 전차의 진행경로에 있는 5명과, 전차의 경로를 바꾸면 희생될 한 명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는 1960년대로 거슬러 가는 유명한 사고실험인 전차 문제에 대한 대응 문제이다. 이것이 무인 자동차의 사례가 되면 상황은 이렇게 바뀐다. 자율주행 자동차를 타고 거리를 신나게 달리고 있을 때, 신호가 빨간 불이 되었는데 차에 이상이 생겨 멈출 수가 없다.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차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탑승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인가, 보행자를 칠 것인가. 2016년 초가을에 열린 파리 모터쇼 전시회장에서 이러한 질문을 받은 메르세데스 벤츠의 대변인은 "우리는 탑승자를 구합니다."라고 대답했다가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당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6퍼센트가 탑승자를 희생시켜서라도 되도록 많은 사람을 살리는 쪽이 더 도덕적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경우가 된다면, 공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 나와 남의 목숨이 지닌 가치를 저울질하는 알고리즘을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지적하고, 고민한다.

알고리즘이 적용되는 대부분의 산업에서는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이 충돌하는 팽팽한 갈등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이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알고리즘의 선택은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의 한계와 가치에 대해서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자동화가 삶의 모든 영역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우리의 삶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늘날 알고리즘은 인간을 도와 유방암을 진단하고, 연쇄살인마를 붙잡으며, 비행기 추락을 방지하고, 누구나 손끝으로 인류의 방대한 지식을 쉽게 얻을 수 있게 해주고, 세계 곳곳의 사람들과 즉시 연결되게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그럼에도 우리는 알고리즘이 남겨준 문제들에 대해서 짚어보고, 알고리즘의 힘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기계와 인간의 완벽한 공생을 통한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각종 위기와 쏟아지는 정보에 휘둘리지 않고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도와 준다. 당신은 착취당할 것인가, 지배할 것인가, 아니면 완벽하게 공생할 것인가. 미래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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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티스
마이클 크라이튼 지음, 이원경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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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올여름 마시 교수와 함께 서부에 가지 않는다에 천 달러 걸겠어.”

내가 대꾸했다.

“좋아. 내기를 받아주지.”

그 순간 깨달았다. 비록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여름 내내 소름끼치게 뜨거운 사막에서 미치광이로 소문난 늙은이와 오래된 뼈를 파내며 함께 지내게 되었다는 것을.     p.15

마이클 크라이튼 사후 세 번째로 발표된 소설이다. <쥬라기 공원>이라는 너무도 유명한 그의 대표작으로 많이들 알고 있는 마이클 크라이튼은 20세기 최고의 이야기꾼이자 과학 스릴러의 거장이다. 사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마이클 크라이튼의 작품은 내게 거의 충격이었다. <쥬라기 공원> 이후로 과학 스릴러라는 장르에 대해, 공룡이라는 테마에 대해 호기심이 생겨서 한동안 관련된 책들을 찾아 푹 빠져 지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전 추리소설과 판타지 소설에 푹 빠져 있던 내게 그의 작품은 그야말로 신세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너무도 오랜만에 그의 작품을 만나게 되어 읽기 전부터 굉장히 설레었다.

이 작품은 마이클 크라이튼이 1970년대에 집필한 미공개작으로, <쥬라기 공원>의 프리퀄 격인 작품이다. 현재까지로는 그가 남긴 작품 중에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최후의 작품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배경은 사람들이 금을 캐러 미 서부 인디언 지역으로 몰려들던 1870년대이다. 모두가 금을 찾아 서부로 향하던 시대, 공룡 화석을 찾아 그곳으로 간 이들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 활약했던 실존 인물인 코프와 마시, 두 고생물학자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에, '팩션 모험극'이기도 하다. 아직은공룡이란 존재를 믿을 수 없던 시기이자 창조론과 다윈의 진화론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그 시절, 사라진 공룡의 세계를 찾아 서부 대평원으로 떠나는 여정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현지 발간 당시전성기의 마이클 크라이튼을 다시 만난 듯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자연에는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한 것들이 아주 많다네. 이 브론토사우루스가 활보하던 시대에는 빙하의 얼음이 녹고, 지구 전체가 열대로 바뀌었지. 그린란드에 무화과나무가 자라고, 알래스카에 야자수가 무성했어. 미 대륙의 광활한 평원들은 당시에 거대한 호수들이었고,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은 호수 바닥이었네. 죽은 동물의 사체가 호수 바닥에 가라앉으면 진흙 침전물이 그 위에 쌓여 점차 돌로 굳어지지. 그렇게 보존된 화석을 우리가 발견한 거야. 만약 이런 증거들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런 거대한 동물의 존재를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나?"    p.213~214

1800년대 후반 미국의 고생물학자였던 코프와 마시는 공룡 화석 발굴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인 라이벌이었다고 한다. 서로 비방하는 것은 기본이고 상대방이 발견한 화석을 도둑질하는 등 상대를 이기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들의 흥미로운 대결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부유한 예일대생 윌리엄 존슨은 라이벌인 친구와 미국의 미래가 서부 개발에 달렸다는 주장에 대한 말싸움을 하다 발끈해 즉흥적으로 서부 여행을 가겠다고 선포한다. 예일대의 마시 교수는 해마다 학생들을 선발해 탐사 여행을 떠났는데,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굴리는 걸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친구와의 내기 때문에 마시 교수를 따라 서부로 가게 된 윌리엄은 결국 일행들과 여정을 시작하는데, 마시 교수는 그를 자신의 라이벌인 코프의 스파이라고 의시종일관 의심한다. 결국 마시의 탐사대로부터 버림받아 혼자 남겨진 윌리엄은 우연히 마시 교수의 라이벌인 필라델피아 대학 고생물학과 교수 코프를 만나게 된다. 코프는 마시의 탐사대에서 쫓겨난 윌리엄을 자신의 탐사대에 합류시키고, 예상치 못하게 윌리엄은 그들과 함께 화석 탐사에 나선다.

‘고생물학’과서부라는 소재가 전혀 안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마이클 크라이튼의 솜씨는 이 두 가지를 기가 막히게 요리해내고 있다. 과학 스릴러 거장의 마지막 작품을 만난다는 조금의 감격스러움도 있고, 아주 오랜 만에 만나는 그의 '공룡 이야기'라는 점도 설레임을 더해주어 더욱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쥬라기 공원>의 프리퀄 격이라는 의견은 그다지 와 닿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공룡의 화석을 찾으러 떠나는 이들의 여정이라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이 <쥬라기 공원>이 만들어지는 데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짐작은 충분히 되었다. '과연 윌리엄은 무사히 공룡 화석을 발굴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라는 것이 이야기의 주요 플롯이지만, 실존 인물인 두 고생물학자의 대결과 골드 러쉬와 인디언과의 긴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미 서부 지역이라는 배경이 전해주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오래 전 <쥬라기 공원>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 작품도 놓치지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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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프란츠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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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날벌레들이 날아다니다 죽었습니다. 온종일 비가 내렸어요.

바람 한 점 없이 아주 뜨듯한 빗줄기가 수직으로 내리긋는 야릇한 비였고, 시클라멘을 짓이겨 놓으면서 풀 위로 쏟아지는 기세가 꺾일 줄 모르더군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새들만은 추적추적 내리는 이 비가 불편하지 않은지 날아다녔어요.

새들은 오솔길을 따라서, 수풀 속에서, 여름이 선사한 무성한 초목 아래서, 얕은 나뭇가지에서 여전히 지저귑니다.    p.44~45

어둠 속에서 귓가에 하얀 머리칼 몇 올뿐인 삐쩍 마른 한 늙은 남자가 문을 밀고 무대로 등장한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는 낡은 피아노로 다가간다. 어둠과 시간에 묻혀 거의 보이지 않는 연로한 그 남자는 피아노를 연주한다. 그리고 내레이터가 등장해 인물을 소개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1860년 미국의 한 사제로, 그의 이름은 시미언 피즈 체니이다. 19세기 가톨릭 사제이며 최초로 새소리를 기보한 음악가인 그는 실존 인물이기도 하다. 노 사제는 오래 전 죽은 아내를 아직도 목 놓아 부르는 중이다. 그의 아내는 딸 로즈먼드를 낳고 해산 직후 침대에서 죽었다. 사별한 아내를 잊지 못한 채 은둔하여 살았던 그는 아내가 사랑했던 사제관 정원의 모든 사물이 내는 소리를 기보하는 것으로 아내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승화시키고자 한다.

음악과 언어가 결속된 독자적 작품 세계를 구축한 파스칼 키냐르의 신작이다. 17세기,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이자 작곡자인 생트 콜롱브의 이야기를 그렸던 <세상의 모든 아침>과 쌍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나 이번 작품은 희곡 형식으로 쓰여 더욱 흥미롭다. 등장인물은 내레이터와 사제 시미언, 그리고 딸 로즈먼드, 이렇게 세 명뿐이다. 널찍한 무대 역시 최소한의 소도구만 놓여 있어 고요하고 느리게 움직이며 전개된다. 주인공 시미언 피즈 체니는 정원에서 지저귀는 온갖 새들의 노랫소리뿐만 아니라 물 떨어지는 소리, 옷깃에 이는 바람 소리 등 생명이 없는 사물의 소리까지 음악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무대는 캄캄하다. 칠흑 같은 어둠이다.

날마다 찾아오는 밤은 얼마나 야릇한 실체인가!

얼마나 기이한 질료가 자연에 배어들며 세상을 집어 삼키는가!

공간의 맨끝을 뚫어지게 바라보면, 낮이 끝나며 시작되는 어둠에는 끝이 없는 듯하다.

매년 겨울이 시작되면 밤이 더욱 깊어질까 두려워진다. 결코 끝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다.   p.73

어느 날 시미언은 딸인 로즈먼드를 불러 집을 떠나라고 말한다. 이유를 묻는 딸에게 그는 말한다. 더 이상 널 보고 싶지 않아서라. 라고. 아버지가 딸을 내쫓는 이유는 바로 오래 전 죽은 아내 때문이다. 딸의 나이가 이제 곧 스물여덟이 되었고, 아내는 스물넷에 죽었던 것이다. 게다가 딸은 점점 더 엄마를 닮아 갔고, 살아 있는 딸을 보는 것이, 딸이 나이 먹어 가는 걸 보는 것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한 여인을 사랑하는 것과 딸을 사랑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말하는 그의 말을 온전히 다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의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만큼은 알 수 있었다. 28년 전 죽은 아내 때문에 딸을 쫓아내는 아빠라니. 그 절대적인 사랑, 유통 기한 없는 사랑, 설명할 수 없는 사랑...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돌아온 딸은 아빠에게 말한다. 엄마에 대한 사랑이 너무 지나쳤다고. 그런 딸에게 아빠는 말한다.

"비밀을 하나 말해 줄까, 딸아.

사랑엔 결코 지나침이 있을 수 없단다."

 

파스칼 키냐르는 대대로 언어학자와 음악가들을 배출한 집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5개 국어를 습득하고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면서 자라났다. 이러한 배경은 바이올리니스트·첼리스트·오페라 작곡가라는 다양한 이력으로 이어졌으며, 일관되게 그의 작품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이번 신작 역시 그가 평생에 걸쳐 몰두했던 생의 근원과 기원의 음악이라는 주제를 한 무명 사제 음악가의 삶을 통해 풀어낸 작품으로, 출간 즉시 도빌 시의 <책과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시미언 피즈 체니는 미국 뉴욕주 제너시오의 사제관 정원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기보한 최초의 음악가이다. 극 중에서도 나오지만 실제로 그가 생전 그토록 출간하려 애썼으며, 사후에 자비 출간된 책이 바로 '야생 숲의 노트'이다. 그가 기보하는 새소리, 바람 소리, 갈대나 사물이 내는 소리 등은 '자연의 음악', '음악 이전의 음악'이다. 파스칼 키냐르는 이러한 이야기를 정제된 시적 언어로 놀랍도록 아름답고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상실과 외로움, 고통과 침묵, 평화와 고요의 순간이 마치 음악처럼 들리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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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나의 집 모중석 스릴러 클럽 46
정 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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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타당한 요구였다. 그 무엇보다 아내와 아이가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 지극히 미국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그를 속박하고 있는 지구 반대편에서는 무조건 부모가 우선이다. 아이는 두 번째, 그리고 아내는 맨 마지막. 매와 진은 그를 그렇게 키웠다. 그는 그런 부모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그렇다고 질리언에게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p.133~134

며칠 전 낮에 아랫집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한참 들린 적이 있다. 보통 어른이 곁에 있을 테고, 아기가 뭔가 불편한 게 있어서 울거나 칭얼댄다면 금방 달려가서 해결해 주지 않을까. 물론 그럼에도 아이의 요구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해 아이를 조금 길게 울리는 경우도 생길 수 있겠지만, 참 이상하다 싶게 아기 울음소리가 길게 들렸다. 순간 생각했다. 설마 아기만 남겨두고 어른이 자리를 비운 건가? 혹시 아기를 학대하는 부모가 있는 걸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급기야 아래층에 내려가볼까 하던 차에 아기 울음 소리가 그쳤다. 세상이 험악해지고, 뉴스에선 연일 끔찍한 소식을 사건사고로 보도하고.. 그러다 보니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굳게 닫힌 대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생각에 오싹했다.

대부분 가정 범죄는 집 안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가까운 이웃이나 친구나 동료들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범죄자들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지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시무시했다. 정윤의 첫 소설 <안전한 나의 집>에 등장하는 가족들 역시 그러했다. 크고, 튼튼해 보이는 대문이 그려진 표지를 열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가족이라는 허울뿐인 이름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7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와 보란 듯이 성공한 아버지, 아버지처럼 교수가 된 아들,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 완벽히 성공한 재미한인 가족이다. 그러다 그들에게 즐겁고 안전해야 하는 집은 문이 닫히면 지옥으로 변하는 곳이다.

그들 대부분이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어린 나이에 한국에서 이민을 왔다. 그런데 그들의 사고방식은 누가 봐도 한국식이다. 여자들은 전부 남편과 아버지와 시부모에게 복종한다. 지금도 분주히 음식을 나르는 건 여자들뿐이고, 그 중에도 며느리들은 가장 눈에 띈다. 며느리들은 항상 필사적으로 상대의 비위를 맞추기 때문이다....그는 사랑하는 이가 자신의 어머니처럼 결혼과 함께 종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질리언도 일 년에 몇 차례 시부모 앞에서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여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한국인 아내들은 평생을 그러고 살아야 한다.    p.174

부모에게 반발해 백인 여자 질리언과 결혼한 경, 그들은 대출 이자를 갚느라 허덕이다 결국 집을 내놓으려고 공인중개사를 만난다. 학자금 대출과 주택 담보 대출이 경의 발목을 잡으면서 빚이 불어나고 카드 돌려 막기가 일상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집값이 폭락해 대출금조차 보전이 안 된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을 때, 집 뒤뜰에 알몸인 여자가 다리를 절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경의 어머니인 매였고, 아들을 보자마자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한다. "도와줘." 그리고 "아버지가 다치셨어." 하지만 한국말이 서툰 경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해치려 했다, 다치게 했다는 식으로 알아 듣는다. 어머니의 몸은 찰과상과 핏자국, 멍으로 뒤덮여 있었다. 경의 아버지는 십 수 년 전까지 어머니를 무자비하게 때렸던 전력이 있다. 하지만 경찰과 함께 부모의 집을 찾은 경은, 강도가 들어 집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아버지는 무차별 폭행을 당했으며, 어머니와 가정부는 그들에게 강간당했다는 알게 된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경은 그런 일을 겪은 부모를 당분간 자신이 돌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강도가 들어 그들이 당한 그 일만큼이나 경에게 끔찍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렸고, 어머니는 아들을 때렸다. 어머니인 매는 미국으로 와서 친구도, 일자리도 없었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고, 그녀가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던 것은 어린 아들뿐이었던 것이다. 그들 가족은 그렇게 유지되었다. 어린 경은 어머니가 얼마나 비참하게 살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화풀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했다. 하지만 왜 어머니가 집에서 나갈 용기를 내지 못했는지, 자신을 데리고 탈출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원망했다. 아버지 진은 미국에서 사회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가족들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고, 밖에서와 달리 집에서는 매우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경은 오랜 시간 증오했던 부모를 집으로 모셔와 자신의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지내도록 해야 한다. 각기 다른 사고방식과 신념으로 살아온 3대가 한 지붕 아래 모이면서 시작되는 진짜 비극은 서늘하고, 오싹하다.

작가는 경의 부모에게 벌어진 끔찍한 범죄라는 미스터리와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한인사회, 그리고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미국인이지만 사고방식만은 지극히 '한국적'인 해외 교포 1.5세들의 이야기를 함께 배치해 스토리를 풀어 나간다. 작가인 정윤 역시 서울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 재미한인이고, 이 작품을 번역한 번역가 역시 그러하다. 외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모순과 즐겁고 안전해야 할 집에서 벌어지는 가정폭력이라는 아이러니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다. 참 아프고 슬프면서도, 오싹하고 서늘한 작품이다. 당신의 집은, 당신의 가족은 안전한가. 굳게 닫힌 문 뒤에서 벌어지는 이런 비극을 우리는 더 이상 모른 체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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