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리학 이야기 - 알아두면 전혀 무서울 것 없는
나카노 토오루 지음, 김혜선 옮김, 박성혜 감수 / 영진.com(영진닷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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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있어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뿐이다. 사람이 죽으면 몸의 세포도 역시 죽는다. 그렇다면 세포가 죽으면 사람도 죽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인데 어느 장기의 세포가 어느 정도 죽는지, 또 어떤 속도로 죽는가에 따라 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면 세포가 죽어도 괜찮다. 게다가 아폽토시스(세포자연사)라고 불리는 병이 아닌 생리적으로 세포가 죽어가는 현상마저 알려졌다.   p.31

 

'병리학'이라고 하면 어쩐지 딱딱하고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 뜻을 보면 질병의 분류, 기재 및 그 특성과 병인 및 진행 과정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라 되어 있으니 더욱 그렇게 보이고 말이다. 하지만 쉽게 말하자면 병이 어떤 이유를 발병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보면 된다. 일생 동안, 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을 없을 테니 어느 정도 알아두면 도움이 될 수밖에 없는 학문이기도 하다.

 

 

 

 

 

 

의과대학 교수인 저자는 의료계와 관련 없는 보통 사람도 어느 정도는 병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낯설 수도 있는 분야이니 읽다가 어렵게 느껴지는 내용도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금방 알기 쉬운 내용으로 돌아오므로 어려운 부분은 일단 건너뛰어도 지장이 없다고 미리 서문에 밝히고 있어, 오히려 부담 없이 술술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의료계에서는 '내과의는 뭐든지 알고 있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외과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무슨 일이라도 한다. 병리의는 뭐든지 알고 있고 뭐든지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때를 놓친다'라는 농담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이 병리의가 하는 일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말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병리의는 환자의 병소에서 떼어 낸 조직, 형태에 의한 진단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사망한 환자의 병에 관해 부검을 통해 조사하는 일도 한다고 하니 말이다.

 

 

 

 

병이라는 것은 세포의 기능이 여러 가지 상해를 끊임없이 받게 되어 파탄 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되더라도 바로 죽는 것은 아니다. 병이 난 세포들은 정상과는 조금 다른 상태에서 좀 전문적인 단어가 되겠지만 '병태생리'적으로 새로운 평형 상태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 어르고 달래서... 왠지 모르게 세포와 삶을 함께하는 느낌이 들지 않나?    p.94

 

우리의 몸은 대략 200종류의 약 6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많은 세포가 각각의 역할을 완수하고, 나아가서는 협조화여 가능한 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사람의 인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세포가 손상이 되는 것을 우리는 병이 난다고 한다. 정신 질환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질병의 원인은 세포에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책은 바로 그 세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세포가 스트레스를 어떻게 참아 내는가부터 시작해 세포의 죽음, 노화 등의 이야기를 거쳐 암과 함께 가장 높은 사망 원인으로 꼽히는 심혈관 장애를 중심으로 몸 속 혈액에 관해 알아 본다. 그리고 '병의 황제'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이라는 질환의 발병 원인부터, 어떻게 증식하는 지와 같은 암의 진화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장에서는 자궁경부암, 위암, 간암 등에 관한 이야기를 거쳐 멀지 않은 미래에 의학계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될 AI나 분자표적약 등에 관한 내용도 수록되어 있어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나 '실마리도 없는 잡담을 하듯이 질병의 메커니즘을 웃음과 함께 설명하는 지적 여행'이라는 소개 문구처럼, 마치 별로 어렵지 않은 이야기를 일상 속 잡담하듯이 풀어내고 있어 의학과는 전혀 무관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보통의 독자들도 재미있게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병에 걸리면 다양한 약이 처방된다. 그러한 약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효과를 나타내는가를 이해하려면, 병의 발병에 관한 병리학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요즘은 처방전에도, 약국에서도 각각의 약에 대한 기능과 효과에 대해 자세히 기재되어 있고, 설명을 들을 수 있어 자신이 처방 받는 약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의학이 크게 진보한 만큼 일반인들도 그에 걸 맞는 의학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의학적 지식과 그에 대한 해석,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통해서 평소 궁금했던 여러 질병의 발병원인과 진행과정 등에 대한 의문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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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내가 죽은 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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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서야 깨달았어. 나한테는 중요한 뭔가가 없다는 걸. 그 이유를 찾다가 어릴 적 기억이 없다는 사실이 생각이 났어."

"너한테 뭐가 없다는 건데?"

"없어." 사야카는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알아. 나밖에 몰라. 난 결함 있는 인간이야."

예상치도 못했던 말이 사야카의 입에서 튀어나와서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p.37

7년 전 헤어진 그녀에게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그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고등학교 2학년부터 대학교 4학년까지, 약 육 년 동안 연인이었다. 하지만 딱히 정열적인 애정 표현을 나눈 적도 없고 극적인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육 년이나 사귀고 있었고, 관계에 종지부를 찍은 건 사야카였다. 그랬던 그녀에게 먼저 연락이 온 것이다.

"이 지도에 있는 곳에 가줘. 나랑 같이."

 

남편은 미국 출장 중이고,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연락했다는 사야카는 사 년 전에 결혼해서 현재는 전업주부였다. 그녀는 황동으로 만든 열쇠와 편지지에 검은 잉크로 그린 지도를 보여 준다. 일 년 전에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이라면서, 이 지도에 있는 곳에 함께 가달라고 부탁한다. 아빠의 생전 행동 중에 지금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고, 어쩌면 아버지가 이 지도에 있는 곳에 주기적으로 다녀오셨던 것 같다고, 여기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거였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에게 어릴 적 기억이 전혀 없다고, 그 기억을 되찾기 위해 이곳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나가노의 숲 속에 위치한 회색 집을 찾게 되는데,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듯 기묘한 그 집에서 그녀는 잃어버린 기억과 자신의 과거를 찾게 될까.

이렇게 생각해보니, 이 집에 감도는 불길한 기운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비과학적인 표현이었지만 저주와도 같은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건, 사야카의 기억이 사라진 것에도 그 저주가 영향을 끼친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사야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 건 바로 그때였다. 갑작스러운 비명에 생각에 빠져들던 나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p.192

크레타 문명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크노소스 궁전 안에 고고학자들을 괴롭힌 방이 있었다고 한다. 배수시설이 있긴 했지만 실제로 사용할 수는 없었고, 방을 만든 재료도 마모되기 쉬운 재질이었으며, 계단 등에 사람이 지나다니며 생기는 사용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이 방은 무엇일까 모두 의아해했다. 그곳은 바로 망자가 저승에 가서 생활하는 방, 유령을 위한 공간, 요컨대 무덤이었던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바로 이 이야기에서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이라는 작품을 착안했다고 한다. 덧창이 닫힌 어둑한 집 안, 수북이 쌓인 먼지와 스산한 공기, 오래된 일기장, 같은 시간에 멈춰버린 시계들... 오래된 집이라는 공간만큼 공포를 불러 일으키기 적절한 장치도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으로 단 두 명의 등장인물이 한적한 숲 속의 회색 집에서 만 하루 동안 겪는 일을 그리고 있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연극적인 구성이 돋보이는 본격 미스터리로 손꼽히는데, 시종일관 오싹하고 섬뜩한 기분이 들게 만들어 공포소설처럼 읽히기도 한다. 작가가 '자신 있게 추천하는 야심작'이라는 표현을 할 만큼 자신감과 애정을 드러내는 작품이라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별다른 사건이나 여러 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하지 않아도 시종일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긴장감과 서사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도 10년이 넘어 새 번역과 새 디자인으로 다시 출간된 작품이고, 요즘 같은 날씨에 읽기 딱 좋은 이야기이니 이번 기회에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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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서른, 세계여행 - 현실 자매 리얼 여행기
한다솜 지음 / 비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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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를 타고 들어가자마자 엄청난 풍경이 펼쳐졌다. 눈이 채 녹지 않은 어마어마한 산 아래, 동화 속 마을에 온 것 같았다. 내가 보아온 할슈타트의 사진은 겨울이었는데, 또 다른 푸릇한 할슈타트를 경험하다니. 페리에서 내려 돌아가는 배편의 시간을 확인하고 동생과 나는 본격적으로 할슈타트 여행에 나섰다. 우리처럼 당일로 온 사람도 있고, 며칠 묵으며 천천히 여행하는 여행자들도 있는 듯했다. 문득 예쁜 숙소가 가득한 이 마을에 머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107

215일 동안 인스타그램으로 공유되어 4만 팔로워의 뜨거운 응원을 받은 한자매의 세계여행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이제 딱 서른 살, 나는 무엇을 이뤘을까. 그동안 적어놓은 버킷 리스트 속에는 언제 이룰지 모르는 꿈들이 가득했다. 그녀는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세계여행을 떠나기로 마음 먹는다. 이 결정을 누군가와는 상의하고 싶었고,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은 동생이었다. 그녀의 결정을 듣던 스물다섯 살 동생은 대번에 이렇게 말한다. "언니 나랑 같이 가자." 그렇게 '한자매'의 세계여행이 시작되었다.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백배 낫다'는 말에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더 늦기 전에 버킷 리스트를 실현해보겠다고,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다소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일에 도전하기란 웬만큼 추진력이 있어서는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게다가 서른이라는 나이는 대학 졸업 후 어느 정도 직장 생활에 적응이 되어 경력을 포기하기가 참 어려운 시기 아닌가. 그리고, 거창한 세계 여행으로 수많은 경험을 하고 돌아와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다녀와서 계획은 있냐는 엄마의 물음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뚜렷한 계획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벌써부터 걱정하며 여행하고 싶지는 않다고. 그렇지만 다녀와서는 더 멋진 사람이 되어 멋진 인생을 살겠다고. 딸의 이야기에 대한 엄마의 대답은 "우리 딸들, 인생 참 멋있게 산다." 였다. 그렇게 믿고 지지해주는 엄마, 아빠의 응원으로 한자매는 본격적인 세계여행 준비에 집중하기 위해 회사에 사직서를 낸다.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도착해서 체크인했다. 다행히 배낭은 방수가 되는 재질이라 많이 젖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내 배는 눈치도 없이 밥을 달라며 보챈다. 동생도 배가 슬슬 고파오는 표정이다. 우리는 이른 저녁이나 먹자며 밖으로 나갔는데 주변을 둘러봐도 낡은 건물에 상점들뿐, 마땅한 식당이나 슈퍼가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과일을 파는 상인이 보인다. 그거라도 사야겠다 싶어 가보았지만 과일 상태가 안 좋았다. 바로 옆, 옥수수와 고구마를 파는 상인이 보인다. 동생과 나는 이게 최선이란 걸 직감하고는 옥수수 하나와 고구마 두 개를 골라 700짯을 냈다.    p.324~325

이 책은 출발 215일 전부터 시작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시작으로 24개 나라, 54개 도시 곳곳을 누비는 여정을 담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영원히 꿈일 것만 같던 세계여행을 떠난 스물다섯, 서른 살 자매의 여정은 20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메고 비를 쫄딱 맞고 현실 자매의 싸움도 매일같이 이어지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리얼함으로 인해 진짜 여행처럼 느껴진다. 그녀들의 세계 여행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시작된다. 러시아를 가로질러 모스크바에서 체코로 들어간다면 여비를 최소화할 수 있는 데다, 평소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대한 로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여정의 첫 유럽 여행지는 체코의 프라하, 그리고 헝가리의 로맨틱한 부다페스트,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꿈꾸는 여행지라는 터키의 카파도키아를 거쳐, 오스트리아, 독일, 영국, 크로아티아, 스위스, 그리스 등등...으로 이어진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는 누룽지 한 조각에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뉴욕에서는 현실 자매의 다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도 하고, 페루의 숙소에서 만난 크고 작은 벌레에 기겁하기도 하고... 다양한 풍경들을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하게 된다.

여정이 끝나고 후반부에 수록되어 있는 장기여행을 위한 다양한 팁들도 매우 흥미로웠다. 출발 준비부터 귀국까지, 장장 400여 일의 노하우를 고스란히 담은 체크리스트와 여행 루트, 교통비와 여행경비, Q&A까지 꼼꼼하게 정리한 부록이 수록되어 있어 실제로 세계여행을 떠날 수 있는 여행 가이드로서의 역할도 해줄 것 같으니 말이다. 각 국가별 비용도 식비, 교통비, 숙소, 입장료, 액티비티 등으로 나뉘어 있고, 원화로 환산했을 때 금액도 표기되어 있어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여행 비용이었다. 나도 동생과 둘이서 해외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있는데, 확실히 친구나 연인과 함께하는 것과는 다르게 더 편한 부분들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자 마자 동생에게 이런 책이 있다고 소개를 해줬는데, 언젠가 나도 이렇게 리얼한 자매 여행을 떠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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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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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흰 이를 내보였지만 그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도리어 분위기가 더 어색해진 것을 깨달은 듯 가가는 그답지도 않은 실없는 웃음을 거두었다. 그리고 뭔가 각오한 듯이 숨을 토해낸 뒤, "과연 우리가 다른 친구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라고 중얼거렸다. "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거 아닌가?"    p.236~237

이번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가 국내 출간 10여 년 만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출간되었다. 개정판에서는 10여 년 전 자신의 번역을 대대적으로 수정, 보완했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뀐 한글어문규정을 적용하고 기존 판본의 크고 작은 오류를 바로잡은 것은 물론, 권별로 문장 전체를 3,000군데 이상 다듬어 읽는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아울러 각 권에 대한 기발한 해석이 빛나는 그림작가 최환욱의 표지화로 시리즈로서의 통일성을 더하여 소장 가치를 높였다. 개정판이 출간된 덕분에, 이 작품을 오랜 만에 다시 읽게 되었다. 최근에 가가형사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을 읽었던 터라, 시리즈의 첫 작품에서 만나는 가가 교이치로의 풋풋한 모습이 너무도 반가웠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1985 <방과 후>로 데뷔했고, 두 번째 작품으로 1986 <졸업>을 출간했다. 이 작품에서 가가 교이치로라는 캐릭터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아직은 형사가 아니라 평범한 대학생으로 나와 더욱 흥미진진했다. 가가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집을 나간 것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아버지가 경찰이기 때문이라고, 경찰이란 가족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대학 졸업반이 되면서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할 때 자신은 교사 아니면 경찰관이 되고 싶다고 했으면서도, 결국 교사가 되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첫 장면에서 친구인 사토코에게 프로포즈를 했기 때문에, 가족을 꾸리려면 경찰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참고로 가가의 어머니가 집을 나간 사연에 대한 진실은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기도의 막이 내릴 때>에서 밝혀 진다. 그리고 가가는 시리즈 두 번째, 세 번째 작품에서는 교사라는 직업으로 등장해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네 번째 작품인 <악의>에서 재직 중 어떤 사건으로 인해 자신이 교사로서는 실격이라고 판단해, 경찰에 입문하게 된다.

진실을 추구하는 것에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가가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미나미사와 선생님의 말씀대로 진실이란 볼품없는 것이고 그리 큰 가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가치 있는 거짓말이라는 것도 이 세상에는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가가는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친구의 원한을 풀자는 게 아니었다. 아무 이론 없이, 오로지 진실을 알고 싶다는 것과도 달랐다. 더구나 정의감 같은 건 가장 적합하지 않은 말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것이 우리의 졸업 의식이라고 가가는 생각했다. 긴 시간을 들여 언젠가는 무너져버릴 나무토막을 쌓아온 것이라면 그것을 무너뜨렸을 때 비로소 우리가 건너온 한 시대를 완성시킬 수 있으리라.   p.374

, 다시 <졸업>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면, 고등학교 시절부터 함께해온 7명의 친구들은 대학 졸업을 몇 달 남겨두고 있다. 가가의 첫사랑은 침착한 성격의 사토코이고, 그녀는 졸업 후 도쿄에 있는 출판사에서 일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다만 현재 집에서 도쿄까지 두 시간은 걸리는 거리라 집을 떠나야 하는데, 그녀가 도쿄에 올라가 혼자 산다는 것에 아버지가 반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미카와 쇼코 백로장이라는 대학생 원룸 맨션에 살고 있다. 얌전하고 수동적인 쇼코는 모 여행사에 취직이 결정되었고, 나미카는 가가 만큼 검도 실력이 뛰어나 대회에서 결승에 진출하기도 하는 적극적인 성격이다. 쇼코는 현실적이고 출세 지향적인 도도와 커플이고, 와코와 하나에는 테니스부에서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가는 커플이다. 다도회, 검도부, 테니스부라는 각자의 취미 활동으로 함께 우정을 나눠 온 일곱 친구들은 바쁜 취업 준비 과정에서 어느 날 갑자기 충격적인 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쇼코가 자신의 원룸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현장은 자살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연인인 도도조차 자살의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남은 친구들이 은사인 미나미사와 선생님 댁에서 다도 모임을 갖다가 두 번째 살인이 벌어지게 되는데... 두 사건 뒤에 감춰진 동기와 진실을 밝히기 위해 가가는 자신만의 추리를 해나가기 시작한다.

가가 형사 시리즈가 여타의 추리소설 시리즈물과 확연히 다른 차이점을 보이는 것 중의 하나는 이야기의 중심에 주인공이 있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사실 한 주인공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시리즈물일 경우, 그 인물의 개인사부터 시작해서 그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메인 플롯과 함께 성장해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시리즈 캐릭터를 필요 최저한밖에는 사용하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시리즈에서는 주인공이 아니라 그 외 다수의 등장인물들 각각의 사연에 꽤 많은 분량이 할애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리즈의 첫 작품인 <졸업>에서는 가가 교이치로라는 인물이 가장 많이 등장하고, 또 그의 성격을 가장 많이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 작품에서 가가는 대학생 신분으로 활약을 펼치는데, 웬만한 형사 못지 않은 직감과 뛰어난 추리력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의 첫사랑 사토코에 대한 고백과 그녀를 대하는 태도, 친구들 사이에서 행동하는 모습과 아버지의 대한 그의 생각 등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어 시리즈의 원형이라는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냉철한 머리, 뜨거운 심장, 빈틈없이 날카로운 눈매로 범인을 쫓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잃지 않는 불세출의 형사 가가 교이치로, 그의 탄생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이라 열 권의 리즈 중에서도 이 작품만은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갓 데뷔한 20대에 발표했던 풋풋한 청춘 미스터리이지만, 결코 가볍거나 만만한 작품이 아니다. 가가형사 시리즈의 열 번째 작품을 읽고 나서, 첫 번째 작품을 다시 만나서인지 읽는 내내 향수와 설레임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가가형사 시리즈 중에 어떤 작품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면, 무조건 이 작품부터 만나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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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막이 내릴 때 (저자 사인 인쇄본)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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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리 다리를 지나자 푸른 물이 출렁거리는 계곡이 이어져, 주위에 고층 건물이 없었다면 여기가 도쿄라는 사실을 잊을 것 같았다.

"도쿄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기는 처음이에요."

"한 방향에서만 바라보면 본질을 알 수 없는 법이야. 사람이나 땅이나."

가가의 말에 마쓰미야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p.190~191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 그 열 번째 이야기이자 시리즈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작품이다. 가가 교이치로라는 캐릭터가 처음 등장한 것이 1986년에 발표된 <졸업>이었으니, 시리즈 열 편이 진행되는 동안 무려 삼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특히나 히가시노 게이고가 시리즈물을 쓰는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는 캐릭터이고, 데뷔작인 <방과후>를 쓴 바로 다음 작품이 이 시리즈였기에 그의 작가 인생 전체와 함께 하고 있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천재적인 수사 실력이나 뛰어난 직감 등을 가지고 있는 형사 캐릭터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많이 등장하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는 따뜻한 캐릭터라 더욱 매력적이기도 하고 말이다.

가가 형사 시리즈에서는 전반부의 작품보다 후반부의 작품에서 가가 형사의 비중이 많이 높아졌었다. 시리즈 여덟 번째인 <신참자>에서부터 옛 도쿄의 정취가 어린 니혼바시 일대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그려졌는데, <기린의 날개>를 거쳐 이번 작품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배경이다. <기도의 막이 내릴 때>에 이르러서야 가가 교이치로가 파견 근무를 자청하면서까지 니혼바시 일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나오고, 그 동안 간단히 언급되어 온 그의 복잡한 가정사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시리즈 최대의 미스터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가가가 자리에 앉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얼마 전에 아는 간호사 분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그랬답니다, 저세상에서 자식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 그럴 수만 있다면 육체 따위는 없어져도 좋다고요. 부모란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켜도 좋은가 봅니다. 히로미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히로미는 순간 현기증이 일었지만 겨우 참아 냈다.    p.352

도쿄 변두리의 한 아파트에서 타살로 추정되는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다. 목이 졸려 죽은 변사채는 시가 현의 청소 업체에서 일하던 오시타니 미치코로 밝혀진다. 이상한 것은 시신이 발견된 아파트의 집 주인과 전혀 접점이 없었다는 것이고, 집의 주인인 고시카와 무쓰오 역시 행방이 묘연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아파트 근처 하천 둔치에서 노숙자가 살해된 사건이 발생한다. 비닐로 지어진 오두막에 화재가 발생했고 그 안에서 불에 탄 남자의 시신이 나온 것이다. 경찰은 두 사건의 시기와 현장의 거리 등 유사성에 주목하지만, 좀처럼 명확한 연결고리를 찾지 못한다. 한편 오시타니 미치코가 도쿄에 올라왔던 이유가 중학교 동창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드러나고, 경찰은 자연스럽게 연극 연출가인 아사이 히로미를 용의선상에 올려놓지만 수사는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돈다. 과연 남의 아파트에서 죽은 여자의와 남의 오두막에서 불에 탄 남자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가가는 사건 현장에 있던 달력에서 자신의 어머니 유품에 있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의 메모를 발견하게 된다. 어렸을 적에 집을 나간 어머니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던 가가는 사건을 조사하면서 점점 더 어머니의 과거에 대해 알아 간다. 그리고 이번 사건이 어머니와 연관되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사건의 중심에 있는 아사히 히로미의 비극적인 가정사와 가가 형사의 과거사가 얽히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복잡하게 펼쳐진다. 어린 시절의 비극을 딛고 연극 무대를 향한 오랜 꿈을 실현한 여성 연출가와 어릴 적 가출한 어머니의 행적을 찾아 니혼바시 일대를 맴도는 경시청 소속 형사,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운 채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는 거대한 비극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결코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인물들이 빚어내는 드라마는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하여 명불허전, 시리즈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에 걸맞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가가 형사 시리즈’ 그 마지막 이야기라서 너무 아쉽지만, 그만큼의 완성도를 보여주고 막을 내리는 것이라 아낌없이 박수를 쳐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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