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클리벤의 금화 1
신서로 지음 / 황금가지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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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겠습니다. 저를 서리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실컷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먹으려 했다."

"하오면, 왜 먹지 않겠다고 하셨습니까?"

"먹고 싶지 않아졌으니까."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바로 그런 걸 묻고 있기 때문이다."     p.19

 

영주의 딸이 용에게 납치되었다. 행여나 용이 식사 거리가 아니라 노예나 시종으로 부리기 위해 잡아간 것이라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용이 그러한 습속을 갖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바가 없다. 그러니 가난한 남작의 여덟 번째 딸인 울리케 피어클리벤은 용의 한 끼 식사로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운명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애를 쓰고 운이 따라준다 해도 용의 소재지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날이 지나갈 테니, 그 동안 울리케가 무사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애초에 지상 최강의 포식자이자 맹수인 동시에 신화의 계보를 증거하는 실재의 현현인 용을 인간의 군사력으로 격퇴하는 것 또한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러한 가혹한 사태 앞에서 부정을 애써 꾹꾹 눌러 삼키며 영주가 침통해하고 있을 때, 용에게 잡혀간 울리케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이야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지점에서 시작된다. 무시무시한 포식자가 자신의 먹이에게 "너를 먹겠다."는 선언 뒤에 이어지는 장면이 살육의 현장이 아니라 이상한 대화였기 때문이다. 울리케는 감히 용에게 말한다. "저는 제가 식용에 적합하다는 근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신에 식은땀이 축축했고, 얼굴도 창백히 질려 있었지만 울리케는 까무러칠 것 같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용과 침착하게 대화를 시작한다. 이게 대체 무슨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설득과 이해가 가능한 판타지 세계라니, 우리는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놀라운 서사 속으로 시작부터 빠져들고 만다. 사슴을 능숙하게 발라내고, 자신을 한 끼 식사로 처리하려는 용을 상대로 화려한 언변으로 협상을 시도하는 공주와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는 대신 인간의 이야기를 듣고, 인간과의 대화를 통해 원하는 바를 얻으려는 드래곤이라니.. 그야말로 놀라운 상상력의 끝판왕이 아닐 수 없다.

 

 

너무 기가 막혀 잠에서 깨버린 울리케는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용의 음성이 귓가에 아직도 생생하였다. 그들은 허락을 구할 줄 모른다 -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새삼 자랑할 줄도 모른다 - 원래 그냥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숱하게 용사한다 - 가장 강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즈음에서야, 울리케는 어떤 호의를 갖고 있건 간에 이 용이 결코 만만치 않은 대화상대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p.358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에서 최장기간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인기작이 종이책으로 출간되었다. 이번에 1권과 2권이 출간되었고, 시리즈는 8권으로 완간 예정이라 이야기는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3, 4권이 2020년 초 출간될 예정이라 출간된 책의 이후 내용이 궁금하다면 브릿G에서 온라인 연재로 다음 이야기를 미리 만나보아도 좋을 것 같다. 이영도, 하지은을 잇는 한국 정통 판타지 문학의 귀환을 알린 작품이라는 평가를 듣는데, 바로 그러한 판타지의 전형을 깨트리는 인물과 서사가 매우 인상적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판타지 소설들이 전쟁을 주요 무대로 하거나, 분쟁의 해결 방안이 전투인 것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전투 대신 대화를 통해 '교섭'을 한다. 그리고 그 '교섭'이라는 장면의 대화들이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큭큭대는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고, 기발함에 혀를 내두르기도 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사실 '용에게 잡혀간 공주'라는 모티브는 신화에서부터 현대 판타지까지 단골 등장 소재이다. 흉포하고 절대적인 악 ''과 구원받아야 할 '공주', 그리고 용을 물리칠 '기사'. 그러나 이 작품에서 공주를 구하는 기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먹잇감으로 잡혀왔음에도 당당히 용과 입씨름을 하는 소녀 울리케와, 속내를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인간 세상을 바라보는 용이 등장한다. 특히 도입부의 90여 매에 이르는 용과 울리케의 먹히고 먹는 자의 '음식'에 관한 흥미로운 토론은 특히 백미이다. 이야기의 서두부터 낯선 전개에 당황스러웠지만, 페이지를 넘길 수록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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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양사전 -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잘난 척 인문학
김대웅 엮음 / 노마드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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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방향지향성과 기억력은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경우와 그것에 대처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게 했다.... 따라서 여성들은 준비성, 조심성, 다양성 등에서 남자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아내가 사소한 것까지 지적하는 것이 목표지향적인 남편들에게는 부질없는 잔소리로 들리지만, 따지고 보면 거의 모두 남자들의 생존에 꼭 필요한 조언과 충고인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목표지향적인 남편은 무용지물일까?   p.66

우리는 정보와 지식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을 비롯한 온라인 매체, 각종 매스컴 등이 온갖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쏟아놓고 있는데.. 그 중에서 나에게 꼭 필요한 것, 내가 알고 싶은 지식은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 책은 그런 독자들의 아쉬움을 해소시켜주기 위해 기획되었다.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갖가지 담론들과 알아두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지식들이 가득한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다.

인류의 진화에서 시작해, 유전자와 진화론을 거쳐 남자의 폭력과 여자의 잔소리, 평균수명, 결혼제도, 후손에 이르는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민주주의와 극단주의, 한민족, 유대인, 외계 생명체, 유령, 귀신 등의 실체에 관한 정보도 재미있었고, 인간의 본성과 트라우마, 결정장애, 인간성과 기억 등 심리학 적인 요소들에 대한 이야기도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문명, 세대, 현대사회의 키워드 등 사회적인 변화에 관한 이슈도 다루고 있으며, 그 속에서 미투와 불평등을 거쳐 정치적인 문제도 놓치지 않고 있다. 유전자, 유전공학과 우생학, 영아살해, 위약효과와 비만 등에 관련된 과학 정보도 어렵지 않으면서 새로운 정보로서 활용할 수 있을 만한 지식들이라 도움이 될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최근에도 이른바 '재판 거래'가 큰 이슈가 되고 있지 않은가? 사법부가 정권의 요구에 따라 재판을 한없이 미루고, 부당한 요구에 맞춰 판결을 내린 사례들이 문제가 된 것이다. 흔히 말하는 사법농단이다. 사법부가 목표하는 준법, 정의, 평등, 공평이 한때나마 모두 무력해진 것이다. 또한 뚜렷한 확증 없이 정황증거만으로 법적 판단을 내리는 경우도 매우 많다.   p.324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시리즈 신간은 바로 '문화교양사전'이다. 그 동안 영어, 우리말,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상식들을 다루어 왔는데, 교양, 상식이라는 점에서는 이번 신간이 가장 보편적으로 도움이 되어줄 만한 지식들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이 시리즈는 인문학적 교양을 필요로 하는 청소년과 일반인들에게사전답지 않은 사전, 사전 이상의 사전'으로서 역할도 충분히 하고 있어 매우 흥미진진하다. 국내외의 다양한 문헌을 근거자료로 하여 백과사전에서 제공하지 않는 풍부한 상식과 정보를 담고 있어 전혀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는 점도 장점이다. 기존에 영어잡학사전과 우리말 어원사전을 읽었었는데, 시대와 교감할 수 있는 온갖 지식들이 펼쳐지는 책이라 두고 두고 필요할 때마다 찾아서 읽고 싶은 책이었다.

억지로 암기하는 지식이 아니라 연상 작용을 통해 기억하게 되는 살아 있는 교과서가 필요한 학생들, 그리고 직장인들을 비롯해 내가 아는 상식보다 한 걸음 더 깊은 지식이 필요한 많은 분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각각의 테마에 맞게 역사적 배경과 의미 등을 읽으면서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 책을 읽는 데 크게 시간이 필요하거나, 이해하는데 노력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저 재미있게 읽으면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상식과 교양으로 고스란히 자신의 지식이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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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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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교회에 간다는 걸 아는 사람은 몇 명 안 돼요."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럼 당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걸 말해봐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팅커는 진지했다.

"아무도 모르는 것?" 내가 말했다.

"딱 하나면 돼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약속해요."

그는 자기 말을 증명하려는 듯이 심장 앞에서 성호를 그었다.    p.76

1966, 케이트와 밸 부부는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한다. 1930년대 말에 뉴욕 지하철에서 몰래카메라로 찍은 인물사진들을 전시하는 자리였다. 남자, 여자, 젊은이, 노인, 말쑥한 사람, 칠칠치 못한 사람.. 사진 속 사람들의 얼굴들은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을 포착하고 있었다. 사진 속의 많은 이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의 자아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공황이 시작됐을 때 열여섯 살이었던 케이트는 당시의 시대 풍경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진을 보다 30년의 세월과 만남의 협곡을 건너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얼굴을 발견한다. 팅커 그레이의 미소를 다시 보게 되면서, 케이트의 마음은 1937년의 뉴욕으로 돌아간다.

미국 중서부 출신의 놀랄 만한 미인인 이브는 케이트의 하숙집 룸메이트였다. 이브와 케이트는 신년 전야에 클럽에서 굉장한 미남에 값비싼 외투를 입고, 상냥하면서도 정중한 말투를 쓰는 신사 팅커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팅커와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 맨해튼 사교계에 발을 들이게 되는데, 함께 영화를 보고, 재즈 음악을 즐기고, 술을 마시고, 토론을 하며 서로에게 이끌린다. 비서로 일하는 케이트는 점심시간에 우연히 팅커를 만나 커피를 한잔 하게 되고, 그 일은 이브의 질투를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그들 셋에겐 아직 사랑보다 우정이 더 중요한 시기였고, 그들은 즐거운 분위기에서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고 나와서 함께 차에 탔던 세 사람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팅커와 케이트는 무사했지만 이브는 얼굴을 심하게 다쳐 여러 번 재건수술을 받게 되는 처지가 된다. 운전을 했던 팅커는 자책감에 이브의 삶을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퇴원하는 그녀를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간다. 성공을 위해 조지 워싱턴의품위의 규칙을 성실히 따르던 남자, 팅커의 충동적인 결정으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이제는 누가 누구의 것이고, 극장에서 누가 누구 옆에 앉을 것인지를 따질 수 없어져 버렸으니 말이다.

 

인생은 여행보다는 허니문 브리지와 더 가깝다. 20대 때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 그래서 뚜렷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수많은 꿈을 좇다가 다시 방향을 바꿔도 시간이 충분할 것처럼 보인다. 게임을 하면서 카드를 하나 뽑으면 그 카드를 그냥 갖고 다음 카드를 버릴 건지, 아니면 먼저 뽑은 카드를 버리고 그 다음 카드를 가질 건지 곧바로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탁자 위에는 우리가 뽑을 수 있는 카드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방금 내린 결정들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우리 인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p.517

에이모 토울스의 눈부신 데뷔작 <우아한 연인>이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2013년에 국내 출간되었을 당시에 읽고는 완전히 사랑에 빠졌던 작품이기도 하다. 새롭게 현대문학에서 출간되면서 <모스크바의 신사>와 같은 느낌의 디자인으로 새 옷을 입었는데, 너무도 우아하고, 아름답다. 에이미 토울스는 한 작품의 완성에 4년의 집필과 1년의 독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4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발표한 데뷔작 <우아한 연인> 2011년 작이고, 두 번째 작품인 <모스크바의 신사> 2016년 작이다. 그러니 지금 집필 중인 195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아마도 2020년 이후에나 만나게 될 것이다. 그의 신작을 기다리는 동안, 절판되어 구할 수 없었던 그의 데뷔작을 만나 보자. 그리고 지금 책 구매 시 영어 원문이 포함된 젊은 조지 워싱턴의 <Rules of Civility> 미니북을 받을 수 있다. <우아한 연인>의 남자 주인공 팅커가 성공을 위해 조지 워싱턴의품위의 규칙을 성실히 따르던 인물이기 때문에, 미니북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게다가 이 작품의 원제인품위의 규칙(Rules of Civility)’ 또한 조지 워싱턴의 '사교와 토론에서 갖추어야 할 예의 및 품위 있는 행동 규칙'에서 가져온 것이니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민자의 딸이자 노동 계층인 케이티와 할리우드 드림을 꿈꿨던 이브, 그리고 젊고 유망한 은행가 팅커, 이들 세 사람의 운명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와 팅거의 충동적인 결정으로 인해 완전히 달라진다.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등장하지만, 흔해빠진 삼각관계나 애정관계 없이 세 인물의 관계가 담백하게 진행되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중심 서사만 따지자면 언뜻 전형적인 구성으로 보이지만, 사실 줄거리 요약만으로는 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극 중 팅커는 오래 전 케이트가 무인도에 난파할 때 소로의 월든을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그 책을 읽기 시작한다. 케이트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를 만나 월든을 여러 번 읽은 흔적을 발견한다. 나 역시 6년 전에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월든을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케이트가 엄청난 책벌레였기 때문에 이 작품은 곳곳에서 고전 문학들을 배경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이브에게 헤밍웨이를 읽어 주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힘든 시기를 겪으며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들을 통해 위로 받기도 하는 등, 중요한 장면마다 배경에는 항상 고전 문학 작품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극 초반, 점심시간에 우연히 마주친 케이트와 팅거가 나누었던 대화는 한 번이라도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면 가슴을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팅거는 케이트에게 묻는다. "당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걸 말해봐요." 그리고 이들 세 사람의 운명이 폭풍 같은 격랑에 휩쓸리고 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두 사람. 이번에는 케이트가 팅거에게 묻는다. "당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사실 하나만 얘기해줘요." ,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이 작품을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만들어 준다. 아직까지 이 장면의 페이지까지 이르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나는 이 장면을 가슴이 시리도록 매우 사랑한다. 완벽하게 재현된 1930년대의 뉴욕을 배경으로 섬세하고, 우아하고, 아름답게 그려진 이들의 이야기를 꼭 만나 보길. 당신도 이 작품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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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가 우는 섬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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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인간은 원초적으로 이야기를 갈망해요. 기승전결 구조가 인간의 본성인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죠. 이야기가 품은 메시지는 공감과 위안을 줘요. 그래서.... 역사는 잊히더라도 이야기는 남아요!"

진정란이 아련한 표정으로 마지막 말에 강조점을 붙였다.

"그렇죠! 그러니까 내 말은 리얼리티보다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리얼리티는 이야기를 받쳐주는 속성이 되어야지 그걸 우선의 가치로 두면 안 된단 말입니다. 역사소설에서 독자들이 기대해야 하는 것은....."     p.126

바람이 세차게 불고, 현재 태풍이 북상 중이라는 예보가 들려오는 통영항에는 풍랑주의보로 모든 노선의 운항을 중단한다는 안내가 뜬다. 그렇게 바다 상태가 험한 와중에 외딴섬 호죽도로 향하는 배 한 척이 출항한다. 8명의 사람들이 오픈을 앞둔 연수원의 모니터원으로 초대를 받은 것이다. 좋은 대나무가 자라는 섬이라는 호죽도, 그곳에 돔 형태의 독특한 구조를 한 최신식 연수 시설이 들어섰다. 건물주인 정명선은 각각의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내어, 이들을 연수원 모니터링 행사에 초대한다. 그렇게 모이게 된 8명은 서로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로, 나이도, 직업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이들은 물리학과 대학생인 임하랑, 요즘 가장 핫한 젊은 여가수 나리, 역사소설 작가인 최혁봉, 영화 프로듀서인 신만수, 웹툰 작가인 이윤동, 무역회사에 다니며 민담을 수집하는 블로거 진정란, 택시운전을 하는 노인 조동욱, 시사주간지 기자 공치수로 연령대도 이십대 초반, 30대 후반, 40대 초반 등 다양했다. 소박한 섬과는 어울리지 않게 현대적인 외형의 연수원에 도착한 이들은 전시대 유리관 위에 놓인 대나무 상자 속에 있던 모형 안구때문에 모두들 깜짝 놀란다. 그리고 그것이 <바늘 상자 속에 넣어둔 눈알>이라는 민담이 호죽도에서 변형되어 전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깥에는 점점 세찬 비바람이 몰아쳤고, 바람에 휩쓸리는 대나무 숲은 서럽고 음산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착한 첫날 밤 그들은 술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만찬을 꽤 늦게까지 즐기고 각자의 방에서 잠이 든다. 다음 날, 연수원 안에서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살해된 시체가 발견된다. 게다가 하루 전까지 통화가 되었던 건물주는 연락 두절이고, 태풍으로 고립된 섬에는 젊은 경찰 한 명뿐이다.

 

말도 끝내지 못하고 임하랑은 생각에 파묻혔다. 다양하게 흩어진 사실들이 하나의 가설 아래 모이고 있었다. 상위의 가설과 하위의 가설이 가지를 뻗으며 서로 연결됐다. 사실들이 몽글몽글 무리지어 모였다.

'어떻게' ''가 동일한 맥락에서 비슷한 비중의 가치 싸움을 했다. '어떻게'가 인지적인 문제라면 ''는 심리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둘은 다르지 않았다.   p.281

대나무 가득한 섬에서 전해지는 불길한 민담, 그리고 폭풍우로 고립된 섬에서 벌어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의 살인 사건, 그리고 사건의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대학생. 송시우 작가의 전작들과는 달리 트릭과 수수께끼 풀이에 집중한 본격 미스터리라 더욱 흥미롭게 읽었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이 고립된 환경에서 죽어 나가는 클로즈드 서클의 배경으로 본경 미스터리의 클리셰인 태풍이 치는 섬을 선택해 아주 기본적인 형식을 구축했다. 거기에 살인의 분위기를 고조시킬 서양의 마더구스 같은 동요나 동화를 찾다가 우리나라 민담 중에 <바늘 상자 속에 넣어둔 눈알>이라는 이야기를 만난다. 그리고 민담에 나오는 대나무라는 소재에 착안해 '민담을 모티브로 고립된 섬에서 대나무를 이용하여 벌어지는 살인사건'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냈다.

검은숲독서클럽 4주차 도서로 만나게 된 작품이다. 송시우 작가의 작품들이 그래왔듯이 이번 신작 역시 가독성이 매우 뛰어나고, 탄탄한 구성력을 바탕으로 잘 짜인 미스터리를 보여주고 있다. 전 출간작이 영상화가 확정된 작가답게, 이번 작품 역시 곧 바로 영상화시켜도 무리가 없을 만큼 매력적인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추리소설의 고전적인 기법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전혀 뻔하지 않은 트릭과 군더더기 없는 속도감으로 지루할 틈이 없는 작품이었다. 오랜 시간 구전되어온 기괴한 민담이 자아내는 불안이 고립된 섬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과 결합되어 오싹함을 자아내고, 물리학과 대학생이라는 색다른 탐정 캐릭터 또한 독특한 매력을 보여주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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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버리기 기술 - 엉망진창인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는 힘
마크 맨슨 지음, 한재호 옮김 / 갤리온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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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난 우리 모두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고 믿어. 우연의 일치 같은 건 없어. 모든 사람이 중요한 건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야. 그리고 설령 우리가 한 사람만 도울 수 있다고 해도, 그건 여전히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야. 안 그래?'

이야, 진짜 귀여운데! 그건 당신의 희망 사항이다. 그건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가치 있게 만들려고 당신 마음이 지어낸 이야기다.    p.30~31

<신경 끄기의 기술>로 전 세계 800만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던 마크 맨슨의 최신작이다. 전작에서 "애쓰지 마, 노력하지 마, 신경 쓰지 마."라며 자기계발서의 패러다임을 뒤집는 이야기를 했던 그가 이번에는희망 버리기라는 도발적인 주제로 돌아왔다. 역사적으로 절대적이라 믿은 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이제 기술의 진보로 개선할 고통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세상을 살지만, 수많은 사람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희망의 부재와 목표의 상실, 이 책은 이러한 모든 것이 일어나는 이유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진짜 희망이 무엇인지 찾고자 한다.

물고기에게 물이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필수 조건이듯 인간의 정신은 생존하기 위해 희망을 필요로 한다. 현재보다 미래가 나아지리라는 희망, 삶이 어떻게든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없다면 왜 살아가겠는가, 왜 뭔가를 하겠는가. 희망은 우리가 자신보다 대단하다고 믿는 대상이다. 우리는 희망이 없다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우울증과 불안을 겪고 방황하는 이러한 시대에 지속 가능한 희망은 무엇인가.  저자는 말한다. 희망하지 말라. 그리고 절망하지도 말라. 더 나은 것을 희망하지 말고, 그냥 더 나아지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희망 이후의 세상을 희망하고' 있다.

 

왜냐하면 희망은 전염성이 있기 때문이다. 희망이 세상을 구한다.

판도라의 상자에 관한 해석 중 덜 알려진 것이 여기 있다. 희망이 그저 또 다른 형태의 악이라면? 희망은 필레츠키의 영웅적 행위에만 영감을 준 게 아니기 때문이다. 희망은 공산주의 혁명과 나치의 집단 학살에도 영감을 줬다. 히틀러는 진화적으로 우월한 인류를 만들기 위해 유대인을 몰살하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지난 100년 동안 서구 자본주의 사회가 저지른 잔혹 행위의 대부분이 희망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됐다.    p.178~179

판도라의 상자 신화에 관한 해석은 다양하다. 가장 흔한 해석은 신이 우리를 세상의 모든 악으로 벌했지만, 그 악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인 희망도 줬다는 것이다. 그 말은 즉, 모든 상황이 엉망이 될수록 우리는 희망을 더 많이 동원해야 하고, 충분한 희망을 모으면 누구나 악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크 맨슨은 그러한 희망에 대해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희망은 생명을 살릴 수도, 앗아 갈 수도 있으며, 우리를 고무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희망에도 건전한 희망과 해로운 희망이 있으니, 희망을 믿거나, 그것에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논리대로 이야기를 따라 가다 보면 결국 희망이 파괴적이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사실 이는 자기계발서에서 저자가 독자에게 할법한 말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마크 맨슨은 무한 긍정만을 강요하던 기존의 자기계발서들과는 달리 믿고 노력하는 것만으로 인생이 특별해지거나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었다. 그는 이번 신작에서도 여전히 통쾌한 직언과 유머로 독자들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희망을 버려, 행복을 찾지 마, 고통을 선택해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리얼리스트가 되는 법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엉망진창인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길 원한다면, 지금보다 나은 삶을 꿈꾸고 있다면, 희망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필요하다면, 마크 맨슨이 당신을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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