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 이야기 세트 - 전4권
김은성 지음 / 애니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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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엄마들은 종종 딸에게 말한다. 나처럼 살지 말라고. 또 엄마들은 종종 쓸쓸하게 체념하듯 중얼거린다. 이것도 다 내 팔자지. 그리고 엄마들은 삶이 유난히 고단하고 팍팍한 날이면 또 말한다. 엄마는 괜찮다고.

 

올해로 일흔 둘이 되신 나의 엄마는 가족들이 모두 뜯어 말리는 결혼을 했다고 한다. 아빠는 엄마보다 나이가 열 여섯 살 많았고, 이혼 후 딸 둘을 키우고 있었다. 게다가 오랜 시간 직업 군인으로 일을 하신 탓에 다정다감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셨고, 명문대를 졸업하시고 남다른 프라이드가 있었던 분이라 비슷한 수준이 아니면 좀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엄마는 사람 좋아하고, 이웃이든 친지든 뭔가 퍼주는 걸 즐겨 했고, 남편의 강압적이고 까다로운 성격을 다 받아주면서도 절대 기죽지 않고 할말 다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죽고 못사는 사랑에 빠져 결혼한 것도 아니었고, 선을 보고 의례적인 몇 번의 만남 후 결혼을 한 것이니 그 이후의 시간들은 커다란 반전 없이 누구나 예상할 법한 스토리로 이어진다. 남아선호사상이 뿌리 깊게 남아 있던 시절이라 아들을 낳지 못한 며느리는 구박덩어리였고, 덩달아 딸이라는 이유로 나와 내 동생도 할머니의 눈치만 보며 단 한 번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

엄마는 대체 그런 결혼을 왜 했던 것일까. 한때 황혼 이혼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도 있었는데, 엄마는 아빠가 먼저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 곁에 계셨다. 대체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제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바보 같았고, 미련했던 엄마의 삶에 여전히 화가 난다. 가끔 엄마가 지난 시절을 후회하는 투로 말을 하거나, 당시의 선택이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말을 꺼내면, 나는 더 듣지도 않고 말했다. 어쨌든 엄마가 선택한 거니까, 그건 엄마가 책임져야지. 엄마 인생이니까. 생각해 보면 나는 늘 이런 딸이었다. 엄마가 여자로, 아내로, 사람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려고 할 때면 차가워졌다. 엄마의 슬픔, 엄마의 서러움, 엄마의 회한 이런 것들을 감당하기가 무서워 선을 긋고, 뒤 돌아섰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나는 이렇게 나이를 먹고도 왜 여전히 이렇게 철부지 딸인 걸까.

 

리뷰를 쓰면서 책의 내용과 상관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로 왜 이렇게 긴 서두를 시작했느냐 하면,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엄마의 이야기게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은 것이 너무도 미안했기 때문이다. 엄마의 인생을 조금 더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고, 속상했다. 바로 김은성 작가의 만화 <내 어머니 이야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렇지 않을까. 이 책을 읽고 나면 나의 엄마가 생각나고, 엄마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엄마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좋은 책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계속 독자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책 속 이야기를 통해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이 책의 이야기가 끝이 난 뒤에도, 끊임없이 우리 엄마도 거쳐 왔을 한국의 근 현대 백 년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힘들었던 그 시절을, 여자로, 아내로, 며느리로, 엄마로 살아온 나의 엄마를 생각한다.

 

새집에 다시 고양이가 살기 시작한 것처럼 엄마와 나도 다시 힘을 내서 살아보기로 했다. 이제 엄마는 엄마 일, 나는 내 일을 하면 된다. 엄마는 1927년생으로 80년의 삶을 되짚어보고 있고, 나는 그런 엄마를 만화로 그리기 시작했다. 엄마의 고향은 물장수로 유명한 함경남도 북청이다.

 

마흔에 처음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딸이 꼬박 십 년을 바쳐 그린 어머니의 삶이 바로 전 4권으로 된 만화 <내 어머니 이야기>이다. 저자는 십 년에 걸쳐 어머니의 이야기를 녹취하여 이 만화를 그렸는데, 모든 대사와 내레이션에 구술자인 어머니의 입말을 최대한 살렸다고 한다. 저자의 사십대와 어머니의 팔십대가 오롯하게 담긴 이 책은 사실 절판된 지 3년 만에 이번에 재출간이 되었다. 김영하 작가가 알뜰신잡이라는 방송에서 사라지지 말아야 하는 책으로 강력 추천한 덕분이다. 방송의 힘은 참 대단한 것이, 이렇게 사라진 책을 복간하기도 하고, 나온 지 한참 된 구간을 몇 천부씩 증쇄하게 만들기도 하고, 출간되었을 때는 거의 빛을 보지 못했던 책을 갑작스레 베스트셀러로 만들기도 한다. 나 역시 책을 많이 읽는다고 자부하는 독자였지만, 만화까지 챙겨보는 편은 아니었던 터라 김영하 작가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작품이 세상에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새삼 감사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놀라운 작품이 절판되어 세상에서 묻힌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손실이겠는가.

이 책은 일제 강점기의 함경도 북청을 배경으로, 당시의 생활상과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야기이다. 어머니의 유년 시절부터 시작해 원치 않은 혼인과 소소한 집안사 등이 이어지고, 6.25전쟁으로 인해 피난민 시절을 거쳐 70년대 말 서울에 올라온 뒤의 가족사가 현재 대학생이 된 딸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지극히 평범한 개인의 삶 전체를 그리고 있기에, 엄청나게 극적인 사건이나, 화려한 클라이막스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갈등 관계나 놀라운 전개를 보여주는 스토리는 아니다. 하지만 투박한 그림체와 구수하고 맛깔나는 사투리로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한 명 한 명, 개개인의 소소한 일상들이 모여서 거대한 역사가 된다는 것을 놀랍도록 재미있게 들려 주고 있다. 교과서에나 봤던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읽어도, 생생하게 와 닿고 실재한 삶으로 체험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야기였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견디고 살아내 우리를 키워 낸 세상 모든 엄마들의 이야기가 이 책 속에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910년대에서 시작해, 40년대, 50년대를 거쳐 7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는 우리의 역사 중 가장 격동의 시기를 통과하는 매우 평범한 한 여성의 생애를 그리고 있으니 말이다. 김영하 작가가 말한 것처럼, 세상에는 사라져서는 안 되는 책들이 있다. 이러한 책을 만나게 해 준 작가님의 추천이 눈물 나게 고마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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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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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썩썩썩 비는 소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수화기를 힘없이 놓았다. 그리고 한숨지었다.

나는 왜 낭만을 찾는답시고 간직하고 있는 낭만이나마 하나하나 조각 내려 드는 것일까? 이 낭만이 귀한 시대에.   p.71

나는 장미여대 시절 장미의 여왕으로 뽑힌 적이 있을 만큼 용모가 뛰어난 재원이었다. 당연히 따르는 총각들도 많았었고, 그들 중 지금의 남편을 선택해서 풍파 없이 살아왔다. 후회는 없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간사해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세월이 꽤 흐른 어느 날, 나는 그 시절 열렬한 추종자 중에 화가 지망생의 이름을 화랑에서 발견한다. 하게 된다. 마음만 먹었다면 나는 그의 아내가 될 수도 있었지만, 가난한 화가를 남편감으로 생각하기엔 너무나 상식적인 보통 여자였다. 그랬던 그가 화가로서 대성을 해서 꿈을 이룬 모습을 보니, 감동인지 질투인지 모를 착잡한 감정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래서 화랑으로 들어가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자신만만하고 편안한 얼굴로 담소를 즐기고 있는 그에게 차마 다가가지 못한다. 음식 테이블로 가서 이것 저것 배불리 먹고는, 흘금흘금 곁눈질을 해가며 가족들에게 줄 먹을 거리들을 주머니와 핸드백에 넣고는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나온다.

화랑에 가서는 그림을 한 점도 보지 않고, 포식만 하고 나온 나의 일상은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 이 작품은 '마른 꽃잎의 추억'이라는 타이틀로 네 편이나 시리즈로 연재되었던 이야기이다. 화랑을 나온 뒤 그녀는 오래 전 자신을 열렬하게 추종하던 총각들을 찾아 보기로 한다. 고생고생해서 내 집을 장만하고 나니 여유는 있어졌지만, 설렘은 고사하고 몸과 마음이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공허했던 것이다. 과연 그들은 현재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낭만적인 이 스토리는 뻔할 것 같지만 상투적이지 않았고, 큭큭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유쾌한 기분으로 이어지다 짧지만 강한 여운을 남기며 마무리된다. 이 작품을 비롯해서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모두 소소한 우리네 이웃의 일상들을 그리고 있는데, 하나같이 재미있었고, 공감되었고, 흥미로웠고, 뭉클했다. 정말 오랜 만에 만나는 박완서 작가의 작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게다가  실제로 수십 년 전에 쓰여진 이야기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다시'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하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야기들이었다.

 

 

이런 부부 싸움은 엿듣기가 잘못이다. 곧 우리 집으로 옮아 붙는다. 옮아 붙은 싸움은 옆집과 똑같은 경위를 밟는다.

이 아파트에 사는 남자란 남자는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머저리인지. 태어나길 그렇게 머저리로 태어났을 리도 없고 암만해도 이 아파트의 터가 센가 보다.   p.157

() 박완서 작가가 처음이자 유일하게 펴낸 짧은 소설집으로 70년대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한 48편의 짧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책이다. 오래 전에 나왔던 책인데, 이번에 박완서 작가의 8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소설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들려주는 짧은 소설집 <멜랑콜리 해피엔딩>과 함께 예쁜 옷으로 갈아 입고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당시 문예지나 교양지가 아니라 대기업 사보에 실렸던 콩트이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물론 70년대의 산물이기에 그 수십 년의 세월에서 오는 세대 차이라던가, 삶의 풍경들은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맛깔나는 표현과 유머, 기막힌 위트들로 인해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는 우리네 인생의 모습들로 느껴지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작가는 '70년대에 썼다는 걸 누구나 알아주기 바란 것은, 바늘 구멍으로 내다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멀리, 적어도 이삼십 년은 앞을 내다보았다고 으스대고 싶은 치기 때문이라는 걸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70년대의 개발과 발전을 외치던 당시 사회상과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을 알지 못하는 나 같은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타임슬립이라도 한 듯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집의 풍경은 다른 듯하면서도 모두 비슷하지 않은가. 우리가 잃어 버린, 혹은 잊어 버리고 사는 그 시절에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이야기들이 모두 따뜻하고, 애틋하고, 정겹게 느껴졌다. 박완서 선생님은 어떤 시시한 일상적 소재로도 삶의 진수를 뽑은 이야기의 진수성찬을 차려낸다는 권지예 작가의 말처럼, 그야말로 탁월한 이야기꾼다운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이는 박완서 작가의 작품이 언제까지고 읽힐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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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 해피엔딩
강화길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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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원에 일곱 장하는 돈가스는가정의 평화라는 성찬식 풍경을 완성하며 저녁 식사로 준비될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미움을 감춘 채, 가엾고 무해한 자기 딸의 평화에 금이 가지 않도록 고기를 질겅질겅 씹을 것이다. 이것이 비극보다 오래가는 시트콤의 힘이...........문장의 주어가 어느새 ''에서 '그들'이라는 삼인칭으로 바뀌어 있다. 그녀는 오늘의 메모를 글로 옮길 준비가 다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우스꽝스러움을, 유치함을, 자신을 포함한 통속의 세계를 용서한다, 용서한다.   -김성중 '등신, 안심' 중에서, p.53

박완서 작가의 8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소설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들려주는 짧은 소설집이다. 41년의 문학 생활에 걸쳐 늘 관심을 두었던,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소설가 29명이 저마다의 시선으로 읽고 써낸 결과물은 그 자체로 그저 뭉클하다. 단편 소설보다도 짧은 소설인 '콩트'라는 형식 때문에 매우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나갈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분량이 짧다는 것은 서사보다는 대개 인생의 한 장면을 예리하게 포착해서 그리는 것이므로, 그야말로 부담 없이 페이지가 술술 넘어 간다.

결혼할 남자를 오로지 순간적인 사랑으로만, 낭만 100퍼센트의 요소로 선택했기에 신혼이 가시기도 전에 싸우기 시작한 부부의 이야기는 애처로운 화해로 끝난다. 등심과 안심을 '등신과 안심'으로 잘못 메모한 아내로 인해서. 그와 나는 둘도 없는 상등신들이고 우리는 화해가 이루어져 안심하고 있구나, 이것은 등신들이 안심하는 이야기구나, 라고 아내는 생각한다. 피식 웃음이 나오는 장면이지만, 아마도 '비극보다 오래가는 시트콤의 힘'으로 오늘도 남편과, 아내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숱한 사람들은 뜨끔할 지도 모르겠다. 김성중 작가의 '등신, 안심'이라는 작품의 이야기였다. 계약직 채용 심사에서 옛 연인에게 반대표를 행사하는 교수의 이야기, 분실물을 찾기 위해 탐정을 방문한 의뢰인이 어쩌다 보니 탐정의 잔심부름만 하게 되는 이야기, 안경을 잃어버린 난시의 주인공이 거래처 사람과 계약을 하며, 카페에서 점원에게 질문을 하며 자신처럼 안경을 잃어 버려 아주 가까운 거리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맞닥뜨리게 되는 이야기 등등... 짧은 분량에 전혀 구애 받지 않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마음이란 얼마나 허약한지. 한 몸으로 여러 개의 역할을 하며 살아내야 하는 처지도 같고, 능력만큼 대접받지 못하는 것도, 언제나 시간이 부족해 발을 구르는 것도 똑같은데. 너의 과거가 내 현재이고, 내 현재가 다시 너의 미래가 될 수도 있으며, 그런 서로에게 굳은 의리를 느끼는 것도 사실인데. 그런데 끝없이 서로의 현재를 비교하고 다른 점을 찾아내려 한다. 너의 행복을 나의 불행으로, 너무도 쉽게 치환해 버린다. 나보다 즐거운 너를 견딜 수가, 거리를 둘 수가, 없다. 지혜는 슬기에게서 부정하고 싶은 자신의 과거만을 보느라 지금 빛나는 그 애의 모습을 보지 못한 자신이 끔찍했다.   -윤이형, '여성의 신비' 중에서, p.170~171

무엇보다 이 소설집이 중요한 것은 박완서 작가가 우리 곁을 떠난 지 8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그가 남겨준 문학의 유산을 기리는 이들이 많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강화길 작가는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할 때면 늘 박완서 선생님을 떠올린다고 말한다. 그녀의 작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계속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위로가 된다고 말이다. 백민석 작가는 대학 시절 여자 동기들이 항상 박완서 선생의 책을 끼고 다녔다고 추억한다. 윤이형 작가는 박완서 선생이 여성에게 삶의 매 순간이 투쟁임을, 문학이 순응이나 타협이 아니라 격렬한 싸움임을 평생 온몸으로 체현하며 살았던 사람이라고 경외심을 품는다. 임현 작가는 결코 쉽게 쓰일 수 없는 문장들이 쉽게 읽힐 때, 어떤 배려 깊은 다정함도 함께 읽게 된다고 말하며, 한유주 작가는 그녀의 작품에 대해 정밀한 관찰로 삶에 대한 부감을 획득하는 소설의 교본이라고 말한다. 이 소설집은 이렇게 후배 작가들이 선배의 문학 정신에 대해 존경과 애정으로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답신 같은 글들이기도 하다.

백수린 작가의 '언제나 해피엔딩' 속 주인공 민주는 스무 살 이후 자신이 살았던 삶이란 꿈꾸어왔던 것들을 조금씩 하향 조절하는 날들의 연속이라고 느낀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꿈을 잊어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극중 민주는 자신은 절대 늙어서 저렇게 되지 않겠다고, 그렇게 될까 두려운 사람의 전형이라고 생각한 박 선생에게 무심코 자신의 불안한 속내를 내비친다. 이 시기만 지나면 불안한 마음은 괜찮아지냐고. 박선생은 말한다. 엔딩이 어떻든 언제나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 다음엔 다 괜찮아진다고. 영화관에서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끝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다만 여기, 지금의 온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제목 그대로멜랑콜리해피엔딩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 스물 아홉 편의 짧은 이야기들 속에 담긴 생의 순간들을 통해 내 삶을 다시 한번 돌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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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노멀 - 역경을 인생의 기회로 바꾼 우리 이웃의 슈퍼맨들
멕 제이 지음, 김진주 옮김 / 와이즈베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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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탄력성이 좋은 아이들에게는 자기 나름의 인생 서막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내가 태어난 곳은"이라는 서두로 시작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크립톤 행성을 떠나야 했던 슈퍼맨이나 거미에게 물린 스파이더맨처럼 아이들을 절박하고도 용감한 삶의 여정으로 이끄는 사건이나 상황이 발생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너무나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서 그 사건 이후로는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고 삶이 어딘가 망가져 버린 느낌을 받게 된다.   p.44

 

이 책은 '역경을 인생의 기회로 바꾼 우리 이웃의 슈퍼맨들'이라는 부제처럼 불가항력적인 역경과 실패를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인 멕 제이는 임상심리학자이자 교육자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20년 가까이 들어 왔고, 그러한 실제 상담 사례를 제시하면서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회복탄력성'을 일깨워 주고자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회복탄력성'이란 무엇인가. 회복탄력성이란 시련이나 트라우마, 비극적인 사건 또는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요인 앞에서도 잘 적응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심각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예상 밖의 능력이자 중대한 시련을 딛고도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에 소개되고 있는 이들은 자기 스스로를 회복탄력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분명 자기가 처한 상황에 적응을 잘 해냈고 여러 사람의 예상보다 더 유능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유는 회복탄력성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단순한 표현들과 통속적인 정의들이 이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알려주는 개인과 공인의 사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회복탄력성에 대한 개념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이 대목에서도 여러 슈퍼노멀은 슈퍼히어로와 닮은꼴을 보인다. 슈퍼히어로는 악당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하지만 대개 홀로 집으로 돌아온다. 슈퍼맨은 고층 건물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지만 자신과 로이스 레인과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클라크 켄트 사이의 삼각관계는 뛰어넘지 못한다. 원더우먼에게는 진실의 올가미가 있지만 슈퍼맨과 마찬가지로 스티브 트레버와 자신의 평상시 자아인 다이애나 프린스 사이의 삼각 구도 안에 갇혀 자기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다. 배트맨은 수많은 연인을 거치지만 끊임없이 사랑에 실패한다.   p.426

 

이 책에서 저자는 실제 상담 사례들을 비롯해 스포츠 스타인 안드레 애거시, 팝아트 예술가 앤디 워홀, 미국 유명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세계적인 힙합 뮤지션 제이 지 등의 유명인들의 일화도 함께 소개하면서 슈퍼노멀들의 성공 전략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평범함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뜻의슈퍼노멀(supernormal)' 이라는 단어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슈퍼히어로처럼 어딘가 현실성이 없는, 어떤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슈퍼노멀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잇는 매우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우리 주변에도 슈퍼맨처럼 크나큰 시련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개척한슈퍼노멀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유년기에 겪게 되는 시련은 평생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부모 혹은 어른들에게 성적 학대, 정서적 학대 내지는 가정 폭력을 경험한 경우도 있었고, 알코올중독자 부모를 둔 아이도 있었고,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형제자매 때문에 불행한 유년기를 보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실제 상담 사례들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어린 시절의 시련과 상처를 딛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곳까지 기어코 날아오른다. 하지만 과거에 경험한 시련의 기억이나 심적 고통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으며,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슈퍼노멀들은 이러한 고통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고, 부딪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일까. 최악의 상황을 인생의 기회로 삼은슈퍼노멀들의 성공 전략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TED 명강사이자 심리전문가 멕 제이가 제안하는 미래를 설계하는 힘은 당신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슈퍼노멀'을 만날 수 있게 해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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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산문집
김소연 지음 / 마음의숲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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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을 선물로 받는 게 더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꽃이라든가, 초콜릿이라든가, 연필 같은 것. 남지 않는 것들. 그걸 영영 간직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되는 것들. 그런 선물이라야 주고받는 마음이 홀가분했다. 사물에 사연이 쌓여가서 추억이 사물보다 더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는 풍경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그 시절의 나는 여렸던 것임이 틀림없다. 실은 선물에 대한 부담이라기보다 나 자신의 여림에 대한 불만 쪽에 더 가까운 심사였을 것이다.   p.22

<마음 사전> <한글자 사전>으로 마음을 이루는 낱말 하나하나를 자신만의 시적 언어로 정의했던 김소연 시인의 신작 신문집이다. 시인은 기존의 산문집과 다르게 경험한 것들만 쓰겠다는 다짐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상을 자세히, 섬세한 시선으로 적어보고자 시작했고 오직 직접 만났거나 겪었던 일들만을 글로 옮겼다고 하니 더 기대가 되었다. 생각하는 바와 주장하는 바가 아닌, 다만 실제로 경험한 일들만을 글로 쓰는 산문집은 어떤 느낌일까.

 

'나를 뺀 세상의 전부'라는 의미심장한 제목부터 마음에 와 닿았던 책이다. 시인은 '나를 뺀 세상의 전부, 내가 만난 모든 접촉면이 내가 받은 영향이며, 나의 입장이자 나의 사유'라고 말했다. 누구나 타인과 관계를 맺어 가면서 살 수 밖에 없고,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씩 변화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에 따라 성향도 달라지고, 취미와 생활 환경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환경이 달라지는 것에도 우리는 영향을 받고, 소소한 일상의 작은 것 하나도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모르는 동네의 골목을 구석구석 누빌 때 내가 누구인지를 잠깐 잊고 있었다. 얼마나 바빴는지, 당장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안중에 없었다. 매일, 하릴없이 산책이나 하면서 들꽃이나 꺾으면서 빵이나 사먹으면서, 길거리에서 서성이면서 살아왔던 것만 같았다. 집에 돌아와 유리병에 수돗물을 담아 쑥부쟁이를 꽂았다. 비좁은 마음속에 자그마한 자리가 생겨났다.   p.195

 

함께 시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서 온 문자 한 통, 지인의 개인전 오프닝 행사에서 만난 다섯 살 아이의 말 한마디, 소설을 읽고, 시를 읽으며 소개하는 문장과 단상, 친구와 나누던 꿈 얘기, 압력밥솥에서 밥이 익기를 기다리며 들리는 소리,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 어린 시절 비밀기지였던 다락방에 대한 추억 등등... 소소하다면 소소하고, 특별하다면 특별할 수도 있지만, 누구의 일상에서나 쉽게 마주칠 법한 시인의 하루하루가 이어진다. 단어에 대한 예민하고 특별한 감각이 있는 저자라서 그런지, 문장들이 하나하나 콕콕 가슴에 와서 박힌다. 갈수록 개인주의가 너무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리는 삭막한 세상에서, 누군가와 더불어 산다는 것에 대한 사유가 뭉클하고, 따뜻했다.

모든 글들이 다 좋았지만, 특히나 와 닿았던 것은 저자가 읽는 책들에 대한 사유였다. 소설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러하겠지만, 완벽하게 일상의 삶을 잊어 버리고 잠시 나마 허구의 세상에서 살 수 있다는 점이 독서의 목적이자 가치일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잠자코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의 심연에 불쑥 물컹한 손을 집어넣었다가 뺀다.' 라고. 그렇게 '소설을 읽는다는 자의식을 놓고, 그냥 그 세계에 들어가 잠시 동안 무언가가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인물이 되면서' 소설을 읽었다고. 그리하여 '잠에서 깨어난 듯 책을 덮고 났을 때에 나를 둘러싼 방 한 칸이 낯설어질 만큼 그 세계에서 살다 나온다'라고 말이다.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행간의 여백에 담겨 있는 무엇까지 완벽하게 김소연 시인만이 쓸 수 있는 표현과 정서로 빼곡한 페이지들이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살아가므로 완성되어간다'는 문장을 호흡 하나까지 모두 이해하고 싶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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