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길을 잃었어 I LOVE 그림책
조쉬 펑크 지음, 스티비 루이스 그림, 마술연필 옮김 / 보물창고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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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전체가 잠들어 있는 어느 새벽, 고요한 맨해튼의 도서관 앞에서 돌사자 용기가 잠에서 깨어난다. 용기는 짝꿍인 인내에게 인사를 건네지만, 인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인내는 매일 밤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도서관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아침이 되기 전에 돌아오지 않은 적이 없었던 인내였기에 용기는 걱정이 된다. 그래서 한 번도 주춧돌 위의 자기 자리를 떠나본 적이 없었던 용기였지만, 인내를 찾기 위해 도서관 안으로 뛰어 들어가게 된다.

크고 웅장한 도서관 안으로 처음 들어와 본 용기는 코끼리 열두 마리만큼 높은 천장과 물소 열 마리만큼 넓은 공간이 완전히 새로운 세상처럼 느껴진다. 용기는 도서관 내부를 이리 저리 구경하며 미로와도 같은 방들을 헤매고 다닌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방들을 지나가야 인내를 만날 수 있는 것일까. 용기는 모리스 센닥과 신시아 라일런트와 제인 욜런과 제리 핑크니와 주디 블룸의 책 사이를 지나다닌다. 그때 옆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온다. 과연 용기는 무사히 인내를 만날 수 있을까.

이 책은 뉴욕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자 세계 5대 도서관으로 꼽히는 뉴욕 맨해튼에 자리한뉴욕공공도서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림책의 주인공인 돌사자 '인내' '용기'는 실제로 5번가 입구의 뉴욕공공도서관 건물 앞을 지키고 있다.

도서관을 누비는 용기와 함께 우리는 애스터 홀, 로스 메인 열람실, 에드나 반스 살로몬 룸 등 뉴욕공공도서관 안의 여러 명소들을 실감나게 방문해볼 수 있다. 뉴욕공공도서관은 3개의 중앙 도서관과 크고 작은 80여 개의 지점 도서관들로 이루어져 있어 그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데, 이 그림책을 통해서 잠시나마 곳곳을 가볼 수 있어서 특별한 경험을 안겨 준다.

 

사실 뉴욕공공도서관은 여행을 간다면 필수 코스로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갈 정도로 유명한 장소이기도 하다. 맨해튼 한복판에 마치 궁궐처럼 버티고 서 있는 건물은 매우 웅장하고, 아름답기도 한 곳이니 말이다. 게다가 도서관 내에는 3 800만 점이 넘는 도서와 소장품들이 무려 120km에 달하는 책꽂이에 진열되어 있다. 셰익스피어의 첫 작품집, 제퍼슨의 독립 선언문 자필 원고 등 희귀본도 다수 소장하고 있는 곳이라 더욱 가치 있는 장소이다. 개인적으로는 넓은 천장과 아치형 창문이 중세의 성을 연상시키는 중후한 분위기의 3층 열람실에 있는 긴 테이블에서 책을 읽어 봤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있었는데, 이 그림책을 통해서 잠시나마 뉴욕으로 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도 들었다.

도서관만큼 길을 잃기에 좋은 장소도 없을 것이다. 나도 어린 시절 도서관에 갔을 때 미로처럼 빼곡한 서가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도서관이라는 장소는 길을 잃고 헤매고 다녀야만 생각지도 못했던 책을 발견하는 깜짝 선물을 안겨주는 곳이기도 하다. 극중 용기와 인내처럼 아무도 없는 한밤의 도서관이라면 정말 멋질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읽어도 좋고, 어른들이 읽기에도 너무 따뜻하고 매혹적인 그림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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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의 인문학 - 천천히 걸으며 떠나는 유럽 예술 기행
문갑식 지음, 이서현 사진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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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세기말 불꽃처럼 등장한 이들의 주요 무대는 어디였을까? 바로 살롱과 카페다. 빈이라는 도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커피라는 단어와 무척 밀접하게 느껴진다. 빈의 카페를 누비고 다녔던 수필가 알프레트 폴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카페란 혼자이고 싶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 동시에 옆자리에 벗이 있어야 하는 곳이다.” 이처럼 예술가와 지식인에게 살롱과 카페는 자유롭게 작품을 구상하고, 자신의 이념과 가치를 설파하며, 서로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p.53~54

사진작가인 아내와 함께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문갑식 기자, 그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매번 여행하는 곳과 관련 있는 예술가와 작품을 찾아본다고 한다. , 소설, 그림, 조각, 음악 등 우리가 걸작이나 명작이라 부르는 작품을 한껏 감상하고 여행지로 떠나면, 단지 눈에 보이는 그 공간의 현재뿐 아니라 과거까지 여행할 수 있다고 한다. 마치 카페 센트럴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프로이트, 폴가, 츠바이크, 로스가 한자리에 모여 열을 내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유럽 여행을 떠나는 이들을 위해 르네상스부터 현대에 이르는 위대한 예술가 15인의 삶과 예술을 펼쳐놓으며, 그들이 살았던 생생한 삶의 현장까지 소개하고 있다. 클림트, 모차르트, 랭보, 단테…, 그리고 카사노바까지 흥미진진한뒷이야기로 만나는 예술가들의 맨얼굴을 만나 보자. 평범해 보이던 장소도 예술이라는안경을 쓰면 완전히 다르게 보이곤 경험을 할 수 있다.

 

그의 진짜 직업을 둘러싼 논쟁 못지않게 재미있는 것이 존 르카레라는 이름이다. 그는 가명을 쓰는 스파이의 특성상 실명으로 책을 출판할 수 없었고, 상관이 책을 읽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책을 가명으로 내더라도 인세를 받는 것이 문제였는데, 그는 고민 끝에 이런 방법을 썼다. 은행에 입금된 인세를 바로 찾지 않고, 예금액이 일정 액수에 도달하면 연락을 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작품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공전의 히트를 치며 베스트셀러가 되자, 마침내 은행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 전화를 받은 이후 그는 기분 좋게 사표를 던졌다고 하니, 그야말로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법한 로망을 실현한 인물이라 하겠다.    p.268~269

개인적으로는 안개 자욱한 스파이와 판타지의 세계를 산책하는 '영국'편이 흥미로웠다. <나니아 연대기>를 탄생시킨 C.S.루이스의 옥스포드, 그리고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의 존 르카레, <자칼의 날>의 프레더릭 포사이드의 런던이다. C.S.루이스와 J.R.R.톨킨이 돈독한 우정을 쌓았고, 서로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와 <나니아 연대기>가 띠고 있는 기독교적인 색채에 대한 배경 이야기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하드보일드 작품들을 좋아하고 즐겨 읽었던 독자로서 존 르카레와 포사이드의 작품과 그 배경에 대한 이야기 또한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을 여행하는 가장 매력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바로 산책하듯 여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관찰하며 걷는 것, 충분히 시간을 들여 곳곳을 살펴보고 그 곳에 숨겨진 이야기에 세심하게 귀 기울이는 산책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보티첼리와 단테의 피렌체, 클림트의 빈, 랭보의 샤를빌 메지에르, 고흐의 생 레미 드 프로방스 등 곳곳에 남아 있는 예술가들의 흔적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 덧 유럽이 가깝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유럽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도 들 것이다. 예술 기행 혹은 문학 기행이라고 해서 여행을 통해서 직접 체험하는 인문학 서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 한 곳에 앉아 있으면서도 우리는 책을 통해 세계를 여행한다. 이 책도 여행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들을 통해 더 깊게 여행하는 방법, 더 감각적으로 산책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으니 훌륭한 유럽 예술 여행 가이드가 되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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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늘에서 떨어졌을 때 - 삶, 용기 그리고 밀림에서 내가 배운 것들
율리아네 쾨프케 지음, 김효정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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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이후로 나와 다른 이들이 품은 가장 큰 의문은 3킬로미터 가까운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내가 어떻게 경미한 상처만 입고 살아남을 수 있었나 하는 점이었다. 비록 한참 후에는 의식을 되찾은 순간에 감지한 것보다 부상이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추락의 심각성을 감안하면 내 상처는 대수롭지 않은 수준이었다. 쇄골을 제외하면 부러진 데가 없었고 피부에 입은 상처도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기적이었을까? 아니면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이유가 있을까?   p.118~119

1971 12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열일곱 살 소녀 율리아네 쾨프케는 엄마와 함께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푸카이파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로 겨우 1시간 거리였고, 오전에 이륙한 비행기의 처음 30분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륙 20분 후 샌드위치와 음료로 구성된 간단한 아침식사가 나왔고, 10분 뒤에는 승무원들이 식사 뒷정리를 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승객들은 저마다 한껏 들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행기가 폭풍전선을 만났다. 조종사는 뇌우를 피하지 않고 지옥의 먹구름 속으로 똑바로 돌진했고, 환한 대낮이 밤처럼 어두워졌다. 사방에서 끊임없이 번개가 내려쳤고, 열린 짐칸에서 머리 위로 물건들이 쏟아져 내리고, 물건들이 날아다녔고,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울부짖었다. 그렇게 급속하게 비행기는 추락했고, 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기적처럼 단 한 명만 빼고는 말이다.

율리아네 쾨프케는 3000미터 상공에서 페루의 다우림으로 추락했지만,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했다. 인적이 없는 깊은 밀림 속에서, 쇄골이 부러지고 다리에 찢어진 상처를 입은 채 깨어난 그녀는 극적으로 구조될 때까지 무려 11일간 홀로 사투를 벌이고 살아남는다. 무려 3킬로미터 가까운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어떻게 경미한 상처만 입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도 신기한 일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었다면 기적은 딱 거기까지였을지도 모른다. 밀림을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다우림은 살벌하기만 한 곳일 테니 말이다. 그곳은 온갖 생명이 들끓는 곳이지만 인적은 찾아 볼 수 없고, 질척대는 습기와 각양각색의 곤충들과 악어와 뱀, 왕대머리수리 등 목숨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요소들이 차고 넘치는 곳이다. 율리아네 쾨프케의 부모님은 동물학자였고, 어려서부터 많은 것들을 경험해왔으며, 실제로 밀림에 들어가 살아본 적도 있었다. 당연히 야생 생활에도 익숙했고, 수많은 곤충과 동물들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정말 영화 같은 생존 실화가 아닐 수 없다.

 

"이 주위에 딱정벌레, 개미, 풍뎅이, 진드기 같은 생물이 몇 마리나 기어다니고 날아다니는지 알아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한테 무슨 소용이 있죠?" 나는 종종 이런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연구를 통해 잘 알게 된 대상만 제대로 보호할 수 있습니다. 숲과 생물다양성을 눈앞의 이익을 위해 파괴하는 것보다 보존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유익하고 가치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될 겁니다."    p.246

비행기 추락사고에서 홀로 살아남은 열일곱 소녀는 이제 쉰여섯이 되었다. 그녀를 유일한 생존자로 만든 그날의 추락 사고는 그녀의 나머지 인생 전체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그녀의 삶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지금의 자리에 이르게 했다. 그녀가 떨어졌던 팡구아나 밀림이 일생을 걸고 지켜야 할 삶의 목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사고 이후 무분별한 개발에 맞서 페루 밀림을 보호하기 위해 동물학자로서 평생 헌신해왔다. 유명한 동물학자인 부모님을 두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전 세계의 생물다양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따라야 할 행동 규칙들을 숙지하며 밀림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덕에 기적처럼 추락 사고 후에 생존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녀의 인생 행로가 정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민가에서 한참 떨어진 열대 우림 한가운데서 11일 동안 헤매는 일을 아마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견뎌내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은 1971년 비행기 사고가 일어난 지 꼭 40년 만인, 2011년에 독일과 미국에서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다. 물론 그 동안 수많은 곳에서 출간 제의를 받았지만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독일의 거장 영화감독 베르네 헤어조크를 만나 그와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희망의 날개>라는 다큐멘터리를 찍게 되면서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왕좌의 게임>에 출연한 소피 터너가 영화화 판권을 사들여 조만간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엄마를 잃은 슬픔과 홀로 살아남았다는 자책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 한 여성의 성장기이자, 무분별한 개발에 맞서 페루 밀림을 보호하기 위해 헌신한 한 동물학자의 분투기는 놀라울 정도로 감동적이다. 실화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드라마틱한 스토리라서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한 작품이기도 하다. 기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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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병 - 인생은 내 맘대로 안 됐지만 투병은 내 맘대로
윤지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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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고 나서 좋은 점은

생각지도 못한 소중한 이들이

내 옆에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p.180

그림책 작가 윤지회, 어제까지 두 돌도 안 된 아들과 씨름하며 겨우 어린이집에 보내고 그사이에 정신 없이 일하며 저녁 반찬을 걱정했던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위암 4기라는 믿을 수 없는 선고를 받게 된다. 위암 4기 환자의 5년 이상 생존율은 7%, 그 말은 그녀가 5년 안에 죽을 확률이 93%라는 말이다. 대부분 항암 치료를 받다 악화되거나 수술을 해도 재발, 전이로 고통 받다 죽는다고 한다. 이 책은 윤지회 작가가 '위암 4' 선고를 받은 날부터의 기록을 그림과 글로 엮어 낸 그림 일기이다.

 

위암 투병기라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이거나 감정의 저 밑바닥까지 내려간 구질구질한 서글픔을 예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상큼 발랄한 표지 색상과 일러스트가 의미하듯이, 이 책은 온갖 항암 치료와 약으로 육신이 너덜너덜해진 순간에도 소소한 기쁨과 행복, 그리고 희망과 웃음을 잃어 버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고통이나 슬픔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래서 신파나 멜로 드라마를 그다지 즐겨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프지만 사랑스럽고, 슬프지만 씩씩해서 참 좋았다.

 

모두들 각자의 어려움을 안고 산다.

때로는 정말 지치고 힘들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

조금씩 변하고 자라는

내 모습을 마주한다.    p.372

병원 나이 38 2개월, 두 돌 아기 엄마이자 무뚝뚝한 남편의 아내, 그림책에 그림을 그리고 무민 캐릭터와 SF 영화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책 이야기를 즐겨 하고, 아이를 재우고 웹툰을 보면서 피로를 풀고, 무서운 영화는 절대 못 보고 동물 학대와 장보기를 싫어하는, 그저 평범한 일상을 누리던 여자 사람. 하지만 지금은 8차 항암 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항암 약만으로 치료를 받으며이제 좀 살만 하다.’를 느낄 새도 없이, 발병 1 6개월 만에 암이 다시 난소로 전이되어 다시 수술을 받고, 표적 항암 치료를 받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되었건 ‘1년 안에 재발할 확률 80%’를 무사히 지나왔으며, 아이는 이제 말을 배우기 시작한 네 살 꼬마가 되었다. 여전히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그녀는 살아 있다.

계획한 대로 펼쳐지는 인생은 없고,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간이라고들 하지만, 이 책은 작가가 온몸으로 겪은 그 빗나감의 기록이기도 하다.

 

항암 치료 중에도아기는 나중에 가져요.’라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의사, 난데없이 푸시킨의 <>을 이야기하며 수줍게 마음을 고백하는갱상도 사나이아버지, 무뚝뚝한 걸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남편이지만 요동하지 않는뚝심력으로 묘한 위로를 선사하는 남편, 놀이터를 제 방 뛰놀 듯 천방지방 뛰다가도 이내 꽃잎 한 장을 주워 엄마 손에 꼬옥 쥐어 줄 줄 아는 아이, 이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녀의 투병기를 우울하고 칙칙한 색깔이 아닌 화사하고 따뜻한 색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불만이 쌓이고, 짜증이 나고, 화가 날 때 그녀처럼 되뇌어 보자.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데 뭘, 그냥 넘기자' 라고. 그렇게 예전보다 아주 조금은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그녀의 이야기에 마음이 울컥해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나의 일상을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사기병이라는 제목은 '내 인생에 사기 같은 병, 위암사기병'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거짓말 같은 상황에 처할 때 이렇게 소리치고 싶어 진다. "이건 사기야! 말도 안 돼!"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현실이고, 오늘을 버티고 살아내야 할 조건이다. 작가의 이야기는 매일매일 누리는 일상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고,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책을 읽자마자 윤지회 작가님의 SNS를 찾아가 팔로우를 했다. 작가님이 1년을 무사히 살아 왔고,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오늘도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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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초
T. M. 로건 지음, 천화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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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은 세 가지였다.

72시간 안에 이름 하나를 말해야 한다.

거절하면, 제안은 사라질 것이다. 영원히.

받아들이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선택을 번복할 수도 없다.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놓을 것이 거의 확실한 거래.

악마와의 거래였다.  p.11

<리얼 라이즈>에 이은 T. M. 로건의 두 번째 작품은 내에서도 뜨거운 화두인직장 내 괴롭힘성희롱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쩌면 당신에게도 벌어졌을, 언젠가 나도 겪었을 심각한 사회적 현상을 다루고 있어 묵직한 이야기지만, 시종일관 긴장감 넘치는 플롯과 예측할 수 없는 반전으로 인해 매우 속도감 있게 읽히는 작품이다. 전작에서 현대인의 삶에 뿌리 깊이 침투해 있는 SNS와 그 역기능에 대해 공감하고 있을 사람들의 심리를 건드려 공포심을 극대화시켰던 T. M. 로건은 사회적 불의 속에서 평범하고, 힘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통쾌한 메시지를 던져 준다. 놀라운 데뷔작만큼이나 흥미롭고, 매혹적인 작품이다.

, 누군가 당신을 위해서 대신 복수를 해주겠다고 제안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내게 이름 하나만 주시오. 감쪽같이 사라지게 해주지, 이 세상에서 영원히.” 누군가 당신을 위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대상을 사라져버리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모든 것을 뒤바꾸는 '29'의 결정, 제목인 29초는 그 돌이킬 수 없는 찰나의 선택을 의미한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제안을 받게 된 세라가 그것을 수락할지 말지 결정하는 그 순간. 상사인 러브록 교수에게 매일같이 각종 괴롭힘과 협박에 시달리고 있었던 세라는 과연 그 제안을 수락할 것인가. 그리고 러브록의 이름을 그에게 넘겨줄 것인가. 

 

인생에는 단 세 가지의 선택지가 있단다, 세라.

달아나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고

절차를, 제도의 힘을 믿을 수도 있다.

아니면 맞서 싸울 수도 있어.

세라는 맞서 싸우는 쪽을 택했다. 설령 그것이 상대와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비열하게 싸우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p.476~477

대학 시간강사인 세라는 승진심사를 앞두고 있었다. 이는 자신을 괴롭히고 성적인 압박을 가해오는 상사 러브록 교수의 행태를 더 참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인사권을 가지고 있었고, 공식적으로는 TV 출연 유명 교수에다 매력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러브록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거부 의사를 표하지만, 그는 전혀 거리낌없이 계속 그녀에게 추근대는 행동을 한다. 급기야 승진여부가 결정되는 날, 러브록은 세라를 승진 심사에서 탈락시키기로 했다며, 다시 승진 대상에 이름을 올리고 싶다면 학과에 대한 헌신을 자신에게 보여달라고 대놓고 요구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러브록의 행태를 참아낼 수 없었던 세라는 좌절감과 굴욕감에 치를 떨며 분노에 휩싸인다. 내년을 기약하며 승진을 포기해야 할지, 인사부에 그를 고발하고 이의를 제기해야 할지 고민하지만 어느 쪽으로도 결정할 수가 없다.

그때,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우연히 교통 사고 현장을 목격하고, 어린 소녀를 도와주게 된 대가로 일생일대의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인볼코프에게서누구든 원하는 사람 한 명을 없애주겠다.’는 제안을 듣게 된 것이다. 누구든 마치 존재한 적도 없는 것처럼 지구상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게 만들어 주겠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어떨까. 자신의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고, 잡혀서 처벌받을 일도 없고, 결과에 대한 책임 없이 뭔가를 할 수 있는 평생 한 번 있을 기회였다. 게다가 하필 세라에게는 미칠 듯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자신의 커리어를 가로막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제안을 받자마자 세라의 머릿속에는 단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른다. “누구나 벌을 내리고 싶은 사람이 한 명쯤은 있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주 조금의 정의라도 더 맛보길 원하는 거죠.” 그의 말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 누구든, ‘없애고 싶은이름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든, 내 앞길을 방해하는 사람이든, 혹은 사회 정의를 위해 사라지는 게 나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든 말이다. 이 작품은 사회적 약자인 자신을 보호해줄 제도적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가운데, 선택의 기로에 선 세라의 행동을 통해서 무언의 희망을 보여준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이야기는 예상과 전혀 다르게 펼쳐지고, 평범한 여성인 세라가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제대로 복수를 해내는 모습이 너무도 통쾌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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