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총총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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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보, 자식을 키운다는 게 뭘까."

남편이 캄파리 소다를 한 모금 마셨다. "이거, 신기한 맛이네."

남편의 이런 점이 좋았다. 어설피 눈치 빠른 소리를 해줬다면 팽팽히 당겨진 실이 뚝 끊겼을 것이다.

"자식을 키운다는 것......" 잊어버렸을 때쯤에야 남편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에 가슴속에 빨간 거품이 뽀그르르 피어 올랐다.   p.85

열아홉 나이에 밤업소에 들어온 사키코는 서른하나지만 스물다섯인 것으로 일을 하는 중이다. 쉽게 남자에게 홀딱 반하고, 또 쉽게 헤어지고, 버림받고, 이제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하면서도 또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는다. 어머니에게 중학교 1학년인 딸을 맡겨두고 거의 신경도 안 썼는데, 통화하다 방학이라는 말에 놀러 오라고 말을 건넨다. 2년 만에 얼굴을 보는 딸은 사키코가 상상한 것보다 훌쩍 커 있었다. 완전히 어른스러워진 지하루에게 브래지어도 사주고, 주말에 함께 동물원도 가지만, 사키코의 관심은 딸이 아니라 여전히 남자다. 업소에 손님으로 와서 사교 댄스를 가르쳐 주곤 하는 야마씨와 사랑에 빠지지만 물론 끝이 좋을 리 없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사랑의 허상만을 쫓으며 사는 사키코의 딸, 쓰카모토 지하루이다. 하지만 아홉 편의 연작 단편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 지하루의 시점은 없다. 엄마인 사키코의 시점으로 진행된 첫 번째 이야기에서 열세살의 나이로 등장한 지하루는 할머니와 함께 사는 본가의 이웃 아줌마인 이쿠코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열여섯이다. 그리고 댄서로 취직을 하는 스무살, 슈퍼에서 배달 일을 하는 스물 두 살을 거쳐 서른여덟, 마흔 넷의 나이로 각각의 이야기 속에서 배경처럼 등장한다. 그러니까 지하루라는 여자의 인생을 그녀가 관계를 맺었거나, 스쳐 지나갔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때그때 여자와 관계를 맺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치 야스노리가 알고 있는 사람처럼 상으로 나타나고 언어와 함께 흘러나왔다. 문득 깨달은 것은 여자가 모든 일을 지극히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같은 건 거의 말하지 않았다. 그런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닌가, 하고 미심쩍을 만큼 그녀는 담담히 자신의 과거를 풀어놓았다.   p.292

사쿠라기 시노는 "시점이 없는 한 사람의 인간, 쓰카모토 지하루라는 여자의 반생이 서서히 드러나는 이야기로 만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삼대에 걸친 여성들, 어머니 사키코, 딸 지하루, 그리고 그 딸아이 야야코가 서로 전혀 관계를 맺는 일 없이 홋카이도의 각자의 땅에서 살아갑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각각의 완성된 이야기 아홉 편을 한데 모았을 때 원을 그리며 하나로 연결되며 정리가 되는 작품이 만들어졌다. 사쿠라기 시노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 지하루의 생각이나 감정 같은 것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녀를 아는 주변 인물들의 말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엄마도 딸도 자진해서 한사코 내리막길로 굴러 떨어지는 이상한 성품이라든가, 남자에게 이 정도쯤이라면, 하고 넘보게 하는 어떤 종류의 허술함이 있었다든가, 가느다란 몸에 비해 젖가슴이 유난히 불룩하고 상냥한 구석이 전혀 없다든가, 결코 청결하다고는 하기 어려운 모습에 어딘가 아둔한 분위기가 감돌았다든가 하는 식이다.

사쿠라기 시노를 '신 관능파 성애문학의 대표 작가라고 하는데, 확실히 그녀의 작품들은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처럼 읽힌다. 줄거리만 보자면 이 무슨 막장 드라마냐 싶은 이야기인데,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치열한 애증과 욕망이 그려져 있다. 살면서 좀처럼 '감정'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여자의 삶은 극단적으로 불행할 것처럼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마냥 어둡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부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삶에서 결코 부정적이지 않은 무언가를 포착해내는 것 같다고 할까. 일그러졌어도, 너무 슬퍼도, 고통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더라도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간다. 밤하늘에 가득한 별들, 모두 저마다의 자리에서 반짝거린다. 몇몇은 흘러가고, 그리고 몇몇은 사라진다. 사라진 별에도 한창 빛나던 날들이 있었다. 우리 역시 밤하늘에 깜빡이는 이름도 없는 별들이었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들의 삶 역시 하나하나의 별처럼 빛이 나는 것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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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나 읽을걸 - 고전 속에 박제된 그녀들과 너무나 주관적인 수다를 떠는 시간
유즈키 아사코 지음, 박제이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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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깊숙이 스르륵 스며드는 문장, 인간의 본질을 찌른다기보다는 싹둑 잘라내는 것만 같은 노련함. 무코다 구니코의 글을 읽고 나면 왠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포근함이 밀려든다. 드라마도 물론 훌륭하지만 그녀의 단편소설은 활자를 음미하는 즐거움을 응축해놓은 듯한 ''이 있다. <옆집 여자>는 내가 몹시도 좋아하는 구도, '전혀 딴판인 두 여성'을 그린 소설이다. 가슴속 설렘을 잊은 지 오래인 이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작품이다.    p.83

유즈키 아사코의 앗코짱 시리즈나 <서점의 다이아나>, <나일 퍼치의 여자들> 등을 재미있게 읽었었다.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그리고 여성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필력에 완전 반해서 읽는 내내 마치 연애를 하는 것처럼 마음이 설레이는 경험이었다. 그래서 유즈키 아사코가 그려내는 여자들의 삶에 관해 아기자기하고 따스한 이야기들을 좋아하는데, 이번에 만나게 된 신작은 고전 독서 에세이라고 해서 더 기대가 되었다. 그녀는 매체에서 에세이 연재 의뢰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어릴 적 즐겨보던 <세계명작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고 말한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잘 모를 만큼 오래, 꾸준히, 날마다 같은 느낌으로 제목만큼은 누구라도 아는 고전 명작을 읽어나가는 연재를 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어릴 적에 읽었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읽기를 미루었지만 읽고 싶었던 세계 고전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다시 읽어내며 글을 쓴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여타의 다른 독서 에세이, 고전 읽기에 관한 글과는 차별화된 부분은 바로 고전 속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에 주목하는 책 읽기라는 점일 것이다. 기 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에밀 졸라의 <나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캐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등등 누구나 누구나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고전, 그 중에서도 여성 캐릭터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내가 서양 고전소설을 좋아하는 한 가지 이유는 등장인물의지나침때문이다. 화가 나면 상대방에게 장장 한 페이지에 걸쳐 할 말, 못 할 말 마구 퍼붓지 않나, 충격을 받으면 갑자기 기절해버리지 않나, 실연을 당하면 병으로 쓰러지지 않나, 하인에게 닥치는 대로 화풀이를 하지 않나, 욕심이나 증오 같은 감정을 몇 년이고 끈질기게 질질 끌지 않나. 생각해보면 지금보다 수명도 훨씬 짧았고 오락이나 선택지가 적었던 시대라 감정만이 유일한 이정표니, 민폐를 끼치더라도 그들은 그들 나름으로 마음 가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p.218

유즈키 아사코는 고전 속 여성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학창 시절의 같은 반 친구 같다고 말한다. <위험한 관계<의 세실과 <보바리 부인>의 에마, 그리고 <여자의 일생>의 잔. 늘 가슴 한 켠에 걸려 있다가 문득 그녀들이 저지른 실수가 떠올라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때로는 그녀들의 결단에 용기도 얻는다고. 그들의 삶을 그리고 있는 문장들을 읽으며 그녀는 자신보다 오래 세상을 산 친구에게 잔혹한 진실을 들은 듯 명치끝이 묵직해진다고 한다. 여자들의 관계를 작품 속에서 많이 그려왔던 그녀는 사실 '여자들의 관계는 질척거려서 무섭다'라는 선입견과 맞서 싸운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쓰고 있다고 한다. 그 동안 여성 캐릭터 창조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온 작가라는 평가를 들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누구보다 여주인공들에게 이야기하듯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작가라서, 그녀들의 장점도 단점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는 영미권, 유럽권 작품들과 더불어 일본 작가들의 작품도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다. 사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작품들 대부분은 전부 읽지는 않았더라도 어느 정도 아는 작가의 작품인 경우가 많은데, 일본 작가들의 작품은 몰랐던 작품들도 있어 좋은 정보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리요시 사와코의 <악녀에 대하여>, 다나베 세이코의 <대답은 내일>, 모리 마리의 <달콤한 꿀의 방>,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 등 국내에도 많이 소개되었던 작가들의 작품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들도 많아 고전 읽기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가 되어 줄 것 같다. 유즈키 아사코의 소설들이 그러했듯이, 이 작품 역시 고전 따위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친근하고, 쉽고, 공감되는 글들이 많았다. 우리가 알고 있지만, 사실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던 고전 작품 속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유즈키 아사코의 애틋하고 살뜰하며 다정한 고전 읽기를 통해 어느 새 당신도 고전 속 여주인공들이 친구처럼 느껴질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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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너는 노땡큐 - 세상에 대들 용기 없는 사람이 뒤돌아 날리는 메롱
이윤용 지음 / 수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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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이 돼서, 라는 말로 남의 사생활에 쑥 끼어드는 사람들.

걱정이 돼서, 라는 말로 남의 상처에 소금 뿌리는 사람들.

걱정이 돼서, 라는 말로 심란한 속을 더 뒤집어놓는 사람들.

나는 이제네가 걱정이 돼서라는 핑계로 나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을 거부하려 한다.     p.20

우리는 매일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간다. 회사에서, 집에서, 마트에서, 공원에서, 그리고 온라인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 나도 모르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럴 때 소심해서 세상에 대들 용기도 없고, 억울해도 잘 따지지 못하는 성격을 가진 이들을 위한 팁 같은 게 있다면 좋을 것 같다. 함부로 내 인생을 흔드는 사람에게 이제 너는 노땡큐! 라고 한마디 날리기도 하고, 헤어지길 다행이지 싶었던 전남친의 연락에 쿨하게 나 좀 삭제해줄래? 라고 미련 없이 답문을 보내기도 하고 말이다.

이 책은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 [친한 친구] [2시의 데이트] [박준형, 정경미의 2시 만세] 20년 동안 작가로 일해온 이윤용의 세 번째 에세이이다. 저자는 말한다. 소심해서 세상에 지를 용기 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상처 준 사람들을 향한 내 감정을 아무도 모르게 삭제해버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생각을 버릴 수 있도록 연습시켜주는 자기계발서나, 자신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조련하도록 방법을 제시하는 훈련서는 아니라고. 그저 앞에서는 아무 말 못해도 뒤돌아 혀를 내미는 메롱 같은 거라고. 그렇게 작은 메롱과 꼬물거림으로 자신의 감정을 보호하며 살고 싶다는 저자의 말에, 책을 읽기도 전 서문부터 마음이 활짝 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어깨가 뭉쳐 물리치료를 받을 때, 제가 물었죠.

"제가 뭘 잘못했길래 이렇게 근육이 놀랐을까요?"

그때 물리치료사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열심히 사느라 그랬겠죠. 잘못은요, ."    p.109

오랜 만에 연락 온 친구가 돈 좀 있냐고, 몇 백만 빌려줄 수 있냐고 묻는다. 돈이 없어서 미안하다는 저자에게, 넌 혼자 사는 애가 그 돈도 없냐며 오히려 타박을 하는 친구. 순간,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저자는 미안하다고 얘길 했다. 그리고 6개월쯤 지났을 때 그녀에게 또 돈 좀 있냐고 연락이 온다. 그런데 솔직하게 돈이 없다고 하면 또 뭐라고 할지 걱정이 되어 돈이 없는 이유를 만들고 있었던 거다. 생전 연락 한번 없다가 불쑥 문자로 돈을 꿔달라는 친구. 돈이 없다고 하면 오히려 타박하는 그녀에게 왜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것인가. '나보다 내 돈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이런 친구' 삭제해도 된다는 것이 바로 이 책에서 알려주는 '인생에 독이 되는 관계, 타인에게 쉽게 상처 주는 사람 티 안 나게 정리하는 법'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부지런할 필요는 없다. 나의 타고난 게으름은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쉬는 날 하루 종일 빈둥거려도 자책하지 않고, 약속 시간에 늦을까 봐 뜀박질하는 자신을 손가락질 하지 않는 뻔뻔함에는 삭제 대신 저장 버튼을 눌러본다. 아무리 각박해도 유머만은 평생 잃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긍정모드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그녀처럼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을 체에 한번 걸러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이 된 사람과 감정들을 삭제하고, 힘이 된 사람과 그 마음들을 보관함에 담아두는 거다. 마음의 휴지통을 비우고, 한결 단단해진 기분으로 내일을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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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 짓다 - 듣는 순간 갖고 싶게 만드는 브랜드 언어의 힘
민은정 지음 / 리더스북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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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는 존재 이유가 있다. 존재 이유가 불명확하면 도태되고, 결국은 소멸된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업이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진정성 있게, 그러면서도 남다르게 자사 브랜드에 담아내는 것이다.   p.131

카누, 티오피, 오피러스, 서울스퀘어, 뮤지엄 산, 평창동계올림픽 슬로건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브랜드의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 책은 귀에 꽂히는 그 이름들이 만들어지게 된 과정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고 있다. 25년간 수많은 히트 브랜드를 탄생시킨 국내 최고 브랜드 네이밍 전문가 민은정의 첫 책이다. 브랜드 이름, 슬로건, 콘셉트, 스토리 등 브랜드를 구성하는 모든 언어 콘텐츠를 다루는 전문가를브랜드 버벌리스트(Brand Verbalist)’라고 한다. 가장 뛰어난 브랜드 버벌리스트로 손꼽히는 민은정 인터브랜드 전무는 지난 25년간 다양한 기업과 500개가 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브랜드에 이름을 붙이고 숨을 불어넣는 일을 해왔다. 저자가 직접 진행했던 32가지 브랜드 사례를 통해 대중에게 사랑받고 오래도록 살아남는 브랜드 언어 전략을 들려주고 있어 마케터, 기획자, 브랜드 담당자들에게는 필독서가 될 것 같은 책이기도 하다.

브랜드의 첫인상과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브랜드 이름'이다. 그리고 '브랜드 슬로건'은 브랜드 이름과 함께 브랜드의 성격을 드러낸다. 한편 브랜드에 인격을 부여하는 것은 '브랜드 스토리'이다. 그러니 브랜드 메시지와 브랜드 콘텐츠는 고객과 나누는 대화와 같다. 기억하게 하는 것, 공감하게 하는 것, 인간적 매력을 부여하는 것,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브랜드 언어의 목표이다.

2000년대 중반, 프리미엄 원두 캔 커피의 출시를 앞두고 동서식품과 미팅을 할 때, '커피다움을 느낄 수 있는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커피 맛에 대한 음성학적 정의로 시작해 강한 첫 맛, 부드러운 끝 맛, 아련하게 남는 뒷맛을 음성학적으로 치환해 강한 첫 음절은 격음과 경음으로, 부드러운 둘째 음절은 유성음으로, 여운이 남는 끝 음절은 받침 없는 모음이나 유성음 받침으로 끝맺어 공기 중에 진동을 남기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티오피(T.O.P)'였다. 커피의 강한 첫 맛은 '', 부드러운 맛은 ',', 여운이 남는 향은 '', 이렇게 세 음절이 각각의 역할을 나누어 수행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는 최고를 의미하는 단어 TOP을 재구성한 이름이기도 하다. 이후 프리미엄 원두 캔 커피 시장은 빠르게 성장해 10여 년 만에 1조 원을 넘는 시장이 되었지만, 여전히 최강자는 롯데칠성음료의 칸타타와 동서식품의 티오피다. 음료수 시장은 '브랜드 역할력'이 큰 시장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업의 언어와 브랜드 언어의 차이다. 내가 들려주고 싶은 것은 기업의 언어이고, 고객이 듣고 싶은 것은 브랜드의 언어다. 내 수준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기업의 언어이고, 고객 수준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브랜드의 언어다. 내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기업 언어이고, 고객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브랜드 언어다.

브랜드 스토리를 개발할 때 기업의 언어로 말하지 마라. 브랜드 언어로 말하라. 그래야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p.248

동서 식품의 '카누', 기아자동차의 '오피러스', 제주도의 맥주 '제스피', 피로 회복제 '액티넘' 등등 누구나 알만한 브랜드들의 이름이 탄생하게 된 스토리가 담겨 있어 매우 흥미진진했다. 게다가 차별화된 콘셉트 잡는 법을 비롯해 귀에 꽂히는 브랜드 이름과 슬로건 짓는 법, 인상적인 스토리와 메시지 개발하는 노하우 등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었던 독보적인 브랜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어떤 기업이든 고객에게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강조하려고 할 것이다. 고객의 마음속 깊이 새겨지고 싶다면 '무엇'이 아닌 '' 그것을 하는지 자연스럽게 전달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브랜드 언어라는 것이다. 기능이 아닌 브랜드로 차별화되는 시대, ‘언어는 대중이 브랜드를 인식하는 가장 확실한 통로다. 특히 이름은 브랜드의 첫인상이자 운명을 가르는 기준이다. 슬로건과 콘셉트, 스토리, 메시지 등 이름에서 파생되는브랜드 언어들을 독창적으로 만들려면 남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이 책에서 국내 최고 브랜드 버벌리스트가 들려주는 정교하고 과학적인 네이밍의 세계는 놀랍고도 흥미진진했다. 성공한 브랜드 이름에는 알고 보면 고도로 계산된 네이밍 법칙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전하는 후발 브랜드가 콘셉트를 잡을 때 유의해야 할 점, 기업 슬로건을 지을 때 지켜야 할 세 가지 원칙, 오래도록 회자되는 브랜드 스토리 만드는 법 등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브랜드 언어 전략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버벌리스트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충고와 팁들이 수록되어 있다. 여러 항목 중에 '꿋꿋하게 거절당하기'라는 대목이 눈에 띄었다. 딱 한 가지 결과물이 선택되기 위해서 수백 수천 개의 아이디어가 거절당한다. 그러니 거절을 견디는 것은 브랜딩을 하는 사람들이 매일매일 경험하는 일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거절당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경험이다. 그렇지만 이 거절을 꿋꿋하게 견디는 자가 결국 최고의 아이디어를 탄생시킬 수 있다. 브랜드 언어 전문가가 되고 싶다면, 시장에서 성공하는 브랜드 이름이 어떻게 탄생하는 지 알고 싶다면, 그리고 듣는 순간 갖고 싶게 만드는 브랜드 언어의 힘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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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살짝 기운다
나태주 지음, 로아 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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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즐겨보는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서 주인공 은호가 이제 조금씩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한 누나 강단이를 생각하면서 시를 읽는다. '그렇다면 누군가 두고 온 한 사람이 보고 싶은 거다. 또다시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고 싶어 마음이 안달해서 그러는 것이다.' 오랜 세월 친동생, 친누나 처럼 지내온 그들의 관계가 조금 달라지려는 차에 부득이한 상황으로 인해 며칠 떨어져 있게 되는데.. 그때 이 책을 읽었다. 소리 내어 책을 읽어 주는 대상은 따로 있었지만, 아마도 마음 속으로는 그녀를 생각하며 시를 읽었을 것이다. 그때 은호가 읽었던 가슴 설레던 그 시집이 바로 이 책이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너를 사랑한다

거리에도 없고 집에도 없고

커피 잔 앞이나 가로수

밑에도 없는 너를

내가 사랑한다                 -p.12, '그런 너' 중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라는 시, '풀꽃'을 쓴 시인 나태주. 이 책은 풀꽃 시인 나태주의 미공개 신작 시 100편을 담고 있다. 게다가 일러스트 작가 로아의 다정한 그림이 함께 실려 있어 책 자체도 너무 아름답다. 시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들에게 쉽고, 친근감 있게 다가갈 수 있는 시집이 아닌가 싶다. 잘 읽히고, 어렵지 않고, 공감되는 부분도 많고, 무엇보다 각각의 시와 어울리는 일러스트들이 굉장히 감각적이고 예쁘다.

나태주 시인은 이 책을 통해서 세상 곳곳에 높여있는 아름다운 것들과 애틋한 사랑에게 안녕을 전하고,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시인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살포시 가져와 시로 써 내려가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인지 시들을 이루고 있는 언어들이, 감정들이 다정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쓰러진 꽃도

함부로 밟거나

잘라서는 안 된다

꽃이 필 때까지

꽃이 질 때까지

기다려주어야 한다          p.140, '뿌리의 힘' 중에서

사랑의 설레이는 순간의 이별의 슬픈 감정을 담고 있지만, 일상의 소소한 것들도 그려내고 있는 시집이다. 1장에서는 연인의 이야기를, 2장에서는 부모님을 비롯해 가족들을 향한 애정을, 3장에선 자연과 일상에 대한 고마움을, 4장에선 삶에서 마주했던 인연들에게 건네는 말을 담고 있다. 또 어떤 시에서는 아기가 웃으면 따라 웃고, 아기가 아프면 따라서 아픈 엄마를 담고 있고, 어떤 시는 아내와의 오랜 세월을 그려내고 있고, 여전히 꽃보다도 고우신 어머니에 대한 마음도 있고, 초보 엄마, 젊은 엄마들에게 건네는 위로와 딸에게 건네는 애틋한 마음도 있다.

'서있을 때 보이지 않던 구름이 자리에 앉았더니 보이기 시작한다'로 이어지는 시가 유독 마음에 남는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감정들을 놓치며 살고 있을까. 자리에 앉았더니 '구름만 보이는 게 아니라 바람의 손도 보이고 바람이 만지고 가는 구름의 속살까지도' 보인다고 시인은 말한다. 일상이 전쟁처럼 치열하고, 사는 게 매일매일 너무 바쁘지만, 그래도 가끔은 한숨 돌리고 마음의 여유를 좀 가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아이의 눈높이로 앉아서 아이가 바라보는 시야로 세상을 내다보기도 하고, 또 가끔은 급하게 가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파란 하늘과 솜사탕 같은 구름도 바라보며 살아야겠다. 시를 읽는 다는 것은 이렇게 일상의 쉼표를 만들어주는 준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한 것 같다. 휴식이 필요한 당신,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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