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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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명화 한 편을 감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10초나 30? 아니면 꼬박 2? 중요한 화가의 전시회에는 300점을 거는 것이 표준이 되어 있는데, 그러면 그런 곳에서는 좋은 그림 한 점을 감상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일까? 그림 한 점에 2분을 쓴다면 300점을 모두 보기까지 열 시간이 걸린다(점심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화장실에 가는 시간은 셈에 넣지 않았다). 마티스나 마그리트나 드가의 전시회에 가서 열 시간 동안 그림을 본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세요. 나는 그런 적이 없다.    p.116

줄리언 반스의 첫 예술 에세이집이다. 그는 1989,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제리코의 그림 한 점을 두고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2013년까지 25년간 반스는 <현대 화가>, <런던 리뷰 오브 북스>, 〈가디언〉 등 다양한 예술, 문학 잡지에 예술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 이 책은 그 중에 제리코에서 들라크루아, 마네, 세잔을 거쳐 마그리트와 올든버그, 하워드 호지킨까지 낭만주의부터 현대 미술을 아우르는 17편의 이야기를 선별해 엮었다. 시중에 그림 읽기와 관련된 가벼운 에세이들이 워낙 많기도 하고, 소설가가 읽어주는 그림 안내서라고 하니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에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깊이 있고, 놀라울 정도로 전문적인 책이라 '아주 사적인' 미술 비평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수준 높은 책이었다.

 

인물 사진을 많이 그렸던 드가하면 발레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먼저 떠오른다. 대개 리허설이나 공연이 끝난 직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여성 발레리나들의 그림들은 누구나 하나쯤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런데 당시에 드가를 가리켜 "여자의 은밀한 모양을 품위 없게 그리는 일에 주력하는 화가"라는 주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여자들을 싫어했으며, 그들을 경멸하는 그림을 그렸다는 건데 아름다운 발레리나들의 모습을 그렸던 화가가 여성을 혐오한다는 혹독한 오해를 받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외에도 보나르는 한 여인의 그림을 385점이나 그려 지독한 사랑의 상징이 되었고, 세잔은 모델에게 사과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호통 치다 화가 나면 붓을 내팽개치고 화실을 뛰쳐나갔다고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미술에서 단 하나 중요한 건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브라크의 말이다. "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 눈이 있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과 언어가 서로 얼마나 무관한지 안다." 나아가 그는 "어떤 것을 정의하는 일은 그것을 정의로 대체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전기를 쓰는 일은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았던 인생을 전기로 대체하는 일이며 잘해야 난감한 일일 뿐이지만, 브라크의 도덕적 진실을 접할 수 있는 한 그런대로 괜찮으리라.    p.304

줄리언 반스. 소설뿐 아니라, 음악과 요리,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깊이 있는 평론을 써온 걸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 출간된 에세이만 해도 벌써 네 번째 책이니 말이다. 최근에 읽었던 그의 요리 에세이도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어려서 요리를 배울 기회가 충분치 않았던 줄리언 반스가 중년이 되어 뒤늦게 낯선 영역이던 부엌에 들어서서요리를 책으로 배우며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까칠한 부엌의 현학자가 투덜거리는 말들이 너무 공감이 되어 재미있게 읽었었다. 백 권이 넘는 요리책을 사 모으며 요리 경험과 교훈을 쌓아나가는 와중에 모호한 요리책에는 혹독한 독설을 퍼붓곤 했는데, 그 모든 것들이 그냥 투덜거림이 아니라 핵심을 찌르는 위트라서 인상적이었다.

 

이번에 만난 미술 에세이 역시 어느 책에서도 말해주지 않았던 지극히 사소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그의 독창적인 시선과 소설가다운 탁월한 상상력, 문화 전반의 깊은 지식을 토대로 풀어내고 있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미술사학자의 책도, 예술가의 책도 아닌, 그저 예술을 감상하는 비전문가의 글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소설가라는 사실이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 상상력으로 완전히 다른 창조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 말이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그림을 두고 작품의 배경이 된 사건과 그림이 탄생할 때까지의 과정, 그리고 화가의 삶과 다른 이들의 감상까지 조사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소설가 특유의 상상력을 가동해 한 편의 드라마로 엮어내고 있다. 사실 에세이라고 하기엔 내용들이 조금 어렵고, 낯선 배경 지식들이 익숙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홀린듯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것이 줄리언 반스의 힘이 아닐까 싶다. 소설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특별한 그림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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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톺아보기
찰스 로버트 다윈 지음, 신현철 옮김 / 소명출판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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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선택은 매일 매시간 전 세계에 걸쳐 아주 사소한 변이라도 모든 변이들을 속속들이 조사하는데, 나쁜 변이는 버리고, 좋은 것들은 보존하고 더해간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자연선택은 기회가 언제 또는 어디에서 나타나든지 상관없이 아주 조용히 알아차리지 못하게 살아가는 생물적, 무생물적 조건과 관련하여 생명체 하나하나를 개선하도록 작동한다. 시계 바늘이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지나갔음을 표시할 때까지 우리는 서서히 발전해가는 변화들을 전혀 볼 수는 없다. 게다가 우리는 과거에 지나가 버린 지질학적 시대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가 너무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생명 유형이 과거와 현재가 다르다는 점만 알 수 있다.    p.122~123

인류를 뒤흔든 과학적 발견이야 많지만 다윈의 진화론만큼 심하게 세상을 흔든 것은 없을 것이다. 다윈의 이론은 인간 자신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시각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의 주장은 '생명은 신이 직접 개입할 필요 없이 유전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변화에 이끌려 조금씩, 그리고 영원히 달라져간다는 그의 말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신의 창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진화의 산물은 수많은 종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진화론은 교과 과정에서 적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전공자가 아닌 이상에야 접하기 어렵다. 그저 '진화론'을 다루고 있는 교양 과학서를 통해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나 역시 그러했고 말이다.

사실 <종의 기원>은 그 유명세만큼이나 읽기 어렵다는 악명이 높은 책이기도 하다. 다윈 시대의 생명과학 지식과 용어에 대한 이해 부족, 엄청나게 다양하고 또 매우 생소한 생물들에 대한 관찰 결과와 수많은 인물들의 조사 결과가 인용되어 있으나 이들을 거의 알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본문에 소제목이 없어 읽어 내려가기가 매우 힘들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 등이 그 요인이라고 한다. 그러던 차에 이번에 만나게 된 책은 1859년에 출간된 '종의 기원' 초판을 주석과 함께 완역하여, 더 깊이, 낱낱이 톺아볼 수 있도록 하고 있어 매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주석이 무려 2,200여 개에 달하는데다, 굉장히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많은 용어들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어 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가 읽기에도 조금 수월해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좀 더 자세히 내가 의도하는 바를 설명해야만 한다. 다른 무리와의 연관성과 종속성에 따라 강 하나하나의 무리를 배열할 때 자연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엄밀한 계보에 근거해야만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몇몇 분지나 무리들에서 발견되는 차이의 정도가, 비록 이 무리들이 공통조상에서 시작한 혈통에서 같은 수준으로 묶인 동류일지라도, 이들이 겪은 변형의 서로 다른 정도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서로 다른 속, , 절 또는 목이라는 계급에 유형이 소속되는 것으로 표현된다.    p.546~547

1859, 모든 생물은 완벽하게 창조되었기에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던 시대였다. 신이 이 자연을 설계했다고 주장하는 자연신학이 주류였지만 찰스 다윈은 그러한 믿음에 의심을 품었다. 그는 남미와 대서양·태평양·인도양을 넘나들며 수많은 동물·식물을 채집하여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20여 년 동안, 진화론을 입증할 방대한 증거와 자료들을 수집했다. 그리고 그가 발표한 <종의 기원>은 당시 사회의 시대사조를 뒤집어엎는 혁명적인 사건이 된다.

생물학 전공자들도 어렵게 느낀다는 <종의 기원>이기에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이 읽고 이해하기에는 여전히 낯선 내용들이 너무 많은 책이긴 했다. 하지만 역자의 친절하고 자세한 주석들이 길을 잃고 헤맬때 마다 붙잡아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생물학 강의를 듣는 것처럼 어려운 대목, 설명이 필요한 용어들이 등장할 때마다 잠깐 멈추고 주석을 읽으면서 숨을 고른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읽어야 하는 책이다. 누구나 다윈의 <종의 기원>을 알고 있고, 그가 말하는 진화론의 요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바로 지금이야말로 진짜 <종의 기원> 완역본에 도전해 볼만한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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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책 - 우리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물건의 역사
키스 휴스턴 지음, 이은진 옮김 / 김영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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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루스에 글씨를 쓰는 경험이 불만스럽더라도, 파피루스를 생각해낸 것 자체가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파피루스처럼 가볍고 유연하고 내구성이 좋은 필기 재료가 없었으면 두루마리가 존재할 수 없었을 테고,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없었으면 책이란 것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이 살려면, 먼저 파피루스가 죽어야 했다.    p.41

도서관에서 가면 특유의 냄새가 있다. 오래된 종이의 냄새, 책들이 많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만 맡을 수 있는 그런 냄새를 좋아한다. 한때는 그 냄새가 좋아서 도서관에 책을 읽으러 간 적도 있을 정도로 내게는 친숙함을 불러일으키고, 안정감을 주고, 편안한 기분이 들게 하는 그런 냄새다. 아마도 아주 어릴 때부터 책과 함께 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런 종이의 냄새에 반응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종이책을 사랑한다. 책들을 보관하는 문제 때문에 전자책을 사서 보던 시기도 있었지만, 결국은 종이책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종이를 한 장 넘길 때의 그 소리와 촉감, 냄새를 사랑하고, 책이라는 물건이 지니고 있는 무게와 품격, 그리고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을 때의 그 존재감을 사랑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덕분에 서재의 전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책꽂이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바닥에 쌓이기 시작한 책들로 인해 지금은 마치 미로처럼 발 디딜 곳을 찾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말이다.

키스 휴스턴의 <책의 책>은 바로 그렇게 종이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을 위한 완벽한 선물 같은 책이다. 책이 사물로서 갖는 물성, 즉 책의 몸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책이라는 매혹적인 공예품에 관한 러브레터, 책에 바치는 오마주, 책을 책이게 한 책 덕후들의 이야기이다. 종이와 잉크, 판지, 풀로 이뤄진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장치로서의 책, 질량과 냄새가 있고, 무게가 있고, 촉감을 느낄 수 있는 사물로서의 책 말이다. 저자는 점토판과 파피루스 두루마리에서 지금의 하드커버와 페이퍼백으로 진화해온 책이라는 물건의 흥미로운 2,000년 역사를 속속들이 파헤친다.

 

레코드판에서 CD로 넘어간 음악 애호가들이나 DVD에서 블루레이로 갈아탄 영화광들,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 넘어간 독자들이라면, 마르티알리스의 마케팅 전략에 전율할 것이다. 시인 마르티알리스는 글 몇 줄로 '양피지로 만든 소책자'라는 새로운 미디어 형식을 소개하고, 이 새로운 매체로 제작한 자기 책을 사라고 독자들을 부추기고, 정확히 어디로 가면 자기 책을 파는 서점을 찾을 수 있는지까지 알려준다.    p.393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두루마리에서 시작해 동물 가죽으로 만드는 양피지 시대가 온다. 하지만 양피지의 불가사의한 매끄러움과 고혹적인 외양에도 불구하고 이는 동물의 죽음에서 시작된 유혈이 낭자하고 아주 폭력적인 기나긴 과정의 산물이었다. 잔인한 해부 과정을 하나하나 거친 끝에야 겨우 양피지 한 장이 나온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고대 중국에서 최초의 종이를 발명하게 되는데 종이의 제작 방법과 발전하게 되는 과정 또한 매우 흥미로웠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72단계나 거쳐야 겨우 한 장 나오는 종이 생산 과정이 기계화하면서 효율을 높이게 되었고, 19세기 중반 목재 펄프로 종이를 만들게 되면서 원재료인 넝마 품귀 현상이 해결되었다고 한다.

, 이렇게 종이의 탄생과 생산 과정을 거쳐 다음에 이어지는 항목은 '본문'이다. 인쇄술에 관한 흥미로운 역사가 펼쳐지고, '삽화'를 거쳐, '무선 제본' '페이퍼백 장정' 등으로 책이라는 것이 점점 더 진화해오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섞인 구성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책의 원형은 15세기 말 무렵 한 인쇄공의 손에서 결정되었고, 1,000년이 넘는 책 제작 전통을 바꿀 접착식 제본으로 특허를 신청하고 나서 몇 년 뒤 영국의 기차역에서는 통속적인 페이퍼백 염가 소설책이 팔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 인쇄, 제본, 삽화 등 책의물성이 그려온 역사를 인류 문명의 결정적 장면들과 교차해 풀어간 책의 생애사 자체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사실 이 책은 남다른 디자인과 제작 방식으로 구현한 책의 구조로 읽기도 전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평범한 양장본은 표지로 쓰는 두꺼운 판지를 천이나 가죽으로 감싸는데, <책의 책>은 판지를 그대로 노출했다. 제목은 백박으로 제작했으며, 부제나 저자, 역자명은 검정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했고, 책머리’ ‘책등등 책의 각부 명칭을 표시했다. 내지에도각주’ ‘캡션등 구성 요소의 명칭을 넣어 책의 신체 구조를 환기할 수 있게 해서 '사물로서의 책' 그 자체를 고스란히 느끼면서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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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쓰면서 외우는 일본어 문법 30일 완성 (스프링)
나무 지음 / 세나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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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일본어 학원을 열심히 다니다 그만 둔 뒤로는 따로 일본어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일본 여행을 가거나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그래도 한때 배웠다고 단어들이 들리곤 해서 제대로 다시 한번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곤 했다. 하지만 영어든 일본어든 그리 쉽게 시작해지지가 않는 것이 또 외국어 공부이다. 특히나 일본어는 한국어와 기본 어순이 같아서 쉽게 느껴지지만, 한자를 외워야 하는 게 만만치가 않았던 기억이 나서 더욱 다시 시작하기를 미루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하루에 4페이지씩, 퀴즈를 풀듯 손으로 따라 쓰며 공부하면 한 달 만에 일본어 문법을 끝낼 수 있다는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기초 문법뿐만 아니라 초급에 필요한 단어장, 배운 내용이 들어간 회화도 소개되어 있어 문법과 어휘, 그리고 회화를 자연스럽게 함께 익힐 수 있어 더 좋을 것 같았다. 

 

우선 스프링 제본으로 되어 있는 책이라 손으로 직접 쓰면서 공부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기본적인 구성은 매일 학습 내용이 도표로 정리되어 있고, 제시된 단어들의 활용법을 빈칸 채우기를 통해 직접 쓰면서 연습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그날 배운 문법을 실제 문장을 통해 연습할 수 있도록 문장 완성하기가 이어지며, 간단한 회화 내용을 베껴 쓰면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한다. 각 챕터 마다 곡 외워야 할 단어들이 따로 정리되어 있고, 단어 연습장에 쓰면서 외울 수 있다. 간단한 테스트를 통해 공부한 내용을 확인하는 문제 풀이가 수록되어 있고, 각 챕터가 끝날 때마다 복습하는 과정도 있다. 1일차에서 4일차에 명사와 형용사의 활용을 공부하면 5일차에 그에 대한 복습이 있고, 6일차에서 12일차까지 동사의 종류와 기본 활용을 배우면 13일차에 그에 대한 복습이 있는 식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외국어 공부 중에 가장 진도가 안 나가고 어려운 것이 바로 문법인데, 기초 문법을 이렇게 딱 한 달 동안 집중해서 보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는 마스터할 수 있도록 정리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도표로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고, 그냥 눈으로 읽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매 페이지마다 계속 직접 손으로 쓰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도 저절로 단어나 문법의 구조가 외워지지 않을까 싶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달만, 일본어 공부에 시간을 투자해보자. 그것도 책 한 권으로 부담 없이, 가볍게 할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나처럼 일본어 공부를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더 잘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기초 문법이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 이번에는 더 미루지 말고, 이 책과 함께 다시 일본어 공부를 해보려고 한다. 우선은 딱 한 달만, 무슨 일이든 시작이 제일 어려운 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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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했던 모든 애인들에게 - 지구상에서 가장 특별한 203가지 사랑 이야기
올린카 비슈티차.드라젠 그루비시치 지음, 박다솜 옮김 / 놀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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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돌이켜보면, 이제부터는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들이 있다. 셰브를 만난 것도 그런 순간이었다. 그는 내게 사랑의 좋은 것들을 전부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천천히 광기에 잡아 먹히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서서히 그를 옭아매는 광증에는 곧 과대망상이 따라왔다. 그 모든 일이 고작 한 달 만에 일어났다. 정신이 온전한 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길고 느리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지켜보는 것과 같았다. 실제로 그도 마찬가지로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새크,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기억해줘."     -'우리의 플레이리스트', p.43

이별을 하고 나서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린 다음에 가장 난감한 것이 떠나간 그 혹은 그녀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함께 찍은 사진, 서로에게 쓴 편지, 함께 읽은 영화와 책들... 집안 곳곳, 거리 곳곳에 떠나간 연인에 대한 기억들이 가득할 테고 그 흔적들을 정리해야 비로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보통은 그 사랑의 덧없는 잔해들이 잔혹하고, 슬프고, 실패이기 때문에 흔적을 제거하고, 기억을 망각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바로 그 지나간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고통스러운 물건을 버리지 말고, 기억과 함께 저장할 수 있는 보관소가 있다면 어떨까. 결과야 어찌 되었든 당시에는 무엇보다 소중한 순간들이었고, 행복한 추억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아주 특별한 보관소 '이별의 박물관'이 탄생하게 된다.

2006, 크로아티아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애틋한 전시가 열렸다. 사랑의 크고 작은 순간들을 기념하는 것처럼이별을 기념하는 전시였다. 4년간 사귄 연인이었던 올린카 비슈티차와 드라젠 그루비시치는 사랑이 끝나고 남은 물건들의 처분을 고민하다 이별 보관소를 만들기로 한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별을 상징하는 물건과 그에 얽힌 사연을 보내왔고, 이별의 박물관은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으로 모든 헤어진 연인들의 망명처 역할을 하고 있다.

 

낡아 해지고 모래가 묻은 이 책들은 최근에 끝난 길었던 사랑의 상징이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프루스트의 책에 중독되었다. 특히 휴가를 가면 나는 그녀에게 그의 소설을 소리 내어 읽어주곤 했다. 이 소설의 많은 부분을 알가르베의 타비라섬에서 보낸 몇 번의 여름 동안 읽었다. 우리는 인적 드문 백사장으로 걸어 나가 부목과 대나무, 실크 사롱으로 은신처를 만들고선 대서양의 둔탁한 파도 소리를 배경음 삼아 마치 최면을 거는 듯한 이 산문에 빠져들곤 했다.    - '읽지 못한 결말', p.141

다리가 몇개 남지 않은 지네 인형, 종이접기 꽃, 점토로 만든 여우, 낙하산 장치, 어린이용 자동차, 깨진 거울 조각들, 실리콘 가슴 보형물, 머리카락 타래, 바이올린 로진, 휴대용 체스판, 스틸레토 힐 한짝, 하트 모양 메달 장식, 콘크리트 조각 등등.. 이것들은 이별의 박물관에 사연과 함께 보관된 물건들이다. 이별의 박물관에 전시된 각각의 물건과 사연 들은 사랑이 지속되었던 기간, 그리고 그들의 거주지와 함께 기록되어 그곳에서 지나간 시간을 영원히 박제 시킨다. 이들의 사연들은 모두 지극히 개인적이고, 또한 너무 사소하다. 평범해서 지루하고, 파격적이어서 놀랍기도 하고, 너무 슬프고, 가슴 아프고 내용 또한 가지각색이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나누고, 또 헤어지며 살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가장 개인적이고 사소한 이별담을 읽으면서 누구나 자신의 지나간 사랑과 이별의 추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 책에는 박물관 설립자 올린카 비슈티차와 드라젠 그루비시치가 직접 선별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애틋한 203가지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누구나 사랑을 하고 이별을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흔하디 흔한, 특별할 것 없는 이별담이 당사자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순간으로 기억된다. 이 책은 그 수많은 이별담 중에서 나쁜 기억은 지워버리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며, 따뜻한 위로를 전해준다. ‘잠시라도 존재했던 세상의 모든 연인들을 위한 박물관이라는 별칭만큼 이곳의 존재 이유는 특별하다. 그 누구도 현재 진행형인 사랑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버린 이별에 대해 이렇게 소중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을 테니 말이다. 오늘도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와 헤어지고 힘들어할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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