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아이 1
야쿠마루 가쿠 지음, 이정민 옮김 / 몽실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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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다는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썼다고 말했다. 만약 정말 그 정도로 두뇌가 좋다면 이곳을 나가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재주가 있을 터이다. 그러나 아무리 똑똑해도 마치다에게는 더 소중한 것이 결여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살아가기 위해 뭘 할지 생각하는 것은 머리지만, 무엇을 위해 살아갈지를 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이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자신은 그것을 마치다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   p.63

마치다 히로시라는 소년이 인간을 구별하는 기준은 단 하나였다. 머리가 좋은 인간인가, 나쁜 인간인가. 남자와 여자도, 부자와 가난뱅이도,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도 아니었다. 바로 그가 살아남기 위해 의지해야 했던 것이 바로 자신의 높은 아이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겐 가족도, 친구도 없었고, 누군가를 그리워한다거나 좋아한다는 등의 감정 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미혼모였던 히로시의 엄마는 학교에 보낼 비용도 아깝다는 생각에 그를 방안에서 사육했다. 출생신고도 하지 않아 호적도 없었고, 당연히 학교에 가본 적도 의무 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 그는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살아야 했고, 그는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써야 했다. 히로시의 아이큐는 160 이상이었고, 한 번 본 것은 사진을 찍듯이 기억에 새길 수 있는 직관상 기억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뒷골목 세계를 이끄는 무로이 진이라는 남자가 있다. 그는 범죄라는 것이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불가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행복한 인간을 불행하게 하기 위해, 불행한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살아간다. 마치 신흥 종교처럼 보이는 이상한 이 사상은, 평등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 범죄로 인해 불평등함을 메운다는 비뚤어진 세계관으로 그를 따르는 무리를 만든다. 세상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체감하면서 살아온 이들에게 그러한 생각은 자신들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갈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세상에 빈부가 있고, 증오나 악의나 욕망이라는 감정이 있는 한 범죄가 없는 세계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범죄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자기 합리화가 필요할 수밖에 없기도 하고 말이다.

 

불행한 인간을 조금 행복하게 하고 행복한 인간을 조금 불행하게 한다... 무로이는 그 말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신이 조화를 부리듯 범죄를 이용해 사회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무로이는 어떤 의미에서 범죄라는 수단으로 불평등한 사회를 바꾸려하는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렇다면 그 일의 한 부분을 맡고 있는 아마미야 일행은 '신의 아이'인 셈이다.   p.101

사회파 추리의 강자 야쿠마루 가쿠는 매번 묵직한 미스터리를 그려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용서와 복수라는 다소 어둡고 무거운 주제가 이렇게 술술 읽혀도 되나 싶을 만큼 쉽게 읽히고,가슴으로 다가오는 것이 그의 작품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었다. 국내에 꽤 많은 작품들이 출간되어 있는데, 최근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이 역주행 베스트셀러가 되는 바람에 아마도 지금 가장 핫한 작가일 것이다. 이번에 만나는 <신의 아이>는 야쿠마루 가쿠의 아홉 번째 국내 출간작인데, 두 권짜리라 그 중에서도 분량이 가장 많다. 그만큼 다양한 플롯과 반전,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엮여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1권의 이야기는 범죄를 이용해 불평등한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사상에 심취한 무로이 진이 소년원에 들어간 마치다를 갖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건을 벌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히로시가 소년원에서 겪게 되는 스토리가 전반부, 그리고 그가 소년원을 나와서 부딪히게 되는 사람들과의 관계, 여전히 그에게 관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뒷골목 세계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리고 사실 히로시라는 특별한 캐릭터 외에 주연보다 더 눈길이 가는 조연 캐릭터가 있어 플롯이 풍부해지고, 몰입감을 높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후 전개가 어떻게 될 지 더 궁금해지는데, 어서 빨리 2권을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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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노, 오늘 하루는 어땠어?
이가라시 미키오 지음, 고주영 옮김 / 놀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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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알 것 같아!

혼자 있다는 건 이렇게 그냥 걷는 거야.

하지만 누군가와 이야기를 한다는 건 이렇게 풍경을 보는 게 아닐까?   p.142

<보노보노> 1986년 출간되어 1988년 고단샤 만화상 수상 후 30년 넘게 연재를 이어오고 있는 네 컷 만화이다. 이 책은 만화 <보노보노> 1권부터 30권 중 원작자 이가라시 미키오가 특별히 고른 18개 작품만을 모은 베스트 컬렉션이다. 수백 편의 이야기 중 가장 재미있는 에피소드만을 엄선해 담았고, 보노보노와 숲속 친구들이 모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모았기 때문에 <보노보노>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 입문용으로 읽기에도 좋다.

기본적으로 저자인 이가라시 미키오가 좋아하는 이야기들을 골랐지만,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이야기들도 염두에 두고 고른 에피소드들이라고 하니, 아마도 가장 <보노보노>다운 이야기들인 셈이다.

 

보노보노와 숲 속 친구들을 정리해보자. 주인공인 아기 해달 보노보노는 항상 태평하고 느긋하다. 언제나 공상에 빠져 있고, 엉뚱한 성격도 가지고 있다. 남을 괴롭히지만 다방면에 걸쳐 인생 경험이 풍부한 너부리는 숲속의 개구쟁이이다. 가끔 속 깊은 말을 던지는 포로리는 보노보노의 절친으로 암컷으로 오해 받지만 사실 수컷이다. 보노보노는 뭐든 수수께끼 같은 존재인 야옹이 형에게 물어보는데, 굉장히 성가셔한다.

똥싸개 린과 린의 아빠 지식왕 울버, 세상 모든 것이 싫기만 해 독설을 날리는 너부리 아빠, 대화법도, 사는 법도 독특한 보노보노 아빠, 달관한 성격의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포로리 아빠,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명랑한 홰내기, 거짓말을 태연하게 잘도 하는 너부리의 친구 오소리, 너부리와는 숙명의 라이벌인 포로리의 누나 아로리가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심심한 이유는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론가 가기 위해서는 걸어야 한다.

그러면 할 일이 생긴다.

너부리야, 심심할 때 어딘가에 간다는 건 그런 얘기지?   p.313

너부리는 다들 시시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의문이다. 어제 뭐 했고, 오늘은 날씨가 어떻고 하는 얘기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는 너부리의 말에 포로리가 말한다. 다들 그렇게 재미있는 일만 있지는 않다고. 만약 재미있는 이야기만 해야 한다면 다들 놀러 왔다가도 금방 가버릴 거라고. 모두 외롭고 쓸쓸하니까 시시한 얘기라도 하고 싶은 거라고 말이다. 한참을 이런 저런 공방을 펼쳐가며 시시한 이야기를 왜 하느냐에 대해 토론하는 이들의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고, 우리들의 일상 같았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게 마련이고,,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삶을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시시한 이야기가 정말 좋다고 생각하는 보노보노의 소박한 마음이 괜시리 뭉클했다.

보노보노는 소심하다. 보노보노는 걱정이 많다. 보노보노는 친구들을 너무너무 좋아한다. 보노보노는 잘할 줄 아는 게 얼마 없다. 심한 만큼 걱정도 많고, 잘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무식하고 우직하게 노력하는 그런 캐릭터. 느릿느릿,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보노보노의 행동에서 묘하게도 위로가 되는 순간을 발견한다면, 어쩌면 당신도 외로운 어른인지도 모르겠다.

 

<보노보노>가 좋은 이유는 젠체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오한 이야기를 심오하게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심오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말이다. 이 작품은 무심한 듯 툭 던지는 말 속에 담겨 있는, 단순하지만 삶의 예리한 진실들이 빛나는 그런 만화다.

<보노보노>의 오랜 팬이라면 한 권으로 <보노보노>의 세계를 총망라한결정판을 오래도록 기다려왔을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보노보노, 오늘 하루는 어땠어?>는 단 한 권만으로도 <보노보노> 속 수백 편의 이야기 중 가장 재미있는 에피소드만을 엄선해 담은 베스트 컬렉션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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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인자에게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 지음, 김지원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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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달랐다.

오빠를 위해서 내 목숨을 던질 수 있던 시절도 있었다.

하이네켄 납치 사건 이후 우리 모두가 따돌림을 당하던 때, 나는 오빠가 우리에게 가르친 '우리 대 나머지 세상'이라는 가족의 충성심에 대한 신화를 믿었다.

하지만 오빠가 자신의 가족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깨달았다. 우리의 적은 바깥세상이 아니었다. 오빠가 우리 적이었다.   p.199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범죄자라면? 가정폭력으로 얼룩진 유년시절, 다정한 오빠이자 아버지와도 같았던 존재가 나의 아이들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수많은 사람을 살해한 살인자라면? 이 작품은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범죄자이자 하이네켄 납치사건의 주범인 빌럼 홀레이더르의 여동생,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가 쓴 회고록이다. 그녀는 살해 위협을 피해 직장도 그만두고 숨어 살며 원고를 완성했고, 탈고한 후에도 책이 공개되기 직전까지 어느 서점에도 간단한 소개조차 제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빠인 빌럼 홀레이더르가 알게 된다면 책의 출간을 막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2016 11, 한 심야 TV 쇼에 등장한 책 한 권이 네덜란드 전역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나는 아직도 오빠의 살해 목록 1순위다

 

빌럼이 처음부터 아스트리드에게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남매의 어머니 역시빌럼이 열두 살, 열세 살 무렵까지만 해도 매우 착한 아이였다고 기억한다. 문제는 아버지였다. 잘생기고, 매력적이고, 상냥하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였던 아빠는 엄마와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폭군의 모습으로 변했다.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에 가정폭력을 일삼았고, 과대망상증 환자에, 병적으로 질투심이 강했다. 아스트리드와 소냐 언니, 빔 오빠와 헤라르트 오빠, 이렇게 네 남매는 어린 시절부터 모두 아빠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하며 살아야 했다. 아빠는 엄마를 때렸고, 빔 오빠는 소냐 언니를 때렸고, 헤라르트 오빠는 아스트리드를 때렸다. 공격성과 폭력성이 의사소통이 되어 버린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폭력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졌지만, 아버지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황에서 빌럼은 여동생에게 다정한 오빠이자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는 든든한 오빠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빌럼은 아버지를 닮아가며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적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나는 그의 여동생이었다, 안 그런가? 그들이 지하세계의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유일한 이미지는 <대부> 같은 조직폭력배 영화에서 본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가장이 오로지 자신의 가족에게만 사랑이나 연민을 드러내는 그런 영화들.

하지만 우리 삶은 대부 영화가 아니고, 낭만적인 범죄자 가족의 초상도 아니었다. 이것은 한 명이 나머지 모두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p.216

빌럼은 어린 소년일 때부터 엄마에게 폭군처럼 굴었고 엄마는 늘 그걸 형편 없는 아빠 탓으로 돌리곤 했다. 그래서 중범죄를 저질렀는데도 아들을 절대로 버리지 못했다.

"그 애는 꼭 제 아빠 같아. 딱 제 아빠야."

 

빌럼은 하이네켄 납치 사건의 주범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는 납치 사건뿐만 아니라 돈을 위해서라면 동료들을 협박하고제거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폭언을 일삼고, 절친한 친구이자 동생 소냐의 남편이었던 코르 역시 살해했다. 하지만 그는 수려한 외모와 언변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방송에 나가기도 하며 유명인이 된다. 그러니 그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면모를 아는 사람은 가족뿐이었다

변호사가 된 아스트리드는 치밀한 준비 끝에 네덜란드 최악의 범죄자이자, 다수의 살인을 교사한 친 오빠 빌럼을 법정에 세운다. 이 책은 바로 그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주도 면밀한 준비 끝에 변호인이 아닌 증인으로 법정에 서서 친 오빠를 단죄해야 하는 심정이란 대체 어떤 걸까.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고통일 것이다. 게다가 빌럼은 교도소 안에서 아스트리드의 살해를 지시했고, 그녀는 현재 직장을 그만두고 살해 위협을 피해 숨어서 살아가고 있다. 이 무시무시한 현실은 놀랍게도 실제로 일어난, 그리고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인 실화이다.

 

나는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내 일, 내 집, 전부 다 잃었다.

그래도 아직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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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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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는 로즈의 시건방진 행동, 무례함, 지저분함, 자만심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을 괜히 고생시키려 들고 고마워할 줄 모른다고. 그녀는 브라이언의 순진무구함과 로즈의 되바라짐을 입에 올린다. , 넌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지, 플로가 말한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이렇게 말한다.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p.31

앨리스 먼로의 고국인 캐나다에서는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Who Do You Think You Are?'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고, 그 외 지역에서는 '거지 소녀'로 발표된 작품이다. 주인공 로즈를 중심으로 연결된 단편 열 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종의 연작소설처럼 단편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시골 마을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로즈의 어린 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새어머니 플로와의 유대를 배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타운의 가난한 지역에서 살았던 로즈의 가족은 네 명이었다. 가구 수선 일을 하는 아버지,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새어머니 플로, 이복동생 브라이언. 로즈의 어머니는 그녀가 아기일 때 병으로 죽었다. 과묵한 아버지는 딸에게 혹독한 매질도 서슴지 않았고, 새어머니는 로즈의 시건방진 행동이나 무례함을 지적하며 억누르려 한다. 아버지는 로즈가 학생일 때 병으로 세상을 먼저 뜨지만, 새어머니 플로는 로즈가 대학에 진학하고 결혼과 이혼을 하고 중년에 이르는 세월 내내 고향 집에 머무른다. 누추한 환경과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똑똑한 소녀 로즈는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한다. 왜냐하면 여학생들에게 가난은 상냥하고 헤픈 태도나 멍청함과 결합되지 않는 한 매력이 없었고, 좋은 머리는 우아함의 징후, 즉 품격과 결합되지 않는 한 매력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로즈는 부유한 집안 출신인 패트릭을 만나 결혼하지만, 결국 십 년 만에 이혼을 하게 된다.

 

 

로즈는 언제나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완전히,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질 거라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런 사람은 없을 거라고, 아무도 자신을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원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있어서인데, 자기 안에 그것이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것인가?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아내, 애인, 하고 생각했다. 그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말들. 그 말들이 어떻게 자신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 그것은 기적이었다. 실수였다. 그것은 그녀가 꿈꿔온 것이었다. 그녀가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   p.147~148

표제작이자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거지 소녀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라는 동명의 그림에서 따온 것이다. 왕이 아름다운 거지 소녀에게 청혼을 하며 왕관을 벗어 들고 있는 그림이다. 비천한 거지 소녀를 왕비로 맞을 수 없다며 모두 말렸지만, 왕은 왕좌를 버리고 사랑을 선택했다. 패트릭은 로즈와 사귀기 시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우리는 너무 다른 세계에서 자랐다고, 우리 가족은 가난하다고 말하는 로즈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가난해서 나는 좋아. 너무 사랑스러워. 거지 소녀 같잖아."

부유함에서 오는 오만이었고, 패트릭이 사랑한 것이 로즈라는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였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즈 역시 막막한 현실에서 도피하는 심정으로 결혼을 결심했기에, 이들의 파국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지도 모른다. 이후 로즈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이곳 저곳을 떠돌며 배우이자 교사로 살아간다. 생활은 안정적이지 않고, 수입은 터무니없이 적고, 끊임없이 외로워하며, 누군가에게 희망을 품었다 좌절한다. 매번 실패하고, 실망하면서도 행복에 대한 환상 때문에 계속 누군가에게 매달리고, 희망을 꿈꾸는 것이다. 앨리스 먼로는 로즈의 삶을 미화하지도, 긍정적으로 그려내지도 않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허영과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주변 사람들의 행동과 말을 관찰하고, 경험하고, 판단하며 자신만의 삶을 꿈꾼다. 먼로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자신과 주변을 소재로 다양한 변주를 하며 인간사와 관계를 그려내는 걸로 유명한데, 비교적 초기 작품인 <거지 소녀>의 주인공 로즈의 성격이나 그녀가 겪는 인생은 이후 수많은 다른 작품에서 다양하게 보여진다. 실패와 실망, 어리석음과 허영, 나약함과 수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택한 그 삶을 살아보겠다고 말하는 로즈의 목소리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먼로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체감하는 것이지만,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상처, 관계와 회한에 대한 것들은 무엇 하나 내 일 같지 않은 장면이 없었는데, 이번 작품 역시 그러했다. 비록 외롭고 초라하더라도 내 삶은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가치가 있으며, 내가 비록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찮은 존재도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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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을 보면 밖을 보면 웅진 모두의 그림책 18
안느-마르고 램스타인.마티아스 아르귀 지음 / 웅진주니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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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론가 여행을 떠났을 때, 그곳이 도시라면 항상 야경을 보고 온다. 반짝반짝 빛나는 조명들로 수 놓인 빌딩숲은 낭만적인 야경을 만들어 너무도 아름답다. 여행지에는 아예 야경 투어나 야경을 볼 수 있는 관광지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밤의 경치는 그렇게 그림처럼 예쁘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그 풍경들은 천차 만별일 것이다. 화려한 조명의 빌딩숲에는 야근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다크 서클이 내려 앉은 직장인들이 가득할 지도 모르고, 고층 아파트의 집들엔 화목한 가정도 있겠지만, 다툼을 하거나, 서로를 미워하거나, 혹은 각자 자신의 방에서 고독해하는 사람들 등 여러 모습일 테니 말이다.

이번에 만난 책은 바로 그렇게 여러 대상의 안과 밖 풍경을 번갈아 보여 주며 한쪽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현상의 이면을 볼 수 있도록 해주고 있어,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 책은 웅진 모두의 그림책 18권으로, 2015 볼로냐 라가치상 수상 작가 안느-마르고 램스타인 & 마티아스 아르귀 듀오의 작품이다. 제목과 표지에서부터 작품 의도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데, '안을 보는' 것과 '밖을 보는' 것은 마치 거울의 이면처럼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글자도 거꾸로 쓰여져 있고, 표지 앞면의 그림과 뒷면의 그림이 안에서 보는 풍경과 밖에서 보는 풍경을 각각 보여주고 있다.

안에서 보면 깎아 지른 절벽 위에 있는 성 주변으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다. 하지만 밖에서 보면 이는 스노우볼 안에 있는 미니어처 장식이다.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는 작가의 말이 책을 읽는 동안 누군가의 ''을 들여다보도록 했었기 때문이다.

밖에서는 잘 차려입은 여인이 강가로 피크닉을 와서는 사과를 베어 먹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안에서 보면 잘 익은 빨간 빛깔의 먹음직스러운 사과 내부는 이미 애벌레가 다 파먹은 상황이다. 안에서 보면 운전자의 시선으로 멋진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데, 밖에서 보면 운전자의 차 뒤로 차들이 줄지어 길게 늘어서 있는 정체 상황이다. 이런 식으로 이 그림책은 안과 밖의 풍경과 그 온도차이를 보여 주면서 세상의 다양한 이면을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우물 안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던 개구리처럼, 살다 보면 바깥세상의 형편도 제대로 모르면서 자기가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경험이 적어서 보고 들은 게 별로 없어서 일수도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편협한 시각으로 한쪽 방향만 바라보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바로 그래서 이런 책이 필요하다. 그림책은 아이들만 보는 거 아니냐고? 천만에. 이런 그림책은 어른들에게도 마법처럼 특별한 시간을 선사한다. 바로 우리가 잊어버리고 사는 세상 혹은 계속 모른 채 살아갈 수도 있는 세상을 보여주는, 놀라운 상상력을 선물하는 그림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광산, 들판, 바다 등 드넓은 자연 세계는 물론 <미운 오리 새끼> <라푼젤> 등 고전 동화까지 경계 없이 넘나들며 세상 곳곳의 안과 밖을 보여 준다. 명암을 생략한 채색과 본질적 형태를 강조한 형상으로 이미지를 그려내는 작가들의 작품이라 이야기가 없어도 이미지만으로 서사를 만들어 낸다. 대상의 안과 밖 풍경이 만날 때 비로소 탄생하는 마법 같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반복되는 일상에서 매일 같은 일만 하다가 머리가 굳어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면, 아이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선을 가르쳐주어 상상력을 키워주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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