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희의 황금 레시피 - 집밥의 품격을 높이는 비법 노트
황지희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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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최고의 요리비결등 여러 요리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집밥 요리를 선보인 황지희 요리연구가의 '제대로 된 집밥 레시피' 북이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반찬부터 뜨끈한 국물의 국과 찌개, 한국인의 소울푸드인 김치 요리, 쉽지만 고급스러운 손님 초대 요리, 그리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나를 위한 한 그릇 요리까지.. 누구나 엄마의 손맛이 가득 담긴 밥상을 차릴 수 있도록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는 요리책이다.

본격 집밥 레시피라 사실 메뉴 이름들만 보면 주부라면 누구라도 알만한 기본 메뉴들이 가득하다. 이런 건 굳이 레시피를 볼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평범하고, 기본적인 메뉴들인데, 내용을 보면 사실 평범하지 않다.

예를 들어 진미채 무침을 할때 소주 3큰술을 종이타월에 부은 다음 축축한 상태로 진미채를 감싸주면, 진미채의 잡내를 제거하고 살균작용을 해준다거나, 연근 조림을 할 때 연근을 흑설탕에 넣어 버무리고 5분 정도 지난 후 흑설탕이 어느 정도 녹은 다음에 끓인다는 것, 그리고 폭탄 달걀찜을 할때 달걀과 함께 튀김가루 또는 밀가루를 반큰술 넣어준다는 팁은 바로 실전에 사용해보고 싶은 아이디어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마 같은 요리를 숱하게 해보았다고 하더라도 이런 내용들은 알지 못했던 경우도 많을 것이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고, 실제로 요리를 매일 하고 있기도 하고, 하다 보니 매일 하는 집밥의 종류와 메뉴가 사실 거기서 거기라 나도 요리책을 꽤 많이 본 편이다. 그런데 점점 사람들이 복잡한 요리보다는 쉽고, 빠르게, 간편하게 할 수 있는 요리들을 선호하다 보니 요리책에 실려 있는 레시피들도 굉장히 간단하다. 설명이 적고, 과정도 간소화된 책들이 많아서, 실제로 해당 레시피로 요리를 하다 보면 좀 헤매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시작부터 목적이 '정확한 레시피의 공유'라고 하고 있는 만큼 구체적인 레시피들을 수록하고 있어 매우 실용적이다.

 

언젠가부터 집밥 열풍이 뜨거워졌다. 흰 쌀밥과 정갈하게 차려진 반찬이 나오는 한식당들이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끼니는 챙기고 살자는 취지의 먹방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모아 요리하는 과정 자체에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쏟기도 한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어떤 재료가 들어가고, 어떤 방식의 조리방법이 쓰이는지 알려면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요리를 전혀 안 해본 사람이라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수도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기본에 충실한 레시피북이 아닐까 싶다. 바로 이 책처럼 말이다.

 

요리를 처음 시작하는 요리 초보부터 요리 조금 할 줄 안다는 경력직 주부까지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책이다. 그것도 '맛있고 건강하게' 밥상을 채우는 비법이 담겨 있어 더욱 특별하다. 재료를 준비하고, 음식을 만들고, 그리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요리와 일상을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집밥은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완성시켜주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반찬들이지만, 그 평범한 맛에 '엄마의 손맛'을 더한다면 최고의 집밥 메뉴가 될 것이다. 이 책과 함께 요리 초보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주부 9단은 맛을 더해주는 비법들만 활용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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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해자들에게 - 학교 폭력의 기억을 안고 어른이 된 그들과의 인터뷰
씨리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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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 가면서 이런 게 얄미웠어요. 가해를 했던 애들이 두 부류로 나뉘어요. 어떤 애들은 잘 안 풀리는데, 그러면 뭐 좋은 마음이 들진 않아도 최소한 화는 덜 나요. 근데 너무 잘 풀린 애들을 많이 봤어요. 누가 들어도 알 만한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는 애도 있고, 굉장히 좋은 친구로 평판이 나는 애도 있고, 허탈해지는 느낌 있잖아요. 저지른 사람은 없고 당한 사람만 있구나, 결국에는. 그 생각이 제일 많이 들었어요.    p.50~51

최근에 유명 연예인의 과거 학교폭력 행적을 피해자들이 폭로하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연예인들 중 일부는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며 잘못을 부인하거나, 피해자와의 사이에서 오해가 있었다는 식으로 변명하거나, 혹은 그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활동을 중단하기도 한다. 고등래퍼, 프로듀스 101 등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출연자가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것이 밝혀져 논란을 불러 일으켜 소속사에서 방출되거나 프로그램에서 하차되는 경우가 있었다. 대체 그들은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질러놓고서 아무렇지도 않게 방송에 출연할 생각을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가해자들에게는 그 당시가 그저 어리석은 날들의 실수 내지는 이미 지나가 버린 순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피해자들은 학교폭력 경험의 순간을 10, 20년 계속 끌어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언제나 가해자는 사라지고 피해자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10대 시절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한 채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온전히 담고 있다. 인터뷰어이자 이 시리즈를 기획한 최윤제 피디를 비롯해, 인터뷰이 10명 모두가 학창 시절 왕따였던 기억을 갖고 있으며, 그 일로 인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간진한 채 살아왔다고 말한다. 이들뿐만 아니라 그외 392명의 설문 응답자들이 모두 학창 시절 왕따였으며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다. 당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상을 하기도 했고,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던 이들도 있었으며, 어른이 된 후에도 지독한 트라우마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소외를 경험한 이들 대부분이 당시 무너졌던 존엄성이 회복되지 않은 채로 어른이 되어 버렸다. 정신과 의사들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의 아픔을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나 사실 왕따였어."라는 고백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이유가 있든지 간에 폭력을 정당화해선 안 돼요, 절대로. 그리고 내 편 없이 힘들 때 그래도 믿어요, 자신을. 이렇게 같이 싸워 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니 혼자 있지 마요. 내가 겪은 아픔들을 조금이나마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꼭 우리가 아니어도 괜찮으니 누군가에게 말해 줘요. 숨 막힌다고. 괴롭고 힘들다고. 살려 달라고. 같이 있어 줄게요. 포기하지 마요. 그리고 미안해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주지 못해서요. 더 노력할게요. 힘내요. 우리.     p.259

<왕따였던 어른들 Stop Bullying> 프로젝트는이렇게 시작되었다. 2019 4월 유튜브, 학창 시절 '왕따'를 당했던 끔찍한 기억을 여린 몸에 새긴 채 그대로 어른으로 커 버린 이들 10명이 모여 각자 자기 경험담을 털어 놓는 방식의 이 인터뷰 영상 2편이 올려진다. 이 인터뷰 영상물들은 순식간에 조회 수 300만 회를 넘기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그에 힘입어 2편의 영상물이 더 제작되었다. 이 시리즈는 6개월여가 지난 지금까지 누적 조회 수 300만 회를 기록하며 더 많은 이들에게 퍼져 나가고 있다. <나의 가해자들에게>는 바로 이 영상물에 담긴 인터뷰 전문을 다듬어 실은 책이다. 영상물들의 재생 시간은 고작 20여 분 남짓이지만, 실제 인터뷰하고 이야기 나눈 시간은 5시간이 훌쩍 넘는다.

학교폭력은 점점 더 은밀해지고, 잔혹해지고 있다. 가끔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 끔찍해졌는지 무섭기도 하다. 게다가 피해학생이 학교폭력 사실을 털어놓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부모님에게 걱정 끼치기 싫어서, 문제를 더 키우기 싫어서, 말해봤자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체념해서, 더 큰 보복이 두려워서 등등의 이유로 입은 다무는 아이들이 많다. 하지만 침묵은 가장 나쁜 대응 방식이다. 학교폭력을 남의 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지만,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학교와 사회가 더 적극적으로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피해자들이 날것 그대로 전하는 생생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왕따가 실제로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실히 인식하는 계기가 되고, 같은 아픔으로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 더 없는 공감과 위로가 되어준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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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안 맞네 그럼, 안 할래
무레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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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만든 하이힐은 정말로 아름답다. 그건 인정한다. 샌들도 놓여 있는 것만으로 아름다운 게 있지만, 마찬가지로 놓여 있는 것만으로 자태가 아름다운 하이힐이 있다. 나는 크리스찬 루부탱의 하이힐을 실물로 보고, 세련된 사람들이 루부탱이라면 설레는 이유를 절실히 이해했다. 하나같이 작품이고, 너무나 아름다운 구두였다. 다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과 자기가 신고 싶다, 신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절대로 내게는 어울리지 않을 구두였다. 내게는 내 체형에 어울리는 구두가 있다.   p.99~100

<카모메 식당>, <모모요는 아직 아흔 살>, <결국 왔구나> 등의 작품으로 만나왔던 무레 요코가 쓴 '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들에 관한 에세이이다. 이제 60대를 맞은 무레 요코는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상이 강요되었던 일본 사회에 나타난 돌연변이 같은 존재라고 한다. 온갖 편견과 고정관념 중에서 자신에게 불편한 것들을 '정중하게, 그렇지만 단호히' 거부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하기를 거부하는 목록들이 뭐 거창하고 대단한 것들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울 수도 있는 그런 것들이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당연히 결혼을 해야 한다. 그리고 결혼하면 또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들 하는데, 대체 그 당연함은 누가 만든 것일까. 모두 세상이 만든 '당연함'인데 다들 너무 신경쓰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사회적 관습이나 규칙들에 반발하고 싶지 않아서, 내지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눈치를 보느라, 정작 나다운 모습을 잃어 버리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레 요코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이 자주 다투는 모습을 보면서 결혼에 대한 이미지가 아주 나빴다고 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는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우선이었던 데다, 심리적,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을 때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괜찮은 남자들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육아를 하면서 일을 하기는 힘들었고, 사람들의 시선 또한 당연히 여성이 결혼을 하면 일은 그만두는 게 다반사였다. 그녀가 바라는 건 혼자서도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일이었지, 남편이나 자식이 있는 가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기준에 너무도 당당하게 ''라고 할 수 있는 그녀의 인생이 멋지게 보이는 건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사람은 '한다, 하지 않는다'를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옛날부터 들어온 여자의 행복, 즉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늙으면 자식과 손자들이 부양해 주고,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저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루트를 완전히 무시했다. 전부 하지 않고 살고 있다. 결혼은 번식의 근본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도 있다....예스보다 ''라고 말하기가 어렵지만, 10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0가지 삶의 방식이 있는 게 당연하다. 자신감을 갖고 세상의 기준에 ''라고 할 수 있는 인생도 좋다고 생각한다.    p.155~156

누구나 다 이용하는 인터넷 쇼핑은 편리하지만, 오배송이 되는 경우도 있고 택배 상자 처리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몇 번 그런 일들을 겪고 나서 이제는 옷도 책도 인터넷으로 사지 않고 보니, 너무 편해졌다고. 좋다는 화장품도 이것 저것 써보았지만, 정작 피부에 맞지 않는 것들이 많아서 오히려 트러블이 생기는 경험을 하고 나서 지금은 최소한의 제품만 사용한다고. 그렇게 그녀는 예뻐지는 것보다는 트러블이 생기지 않는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신용카드 대신 현금을 사용하고, 커피를 너무 좋아했지만 몸에 무리가 오자 이제는 카페인리스 제품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하이힐, 스마트폰, SNS, 포인트 카드 등등... 사람들이 다 하니까, 누구나 필요하다고 하니까 나까지 굳이 할 필요는 없다는 그녀의 목록들이다. 나다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맞는 것과 안 맞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본다. 눈치 볼 것 없이, 스트레스 받지 않고, 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 두 달 정도 남은 올해에는 무엇을 하지 않을지, 그리고 다가올 2020년에는 또 무엇을 하지 않겠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지 말이다. 예전부터 쉬는 날 집에 가만히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 어쩐지 낭비처럼 느껴지곤 했었다. 항상 시간을 쪼개고 나누어서 바쁘게 사는데 너무 익숙해서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간을 견디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별일 없이 그냥 뒹굴뒹굴 시간을 보내는 걸 나는 참 못한다. 항상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간이 흘러 가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고, 가끔은 몸도, 마음도 좀 쉴 수 있는 여유를 스스로에게 안겨 주고 싶다. 무레 요코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만들어가는 방식을 읽다 보니, 나도 조금은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귀찮은 일은 그냥 미뤄보기도 하고, 가끔은 아무 것도 안 하는 채로 시간을 흘려 보내기도 하고, 뭐 어때. 그게 나야. 라고 말할 수 있는 내일을 고대하면서 말이다.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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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책
니나 게오르게 지음, 김인순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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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 상태에 있는 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부인을 사랑한다고 절대 말하지 않을 사람과 결혼하는 것과 같아요." 닥터 사울이 좀 더 조용히 말한다. "그런데도 부인은 부인의 모든 애정과 에너지를 그에게 쏟아 부어야 합니다. 부인의 모든 사랑을. 부인이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면 말이죠. 행복한 결말 없이. 현재하지 않는 사람과 부인 인생의 많은 부분을 보내게 될 겁니다."

그게 무슨 대수라고? 그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헨리와 함께 지낼 때는 늘 그랬다.    p.106~107

템스강을 오가는 유람선에서 배의 난간 옆에 서 있던 어린 소녀가 강물로 떨어진다. 해머스미스 다리 위에 있던 사람들은 아이가 떨어지는 걸 보지만 모두 너무 놀라 꿈쩍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수영을 한 게 25년 전임에도 망설임 없이 물 속으로 뛰어 내리는 한 남자가 있다. 종군 기자로 전쟁터를 누비던 헨리는 그 시절 만났던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헨리는 무사히 아이를 구하고 나오지만, 역광 때문에 그를 보지 못한 운전자가 모는 자동차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하고 만다. 그 사고로 그는 의식불명 상태, 즉 코마에 빠진다. ‘코마라는 단어가 그리스어로깊은 잠을 뜻한다고 하는데, 충격적인 사고로 헨리는 깊은 잠 속에 빠져 들고 만다.

그리고 15일 뒤, 열세 살 샘은 아빠를 만나러 병원에 온다. 벌써 열네 번째 방명록에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고, 그러느라 학교에서 이 수업 저 수업을 한 시간씩 빼먹고 있다. 샘은 멘사 클럽에 가입한 수재이고, 공감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래보다 매우 성숙한 소년이다. 샘은 가족은 엄마와 새아빠 스티브와 동생 맬컴이지만, 언제나 아빠인 헨리를 그리워해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이 병원에 인위적 혼수상태에 빠진 상태로였지만 말이다. 샘은 아빠를 만나러 오면서 다른 병동에 역시 의식불명 상태로 입원해 있는 또래의 여자아이 메디를 만나게 된다.

 

런던은 두 세계를 가르는 이른 아침의 안개에 뒤덮여 있다. 불안한 걸음걸이로 밤의 어둠을 헤매는 방랑자들의 세계. 나도 한 때 이 세계에 속했다. 한편 일터로 출근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야 하는 사람들의 세계. 두 개의 평행 세계. 두 세계가 마주치는 곳에서, 튜브에서, 버스에서, 이른 아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집에서,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무시한다.

밤의 방랑자들은 자신들 인생의 또 하루가 지나간다는 걸 참지 못하고, 끈을 놓치지 않으려 그 하루를 어둠 속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은 자신들 앞에 있는 하루를 허비하지 않으려 한다.    p.246

책을 읽다 보면 누구나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문학의 마법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읽고 뭔가 달라진다. 허구의 이야기가 우리의 현실에 금이 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페이지의 한 문장, 하나의 단락, 그리고 숨겨진 여백을 통해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아주 잠깐이라도 주마등처럼 스치는 우리의 일생을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순간은 책을 덮어도 잊을 수 없다. 앞으로 펼쳐질 기나긴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사실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책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런 작품을 만나게 되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참 설레인다. 바로 이 작품처럼 말이다. 이 작품은 '우리가 살 수도 있을 다른 삶들이 존재한다는 걸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보통 불의의 사고가 등장하고, 코마 상태에 빠진 인물이 나오는 작품이라면 앞으로 이어질 서사가 어느 정도 예상이 될 것이다. 치료 과정에서 오는 슬픔과 고통, 주변 사람들의 삶과 그 이후에 벌어지게 되는 비극으로 인해 신파성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서사를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인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헨리가 겪는 꿈의 세계와 코마 상태에 빠진 그를 지켜보는 이들의 진짜 현실을 교차 진행시키고 있다. 그가 현실에서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그의 아들과 사랑을 마음속에 품은 채 말하지 않아 오래도록 함께 하지 못했던 전 연인이 병원에서 만나게 되고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단순한 슬픔이나 눈물이 아니라 감정을 공유하는 이해의 순간이다. 그리하여 과거와 현재가 헤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하고, 삶과 죽음이 만나는 경계에서 현실과 환상이 어두운 꿈속을 유영한다. 이 작품은 오래 전 <종이 약국>이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니나 게오르게의 신작이다. 전작에서는 손님의 상처와 슬픔을 진단하고 그에 맞는 책으로 처방하는 독특한 약국이 등장해 책의 힘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뭉클하게 펼쳐졌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사변 소설을 출간하는 출판사를 운영하는 에디를 통해 문학의 힘과 역할을 보여준다. 누구라도 상처의 이면을, 상실의 바깥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운 것을 해내는 것이 바로 문학이고, 이야기의 힘이다. 오랜 만에 눈물 범벅이 되어 읽은 작품이다. 꿈 같은 소설이지만, 그 어떤 작품보다 현실과 맞닿아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작가가 자신의 최근 작품들에 직접 이름 붙인삶과 죽음 3부작의 마지막에 해당되는 작품이라고 하니 다른 작품들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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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손을 보다
구보 미스미 지음, 김현희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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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동안에 푹푹 쌓인 잡동사니와도 같은 기억을 품고 있다가 비눗방울이 터지듯이 그 기억들이 하나둘 사라져버릴 때, 과연 난 누구의 이름을 부를까? 혼다 씨의 작고 둥근 등을 바라보면서, 일본식 주점 현관에서 보앗던 미야자와의 등을 떠올렸다. 미야자와가 지난번 우리 집에 온 날로부터 어느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장마가 끝나고, 벌써 7월의 끝자락이 다가오고 있었다.   p.47

소노다 히나는 노인요양시설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다. 부모님을 사고로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랑 단 둘이 살면서 언젠가 할아버지를 병간호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작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현재는 혼자 살고 있다. 혼자 남겨진 외로움에 노인요양복지전문학교에서 만난 동창 가이토와 연애를 했지만,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더욱 고독해진다는 것을 깨닫고 헤어졌다. 하지만 헤어진 후에도 가이토는 이런저런 핑계를 들며 그녀를 찾아왔고, 그녀 역시 특별히 그를 밀어내지 못하며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모교의 입학 안내 팸플릿을 제작하기 위해 찾아온 광고회사의 미야자와를 만나게 되면서 가이토와 함께 할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야기는 소노다 히나의 시점에서 시작해 광고회사 사장인 미야자와, 히나의 전 남자친구인 가이토, 그리고 가이토의 직장에 신입으로 들어온 하타나카의 시점으로 계속 교차 진행된다. 하나의 장이 끝날 때마다 앞 장에서 벌어진 사건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사실 그때 상대가 올랐던 각자의 상황은 무엇이었는지 여러 인물의 시점으로 보여진다. 사랑에 모든 걸 쏟아 부을 만큼 외로운 여자와 자신을 원하지 않는 여자에게 마냥 집착하는 남자, 사랑 따윈 내 삶에 필요 없다고 여기는 여자와 타인을 사랑할 수 없는 남자, 사랑에 대해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네 남녀의 이야기는 연애의 여러 모습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어째서 나는 이 바다가 보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내 안에도 저 바다의 파도처럼 나와 타인을 갈기갈기 찢어서 갈라놓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나는 아무와도 마음을 깊이 통하고 통하고 싶지 않다. 타인에게 나 자신을 이해받고 싶지도 않다. 누군가에 대해서 쉽사리 잘 아는 척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 나는 누군가와 마음을 서로 통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나 자신도 그 사실을 훨씬 이전부터 어렴풋이 눈치 챘을 것이다. 나 혼자의 세상에서만 나는 살아갈 수 있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는 것이다.    p.234~235

대담하고 파격적인 장면 묘사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제159회 나오키상 최종 후보작으로 섬세한 문장과 뛰어난 심리묘사로 연애의 달콤함과 씁쓸함을 담고 있다. 아내와 별거 중인 미야자와는 히나와의 만남을 계기로 살아갈 의미를 되찾지만, 그녀의 곁에 계속 머무를 수 없다. 가이토는 히나를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선 힘을 써서 억지로 그녀를 품고, 상처를 주고,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대놓고 추근대며 접근하는 하타나카를 만나 히나를 잊으려고 한다. 남편과 이혼한 하타나카는 한 달에 한번 남편의 요구로 아이를 만나러 가지만, 모성이라는 게 일절 없어 겨우 그 한 시간이 고역이기만 하다. 정작 자신이 낳은 자식한테는 상냥하게 대하지 못하면서, 하루하루 죽음에 다가서는 노인들에게는 상냥하게 대할 수 있는지 스스로도 신기해하는 그녀를 이해하기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늙어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을 보살피는 일을 하는 히나에게 어린 소녀가 묻는다. "사람은 언젠가 죽잖아요. 근데 왜 태어나는 거죠?" 소녀의 순진한 질문에 명쾌하게 대꾸할 수 있는 정답을 가지고 있는 어른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언젠가 죽게 되어 있는데 왜 태어나는 걸까, 어차피 언젠가 헤어지고 말 거라면 대체 왜 모든 걸 다 바쳐서 사랑하는 걸까. 사랑의 끝에 쓸쓸함만 남는 거라면, 영원할 수 없는 그 감정을 우리는 왜 갈구하는 것일까. 감각적인 문체로 섬세하게 사랑의 감정들을 묘사하고 있는 연애 소설이지만, 삶이란 무엇인지,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작가는 한국 독자들을 위한 메시지로 첫 장에산다는 것의 애달픔을 마음껏 음미해주세요라고 썼다. 이 책 속 이야기를 읽는 동안, 그렇게 애달픈 마음으로 삶을, 사랑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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