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작 - 잠 못 드는 사람들 / 올라브의 꿈 / 해질 무렵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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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운명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나는 슬픔이라고, 무언가에 대한 슬픔이거나 아니면 그냥 슬픔이라고 답할 게다, 음악 속에서 그 슬픔은 가벼워질 수 있고 떠오를 수 있게 되는 거고 그 떠오름은 행복과 기쁨이 될 수 있어, 그래서 음악이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나는 연주를 해야만 하는 거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겐 이 슬픔의 무언가가 남아 있는데 그게 수많은 사람들이 연주를 듣는 걸 즐기는 이유야, 음악이 그들의 삶을 들어 올리고 고양시켜 주거든,     p.49

이야기는 17세 두 연인이 머물 곳을 찾아 헤매는 것으로 시작한다. 연주자인 아슬레와 현재 임신한 상태인 알리다는 몇 시간이나 거리들을 돌아다니고 있지만, 그 어디서도 방을 빌린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들이 아직 결혼을 치를 요건이 되지 않는 어린 나이 아직은 떳떳하지 못한 관계로 보여서 일수도, 혹은 알리다가 만삭이라 언제 출산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늦가을이고, 어둡고, 춥고, 곧 비도 내리기 시작할 것 같았다.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겨우 어느 집에 들어가게 되고, 알리다는 그곳에서 아기 시그발을 낳는다. 1 <잠 못 드는 사람들>은 그렇게 아기의 탄생에 이르는 과정으로 끝이 나고, 2 <올라브의 꿈>이 시작된다.

아슬레는 이제 올라브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살고 있었고, 반지를 사기 위해 도시를 헤맨다. 그러다 자신을 아슬레라고 부르는 어딘가 낯설지 않은 노인을 만나게 된다. 노인은 한 남자와 어떤 여인이 죽은 채 발견되었고, 그 후로 딸이 자취를 감추고, 한 늙은 산파 여인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렇게 과거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올라브의 발목을 잡는다. 누구나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하는 법, 모든 것은 결국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3 <해질 무렵>에서는 시간이 꽤 흘러 아슬레가 곁에 없는 알리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알리다와 아이는 여전히 살 곳이 없어 거리에서 지내는 중이었고, 제대로 먹지 못해 무척 야윈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알아보는 오래전 동네 어른을 만나 아슬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전해 듣는다. 그러나 알리다는 자신과 아슬레가 여전히 서로 함께 한다고, 자신은 그 안에 있고, 그는 자신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존재하고 있어, 앞으로도 늘 그럴 거야, 그럼에도 그녀는 아이와 함께 살아 가야만 한다.

너 거기 있구나, 우리 착한 아기, 넌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기야,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지, 여기 반짝, 저기 반짝, 겁내지 말렴, 우리 아기, 우리 소중한 아기, 그러자 아슬레는 푸르게 반짝이는 피오르 위로 떠오른다 그리고 알리다가 잘 자라 우리 아기, 너는 그저 떠오르고, 너는 그저 살아가고, 너는 그저 연주하렴, 우리 착한 아기, 라고 말하자 그는 푸르게 반짝이는 피오르를 넘어 높이 푸른 하늘로 떠오른다, 그리고 알리다가 아슬레의 손을 잡고 그는 일어서서 알리다의 손을 잡는다    p.187

욘 포세의 작품을 처음 만난 건 얼마 전 출간되었던 <아침 그리고 저녁>이었다. 고독하고 황량한 피오르를 배경으로 평범한 어부가 태어나고 또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을 꾸밈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던 그 작품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등장 인물이 많은 것도 아니며, 화려한 미사여구로 치장한 이야기도 아닌데 이상하게 시종일관 눈을 뗄 수가 없는 마법 같은 작품이었으니 말이다. 이번에 만난 작품은 전작에 비해 최근에 발표된 이야기들이다. 「잠 못 드는 사람들Andvake(2007)과 「올라브의 꿈Olavs draumar(2012) 그리고 「해질 무렵Kveldsvævd(2014) 세 편의 중편 연작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으로 2015년 북유럽 문학 최고의 영예인 북유럽 이사회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3부작>은 세상에 머물 자리가 없는 연인과 그들 사이에 태어난 한 아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세 작품 모두 줄거리 자체는 간단하고, 분량도 길지 않지만 사실 읽기는 만만치 않다. 마침표와 구두점 없이 쉼표로만 이어진 텍스트는 작품을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덩어리로 보이게 하고, 반복되어 사용되는 어휘와 구절은 소설을 자유시나 음악처럼 읽히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작가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욘 포세는 일찍이 음악 활동을 했었고, 음악을 그만두고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음악의 형식을 글쓰기에 적용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고유한 구조와 수많은 반복을 지니게 되었고 간결한 문장을 사용하면서, 동일하거나 유사한 어구를 반복하고 그 리듬을 살리는 수사법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에서도 역시나 최소한의 인물과 최소한의 대사로 구현되는 이야기이지만,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여러 번 읽고,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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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중인 시체 Corpse on Vacation K-픽션 스페셜 에디션
김중혁 지음, 정이정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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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다 가둔 거예요?"

"나는 버스에 갇혀서 오래 살 거예요. 엄청나게 오래살 거야. 심장을 기계펌프로 바꾸고, 팔다리는 그거 알죠? 나와라 만능 팔, 가제트. 다리는 무쇠다리. 아니, 다리는 무쇠바퀴. 머리도 컴퓨터로 바꿀 건데 절대로 업데이트 안 하고, 옛날 기억만 계속 재생시킬 거야. 그래서 아주아주 오래 살 거예요."     p.19~20

버스에다 '나는 곧 죽는다'라고 붙여 놓고, 전 재산을 싣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프리랜서 논픽션 작가인 ''는 새로운 아이디어도 없었고 새로운 생각을 발전 시킬 배터리도 없는 상태였다. 경제인들의 인터뷰집을 출간해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던, 짧았던 그 전성기가 지나가고 나서 그는 첫 번째 삶이 끝났다는 생각을 한다. 그즈음 그의 고민은 두 번째 삶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였고, 두 번째 직업을 찾아야 했지만 걸맞은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 방송에서 버스 여행자의 모습을 보고는 그의 얼굴과 눈빛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아 그를 찾아가기로 한다.

 

그렇게 ''는 개조한 버스로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여행을 다니는 주원 씨(가명)와 함께 버스 여정을 함께 하게 된다. 처음에는 주원 씨에게 버스 여행을 시작하게 된 계기라든가 여러 가지에 대해서 인터뷰를 시도했었지만, 그는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해댔고 ''는 언젠가부터 인터뷰를 포기하고 그저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기로 한다. 그리고 그의 과거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들에 대해 끊임없이 그와 대화를 나눈다. 그가 왜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인지, 그가 밤에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는 이유에 대해, 어느 순간 '' ''의 삶을 온전히 경험하게 된다. '휴가 중인 시체'라는 제목만 보고 추리 소설이나 스릴러를 예상했는데, 시체라는 단어의 의미는 상징적인 은유였다. ''가 첫 번째 삶을 끝내고, 주원 씨와 함께 버스 여행을 다니며 두 번째 삶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여태껏 한 번도 죽지 않고 계속 살아 있는 존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죽음과 삶이 반복되는 그 어딘가에서 이 작품은 우리에게 묻는다.

 

 

"아주아주 간단한 실수를 했을 뿐인데 큰 벌을 받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비극이 다 그렇지 않나요? 신화 속의 주인공들도 그렇고."

"신화라... 그렇네요. 신화 속 인물들이 그렇죠. 그런 사람들에게는 벌이 곧 용서일까요? 벌을 충분히 받았다면 그걸로 용서받은 것으로 생각해도 되는 걸까요?"    p.71~72

<K-픽션> 시리즈는 최근에 발표된 가장 우수하고 흥미로운 작품을 엄선해 한영대역으로 소개하는 시리즈로, 한국문학의 생생한 현장을 국내외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기획되었다고 한다. 매 계절마다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있으며 현재 총 25권이 출간되었다. 박민규 작가를 시작으로 손보미, 황정은, 천명관, 장강명, 김애란, 김금희, 최은영, 구병모, 조남주 등등 지금 가장 주목받는 작가들의 작품을 모두 만나볼 수 있는 시리즈이다. 무엇보다 매 페이지마다 왼쪽에는 한글로, 오른쪽에는 영어로 함께 수록하고 있어 더욱 흥미롭게 읽히는 시리즈이기도 하다.

번역은 제2의 창작물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문화적 배경이 다른 한 나라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지난한 작업의 결과물이다. 한강 작가가 맨부커상을 수상했을 때도 번역가와 함께 상을 받고, 번역가도 작가만큼이나 주목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작품의 내용을 고스란히 포함하면서도 다른 언어권 독자들이 읽을 때에 문장의 호흡과 여백의 분위기까지 살려주어야 하니, 번역이란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다. <K-픽션> 시리즈의 영어 번역은 세계 각국의 한국문학 전문 번역진이 참여했으며, 번역과 감수, 그리고 원 번역자의 최종 검토에 이르는 꼼꼼한 검수 작업을 통해 영어 번역의 수준을 끌어올렸다고 한다. 분량이 짧은 단편소설인 만큼 먼저 원작을 쭉 읽고 나서, 영어 번역 페이지로만 다시 한번 읽어 보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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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시즌2 : 10~14 세트 - 전5권 (리커버 에디션) 미생 (리커버 에디션)
윤태호 글.그림 / 더오리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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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하는 건 좋은데 너무 힘들게 일하진 말아요.

힘들게 일하면 일로 보상을 받고 싶고, 일로 성취하고 싶고 일로 만족하고 싶어져요.

가족은 상관없어져요. 자기 자신도요.    -14, p.249~250

<미생>이 리커버 에디션으로 새롭게 옷을 갈아 입었다. 이 작품은 2012 1월 처음 연재를 시작해, 2016 1월 시즌 2의 이야기로 이어졌고, 작년 봄 시즌 2 13권까지 출간이 된 상태였다. 이번에 바로 다음 이야기인 14권이 새롭게 출간이 되었는데, 출판사가 바뀌면서 기존의 표지와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리커버 에디션의 표지는 실재의 공간에 가상의 인물을 그려 넣는 식으로 표현되어 있어 더욱 인상적이다. 만화 속 인물들이 실제 극 중에서 매일같이 드나들어야 하는 곳을 실사로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어 더욱 생생하게 현실처럼 그려져 있다.

 

 

<미생> 2012년 첫 연재 후 수많은 직장인들의 공감을 자아내며 가히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다. 2014년에는 tvN 드라마로도 방영이 되어 최고의 드라마라는 평가를 얻기도 했다.

기존에 출간된 버전으로 13권까지 읽어 왔다면, 계속되는 이야기이므로 이번에 새롭게 출간되는 14권만 구매해서 읽으면 될 것이다. 혹은 이 작품이 궁금했는데 분량이 많아서 선뜻 도전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시즌 2의 이야기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시즌 2는 아직 5권 밖에 출간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시즌 1의 이야기를 읽지 않았더라도 상관없이 읽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늘상 말하곤 한다. '일이나 해.' 무시당하거나 인정받지 못하거나 배려 받지 못하고 힘들어질 때 위로처럼 툭 던져주는 그 말. '일이나 해.'

하지만 모두 알고 있다. '일이나' 하기엔 '일이나'로 끝나는 ''은 없다는 걸.

어떤 일은 잘하고 싶어서, 어떤 일은 하기 싫어서, 고과에 반영되니,  회피하고 싶으니, 내 능력으론 안 되는 일이니... '일이나' 하고 있기는 매우 힘들다.

돈 받은 만큼만 일하고 싶지만 돈 때문에 일하는 것 또한 빈궁하고 무참하여 일에 나를 얹는다.      -14, p.256~258

시즌 1의 이야기가 대기업의 이야기였다면, 시즌 2는 위태로운 중소기업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대기업 계약직 사원인 장그래는 중소 기업의 사원이 되었고, 오상식 과장은 오상식 부장으로, 김동식 대리는 과장이 되었다. 특히나 신간인 14권에서는 전체의 프리퀄 스토리인 오상식의 과거 젊은 시절을 담고 있다. 또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빨간 눈에 담긴 사연이 드디어 밝혀지고 있어 이 시리즈의 팬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13년 기준 한국의 대기업이 약 3천개, 고용 인원이 192만 명이라면, 한국의 중소기업 수는 340만개, 중소기업 고용 인원은 1,342만 명이라고 한다. 전체 노동자의 12.3프로가 대기업 현관을 향할 때, 대기업의 1천 배에 육박하는 중소기업을 향해 전체 노동자의 87프로에 달하는 종사자가 크고 작은 골목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마도 시즌 2의 이야기에 더 공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월급날 월급은 자연히 입금되는 것이라 생각했던 대기업 인턴 장그래가 직원 7명의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면서 회사가 월급날 직원들에게 월급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엄청나고 엄청난 성과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처럼, 대기업에서는 당연하던 많은 것들이 중소기업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장그래는 자신이 버는 돈이 눈에 들어오는 회사에서 '내 몫'의 월급 이전에 '내 몫'의 일을 하고 있는지를 더 첨예하게 고민한다.

오늘도 당연히 일을 했고, 내일도 여전히 일을 하고 있을 당신에게 이 작품은 묻는다.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여전히 '미생'인 당신이 '완생'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가 완전히 살아 있는 자가 되기를 응원한다. 세상 모든 직장인들을 위한 작품 <미생> 그리고 새롭게 시작되는 발걸음, 시즌 2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 긴 여정을 독자로서 함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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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시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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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너무 일찍 죽었어. 열세 살이었지."

"안됐군. 당신 같은 사람이라도."

"그렇지." 두 사람은 이제 갑판에 올라왔다. 도로는 바다를 보며 말했다. "나는 삼천칠백 년을 넘게 살았고 수천 명의 자식을 가졌어. 여자가 되어 아이를 낳아보기도 했지. 그런데 아직도 내 몸으로 낳은 아이가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다니. 나처럼 다른 존재가 태어났을까?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갔을까?    p.120

도로, 그의 일족 말로는 동쪽,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그는 삼천칠백 년을 살아온 인물로, 다른 사람을 죽이고 그의 육체를 옷처럼 입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불사의 존재다. 그렇게 그는 젊음과 힘을 유지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일족을 만들고 지키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찾아내 자신의 아이를 갖게 하거나 서로 교배시켜 새롭고 강한 일족을 만들며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아프리카의 한 부족마을에서 아냥우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태양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녀는 삼백여 년을 살아왔다.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원하는 대로 형상을 바꿀 수 있어 동물로도, 남자로도, 노인과 젊은 여성으로도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냥우는 도로의 일족이 아닌, 야생종(Wild Seed)이었다.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도로는 아냥우에게 제안한다.

“나와 함께 가면 당신 손으로 땅에 묻지 않아도 되는 아이를 보게 될지도 몰라... 내가 당신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자식을 주지."

불사의 존재라는 건 자신이 낳은 자식들이 나이 들어 죽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오랫동안 많은 이들을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떠나 보내며 살아온 아냥우이기에 그녀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와 함께 떠난 아냥우가 마주하게 되는 현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사람은 삼천칠백 년 넘게 살았어요. 그리스도가, 그러니까 이 식민지의 백인 대부분이 믿는 신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도 도로는 이미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래 산 후였다고요.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찰나를 스쳐 지나가는 존재였을 거예요.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부족이나 나라, 신과 악마조차도요. 모든 존재가 그를 남겨둔 채 사라지니까요. 하지만 당신, 태양의 여자인 당신은 예외일지도 몰라요. 당신이 다른 사람과는 다른 존재라는 점을 일러 주세요. 느끼게 만드세요.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세요."     p.256

2011 <야생종>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출간되었다 절판되고 나서, 중고 시장에서 꽤나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었던 옥타비아 버틀러의 걸작이다. 초능력자를 흑인 노예에 빗대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역사를 폭로하고 있는 이 작품은 실제로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과 교차되며 비현실적일 만큼 폭력적인 현실을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도로와 아냥우가 처음 만나는 17세기 말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19세기 중반 남북전쟁 전 미국에서 끝 중에 떠 있으면 읽는 동안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어 감정 이입이 어려워지곤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출발한 이야기라면, 어느 정도의 비약과 과장마저도 마치 진짜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가 넓어진다. 그런 면에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들은 출간된 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당대의 현실 속에서 읽힌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근대에 횡행한 노예제도의 폭력성을 고발하려고 도로와 아냥우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초능력자들을 교배시켜 불사의 존재를 만들려는 남자 도로의 모습은 미국 남부에서 흑인 노예를 인위적으로 교배시킨 사건을 상징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단순하게 이분법으로 그려낼 수 없는 것이고, 버틀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양 극단의 캐릭터 도로와 아냥우를 통해 그것을 한츰 더 깊이있게 그려내고 있다. '무언가를 얻을 때는 무언가를 잃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자신의 가치관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캐릭터라고 그녀 스스로 말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용당하는 가임여성, 인종차별과 노예제, 강자와 약자 사이의 관계,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사라지고 있는 비극까지.. 현실 세계의 갈등과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작품이라 묵직한 무게감을 안겨준다. 이 작품은패턴마스터 시리즈에서 네 번째로 출간된 작품이자 프리퀄이라고 한다. 국내에서도 이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을 곧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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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하다
선현경 지음, 이우일 그림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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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란 그냥 아는 사람과는 다르다. 나만 알고 있는 뭔가가 있다. 그런 특별함이 친구의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로 포틀랜드와 호놀룰루는 내게 친구 도시다. 자주 가는 공원이 있고, 거기엔 내가 좋아하는 특별한 나무 그늘이 있으며, 넓은 해변의 모래사장에는 나만 알게 된 좋은 자리가 생겼다... 새로 생긴 식당이나 멋진 가게는 관광객이 더 잘 안다. 나만 아는 냉이향이 풍기는 길모퉁이가 있고, 나만 알게 된 바다의 암초가 있으며, 나만 알게 된 파도가 잘 오는 장소가 있다. 그냥 깊어졌을 뿐이다. 친구처럼.    p.149~151

2015년 가을 어느 날, 그림책 작가인 아내 선현경과 이우일은 익숙한 서울의 일상을 잠시 멈추고 미국 오리건 주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로 날아갔다. 세상 모든 여행자들의 로망인 현지인처럼 그곳에서 눌러앉아 직접 살아보기를 실천한 그들의 이야기는 <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이라는 여행 산문집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단순히 몇 주나, 몇 달 여행을 다녀온 경험을 쓴 것이 아니라, 아예 그곳에 이 년이라는 시간 동안 눌러 앉아 살아본 것 일상을 풀어낸 거라서 여타의 여행 에세이들과는 완전히 달랐던 기억이 난다.

 

2017 10, 부부는 포틀랜드를 떠나 또 한 번 낯선 도시 하와이 오하우 섬에 짐을 푼다. 이 책은 하와이에서 파도 타고, 글 쓰고, 파도 타고, 그림 그리며, 일년하고도 십 개월을 여행과 일상의 사이 그 어디쯤에서 만들어졌다.

이 책의 제목인 '하와이하다'는 포르투갈어 '창문하다(janealar)'에서 힌트를 얻어 새롭게 탄생한 말이라고 한다. 창문을 통해 세상을 만나고 생각한다는 의미의 '창문하다'처럼, 하와이를 통해 세상을 만나고 생각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선현경 작가 특유의 솔직하고 깊은 통찰을 담은 145편의 에세이와 이우일 작가만의 촌철살인의 유머를 담은 200여 컷의 일러스트가 만나 652일간의 조금 길고 특별한 하와이 살이가 펼쳐진다!

"지금보다 더 좋아지기를 바란다는 건 욕심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앞으로 내게는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가 없더라고. 시간이 가면 몸은 더 늙고 힘들어질 거야. 지구 환경도 더 나빠져 바다에 못 들어갈지도 몰라. 그래서 오늘에 더 충실하려고."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건 정신병 초기 증세라고. 다른 미래를 원한다면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부터 다르면 된다. 우린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좋은 오늘을, 함께 살아가겠구나.    p.191~192

동화 작가 선현경과 만화가 이우일 부부는 프로 여행러, 혹은 여행 중독자라고 칭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일상을 여행처럼 보내고 있다. 올해가 결혼 이십 주년이 된다는 이 부부는 결혼식도 아무 이벤트 없이 가까운 성당에서 식을 올리고, 긴 신혼여행을 해보자며 편도 티켓으로 유럽행 비행기를 탄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빙자해 마구잡이로 떠돌아 다니다 보니 일 년을 그렇게 여행을 다녔었다고 한다. 포틀랜드에 갈 때도 별 생각 없이 짐을 싸서 갔었고, 온 김에 하와이도 살아보자며 떠돌다 보니 어느 새 한국을 떠나 온 지 사 년이 지나고 있다고 하니 참 유별난 부부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그 무모함과 자유로움과 열정이 질투가 날 만큼 부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많은 여행을 함께할 수 있는 취향과 사고방식이 맞는 부부라서 부럽고, 일상의 익숙함이 지겨울 때마다 낯선 곳으로 가 그 소중함을 확인하고 돌아올 수 있는 여유와 용기 있는 도전 정신이 멋지게 보였다.

 

북태평양의 동쪽, 아름다운 남국의 섬 하와이. 청량한 공기, 전세계 서퍼를 유혹하는 에메랄드빛 바다, 마성의 파도, 명랑한 훌라댄스, 소박한 우쿨렐레, 건강한 먹을 거리, 그리고 모두를 반기는 '알로하 스피릿'의 친절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책이다.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화와이의 냄새와 색깔이 물씬 느껴지는 책이기도 하다. 심플한 겉 표지를 벗겨 내면 만나게 되는 속표지가 알달록 하와이안 꽃 무늬인데다, 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예쁜 색채감의 하와이 스케치들이 8장이나 수록되어 있어 눈부터 즐거워진다. 이우일의 유머러스한 일러스트들은 웃음을 자아내면서, 유쾌하고, 따뜻하다. 선현경의 솔직하고 담백한 글은 이십 년차 부부의 투닥거림과 알콩달콩 귀여운 일상들을 손에 잡힐 듯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언젠가부터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모 회사의 캠페인 슬로건처럼 이제 여행은 꽉 짜여진 스케줄에 따라 이곳 저곳을 단기간에 누비는 것이 아니라, 여행지에 머물면서 현지인처럼 진짜 그곳의 삶을 살아보고, 그 도시의 진짜 삶을 맛보는 것이 여행 트렌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을 때면 나도 한 번쯤은 이렇게 제대로 현지의 공기를 마시며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잠시 다녀오는 여행이 아닌, 이들처럼 그곳에 눌러 앉아 살아보는 그런 여행 말이다. 2019년 늦여름, 이제 이들 부부는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다음에는 어느 나라에 가서 살게 될 지, 또 어떤 유쾌하고 기분 좋은 여행이야기를 들려줄 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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