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 3미터의 카오스
가마타미와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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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대 블로그 사이트 아메바블로그의 톱랭킹 블로거가마타미와가 자신 있게 공개하는 코믹 일상툰이다. 저자는 '혼자 사는 가마타미와의 반경 3미터의 카오스'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파워 블로거이자,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왠지 길을 묻기 쉬운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에게 모르는 사람이 곧잘 말을 걸어온다고 한다. 그래서 재미있는 사람과 만난 일을 잊어버리기 아쉬워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 특별히 좋아했던 사람들, 재미있었던 사람들의 사건사고를 만화로 그리게 된 것이다.

 

일상에서 이렇게 특이하고, 재미있는 사람을 유난히 많이 만나게 되는 상황이 다소 비정상적으로 느껴지긴 한다. 화려한 말솜씨의 미녀 점원이 옷을 골라주다가 갑자기 자신이 변태라고 고백하거나, 패밀리 세일에서 딸의 옷을 사면서 다짜고짜 옷을 대보고 어떤지 물어보는 아주머니, 100엔샵에서 물건을 고르면서 비슷한 둘 중에 뭐가 나은지 상담을 요청하는 할머니, 은행 ATM코너에서 눈이 어두워 기기를 잘 다루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도와드렸는데 카드 비밀번호까지 알려주는 상황 등등... 실제로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개성 넘치는 인물들의 향연이다.

일상 속 유쾌한 사연들 외에도 타이완과 미국 여행기도 수록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던 타이완에서 엄청나게 긴장한 동시에 즐겁기도 했던 저자의 심정이 공감되어 더욱 재미있었다. 티켓 발권부터 혼자 밥 먹기, 택시 타기 등등 혼자서 낯선 해외에서 겪게 되는 상황들이 저자 특유의 유쾌함과 웃음 터지는 센스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여행기에서는 실제 여행 당시의 사진들도 수록되어 있는데, 사진들이 실사 만화처럼 편집되어 있어 더욱 독특한 여행기가 된다.

어린 시절부터 콤플렉스인 맥주병 탈피를 위해 수영장에 다니는 에피소드도 너무 재미있었다. 가격이 제일 저렴한 평일 낮반으로 등록한 탓에 할아버지, 할머니 밖에 없는 풍경 속에서 수영을 배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되는데, 그야말로 시트콤 한 편을 보는 것처럼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들어 주는 에피소드였다. 수영장 할머니들 캐릭터는 유별나긴 했지만, 괜스레 정이 가는 그런 인물들이기도 했다.

사실 길을 걷다가, 어느 가게에서, 음식점에서 저 사람 왜 저래? 싶은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은 그저 순간 웃고 넘기고 잊어 버리겠지만, 가마타미와는 그런 순간들을 일기로 쓰고 기억한다. 무려 십팔 년 정도나 일기를 써왔다고 하니, 아마도 습관이 되었을 것 같기도 한데, 재미있는 사람과 만난 경험을 보물이라고 생각하기에 아마도 더 그런 상황을 자주 마주하지 않게 되었나 싶다.

물론 이 책을 읽다 보면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 실제로 있단 말인가 싶은 대목도 종종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허구보다 더 말도 안 되게 이상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니 여기 소개된 혼자 간직하기 아까운 레전드 에피소드들을 읽으면서 공감해도 좋고, 아니더라도 그저 깔깔대고 폭소를 터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마도 당신은 이 책을 읽으면서 하루치의 웃음을 다 소진하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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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조금씩 너만의 시간을 살아가
유지별이 지음 / 놀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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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 한 장을 넘기면 '그렇게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동화는 늘 그렇게 말해. 나조차도 모르는 나의 결말을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는 건지 열심히 하면 성공할 거래.

왜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걸까. 작아지는 꿈을 외면했던 걸까. 마음을 열지 않았던 걸까. 그렇게 생각할 때 나에게 살포시 햇빛 한 줄기가 내려앉았어.    p.84

네이버 그라폴리오 인기 작가 유지별이의 첫 책이다. 작가는 틴에이저 일러스트 스토리 창작자 공모전에서 당선하며 데뷔했는데, 십 대 창작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감성과 메시지가 인상적이다. 누구나 거쳐온 학창 시절의 추억을 떠올려 볼 수 있는, 열아홉의 꿈과 스물의 낭만이 가득한 일러스트들이 청소년과 대학생 독자들에게 많은 공감과 위로를 안겨줄 수 있을 것 같다. 책도 예쁘고, 스토리도 마치 웹툰 처럼 이어지는 책이라 졸업·입학 시즌 선물하기에도 좋을 것 같다.

대학 졸업 후, 직장을 다니면서 사회인이 되고부터는 매일매일의 일상이 뭐 그리 바쁘고, 전쟁처럼 지나가는지.. 학창 시절을 돌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지금은 길을 걷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면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나 싶게 딴 세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때 그 시절 3월이면 새로운 선생님과 새로운 반 친구들에 대한 설레임과 한 해 동안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기대감으로 봄을 맞이했었다. 새 학년이 되면서 친했던 친구들과 한 반이 되면 조금 안심이 되었는데, 그들과 반이 갈리고 낯선 친구들만 가득한 교실에 들어서면 이번에도 마음에 맞는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살짝 두렵기도 했다.

그 짧은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미리 먹거나, 매점에 달려가 간식으로 배를 채우던 장면, 새벽에 학교에 가서는 밤하늘에 별이 총총 떠 있을 때가 되어야 집에 돌아와서 녹초가 되던 기억, 가끔 학교가 일찍 끝나는 날 방과 후의 포근한 공기와 햇살, 시험 시작 전 교실의 긴장된 분위기, 소풍과 수학 여행을 떠나던 순간의 두근거리는 설레임 등...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 전 그 날, 그 순간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내가 빛나면 남들이 나를 좋아해줄 테니, 웃어야지. 잘해야지. 참아야지.

내가 뒤처지면 감당 못 할 외로움이 찾아올 테니, 행복해야지. 노력해야지. 높아져야지.

그런데 그냥.... 빛나지 않더라도 나를 봐주면 안 돼?    p.183

보통 그림 에세이는 남녀의 연애와 사랑을 주제로 한 책들이 대다수를 이루는 데 비해 이 책은  열아홉의 꿈과 스물의 낭만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어 인상적이다. 작가가 열아홉의 나이에 데뷔했고, 바로 자신이 살아내고 있는 시간들을 현재 진행형으로 그려내어 더욱 또래 독자들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아니었나 싶다. 새학기가 시작되는 봄에서 시작해, 기말고사, 여름방학을 거쳐 가을을 지나며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겨울이 되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며 봄을 맞이하는 스토리이다. 소소하지만, 누구나 거쳐왔던 학창 시절의 추억들이라 뭉클하고, 따뜻하고, 설레이는 이야기들이었다.

작가의 말처럼, 어른이 되어도 서툰 건 똑같다. 꾸준히 앞만 보며 달려오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아무것도 모르던 때가 그리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부모님의 그늘 아래 있던 학생 신분에서 사회라는 거대한 세상으로 발을 딛고, 내가 하는 일로 인해 돈이라는 걸 벌게 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한 세계를 깨버리고, 다른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가면서 점점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힘들지 않은 척, 마음을 숨기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그렇게 마음의 여유를 잃어 버리고,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놓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 책은 위로와 휴식을 안겨준다.

나에게도 이렇게 빛나던 시절이 있었지, 추억하며 그 시간들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맑은 새소리, 살랑이며 볼을 간지럽히는 꽃바람, 반짝이는 빛의 조각들, 그리고 나무 그늘 틈으로 보이는 눈부신 반짝임까지.. 봄에 읽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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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 - a love letter to my city, my soul, my base
유현준 지음 / 와이즈베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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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간을 감정과 연관시켜 기억한다. 다양한 공간과 그 공간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한의원 약초 서랍처럼 여러 개 있다. 디자인을 할 때는 내가 그 공간에서 어떠한 느낌을 받기 원하는지를 먼저 생각한 후 그 서랍에서 필요한 공간을 찾아 대입하는 식으로 작업한다.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기억들이 나를 먹고 살게 한다.   p.87

사람은 일생 동안 만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 영화, 음악, 미술 등 예술도 한 사람을 이루는 모태가 된다. 그리고 시간을 보낸 공간도 그 사람을 만든다. 이 책은 건축가 유현준을 만든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인간으로서, 건축가로서 자신을 성장하게 한 도시의 요소와 장소들을 이 책을 통해서 소개한다. 생애 첫 기억인마루에서 시작해, 자신이 태어난 동네인 구의동에서 본격적으로별자리 여행을 시작한다. 엄마가 차고를 개조해 운영했던 피아노 학원, 엄마가 운영했던 파랑새 유치원, 가족과 함께 자주 갔었던 집 뒷동산인 아차산의 바위산 등성이, 시장을 지나 골목길 어귀에 들어서면 있던 동네 가게 '도매식품', 초등학교 스쿨버스의 맨 뒤에 있던 구석 자리, 친구들과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를 했던 골목길... 저자는 말한다 골목길은 경이로운 공간이라고. 골목길은 운동장이 되기도 하고, 놀이의 편을 나누면서 협상을 배우는 장소였고, 구슬치기를 하며 거래를 배우는 장소이자 경영을 배우는 장소였다고. 지금의 어린아이들은 이러한 사회적 지혜를 배울 공간이나 시간이 있기나 한지 걱정스럽다는 그의 말이 마음에 남는다. 지금은 도시에서 거의 사라진 공간이지만, 나에게도 어린 시절의 추억이 조금은 있는 곳이 바로 골목길이었다.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별자리란 나를 형성한 공간, 지금 나에게 필요한 공간 그리고 인생에서 희미하지만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공간을 의미한다. 연애하기 좋은 공간, 혼자 있기 좋은 공간, 일하는 공간, 일상적으로 통과하면서도 그 공간이 갖는 진가가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 도시에 숨겨진 보석 같은 공간 등에 대한 글을 읽다 보면 도시가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도 든다. 모두에겐 각자의 장소가 있을 것이다. 힙하지 않아도, 완벽하지 않아도 나에게만 특별하고 애틋한 그런 곳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어린 시절과 지금의 일상을 만드는 공간에 대해 생각해본다.

 

모든 길은 다 통한다. 홍대에서 한남동으로 가야 한다고 치자. 가는 길은 수없이 많다. 강변북로를 타고 가도 되고, 삼각지와 이태원을 거쳐서 가도 되고, 남산순환도로를 통해서 가도 된다. 신촌오거리를 통해서 가다가 길이 막히면 아현동사거리에서 우회전해 공덕동을 통해서 돌아가도 된다. 길을 바꿔 가도 목적지는 같다. 다만 경치만 달라질 뿐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계획했던 길이 막히면 다른 길로 가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모여서 새로운 풍경이 되는 것이다.    p.401

이 책에 소개된 건축가 유현준의 눈에만 반짝거리는 공간들은 한 개인의 역사이자, 도시에 보내는 러브레터이고, 여행 가이드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특별한 국내 여행지를 추천해주는 가이드북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리스 산토리니 대신 부산의 감천마을을, 스위스 대신 산정호수를, 타임스퀘어와 센트럴파크 대신 코엑스몰의 별마당 도서관을 추천한다. 감천마을은 산토리니와 공간 구성이 닮았고, 색상과 형태가 더 다양한, 컬러의 도시이다. 우리나라엔 호수가 많지 않은데, 특이하게 커다란 호수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산정호수이다. 별마당 도서관은 쇼핑몰의 복도가 모여드는 교차점에 자리해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는 공간 구조인데다, 쇼핑몰에서 유일하게 자연 채광이 들어오는 공간이다. 공짜로 앉아서 책이라는 콘텐츠를 즐기며 햇빛까지 볼 수 있어 특별한 공간이라는 거다. 이러한 공간들에 대한 글을 읽다 보니, 나와 도시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미처 몰랐지만 너무도 멋진 공간이 도시 속에 얼마나 많은지 새삼 깨닫게 된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집에서는 여동생과 한 방을 썼다. 어린이 책상이 두 개있었고, 이층 침대가 있었고, 작은 옷장과 네 칸짜리 책장이 하나 있었다. 그러한 구조로 거의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그 방을 사용했었는데, 방에 하나 있던 책장만은 오롯하게 내 차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겨우 책장 네 칸에 책을 얼마나 넣겠냐 싶지만, 당시에는 나의 보물 같은 장소였다. 대학을 가고 직장에 다니면서 독립을 해서는 그 네 칸짜리 책장이 두 개로 늘어났다가, 결혼 후 신혼집에서는 나만의 서재가 생겼다. 벽 네 면을 전부 책장으로 채우는 게 어릴 때부터 소원이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가장 많은 삶을 빚는 공간이니, 그곳이 좋아야 그 사람의 살의 질도 좋아진다는 저자의 말처럼, 감사하게도 나에겐 지금 그런 공간이 생긴 것이다. 이 책 덕분에 나에게 소중한 공간들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심코 스쳐 지나갔던 도시의 공간들에 대해서도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살면서 모든 순간이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이다. 순간순간이 아주 가끔 아름답고, 또 아주 가끔 행복할 테니, 우리는 그 순간들을 이어서 별자리로 만들어야 한다. 나도 머릿속으로 별자리를 되짚어본다. 나를 형성한 공간, 내가 지나온 공간, 그리고 나에게 필요한 공간은 어디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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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스 브라더스
패트릭 드윗 지음, 김시현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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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자를 찾지 않는 게 좋아. 진찰비와 관련해 불행한 사건이 있었거든. 나를 다시 보면 무척 기뻐하겠지. 하지만 우리를 도울 마음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군. 남쪽으로 몇 킬로미터 더 가면 마을이 있다고 그자가 그랬어. 그리로 가는 게 최선일 거야. 네가 갈 수 있다면 말이지."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인생의 많은 것이 그렇듯 이번에도 어쩔 수 없는 거야, 형제."   p.31~32

골드러시의 광기로 들끓는 1851년 미국 서부, 각종 청부업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악명 높은 킬러 형제, 시스터스 브라더스의 여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찰리 시스터스와 일라이 시스터스 형제는 제독으로부터 캘리포니아로 가서 허먼 커밋 웜이라는 금 채굴꾼을 찾아내 죽이라는 의뢰를 받는다. 제독의 정찰병인 멋쟁이 헨리 모리스가 미리 웜을 조사하고 샌프란시스코의 호텔에서 형제를 기다리고 있기로 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기에 적당한 그곳으로 가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서부 해안을 따라 오리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여정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협곡에서 야영을 하다 일라이가 독거미에 물려서 온몸에 열이 나서 드러눕고, 다음날 아침 일어났더니 왼쪽 얼굴이 그로테스크하게 부어 치과 의사를 데려와 썩은 이를 뽑으며 난생 처음으로 칫솔질하는 걸 배우게 된다. 그러고는 찾은 숙소가 마녀 같은 노파 혼자 있는 오두막이었는데, 노파에게 이상한 저주를 받기도 하고, 다음 마을의 호텔에 묵으면서는 주정뱅이 찰리가 술을 너무 퍼마셔 숙취로 고생하고, 일라이는 그 와중에 호텔의 카운터를 보는 하녀와 사랑에 빠진다. 물론, 여자의 마음과는 상관없는 혼자만의 감정이었지만 말이다. 시작부터 상태가 시원찮았던 일라이의 말 텁은 점점 더 컨디션이 나빠지고,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빨간 암컷 곰을 사냥해 현상금을 받지만 졸지에 도둑으로 몰려 돈도 잃고, 그 지역 사냥꾼들과 목숨을 걸고 한판 붙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 과연 이들은 무사히 샌프란시스코까지 갈 수 있을까.

 

"이런 일을 즐기나요?"

"건건이 달라요. 어떤 일은 별난 장난 같고, 또 어떤 일은 지옥 같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떤 행위에 보수가 주어지면 그 자체로 존중할 만한 일이 되죠. 한 사람의 목숨이 내게 달려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달려 있는 거겠죠." 그녀가 지적했다.   p.160

이 작품은 캐나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총독문학상을 포함해 4개 상을 수상했고, 영화로 제작되어 베니스 국제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소설 자체도 매우 영화적이다. 장면들마다 보여지는 특유의 리듬과 페이지 바깥으로 걸어나올 것 같은 개성 만점의 인물들, 그리고 폭력과 유머가 공존하는 독특한 아이러니에서 빚어내는 에너지가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그래서 살인과 폭행을 일삼는 악당을 화자로 피비린내 나는 삭막한 여정을 그리고 있지만 너무도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보통 서부극하면 19세기 후반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강인한 개척자와 악당과의 대결을 그리는 작품이다. 플롯은 단순하고, 액션이 위주인 서부 영화로 주로 만나왔을 것이다. 이 작품은 소설로서는 드물게 그러한 웨스턴 장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기존 장르의 문법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완전히 색다르고 독특한 장르를 탄생시켰다. 카우보이모자와 권총, 황야의 결투, 무법지대, 말을 타고 가는 여정 등 웨스턴 장르의 소재와 공식이 등장하지만, 현대적인 블랙유머와 개성 있는 캐릭터들로 인해 굉장히 세련된 카우보이 누아르가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모여든 서부개척시대의 인간군상들이 풍자적인 필치로 그려지고 있으며, 매 장면마다 잔인한 폭력과 코믹한 유머가 공존하고 있다. 유혈이 낭자한데도 웃길 수 있다니 쉽게 상상이 가지 않을 지도 모르겠지만, 무표정하게 툭툭 내뱉는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너무 웃기고, 유쾌한 작품이었다. 사실 서부극 장르를 영화로든 소설으로든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닌데, 이 작품은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나 험상궂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감상적이고, 어디서든 금방 사랑에 빠지는 로맨틱한 면모도 가지고 있고, 행동은 무자비하더라도 나름의 윤리관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일라이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 정 많고 악명 높은 킬러 형제의 위험천만한 여정에 당신을 초대한다.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스타일리시한 서부극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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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2
야쿠마루 가쿠 지음, 이정민 옮김 / 몽실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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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모님이 계시고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뭐 하나 부족함 없이 자랐어. 그런 내가 너의 고생과 고독을 이해할 순 없겠지. 그래서 잘난 듯이 충고 한마디 못해."

"그럼 닥쳐."

"그래도 이 말만은 해야겠어.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어."     p.67~68

 

이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모두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들은 학교에 제대로 가지 못했고, 세상과 거의 단절된 생활을 했다. 호적이 주어지지 않아 의무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살아온 이도 있었고, 부모에게 버려져 친척에게 구박과 학대를 받아온 이도 있었다. 사랑을 충분히 받고, 제대로 된 교육을 통해 사회성을 키워야 할 시기를 이렇게 거쳐온 사람이 감정이 없는 존재로 성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으니, 사랑을 줄 수도 없을 것이고, 행복이라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 왜 행복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저지른 죄의 아픔을 진심으로 느낄 수도 없다.

부모가 방치해 호적도 없고, 의무교육도 받은 적이 없는 천재 소년 마치다, 범죄를 이용해 불평등한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사상에 심취한 무로이 진, 그리고 소년원에 들어간 마치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일부러 범죄를 저지르고 지능이 낮은 연기까지 했던 아마미야. 이들을 중심으로 마치다가 대학에서 만나게 되는 친구들, 아마미야가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는 미노루를 찾기 위해 노숙자가 되어서 만나는 사람들, 히로시와 아마미야를 소년원에서부터 지켜봐온 교도관 나이토 등 많은 인물들이 등장해 차곡차곡 이야기를 쌓아 나간다. 야쿠마루 가쿠의 전작들에 비해 분량이 많은 작품인 만큼 진지하게 인물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마치다가 뭐라던가?" 조바심이 나서 묻자 이소가이가 눈을 떴다.

"행복해지라고요... 제가 행복해지지 않으면 소중한 사람을 결코 행복하게 할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게다가 행복해지지 않으면 제가 범한 죄의 아픔을 진정으로 느낄 수 없다고도 말입니다."

"그렇군...."

이소가이의 이야기를 듣는 사이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p.192~913

 

제목인 '신의 아이'란 특별한 재능, 그 중에서도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아이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에겐 바로 그 뛰어난 지능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면서 자연스레 주어지는 부모와 가족부터 따뜻함, 사랑, 행복 등 기본적인 감정 조차 느껴보지 못한 채 살아 간다. 하지만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사회구조적 범죄를 통해 사회적 제도들에 의문을 던지고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이라는 온기'를 말하기 위해 참 많은 시간과 인물들을 거치며 돌고 돌아 만들어지는 작품이라 더욱 인상적이었다. 작품의 가독성과 상관없이, 조금 천천히 호흡하며 읽어 나가면 더 좋을 만한 작품이다.

야쿠마루 가쿠는 데뷔작부터 최근 작품까지 '소년범죄'를 꾸준히 다루고 있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에는 매번 범죄를 저질렀거나 범죄와 연루된 소년들이 등장한다. 그렇게 소년범죄라는 주제가 담고 있는 다양한 문제의식을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었는데, 이번 작품에 이르러서는 범죄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게 된 근본적인 배경에 집중하고 있다. 대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과연 누구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사회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한번쯤 고민해봐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들이 다 그러했지만, 사회성 짙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장황한 설교를 늘어 놓아 지루하게 만들지 않고, 미스터리와 추리적 요소와 스릴러적인 템포로 이야기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점도 장점이다. 한마디로 '한번 읽기 시작하면 절대로 쉽게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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