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 하찮은 체력 보통 여자의 괜찮은 운동 일기
이진송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여전히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운동의 참맛을 깨닫고 운동과 인생의 의미를 연결하는 경지에 오르지도 못했다. 생리가 시작되면 관절이 약해지니까(사실) 운동하면 안 된다며(게으름) 드러눕고, 비가 오면 갈까 말까 망설이고, 그나마 등록비가 아까워서 억지로 몸을 일으킬 때면 걸음걸음이 울고 넘는 박달재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내가 한없이 초라하고 남루하게 느껴지는 날, 사소한 일에 서운함이 폭발하고 누군가 원망스러운 날, 살아보겠다고 운동을 꿈지럭꿈지럭 하는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이 드는 날, 바로 그 순간에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려야 한다.     p.17

나이가 들 때마다 가장 먼저 체감하게 되는 것은 바로 체력의 한계가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밤을 꼬박 새우고도 아침 일찍 일어나 에너지 넘치는 하루를 보내기가 예사였는데, 이제는 새벽 두세 시만 지나도 몸이 천근만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잠이 와서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라는 게 아니라, 잠이 오질 않더라도 체력이 떨어져서 그 시간을 더 버티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또 하나, 체중이 쉽게 줄지 않다는 것. 분명 예전에는 한두 끼만 굶어도 배가 쏙 들어가고, 어느 정도의 체중 감량은 마음만 먹으면 가능했었는데 말이다. 이제는 웬만하면 체중이 쉽게 줄지 않는 몸이 되어 버렸다. 나이가 들면서 신진 대사율이 떨어지고, 끼니를 제때 안 챙겨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지 않은 시간들이 쌓여서 일어나는 변화들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제목부터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아마도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하면서 온갖 핑계들을 만들어서 내일부터 해야겠다며 미루기 일쑤였던 적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라서, 회사에서 너무 시달렸더니 피곤해서, 내일 중요한 일정이 있으니 쉬어야 해서, 코치가 마음에 안 들어서 등등... 이유는 다양하지만 사실 딱 한가지 아닐까. 그냥 운동하러 가기 귀찮아서, 운동이 재미없고 지루해서 말이다. 이 책은 '운동하는 멋진 여성'을 동경하면서도, 막상 운동에 도무지 재미를 붙이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한 운동 에세이이다. 저자는 수많은 운동에 도전했지만 매번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럼에도 운동을 멈추지 않는 단단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그녀가 어느 순간 갑자기 달라저서 운동에 눈뜨는 기적을 보여주지 않고, 그저 하찮은 체력 보통 여자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더 공감되고, 이해되는 이야기였다.

이제 나는 운동 시간을 확보하려고 기꺼이 여러 가지를 포기한다. 서른 살 이전, 영양가 없고 의무뿐이던 인간관계를 정리하면서 나의 생활은 아주 간결해졌다. 변수가 많고 야근이 잦은 일을 그만두었다. 아무리 바빠도 씻고 자는 시간을 뺄 수는 없듯, 운동을 그 정도로 중요한 일정으로 만들었다. 같은 운동을 100일 넘게 하고 있다. 곰이 인간이 되는 극적인 변신은 없어도, 아침에 일어나기 쉽다거나 발목 통증이 줄었다는 사소한 변화에 쉽게 감동하며 지낸다.    p.107

저자는 정말 다양한 종류의 운동을 전전하며 오랜 세월을 운동 센터회원님으로 살아왔다. 물론 실제로 출석한 날은 합산해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빠진 날이 더 많고, 그만두고 환불 받는 경우도 많았지만 말이다. 헬스클럽, 요가, 커브스, 수영, 승마, 스노보드, 댄스, 스쿼시, 복싱, 아쿠아로빅, 배드민턴, 복싱, 필라테스 등등을 거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운동을 하러 다닌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이 대부분의 보통 여성들에게 폭풍 공감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을 선사하고 있다. 많은 여성들이 오직 체중 감량을 위해 운동을 하고, 운동과 즐거움을 연결 짓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물론, 그나마 운동을 꾸준히 하러 다니는 사람들은 다행이지만, 대다수는 머리로만 운동해야지, 라고 생각할 뿐이다. 

매우 유쾌하게, 재미있게 읽히는 글이지만 그 속에는 날카롭게 핵심을 간파하는 지점들이 있다. 보통 여자들이 운동과 좀처럼 가까워지기 힘든 데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부터건강한 몸이 아니라아름다운 몸’, 마른 몸'을 요구하는 사회적 시선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운동을 재미있게 느낄 수 없는 이유를 명백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운동의 초점이내 몸이 아니라남에게 보이는 내 몸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보통 여자들은 더더욱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릴 필요가 있다는 거다. 무엇보다 운동을 대하는 저자의 마음가짐이 너무 와 닿았고, 멋있었다. 남 보기 예쁜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내가 쓸 체력을 비축하려고, 더 강한 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약점과 아픈 몸이라도 그대로 살아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운동을 하고 있다니 말이다. 보통 여자들의 진짜 운동 이야기는 이렇게 잘하지 않아도, 꾸준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와 함께라서 더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쌍둥이
후지사키 사오리 지음, 이소담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군가에게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마음을 나는 '슬픔'이라고 불렀다. 누군가의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지만 그 누구에게도 특별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비참함을 '슬픔'이라고 표현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서, 누군가에게 소중하게 여겨지고 싶어서 나는 울었다. 그래서 그때, 눈물을 흘릴 만큼 간절하게 바라던 말을 해준 쓰키시마를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p.22

열네 살 소녀 나쓰코는 친구를 어떻게 사귀면 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래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시작했던 피아노가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무렵부터 여자애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곤 했는데, 부모님은 맞벌이라 늘 집에 안 계셨고 항상 혼자였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에 막 올라갔을 때, 한 학년 선배인 쓰키시마와 가까워지게 되어 함께 산책을 하고, 서점이나 음반 가게에 가고, 영화를 보며 대화가 잘 통하는 속 깊은 이성 친구가 된다. 시간이 흘러 쓰키시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가 사라진 학교에서 나쓰코는 중학교 3학년이 된다. 몇 개월 만에 연락이 된 고등학생 쓰키시마는 조금 어른스러워 보인다. 그는 고등학교가 재미없고, 노력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고 지루해하다 결국 학교랑 맞지 않는 것 같다며 그만두고 미국에 가게 된다.

서로 너무도 상극처럼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닮아 보이기도 하는 두 사람이다. 나쓰코와 쓰키시마는 그렇게 서로 다른 듯 닮은 모습으로 중학교 시절부터 우정을 나누며 성장한다. 나쓰코에게 쓰키시마가 약간 첫사랑 같은 느낌이라면, 쓰키시마에게 나쓰코란 어떤 존재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는 나쓰코에게 난 너를  쌍둥이라고 생각해라고 말하지만, 거리낌없이 좋아하는 애가 생겼다고 고백을 하는 등 그녀를 이성으로 여기는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녀 역시 우리 관계를 어떤 말로 표현하면 좋을까, 라고 생각하며 우정인 듯 사랑인 듯 알 수 없는 독특한 관계가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나쓰코와 쓰키시마는 왕따와 우울증, 유학 실패로 인한 정신병원 입원 등의 방황하는 시기를 거쳐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함께 음악을 하는 것이 마침내 자신들이 있을 곳이라는 것을 찾게 된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쌍둥이 같으면 좋을 텐데. 경계선이 사라져서 뭐든지 다 공유하면 좋을 텐데. 그러면 지금 네가 보는 세계를 나도 볼 수 있을 텐데.

나는 지하실에서 다른 세계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 목소리를 더 멀리까지 울려 퍼뜨리고 싶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p.291

이 작품은 밴드의 멤버가 쓴 데뷔 소설로 제158회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던 화제작이다. 돌연 음악계에 등장해 압도적인 팝 센스와 친근한 존재감으로세카오와 현상을 일으키며 인지도를 얻은 4인조 밴드 SEKAI NO OWARI. 이 독보적인 인기 밴드에서 피아노 연주와 라이브 연출 전반을 담당하고 섬세한 감성의 곡을 만드는 멤버 Saori의 데뷔작이다. 평소에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했고, 그걸 바탕으로 독서에 관한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이번 소설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밴드의 결성 과정을 그려 음악 팬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쌍둥이, 마치 이 세상에 같은 타이밍에 태어나 같이 살아온 존재 같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완벽하게 다른 성향을 지니고,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두 존재가 만나 '사랑'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한 몸을 나누고 태어난 것 같다는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는 생소하면서도 공감이 되기도 하고, 낯선 느낌이면서도 익숙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내 인생의 파괴자인 동시에 창조자였다"는 말이 뭉클하게 와 닿았다. 쓰키시마는 나쓰코가 그의 쌍둥이가 되고 싶어서 괴로워했던 시간도, 그리고 쌍둥이가 되고 싶지 않아 혼자 울던 밤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다. 화창한 날도, 비 오는 날도, 건강한 날도, 아픈 날도, 넉넉할 때도, 빈곤할 때도 말이다. 소중한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의 의미와 책임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하고 슬퍼하기도 했던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다면, 당신도 이 작품을 읽으면서 뭉클해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얼:하다
조승연 지음 / 와이즈베리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뉴욕의 힘은 밀도다. 브롱스에는 전통적으로 캐리비안 해안과 미국 남부에서 인종차별을 피해 북부로 도망친 흑인들이 정착했다. 퀸즈에는 그리스, 동유럽 그리고 한국과 중국 이민자 동네들이 있다. 그보다 남쪽에 있는 브루클린은 전통적으로 유태인과 이탈리아인의 동네로, 수많은 마피아 영화의 명소이기도 하다. 뉴욕에 있는 약 800가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민족들은 뉴욕 자체를 다채로운 색채를 가진 수채화로 만든다.    p.66

《시크:하다》에서 우리와는 다른 프랑스인들의행복에 대한 관점을 소개했던 조승연 작가의 신간이다. 《리얼:하다》에서는가식적이지 않고 당당하게살아가는 뉴요커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인문학적인 관점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는 한 도시의 매력은 화려한 랜드마크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거라고 말한다. 뉴욕을 뉴욕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뉴요커들 덕분이라고 말이다. 터무니없이 비싼 호텔 숙박비에다가 엄청난 팁을 지불하면서도 웨이터에게 온갖 푸대접을 받는 곳, 세상에서 가장 열악하면서도 주거비용이 비싼 도시 중 하나인 뉴욕!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살아보고 싶어 하고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파리 사람들까지 동경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사업가, 디자이너, 예술가들은 뉴욕에서 인정받는 것을 최고의 성공으로 여기고,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 뉴욕에서 한번쯤 살아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뉴욕은 판타지를 안고 오는 이들에게 반전을 제시한다. 뉴요커는 말이 빠르고 거칠며, 무례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뉴욕을 찾는다. 왜 그럴까? 저자는 1999년 대학 신입생으로 뉴욕에서 살기 시작했고, 중간에 1년 휴학하는 동인 할 일 없이 뉴욕의 길거리를 배회하고, 할일 없이 공원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들과 말동무를 하면서 학교나 사무실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뉴욕의 속내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책에서 '뉴욕'보다는 '뉴요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뉴욕이라는 도시를 만들어낸 뉴요커의 철학, 세상을 사는 방식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동네마다 색채가 전혀 다른 뉴욕은 마치 전 세계의 문화를 압력솥에다 넣고 끓이고 있는 곳 같다. 그리스와 중국이, 자메이카와 아프리카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서로 경계하면서도 생각과 삶의 방식을 주고받고 배우면서 또 싸우는 과정에서 세계에서 가장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도시문화를 형성하며 거듭난 것이다. 이것은 프리드먼이납작하고, 덥고, 사람이 너무 많다라고 묘사한 지구 전체의 미래 모습과도 비슷하다.     p.161

뉴요커는 이민 이후의 생존 경험을 통해, 주변 사람의 부러운 시선이나 허울 좋은 체면치레 같은 것은 생존에 도움이 전혀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진정한 자유와 존재감은 경제적 자립에서만 온다는 것이 뉴요커의 행복 공식이다. 또한 뉴요커들은 일할 때 고도의 집중력과 긴장도로 임하지만, 인생을 즐길 때는 아예 풀어져 있다. , '할 때는 하고, 안 할 때는 안 한다'를 철저히 지키는 것이 그들의 인생에 대한 태도인 것이다. 뉴요커들의 무례함은 가히 전설적인데, 사실 알고 보면 그들의 무례함은 겉치레가 없는 것이지, 진짜 필요한 순간에 인간성을 저버리는 무도함은 아니라고 한다. 그 밖에도 뉴욕의 부자가 사는 방법, 뉴요커가 가르쳐주는 외롭지 않게 사는 법, 뉴욕의 사교육에 관한 것까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시선을 사로잡는 책이었다.

아웃사이더의 천국,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를 생성하고 전파하는 도시 뉴욕이 가진 힘의 원천은, 전 세계에서 건너온 수많은 민족의 독특한 스타일과 말투, 제스처, 색감, 안목이다. 인간은 좋은 것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그러니 굳이 타인의 호불호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다르다는 것만 인정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뉴욕이라는 도시가다양성이라고 하는 과제와 끊임없이 씨름하며 깨달은 결론이라는 거다. 이 책을 통해 뉴요커들이 일과 가족, 연애, 우정, 문화,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인간관계와 삶을 영위하는지, 문화적 맥락 속에서 관찰한 그들의 삶을 만나고 보니 내가 막연히 생각해왔던 뉴욕과 뉴요커에 대한 이미지가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항상 생존모드를 장착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면서도 인생의 멋을 스스로 터득하고, 언제나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뉴요커들의 모습이 멋졌고, 그렇게 내 멋대로 사는 삶 속에서 진짜 행복을 발견하는 그들의 삶에 대한 태도를 배우고 싶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이코 헌터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난 죽을 수 있다.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으니까.

난 아무것도 아니다. 오래 전부터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였다.

숨 쉬고, 말하고, 걸어 다니는 산송장이었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다.

그런데 뭐가 이토록 두려운 거지?    p.76~77

레미는 36년을 살아오면서 그 중 4년 동안 거리에서 노숙을 하며 지내는 중이다. 그도 한때는 성공한 남편이자 사랑하는 딸의 자상한 아빠, 중소기업의 전도유망한 기술자로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살았다. 그는 딱 한 번, 사장의 아내와 부정한 행위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가정과 직장을 비롯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사장은 그 사실을 조용히 덮어주는 대가로 자진 퇴사를 요청했고, 아내는 이혼 절차를 밟기 시작했고, 친구들을 그를 외면 했다. 구직 활동도 여의치 않았고, 기댈 형제도 없었던 터라 그렇게 노숙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벤츠에 타고 있는 남자를 공격하는 괴한 둘을 목격하게 되고, 남자는 자신을 도와준 대가로 레미에게 값비싼 저녁을 대접한다. 게다가 안 그래도 직원을 고용할 참이었다며 그에게 보답으로 일자리를 제안한다. 그러나 넉넉한 월급에 성에서 숙식까지 제공되는 일자리는 사실 그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그에게 주어진 일자리는 정원사가 아니라 인간사냥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었다.

사진작가인 디안은 세벤트 산맥의 외진 숲으로 업무 차 출장을 오게 된다. 그곳에 도착해 장엄함이 절로 느껴질 정도로 비현실적인 적막과 무한대로 펼쳐진 것만 같은 거대한 공산 속의 생생한 색감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다. 연인에게 버림받은 뒤 오로지 일에만 매달려왔던 그녀에게 일은 도피처이자 살아갈 이유이고,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식사를 하러 들어간 산장에서는 남자들이 인근에 위치한 숲 속에서 젊은 여성이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이야기에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경찰도 해결하지 못한 미제 사건이라 혼자 숲 속으로 들어갈 때는 각별히 조심하라는 얘길 들었지만, 그녀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촬영을 하던 중에 산장에서 만난 남자들이 한 남자를 우발적으로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고, 목격자를 없애기 위한 그들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계획적인 살인이지만 살해 동기는 어디에도 없는 그런 범죄.

정말로 살해 동기가 없었을까?

있다면 딱 하나 있긴 했다. 바로 쾌락. 그 짜릿한 느낌.

조만간 또 다시 나설 것이다.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멈추는 순간, 자신이 죽을 것만 같기 때문에... 참을 수 없는 금단현상으로.    p.191

인간사냥에 참여하는 이들은 돈을 아주 많이 지불하고 전세계에서 온 부유한 사람들이다. 법적으로는 절대 죽일 수 없는 사냥감, 한 번도 사냥해본 적 없는 사냥감을 찾던 이들은 노숙자, 불법체류 외국인 등 세상에서 당장 사라져도 아무도 찾지 않을 만한 사람들을 데려와 게임을 시작한다. 네 명의 사냥감, 그리고 네 명의 사냥꾼, 이들은 각자 목표물을 고르고 숲을 향해 도망가는 사냥감들을 추적한다. 그저 총을 난사해 사냥감을 학살하고, 살육을 즐기기 위해 거액의 참가비를 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이들은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우발적인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목격자를 쫓는 마을의 남자들 역시 겉으로는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사실 인간사냥에 참여하는 이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이 작품은 노숙자 레인과 사냥감으로 선정된 세 명과 사진작가 디안의 시점으로 각각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교차로 진행된다.

이 작품은 국내에 출간된 카린 지에벨의 여덟 번째 장편소설이다. 대부분 페이지 수가 많아 두툼한 작품들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그 중에서도 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그만큼 군더더기 없고, 빠른 전개가 돋보이는 작품인데, 쫓기는 인물들의 심리 묘사를 통해서 공포와 서스펜스를 체감하게 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만든다. 기존에 국내에 출간된 카린 지에벨의 작품들을 대부분 읽어 보았는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임팩트 있는 한 방을 보여주는 그녀의 단편도 괜찮았고,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심리적 요소들을 끄집어 내어 복잡다단한 심리변화를 포착해내는 장편도 탁월했다. 사이코 패스 혹은 소시오 패스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작품들이 많았는데, 이번 작품에 등장하는 사이코 헌터는 무자비하고 냉혹하다는 점에서 그 연장선상에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해서 도덕적인 고민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점은 전형적인 악인 같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들은 거짓된 가면을 쓴 지극히 평범한 인물들이라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양심의 가책을 벗어 던진 살인범이 무고한 시민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닮았다는 점은 실제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눈곱만큼의 자비도 허락하지 않는, 무자비하고 숨 막히는 추격전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르네 놀트 그림,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녀들이 착용하는 것은 모두 빨갛다. 피의 색, 우리를 정의하는 색이다.

가리개 또한 규정된 보급품이다. 우리의 시야를 제한하는 동시에 우리를 드러내지 않게 해준다.

나는 결코 붉은 옷이 어울리지 않았다. 빨강은 내 색깔이 아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버전이다. 원작 소설의 주제의식을 잘 살려낸 색감과 긴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압축한 각색으로 해외 언론으로부터 '드라마 영상보다 더 뛰어나다'라는 호평을 받았다고 해서 매우 궁금했다. 게다가 텍스트로 읽으면서 상상했던 공간과 배경, 인물들의 이미지를 이미지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설레이기도 했다.

 

 

<시녀 이야기> 1985년 발표 당시 여성을 오직 자궁이라는 생식 기관을 가진 도구로만 본다는 설정 때문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으며, 출간한 지 30년이 되어가는 오늘날에 와서는 성과 가부장적 권력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친,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으로 인해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으로 평가 받고 있다. 최근 Hulu 채널을 통해 드라마로 새롭게 선보이며 또다시 주목 받고 있으며, 드라마는 시즌 3까지 나올 정도로 화제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속작인 <증언들>이 올해 부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시녀 이야기> 이후 무려 34년 만의 후속작인 <증언들>도 곧 국내에서 만날 수 있다니 매우 기대가 된다.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서 생각한다. 아침에는 내 집에서 잠을 깨게 될 거라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 있을 거라고.

오늘 아침에도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 혹은 근 미래를 배경으로 길리어드 공화국, 여러 가지 원인들이 겹치고 겹쳐 인류에게 끔찍한 재앙이 벌어진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임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국가에서는 임신이 가능한 여성들을 강제로 징집해 관리하고 통제하기 시작한다. 여성들은 신체적 기능에 의해 하녀, 아주머니, 시녀, 아내 등등의 역할로 규정되고 그들에게 더 이상의 개인적인 삶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 작품의 주인공이기도 한 '시녀'는 출산이 가능한 생식능력을 가진 여성으로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이들은 국가를 지배하는 고위층 부부들에게 할당되어, 그 집의 주인 남자들과 주기적으로 관계를 갖고 임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부여 받는다.

"나는 씻기고 솔질하고 배불리 먹인 한 마리의 경품용 돼지처럼 기다린다"

시녀는 주인 남자의 정부나 애인이 아니라, 그저 의무적으로 그들 부부에게 '자궁'만을 임대해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쾌락, 욕망, 연애 감정 따위는 사라져 버렸고, 오로지 종족 번식을 위한 끔찍한 의례이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함께 관계를 맺는 장소에서 그 행위를 돕고 지켜봐야 하는 고위층 아내들의 상황 역시 결코 행복할 수 없겠지만, 붉은 색의 드레스와 구두, 하얀색 가리개로 얼굴까지 가리고 어딜 가든지 감시를 받으며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여자의 처지는 가슴이 서늘해지도록 섬뜩하다.

 

르네 놀트는' 피의 색인 빨강과 그 전조를 암시하는 주황, 진홍, 적갈색의 색채 활용'을 통해 극중 인물들의 감정을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통제된 사회 이전의 과거 회상 장면의 채도와 반복되는 악몽의 느낌을 다르게 보여주고, 강렬한 소설의 서사를 압축해서 임팩트있게 전달하면서도 이야기의 여운을 남겨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사실 원작 소설은 오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다 이야기가 담고 있는 무게 때문에 읽기에 만만치가 않다. 그러니 만약 원작 소설을 아직 읽기 전이라면 그래픽 노블 버전으로 먼저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곧 출간될 <증언들>을 만나기 전에 미리 읽어보면 더욱 좋을 테고 말이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는 소설이 지닌 깊이 있고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만화가 지닌 시각적 효과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점에 있어 굉장히 훌륭한 장치이다. 어른들의 만화라고도 불리며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을 띠고 있다고 보면 되는데, 보통은 매우 길고 복잡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고, 함축적이고 은유적인 이미지로 전개가 빠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촘촘히 글자가 박힌 소설책보다는 눈의 피로도 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좋은 반면에, 조금 내용이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렇게 원작 소설이 이미 존재하고, 그 뒤에 그래픽 노블이 나온 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래픽 노블이 가진 장점과 소설의 단점이 적절하게 손을 잡은 느낌이랄까. 그래픽 노블의 장르적 특성이 빡빡한 지면 구성, 때론 실험적인 내용들인데, 원작이 있는 경우에는 그런 점이 오히려 문학성 높은 만화 혹은 예술적 성향이 강한 만화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그래픽 노블이 가격대가 좀 비싼 편인데, <시녀 이야기>는 가격도 아주 착하다. , 모두들 이 특별한 기회를 놓치지 말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