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웅진 모두의 그림책 17
세바스티엥 조아니에 지음, 요안나 콘세이요 그림, 최성웅 옮김 / 웅진주니어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서 오세요', 식당에 가거나 가게에 들어설 때, 혹은 낯선 이를 방문하거나,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듣게 되는 인사 말이다. 어서 오세요, 라는 그저 친절한 이 말에는 대가나 목적 없이 그저 따뜻한 환대를 하는 순간의 진심이 담겨 있다. 이번에 만난 그림책 <어서 오세요>는 아이를 향한따뜻한 환대를 시적이고 리듬 있는 문장과 섬세하면서도 유머러스한 그림으로 풀어 내고 있다.

이 세상에는 우리 아빠, 우리 엄마, 그리고 내가 있어.

아이는 생각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뭔가 깜빡한 것 같아.

그러고는 다시 해 본다.

아빠, 엄마, ... 그 다음에 뭘 잊어 버린 걸까?

세상이라는 곳에서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아이는, 가족을 시작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고, 감정을 배우고, 웃음을 배우고, 친구들을 만나고, 용기와 행복을 알아 나간다.

웅진 모두의 그림책 17권이다. 글을 쓴 작가 세바스티엥 조아니에는 잘못과 실수를 가정한 판타지로 이야기를 풀어 아이들을 벌주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그저 담백하고, 따뜻하게, 아이들을 향한 '따뜻한 환대'를 마치 노래하듯이 글로 풀어내고 있다. 그림을 그린 요안나 콘세이요는 색연필 그림으로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폴란드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이다. 나무의 온기를 품은 색연필로 오밀조밀하게, 사소한 표정이나 작은 디테일 하나 놓치지 않고 사각사각 페이지 속에 담아내고 있다.

콘세이요가 즐겨 쓰는 노랗게 빛 바랜 페이지가 색연필의 가는 선으로 그려내는 세밀함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준다. 무엇보다 인물들의 생생한 표정이 인상적이고, 비슷한 듯 닮아 있지만 조금씩 다른 그들의 얼굴을 만나는 것이 흥미진진했다. 아이가 자라면서 아빠와도 닮았다가, 엄마와도 닮았다가, 두 사람 모두를 닮은 것처럼 보이다가, 또 전혀 다른 개성을 찾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가 세상을 향해 질문과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여정도 좋았지만, 각양각색의 사람과 동물, 사물들로 가득한 그림들이 정말 마음에 남을 것 같은 작품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는 표현하는 도구마다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곤 한다. 그러니 수채화로 작업할 때, 그래픽으로 만들어 낼 때와, 색연필로 그려낸 그림이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컬러링북을 채색하거나, 아이와 함께 색칠 공부를 할 때도 크레파스와 물감과 색연필이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색연필 만의 강점은 아마도 어떻게 그려도 선이 지나간 자국이 고스란히 남는 것 아닐까 싶다. 마치 내가 이 책의 빈 여백에 색연필로 쓱쓱 뭔가를 그려도 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다. 포근하고, 아늑하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그림들의 향연이다.

책을 구매하면 '일러스트 페이퍼북'을 부록으로 받을 수 있다. 거의 그림책과 비슷할 정도로 판형이 큰 이 부록에는 선물 포장지 또는 포스터로 활용할 수 있는 일러스트들이 담겨 있다. 한 장씩 커팅하기 쉽도록 되어 있고, 떼어내 일러스트를 펼치면 실제 그림책의 그것보다 훨씬 큰 이미지가 되기 때문에, 책의 표지로 사용할 수도 있다. 일러스트 페이퍼 북으로 다양한 표지를 만들어 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될 것 같다.

지금 우리는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성별과 인종, 다양한 생물과 사물이 함께 하는 지구촌 사회에 살고 있다. 노인과 어린아이, 얼굴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외국인들, 먼 곳에서 전학을 온 아이,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 행동이 다르거나 어딘가 불편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는 이방인이나 소수자가 될 수도 있다. 어른인 우리가 아직 많은 것들이 낯설고 어려울 아이에게 해줘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세상에서 다양한 삶의 방식들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따뜻한 애정과 든든한 응원과 진정한 축복의 마음으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은 나도 과학이 알고 싶었어 2 - 사소하지만 절대적인 기초과학 상식 124 실은 나도 과학이 알고 싶었어 2
래리 셰켈 지음, 신용우 옮김 / 애플북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양파를 썰거나 다질 때 양파의 세포에서 효소가 방출된다. 이렇게 나온 효소, 알리나아제와 최루 물질 신타아제는 함께 방출된 또 다른 물질, 아미노산 술폭시드를 분해한다. 이 반응은 불안정한 술펜산을 형성하는데, 술펜산은 휘발성 가스가 되며 안정화한다. 이 가스가 눈에 들어가면 우리 눈을 촉촉하게 유지해주는 수분과 반응한다. 술펜산이 눈에서 눈물과 섞이면 자동차 배터리에 있는 독성물질인 황상을 형성한다. 황산을 감지한 우리 눈의 말단 신경은 즉시 뇌에 신호를 보내고, 뇌는 다시 눈물길에 '이 자극적인 물질을 희석해 우리 눈을 보호하라'고 메시지를 보낸다. 그 결과 보호 수단으로 눈물이 흐르게 된다.  p.56

양파를 자르면 왜 눈물이 날까?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꽤 많은 단계와 효소와 물질들이 동원된다. 그리고 이렇게 양파와 반응해 흘리는 눈물은 우리의 몸이 어떻게 위험에 반응하는지, 우리의 뇌가 화학물질을 어떻게 조율해 신체를 보호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기도 한다. 기초적인 과학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알려 주는 과학교양서인 이 책에서는 양파가 어떻게 눈물이 나게 만드는지를 화학적으로 풀이해 설명해주고, 눈물을 막을 수 있는 방법도 팁으로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과학의 원리란 생각보다 일상과 매우 가깝게 있다. 대체 과학 이론 따위가 실생활에서 무슨 도움이 되냐고 생각했던 이들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과학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실은 나도 과학이 알고 싶었어> 2권에서는 화학, 물리, 생물, 기술과학의 원리를 살펴 본다. 1권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던 기술과학 이야기를 풀어내고, 과학의 가장자리와 역사, 일상생활 속 과학적 호기심도 해소하고 있어 흥미롭다. 비행기가 번개에 맞으면 어떻게 될까? 휴대전화는 어떻게 작동할까? 벽걸이 텔레비전은 어떻게 작동할까? 야광봉은 어떤 원리일까? 등 과학 기술에 대한 호기심을 풀어보고, 얼음은 왜 물 위를 떠다닐까? 이스트는 왜 오븐에서 부풀까? 종이는 시간이 지나면 왜 노랗게 될까? 등 매혹적인 화학의 세계도 그려내고 있다.

반려동물 주인 3분의 2가 반려동물이 자신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부모들이 십 대 자녀를 이해하는 것보다 높은 비율이다. 물론 농담이다! 의사소통이 원활하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은 반려동물, 특히 개와 주인 사이의 강한 유대를 보여 준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이런 유대감을 보이는 경우는 개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동물 행동 전문가들은 동물과 인간은 소리와 행동이 연관된 상황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며 소통을 배운다고 말한다.     p.166

무엇보다 생물들의 신비를 풀어주는 카테고리는 호기심 많은 아이들, 청소년들이 특히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 씨앗은 어떻게 나무가 되는지, 물고기도 잠을 자는지, 스컹크의 방귀 냄새는 왜 구린지, 해바라기는 왜 항상 태양을 쳐다보는지, 반려동물과 주인은 서로를 이해하는지, 개들은 왜 꼬리를 흔드는 지, 앵무새는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는 지 등등.. 사실 대부분의 어른들도 딱 명확하게 답할 수 없는 그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라 생활 상식으로서도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이었다. 그 외에도 일상 속에서 떠오를 수 있는 엉뚱한 호기심들도 과학적으로 풀어내는 질문들이 수록되어 있어 재미있었다. 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할까? 왜 스쿨버스에는 안전띠가 없을까? 자동차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전자레인지는 어떻게 음식을 익힐까?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지구 반대편으로 구멍을 뚫고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등등 기발한 내용들이 과학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영어로 과학(science)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지식을 뜻하는 '스시엔티아(scientia)에서 왔으며, '연구를 통해 알아낸 지식'이라는 뜻으로 정의된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연구하는 과학은 내가 사는 세상과 물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명체는 어떻게 형성되는지, 하나의 동작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설명해 준다. 그러니 학생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과학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무엇보다 과학은 정말 재미있고, 별나고, 신기하고, 믿기 어려운 걸 증명해 준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과학적 호기심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된다며 더욱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은 나도 과학이 알고 싶었어 1 - 사소하지만 절대적인 기초과학 상식 126 실은 나도 과학이 알고 싶었어 1
래리 셰켈 지음, 신용우 옮김 / 애플북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은 유전적으로 많이 먹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다. 음식이란 것은 수천 년 동안 매우 부족했다. 더구나 소금, 탄수화물, 지방이 포함된 음식은 구하기 힘들었으므로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모두 인간의 식단에 필요한 영양소지만 구하기가 힘들어 지나치게 많이 먹게 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 하지만 요즘엔 다르다. 사방에 음식이 널려 있다. 패스트푸드점과 식당이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우리는 뼛속 깊이 뿌리내린 '석기시대 정신'으로 아무리 먹어도 만족을 모른다.    p.27

왜 몸에 안 좋은 음식일수록 자꾸 당길까? 이 책에 의하면, 간단히 말해 정크 푸드에 설탕이 엄청나게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뇌에서 아드레날린과는 반대로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줄이는 강한 호르몬인 옥시토신을 혈관으로 분출시킨다고. 그래서 정크 푸드를 '위안이 되는 음식'이라고 부른다는데, 사실 '몸에 안 좋은' 음식이라도 맛이 있다면 별 생각 없이 즐기는 나로서는 괜히 뜨끔해지고 말았다.

이 책은 미국국민 과학선생님이 기초적인 과학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알려 주는 과학교양서이다. 청소년과 성인을 막론하고 누구나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교양으로서의 과학상식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전혀 어렵지 않고 지루하지도 않게 읽히는 책이다. 미국대통령 과학교사상 6회 수상했다고 하는 저자는 20여 년간 과학 칼럼을 연재하며 가장 많이 받았던 126가지 질문들을 엄선하여 이 책에 담았다.

 

달에는 3일이면 가지만 화성은 편도로 8개월이 걸린다. 잠시 머무른 뒤 돌아오는 데 또 8개월이 걸리니, 화성을 왕복하려면 최소 16개월 이상이 소모된다. 그 기간 동안 사방이 막힌 우주선 안에서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의료 시설도 이용하지 못하면서 매일 똑같은 동료들과 생활하려면 엄청난 정신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화성은 생각처럼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p.197

영화 '마션'을 비롯해서 화성을 탐사하고, 화성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는 작품은 생각보다 꽤 많다. 그렇다면 실제로 인간이 화성에 갈 수 있을까. 물론 인간은 화성에 갈 수 있다. 하지만 이 여정은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들고, 위험하며, 오랜 시간이 걸린다. 화성에 우주선을 보낼 수 있는 특정 시간대가 있는데, 반드시 정확한 발사 시간대에 이륙해 정확한 시간에 착륙하고, 임무를 수행한 뒤 복귀선과 만나야 한다. 게다가 화성은 인간에게 매우 적대적인 장소로 대부분 이산화탄소로 이루어진 얇은 대기가 열을 잡아 두지 못해 적도 부근의 평균 기온이 영하 46도에 이른다. 대기압도 굉장히 낮고, 기온도 낮아, 물이 일반적인 액체 상태로 존재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화성으로 무인우주선을 보내 탐사하는 것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유인우주선이 화성에 간 적은 없다고 한다.

<실은 나도 과학이 알고 싶었어> 1권은 인체, 지구과학, 천문학, 기술과학이라는 카테고리로 사소하지만 중요한 기초과학 상식을 다루고 있다. 우리 몸에는 세포가 몇 개나 있을까? 우리가 꾸는 악몽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물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면 익사할까? 음치는 왜 생기는 걸까? 일란성 쌍둥이는 지문도 같을까? 눈은 외 하얀색일까? 고층 건물은 왜 땅으로 꺼지지 않을까? 오존층이 계속 파괴되면 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타지 않고 태양에 얼마나 가까이 갈 수 있을까? 우주의 다른 곳에 또 다른 생명체가 존재할까? 블루투스는 어떻게 작동하는 걸까? 레고는 어떻게 맞물리는 걸까? 등등.. 일상 속에서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해서 지나쳤던 의문부터 매우 심호하고, 철학적이고, 유머러스하고, 기발한 질문에 이르기까지 흥미로운 내용들이 가득하다. 과학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사람도 과학이 너무 어려워 아예 알기를 포기했던 사람도, 과학을 공부하고 있는 청소년들도, 과학 이론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고 있는 성인들에게도 도움이 될만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로 K
돈 드릴로 지음, 황가한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을 정의하는 요건은 그것에 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은 훼손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형태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를 죽이고 싶어 합니다."

"영원히 사는 우리는 과연 어떤 쓸모가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궁극적인 진리와 마주하게 될까요?"

"사람들이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내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 주는 고통 때문이 아닐까요?"   p.77

주인공 제프 록하트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비밀 단지로 향한다. 그의 아버지 로스 록하트는 육십대 중후반의 억만장자로 생체공학과 신기술이 발전할 미래까지 육체를 냉동 보존하는 비밀 실험 프로젝트의 주요 투자자이다. 그의 두 번째 아내인 고고학자 아티스가 불치병에 걸려 이 실험에 참여하기로 한 상태였다. 하지만 제프는 이 모든 것들이 혼란스러웠고, 낯설기만 했다. 그에 비해 아버지 로스는 의학적, 기술적, 철학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냉동 보존술로 몸이 냉동되고, 미래의 어느 시점이 되면 끝에 이르게 한 상황에 대응할 방법이 존재하는 시기가 올 것이고, 그때 정신과 육체가 복원되고 다시 살아나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제프는 의붓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실제로 목격한 그곳의 풍경은 충격적이었다. 사람들이 때가 되기 한참 전에 몸에서 필수 장기들을 꺼내고 죽은 상태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는 사실, 후드와 가운 차림으로 투명한 캡슐 안에 웅크려 있던 마네킹같은 모습들, 그들이 언제가 되든 다시 살아났을 때 모두 똑같을까. 인간으로 죽어서, 같은 크기의 드론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 이들은 경계의 바깥에서,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제프는 이곳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사유한다. '인간은 태어남을 선택할 순 없지만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영예로울 수 있는 것일까.' 이들은 시간의 바깥에서, 역사의 바깥에서 살게 될까.

 

평범한 순간들이 삶을 구성한다. 어머니는 이 명제를 믿어도 됨을 알았고, 나 또한 결국은 우리가 함께 보낸 세월에서 그것을 배웠다. 엄청난 도약도, 추락도 아니다. 나는 이슬비처럼 내리는 과거의 작은 파편을 들이마시고 내가 누구인지 안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이 시간의 필터를 거친 지금은 더 선명하다. 다른 누구에게도, 아주 아주 조금이라도, 아무에게도, 그 누구한테도, 절대 속하지 않는 경험이다. 나는 그녀가 돌돌이를 사용해 천 코트에서 보풀을 제거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코트를 정의해봐, 나는 생각한다. 시간을 정의해봐, 공간을 정의해봐.   p.117

사실 '냉동 보존술'이라는 소재는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다. 사람의 몸을 극저온에 보관해 미래의 사람들이 되살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인체 냉동 보존술'이라고 한다. 우주선을 타면 우주를 여행할 수 있는 것처럼, 이 방법 또한 미래의 다른 시간대로 이동할 수 있는 일종의 시간 여행인 셈이다. 시신을 급속 냉동시켜 세포 조직의 부패를 막아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동안 보관했다가 부활이 가능해질 때 즈음해서 해동시킨다는 것인데, 실제 냉동인간 상태로 보관되어 있는 시신은 현재 미국과 러시아에 걸쳐 600여 구에 달한다고 하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과연 불로장생은 더 이상 헛된 꿈이 아닌 걸까. 질병 때문에 삶을 일찍 마감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기적 같은 기술이 그야말로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 물론 냉동 보존에 워낙 거액의 비용이 들기 때문에,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소재부터, 표지의 분위기까지 모두 전형적인 SF 작품처럼 이야기가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굉장히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이라 흥미로웠다. 극중 '사람들이 평범하게, 쉽게 잊으며 하는 일들.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의 표면 바로 밑에서 숨 쉬는 것들. 나는 이런 행위, 이런 순간에 의미가 있길 원한다.'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어쩌면 이 작품이 쓰여진 방식이 바로 이런 방식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보여지는 것 이면에 있는 것들을 살피고, 현재와 미래,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진지하고 예리한 통찰을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니 말이다.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소재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데다,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 또한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절묘한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3의 시나리오 1 - 의문의 피살자
김진명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은 사실보다 더 진실이라야 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이 작가 서문은 무얼 말하는가. 그는 자신이 쓴 소설에 등장하는 이런 일화들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건가. 그렇다면 그의 죽음은 소설 속의 인물이자 실제 인물인 대통령안보보좌관이나 뉴욕의 류삼조 박사와 관련이 있다는 얘긴가.    -1, p.54~55

베이징에서 한국인 소설가가 피살된 채 발견된다. 이름은 이정서, 이틀 전에 평양에서 베이징에 도착했고, 오던 날 밤 권총에 맞아서 피살되었다. 여권, 지갑 할 것 없이 전부 사라졌고, 전문가에게 당한 것처럼 보였는데, 비행기 꼬리표로 인해 신원과 그의 여정이 밝혀진다. 뉴욕과 평양과 베이징을 동시에 방문했다는 것으로 보통의 여행객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대체 그는 왜 베이징에서 살해된 것일까. 베이징의 공안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함께 수사를 벌이게 된 한국의 검사 장민하는 이정서의 피살에 얽힌 배후를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는 이정서가 쓰던 소설이 국제 관계나 국제 정치 외교에 관한 내용이었다는 걸 듣고는, 최근 쓰던 원고가 단서가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피살된 소설가가 미완성 원고에 써놓은 것은 한국의 정치인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미국의 정보기관에 치명적인 약점을 잡혀 평소에는 소신대로 뭘 하는 척하지만 중요한 일에서는 은밀히 미국의 입장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는 구도로 진행되는 이야기였다. 장검사는 최근 수사 중에 알게 된 사실과 비슷한 내용을 원고에서 발견하고, 소설 속 내용이 현실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사건을 조사해나가면서 점차 배후에 엄청난 정치적 음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과연 이정서가 죽기 전 언급했던 '3의 시나리오'란 무엇이며, 그는 왜 살해 당하게 된 것일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백 년에 한 번도 틀어질 수 없는 일들이 틀어지고 있었다. 이정서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미국 대통령이 무언가를 성사 직전에 취소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김정일 암살이라는 엄청난 공작이 불과 하루 전에 취소되는 일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장 검사는 제3의 시나리오가 이런 일들과 모종의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에 빠져들었다.     -2, p.115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 북미관계의 전환기를 다룬 이 작품은 2004년 출간작으로, 이번에 15년 만에 재출간되었다. 김진명 작가는 25년 전에도 한반도의 핵개발을 소재로 한 작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적이 있다. 2년 전 신작에서도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미중러일 4강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실을 그려냈었다. 허구와 사실을 넘나드는 이야기로 팩트 소설이라는 독보적인 장르를 구축한 작가답게, 매번 정치적인 이슈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무엇보다 정치적인 배경을 무대로 펼쳐지는 극중 스토리 또한 매력적인 미스터리와 긴장감 넘치는 전개로 지루할 틈 없이 펼쳐지고 있어 작품의 가독성만큼은 인정해줄 수밖에 없는 작가이기도 하다.

<3의 시나리오> 역시 무려 15년 전에 쓰였지만, 여전히 뜨거운 남북 관계의 이슈를 짚어내고 있다. 북미회담 결렬에 담긴 진짜 메시지는 무엇인지, 대북 정책에 대한 고민과 국제 정세의 움직임을 읽어내고 그 이면의 메시지를 '소설적 허구'로 그려내고 있지만, 누구라도 이 작품을 읽으면서 '진짜 현실'을 떠올리고, 한번쯤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소설이지만 소설 같지 않고,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전개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게다가 대중 소설로서는 드물게 국가 간 대치되는 상황을 치밀하게 묘사해 CIA 학술정보지에도 등재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놀라울 정도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팩트 소설이라는 말일 것이다. 15년 전에 쓰인 작품이라 이야기의 배경은 오래 되었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힘의 역학관계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 또한 이 작품을 여전히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