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를 믿나요? - 2019년 볼로냐 라가치 상 오페라프리마 부문 대상 수상작 웅진 모두의 그림책 25
제시카 러브 지음, 김지은 옮김 / 웅진주니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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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을 잘하고 물을 좋아하는 소년 줄리앙은 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에서 인어들을 직접 만나게 된다. 책 속에서만 보았던 인어를 본 소년은 인어의 화려한 아름다움에 반한다. 그리고 자신도 인어가 되어 바다 속에서 물고기들과 함께 자유롭게 헤엄치며 노는 것을 상상한다.

 

"할머니는 인어 봤어?"
"그럼, 봤지."

"할머니... 나도 인어인데."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목욕을 하러 가느라 자리를 비우고, 혼자 남겨진 줄리앙은 커튼과 화분으로 인어 분장을 하며 논다.

 

 

소년이 인어의 모습이 되어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무뚝뚝한 할머니는 화가 난 표정으로 자리를 피한다. 남자아이가 자신을 사회가 규정한 남자다운 모습에서 벗어난 모습으로 꾸미고 노는 것을 발견한다면, 누구나 마찬가지로 화를 내거나 혼을 낼 것이다. 대부분의 어른들이라면 말이다. 우리는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라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자다움', '남자다움' 을 강조하는 분위기는 너무도 당연했고, 사실 그러한 인식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바로 그 '답다'는 규정의 옳고 그름은 대체 누가 판단하는 걸까.

 

"와, 이게 뭐야, 할머니?"
"너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다시 돌아온 할머니는 줄리앙을 혼내는 대신 예쁜 목걸이를 건네 준다.

 

 

할머니가 준 목걸이를 목에 걸고 인어 분장을 한 차림새로 줄리앙은 할머니와 함께 길을 나선다.

 

"인어다." 줄리앙이 속삭였어요.
"그래, 우리 꼬마 인어도 같이 가 볼래?"

 

광장에는 인어 무리가 행진을 하고 있었고, 할머니와 줄리앙은 인어들과 함께 걷기 시작한다. 생물학적 성별을 근거로 만들어진 사회적 규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소년의 이야기가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수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나 지칭 없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년의 숨은 고민을 할머니의 사려 깊은 행동을 통해 감싸 안아주고 있어 매우 섬세하고, 따뜻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개성과 자신의 몸을 비롯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야말로 무조건적인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웅진 모두의 그림책 25권은 세상이 만들어 둔 관습이나 규칙을 벗어난 길 위에서 자기만의 길을 찾기 위해 나서는 소년 줄리앙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시카 러브 작가의 첫 그림책 데뷔작인 이 작품은 2019 볼로냐 라가치 상 오페라프리마 부문 대상, 2019 에즈라 잭 키츠 상 명예상, 2019 스톤월 북 어워드 대상을 받으며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 책은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에 대한 귀여운 변주이기도 하다. 200년 전의 인어공주에 비해 21세기의 인어공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곧 개봉될 월트 디즈니의 실사판 영화 <인어공주>에서는 주인공 역할에 흑인 배우를 캐스팅하는 파격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작품 속 소년 줄리앙은 할머니의 믿음과 응원으로 오색찬란한 인어들의 행진에 함께 나설 수 있게 된다. 인종 차별,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등을 떠나 다양성을 존중하고, 개성을 인정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라는 예쁜 그림책이었다. 아름다운 색채의 그림들을 통해 보여지는 반짝반짝 빛나는 이야기였다. 언젠가는 차별 없는 세상이 되기를, 그리고 아이들의 개성과 가능성, 그리고 꿈을 지지하는 어른들로 가득한 세상이 되기를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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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 1
조금산 글.그림 / 더오리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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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웹툰 인기작 <시동> 단행으로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마동석, 박정민, 정해인, 염정아 등 화려한 캐스팅으로 12월 18일 개봉 예정이기도 하다. 조금산 작가는 OCN 드라마 <구해줘>의 원작인『세상 밖으로』, JTBC 드라마 <탁구공>의 원작인『탁구공』이 대표작인데,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작품은 <시동>이 처음이라고 한다. 전체 4권으로 완결되는 단행본이고, 현재는 1,2권이 나왔고, 3,4권은 예약 판매 중이다. 그래서 우선 1권과 2권을 먼저 만나 보았다.

 

 

이야기의 시작은 동네 꼬마들을 협박해 돈을 뜯어 내는 두 주인공 택일과 상필의 모습이다. 이젠 삥 뜯고 애들 때리는 것도 지겹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다닐 생각도, 어디가서 일할 생각도 없는 청춘들이다. 택일의 엄마는 전직 배구선수 출신이라 툭하면 손부터 나가는 성격인데, 아들놈이 하라는 검정고시 준비는 안하고 집에는 며칠 만에 들어오니 싸대기를 날리지 않을 수가 없다.

 

"어른이 돼서도 할 수 있는 걸 왜 자꾸 미리 하겠다고 난리 치는 거야."

 

택일은 언제나 아무도 없는 무인도로 가고 싶다는 꿈을 꾸지만 떠날 용기도 돈도 없다. 그러다 자신들이 때렸던 꼬맹이들 형이란 놈이 나타나 실컷 얻어 터지고 나니 이 새끼 저 새끼 다 지겹고, 동네도 지긋지긋해서 며칠 바람 좀 쐬다가 오겠다며 무작정 차표를 끊는다. 택일은 그렇게 원주로 향하고 숙식이 제공되는 중국집 장풍에 취직을 하게 되고, 상필은 돈을 벌기 위해 동네 형의 소개로 일수 가방을 손에 들고 다니기 시작한다.

 

 

찌질한 반항아 ‘택일’과 폼생폼사 반항아 ‘상필’은 그렇게 사회로 첫 발을 내딛게 된다. 택일은 남다른 포스의 주방장 거석이 형과 가출 소녀이자 복싱이 특기인 경주를 만나게 되고, 상필은 사채업을 하는 사무실을 다니면서 조금씩 어른들의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거의 시종일관 맞는 캐릭터인 택일은 엄마에게 싸대기를 맞고, 동네 꼬맹이들의 형에게도 맞고, 장풍반점의 주방장 거석에게도 맞고, 자신보다 어린 소녀 경주에게도 기절할 만큼 맞는다. 불량 학생 내지는 반항아처럼 하고 다니지만, 완벽하게 나쁜 놈이라기엔 어딘가 이프로 부족한 듯한 느낌이라 더 인간적이다. 폼 나게 돈 벌고 싶은 상필은 말 주변이 좋아서 천연덕스럽게 일수 일을 해내지만, 아직은 마냥 소년처럼 보이는 살짝 귀여운 캐릭터이다.

 

 

단행본을 다 읽고 나서 영화 예고편을 봤는데, 배우들과 인물들의 싱크로율이 너무 완벽해서 깜짝 놀랐다.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인 성격의 거석이 형과 단발 머리를 한 마동석 배우의 만남은 그야말로 웹툰을 찢고 튀어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택일 역의 박정민 배우, 상필 역의 정해인 배우, 그리고 말보다 몸이 앞서는 택일의 엄마 역에 염정아 배우까지... 캐스팅 만으로도 작품에 대한 기대치가 올라가는 작품이다.

 

"인생 뭐 있어? 일단 한번 살아보는 거야!"

 

영화 '시동'이 '강철비', '신과 함께' 시리즈에 이어 웹툰 원작 영화의 흥행 계보를 이어갈 지도 기대가 된다. 갑갑한 집구석을 떠나고 싶었든, 누군가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도망쳤든, 남들처럼 폼 나게 살고 싶었든, 주먹보다는 프라이팬을 휘두르고 싶었든 간에.. 그들 모두에게 인생의 '시동'을 걸기 위해서는 용기 있는 한 걸음이 필요했다. 그렇게 이 작품은 자신만의 삶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모두를 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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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이르는 병
구시키 리우 지음, 현정수 옮김 / 에이치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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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든 나쁘든 하이무라 야마토를 무시할 수 없다. 잊을 수도 없다. 그렇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아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간접적으로 서로 찾는 것이다.
- 왜?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째서 그 사람은 그렇게 되어버렸을까? 대체 그 사람의 어떤 얼굴이, 어떤 말이, 어떤 태도가 그 사람의 진실이었을까?    p.169


삼류 사립대생 마사야는 친구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한 채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마사야는 초등학교, 중학교 때만해도 우등생에 반의 영웅으로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이후로 성적이 떨어지고 절망에 빠져 여러 번 휴학 후 결국 퇴학 처분을 받고 심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후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대학수험 자격을 얻었지만, 가고 싶었던 곳에는 전부 떨어지고 간신히 합격한 곳이 신흥 사립대학뿐이었던 거다. 희망하지 않았던 대학 생활이었고, 친구들은 모두 수준 낮은 인간들로 보였으니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사야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그것은 24명을 죽인 희대의 연쇄살인마가 감옥에서 보낸 편지였다. 이미 사형을 선고 받은 연쇄살인범이 평범한 대학생에게 왜 편지를 보낸 것일까.

 

하이무라 야마토, 그가 24건의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 것은 5년 전 일이었다. 그러나 경찰이 입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중 고작 9건뿐이었다. 피해자는 대부분 10대 소년소녀로, 적게는 열여섯 살부터 많게는 스물세 살이었다. 만약 그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면, 누구나 영화배우 같은 느낌의 기품 있는 미남자라고 생각할 법한 차분하고 온화해 보이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마사야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고등학교 입학을 눈앞에 두었던 시기까지 단골이었던 제과점의 주인이기도 했다. 하이무라는 소년소녀들을 감금하고 고문하고 살해한 그 두 손으로 데니쉬와 바게트, 스콘을 구워서 깔끔한 미소로 손님에게 건네주곤 했었다. 마사토는 편지를 받고 그를 면회하러 간다. 하이무라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모두 인정하지만, 아홉 번째 살인만은 자신이 저지른 범행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여자는 자신의 타깃과는 다르고, 수법도 다르다며, 그 한 건만큼은 누명을 쓰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마사야에게 자신의 누명을 증명해달라고 말한다.

 

 

"너, 최근에 누군가에게 '사람이 변했다'라는 말 들은 적 없어?"
가나야마가 속삭이듯 물었다.
"모두 그래. 조금씩 그 사람과 닮아가. 영향을 받는 거야. 말버릇도, 몸짓도, 눈매까지도. 나도 그랬어. 그 무렵의 나는 정말로 '그 사람이 됟고 싶다'라고 바랐지."
마사야는 숨을 삼키고 가나야마의 말을 들었다. 들어서는 안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 검은 파도가 술렁였다.    p.317


마사야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유난히 친절히 대해주었던 빵집 주인이자, 현재의 자신이 아니라 우등생이었던 모습만을 알고 있는 하이무라의 요청을 수락하기로 한다. 변호사 사무실로부터 하이무라가 일으킨 사건에 대한 백여 장의 자료를 읽고, 살인과 범죄에 대한 책을 구입해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이무라의 주변 인물과 사건 관계인들을 하나하나 만나며 조사를 이어간다. 하이무라가 초등학교 재학 당시의 교사, 미취학 아동일 무렵에 자주 맡아서 돌봐주었던 친모의 사촌 언니, 청소년기 하이무라의 보호 관찰을 맡았던 노인, 그와 초등학교, 중학교 9년을 함께 보냈다는 동창, 그의 마지막 양아버지였던 남자, 동네 주민들과 빵집의 단골들, 그와 데이트를 했던 여성들까지... 만나면서 마사야는 생각한다. 각자가 가진 하이무라의 이미지가 너무나도 다르다고.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내젓는 사람들이 있었고,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감싸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분명한 것은 그가 매우 똑똑한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생아로 태어나 열악한 성장 환경에서 자라야 했고, 책임감도 능력도 없는 어머니 밑에서 주위의 멸시와 괴롭힘에 시달리고, 양아버지에 의한 신체적, 성적 학대까지 받으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태생이 불행하다고 해서 모두가 살인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범죄를 저질러도 괜찮다는 핑계는 될 수 없다.

 

연쇄살인범의 인생에 숨은 사건과 진실을 낱낱이 알아가면서, 마사야는 점점 하이무라의 내면으로 깊숙이 빠져든다. 그렇게 그에게 서서히 매료되어 어느 순간 문득 자신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까지 느끼게 되는데, 살인은 정말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는 것일까? 이 작품은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소년의 성장 과정에서부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동기와 심리 상태,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심리 조작의 기술까지, 시종일관 연쇄살인범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실제 존재했던 다양한 연쇄살인범들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기도 하고, 하이무라가 체포되었을 당시의 심정이나 수감 중인 상태의 마음 등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어 오싹하면서도 충격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연쇄살인범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그들이 어떻게 자라왔고, 어떤 과정을 통해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게 되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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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 자작 감행 - 밥도 술도 혼자가 최고!
쇼지 사다오 지음, 정영희 옮김 / 시공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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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자카야에서 찌그러져 있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다. 이자카야에 혼자 들어가 다들 즐겁게 왁자지껄 마시는 모습을 어두운 눈초리로 흘깃흘깃 바라본다. ‘괜찮아. 나야 뭐 어차피…’라고 생각하며 기가 살짝 죽은 채 술을 마신다. 그런데 이게 즐겁다. 어두운 눈매를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몹시 귀엽다. 이런 이상한 취미의 소유자다. 그런데 취미라는 것은 점점 깊은 곳으로 빠지게 마련이므로 ‘이자카야에서 혼자 마신다’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 ‘이자카야에서 대낮부터 마신다’고 하는, 한층 더 과격한 조건에 끌리게 된 것이다.     p.24~25

 

요즘은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1인 가구 증가로 인해 혼밥족이 늘어난 것도 있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영화를 보는 등 혼자서 즐기는 1인 문화 ‘혼족’이 익숙한 분위기 탓도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독신자나 혼밥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미 일상이 된 풍경일 것이다. 이번에 만난 책은 50년 장기 연재 중인 관록의 만화가이자 반세기 넘게 혼밥을 실천해 온 달인 쇼지 사다오의 국내 첫 소개작이다. 무려 1987년 1월부터 <주간 아사히>에 연재 중인 <저것도 먹고 싶다. 이것도 먹고 싶다>에서 발췌한 내용을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박찬일 셰프의 추천평을 보니, 낮술과 아침술을 즐기는 대책 없는 만화가 할배의 책을 힘겹게 번역해서 읽어왔다고 하는데 그만큼 쇼지 사다오의 타고난 입담과 유쾌한 그림은 매혹적이다.

 

쇼지 사다오는 국내 독자들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50년째 연재 중인 주간지만 두 개인 관록의 작가이다. 그를 담당했던 젊은 편집자들이 줄줄이 정년 퇴직하는 사이, 80대의 노장 만화가는 변함없이 그리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흔들림 없고 성실한 일상 뒤에는 매일의 작은 즐거움을 안겨주는 '혼밥'과 '혼술'이 있었다.

 

 

말캉말캉한 무가 이에 닿는 식감에 기분이 좋아진다. 그 식감을 살짝 가로막고 유부의 쫄깃한 식감이 더해진다. 거기에 유부의 기름 맛이 사르르 퍼진다. 그 기름의 맛 또한 무에 적당하게 잘 배어 있다. 무채 유부 된장국을 먹고 있노라면 한 순간 황홀해지며 머릿속이 텅 비어버릴 때가 있다. 유부는 '된장국 세계의 중매쟁이'답게 무와 된장을 훌륭하게 묶어주고 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 유부의 맛이 다른 것을 압도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유부는 물러설 줄 안다. 게다가 그 방식도 훌륭하다. 한 순간 존재감을 드러낸 뒤 '어?' 하는 순간 어딘가로 벌써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p.216

 

이 책에 따르면 고전적인 백반집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정도가 무려 열한 가지나 되는데, 특히나 가게 주인의 항목에 빵 터지고 말았다. 가게 주인은 무뚝둑해야 하고 다소 언짢아 보이고, 약간 삐딱한 느낌이라야 한다나. 게다가 손님이 들어왔을 때 "어서 오세요"같은 인사는 금지고, 손님이 주문을 마쳤을 때도 "알겠습니다"같은 리액션은 금지이고, 복장은 티셔츠에 앞치마 차림인데 앞치마에 얼룩은 필수라고. 하핫. 물론 쇼지 사다오의 매우 개인적인 기준이지만, 어쩐지 우리가 쉽게 상상하는 맛집의 이미지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아 재미있었다. 그가 자신만의 철학으로 나에게 흡족한 한 끼를 완성해 가는 과정은 굉장히 주관적인 이야기지만, 먹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아마 대부분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그가 소개하고 있는 요리와 가게 들에 대한 묘사도 흥미진진하다. 아침 9시부터 영업하는 이자카야에 가서 마음 먹고 '찌그러져서 한잔'을 해보려고 했더니, 곤란하게도 가게 안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밝고 즐거워서 오히려 긍정적인 기분이 들어서 힘이 솟았다는 에피소드도 재미있고, 방송을 보다 유명한 맛집 탐방 리포터가 햅쌀밥을 한 입 먹고는 이런 밥이라면 반찬 같은 것도 필요 없겠다는 소리에 반찬 없이 밥 한 공기에 도전해보는 엉뚱함은 귀엽기도 했다. 굳이 임페리얼 호텔까지 가서 2,625엔이나 하는 햄버거를 먹기도 하고, 굴튀김을 정말 좋아한다며 막 조리가 끝난 굴튀김을 먹는 과정을 놀라울 정도로 세세하게 묘사하며 굴의 물컹함에 대한 고찰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 외에도 돈카스 카레를 먹는 올바른 방법이라든가, 살코기보다 비계가 좋은 이유, 감동의 무채 된장국과 무조건 맛이 보장되는 계란프라이 덮밥에 대한 글도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식사를 하며 느끼게 되는 기쁨과 다양한 음식에 대한 세세한 묘사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쇼지 사다오와 함께 식사를 하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잘 읽었다'가 아니라 '잘 먹었다'고 말을 해야 할 듯한 느낌이다. 물론 밥을 먹는 것도 혼자가 최고라고 외치는 쇼지 사다오이지만, 이 책과 함께라면 그의 밥상으로 초대받는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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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너보다 나를 더 사랑해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하다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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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음식을 냉장고에 넣어 두고 잊어버려 유통기한을 넘기곤 해.
며칠 정도야, 먹어도 괜찮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면 다 상해버려서 먹을 수가 없지.
사람의 마음도 그래. 어떤 감정은 쌓아둔 채 적정 기간을 넘기면 영영 돌이킬 수 없게 변해버리기도 하거든. 그러니까 내 안의 감정을 너무 묵혀두지 마. 꽁꽁 묵혀 둔 감정들이 상해버려서 마음이 무너지지 않게 제 때 마음을 열어서 풀어주라구.    p.24

 

저마다의 개성과 매력의 사랑스러운 여덟 캐릭터로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카카오프렌즈와 젊은 작가들이 만난 '카카오 프렌즈' 시리즈 신작이다. 라이언, 어피치, 튜브, 무지에 이어 사랑스러운 커플 네오와 프로도가 등장했다. 먼저 만나게 된 것은 카카오프렌즈의 대표 패셔니스타이자 새침한 매력의 소유자 네오의 이야기이다. 발랄한 현실주의자 네오와 <나를 위해 하다>의 작가 하다가 만났다.

 

 

 

 

네오는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새침한 고양이이다. 도도한 자신감의 근원은 바로 단발머리 가발에서 나오고, 부잣집 도시개 프로도와 알콩달콩 아옹다옹 연애 중이다. 하다 작가는 말한다. 가끔은 네오처럼 약간 눈을 치켜 뜨고, 제법 까칠한 표정을 지어보면 어떨까. 내 호의가 타인의 권리가 되고, 착해지고 싶다는 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아주지는 않는 세상이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착한 마음이 약점이 되지 않도록, 사랑스러운 현실주의자가 되어 보자는 거다. 어쩐지 '착해 보이지 말아요'라는 문구 때문에 첫 장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친절한 금자씨가 '친절해 보일까봐' 눈두덩을 시퍼렇게 칠하고 다녔던 것처럼, 우리도 눈 딱 감고 한번 그래 보면 어떨까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힘을 들여라, 애를 써라 하고 인사하는 걸까? 안 그래도 모두 힘든 세상인데 말이야. 같은 일을 하더라도, 힘을 덜 들이고 수고를 덜 하고 즐겁고 여유롭게 해내면 그게 훨씬 좋은 일이잖아.
그래서 말인데, "수고하지 마세요" 라고 인사하는 건 어떨까? 나도, 당신도, 너무 수고하지 말고 적당히 여유로운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런 의미에서, 오늘만큼은 수고 대신 칼퇴를 해보자고. 흐흐.    p.166~167

 

SNS에 ‘나를 지키며 사는 삶’에 대해 글을 올리며 7만 팔로워의 공감을 받는 작가답게, 이 책 속의 글들은 온통 '나' 자신을 위한 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힘든 날엔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행복한 돼지가 되어도 좋고, 쇼핑은 단순히 돈을 쓰는 행위가 아니라 내 정체성과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행위라고 말하며, 오래 앉아 있는 사무직은 아랫배가 나올 수밖에 없으니 아름다운 내 아랫배에 자유를 주기 위해 고무줄 바지가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친구들에게 약속 있다고 핑계를 대더라도 하루 종일 집에서 조용히 쉬는 나만의 시간도 꼭 필요하고, 회사는 돈 버는 곳이니까 모든 걸 걸어놓지 말라고 내 삶을 풍요롭게 영위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까칠하고, 뾰족하고, 당당하면서도 매력 넘치는 네오의 모습들이 하다 작가의 말들과 고스란히 겹쳐서 답답했던 마음에 사이다 같은 통쾌함을 안겨준다.

 

 

 

 

카카오프렌즈 캐릭터들은 각자 서로 다른 성격에 콤플렉스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독특하지만 친근한, 귀엽고 사랑스러우면서도, 따뜻하고 위로를 안겨주는 캐릭터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시리즈를 읽으면서, 페이지 구석구석에서 그들 캐릭터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되는 느낌이 든다.

 

"나는 앞으로 누군가에게 사랑 받는 것 대신 스스로 깊고 유능하고 야망 있고 끈기 있는 가끔은 화끈하고 확실한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해."라는 책 속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야만 생기는 가치라면 그게 내 정체성이 될 수 없으니, 무조건 타인에게 사랑 받는 사람,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자신을 돌보고, 언제나 자기답게 행동하려 하고, 하고 싶은 걸 기어코 해내는 매력적인 당신이 될 수 있도록 이 책은 우리를 위로하고, 응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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