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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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이런 식으로 산을 즐기는구나."

기무라 씨가 진지하게 말했다.

"기무라 씨도 이제부터예요. 음식에 집중해도 좋고, 꽃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좋고, 등산 일기를 쓰는 것도 좋고. 그림이나 카메라, 즐길 수 있는 요소는 무한히 있어요. , 좋지요?"   p.124

미나토 가나에가 산을 배경으로 소설을 쓴다고 하면 누구나 미스터리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누군가 다치고, 죽고, 속이고, 배신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녀가 달라졌다. 누가 다치기보다는 치유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은 국내에 꽤 많이 출간되어 있고, 나도 거의 대부분의 작품을 읽었기에 그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책은 그러한 편견을 완전히 깨버리는 작품이었다. 미나토 가나에와 힐링이라는 단어를 연결시킬 수 있다니 놀랍기 그지 없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이별의 슬픔, 사랑의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 떨칠 수 없는 열등감 등 다양한 고민을 안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산을 오르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모처럼 특유의 독기를 뺀 채 평소 취미인 등산을 소재로아무도 죽지 않는 소설을 그려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일본 NHK TV에서 두 시즌에 걸쳐 드라마화되어 영상으로도 사랑 받았다고 하는데, 각각의 에피소드가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연작 형식이라 드라마로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산은 생각을 하기에 딱 좋다. 동행이 있어도 말없이 한 줄로 걷고 있으면 자기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때 마음속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자기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으면 인생도 자기 발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일상생활에서는 외면하던 문제와 똑바로 마주 봐야 할 듯한 느낌이 든다. 이 발로 정상에 도착하면 가슴속에도 빛이 비쳐드는 것 아닐까 하는 기대가 가는 길을 격려해준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과 마주 보면서 걷는 것이 등산이라 생각했다.   p.361

백화점에서 근무하는 리쓰코는 입사 동기 친구들과 함께 첫 등산을 가기로 한다. 등산을 계획하게 된 이유는 바로 아웃도어 행사에서 등산화에 한 눈에 반했기 때문이다. 모처럼 좋은 신발을 샀으니 산에 한번 올라가볼까 싶어서 시작한 등산이었던 거다. 하지만 당일에 친구 한 명이 컨디션을 이유로 불참하고, 다소 어색한 관계인 친구와 둘이 산 정상을 향하게 되는데.. 안 그래도 결혼을 앞두고 고민이 많은 리쓰코는 무사히 등산을 마칠 수 있을까. 그 외에도 단체 미팅에서 만난 수수한 분위기의 남성과 등산에 나서게 된 화려한 사십 대 여성의 이야기도 있고, 아버지 덕에 세 살부터 등산을 시작했지만 어째서인지 정상에는 한 번도 오르지 못했던 여성의 이야기, 독신에 변변찮은 번역 일을 하며 아버지의 농사를 돕고 있는 서른다섯 유미가 잘 나가는 의사 남편을 둔 잔소리꾼 언니와 등산을 가게 되는 이야기 등등.. 저마다의 고민과 사정이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바위투성이의 길을 다 올라가면 단숨에 시야가 탁 트이고, 배낭을 내려놓고 올려다보는 하늘에는 손이 닿을 것만 같다. 선명한 녹색 습원을 지나고, 낯선 식물들과 알록달록한 꽃들도 지나치며 크게 심호흡을 한다. 공기를 배 속 가득 들이쉬면, 스트레스와 불만과 짜증이 쌓인 시커먼 뱃속이 아주 조금은 깨끗해지는 느낌이 드는, 바로 그런 것이 등산이다. 페이지 가득 싱그러움과 맑음이 가득한 느낌이랄까. 산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상큼한 기운이 이야기 속에도 가득해 책을 읽는 내내 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이라는 걸 모르고 읽었다면 전혀 그녀의 작품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녀의 작품이 너무 독하고 어두워서 힘들었던 이들에게도, 혹은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도 색다른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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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온 - 두뇌 스트레칭 감성 일러스트북
상하이 탱고 지음 / 오브제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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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생각이 많아 머리가 아프거나, 빡빡한 일상 속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싶을 때 나는 그림책을 본다. 언어가 아니라 그림으로만 스토리를 전달하는 그림책은 매우 단순하다. 그리고 그 단순함이 어른들에게 필요한 순간이 있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단순해지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자. 그저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복해지는 일들을 망설임 없이 했었다. 그 선택으로 인해 오게 될 결과에 마음 쓰지 않고, 내 행동으로 인해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하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점점 사회화가 되면서 이런 저런 신경 쓸 일들이 늘어나고 보니 어떤 상황에서든 단순해진다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게 되고 만다. 바로 그렇게 단순함이 필요할 때 펼쳐야 하는 일러스트북을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등에서 '언어를 뛰어넘은 그림', '그 자체로 언어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성공적으로 종이책을 출간한 세계적인 일러스트레이터 상하이 탱고의 일러스트북이다. 이 책은 그가 5년 넘게 ''을 주제로 '하루 한 점'씩 그린 1,600여 점 중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170여 점을 선별한 소장 가치 높은 컬렉션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그림 자체에 이야기와 메시지가 녹아 있어 굳이 언어가 필요하지 않다는 데 있다. 색과 글자로 의미를 한정 짓지 않고, 단순한 검은 선으로 된 세련된 드로잉만으로 언어와 국경, 인종과 세대를 뛰어넘어 유머와 위트를 전달하고 있으니 말이다. 얼핏 보면 매우 단순해 보이는 드로잉들이지만, 창의력과 역발상을 바탕으로 피로와 타성에 굳어버린 뇌를 시원하게 식혀주는 소나기 같은 반전을 선사하고 있다.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직장인들에게도, 학교와 집만 오가며 쳇바퀴 돌듯 일상을 보내는 학생들에게도, 고단한 육아와 집안일에 지쳐있는 주부들에게도... 가끔은 그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 이 책의 부제가 '두뇌 스트레칭 감성 일러스트북'인데, 딱딱하게 굳어 있는 우리의 뇌를 새로운 생각과 번뜩이는 아이디어, 창의력으로 빛나는 상상들로 스트레칭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개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상하이 탱고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것들은 이상하거나 기괴하거나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원래 있던 것, 익숙한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을 살짝 비틀어 만들어내는 위트와 아이디어들인 것이다.

이 책은 창의적 발상을 필요로 하는 광고인들이나, 카피라이터, 마케터, 디자이너, 미술학도들에게 반전의 매력을 환기해줄 자기계발서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상하이 탱고가 광고 크리에이터로 일하던 장점을 발취해 그린 그림들이기 때문에 아이디어들이 정말 가득하다. 글이 전혀 없이 그림으로만 이야기하는 책이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보기에도 좋을 것 같고, 스트레스 가득한 어른들에게도 힐링의 시간을 줄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상하이 탱고의 그림들이 ''을 주제로 하고 있기에, 잠들어 있는 머리를 꿈꾸게 하는 것 같다. 예측 불가능한 상상력의 세계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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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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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이 불우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응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사람들이 응원은 해도 자기 손을 내밀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나오키가 잘살기를 바라긴 하지만 관계를 맺고 싶진 않은 것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도와주면 좋을 텐데. 이게 그들의 진심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수염 난 에스닉 요리점 점장한테 가진 고마움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p.200

츠요시와 나오키는 서로에게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었다. 아버지는 형제가 어린 시절 사고로 돌아가셨고, 어머니 혼자 파트타임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며 그들을 키웠지만 어머니마저 과로로 돌아가셨다. 형인 츠요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시작했다. 어머니 역할을 대신해 동생을 먹여 살리고, 대학까지 보내는 것을 자신의 의무처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허리와 무릎이 좋지 않아 두 달 전에 이삿짐센터 일을 그만두게 되고 보니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는 동생이 대학 진학을 거의 포기하고 몰래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나오키가 걱정 없이 대학에 진학할 마음을 먹게 할 돈이 필요했다. 물론 가난하다고 해서 남의 것을 훔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오래 전 이사 일을 해주었던 혼자 사는 부유한 할머니네 집에 도둑질을 하러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들키는 바람에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곧 체포되고 만다.

이제 나오키는 홀로 살아가야 했다. 대학은 당연히 포기하고, 이런 저런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보려고 하지만 만만치가 않다. 이유는 어딜 가나 따라다니는 형이 살인강도범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츠요시에게 편지가 온 것은 졸업식을 이틀 앞두고,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편지지와 봉투 구석에 벚꽃 모양을 한 파란 검열 도장이 조그맣게 찍혀 있는 그 편지는 이후 계속 그의 발목을 잡게 된다. 그가 답장을 하지 않아도, 이사를 가도 어김없이 낙인처럼 벚꽃 도장이 찍힌 편지가 배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형에 대한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학교에서는 그가 학업을 중단하고 떠나주길 바라고, 아르바이트 점장은 그의 존재를 불편해하며, 음악에 걸었던 청춘의 꿈은 사라지고,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는 그를 내친다. 물론 그 편지에는 자신의 과오에 대한 뉘우침과 피해자에 대한 속죄, 나오키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나오키는 자신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버렸는지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차별은 당연한 거야.” 히라노 사장이 조용히 말했다.

나오키는 눈을 크게 떴다. 차별은 나쁘다는 이야기를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요?”

사장이 말했다. “당연하지. 사람들은 대부분 범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 하네. 사소한 관계 때문에 이상한 일에 말려들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따라서 범죄자나 범죄자에 가까운 사람을 배척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행윌세. 자기방어 본능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럼 저처럼 가족 중에 범죄자가 있는 놈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p.360

240만 독자들의 찬사를 받으면서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다. 국내에서 출간된 지 약 10년 만에 리커버 에디션으로 출간되었다. 일본에서는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두 번의 뮤지컬화, 연극화가 되었으며 최근에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랑을 받았다. 범죄자 가족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로, 미스터리나 범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이 아니라 범죄가 벌어진 후 남겨진 이들의 삶에 주목하고 있다. 과연 살인자의 가족이 사회에서 차별을 받는 것이 편견인지 당연한 일인지, 범죄를 저지른 자의 속죄는 언제까지, 어디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극중 나오키가 근무하던 회사에서 형에 대한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었을 때, 사장이 그에게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차별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법에 따라 합당한 기준에 맞게 처벌을 받지만, 그 일로 인해 남겨진 가족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할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그러니 지금 나오키가 겪고 있는 고난까지도 형인 츠요시가 저지른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말이었다.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자신이 죄를 지으면 가족도 고통을 받게 된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 물론 평범한 사람들은 범죄자의 가족 또한 피해자니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도덕적으로는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쓰며 대하다 보니 역차별이 될 수도 있고, 그렇게 차별이건 역차별이건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신경을 쓰는 일이 생기면 회사로서는 부당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처우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장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남겨진 나오키는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일까.

 

죄를 지어 끊임없이 편지로 속죄하는 살인자, 죄는 없지만 끊임없는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는 살인자의 동생과 그런 동생을 불편해하는 사람들. 사실 그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줄 수 없는 어려운 문제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가해자의 가족 입장에서 담담하게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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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중록 1 아르테 오리지널 1
처처칭한 지음, 서미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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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소녀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명과 원한을 짊어지고도 머뭇거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본래의 연약함과 온화함은 모두 깊이 묻어버리고 필사적으로 앞으로, 빛이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오랫동안 잔잔하기만 했던 이서백의 마음에 순간 미세한 동요가 일었다. 마치 봄바람이 깊은 호수의 수면 위를 스치며 일으킨 잔잔한 물결 같았다.   p.88

황재하는 형부 시랑이었던 아버지를 도와 여러 사건을 해결했고, 장안에서도 신동이라고 명성이 자자한 소녀였다. 그렇게 열두 살부터 이름을 알렸던 황재하가 열일곱이 된 어느 날, 가족들이 모두 독살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당시에 그녀는 따로 연정을 품고 있는 이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명문 집안의 자제와 혼례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말다툼이 있었고, 바로 그날 저녁 황재하가 손수 가족들에게 떠준 양제탕 안에 치명적인 독, 비상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모든 정황상 가족들을 살해했을 사람은 그녀 밖에 없었고, 황재하는 살해범으로 수배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녀는 몰래 장안으로 숨어드는 데 성공하나 몸을 숨기려 올라탄 마차에서 기왕 이서백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고 만다. 마침 장안에는 석 달 동안 세 사람이 연달아 죽게된 사방안이라는 사건이 난제로 있었고, 황재하는 자신이 사건을 해결할테니 누명을 벗고 가족을 죽은 범인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황재하는 신분을 위장하고 이서백의 곁에서 함께 사건을 풀어나가게 된다.

‘잠중록(簪中錄)’비녀의 기록이라는 뜻으로, 주인공 황재하가 추리를 할 때 머리의 비녀를 뽑아 끼적이는 버릇과도 이어지는 제목이다. 과연 황재하는 기묘하고 잔혹한 사건들을 해결하고 누명까지 벗어 신분을 되찾을 수 있을까? 차갑지만 고고한 남자 이서백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황실의 기이한 사건들에서 오는 미스터리와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선에서 피어나는 로맨스가 짜릿하게 만나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작품이다.

 

 

문득 이서백은 텅 빈 하늘 같던 자신의 인생에 어느샌가 새하얀 구름이 덧칠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5월의 맑게 갠 하늘처럼 맑은 소녀가 어느 날 갑자기 이서백의 운명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때부터였다. 서로 대립해도 좋았고, 얽히는 것도 좋았다. 그렇지만 이서백의 인생에서는 역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가며 서로를 잊는 게 제일 좋으리라.   p.293

이 작품은 중국의 인기 로맨스 작가 처처칭한의 대표작이다. 중국 문학 사이트인 텐센트 QQ 독서와 장웨(iReader)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고 조회수는 1억 뷰를 돌파했으며, 인기에 힘입어 웹툰으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2019년 현재 소설, 만화 저장수 500만을 넘기고 종이책으로 출간되어 80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인기가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가독성이 굉장히 뛰어나고, 매력적인 캐릭터와 뚜렷한 서사 구조와 긴장감 넘치는 전개가 한순간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작품이다.

처처칭한의 작품 중 유일한 추리물인 작품인데, 그녀가 이미 중학생이었을 적 얼개를 짜놨으며 이후 무려 13년에 걸쳐 집필을 준비했다고 한다. 긴 집필 기간에서도 예상할 수 있듯, 스토리는 탄탄하고 흥미진진하며 캐릭터는 조연 단 한 명까지도 생생하고 입체적이다. 이번에 1권과 2권이 함께 출간되었고, 3권과 4권도 출간될 예정이니, 전체 4권으로 완결되는 방대한 분량이다. 기본적인 구조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추리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반복되지만, 진짜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것은 인물들의 삶이다. 벼랑 끝에 몰리며 신분을 감추게 된 황재하와 알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이서백을 비롯해서 시체 해부의 달인 주자진, 욕망의 화신 황후, 강직한 가문의 수호자 왕온 등 생생하고 매력적인 인물들이 등장해 드라마를 만들어 나간다. 역사와 허구가 뒤섞이고, 황실이라는 비밀스러운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미스터리와 치열한 암투극이 더욱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만들고 있다. 두툼한 페이지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으니, 어서 두 번째 이야기로 달려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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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 아메리카 JGB 걸작선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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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모두는 과거의 강대국이 흐릿한 햇살 속에 폐허가 된 채로 누워 있는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뉴욕 업타운의 고요한 교외 지대를 말을 타고 가로질러서, 아직도 위태롭게 걸려 있는 브루클린 브리지의 동체를 타고 롱아일랜드로 건너가, 창백한 허드슨강의 유령 너머로 저지시트를 건너다보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붕 없는 집들, 버려진 쇼핑몰과 모래로 뒤덮인 주차장만으로도 불편한 기분은 충분했다.    p.63

20세기 중반, 석유와 석탄과 천연가스의 소비 속도가 급증해 세계의 에너지 자원이 곧 고갈될 거라는 징조가 있었다. 결국 해결 방법이 없는 전 지구적 규모의 에너지 위기가 나타났고, 한때 번영을 누리던 국가들의 경제가 주저앉아 버렸다. 파국은 순식간에 찾아왔고 100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자동차 생산이 중단되었다. 그러다 교통이 완전히 정지해 버리고, 나라 전체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사람들은 숨통이 끊어져 가는 거대 도시에 만연한 폭력과 약탈을 피해 멀리 떨어진 소도시로, 안전한 농촌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도시는 차츰 텅 비어갔다. 미국인들은 마지못해 짐을 싸 들고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2030년에 이르자 미국은 완전히 버려진 땅이 되고 만다. 한때 붐비던 도시들은 그렇게 고요한 폐허로 전락해버린다.

그리고 백년 뒤, 2114년 유럽에서 꾸려진 탐사대가 한 세기 전에 버림받은 대륙 아메리카로 출항한다. 아폴로호에는 선원들과 과학 탐사대 외에 몰래 밀항한 스물 한 살 청년 웨인도 있었다. 그는 제2의 아메리칸드림을 품에 안고 폐허가 된 미국을 재건해 자신이 새로운 통치자가 되기를 꿈꾼다. 그리고 20년전 미국 원정대에 소속되어 일을 하다 행방 불명된 아버지를 찾고 싶기도 했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얼굴도 모르지만, 아메리카 어딘가에서 찾아내게 될 거라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아메리카에 대한 환상을 바탕으로 꿈을 이루고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나름의 계획이었다.

 

“그래, 물론 지금 아주 치명적인 전염병이 다가오고 있긴 하단다. 아주 전염성이 높고 치료제도 존재하지 않는 질병이지.”

“박사님도 알고 계세요?”

“알다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질병이니 말이다. 그 질병은타인이라는 이름이지. 머지않아 이곳에 도달할 게야. 지금까지보다 훨씬 큰 원정대를 이루고, 이 땅을 다시 식민지로 만들려고 열의에 가득 차서……”    p.281

아폴로 원정대의 주목적은 최근 아메리카 대륙에서 검출된 방사능 수치 증가의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미국에 도착하면서 항구에 가라앉아 버린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하고, 황금으로 가득한 뉴욕의 땅과 마주한다. 건물에서 쏟아진 금가루가 바다로 흘러 들고 있었고, 막대한 부에 대한 기대로 그들은 환호한다. 하지만 황금빛 해변과 달리 오랫동안 버려졌던 대륙에는 거대한 타워와 버려진 쇼핑몰, 지붕 없는 집들과 건물 사이 골짜기를 메운 모래 언덕들로 창백한 유령처럼 보인다. 과연 이들은 각자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특별한 '아메리카'를 찾아낼 수 있을까? 웨인은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이 되어 폐허가 된 미국을 재건시킬 수 있을까?

현대문학에서 시작하는 'JGB 걸작선' 그 첫 번째 책이자,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의 아홉 번째 장편소설이다. 그는 이 작품의 후기에서 자신은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진짜 '아메리카'는 맨해튼이 나 시카고의 거리나 중서부의 농업도시가 아니라 할리우드와 대중매체가 빚어낸 가상의 공간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할리우드가 현실보다 훨씬 영향력이 강한 가상의 미국의 이미지를 널리 퍼트리고 있어, '미합중국'이 마치 24시간 내내 방영되는 가상현실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모든 환상으로부터 가상의 미국을 구축해, 아메리칸드림의 매력적인 껍질 아래 도사린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이 작품을 쓴 것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22세기 콜럼버스들의 두 번째 신대륙 발견 여정을 따라가면서 디스토피아 렌즈를 통해 미국 문화의 최악과 최고를 특유의 환각적인 내러티브로 보여 주고 있다. 디스토피아가 된 미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리들리 스콧 제작으로 넷플릭스에서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기도 하다. 'JGB 걸작선' 그 다음 작품은 <콘크리트의 섬> <밀레니엄 피플>이 출간될 예정이다. 세계문학 단편선을 통해서만 만났던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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