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 줄리언 반스의 부엌 사색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진과 달라." 현학자가 저녁 요리를 식탁에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치커리를 곁들인 돼지갈비살 두 접시였다. 누가 들어도 자기연민으로 삐걱거리는 어조였다.

"사진과 같으리라 기대하는 건 이의 요정을 믿는 것과 같아." 현학자가 요리를 해주는 그녀가 대답했다.

맞는 말이다. 다년간의 영웅적 노력 끝에 조금이나마 요리의 지혜를 터득했는데도 왜 그걸 잊고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지 참 한심한 노릇이다.   p.91~92

우리 집 서재에도 요리 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큰 편이다. 나도 한때는 요리를 책으로 배웠던 초보 요리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요리에 대한 열정도 그만큼 넘쳐났던 터라, 프랑스 음식에 꽂히면 프랑스 요리에 대한 책을 줄줄이 사서 한 동안 저녁 식탁에는 듣도 보도 못하던 프랑스 요리가 이어졌다. 일본 가정식에 꽂히면 일본 요리책들이, 파스타에 꽂히면 이탈리안 요리책들이, 그 외에도 전골 요리, 오븐 요리, 채식 베이킹, 디저트 요리책 등등 수많은 요리책들을 섭렵했다. 하지만 책에 실려 있는 사진처럼 요리가 나왔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고, 셰프들이 알려주는 계량법은 늘 헷갈렸으며, 분명 레시피 순서대로 했는데도 이해할 수 없는 맛의 요리가 완성되는 경우도 너무 많았다. 그렇게 나처럼 요리책과 사투를 벌여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은 그야말로 공감 이백프로에 페이지마다 킬킬대며 읽게 될 것 같은 책이다.

이 책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시대의 지성, 줄리언 반스의 요리에 대한 에세이이다. 어려서 요리를 배울 기회가 충분치 않았던 줄리언 반스가 중년이 되어 뒤늦게 낯선 영역이던 부엌에 들어서서요리를 책으로 배우며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줄리언 반스는레시피대로하면 맛있는 음식이 될 거라는 믿음으로 완벽주의를 고수하지만, 이상하게도 요리는 늘 어딘가에서 실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백 권이 넘는 요리책을 사 모으며 요리 경험과 교훈을 쌓아나가게 되는데, 까칠한 부엌의 현학자가 투덜거리는 말들이 거의 모두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어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바로 그거다. 빵을 고르는 일. 버터를 마음대로 마구 쓰는 일. 부엌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일. 재료를 조금도 낭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일. 친구와 가족을 먹이는 일. 다른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는, 단순화할 수 없는 사회적 행위에 참여하는 일. 내가 아무리 트집을 잡고 항의의 말을 했어도 콘래드의 말이 맞는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다. 온전한 정신의 문제다.    p.192

특히나 이 책이 흥미로웠던 것은 줄리언 반스가 실제로 다양한 요리책들을 사서 읽고, 레시피를 재현해보고, 불친절한 레시피가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 지를 경험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거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돈으로 대가를 치른 조언을 해주면서, 요리책을 구매할 때 주의사항에 대해 낱낱이 알려주기도 한다. 우선 첫째, 요리책의 화보를 보고 책을 사지 말 것. 음식을 전문으로 촬영하는 사진 작가의 화보대로 실제 요리가 완성되는 경우는 전혀 없으니 말이다. 둘째, 지면 배치가 복잡하고 화려한 요리책은 절대로 사지 말 것. 셋째, 범위가 너무 넓은 책은 피할 것. 넷째, 요리책을 노골적으로 진열해놓은 음식점에서 충동 구매하지 말 것. 다섯째, 집에 주스기가 없으면 주스 책을 사지 말 것. 등등.. 오랜 세월에 걸친 그의 요리책 수집 경험을 통해 들려주는 조언들이 사실 대부분의 요리책들에 해당되는 핵심을 찌르고 있어 매우 유쾌하기도 했다.

 

우리네 엄마들이 해주던 음식의 특징은 정확한 계량이 아니라 대충 손짐작으로 넣는 재료들과 분명 냉장고에 아무 것도 없었는데도 얼마 안 있으면 뚝딱뚝딱 마술처럼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솜씨가 아닐까 싶다. 어릴 때 가끔 엄마가 해준 음식을 먹고는 너무 맛있어 방법을 물어보면 대부분 적당히, 한움큼, 살짝 등등 이해할 수 없는 계량법을 알려 주곤 했다. 그게 뭐야. 했는데 그 뒤로 세월이 흐르고 보니 매일매일 음식을 만들면서 쌓이는 노하우라는 것이 정확한 레시피와 계량법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조금씩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건 매일 요리를 일상처럼 하게 되는 경우에 알게 되는 것들이고, 대부분의 요리 초보자들 혹은 가끔 요리를 하게 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런 레시피야말로 대체 어쩌란 말인가 싶은 불친절한 요리법일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요리책이라 이름 붙은 레시피의 설명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최악일 것이고 말이다. 줄리언 반스는 스스로를 아마추어 요리사라고 하지만, 사실 그는 굉장히 요리를 자주, 관심 있게 하는 편에 속한다. 그래서 그가 모호한 요리책에 퍼붓는 혹독한 독설이 그냥 투덜거림이 아니라 지적이고 위트 있는 에세이가 될 수 있는 것일 테고 말이다.

요리란 쓰는 식재료와 먹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이들 모두에게 귀를 기울이는 소통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는 한 그릇의 요리가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당신도 그렇다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요리를 시작한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요리를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다는 것에 대해 유쾌하고 따뜻한 사유를 경험하게 될 테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강왕 위장 생물 배틀 과학 학습 도감 최강왕 시리즈 12
위장 생물 배틀 편집부 지음, 기타무라 신이치 외 그림, 고경옥 옮김 / 글송이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과학 학습 도감 최강왕 시리즈 12권은 '위장 생물 배틀'이다. 생물들의 놀라운 생존 기술인 위장술의 특별한 비법을 만나볼 수 있다. 생물 83종이 선보이는 나뭇잎, 낙엽, 나뭇가지, 모랫바닥, 사람 얼굴 등의 기상천외하고 다양한 위장술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지구상에는 다양한 생물들이 살고 있고, 먹고 먹히는 위험한 환경에서 천적에게 잡아 먹히지 않도록, 혹은 먹이를 좀 더 쉽게 사냥하도록 생물들은 진화해 왔다. 그 중에 '의태'라고 하는 생존 수단이 있는데, 몸 색깔이나 모양을 바꿔서 주변의 환경으로 위장해서 주위를 속이고 착각하게 만드는 생존 기술이다. 이러하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생물들은 식물이나 다른 생물, 돌이나 바위 등을 흉내 내기도 하고, 몸의 무늬를 이용해 자신보다 더 강한 생물인 척 위장하기도 한다.

 

 

이 책에는 곤충, , 물고기, 파충류, 양서류 등 위장술의 달인들은 생생한 사진으로 위장 전과 위장 후의 모습으로 실려 있다. 위장 전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사진을 한참 들여다봐도 어디에 숨었는지 알아채지 못할 만큼 이들은 위장 기술이 뛰어나다. 녹색 나뭇잎과 똑같이 생긴 나뭇잎벌레, 낙엽을 잘라서 만든 장식품 같은 사탄나뭇잎 꼬리도마뱀붙이, 나뭇잎 위에 올라가면 갑자기 자취를 감춰 버리는 남작 애벌레, 돌돌 말린 낙엽처럼 생긴 기생재주나방 등 도무지 어디에 숨었는지 찾을 수 없는 위장 생물들이 많았다.

강한 척 위장하는 생물들도 흥미로웠다. 곰개미로 위장해서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불개미거미도 있고, 독성 생물의 모습을 흉내 내서 몸을 보호하는 흑점얼룩상어, 납작벌레로 위장하는 제비활치, 생김새와 날갯짓 소리까지도 벌처럼 보이는 줄녹색박각시나방, 흑백 줄무늬를 이용해 바다뱀으로 위장하는 줄무늬장어도 있다. 줄무늬장어의 포식자는 놀랍게도 바다뱀이라, 바다뱀의 눈을 잘 속이면 다행이지만, 위장한 것을 들키면 바다뱀에게 잡혀먹을 수도 있다고 하니 이들의 위장술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하는 생존 기술이기도 한 것이다.

 

 

아이와 함께 최강왕 시리즈를 자주 보는데, 무엇보다 화보가 생생해서 아이가 재미있게 보는 책이다. 특히나 이번 책은 위장 전후의 모습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마치 숨은 그림 찾기라도 하듯 놀이처럼 읽을 수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본래 모습과 위장 모습을 비교해서 살펴볼 수 있고, 아이가 숨어 있는 위장 생물을 찾는 동안 해당 생물에 대한 설명 페이지를 읽어줄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생물들이 왜 위장을 하는 것인지, 위장술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 밝혀지지 않은 위장술 이야기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보통 위장 생물하면 나뭇잎 벌레나 카멜레온 등을 바로 떠올릴 텐데, 생각보다 굉장히 다양한 위장 기술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나뭇잎으로, 낙엽으로, 나뭇가지로 위장하는 생물들이 있었고, 육지 환경으로, 바닷속 환경으로 위장하는 생물들, 그리고 강한 척 위장하거나 다양한 모습으로 위장하는 생물 등 매우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 배설물로 위장하는 벌레나, 암컷에서 수컷으로 성전환 위장을 하는 물고기도 있었고, 사람의 웃는 얼굴로 변장하는 노린재, 넙치나 바다뱀 등 다양한 생물로 변신할 수 있는 흉내문어 등 각각의 위장 기술이 천차만별이었다.  과학 학습 도감 최강왕 시리즈는 그 동안 동물, 공륭, 생물, 요괴 등 다양한 시리즈로 출간이 되었는데, 다음 시리즈도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USB] 빨강머리 앤 : 에이번리 이야기 (오디오북) 오디오북 빨강머리 앤 시리즈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엄진현 옮김, 이지혜 낭독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일 좋고 행복한 날은," 앤이 언젠가 마릴라에게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대단히 멋지거나 놀라운 일, 신나는 일이 벌어진 날이 아니라 단순하고 사소한 즐거움이 실에 궨 진주알이 한 알씩 미끄러지는 것처럼 하나둘씩 자연스럽게 생기는 날인 것 같아요."

초록지붕 집의 삶은 그런 날들로 가득했다. 물론 앤에게도 여러 가지 사건 사고가 일어나긴 한다.    p.294

'빨간 머리 앤'은 빨간 머리의 주근깨투성이 고아 소녀 앤이 실수로 커스버트 남매에게 입양되면서 생기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성장소설인데, 독자들의 열렬한 호응으로 '에이번리의 앤'을 비롯하여 9권의 후속 편들이 이어지는 시리즈이다. 이번 두 번째 작품에서 선생님이 된 앤의 첫번째 부임지에서의 삶이 펼쳐지고, 이어지는 후속 편들에서는 길버트와의 사랑과 결혼 생활, 아이들의 삶 등 앤의 일생이 그려진다. 얼마 전에 예쁜 일러스트와 함께하는 에이번리의 앤 이야기를 읽었었는데, 이번에는 오디오북으로 만나보게 되었다.

요즘 오디오북이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사실 해외에서는 꽤 많은 소설들이 오디오북으로 제작되어 이미 익숙한 책의 소비 채널이지만, 국내에서는 이북 리더기의 기계음으로 듣는 정도였다. 그런데 작년부터 서서히 오디오북으로 소개되는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로, 고전 명작들뿐만 아니라 국내 소설가들의 작품이나 자기 계발서 등등 그 분야도 다양해지고 있다. 이 책은 두툼한 책의 표지에 USB가 삽입되어 있고, 실제 소설의 내용을 종이책으로도 만나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오디오북 음성 파일이 수록되어 있는 USB PC 또는 노브툭에 꽂은 뒤 파일을 모두 PC 등 저장 장치에 복사해서 들을 수도 있고, 케이블을 이용해 스마트폰으로 옮겨서 들을 수도 있어 매우 편리하다. mp3음악 파일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이동 중에도, 인터넷이 원활하지 않은 곳에서도 손쉽게 오디오북을 이용할 수 있다.

", 그냥 너무 아름답잖아... 옛날이야기처럼... 너무 낭만적이고... 그리고 슬퍼." 앤이 말하며 눈을 깜빡여 눈물을 흘려보냈다. "완벽하게 아름다워.... 하지만 어쩐지 조금 슬픈 감정이 뒤섞여 있는 것 같아."

", 물론 누군가하고 결혼하는 건 무서운 일이긴 해요." 샬로타 4세가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셜리 아가씨, 남편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이 이 세상에는 많거든요."    p.479

빨간 머리에 콤플렉스가 있었던, 하지만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초록지붕의 생활에 적응했던 앤이 어느 새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렇게 수다쟁이에 공상을 좋아하는 여자 아이는, 회초리 대신 애정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포부를 굽히지 않을 만큼의 어른이 되었다. 물론 아직은 실패하는 것이 두렵고, 여전히 실수투성이에 덤벙대기도 하고, 여전히 혼잣말하는 어린 시절의 버릇도 고치지 못했지만 말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주근깨 빼빼 마른 소녀를 읽던 당시의 어린 소녀에서 지금은 어여쁜 숙녀가 되어 다시 돌아온 앤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은 어른이 되어 버렸고 말이다.

이 작품을 낭독한 이지혜 배우님의 목소리는 <100인의 배우, 우리 문학을 읽다>에서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로 만난 적이 있다. 이지혜 배우님이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화자인 여섯살 옥희의 목소리로 주요섭의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읽으며, 엄마, 손님의 목소리까지 소화해 내고 있어 마치 한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었다. 그래서 더 기대하며 이번 작품의 음성 파일들을 듣게 되었는데, 이번 작품이 훨씬 더 이지혜 배우님의 매력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는 느낌이다. 꽤 두툼한 분량의 소설이라 지문이 많은 편인데, 지문을 읽을 때와 인물들이 대사를 할 때의 톤이나 발성 등이 전부 달라서 이야기에 막 빠져들어 가면서 들었던 것 같다. 특히 앤의 단짝인 다이애나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 매력이 더욱 돋보였는데, 그 이유는 직접 오디오북을 통해서 다들 들어보면 더 좋을 것 같다. 이번 기회에 귀로 읽는 독서라는 오디오북만의 독특한 매력에 흠뻑 빠져보면 어떨까. 베테랑 배우가 인물들의 성격에 따라 목소리로 연기를 하듯이 낭동을 하고 있어, 더 즐겁고 더 쉬운 독서의 세계를 경험하게 될 테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페인은 순례길이다 - 지친 영혼의 위로, 대성당에서 대성당까지
김희곤 지음 / 오브제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피레네산맥을 넘어서면 스페인 론세스바예스의 산티아고 성당이 나타난다. 산티아고 대성당과 그 이름이 같다. 이는 산티아고 성당이 스페인의 실질적인 관문이라는 뜻이다. 산티아고 성당에서 팜플로나 대성당으로 이르는 길은 중세 나바라 왕국의 길이다. 피레네 산줄기가 들판에 낮게 내려앉는 곳에 팜플로나 대성당이 성벽을 두르고 서 있다. 중세 팜플로나 대성당은 수도원과 병원과 대학을 갖춘 복합 종교 단지였다.  p.59

사도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걸어가는 길을 스페인어로 '카미노 데 산티아고'라 부른다. '산티아고의 길'이라는 뜻이지만, 흔히 '산티아고 순례길'로 알려져 있다. 이곳이 세계인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20세기 후반으로 교황이 방문하고, EU가 유럽 문화유적으로 지정하고, 파울로 코엘료가 순례길을 체험하고 출간한 책이 밀리언셀러가 되면서 전 세계 젊은이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길을 따라 세워진 중세 요새와 마을, 석조 건물과 성당들이 옛 자태를 뽐내며 그대로 남아 있기에 과거의 길을 걷는 느낌도 준다.

<스페인은 건축이다>, <스페인은 가우디다>에 이은 김희곤 작가의 "스페인 3부작의 완결판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간 많은 책들을 통해 국내에 소개돼 왔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여행 가이드북 내지는 여행 에세이의 성격을 가진 책들이었다. 그러나 산티아고 순례길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다. 그곳에는만 놓여 있지 않다. 그 길이 아름답다는 사실보다 그 길이 그곳에 놓여 있는 이유가 우리에겐 중요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대성당과 대성당, 중세인들의 영혼으로 구축된 건축과 건축을 연결하는 길이다. 이 책에는 마드리드 건축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스페인 건축 전문가 김희곤이 직접 걸으며 조망한 산티아고 순례길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가가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하며 정리한 글들과 직접 그린 건축 스케치들, 직접 찍은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중세 사람들은 사람이 더 이상 걸어갈 수 없는 대지의 끝을피스테라라고 불렀다. 중세 모든 대성당과 성당들은 하나같이 동쪽에 제단을 세우고서 피스테라가 있는 서쪽을 바라봤다. 해가 지는 대서양에 면한 피스테라는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암시했다. 육체의 발길이 멈추는 무시아와 피스테라는 신화의 세례를 받은 역사적인 건축물과 유적들이 산티아고의 발코니처럼 남아 있었다.    p.309

최근에 <스페인 하숙>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 촬영지는 순례길 막바지에 자리한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라는 마을이다. 출연자들은 그곳에 알베르게(저렴한 숙박 시설)를 차리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그곳에 들러 먹고, 자고, 따뜻한 응원을 받는다. tvN 〈스페인 하숙〉의 김대주 작가는길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천 년의 건축물들이 영혼을 위로하는 길은 오직 산티아고에만 있다고 말하며, “세상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박물관은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방송을 통해서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심이 생겼다면, 이 책을 통해서 조금 더 깊이있게 728킬로미터 산티아고 순례길의 대장정을 체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역사로 시작해서 순례길을 걸으며 만날 수 있는 눈부신 건축물들로 시선을 돌린다. 대성당과 대성당을 잇는 순례길을 스폐인 건축 전문가가 걷고 있으니, 보통의 여행객들이 바라보는 시선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산티아고 순례길에 놓인 하나하나의 중세 건축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생생한 컬러 사진들과 실제보다 더 진짜 같은 건축 스케치들이 모여 실제로 스페인에 가서 보고 느끼는 것처럼 체험할 수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십오분쯤 후, 볼 때마다 늘 경이롭게 느껴지는 제네바의 호수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때까지 뒤적거리고 있던, 취리히에서 구입한 로잔의 지방신문을 옆으로 치우려는 순간, 어떤 기사를 보게 되었다. 1924년 여름에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베른의 등산안내인 요한네스 네겔리의 유골이 칠십이년 만에 오버아르 빙하에서 발굴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사자들은 이렇게 되돌아온다. 때로는 칠십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얼음에서 빠져나와, 반들반들해진 한줌의 뼛조각과 징이 박힌 신발 한켤레로 빙퇴석 끝에 누워 있는 것이다.   p.34

사람들은 다양한 제각각의 이유로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삶을 시작한다. 그러니 멀리 타국으로 떠나는 이민이 아니더라도 고향을 떠난 것으로 인한 상실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내가 기억하는 고향의 모습도 변하겠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욕망이나 갈망에 의해 기억하는 고향의 모습이 있을 것이고 말이다. 이 작품 속에서 제각각의 이민자들이 품고 있는 그것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상실의 세계, 고향과의 단절, 마음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 어디에도 없는 일종의 유토피아에 대한 욕망 등등.. 작가는 이름도 없이 파묻힌 역사의 개별자들의 이야기를 보편적인 우리의 이야기로 투영시켜 보여주고 있다.

생전에 단 네 권의 소설을 남겼지만제발디언(Sebaldian)’이라는 용어가 생길 만큼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추종자를 양산한 20세기 말 독일문학의 위대한 거장 W. G. 제발트의 대표작인 <토성의 고리> <이민자들>이 작가 탄생 75주년을 맞아 새로운 모습으로 출간되었다. 본문 전체를 원문과 다시 대조해 전반적으로 표현들을 다듬고 몇몇 오류를 바로잡아 번역의 엄밀성을 높였다. 또한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주를 보강하고 외국어 고유명사의 표기법도 새로이 손보았다. 특히 흐릿했던 사진들의 화질을 개선하고 크기와 배열도 독일어판 원서에 가깝게 실었다. 제발트의 작품은 오래 전에 <현기증. 감정들>만 읽었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제발트 읽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그 전날 오후 늦게 눈이 내리기 시작했으며, 호텔 창가에 서서 찬찬히 내려앉는 어스름 속에 하얗게 떠있는 도시를 보자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고도 적어놓았다. 그는 나중에 이런 글귀를 추가했다.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p.185

<이민자들>은 네 명의 이민자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네 편의 공통 화자로 등장하는 나(작가의 분신)는 예전에 영국에서 세 들어 산 집의 주인이던 헨리 쎌윈 박사, 독일 고향 마을의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파울 베라이터, 미국으로 이주해 은행가 가문의 집사로 지냈던 친척 할아버지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와 1960년대 후반 영국으로 이주했을 당시 알게 된, 독일 출신의 유대인 화가 막스 페르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들은 모두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에 고향을 떠나 외국에서의 삶을 살았다. 타인의 삶을 재구성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작가는 여러 사람의 증언을 녹취하고 자료를 조사하고 사진을 수집할 뿐만 아니라 직접 그 현장을 여행한다. 그는 이 작품 속 인물들을 실제로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살았던 곳을 찾아가보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제발트가 서술하는 이야기가 모두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이 독특한 점이다. 팩트와 픽션을 절묘하게 결합한 그의 작품에서는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발트의 작품에서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면 아마도 텍스트와 동행하는 사진의 존재가 아닐까 싶다. 그의 작품들에는 항상 사진을 텍스트의 한 부분으로 활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빽빽한 텍스트 만큼이나 문장의 중간중간에 사진들이 꽤 많이 삽입되어 있다. 이 작품에도 실종된 지 칠십이년 만에 빙하에서 유골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이 실린 신문,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었던 파울 베라이터가 목숨을 끊었다는 철로, 이민을 떠난 친척들의 사진, 외삼촌의 첫 직장이었던 에덴 호텔, 외삼촌이 현관 옷장의 거울에 끼워놓고 간 명함, 티스메이드라고 부르는 차 만드는 기계 등 오래된 과거의 흑백사진들이 칠십 여장이나 수록되어 있다. 이 사진들은 소설의 내용이 대부분 사실임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 작가가 사진에 적합한 허구적 내용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모두 사실이라고, 혹은 허구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제발트의 작품이 갖는 독특한 매력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사진과 사물, 타인의 기억과 자료를 통해서 기억을 만들고, 불러내는 마법이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랜 만에 다시 읽는 제발트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다음 에는 <토성의 고리>를 만나봐야겠다. 봄이라는 계절은, 제발트를 다시 시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