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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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녀들에게 분명히 선언한 메시지가 두 가지 있었다. 시간을 잘 지켜라. 그리고 변명을 하지 마라. 그런데 지금 그는 늦어서 무슨 알리바이를 댈지 수십 가지 변명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은가. 자기 생일 전날 엄마를 묻으러 가게 되다니. 그의 마지막 생일이 될 터였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그는 명령을 선포하여 전국에 흩어져 있는 가족을 불러들였다. 이 생일은 아무도 잊지 못할 완벽한 파티가 되리라.     p.43

 

죽음이란 참으로 우습고도 현실적인 농담이다. 물론 이는 해질녘을 향해 점점 빨라지는 카운트다운을 체감하고 있는 노인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노인들이라면 어린 애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 하는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 또한 막상 죽음을 마주하고 나서는 생각한다.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일흔을 목전에 둔 빅 엔젤 역시 이제껏 크리스마스 아침을 예순아홉 번밖에 보지 못했는데, 전혀 충분하지가 않다고 생각한다. 암 선고를 받은 그에겐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잊지 못할 자신의 마지막 생일 파티를 준비하며 미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온 가족들을 불러 모은다. 그런데 생일 일주일 전, 100세가 된 빅 엔젤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만다.

 

결국 빅 엔젤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일주일 미뤄서 자신의 생일 파티와 함께 진행하기로 한다. 여기 저기 흩어져 사는 가족들이 생일 파티를 위해 먼 길을 두 번이나 올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70세 아들의 생일 파티와 100세 어머니의 장례식을 같은 날 한다니 이 무슨 어이없는 발상이냐 싶겠지만, 이상하게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시끌벅적 유쾌한 이런 가족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멕시코인이고, 멕시코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고 살지만,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4대를 아우르는 대가족의 이야기는 도대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 수가 없다. 이들 가족들의 말투는 퉁명스럽고 독설이 난무하지만 그 속에서 웃음과 유머가 묻어나서 굉장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일흔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면, 본인이야 모든 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사실상 아무것도 중요하지가 않다. 그걸 어떻게 해야겠다는 필요성도 간절하게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다 갑자기, 생일날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기껏해야 20년 정도 더 살겠군.' 그리고 한 해 한 해가 점점 어둡게 저물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15년 남았군.' '10년 남았나.' '이제 5년 정도겠군.' 그러다가 아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사는 게 뭐 대수라고. 내일이라도 버스에 치여 죽을 수 있어! 언제 골로 갈지는 아무도 몰라."    p.150

 

이 작품은 시작부터 장례식으로 시작하고, 곧 죽을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눈물을 자아내는 신파가 아니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작가는 극중 빅 엔젤이 하는 것처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허풍을 떨고' 유쾌한 기조를 잃지 않는다. 재혼한 어머니 아래에서 태어나 소외감을 느끼고, 두 번 이혼하고 세 번째 결혼을 하기도 하고, 데드메탈에 빠져 소리만 질러대기도 하고, 미군에게 속아 불법체류자가 되어버리고,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하기도 하고, 결혼생활의 힘겨움을 토로하고.. 세상 모든 인간사의 다양한 모습들을 전부 다 보여주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이들 가족에게는 바람 잘 날이 없다. 빅 엔젤과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어머니를 기리면서 소중한 추억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오백여 페이지의 두툼한 분량 동안 실제 흘러가는 시간은 단 며칠이지만, 이들 대가족의 수십 년 동안의 세월이 모두 담겨 있어 묵직한 시간의 무게를 안겨주고 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는 이 작품을 실제 형의 마지막 생일 파티에서 영감을 받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죽음이라는 다소 무거운 소재를 생동감 넘치는 인물과 재치 있는 문체로 그려내어 “현대의 마크 트웨인이다”라는 평가를 받았고, 필립 로스와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을 영화화한 스콧 스테인도프의 지휘 아래 할리우드 TV 시리즈로 영상화될 예정이기도 하다. 웃다 보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한 편의 가족 시트콤 같은 작품이라 TV 시리즈로도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은 이야기였다. 가족,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이지만, 그래서 더 상처를 주고 고통을 안겨줄 수도 있는 관계. 가족이란 너무도 복잡하고 어려운 관계라 그만큼 더 소중히 배려해야 하는 존재이다. 이 작품을 통해 모두 자신의 가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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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은 끝! - 일을 통해 자아실현 한다는 거짓말
폴커 키츠 지음, 신동화 옮김 / 판미동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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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만, 일하는 것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노동이 아니라 언어의 힘을 다룬 이 실험에서 얻을 수 있는 간단한 통찰이다. 이 통찰이 흥미로운 까닭은 그것이 '일이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라는 질문을 해명하려던 연구자들이 발견한 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삶에 전반적으로 얼마나 만족하느냐고 물었을 때 직업이 있는 사람의 행복도는 직업이 없는 사람보다 높다.    p.10~11

 

이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치면 마주하게 되는 '일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만, 일하는 것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라는 문장은 살짝 당혹스럽다. 사람들이 일은 좋아하지만 일하기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역설처럼 보이기도 하고, 수수께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일이 아니라 우리가 일에 관해 하는 거짓말이다" 라고. 우리는 머릿속에 관념으로서 존재하는 일은 좋아하지만, 막상 일을 직접 하기에는 질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은 우리를 실망시키고, 직장 생활은 이상적인 이미지를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실을 이상에 맞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관념을 실제로 맞추는 것이 아마도 가장 현실적인 방법일 것이다.

 

심리학과 법학을 전공하고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거짓된 환상들에 속지 말고,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으로 일을 대하자고 말하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서 직업이나 일 자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실제 일하기는 싫어하는 이유가 '일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실제 일할 때 맞닥뜨리는 현실과의 괴리 때문'이라는 말에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러니 일에 대한 환상과 거짓말들을 하나하나 파헤치는 저자의 이야기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직장에는 좋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인생이라는 옷은 인간관계라는 옷감으로 짜여 있다. 우리는 상대방에 자신을 투영하고, 상대방과 마찰을 경험하고, 상대방 고유의 사용설명서를 해독한다... 그리고 이로써 자기 자신의 사용설명서를 자꾸만 업데이트해 나간다. 이것이 바로 많은 이가 엉뚱한 곳에서 헛되이 찾는 진정한 도전이다. 점잖든 천박하든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의 과제다. 그리고 직장에서도 인생은 계속된다.    p.87

 

'직장 생활에 대한 거짓된 환상들'이라는 장은 특히나 공감하며 읽었다. 열정을 불태우면 좋은 결과가 나온다? 새로운 도전을 통해 성장한다? 자유롭게 무언가 만들어 낸다? 일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찾는다?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한다? 나는 회사에서 중요한 사람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 아마도 이론적으로 혹은 이상적으로 보자면 모두 정상적인 문장들이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 이다. 이 문장들이 모두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거짓말들이라는 것을. 열정이 지나치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면 나머지 삶이 일 속에서 증발해 버릴 위험이 있고, 일은 도전이 아니라 그저 반복되는 일상이며, 자신의 '자아'란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스스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니 일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거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하고, 내가 대체 가능하다는 사실보다 대체 불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일을 둘러싼 각종 거짓말들을 짚어내고, 일에 대한 환상을 걷어 내고 바라보는 세상은 어떨까. 저자에 따르면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에 실망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게 되면, 오히려 솔직함을 통한 새로운 동기 부여를 받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 자신의 일에 열정을 불태워도 좋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만이 진실로 만족하고 생산적이고 건강할 수 있다.” 라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자신의 일에 실망하거나 회의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새로운 마음가짐을 안겨줄 것 같다. 당신이 일하기 싫은 건 잘못이 아니다. 일단 집에 가자. 내일 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겨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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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경찰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하빌리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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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척 상황이라.....'
내가 하는 일이 대체 뭔가, 라고 세라는 생각했다. 사람 하나가 죽었는데 그 원인조차 알아내지 못하면서 무슨 교통과 사고 담당자인가.
하지만 그런 불만을 후쿠자와에게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 사고 이후로도 몇 건의 인신사고가 일어났고, 마치 교사가 시험 채점을 하듯이 서류를 마무리해야 하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p.86

 

늦은 밤, 한산한 도로에서 트럭이 중앙분리대를 치고 옆으로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맞은편 차선에서 달려오다 충돌한 승용차 운전자는 손목에 붕대를 감는 정도의 가벼운 부상만 입었지만, 트럭 운전자는 사망하고 만다. 이상한 건 트럭 운전자가 교통 법규를 위반한 적도 없는 무사고 운전자였으며, 동료들이 그의 운전이 너무 점잖다고 놀릴 정도였다는 거였다. 사고 현장을 조사하던 경찰은 트럭이 뭔가를 피하려고 급브레이크를 밟고 핸들을 꺾다가 타이어가 미끄러지면서 중앙분리대를 치고 넘어간 것 같다는 판단에 목격자를 만난다. 사망한 운전자의 아내인 아야코가 담당 경찰인 세라와 동창이라 그들은 함께 의심되는 노상 주차 운전자를 찾아 내지만, 안타깝게도 법적으로는 운전자의 과실을 증명할 수가 없다. '법규는 아주 살짝 어긋나는 것만으로도 적이 되기도 하고 한편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을 지켜 줘야 할 그것이 반대로 사람들을, 그것도 피해자를 공격하게 되는 상황도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아야코는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그 선을 넘어가 보기로 한다.

 

이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으로 '교통경찰'이라는 소재를 중심에 두고 벌어지는 단편 여섯 편이 수록되어 있다. 앞서 이야기한 양날의 검 같은 교통 법규에 저항하려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중앙분리대'를 비롯해서, 시각장애인 소녀의 기적 같은 청각이 밝혀낸 교통사고의 전말을 담고 있는 '천사의 귀', 앞서가는 초보운전 차를 재미로 위협한 뒤차 운전자에게 닥친 후폭풍을 보여주는 '위험한 초보운전' 등 누구나 일상에서 겪을 법한 교통 법규 위반이라는 범죄를 매력적인 미스터리로 재탄생시킨 작품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의 계산대로 진행되었다. 유일한 오산은 유지의 차가 아직 굴러떨어지지 않고 가까스로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죽이고 싶다고 했어.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한다고......."
"시끄러, 조용히 좀 하라고."
핸들을 쥔 손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침을 삼키려고 했지만 입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p.185

 

프리 카메라맨인 후카자와는 마치코의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핸들을 잡은 후카자와 옆에서 둔탁한 소리가 나는 동시에 마치코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앞차에서 뭔가 날아온 것 같다고 생각한 직후의 일이었다. 갑자기 눈이 아프다는 마치코를 데리고 병원으로 급하게 가지만, 상처가 너무 깊어 결국 한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된다. 원인은 조수석 쪽의 바닥에 떨어져 있는 빈 커피 캔이었다. 그들이 마신 것이 아니었으니, 달리던 앞차에서 타고 있던 누군가 던진 게 분명했다. 후카자와는 경찰에 신고하지만, 경찰의 반응은 심드렁하다. 요즘 빈 캔을 창 밖으로 던지는 무개념한 사람들이 많은데, 상대 차량을 특정하기도 어려운 데다, 설령 찾아내더라도 자기는 빈 캔 같은 건 버린 적이 없다고 잡아떼면 어쩔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확실한 사건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경찰의 입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렇게 느닷없는 부상을 당한 입장에서는 그저 운이 나빴다 치고 넘어가긴 어려운 일 아닌가.

 

사랑의 힘이 불러온 의도치 않은 응징을 보여주는 '버리지 말아줘'는 두 커플의 이야기가 별개로 진행되다가 복수 아닌 복수, 그야말로 제대로 된 인과응보를 보여주며 통쾌함을 느끼게 해 준 이야기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치밀한 트릭과 반전이 매 작품마다 포진하고 있어, 발표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잘 읽히는 이야기들이었다. 이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1989년부터 1991년까지 3년여에 걸쳐 문예지에 실었던 것을 1992년에 한 권으로 묶어 출간한 것이다. 국내에는 2010년에 출간되었었고, 무려 9년 만에 개정판으로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롭게 번역해 다시 나오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들이 모두 누구나 쉽게 겪을 수 있는 내용들이라 더욱 공감하며 읽게 되는 것 같다.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교통사고에서는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도, 반대로 피해자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운전에 익숙해지면 교통법규를 무시하거나, 도로에서 다른 차와 경쟁하거나, 배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사소한 일탈과 부주의함이 누군가에게는 일생을 뒤흔드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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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스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선물 - 해피 모지스마스!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지음, 류승경 옮김 / 수오서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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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전날 밤이면 사람들이 집마다 찾아가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여러 명이 함께 이 노래, 저 노래를 부르면 무척이나 듣기 좋았지요.
그럴 땐 밖에 나가서 뭐라도 챙겨주었습니다.
사탕이나 케이크처럼 아주 달콤한 것들을요. 크리스마스잖아요!"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76세가 되어서야 시작해 10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긴 모지스 할머니. 88세에 '올해의 젊은 여성'으로 선정되었고, 93세에는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으며, 그녀의 100번째 생일은 '모지스 할머니의 날'로 지정되었다. 이번에 만난 책은 삶을 사랑한 화가, 모지스 할머니가 전하는 소박하고 따뜻한 크리스마스 풍경들을 담고 있다.

 

 

모지스 할머니의 기억 속 크리스마스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 책에는 할머니 기억 속에 처음으로 자리하고 있던 크리스마스이브부터 당일까지의 따뜻한 집 안 풍경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춥고 삭막한 계절이지만 이런 설레임과 달콤함이 있어 모두들 크리스마스를 따뜻한 풍경으로 기억하는 게 아닐까 싶다.

 

유리처럼 투명한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재미를 놓칠 수 없는 계절, 수북이 쌓인 눈 위로 커다란 썰매를 타고 길을 낼 수 있는 계절, 겨울이다. 매서운 날씨가 찾아오는 계절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집이 더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내가 기억하는 첫 크리스마스는 네 살 때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와 남자 형제 셋을 리브 이모와 함께 집에 남겨두고 그리니치로 쇼핑하러 나갔습니다. 물건을 사고 돌아온 어머니는 리브 이모를 보며, 산타클로스가 카펜터 씨 가게에 들렀으니 꼭 보러 오라고 귀뜸해줬어요. 그 이야길 들은 레스터 오빠는 잔뜩 신이 나서는 스토브 아래쪽을 깨끗이 치우겠다고 나섰지요. 그래야 장난감을 한 아름 든 산타가 스토브 파이프를 타고 내려올 수 있을 테니까요. "

 

크리스마스가 지나가고 며칠만 있으면 한 해가 끝이 나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 쌓인 눈도, 꽁꽁 언 연못도 사르르 녹을 테고, 다시 봄이 오면 말들은 들판을 달릴 것이다. 한 해의 끝과 시작을 이어 준다는 점이 크리스마스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풍경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만으로도 설레고 행복했던 것은 어린 시절을 지나도 여전하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이 책에는 모지스 할머니 기억 속에 처음으로 자리하고 있던 크리스마스이브부터 당일까지의 따뜻한 집 안 풍경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어 뭉클하다. 소박해서 더 예쁘게 느껴지는 겨울의 풍경들이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모지스 할머니의 짧은 크리스마스 에세이도 실려있어 네 살이었던 모지스 할머니의 귀여운 고백도 만나볼 수 있다.

 

<모지스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읽으면서 나의 첫 크리스마스를 떠올려 본다. 아직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와 루돌프 사슴을 믿던 그 시절, 정말 밤새 산타클로스가 다녀가 양말 속에 선물을 넣어준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얼마 안 남은 크리스마스, 다들 해피 모지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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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크 에프 그래픽 컬렉션
로리 할스 앤더슨 지음, 에밀리 캐럴 그림, 심연희 옮김 / F(에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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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눈물에는 짠맛이 난다. 그게 입술에 닿는 느낌이 좋다.
나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얼굴을 닦았다.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어질 때까지.     p.70

 

멜린다는 고등학생이 된 첫날부터 왕따가 되었다. 옷도 촌스럽게 입었고, 낯을 많이 가리기도 했지만, 사실 그녀에게도 한때 절친이었던 친구들이 있었다. 멀리서 전학 온 헤더만 유일하게 멜린다에게 말을 건네지만, 전교생들의 놀림거리이자 괴롭힘의 대상이라 그녀에겐 별 의미가 없다. 아이들은 복도에서 일부러 멜린다를 치고 지나가거나, 발을 걸거나, 고의로 밀거나,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찢어 놓고 가기도 했다. 하지만 멜린다는 애써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고, 참고 반응하지 않으며, 말을 하지 않다 보니 점차 말수가 줄어들어 결국 실어증에 걸리게 되고 만다.

 

멜린다에게 유일한 안식이 되어주는건 독특한 방식으로 미술을 가르치는 미술 선생님의 수업시간과 2학년 구역에 있는 버려진 휴게실이 전부였다.

 

 

사실 멜린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 있었는데, 바로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참석한 어느 파티에서 선배 남학생에게 성폭행을 당한 거였다. 당시 그녀는 경찰에 신고 전화를 걸었고, 그로 인해 파티를 완전히 망쳐 버리게 되었고, 진실을 알지 못하는 친구들은 파티를 망쳤다는 이유로 그녀를 공공의 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운 그날의 진실을 멜린다는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었고, 당연히 피해자로서 보호를 받지도, 위로나 배려를 받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방치된 상처는 점점 더 멜린다를 절벽 끝으로 몰아 넣었고, 평범한 여학생이던 멜린다의 삶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무너져 내리고 만다.

 

친한 친구들은 모두 그녀를 외면했고, 부모님은 각자의 일로 바빠서 딸에게 별로 관심도 없었다. 멜린다도 속으로는 죄책감과 실수, 분노를 다른 누군가에게 털어 넣고, 모든 걸 떠넘기고 싶지만.. 생각과는 달리 말하기는 점점 어려워졌고, 침묵에 익숙해졌다. 과연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치러야 하는 수많은 싸움에서 버텨내고, 승리할 수 있을까.

 

 

나는 친구 없어.
나한텐 아무도 없어.
난 아무 말도 안 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p.202

 

이야기는 시종일관 어둡고, 성폭행, 왕따, 실어증 등 우울한 스토리가 차가운 흑백의 이미지로 보여지고 있다. 하지만 학교라는 사회에 대한 놀라울 정도로 예리한 비판과 진실을 외면하고 침묵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날카로운 은유들이 스토리 자체를 풍부하게 만들어 있어 그 배경과는 상관없이 매우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다. 고등학교에서 듣는 첫 번째 거짓말에 대한 열 가지 항목에는 교직원들은 항상 여러분을 도울 것이다, 여러분은 이곳에서 보낸 학창 시절을 기분 좋게 추억할 것이다 등등이 있고, 고등학교에서 추가로 하는 열 가지 거짓말 항목에서는 지금 수학을 배우면 나중에 커서 쓸모가 있다 라던가, 학교에는 단정한 옷차림으로 와야 한다, 학교는 학생이 하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등등의 문구가 있다. 아마도 학생 시절을 겪었던 그 누구라도 공감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부분들일 것이다.

 

 

<스피크>의 원작 소설은 1990년대 후반에 쓰여졌다. 저자인 로리 할스 앤더슨이 열세 살 때 강간당한 이후로 항상 자신을 덮치던 우울과 걱정의 그늘을 견디며 슨 자전 소설이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매년 가장 뛰어난 '영 어덜트 소설'에 주는 최고 권위의 문학상 '프린츠상' 첫 회 수상작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난 20여 년간 평론가들의 찬사와 독자들의 꾸준한 호응을 얻으며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했고, 이번에 '아이스너상' 수상 작가인 에밀리 캐럴의 강렬한 그림체로 그래픽노블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원작 소설의 명성이야 들어왔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었기에, 이번에 그래픽노블 버전으로 먼저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왜 이 작품이 ‘영 어덜트 소설’의 고전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최근에야 전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일어나면서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지만, 이 작품은 ‘미투 운동’보다 훨씬 전에 성폭력 문제가 심각한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렸으니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역할을 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가해자가 제일 나쁘지만, 그걸 지켜보면서도 외면하고 침묵하는 방관자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나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이 작품은 그렇게 진실을 외면하고, 침묵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피해자에게 말하라고 외치면서, 과연 우리는 제대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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