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비틀 킬러 시리즈 2
이사카 고타로 지음, 이영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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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죽이면 왜 안 되는데?"
왕자는 질문을 해봤다. 비웃거나 농담할 의도는 없었다. 실제로 그 답을 알고 싶었다. 납득할 수 있는 해답을 들려주는 어른을 만나보고 싶었다. 기무라한테서는 대수로운 발언을 들을 수 없을 거라는 짐작도 갔다. 아마도 '사람은 죽여도 되지 않나'라는 자포자기식 의견이 날아오겠지. 그리고 "나랑 내 가족이 죽는 건 참을 수 없지만, 타인이 죽는 건 아무 상관없어"라고 말할 게 틀림없다.    p.58~59

 

왕년에는 킬러였지만 현재는 한낱 알콜 중독자에 불과한 ‘기무라’는 아들의 복수를 위해 도쿄에서 모리오카로 향하는 신칸센 하야테에 오른다. 여섯 살 어린아이를 백화점 옥상에서 떠밀어 중태에 빠뜨린 소년 ‘왕자’를 찾아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눈앞에서 커다란 불꽃이 튀었고, 눈을 떴을 때는 창가 자리에 묶인 채로 앉혀 있었다. 중학생이지만 너무도 영악한 왕자가 오히려 기무라의 행동을 예측하고 준비하고 있었던 거였다. 한편 콤비 킬러인 '밀감'과 '레몬'은 인질로 잡혔던 보스의 아들을 무사히 구하고 몸값이 든 검은 트렁크를 들고 하야테에 탑승한다. 레몬은 돈이 든 트렁크를 좌석과 반대편인 앞쪽 차량 짐 보관소 선반에 올려두었는데, 트렁크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 게다가 그들이 사라진 트렁크를 찾아 우왕좌왕하는 사이, 보스의 아들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같은 시간, '나나오'는 마리아의 지시로 검은 트렁크를 찾아내 도쿄 다음 역인 우에노에서 내릴 예정이었다. 무사히 트렁크를 손에 넣어 플랫폼으로 내려서려고 하는데, 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청부업자 늑대라는 걸 알아본다. 얼마 전에 늑대가 초등학생들을 괴롭히는 상황에서 그에게 본때를 보여줬던 터라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꼴이 된 것이다. 늑대는 나나오를 강제로 가로막고 차 안으로 올라탔고, 기차에서 내리지 못한 채 주먹다짐을 하다 그만 늑대를 죽이고 만다. 자, 그렇게 종착역까지 남은 시간은 단 2시간 30분! 사이코패스 왕자의 잔꾀에 이들은 우연과 필연으로 얽히면서 모두들 의도치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과연 밀폐된 기차 안에서 이들 중 누가 끝까지 살아남을 것인가.

 

 

“잘 들어. 살인을 하면 안 된다는 건 살해되고 싶지 않은 녀석들이 만든 규칙일 뿐이야.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주제에 보호받고 싶은 녀석들이 만든 거지. 나한테 묻는다면, 살해되고 싶지 않으면 살해되지 않게 처신하면 된다. 남에게 원한을 사지 않는다거나 신체를 단련한다거나. 방법은 여러 가지야. 너도 그렇게 하는 게 좋을 테고."     p.460~461

 

이사카 고타로의 '킬러 시리즈' 그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시리즈는 <그래스호퍼>, <마리아비틀>, <악스>로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 무려 7년 만에 출간되어 작년에 서점대상 최종후보로 선정되기도 했다. 냉혹한 살인청부업자들과 아내의 복수를 꿈꾸는 어수룩한 전직 수학 교사 스즈키의 쫓고 쫓기는 하드보일드 느와르를 그렸던 <그래스호퍼>에 이어 만나게 되는 두 번째 작품은 한 명의 주인공이 아니라 여러 인물이 각자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사카 고타로의 '킬러 시리즈'는 킬러가 등장하는 여타의 추리, 스릴러 장르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다. 그야말로 이사카 고타로만이 그려낼 수 있는 독특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단어 그대로 너무도 '인간적인' 킬러가 등장하는 작품은 만나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사실 누군가를 죽이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을 '인간적'이라고 설명하는 것부터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냉혹한 킬러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긴 하지만, 잔인하거나 폭력적이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그저 킬러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들을 중심으로 사회와 인간이 안고 있는 어둠과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읽히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 이사카 고타로 특유의 위트와 유머에서 비롯되는 재미도 여전하고, 전문 킬러가 등장하는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서의 매력도 훌륭하다. 행운과 불행, 우연과 필연, 선과 악이 교차로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 흥미로운 구성을 만들어 내고, 질주하는 기차 안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의 긴장감이 숨가쁘게 펼쳐지는 이들의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거죠?” 그에 대한 이사카 고타로의 답이 잔혹한 생존 게임으로 펼쳐진다. 시속 200킬로미터로 달려가며 인간의 폭력과 악의 근원을 탐구하는 ‘이사카 월드’로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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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A 행성을 기록하다 NASA, 기록하다
NASA 외 지음, 박성래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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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A, 기록하다> 시리즈는 NASA가 유일하게 공식 인증한 도서로, NASA가 직접 촬영한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리즈는 <NASA 행성을 기록하다>와 <NASA 지구와 우주를 기록하다>로 출간되어 있는데, 내가 만난 것은 다양한 행성들을 볼 수 있는 '행성을 기록하다'이다.

 

태양 주변을 공전하는 다양한 행성과 천체 사진들이 200장이 넘게 수록되어 있어 시선을 사로잡는다. NASA 기록 보관소의 사진들이라 퀄리티도 훌륭하고, 우주 화보로서도 가치가 있는 책이라 소장용으로 딱 좋은 책이 아닐 수 없다.

 

 

태양계 안에는 8개의 행성이 존재하고 태양계 밖에도 행성이 존재한다. 이 책에서는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수성, 금성, 지구, 목성, 화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의 모든 것을 만나볼 수 있다. 천문학자들은 해왕성 너머에 숨어 있는 진짜 행성을 찾기 위해 하늘을 샅샅이 뒤져보았고, 최근 연구에 의하면 태양계 외곽에 수백 개의 왜소행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책에서도 8개의 행성들 외에 태양, 소행성, 왜소행성, 혜성 등의 다양한 천체 사진들을 만날 수 있다.

 

 

우선 수성을 근접 비행해서 촬영한 고해상도 이미지부터 너무도 정밀하게 표면을 보여주고 있어 놀라웠다. 수성 표면의 그늘진 충돌 크레이터의 두드러진 모습부터, 충돌 시 뿜어진 물질로 인해 생성된 사방으로 뻗은 광조 등 모두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 특히나 수성의 컬러 지도가 인상적이었는데, 태양계에서 가장 작은 행성이지만 그 밀도는 지구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행성답게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선명한 황금빛을 발하고 있는 금성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거기다 대기에 떠 있는 황산 구름을 보라색 필터로 촬영한 사진과 뿌연 금성의 구름을 촬영한 사진, 어두운 주황색 구름 상층부의 모습 등이 모두 컬러를 달리 하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지구의 다양한 모습들을 담고 있는 사진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극 중간권 구름을 촬영한 이미지에서 볼 수 있는 야광운의 모습부터, 허리케인 이반, 유령 같은 오로라, 놀라운 시카고의 야경, 흑해의 식물성 플랑크톤, 그레이트 솔트 사막, 카스피해의 해저선, 열대 폭풍 등 가장 버라이어티한 이미지와 색감을 가지고 있는 사진들을 지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수 세기 동안 우주 탐험가와 탁상공론 우주 이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온, 태양계의 네 번째 행성인 화성도 관심 있게 보았다. 지구와 유사한 점이 많은 행성이라 영화나 소설의 배경으로도 자주 등장하곤 하는 익숙한 곳이라 그런지 더욱 흥미로웠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태양에서 점점 더 멀어지며 토성, 천왕성, 해왕성으로 이어지는 사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인간이 탐사선을 상상하고 설계하고 만들어, 이를 발사하고 다른 천체로 탐사를 보낸 것이 불과 60여 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덕분에 우리가 이 책에 수록된 사진과 같이 지구에서 멀리 있는 천체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이니 말이다. 현재까지 천문학자들은 8개 행성 주위를 돌고 있는 145개의 위성을 확인했고, 이 밖에 27개 이상의 위성은 확인 중이라고 한다.

 

NASA가 설립된 지도 이미 반세기가 흘렀으며, 그 동안 1,000개 이상의 우주 탐사 임무를 수행해왔다. 이 수많은 유인 및 무인 탐사 계획을 통해 수백만 장의 사진을 촬영했고, 이 책은 그러한 NASA의 기록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진을 선별해 수록한 것이다. 자, 과학과 천문학, 우주에 관심이 있다면, 태양계의 경이로움을 아름답고도 정교하게 담고 있는 이 책이 환상적인 우주 여행으로의 안내서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당신도 우주 탐험가이다. 읽고, 보고, 마음껏 탐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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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
마리즈 콩데 지음, 정혜용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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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어머니를 목매달았다.
나는 붉은솜나무의 낮은 가지에 매달린 어머니의 몸뚱어리가 뱅글뱅글 도는 걸 봤다.
어머니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 백인에게 칼을 휘두른 것이다. 어쨌든 그를 죽이지는 못했다. 어설픈 분노에 휩싸여 어깨를 베는 것에 그치고 말았으니까.   p.20

 

티투바는 열여섯 어린 소녀였던 아베나가 노예로 팔려가는 배의 갑판에서 영국인 선원에게 강간당한 결과로 태어났다. 증오와 멸시의 행위로부터, 끔찍한 폭행으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주인은 아베나의 임신 사실을 알고는 화가 나 그녀를 같은 출신의 노예인 야오에게 줘버렸고, 야오는 그녀를 오누이처럼, 아버지와 딸처럼 보듬어준다. 그럼에도 태어난 아기가 매 순간 고통과 수치를 떠올리게 했기에, 아베나는 티투바를 사랑할 수 없었다. 대신 야오가 두 사람 몫만큼 티투바를 사랑해줬기에, 아이는 애정결핍으로 괴로움을 겪지 않았다. 하지만 티투바는 일곱 살때 어머니가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한다. 어머니가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백인인 주인에게 칼을 휘둘렀고, 사람들이 어머니를 목매달아 처형한 것이다. 야오는 다른 농장주에게 팔려갔고, 티투바는 농장에서 쫓겨난다. 티투바를 거둔 것은 어떤 나이 든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 교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넌 살면서 고통을 받을 거다. 많이, 많이.... 하지만 넌 살아남을 거다!"

 

만 야야는 티투바에게 온갖 종류의 치유 식물들과 바다, 산 등에 대해 알려준다. 그리고 모든 것에 영혼이 있고 숨결이 있음을, 모든 것이 존중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알려준다. 만 야야는 티투바가 열네 살이 되고 며칠 안 되어 세상을 떠났고, 망자의 존재를 느낄 수 있고 믿었기 때문에 티투바는 울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주위에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티투바는 남자들, 특히 백인 남자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혼자 살았는데, 사람들은 그녀가 만 야야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티투바에게 다가온 존 인디언이라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그 역시 노예의 신분이었고, 티투바는 그와 사랑에 빠져 혼자 만의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노예 신분이 되기로 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대상이 생겼고, 그와 함께 하는 대가로 스스로를 노예 상인에게 넘겨 준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삶은 그로 인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얼마나 많이 돌로 쳐 죽여야 하나? 얼마나 불을 질러야 하나? 얼마나 피가 들끓어야 하나? 앞으로도 얼마나 더 무릎을 꿇어야 하나?
삶을 위한 다른 흐름을, 다른 의미를, 또 다른 절박성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불이 나무 꼭대기를 휩쓴다. 그가, 반역자가 연기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죽음을 이겨내어 그의 정신이 남은 것이다. 겁에 질려 둥글게 모여 선 노예들이 다시 용기를 낸다. 정신이 남는다.     p.218

 

이 작품은 세상에 단 한 번 존재하고 단 한 번 수여된, 대안 노벨문학상인 '뉴 아카데미 문학상' 수상작이다. 17세기 말 미국의 작은 마을 세일럼에서 마녀로 몰렸던 흑인 여성 노예 티투바의 삶을 그리고 있다. 1962년, 세일럼의 마녀 재판은 세라 굿, 세라 오즈번, 티투바가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 열아홉 명이 교수형을 당했고, 남자 한 명은 압사형에 처해졌다. 1963년, 티투바는 감옥에서의 '체류 비용'과 쇠사슬 및 족쇄 비용을 지불하지 못해 다시 노예로 팔렸다. 티투바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딱 여기까지였다. 나머지는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재구성되고, 대안 역사 내러티브의 형식으로 다시 쓰여진 것이다. 한 흑인 여성이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노예로 끌려왔다가 세일럼 마을에서 다른 ‘백인 마녀들’과 함께 마녀 재판을 받게 되기까지의 서사는 굉장히 드라마틱하면서도 감동적이다.

 

작가인 마리즈 콩데는 은행가인 아버지와 최초의 흑인 교사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하지만 16세에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역사적, 사회적 현실과 유리된 삶을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후에 그녀는 미혼모가 되고, 가족에게서 버림받고, 가난을 겪으면서 흑인 부르주아의 삶과는 정반대 편에서 살게 되는데, 그로 인해 사회적 약자와 폭력과 차별의 희생자에 대한 남다른 공감과 이해로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수없이 무고한 희생자를 양산했던 마녀 사냥에서도, 똑같이 마녀로 지목되어 무고한 희생을 치렀지만, 백인의 희생과 흑인의 희생은 그 역사적 무게가 같지 않았다. 티투바 역시 흑인 여성 노예였기에 역사의 주변부로 밀려났을 것이다. 그 점에 인간적 연민과 일체감을 느낀 작가는 “티투바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성은 역사에 의해 부당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피부와 성별 때문에 거부당한 인간적 권위를 그에게 꼭 회복해주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낀 것”이라고 집필 동기를 밝히기도 했다. 이 작품 속에서 티투바는 '독립적인 정신의 소유자이자 자신의 욕망을 주장하는 데 있어서 거침없이 당당하며,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끝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놓지 못한 인물'로 대단히 매력적인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다.

 

대부분의 노예들에게는 오로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살아 있기 위해서 그 모든 모욕과 수치를 견뎌내고, 참으며 하루를 버텼다. 하지만 티투바에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에게 삶은 그냥 숨 쉬며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반드시 삶의 풍미가 바뀌어야만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것인가'에 대해 누군가 묻는다면, 답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모든 고통을 하나 하나 감수해가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서. 그래서 그녀의 진짜 이야기는 끝이 난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되어,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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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9-12-27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도 축하드립니다.
리뷰도 멋지지만 사진을 어디서 찎으셨는지 엄청 궁금해지네요^^

피오나 2019-12-27 19:19   좋아요 0 | URL
ㅎㅎ 감사합니다. 책 표지 색감이 예뻐서..지나가다 푸른 조명이 눈에 띄어서 함께 찍었어요 ^^
 
베로니카의 눈물
권지예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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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다가 아냐. 난 아침에 눈 뜨면 정말 행복해서 노래해. 내 자식들, 내 손자들, 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해. 우리도 사는 데 물론 스트레스 많이 받아. 어느 곳에서든 인생이 늘 행복한 건 아닐 거야. 모니카, 부자인 너도 그렇지 않니? 베로니카, 나 부자 아니야. 물론 아주 가난하지도 않지만. 오, 그래? 모니카! 봐봐, 돈은 중요하지만 인생은 돈이 다가 아니잖아. 그럼 어찌 사는가가 중요해. 사랑이 제일 중요하지. 내 마음에는 사랑이 가득하거든. 가난하지만 행복하다구.        

-'베로니카의 눈물' 중에서, p.60

 

작가인 모니카는 쿠바의 아바나에서 몇 달간 지낼 임대 아파트를 구한다. 그리고 입주한 첫날 뚱뚱하고 나이가 꽤 많은 백인 여성인 베로니카를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주인인줄 알았지만, 실제 주인은 마이애미에 있고 그녀는 관리인이었다. 월세에 청소비와 관리비가 포함되어 있기에 베로니카가 주기적으로 집에 들러 모니카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 언뜻 보면 그럴듯해 보이는 집은 싸구려 비닐 소파에 낡은 가구들, 가스레인지는 표면에 녹이 슬어 있고, 솥단지 같은 냄비는 바닥이 검댕으로 두툼하게 더께가 져 있는 등 한국 같으면 몽땅 쓰레기장에 버리고도 남을 물건들 투성이였다. 게다가 물에 석회가 많아 끓여서 가라앉힌 뒤 먹어야 했고, 가스레인지 불을 켜거나 온수 보일러를 켜는 것도 성냥불을 켜서 화구에 대며 점화를 시켜야 했기에 만만치가 않았다. 낙후된 환경에서, 부족한 것 투성이에, 불편한 상황들에 적응하느라 정작 모니카는 제대로 된 글을 써보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낸다.

 

베로니카는 약속한 날짜가 아니라 수시로, 아무 때나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집에 오곤 했다. 그러다가는 일주일째 연락도 없이 안 오기도 하는 등 제멋대로였지만, 막상 만나면 이상하게 웃음과 따뜻함을 안겨주었다. 올해 일흔 셋이 된 베로니카는 이제 자신도 늙어서 일이 힘들다며, 모니카가 한국으로 떠나면 자기도 일을 그만둘 거라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실험실 간호사로 오래 일을 했던 전문직 여성이었지만, 은퇴하고 지금처럼 방을 청소해주고 받는 월급은 형편없었다. 우리 돈으로 한 달에 1만 2000원 정도였던 것이다. 자신이 이곳에 머물면서 한 달에 100만 원이 넘는 월세를 내는데, 관리인 월급이 겨우 1만 2000원이라니, 모니카는 속이 상하고 가슴이 아프다.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쿠바의 엄마와 딸' 관계로 발전하게 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이 하나 생기면서 이들의 관계도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당신도 다 아는 아바나의 관광지를 내가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내게는 도시 자체가 꼭 무대 세팅 같았어요. 빛과 그늘이 극명하게 구분되는 무대. 황 교수의 빠른 걸음을 놓칠세라 앞만 보고 잰걸음으로 다닌 곳, 그런 관광지나 유적지가 조명이 비친 곳이라면, 그 옆의 골목과 집들은 그늘에 가려져 있는 듯한 무대. 그 그늘에서 맨발의 아이들이 뛰놀고 폐허가 된 건물 귀퉁이에 사람이 사는지 빨래가 걸려 있었어요. 빛의 세계로만 나를 안내하려는 황 교수의 배려를 나는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나를 방치했어요.     

-'파라다이스 빔을 만나는 시간' 중에서, p.161~162

 

나는 쿠바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책의 표제작인 <베로니카의 눈물>을 읽으면서, 내가 언젠가 한 번 아바나에 가본 게 아닐까 싶은 착각이 들었을 정도로 극 중에서 주인공이 겪었던 시간들이 체감되는 느낌이었다.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둠, 순수와 오염, 자유와 고독, 혼돈과 모순, 환상과 환멸, 매혹과 잔혹'으로 상징되는 쿠바의 다양한 매력을 관광객으로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이 되어 살아보는 듯한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이 작품에 수록되어 있는 여섯 편의 소설은 쿠바 아바나, 프랑스 파리, 미국 플로리다 등 다양한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해외 여행 중이거나 그곳에 단기 체류 중인 걸로 등장한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낯선 이국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너무도 매혹적이다. '이국'과 '낯선 장소'라는 설정만으로도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변화들이 색다르게 다가오니 말이다.

 

<낭만적 삶은 박물관에나>에서 사진작업 차 파리를 다시 찾은 재이는 오래 전 그곳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던 전남편을 다시 만나기로 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는 친구 부부의 세미나에 대리 출석하기 위해 딸과 함께 플로리다에 온 현주가 딸이 성폭행 피해자였고 미투 고백을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카이로스의 머리카락>에서 은혼식을 맞아 남편과 함께 발칸반도의 아홉 나라를 도는 패키지여행을 떠난 복순은 애써 덮어두고 있었던 그간의 묵은 감정과 기억들과 마주하게 된다. 여행이란 사람을 좀 더 가깝고 애틋하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반면 평소보다 가까워진 그 물리적 거리로 인해 서로가 알지 못했던 낯선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여행을 통해 일상의 숨겨진 이면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의 이면에 숨겨져 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되고, 내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권지예의 소설집은 매혹적이다. 누구라도 이 작품들을 읽게 되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질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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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 고양이
모자쿠키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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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겸 만화가 모자쿠키는 '집사'에게 애정 가득한 잔소리를 쏟아내는 고양이가 주인공인 작품을 네 컷 만화로 그려 트위터에 업로드 하기 시작했다. 이 계정은 한 달 만에 10만 팔로어를 모았고, 게시물마다 수천 건의 리트윗과 수만 건의 '좋아요'를 기록하는 등 뜨거운 관심과 공감을 일으켰다. 그렇게 단숨에 25만 팔로어를 달성하고,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중쇄를 거듭하며 성공을 거둔다.

 

 

그동안 주로 동물을 기반으로 하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그려온 작가의 이력답게, 크라프트 배경 위에 담백하게 그려낸 '잔소리 고양이' 캐릭터는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럽다. 사사건건 쉴 틈없는 잔소리를 퍼부어대고, 주인의 모든 생활 습관들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지만, 그 모든 것에 애정과 사람이 듬뿍있는 게 느껴져서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만화이다.

 

 

한때 '츤데레'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었는데, 무심한 듯 다정한, 겉으로는 무뚝뚝하더라도 뒤에서는 세심하게 배려하는 사람에게 쓰는 이 표현은 '잔소리 고양이'에게 너무도 잘 어울린다. 퉁명스럽고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 그 잔소리들 속에 담겨 있는 마음은 따뜻하기 그지 없다.

 

짧은 만화 안에서 대사라고는 잔소리 몇 마디밖에 없지만, 굉장히 중독성이 있어서 계속 보고 또 보고 싶은 만화이다. 무엇보다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알 수 없지만, 너무도 사랑스러운 고양이 캐릭터 때문일 것이다. 구성과 내용이 간결하고 단순한데다, 하얀 고양이 한 마리 역시 너무 심플하게 그려져 있어 그게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고 말이다.

 

 

또 어질러 놓고 나갔니, 이제 일어난 거야? 꾸물대지 말고 서둘러야지, 살을 빼고 싶으면 간식은 좀 참아보라고! 매 끼니 제대로 챙겨 먹어야지! 술 좀 줄여! 게임 좀 적당히 해! 그거 꼭 사야 해? 신용카드 좀 적당히 써!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날 위한 소리라지만, 듣기 싫은 얘기들은 모두 잔소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부모님에게, 선생님에게 숱한 잔소리를 들으면서 살아왔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야 왜 그때 어른들이 좋은 얘기 대신 쓴 소리만 해댔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더 이상 내게 잔소리를 해대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제 스스로 다 알아서 할 나이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가끔은 등짝을 후려치며 잔소리하던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날이 있다. 아무도 내 곁에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 세상이 나란 존재에게는 무관심한 것처럼 느껴지는 날, 하는 일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후회하게 되는 날,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운 날 당신에게 필요한 책이다. 세상에서 가장 시끄럽지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고양이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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