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치니 - 토스카나의 새벽을 무대에 올린 오페라의 제왕 클래식 클라우드 5
유윤종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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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소원을 빌었는지 바닥이 움푹 팬 자리에 한 컵 분량의 물은 족히 담길 것 같다. 이 앞을 수없이 오갔을 젊은 푸치니도 소원을 빌었을까? 그랬다면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어머니와 가족의 곤궁을 면하게 해달라고 빌었을까? 그것이었다면 그는 소원을 초과 달성하게 된다. 이탈리아 대작곡가들의 찬란한 이름을 잇는 존재가 되게 해달라고 했을까? 그런 큰 소원이었더라도, 그는 이뤄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p.61

내가 푸치니의 오페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십여 년 전 한참 뮤지컬에 빠져 있었던 시기였다. 푸치니의 오페라 중에 <나비 부인>은 뮤지컬 <미스 사이공>, <라보엠>은 뮤지컬 <렌트>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음악극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오페라와 뮤지컬은 굉장히 다르다. 대사가 있는 뮤지컬과는 달리 오페라는 오로지 노래로 대사를 표현하고, 번역이나 개사를 하지 않고 원어로 부르는 것이 원칙이라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당시의 내게 오페라는 너무도 먼 장르였는데, 푸치니의 오페라를 듣게 되면서부터 그 장르에 대한 편견 같은 것이 깨지기 시작했다. 뮤지컬만큼이나 대중적이고, 서사가 뚜렷하고, 격정적인 드라마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감정 이입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푸치니의 오페라는 유려하고도 애절한 정에 넘치는 선율이 유명한데, <라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투란도트> 등 음악에 문외한인 이들조차 그 명성을 익히 알 정도로 대중적으로 사랑 받는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라인업에 푸치니가 있어서 고대했었다. 푸치니의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오페라의 고향 이탈리아를 거닐며 그의 삶과 작품의 발자취를 좇는 특별한 여행기라니 상상만으로도 설레었다. 푸치니는 루카에서 태어나 밀라노에서 데뷔한 후 잇따른 대작으로 성공하기까지, 그는 두 도시에서 사람들과 교류하며 거장으로 발돋움했다. <라 보엠> <나비 부인>의 탄생지 토레델라고를 거치면, <잔니 스키키> <토스카>의 영광이 고스란히 남은 피렌체와 로마로 향하는 여정은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역에서부터 해안가로 걸어 나온다. 그림 같은 빌라들이 바둑판처럼 늘어서 있고, 남국의 이름 모를 꽃들이 정원마다 한여름의 향기를 마음껏 뽐낸다. 해변을 한 블록 남겨두고는 해송이 빽빽한 공원이 짙은 향기를 뿜어댄다. 공원 옆으로 해안과 한 블록 차이로 평행하게 난 기다란 길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트 거리다. 호텔과 음식점들이 소나무 공원과 마주 보고 이어진다. 이 길가에 푸치니의 마지막 집이 있을 것이다.    p.261~262

거장의 흔적을 따라 실제 그 곳의 공기를 마시며, 직접 보고, 느끼는 이 여행이야말로 그들의 소설을, 그림을, 음악을 이해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 아닐까. 그들이 살았던 공간을 직접 찾아가 작품이 탄생했던 세계를 탐험하고, 그 세계와 작가를 새롭게 조망한다는 엄청난 기획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가장 특별한 여행가이드'이자 '세상에서 가장 쉽고 재미있는 인문학'이다. 그 어떤 여행 가이드북이나 여행 에세이에서도 만날 수 없는 특별한 현지의 풍경들과 장소들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고, 수백 년간 우리 곁에 존재했던 고전 명작들의 실체를 느껴볼 수 있도록 해주고 있은 말이다. 무엇보다 세계의 명작들 자체보다 그 위대한 작품 너머에 있는 한 인간의 삶과 발자취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풀어내는 스토리라 더욱 매력적이다. 거장이 살았던 시대, 그가 세상을 바라보았던 시각, 작품이 탄생하게 된 계기와 배경, 그리고 그가 누굴 만나고,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독자인 우리는 몸으로 하는 여행만큼이나 더 생생한 머리로 하는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우리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읽으면서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떠나서 페소아가 사유했던 거리 곳곳을 만나고,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해 쿠바 아바나까지 헤밍웨이의 작품과 함께 배경지를 탐방하고, 도쿄 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첫 문장에서 묘사되는 바로 그 온통 흰색으로 세상, 터널 저쪽과는 너무도 다른 세상을 경험해보기도 한다. 잘츠부르크에서 빈까지 모차르트의 뮤직 로드를 따라가보기도 하고, 기나긴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어둠을 견뎌내야 하는 노르웨이에서 뭉크가 사랑했던 신비로운 여름밤 풍경을 바라보고, 오스트리아 알프스가 보이는 산악 지방 티롤의 한가운데 잘츠부르크에서 클림트의 흔적을 만나고,  '오셀로' '베니스의 상인'의 무대인 베네치아,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인 베로나 등 지중해 연안을 따라가며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입체적으로 만나기도 한다. 텍스트 안에서만 존재하던 거장의 실체를 직접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보고 싶다면, 문학과 음악, 그림을 입체적으로 읽어내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다면, 거장의 작품들과 그 이야기가 탄생한 배경을 직접 보고 느끼면서 체험해보고 싶다면,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적극 추천한다. 일상에 지쳐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그러나 여행을 가기엔 현실적으로 걸리는 부분들이 너무 많을 때,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가 있다면 책상과 소파, 침대에서, 수고스럽고 비싼 여행을 가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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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페어 - 사법체계에 숨겨진 불평등을 범죄심리학과 신경과학으로 해부하다
애덤 벤포라도 지음, 강혜정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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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범죄자의 얼굴, 태도, 행동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직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매일 그런 직감을 활용한다. 즉 거스름돈을 셀지 말지, 어떤 사람이 새치기를 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귀갓길에 언제 길을 건널지 등을 결정할 때마다 그런 직감을 활용한다. 앞에서 나온 네 명의 뉴질랜드 피고인을 볼 때도 이런 무의식적인 조합이 선택을 이끈다. 정말로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한다. 비록 우리가 보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왜 범죄 행위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는지 분명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p.87

1979 8 11, 여자의 집에 침입해 여자를 구타하고 성폭행한 혐의로 존 제롬 화이트는 유죄 평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사실 물리적 증거는 많지 않았고, 범죄 현장에서 수집한 머리카락과 화이트의 머리카락 사이에는 '충분한 유사성'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이었던 건 피해자가 화이트를 가리키며 "저 남자입니다."라고 자신을 공격한 사람이라고 세 번이나 확인했다는 사실이었다. 증인석에 앉아 피고를 가리키며 바로 저 사람이라고 말하는 살아 있는 인간보다 설득력 있는 증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는 범인이 아니었고, 2007년 실시한 DNA 검사 결과 화이트는 무죄로 방면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생의 거의 절반을 교도소에서 보낸 뒤였다. 조사 당시 피해자는 그가 가해자임을 거의 확신했다. 그녀가 그렇게 끔찍한 실수를 저지른 이유는 무엇일까. 더 놀라운 것은 당시 경찰서에서 피해자가 보았던 다섯 명의 남자 중에 진범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지목한 화이트가 세 번째 서 있었고, 다섯 번째 서 있었던 제임스 에드워드 퍼햄이 진짜 범인이었다. 물론 이 사실이 밝혀진 것은 그로부터 거의 30년이 흐른 뒤였지만 말이다.

대체 왜 피해자는 자신을 짐승처럼 잔인하게 강간했던 사람, 같은 공간에서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있었단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고른 걸까. 이 책은 이렇게 선한 의도를 가진 선한 사람이 결과적으로 끔찍한 부정의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법학자 애덤 벤포라도는 형사 사법제도의 허점을 맹렬하게 좇으며, 오늘날의 수사와 재판이 상당히 허술하다고 지적한다. 변호사 활동 후, 드렉셀대 법학 교수가 된 벤포라도는 인지 심리학자들과 공동 연구를 수행하는 등 형사 사법제도의 문제에 천착했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그는 피해자, 피의자, 수사관, 판사와 검사 등 다양한 당사자들의 '기억의 한계' 같은 법 실행 과정에서 저지르는 오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누구나 편견과 착각에 휘둘린다. 법 집행도 그렇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형사 사법제도는 21세기에 도착한 건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적잖이 당혹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어떤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범인을 찾아 처벌함으로써 도덕적인 평형을 회복하려는 욕망이 때로는 공정한 대우에 대한 헌신보다 우선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마음 한구석에서 우리는 이미 스스로의 이런 측면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록 인정하기는 죽도록 싫지만 말이다. 폭력과 피로 얼룩진 이런 불공정이 역사책이며 신문 지면을 더럽히고 있다.    p.282

이 책은 심리학과 신경과학에서 나온 새로운 연구 결과에 의존해 미국의 형사 사법제도를 해치는 요소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사실 저자가 들려주는 사례들은 우리의 직관에 반하며,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혼란스럽고 놀랍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성과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의식적인 통제 없이 진행되는 자동 처리 과정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니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법이란 불편부당하며 법률 소송의 승패는 증거와 철저한 논리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고 싶겠지만, 지난 20년에 걸쳐 심리학자, 신경과학자들은 의식적인 자각 너머에서 작용하는 여러 인지적 요인들을 밝혀냈으며, 이는 대단히 충격적인 사실들을 알려 주고 있다. 법률 소송 결과가 사실은 피고의 자백 녹화영상에서 카메라 앵글, 하루 중에 어느 시간에 심리가 진행되는지, 반대심문에서 단순한 단어 선택 같은 무관해 보이는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있겠는가 말이다.

겉으로는 정의롭고 공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 책에 따르면 실제 미국의 형사 사법제도는 많은 문제점과 모순을 안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그것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허위 자백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경찰의 강압적인 심문 기법, 잘못된 기억으로 범인이 아닌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목격자, 피의자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증거를 피의자 측 변호인에게 넘겨주지 않는 검사, 사람인 이상 편견을 가지고 재판에 임할 수밖에 없는 배심원과 판사 등등.. 미국의 형사 사법제도의 문제점과 그에 대한 개혁안도 제시하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법학자와 심리학자들이 수행한 다양한 심리학적, 신경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매우 이해하기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사례들과 함께 보여주고 있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어떤 개혁이든 출발점은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저자가 '불평등'이라는 파격적인 제목의 이 책을 쓴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을 테고 말이다. 우리 모두 기존의 형사 사법제도를 새로운 눈을 통해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심리학과 신경과학 연구 결과에 대한 인식을 넓히게 된다면, 현재의 결점들을 발견하게 되고, 더불어 향후 나아갈 방향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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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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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혈액 주머니는 마치 더운물 주머니에 물을 가득 채워놓은 것처럼 움직일 때마다 찰랑찰랑 흔들렸다. 서서히 잿빛으로 물들어가는 들판 위로 진한 피비린내가 퍼져가고 있었다. 막 나무에서 떨어진 여린 대추를 물속에 넣고 끓일 때 나는 냄새 같았다. 리싼런의 구부린 팔 안쪽에서 바늘을 빼낸 다음 혈액 주머니를 거두면서 아버지는 그에게 피값으로 백 위안을 건넸다.    p.164

딩씨 마을은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집 안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십 년 전 피를 팔았던 사람들은 열병에 걸려 있었다. 이 열병의 정확한 학명은 에이즈였다. 딩씨 마을에서는 매달 거의 모든 집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열두 살 소년 샤오창의 아버지는 십 년 전, 상부의 주도로 마을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난 매혈 운동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인근 열여덟 개 마을에서 가장 많은 피를 사고 팔았던 피의 왕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복수로 누군가 마을 어귀에 놓아둔 독이 묻은 토마토를 먹고 소년 역시 죽게 된다. 이 작품의 화자는 바로 그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이미 죽은 소년이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딩씨 마을 사람들 거의 전부가 죽게 될 것이었다. 상부에서는 피를 팔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열병이 전염될 것을 우려하여, 병에 걸린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거주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릴 예정이었다. 할아버지는 손자가 죽었고, 아들이 피의 왕이었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그에게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개두를 해야 한다고, 그러고 나면 죽어버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매혈의 우두머리였던 게 뭐 어떻다고 그러느냐며 오히려 반문하고, 할아버지는 병든 사람들을 학교로 모아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곧 죽을 사람들이라도 그 속에서 양심 없고, 부도덕한 행동들을 일삼기는 마찬가지였고, 생명의 연약함과 탐욕의 강대함이 공존하는 그곳은 마치 지옥의 축소판도 같았다. 

죽은 사람은 죽은 닭이나 죽은 개와 마찬가지였다. 발에 밟혀 죽은 개미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소리 내어 울지도 않았고, 흰 종이로 대련을 써 붙이지도 않았다. 사람이 죽으면 그날을 넘기지 않고 파묻었다. 관은 일찌감치 마련되어 있었다. 무덤 역시 사람들이 죽기 전에 다 파놓았다. 날이 너무 무더워 사람이 죽은 다음에 무덤을 파면 이미 때가 늦기 때문이었다. 하루만 지나면 시신이 부패되어 지독한 냄새가 났기 때문에 미리 관을 준비하고 무덤을 파놓았다가 사람이 죽으면 후다닥 순식간에 매장해버리는 것이었다.     p.521

이 작품은 중국의 경제 발전이 가져온 인간의 물질적인 욕망이 빚어낸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옌롄커는 중국의 한 마을에서 비위생적인 헌혈 바늘을 사용해 에이즈에 집단 감염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자본주의라는 유토피아적 환상이 처참하게 붕괴되는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해냈다. '매혈'이라고 하면 역시나 중국 작가인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가 바로 떠오를 것이다. 그 작품이 한평생 피를 팔아 가족을 위기에서 구해낸 속 깊은 아버지 허삼관의 이야기를 익살과 해학을 통해서 그려냈던 것에 비해, 옌롄커의 작품은 보다 비극적인 현실을 그리고 있다. 위화가 평범한 사람들의 진실한 휴머니즘에 착안을 두었던 것에 비해, 옌롄커는 인간의 욕망과 문명이 빚어낸 비극적인 현상들에 천착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옌롄커의 전작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사서>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명예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로부터 판매 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옌롄커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 작품은 '한 편의 소설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어떤 몸부림과 그 몸부림으로 인한 울음이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 작품을 읽기 전에 먼저 강한 심장을 준비하라고, 그리고 새의 몸부림을 느끼고 몸부림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울음과 잠꼬대를 경청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그러한 작가의 진지함과 피를 토하는 날카로운 외침이 작품 전반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피를 사고파는 과정에서 딩씨 마을 전체가 에이즈에 점령당하게 된 현실의 풍경 자체도 지독했지만, 그것을 이미 죽어 땅에 묻힌 열두 살 소년의 시선으로 그려내면서 리얼리즘과 판타지를 결합시키고 있으니, 이 작품은 독자 입장에서 읽는 시간 또한 만만치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인성의 가장 후미진 구석에 자리한 욕망의 그 꺼지지 않고 반짝이는 빛'을 쓰고자 했다는 작가의 말이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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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쓸모 -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2가지 통찰
최태성 지음 / 다산초당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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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역사를 알리는 사람으로서 일연 스님과 같은 역할을 하고 싶어요. 일연 스님은 휴지 조각처럼 버려진 이야기들을 주워 잘 펴서 우리에게 남겨준 분이잖아요. 저도 사람들이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역사,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역사를 재미있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생명력을 불어 넣고, 이 시대에 맞는 의미를 찾아내서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지요. "! 이것 봐! 휴지 조각인 줄 알았는데 보물 지도지? 역사가 그런 거야!" 이렇게 보여주려 합니다.    p.27

학창 시절에 내가 가장 지루해했던 과목은 바로 국사와 역사였다. 단순한 사실의 기록을 그저 외워야 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체 수백 년 전, 혹은 수천 년 전의 문화와 삶을 이해하고, 암기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무슨 커다란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느끼기도 했다. 당시의 교육 방식이 주입식, 암기 위주로 진행되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내가 역사라는 것에 대해 잘못 이해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요즘은 나도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라는 생각에 나 역시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역사는 나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라고 말이다.

이 책은 누적 수강생이 500만 명에 달하는 손꼽히는 역사 강사 최태성, 그가 역사에서 찾은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2가지 통찰을 담고 있다. 수백 년 전 이야기로 오늘의 고민을 해결하는 세상에서 가장 실용적인 역사 사용법이라 그런지, 딱딱하거나 어렵지 않고 역사를 굉장히 대중적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어 쉽게 읽힌다. 그는 역사를 배워서 어디에 쓰냐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반박이라도 하듯, 오직역사를 공부하면 무엇이 좋은가에 답하는 것으로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삶을 바로잡고 싶을 때마다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났다고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만나 보자. 100년 전, 1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도 지금의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고 비슷한 위기를 겪고, 또 극복해낸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큰 책이다.

여기 집안도 별 볼 일 없고, 돈도 없고, 심지어 직장에서도 쫓겨난 남자가 있습니다. 그래도 뭔가 해보겠다고 일을 벌이는데 족족 망합니다. 성격은 또 얼마나 깐깐한지 타협이라곤 모릅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탓합니다. 세상이 잘못돼서 자기가 이렇게 산다는 거죠. 세상뿐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죄다 욕합니다. 딱 사회 부적응자의 모습이죠. 그런데 잘못된 세상이라고 욕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잘못된 세상을 뒤집어엎겠다고 나섭니다. 그의 이름은 정도전. 자신의 이름처럼 '도전'의 연속인 삶을 살다 간 인물입니다.   p.170~171

우리는 참 재미없게 역사를 배워왔다. 연도별로 일어난 사건을 외우고, 그 사건을 일으킨 사람을 외우고.. 그러니 성인이 되어서 기억에 남는 것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역사,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역사를 재미있게 들려 준다면 어떨까. 게다가 역사를 과거의 박제처럼 바라볼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명력을 불어 넣어 동시대성을 찾아내어 알려 준다면 말이다. 역사를 연도나 사건, 사람 이름을 외워야 하는 학문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람을 만나는 일로 생각해 본다면 역사도 참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을까.

책을 읽고 나니 이 책이 역사를 재미있게 풀어주는 책이 아니라, 오히려 수백 년 전 이야기로 오늘의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역사 사용 설명서에 가깝다라는 문구가 확 와 닿았다. 이제 더 이상 역사가 외울 것이 많은 골치 아프고 지루한 암기 과목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대량 인쇄 기술과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을 스티브 잡스가 만든 아이폰과 엮어 세상을 바꾸는 생각의 조건을 알아보고, 대제국 몽골에 항복하면서도 고려의 전통을 지킬 수 있도록 끝까지 협상한 고려 원종의 사례로 하나를 내어주고 둘을 얻는 협상의 기술을 배우는 등 한국사와 세계사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이야기 자체가 너무 재미있기도 했다. 현장에서 직접 강의를 듣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저자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 있는 책이라 500만 명의 가슴을 울린 인문학 명강의를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는 점도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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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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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에게도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찮은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일까. 그 시절의 일들이 내가 스무 살 이후 들어간 세상에서 하찮은 것으로 여겨진다는 건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자랑스레 떠들 일은 아니었다.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 말한다 해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을 일. 어쩌다 언급한다 하더라도 내가 지금은 그 일들을 바보같이 여긴다는 뉘앙스를 담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p.51~52

 

언젠가부터 성별을 뛰어넘은 동성 간의 사랑을 다룬 퀴어 소설들이 독자들에게 거부감 없이 공감을 얻고 있는 것 같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캐롤>, 안드레 애치먼의 <그해, 여름 손님> 정도의 작품만 읽어 봤었는데, 작년에 화제였던 김봉곤 작가의 <여름, 스피드>도 궁금하긴 했다. 그가 커밍아웃한 첫 게이 소설가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섬세하고 감성적이면서도 노골적인 묘사까지 마다하지 않는 작품이라고 하니 말이다. 어쨌건 개인적으로 퀴어 소설들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다지 많이 읽어본 건 아니라서 잘 안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번에 만난 김세희 작가의 <항구의 사랑> 10대 소녀들의 첫사랑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어, 가장 풋풋하고, 예쁜 퀴어 소설이 아니었나 싶다.

여중, 여고로 이어지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여학생의 존재일 것이다. 대부분 키가 크고, 컷트 머리에, 운동을 잘한다거나, 성격이 털털하며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여학생이 인기가 많았다. 예쁘고, 얌전하고, 공부 잘하고 상냥한 여학생이 아니라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도 시대적인 차이는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의 이야기 속 배경인 2000년대 초반에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을 향한 팬픽과 함께 여학생들 간의 동성애로 발전해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시절을 겪지 못한 나로서는 이들의 문화가 조금 낯설기도 했다. 팬픽 이반이니, 레즈비언인 척하는 유행이니 하는 것들이 말이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그들의 미성숙한 감정과 관계들을 이해는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인희를 한심하다고 여겼다. 과거를 그리워하며 적응하지 못하는 그 애를 비웃었다. 그건 그저 유행이었다고, 그뿐이었다고 못받아 주고 싶었다. 여자 아이들 집단에서 너는 남자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인기를 얻었던 거라고 말이다. 나는 또 이렇게도 말해 주고 싶었다. 정신 차리라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이제 우리 주변에는 진짜 남자들이 있으니 남자 흉내는 그만두라고. 아무리 흉내를 내려해도 진짜 남자를 따라갈 수는 없을 거라고. 너의 꼴은 우스꽝스럽고, 보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진다고.   p.158

 

2000년대 초 항구도시 목포, 초등학교 내내 언제나 반에서 가장 작고 미숙한 아이였던 ''는 같은 반 체육부장이었던 인희와 친해진다. 친구보다는 보호자처럼 느껴졌던 인희는 늘 나를 보살펴 주었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 <데미안>을 읽었을 때 바로 인희를 떠올렸을 정도로, 인희는 유년 시절의 데미안 같은 존재였다. 그런 인희와 다시 만나게 된 건 고등학교 입학식이 끝난 뒤였는데, 그 동안 인희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칼머리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짝다리를 짚고 선 모습이 꼭 남자 같았다. 당시에는 여자끼리 사귀는 아이들을 전부 이반이라고 불렀는데, 인희 역시 남자 흉내를 내며 여자와 사귀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나에게는 규인이라는 성숙하고 침착한 친구가 있었고, 그녀를 통해 연극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당시 연극의 주인공이었던 민선 선배와 가까워지게 된다. 그리고 민선 선배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게 되는데, 내가 품었던 마음은 동경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한때 아이돌에 열광하고, 그들이 등장하는 팬픽을 쓰고, 진심으로 연예인들에 대한 마음을 키웠더라도, 그러한 감정이 계속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상을 살아 내려면 좋아하는 것만 바라보며 살 수는 없으니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해야 된다는 말이니까 말이다. 극중 주인공이 스무 살이 되어 목포에서 서울로 올라가고, 대학생이 되면서 자신이 한때 가졌던 마음과 열정들을 모두 부끄러워 하거나 하찮은 것이라 치부하듯이, 우리는 그렇게 잊어 버릴 수 없는 것들을 시간의 너머에 놓아 두고 내일을 바라보며 살아 간다.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건 다 뭐였을까?"

"그땐 다 미쳤었어."

 

하지만 그 감정들은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비록 지금은 그 모든 시간들을 부정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기에 더욱 진솔하고, 애틋하게 느껴진다. 아이돌, 팬픽, 그리고 동성 친구들을 사랑했던 소녀들이 자라서 성숙한 어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아마도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공감과 향수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우리 모두 한때 그런 소녀들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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