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일 : 누가 임신을 아름답다 했던가
전혜진 지음 / 구픽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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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 안 태어나서 국가적인 큰 문제면, 좀 더 본질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거 아냐!"

지원은 씩씩거리며 걸었다. 정환은 손에 짐을 든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뒤따라갔다.

정말, 재주는 곰이 넘고 뭐는 엉뚱한 놈이 챙긴다고.

임신을 하는 것도, 앞으로 수많은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여자인데, 죄다 엉뚱한 것들이 화를 내고, 생색을 내고, 탁상공론을 세워 가며 개인 정보를 요구하고 난리야.

 

"아주 떼로 삽질하고 자빠졌어!"    p.93

 

은주, 지원, 재희, 선경은 20년을 꾸준히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그들이 서로 알게 된 것이 무려 지난 세기의 일이니, 굉장하다면 굉장한 인연이다. 이들은 넷 중에 가장 늦게 결혼을 하게 된 은주의 결혼식장에서 만난다. 형사인 지원은 임신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얼마 전 젊은 여자만 노리는 퍽치기 사건을 해결해 경위로 승진을 앞두고 있었고, 꿈꾸던 강력계로 갈 수 있는 기회까지 생긴 참이었다. 임신을 간절히 바라는 선경은 난임 치료 중이었다. 열심히 일하다 회사에서 쓰러져 첫 아이를 유산한 것이 5년 전, 겨우 성공해서 심장 소리를 들었던 둘째 아이를 또다시 잃은 것이 3년 전이었다. 프리랜서 작가인 재희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남성 난임 검사까지 받아가며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남편 때문에 인공수정 시술을 시작하려던 참이다. 성공한 1인 기업가인 은주는 자신의 나이가 많다는 것에 대한 부담과 회사 운영 사이에서 고민이 많다.

만 나이로 서른다섯만 넘으면 노산이라고, 늙어서 애 낳으면 애가 머리가 나빠진다고들 말하고, 요즘 젊은 사람들이 애를 안 낳아서 큰일이라며,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애를 낳아야 한다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은 무심코 말한다. 사실 그 노산의 기준은, 아직 한참 일할 나이이고, 여자들은 국가를 위해 아이를 낳아 줄 생산 자원이 아니라 자기 일이 있고, 자기 인생이 있는 하나의 인격체라는 걸 그들은 왜 모를까. 고용불안, 불황과 저성장, 환경오염.. 이런 사회 문제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아이를 낳을 결심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시대에, 아이를 낳는다는 건 대체 어떤 의미일까. 이 험난한 세상에 아이를 낳아도 되는 것일까. 혹시, 굉장히 무책임한 일인 것은 아닐까. 이 작품은 사전조사를 바탕으로 한 팩트를 기반으로 한 소설이지만, 마치 르포르타주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리얼하게 현실을 페이지 위로 불러온다.

 

정말 이런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큰일이라고, 아이가 태어나는 게 행복이라고 말할 뿐. 하다못해 몸이 아플 때에도, 임신 기간 내내 현대 의학에 외면당한 것처럼 약도, 파스 한 장도 마음 놓고 쓸 수 없다는 것을. 아이가 희망이 라고 말하면서, 그 아이를 임신한 여자는 사회로부터 반쪽짜리 취급을 당하며 멸시당한다는 것을. 몸이 무겁고 지켜야 할 존재가 있는 약자가 되어 버려, 손쉽게 공격 대상이 된다는 것을.

"... 이런 것들을 다들 안다면, 그래도 임신을 할까요?"    p.413~414

 

승진을 앞두고 예상치 않았던 임신을 하게 된 지원은 강력계에 대한 꿈은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팀 일에서도 배제되어 지구대로 옮기게 된다. 인공수정 시술을 시작한 재희는 난소 과자극 증후군으로 고통을 받는다. 선경은 여러 번 시험관을 시도한 끝에 마침내쌍둥이를 임신하게 되고, 회사에서는 눈치를 받다 결국 쫓겨나듯이 그만두게 된다. 은주도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하게 되는데,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면서 지금의 사업들을 건사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각자의 상황과 생각들은 모두 다르지만, 모두에게 임신이라는 경험이 삶을 크게 바꿀 거라는 건 자명한 현실이다. 이렇게 여자들이 돈 축나고, 몸 축나고, 경력까지 틀어질 걸 각오하면서 임신을 하고 있는데.. 여자들이 아이를 안 낳아서 나라가 당장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떠들어 대면서, 대체 나라에서 임신한 여자들에게 해 주는 게 뭘까. 작가는 출산율 저하로 인한 인구 감소가 이슈가 되는 한국에서 임신한 여성들이 어떤 수난에 처해 있는지 실제 두 아이의 엄마이자 워킹맘의 입장에서 사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마치 나의 이야기인 듯, 내 친구의 이야기인 듯 공감하고, 이해하고, 같이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출산율 저하로 인한 인구 감소가 어쩌고를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 임신한 여성들이 어떤 수난을 겪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임신을 하게 되면 갑자기 약자가 되어 버린다. 몸이 아프고, 뱃속에는 지켜야 할 태아가 존재하게 되니까. 그 상태로 집 밖으로 나서면, 사회는 임산부를 투명인간 취급하거나 오히려 윽박지르고 멸시한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이야기, 하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하는 그런 이야기이다. 임신과 출산을 아직 겪어 보지 못한 미혼 여성들에게,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겪어 보지 못할 남성들이 꼭 읽어 봤으면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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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하는 삶 - 여성의 몸, 욕망, 쾌락, 그리고 주체적으로 사랑하는 방식에 관하여
에이미 조 고다드 지음, 이유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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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성적으로 자신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강박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여러 요소들 중에서 젠더, 나이, 체격, , 매력, 당신의 정체성이나 인식되는 정체성, 인종, 사회적 지위, 가족에서의 역할 등을 바탕으로 당신이 성적으로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미지를 내면화하고 있다.   p.81

이 책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배운 적 없는 여성의 몸, 욕망, 쾌락, 그리고 주체적으로 사랑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뉴욕대에서 성교육학 공부를 하고, 20년간 섹슈얼리티 교육을 해온 저자 에이미 조 고다드는 여성들이 가슴에 담아둔 비밀들을 접하며 결국 같은 것을 원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성적 수치심을 치유하고 싶은 20대 초반의 여성들부터 무언가 해소되지 않는 불만족감을 가진 30대 여성들, 섹스에서의 결핍이 가득 차오른 40대 여성들, 너무 늦기 전에 뭔가를 시도해보고 싶은 50~70대 여성들까지 섹스라는 공통의 고민을 가진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을 코칭해왔다.

사회적, 문화적 인식의 그늘 속에서 스스로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성에 대한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리면서 보다 충만한 삶을 이끌어나갈 것을 끊임없이 제안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성적 결함이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섹스가 만족스럽지 않아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는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결국 같은 것을 원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여성들은 성적으로 보다 강한 자신감을 갖고 싶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고 싶어 한다. 이 책은 성에 무지하고, 두려움까지 갖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성에 관한 매우 건강하고 긍정적인 조언을 하고 있다.

욕망은 섹슈얼리티, 그리고 삶 자체의 근본적인 부분이다. 내면의 꿈틀대는 욕망이 없다면 당신은 아침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의 욕망은 당신이 인생을 향해, 삶을 향해, 관계를 향해, 창조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 당신의 욕망은 당신을 성장으로 이끌고 동기를 부여한다. 더 커지고, 더 많이 갖고, 더 온전히 삶을 경험하겠다는 약속을 행동으로 옮기라고 촉구한다.    p.186

65세 케이티는 대학 졸업 후 수녀가 되었고, 수도원에서 20년을 보낸 후 행복하지도 충만감을 느끼지도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곳을 떠나 평범한 삶을 시작한다. 그녀는 여태껏 성 경험이 전혀 없었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늘 비웃음을 사게 되어 수치심만 늘어 갔다. 50세 앤은 세 번째 이혼을 했고, 네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평생토록 종교적인 수치심 때문에 성적으로 충족되지 못한 삶을 살아 왔다. 24세 나오미는 총명하고 재능 있는 사업가였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마음 속으로 수치심을 품고 있다. 10대 시절 엄마에게 자신의 퀴어 성향을 고백했을 때의 수치심과 아이들이 그녀에게 레즈비언이라며 손가락질을 해댔던 모욕감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성적 학대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여성, 18년간 남편과 섹스리스 결혼 생활을 해온 여성, 오랜 세월 자신의 욕망을 부끄러워했던 여성 등등.. 다양한 여성들이 성적 임파워먼트를 위해 저자를 찾아 온다. 

이들의 사연들이 내 이야기 같다고 느끼는 여성들이 생각보다 많을 것 같다. 대부분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부족하고, 자신의 몸, 에로티시즘, 욕망으로부터 거의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이 흥미로웠단 것은 여성들이 자아를 찾고 성적인 힘을 가진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두려움 없이 내면의 욕망을 온전히 끌어안을 수 있도록, 외부의 압력에 떠밀려 자신을 규정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가 삶을 긍정한다는 증거라면, 성적 에너지가 삶의 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삶을 보다 활기차고 유쾌하게 해주는 열정을 가지고 당신의 섹슈얼리티를 표현해보자. 삶에는 때때로 격렬한 불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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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속 지옥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6
유메노 큐사쿠 지음, 이현희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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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천지에 이런 기묘한 집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꿈속에서 일어난 일처럼 기묘한 일들로 가득하고 하나하나가 악몽보다 더 오싹하고, 두렵고, 기쁘고, 슬펐다... 저 화려한 화장실, 어쩐지 으스스한 병실, 가죽 채찍, '기괴한 북' - 어쩌면 이렇게도 수수께끼 같은 세계가 있을 수 있는가. 어쩌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집이 있단 말인가. 내 눈으로 분명히 보았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다 -.    p.48~49

악기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얼마큼 사로잡을 수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교토에 기괴한 북이 있었다. 보통 북을 치면 둥 둥 둥 하는 맑은소리가 나는데 비해, 이 북은 음산하고 여음이 없는 두... .. .. 하는 소리가 난다. 이 북소리 때문에 예닐곱 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북을 만드는 장인인 구노는 자신의 거래처 가운데 한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갸씨 역시 구노에게 호의적으로 대했으나, 그녀는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었고 당시 숨겨둔 자식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녀는 재상의 부인이 되었고, 구노는 아가씨가 시집갈 때 가지고 갈 혼수품으로 자신이 만든 북을 선물로 준다. 그리고 그 일가에게 불길한 일이 생기기 시작한다.

무섭고도 음산하지만 조용하면서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그 북은 '기괴한 북'이라 불리기 시작한다. 구노 자신은 아무런 뜻이 없었다고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원망과 저주가 북에 스며들었던 것이다. 하여 그 북을 치거나 북소리를 듣는 사람은 모두 죽거나 불행한 일을 겪게 되었다. 구노는 이를 알고 죽어가며 누구라도 좋으니 그 북을 되찾아 다시는 북을 치지 못하도록 찢어 버려달라고 유언을 남기지만, 그 누구도 북을 되찾아오려는 자가 없었다. 그 이야기는 전설처럼, 거짓말처럼 세상에 남겨졌고, 세대를 거치고 거쳐 백년 후 구노의 손자, 그의 아들에게로 내려 온다. 영겁으로도 사라지지 않은 원망의 울림, 인간의 힘으로는 지우기 힘든 슬픈 집념, 무간지옥의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죽어도 죽음으로 얻을 수 없는 영혼의 탄식이 담겨 있다는 그 북소리는 또 누구의 마음을 빼앗고, 목숨을 가져갈 것인가. 여름 밤에 읽기에 오싹하면서도 신비로운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유메노 규사쿠의 1926년 데뷔작인 <기괴한 북>이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요상한 것일까요? 이 숲에는 적도 아군도 없고..... 완벽한 허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왠지 안심과 동시에 평상시의 심약한 내 모습이 한꺼번에 되살아났습니다. 이런 기분 나쁜, 요괴라도 나올 것 같은 숲 속으로 왜 혼자 온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습니다. 군인답지 않은 성격으로 군인이 되어 초원 한가운데서부터 오랜 시간을 기어와 놓고는 홀로 상처 입고 쓰러져 있는 제 운명을 이제야 절절히 되돌아보고 공포심에 참을 수 없게 되자 지금 당장이라도 숲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p.184

1880년대 후반 일본에 처음 서양 추리소설이 유입되었을 당시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의 주요 추리소설을 엄선하여 연대순으로 기획한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그 여섯 번째 작품이다. 가능한 한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을 선정하여 번역하고자 했다는 취지에 맞게 이번 작품 역시 다소 낯선 작가이다. 유메노 규사쿠는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낮지만 일본의 대표적인 미스터리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1926년에 첫 작품을 낸 이후 1936년에 타계할 때까지 그의 작품 활동 기간은 불과 10여 년에 그쳤지만 이 기간에 그는 에세이를 비롯하여 단편, 중편, 장편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이 책에는 유메노 규사쿠의 작품 세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12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편지 글 형식과 자백하는 형식으로 서술되는 이야기가 많고, 추리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탐정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첫 번째 수록작인 <기괴한 북>도 그러하고 주로 이상한 일을 겪은 인물이 1인칭 화자로 등장해 본인이 겪은 사건이나 경험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천재, 정신병자, 소년, 소녀 등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범죄에 휘말리거나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그의 작품은 '탐정소설이라기보다 괴기 소설적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다'는 평처럼 추리소설이지만 미스터리보다는 인간 내면의 어둠을 탐구하는 괴기스러운 면이 부각되어 있다. 나름 추리, 미스터리 장르의 책들을 많이 읽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만나게 된 일본의 초창기 추리 소설들을 읽게 되니 굉장히 신선하고, 색다른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오래 전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치하다거나 고루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에서 벗어나면서도 그 틀 안에서 멋지게 비틀기를 해내고 있어 흥미로웠다. 일본 추리소설의 원류를 이해하고 시대별 흐름을 알 수 있다는 점도 이 시리즈만의 매력이지만, 그냥 작품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아 일본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적극 추천하고 싶은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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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모험 - 인간과 나무가 걸어온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정
맥스 애덤스 지음, 김희정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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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하기 그지없는 자작나무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단순명료하다. 영광의 순간을 누리기 위해서는 다소 힘이 들지라도 기초를 다져야 하며, 작고 사소한 인무를 잘해내는 게 큰 무대에서 주목받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자작나무는 우리가 활동하는 무대 세트를 설치하는 일꾼이다. 인류 역사라는 커다란 무대에 자작나무가 해낸 가장 비범하고 눈에 띄는 역할은 하워드 휴스의 악명 높은 '스프루스구스'일 것이다. 나무로 만든 이 비행기는 재료의 95퍼센트가 자작나무였다.   p.48~49

 

이 책의 서두를 읽는데, 어린 시절 읽었던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책이 떠올랐다. 누구나 다 기억하는 작품이겠지만, 다시 떠올려 보자면 나무가 사랑하는 소년에게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며 행복해하다, 더 이상 줄 게 없을 만큼 세월이 지난 뒤 자신의 나무 밑동을 내어 주며 쉴 수 있게 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인생의 참된 가치, 진정한 사랑과 베품의 의미를 보여주는 작품이었지만, 실제 역사를 돌이켜보더라도 나무는 인간과 늘 공존해왔고,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제공해왔다. 인류 문화사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무와 숲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낌없이 베풀었고 무지를 일깨워 왔다.

 

 

저자인 맥스 애덤스는 세계 곳곳의 유적지를 누비고 다닌 영국의 고고학자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더럼주에 위치한 16만 제곱미터 크기의 삼림지를 사들이고 숲 속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숲에서 나무들을 관찰하고 숯을 굽고 온갖 물건들을 뚝딱뚝딱 만들어내면서, 나무야말로 인간에게 물질적 풍요와 지혜를 선사한 원천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절감하게 된다. 이 책은 바로 그가 수년간 숲사람으로 살면서 보고 느끼고 겪은 것을 생생하게 담은 수기이자, 고고학자의 눈으로 밝혀낸 인간과 나무가 함께 쓴 발전과 진보의 기록이다.

 

 

나는 종이를 더 많이 소비하라고 권하고 싶다...숲은 유용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종이와 성냥을 만들기 위해 조성된 숲에는 베어지는 나무보다 더 많은 나무가 새로 심어진다. 나무가 가진 경제적 가치를 보지 못하고 나무의 경제학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감상적으로만 나무를 대하고 숲을 갈아엎어 특용 작물을 기르거나 초원으로 바꾸는 순간, 숲의 운명은 끝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보며 펄프가 된 나무를 위해 눈물 흘리지 말자. 책 한 권을 더 사는 것이 숲을 구하는 길이다.    p.344~345

 

봄이 되면 새로 태어난 벌레들이 첫 비행을 하고, 새들은 마치 내일 세상이 끝나기라도 할 듯 짝짓기를 하고 둥지를 튼다. 목질의 구근들이 힘을 모아 초록빛 싹을 틔우려고 애쓰고, 개암나무 가지에선 붉은색 꽃이 피기 시작한다. 여름이 되면 수액 냄새가 줄어들고 송진과 밀랍 향이 짙어진다. 푸르른 녹음과 울긋불긋한 꽃들을 배경으로 곤충들이 웅웅거리며 바삐 날아다니고, 과실은 날로 커간다. 가을이 되면 대자연이 가진 팔레트를 총동원해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땅에 가득한 낙엽들은 노랑부터, 갈색, 빨강, 보라, 빛 바랜 초록, 주황에 이르기까지 온갖 색체가 마구 뒤섞여 향연을 벌인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눈이 내리고 숲의 땅이 보이지 않게 되며, 사위가 조용해진다. 하얀 배경에 까맣게 나무들의 모양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시간이 지나 눈이 녹으면 숲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숲의 사계절을 묘사하는 대목이었다. 역사와 과학, 예술을 넘나들며 지식의 숲을 탐험하는 중간 중간, '숲의 사색'이라는 테마로 숲의 정경들이 펼쳐지는데 너무도 근사했다. 숲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볼 수 있었던,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숲이 내쉬는 숨소리, 숲에서 용솟음치는 생명력 등을 글로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각 장의 말미에 달린 '나무 이야기' 또한 너무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12종의 나무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아름다운 세밀화가 곁들여져 있고, 꽃말, 용도, 특징 등과 함께 각각 나무들의 생태학적인 특징을 비롯해 여러 문헌과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일화들이 매우 재미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나무는 기적에 가까운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다. 햇빛과 물, 이산화탄소만으로 산소와 영양분을 만들어내고, 이를 뿌리에서 잎사귀까지 자유자재로 이동시킨다. 가시를 돋우고 나무껍질을 벗겨내어 천적에 대항하기도 하고, 뿌리에 공생하는 균을 통해 동료 나무들에게 비상경보를 울리기도 한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마지막으로 조금은 독특한 저자만의 숲과 나무를 아끼고 사랑하는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톱에 잘려나간 나무토막을 보고 감상에 젖어 안타까워하기보다, 그 자원을 어떻게 쓸모 있게 활용할 수 있을지 궁리하는 것이다. 그는 종이 사용을 중지하고 숲을 보호하자는 사람들의 취지에 대해서, 반대로 종이를 더 많이 소비하라고 권한다. 나무의 쓸모가 사라지지 않아야, 사람들이 숲을 가꾸고 관리하려는 노력이 줄어들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책을 한 권 더 사고 종이를 소비하는 것이 숲을 구하는 길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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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 - 삶의 모든 마디에 자리했던 음식에 관하여
정동현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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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이 내리면 빨간 낙지볶음만 당기는 것이 아니라 눈을 닮은 맛이 나는 맑은 사케에 절로 입이 간다. 추운 겨울날, 따끈히 데운 잔에 튀긴 복어 지느러미를 넣어 나른히 비릿한 맛이 나는 히레사케는 물론이요, 작은 잔이 어울리는 아릿하게 맑고 차가운 것도 좋다. 흰쌀을 깎고 또 깎아 하얀 중심만 남기고 50퍼센트 이상 깎아낸 다이긴조는 입안에 탁 털어 넣으면 무섭게 시퍼런 하늘이 나를 덮치고, 박하사탕처럼 청량한 바람이 나를 감아 돌며, 저 멀리에서는 그 바람에 실린 벚꽃 향이 하늘거리는 듯하다.   p.84~85

돌아보면 삶의 중요한 모든 순간에 음식이 함께 했다. 어린 시절 처음 가족끼리 외식이라는 걸 했던 동네의 경양식 집, 동생은 느끼하다고 했지만 나는 너무 맛있었던 돈까스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 처음으로 독립했을 때, 첫 직장에서 첫 번째 월급을 받았을 때, 첫 남자친구와 근사한 데이트를 했을 때 등등... 뭔가 기념할 만한 일이 생기거나, 오래 기억해두고 싶은 순간에 우리는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걸 먹으러 간다. 그래서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다시 그 순간을 떠올리게 되면, 항상 그 날의 풍경과 사람과 공기 속에 그날 먹은 음식에 대한 맛과 향기와 분위기가 같이 기억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삶의 모든 순간에는 저마다의 고유한 맛이 자리하게 된다. 마치 이 책 속 글들처럼 말이다.

 

대기업을 다니다 서른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겠다는 생각에 사표를 던지고 영국 요리학교로 훌쩍 떠나 요리사가 되었다. 그는 늦깎이 셰프로 일하며 전쟁터 같은 주방 풍경, 음악과 영화와 문학으로 버무린 요리 이야기를 글로 쓰는 칼럼니스트이자 작가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가 써낸 한 그릇에 담긴 사람과 시간에 대한 이야기와 삶의 모든 마디에 자리했던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술술 에세이처럼 편하게 읽히는 글들이지만, 저자가 셰프이기 때문에 요리 과정과 재료와 맛에 대한 묘사가 매우 리얼하고 자세하다. 이야기 속에는 간단한 레시피도 포함되어 있고, 독특한 조리법이나 재료에 대한 팁도 소개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다음 날이 되면 다시 똑같은 시간에 눈을 떴다.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한기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나는 침대 밖으로 나갈 것이고 다시 빵을 구울 것이며 갓 국운 빵을 물고 학교에 갈 것이다. 아침을 여는 나만의 신성한 의식이었다. 마치 기도를 하듯 매일 일어나 반죽을 빚을 때면 사위가 조용해지고 신경이 예민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눈을 감아도 오븐 속에서 익어가는 빵이 보였다. 작은 질감의 차이를 손끝으로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직접 만든 빵, 아무것도 들어가 있지 않은 하얀 빵을 먹으면 나는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듯했다.    p.182~184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부터 뜨끈한 국물 요리가 생각나기 시작한다.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면 시원한 수박과 빙수부터 먹고 싶어 지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홈파티 음식들을 떠올리며 메뉴를 구상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음식들은 우리의 일상과 고스란히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음식은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지난 시절을 불러오게 만들기도 한다. 쓸쓸하고 외로운 날 엄마가 보고 싶으면, 어린 시절 엄마가 해주던 집밥이 생각나고, 지나가다 도시락집을 발견하면 혼자 자취하던 시절 홀로 밥을 먹던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순전히 생존을 위한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웠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값싼 빵이나 라면도 있고, 근사하게 분위기 내고 싶은 날 먹었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가 생각나는 날도 있다.

어떤 음식은 나의 지나온 한 시절을 기억나게 만들고, 또 어떤 음식은 함께했던 누군가를 떠오르게 만드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먹어온 음식만큼, 내가 지나온 시간만큼의 추억들이 쌓이고 쌓여서 나라는 한 사람을 이루게 되는 것일 테고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사람들을 낯선 곳까지 오게 하고 밤을 지새우게 하는 것은 그리움이라고. 그들이 먹는 것은 단지 고기뿐만 아니라 불꽃이고 그 불꽃이 이끌어낸 것은 감춰져 있던 기억이라고 말이다. 그는 날이 춥고 속이 헛헛할 때, 하늘은 흐리고 바람은 찰 때 매운 음식이 당긴다고 말한다. 그럴 때 발걸음이 닿을 곳은 정해져 있다고 무교동의 식당들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낸다. 그리고 다른 집의 것과는 다르게 매서운 직구처럼 매운맛이 강했던 어머니의 비빔국수, 할아버지를 보내고 먹었던 장례식장의 육개장이 슬픔을 견디게 했던 기억도 그려 낸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영국에서 요리학교에 다니던 시절, 난방을 거의 하지 않아 추웠던 오래된 단독주택에서 새벽 마다 일어나서 빵을 만들었던 일화였다. 수업은 아홉 시에 있었고, 그는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여섯 시에 매번 일어나 주방으로 내려 갔다. 밀가루와 우유, , 소금, 버터, 이스트를 준비하고 계량하고, 반죽하고, 숙성해서 모양을 빚어 틀에 집어 넣고 오븐에 굽는다. 재료 준비에서 완성까지 정확히 1시간 40분이 걸려, 완성된 빵 하나를 입에 물고 문밖을 나선다. 노란 자전거 위에 올라 달리면서 먹던 그 빵 맛을 상상해 보았다. 구수하고, 쌉쌀하고, 고소하고, 부드러운 하얀 식빵. 산뜻한 산미와 달콤한 풍미가 섞여 식욕을 자극하는 그 맛. 학교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빵의 그윽한 향이 몸에 남아 있고, 매끄럽고 부드러운 살결 같은 반죽의 촉감이 남아 있는 그 순간들이 너무도 행복해 보였다. 마음을 쌓는 것같이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는 큼지막한 식빵 한 조각에 담긴 그 생의 기쁨을 이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같은 하늘을 지고 사는, 저 멀리, 혹은 가까이에서 숨 쉬는 당신, 당신이 씹어 삼키는 작디작은 한 숟가락에 담긴 세상'이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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