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프란츠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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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사방에서 날벌레들이 날아다니다 죽었습니다. 온종일 비가 내렸어요.

바람 한 점 없이 아주 뜨듯한 빗줄기가 수직으로 내리긋는 야릇한 비였고, 시클라멘을 짓이겨 놓으면서 풀 위로 쏟아지는 기세가 꺾일 줄 모르더군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새들만은 추적추적 내리는 이 비가 불편하지 않은지 날아다녔어요.

새들은 오솔길을 따라서, 수풀 속에서, 여름이 선사한 무성한 초목 아래서, 얕은 나뭇가지에서 여전히 지저귑니다.    p.44~45

어둠 속에서 귓가에 하얀 머리칼 몇 올뿐인 삐쩍 마른 한 늙은 남자가 문을 밀고 무대로 등장한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는 낡은 피아노로 다가간다. 어둠과 시간에 묻혀 거의 보이지 않는 연로한 그 남자는 피아노를 연주한다. 그리고 내레이터가 등장해 인물을 소개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1860년 미국의 한 사제로, 그의 이름은 시미언 피즈 체니이다. 19세기 가톨릭 사제이며 최초로 새소리를 기보한 음악가인 그는 실존 인물이기도 하다. 노 사제는 오래 전 죽은 아내를 아직도 목 놓아 부르는 중이다. 그의 아내는 딸 로즈먼드를 낳고 해산 직후 침대에서 죽었다. 사별한 아내를 잊지 못한 채 은둔하여 살았던 그는 아내가 사랑했던 사제관 정원의 모든 사물이 내는 소리를 기보하는 것으로 아내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승화시키고자 한다.

음악과 언어가 결속된 독자적 작품 세계를 구축한 파스칼 키냐르의 신작이다. 17세기,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이자 작곡자인 생트 콜롱브의 이야기를 그렸던 <세상의 모든 아침>과 쌍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나 이번 작품은 희곡 형식으로 쓰여 더욱 흥미롭다. 등장인물은 내레이터와 사제 시미언, 그리고 딸 로즈먼드, 이렇게 세 명뿐이다. 널찍한 무대 역시 최소한의 소도구만 놓여 있어 고요하고 느리게 움직이며 전개된다. 주인공 시미언 피즈 체니는 정원에서 지저귀는 온갖 새들의 노랫소리뿐만 아니라 물 떨어지는 소리, 옷깃에 이는 바람 소리 등 생명이 없는 사물의 소리까지 음악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무대는 캄캄하다. 칠흑 같은 어둠이다.

날마다 찾아오는 밤은 얼마나 야릇한 실체인가!

얼마나 기이한 질료가 자연에 배어들며 세상을 집어 삼키는가!

공간의 맨끝을 뚫어지게 바라보면, 낮이 끝나며 시작되는 어둠에는 끝이 없는 듯하다.

매년 겨울이 시작되면 밤이 더욱 깊어질까 두려워진다. 결코 끝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다.   p.73

어느 날 시미언은 딸인 로즈먼드를 불러 집을 떠나라고 말한다. 이유를 묻는 딸에게 그는 말한다. 더 이상 널 보고 싶지 않아서라. 라고. 아버지가 딸을 내쫓는 이유는 바로 오래 전 죽은 아내 때문이다. 딸의 나이가 이제 곧 스물여덟이 되었고, 아내는 스물넷에 죽었던 것이다. 게다가 딸은 점점 더 엄마를 닮아 갔고, 살아 있는 딸을 보는 것이, 딸이 나이 먹어 가는 걸 보는 것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한 여인을 사랑하는 것과 딸을 사랑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말하는 그의 말을 온전히 다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의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만큼은 알 수 있었다. 28년 전 죽은 아내 때문에 딸을 쫓아내는 아빠라니. 그 절대적인 사랑, 유통 기한 없는 사랑, 설명할 수 없는 사랑...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돌아온 딸은 아빠에게 말한다. 엄마에 대한 사랑이 너무 지나쳤다고. 그런 딸에게 아빠는 말한다.

"비밀을 하나 말해 줄까, 딸아.

사랑엔 결코 지나침이 있을 수 없단다."

 

파스칼 키냐르는 대대로 언어학자와 음악가들을 배출한 집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5개 국어를 습득하고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면서 자라났다. 이러한 배경은 바이올리니스트·첼리스트·오페라 작곡가라는 다양한 이력으로 이어졌으며, 일관되게 그의 작품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이번 신작 역시 그가 평생에 걸쳐 몰두했던 생의 근원과 기원의 음악이라는 주제를 한 무명 사제 음악가의 삶을 통해 풀어낸 작품으로, 출간 즉시 도빌 시의 <책과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시미언 피즈 체니는 미국 뉴욕주 제너시오의 사제관 정원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기보한 최초의 음악가이다. 극 중에서도 나오지만 실제로 그가 생전 그토록 출간하려 애썼으며, 사후에 자비 출간된 책이 바로 '야생 숲의 노트'이다. 그가 기보하는 새소리, 바람 소리, 갈대나 사물이 내는 소리 등은 '자연의 음악', '음악 이전의 음악'이다. 파스칼 키냐르는 이러한 이야기를 정제된 시적 언어로 놀랍도록 아름답고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상실과 외로움, 고통과 침묵, 평화와 고요의 순간이 마치 음악처럼 들리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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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나의 집 모중석 스릴러 클럽 46
정 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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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것은 타당한 요구였다. 그 무엇보다 아내와 아이가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 지극히 미국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그를 속박하고 있는 지구 반대편에서는 무조건 부모가 우선이다. 아이는 두 번째, 그리고 아내는 맨 마지막. 매와 진은 그를 그렇게 키웠다. 그는 그런 부모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그렇다고 질리언에게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p.133~134

며칠 전 낮에 아랫집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한참 들린 적이 있다. 보통 어른이 곁에 있을 테고, 아기가 뭔가 불편한 게 있어서 울거나 칭얼댄다면 금방 달려가서 해결해 주지 않을까. 물론 그럼에도 아이의 요구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해 아이를 조금 길게 울리는 경우도 생길 수 있겠지만, 참 이상하다 싶게 아기 울음소리가 길게 들렸다. 순간 생각했다. 설마 아기만 남겨두고 어른이 자리를 비운 건가? 혹시 아기를 학대하는 부모가 있는 걸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급기야 아래층에 내려가볼까 하던 차에 아기 울음 소리가 그쳤다. 세상이 험악해지고, 뉴스에선 연일 끔찍한 소식을 사건사고로 보도하고.. 그러다 보니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굳게 닫힌 대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생각에 오싹했다.

대부분 가정 범죄는 집 안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가까운 이웃이나 친구나 동료들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범죄자들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지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시무시했다. 정윤의 첫 소설 <안전한 나의 집>에 등장하는 가족들 역시 그러했다. 크고, 튼튼해 보이는 대문이 그려진 표지를 열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가족이라는 허울뿐인 이름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7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와 보란 듯이 성공한 아버지, 아버지처럼 교수가 된 아들,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 완벽히 성공한 재미한인 가족이다. 그러다 그들에게 즐겁고 안전해야 하는 집은 문이 닫히면 지옥으로 변하는 곳이다.

그들 대부분이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어린 나이에 한국에서 이민을 왔다. 그런데 그들의 사고방식은 누가 봐도 한국식이다. 여자들은 전부 남편과 아버지와 시부모에게 복종한다. 지금도 분주히 음식을 나르는 건 여자들뿐이고, 그 중에도 며느리들은 가장 눈에 띈다. 며느리들은 항상 필사적으로 상대의 비위를 맞추기 때문이다....그는 사랑하는 이가 자신의 어머니처럼 결혼과 함께 종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질리언도 일 년에 몇 차례 시부모 앞에서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여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한국인 아내들은 평생을 그러고 살아야 한다.    p.174

부모에게 반발해 백인 여자 질리언과 결혼한 경, 그들은 대출 이자를 갚느라 허덕이다 결국 집을 내놓으려고 공인중개사를 만난다. 학자금 대출과 주택 담보 대출이 경의 발목을 잡으면서 빚이 불어나고 카드 돌려 막기가 일상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집값이 폭락해 대출금조차 보전이 안 된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을 때, 집 뒤뜰에 알몸인 여자가 다리를 절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경의 어머니인 매였고, 아들을 보자마자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한다. "도와줘." 그리고 "아버지가 다치셨어." 하지만 한국말이 서툰 경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해치려 했다, 다치게 했다는 식으로 알아 듣는다. 어머니의 몸은 찰과상과 핏자국, 멍으로 뒤덮여 있었다. 경의 아버지는 십 수 년 전까지 어머니를 무자비하게 때렸던 전력이 있다. 하지만 경찰과 함께 부모의 집을 찾은 경은, 강도가 들어 집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아버지는 무차별 폭행을 당했으며, 어머니와 가정부는 그들에게 강간당했다는 알게 된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경은 그런 일을 겪은 부모를 당분간 자신이 돌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강도가 들어 그들이 당한 그 일만큼이나 경에게 끔찍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렸고, 어머니는 아들을 때렸다. 어머니인 매는 미국으로 와서 친구도, 일자리도 없었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고, 그녀가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던 것은 어린 아들뿐이었던 것이다. 그들 가족은 그렇게 유지되었다. 어린 경은 어머니가 얼마나 비참하게 살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화풀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했다. 하지만 왜 어머니가 집에서 나갈 용기를 내지 못했는지, 자신을 데리고 탈출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원망했다. 아버지 진은 미국에서 사회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가족들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고, 밖에서와 달리 집에서는 매우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경은 오랜 시간 증오했던 부모를 집으로 모셔와 자신의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지내도록 해야 한다. 각기 다른 사고방식과 신념으로 살아온 3대가 한 지붕 아래 모이면서 시작되는 진짜 비극은 서늘하고, 오싹하다.

작가는 경의 부모에게 벌어진 끔찍한 범죄라는 미스터리와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한인사회, 그리고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미국인이지만 사고방식만은 지극히 '한국적'인 해외 교포 1.5세들의 이야기를 함께 배치해 스토리를 풀어 나간다. 작가인 정윤 역시 서울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 재미한인이고, 이 작품을 번역한 번역가 역시 그러하다. 외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모순과 즐겁고 안전해야 할 집에서 벌어지는 가정폭력이라는 아이러니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다. 참 아프고 슬프면서도, 오싹하고 서늘한 작품이다. 당신의 집은, 당신의 가족은 안전한가. 굳게 닫힌 문 뒤에서 벌어지는 이런 비극을 우리는 더 이상 모른 체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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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순간 - 삶의 의미를 되찾는 10가지 생각
스벤 브링크만 지음, 강경이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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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쓸모없음의 쓸모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도구화에 저항하는 최전선에서 우리를 지키고 이끌어줍니다. 쓸모없는 것이란 우리가 다른 것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해 하는 일입니다. 그런 일들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들이지요. 우리는 그런 쓸모없는 활동에 시간을 쓰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요즘처럼 도구화된 시대에서는 그런 쓸모없는 활동이야말로 삶의 진짜 의미를 되찾아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쓸모없는 일을 하세요. 쓸모없음이야말로 최고의 선입니다!    p.67~68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덴마크, 그곳의 공영방송 라디오 강의 시리즈를 통해 유쾌한 철학 강의로 열광적인 호응을 받은 심리학자가 있다. 스벤 브링크만은행복은 쾌락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에서 나온다라고 말하며, 소크라테스, 니체, 데리다, 로이스트루프, 머독 등 고금의 철학자로부터 길어 올린 10가지 삶의 관점을 제시했다. 특히나 영화나 소설, 일상 등 구체적인 사례를 활용해 철학의 본질인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다루는 데 집중하고 있어 굉장히 대중적이고, 쉬운 철학을 보여 주고 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배가 가라앉는 순간에 스토아철학이 말하는 마음의 평온으로 대응하는 노부부의 태도를 통해 칸트의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식이다. 다들 겁에 질려 바다로 몸을 던지거나, 달아나기 위해 다른 승객을 짓밟거나 난리인 상황에서, 노년의 한 부부는 선실에 남아 침대에 누워 서로를 다정하게 끌어안고 말없이 죽음을 기다린다. 그 온갖 소란과 공포 한가운데서, 곧 일어날 불가피하고 끔찍한 혼란 앞에서 그들은 평화롭게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저자는 말한다. 영화 속 노부부는 분명 인간의 존엄성이라 불릴 만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만약 우리가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면, 우리는 과연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들처럼 보낼 수 있을까. 사실 그런 상황에서 절제력을 잃었다고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존엄성이란 무엇인가. 이 책에서는 타이타닉의 노부부가 보여주는 존엄성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덕이라 부를 만한 것이라고 말한다. 존엄하게 행동할 능력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몹시 흥미롭고 도발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는 대개 죽음을 한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몽테뉴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올바로 이해할 때에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거지요. 그의 표현을 빌리면죽는 법을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는 법을 잊는다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그 의미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삶이 짧고 유한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중요하지 않은 일로 시간을 낭비할지 모릅니다. 아무렇게나 스쳐 지나가는 욕망과 충동의 노예가 되며, 삶을 보편적인 관점에서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p.230~231

저자에 따르면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사실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책에서 들려주는 철학자들의 10가지 생각은, 그 자체로 가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댈 만한 단단하고 기본적인 토대가 되어 준다고 말이다. 10가지 생각은 아래와 같다.

1.우리가 그 자체를 위해 하는 것이 선이다(아리스토텔레스)

2.존엄성은 가격으로 따질 수도 없고 대체될 수도 없다(칸트)

3.인간은 약속하는 동물이다(니체)

4.자기란 관계 그 자체와 관계하는 관계다(키르케고르)

5.진리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진실할 수 있다(아렌트)

6.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은 그의 삶 무언가를 손에 쥐는 일이다(로이스트루프)

7.사랑은 우리 자신 외에 다른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가능한 무척 어려운 깨달음이다(머독)

8.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일이다(데리다)

9.자유는 특권이 아니라 책임으로 이루어진다(카뮈)

10.죽는 법을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는 법을 잊는다(몽테뉴)

이 책에서 들려주는 이 10가지 생각과 철학들은 우리가 사는 시대와 무척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쓸모 없고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언뜻 봐서는 그다지 실용적일 것 같지 않지만, 저자인 브링크만은 이쓸모 없음의 쓸모를 깨닫는 것이 오늘날 가장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관점들은 '이처럼 쓸모 없기에 더 쓸모가 있는,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중요한 가치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관점들이 급변하는 불확실한 시대에서 우리가 믿고 의지할 만한 단단한 토대가 된다는 점에 있어서,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쓸모 없기에 더 쓸모가 있는,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중요한 가치들이 궁금하다면, 급변하는 불확실한 시대에서 믿고 의지할 만한 철학의 관점들이 필요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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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변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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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머리에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뇌가 조금 들어 있는 거지?"

"맞아."

"그렇지만 넌 역시 너겠지........?"

"무슨 소리야. 난 나지. 다른 누구도 아니야."

"그럼 만약 뇌를 전부 교체하면 어떻게 될까? 그때도 역시 넌 너일까?

"그건...."나는 조금 생각한 뒤 대답했다. "내가 아니겠네. 그렇게 되면 내가 아니라 당연히 원래 뇌의 주인일 테지."      p.102~103

산업기기 제조사의 서비스공장에서 일하는 나루세 준이치, 직장 내 그의 별명은 '착한 아이'였다. 윗사람이 하는 말은 뭐든 예, 예 하면서 잘 듣기 때문이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그림 그리기였고, 화방에서 일하던 메구미와 가까워져 연인이 되었다. 좁은 원룸 아파트에 살던 그는 좀 더 나은 방을 얻으려고 부동산 중개사무소에 들렀는데, 그 곳에서 무장강도 사건에 휘말린다. 총을 들이대고 돈을 요구하는 범인의 모습에 손님들은 모두 두 손을 머리 위에 얹고 있었다. 그런데 서너 살쯤 되는 여자아이가 창문을 타고 넘으려던 걸 범인이 발견하고 권총을 소녀에게 겨누고, 나루세는 소녀를 구하려다 머리에 총을 맞게 된다. 사경을 헤매던 그는 '뇌 이식' 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진다. 세계 최초 성인 뇌이식 수술은 세상에 화제가 되고, 나루세는 무사히 의식을 회복하고 깨어난다. 그런데, 그에게 조금씩 사소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나루세는 마음이 약하고, 착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아주 평범하게, 두드러지지 않은 삶을 살아왔던 그가 수술 후 달라진다. 온순하며 낯을 가리는 타입이었는데,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대화도 거침없고 전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연인 메구미의 얼굴에서 주근깨가 거슬리게 느껴지고, 대충 일하는 동료들의 모습이 한심해 보이고, 시간 낭비를 하는 것처럼 보여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진다. 급기야 직장 선배와 술을 마시다 폭력을 휘두르고, 동료들은 점차 그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물을 보는 눈도 예전과 많이 달라져 그림에 재능이 사라지고, 흥미를 잃게 된다. 그렇게 취향, 가치관, 성격 등 많은 것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는 분명히 예전의 나루세 준이치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루세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저 아저씨....." 노리코가 입을 열었다. "전에 만난 그 아저씨 아니야."

순간 분위기가 경색되어 다들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부인이 웃으며 노리코에게 말했다. "무슨 소리니? 함께 인사드리러 가기도 했잖아. 까먹었어?"

"아니야."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 아저씨 아니야."

나는 입안이 바짝 말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은 예리하다.     p.235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작가 데뷔 6주년을 맞이한 1991년에 쓴 작품이다. 현지에서는 100쇄를 거듭한 끝에 문고본만 75만 부, 125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고, 드라마와 영화로 두 차례나 영상화된 작품이기도 하다. 원제는 '변신'으로 뇌 수술 이후 주인공이 겪는 인격에 변화가 생기는 과정을 작가는 '나루세 준이치는 변신하는 중이다'라는 식으로 해석했다. 국내에는 '변신'이라는 제목으로 2005년에 출간되었었고, 이번에 개정판으로 나오면서 전면 재번역을 거치고 작가와의 긴밀한 논의를 바탕으로 새 제목 <사소한 변화>로 출간되었다. 2019년 현재까지도 실제 사람에 대한 뇌이식이 수행된 적은 없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니 무려 수십여 년 전에 이 작품이 출간되었을 당시에 '뇌 의식'이라는 소재가 얼마나 파격적이었을 지 상상이 간다. 게다가 작가는 출간 후 인터뷰를 통해 “<사소한 변화>는 어느 날 버스에 타고 있던 15분 동안 플롯을 거의 완성한 작품이라고 말했는데, 그러한 플롯의 힘이 책을 읽는 내내 질주하는 스피드로 작품에 몰입하게 해준다.

이야기는 인격의 변이를 겪게 되는 나루세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어 더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간이라지만, 하루가 다르게 원래 자신의 모습을 잃어 버리는 주인공이라 당장 다음 페이지에서 어떤 일을 벌어질지 등장인물도, 독자들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나루세를 관찰하는 도겐 박사의 수술 이후 연구 기록과 형사 구라타 겐조의 수사에 관련된 메모, 예전의 그를 가장 잘 아는 인물인 연인 메구미의 일기가 교차 진행되어 더욱 긴장감 있는 플롯을 쌓아 가고 있다.

 

만약 누군가 사고나 불치의 병으로 죽음의 늪을 헤맬 때, 다른 사람의 뇌 일부를 이식해야만 살 수 있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단 그럴 경우 인격에 변화가 생길 우려가 있다면.. 당신은 그래도 수술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자신의 모습 그대로 죽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만약 정말 뇌 이식이 가능해진다면 말이다. 타인의 뇌를 이식해 원래 그 사람의 자아와 완전히 다른 것이 형성된다면, 그럼에도 그 사람은 원래 자신이라고 볼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대체 인격이란 무엇인가. 과학과 의학이 발달해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지금, 윤리적으로 한 번쯤 고민해볼 만한 문제인 것 같다. 우리는 누구누구답다, 나답다,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 사람에게서 비교적 일관되게 나타나는 성격이나 행동의 경향이 그 사람을 규정하는 본 모습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나 다운 모습일 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인데,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타인의 자아를 갖게 되었다면 그건 더 이상 ''라고 볼 수 없지 않을까. 작품의 극적인 재미와 완성도도 뛰어 나지만, 마지막 페이지까지 휘몰아치는 광풍에 휩싸여 있다가 벗어난 뒤, 이렇게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는 작품이라 더욱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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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삶 - 사유와 의지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푸른숲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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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전체를 사유하는 데 헌신하며, 결과적으로 인간의 여러 가지 능력 가운데 하나만을 독점해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부상시키는 전문가의 삶의 방식이나 철학자의 초연한 태도는 보통 사람들의 공통감에는 "죽은 사람을 모방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소멸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경험이나 현상세계로부터의 이탈을 죽음으로 이해하는 세계 안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자살을 희망하지 않고도 이러한 삶의 방식을 신중하게 선택한 사람들은 적어도 파르메니데스 이후 언제나 존재해왔다.    p.30

이 책은 한나 아렌트가 평생에 걸쳐 사유에 관해 탐구한 내용을 생의 말년에 집필한 책으로, 아렌트가 자신의 저작물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긴 그의 마지막 저서다. 1977년과 1978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사유> <의지>가 모두 수록되어 있는 통합본으로, 당시 출간되지 못한 <판단>은 발췌본으로 후반부에 수록되어 있다. 사유와 의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판단을 부분적으로 소개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사실 그는 '판단' 집필을 시작하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았기에, 아쉽게도 그의 강의 자료를 정리해 출간한 '칸트 정치철학 강의' '판단'으로 대신해 읽어야 한다.

묵직한 그 배경처럼 분량부터 칠백 페이지가 넘는데, 그 압도적인 페이지만큼이나 내용도 만만치가 않은 책이다.  정신의 삶을 구성하는 사유 자체를 탐구하는 이 책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정신 활동을 사유, 의지, 판단이라는 세 가지의 정신 활동으로 분류해 조명한다. 사유하고, 의지하고, 판단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아렌트는 독자들이 '정신의 삶' 3부작을 많이 읽기를 기대했다. 그의 이전 저서들은 '정신의 삶' 집필을 위한 준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스스로에게 중요한 저서이기도 하고 말이다.

실재하는 모든 것이 그 동인들 가운데 하나인 가능태를 선행해야 한다는 견해는 확실한 시제로서 미래를 암묵적으로 부정한다. 미래는 단지 과거의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자연적 사물과 인위적 사물 사이의 차이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필연적으로 발전하는 것들과 실재화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들 사이의 단순한 차이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기억이 과거를 위한 기관이듯이 미래를 위한 기관으로서 의지라는 개념도 전적으로 부차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지의 존재를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p.345

우리는 매일 생각하고 의지하고 판단하며 삶을 영위한다. 하지만 삶이란 무엇인가? 사유, 의지, 판단은 어떤 활동인가? 정신의 삶은 일상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등등의 질문에 쉽게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고 말이다. 특히나 아렌트는 철학을 구름 위에서 추상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의 삶으로 끌어들이고 있어, 더 실질적인 사유를 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물론 생각보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최소 서너 번은 완독해야 아주 조금 갈피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 겨우 한번 읽어 본 걸로는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2016~2017년 촛불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시민불복종운동과 혁명을 현상학적 방법으로 규정해 낸 한나 아렌트의 개념들이 신문 등 보도 매체를 통해 소개된 적이 있다. 이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현재 왜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 지에 대한 명확한 사례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한나 아렌트의 여러 사상과 개념들은 그 외 정치 보도에서도 숱하게 활용되고 있지만 말이다. 아렌트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통해 인간 활동의 다양한 의미를 밝히는 데 중점을 두었고, 그의 정치철학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다행히 이 책의 후반부에는 역자가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많은 옮긴이 주를 달았고, 해제논문도 수록해 전반적 구도와 내용을 자세하게 소개해주고 있다. 역자의 말처럼 '난해한 내용을 이해하려고 고민하다가 어느 순간 그 의미를 깨달았을 때 느꼈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책은 읽기를 시도하는 독자들에게 그렇게 특별한 기쁨을 안겨 줄 것이다. 물론 읽는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고달프고, 읽으면서도 이해가 안 되거나 어렵고, 읽고 나서도 내가 대체 뭘 읽은 건가 싶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재독이다. 이 책은 두 번, 세 번... 여러 번 읽을 수록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 역시 곧바로 첫 페이지를 다시 펼치고 재독에 들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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