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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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기서 거짓말을 하면 어떤 위험이 있는지 아십니까? 거기에 살인자들까지 보호한다면?"

"아가야, 내 나이엔 그 무엇도 위험이랄 게 없다는 걸 아느냐?"

벤투라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자신을 응시하는 100세 노인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그녀가 옳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허리가 꼬부라질 대로 꼬부라진 할머니를 어떻게 굽히게 한단 말인가? 이 심문의 길도 평탄치 않고 꼬부라질 조짐이 뚜렷했다.    p.41

이야기는 102세 할머니와 경찰의 대치 상황에서 시작된다. 베르트 할머니는 자기 집을 포위한 경찰들에게 총을 쏜다. 정확히 스물두 방, 그리고 법무사 이웃의 엉덩이도 쏘았다. 수사관 벤투라는 자신의 경찰 인생을 통틀어 가장 놀라운 용의자를 심문하고 있는 중이다. 총기와 범상치 않은 입담으로 무장한 이 빠진 노파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녀는 2차 세계대전부터 두 차례 전쟁을 겪었고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나치 군인과 가정 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을 거침없이 죽여버렸다. 이 작품은 현재 경찰서에서 할머니의 험한 욕설과 유머가 뒤섞인 취조 과정과 그녀가 태어났던 1914년부터 과거 회상 형식으로 교차 진행되며 102세 할머니의 삶을 그리고 있다. 100년을 관통해온 킬러 할머니의 삶은 그야말로 한 편의 누아르와도 같았다.

베르트 할머니는 전날, 도망자인 두 남녀를 자신의 집에 들여서 먹을 것을 주고 보살펴 주었다.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도망자가 된 사연이 그녀를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며칠 전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진 두 남녀, 폭력적인 전남편을 피해 여자를 지키려다 남자는 그를 살해하게 되고, 이렇게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이다. 베르트는 죽고 못 사는 두 연인에게 꿍쳐둔 현금도 쥐어 주고, 자신의 자동차 열쇠도 넘기며 그들의 도주를 도왔고, 그 결과 이렇게 경찰서에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도주 중인 두 남녀를 쫓던 경찰은 황당하게도 불법무기를 소지하고, 경찰에게 총질을 해대는 황당한 할머니를 마주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 할머니의 자백을 듣다 보니 그녀가 이미 세 차례의 살인을 저지른 적이 있고, 지하실에서 시신 일곱 구가 발견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대체 102세 할머니의 집 지하실에 사람 뼈와 동물 뼈가 가득 널브러져 있었던 이유는 뭘까. 어떤 취조에도 능청을 떨며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이 할머니의 삶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 다시 시작할까요? 시신이 총 일곱 구가 발견됐고, 부인은 세 차례의 살인을 자백했어요. 나치 한 명과 두 남편. 나머지 네 명은 누구죠?"

베르트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장난은 끝났다. 그들의 뼈가 수면 위로 떠오른 이상, 고약한 기억들을 다시 파헤쳐야 했다.

"마찬가지야."

"마찬가지라니, 뭐가요?"

이번엔 100세 노인의 목소리에 공포가 스며들었다.

"괴물들이라고. 또 다른 괴물들."      p.202~203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시작으로 프레드릭 배크만의 <오베라는 남자>, 도로시 길먼의 <폴리팩스 부인> 시리즈, 그리고 카타리나 잉엘만순드베리의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까지 노인 캐릭터들이 활약하는 작품들이 꽤 많았는데, 대부분 노년의 주인공들이 굉장히 매력있고, 개성 넘치게 등장했었다. 그 중에서도 이번 작품에서 만난 102세 베르트 할머니는 단연코 압도적이다. 페미니스트이자 연쇄살인범에 괴팍하기 짝이 없는 독설가라는 캐릭터도 흥미롭지만, 할머니의 삶 뒤편에 있는 '모든 폭력적이고 저급한 남성들에 대한 응징'을 보여주고 한 작가의 시선이 더욱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생 법과 정의를 믿으며 살아왔던 벤투라 형사가 베르트 할머니를 취조하면서, 자신이 항상 존재한다고 믿었던 법과 정의가 그녀를 지켜주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는 것 또한 독자 입장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 실제 현실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말이다.

<루거 총을 든 할머니>라는 강렬한 제목만큼이나 가부장, 여성 혐오를 깨부수는 속 시원한 블랙 코미디로서도 매력적인 작품이고, 그 익살스러운 유머 이면에 있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과 횡포, 아동 학대, 사회적 약자 비하라는 주제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페미니즘 스릴러로서도 멋진 작품이다. 그래서 시종일관 유쾌하게 즐겁게 읽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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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10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로 만들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썸씽 인 더 워터 아르테 오리지널 23
캐서린 스테드먼 지음, 전행선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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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을 건너다본다. 구겨진 방수포 둔덕. 그 아래 살과 피부와 뼈와 이가 놓여 있다. 죽은 지 세 시간 반 된 시체가.

아직 따뜻할지 궁금하다. 내 남편. 만져보면 따뜻할 것이다. 구글로 이미 검색해봤다. 어느 쪽이든 놀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p.17

한밤중 깊은 숲 속에서 혼자 무덤을 파고 있는 여자가 있다. 꽉 찬 두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땅파기를 멈춘 그녀, 구덩이의 깊이는 대략 90센티미터가 조금 넘는다. 성인 남자도 혼자 무덤을 판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대체 왜 그녀는 이 오랜 시간과 힘을 들여,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무덤을 파고 있는 걸까. 그녀의 곁에는 죽은 지 세 시간 반밖에 안 되어 아직 몸이 따뜻한 시체가 놓여 있다. 그녀의 이름은 에린, 지금 파묻으려는 시체는 남편 마크이다. 은행가인 마크와 다큐멘터리 감독인 에린은 뜨거운 연애 끝에 결혼식을 올린 신혼 부부였다. 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나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아마도 당신이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극중 화자인 에린은 이렇게 말하며 독자들을 세 달 전, 그들의 기념일 아침으로 데려간다. 그날은 그들이 처음 만난 날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그들이 서로에게 한 눈에 반했던 순간부터,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과 결혼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보라보라섬으로 신혼여행을 떠났고, 그곳 열대의 바다에서 셀 수 없이 많이 지폐와 다이아몬드, 그리고 한 자루의 권총이 든 가방을 발견하게 된다. 그 아래 깊은 바닷속에는 추락한 비행기와 가방 주인으로 보이는 시체들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뭔가 잘못되어가기 시작한다. 과연 이들을 파멸로 이끄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적응 능력은 놀라울 정도다. 그렇지 않은가? 식물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담겨 있는 그릇에 맞게 자란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때로는 자신의 그릇을 선택할 수 있다. 몇몇은 그러한 기회를 얻는다. 그것은 얼마나 멀리 나아가고 싶은가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는 알렉사를, 그녀의 어머니를, 그들의 결정과 그들의 작별을 생각한다. 때때로 우리가 하는 선택은 놀랄 만큼 아름답다. 현재 상황에 나는 확실히 적응했다. 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거울에 비쳐 사방에서 나를 에워싼 그녀의 모습을 본다. 확고하고, 인정사정없는.      p.251

<다운튼 애비>, <어바웃 타임>의 배우 캐서린 스테드먼의 소설 데뷔작이다. 그녀는 뜨거운 나미비아 사막에서 촬영하던 중 눈부시게 반짝이는 바다를 생각하다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3개월 만에 글을 써 내려가 이 소설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영화배우 리즈 위더스푼은 이 책을 직접 읽고첫 페이지부터 나를 사로잡은 심리스릴러다. 책을 덮을 때까지 멈출 수 없었다.”라고 극찬하며 그녀의 북클럽인 헬로 선샤인 북클럽 도서로 선정했다. 이후 위더스푼의 영화사 헬로 선샤인 프로덕션이 소설의 영화 판권을 사들이면서 영화화 또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갓 결혼한 행복한 커플이 신혼여행 중에 돈과 다이아몬드, 권총이 든 가방을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는 심리스릴러로서 어느 정도 예상대로 진행되는 부분이 있지만 가독성만큼은 매우 뛰어난 작품이었다. 만약 당신이 우연히 돈과 보석으로 가득 찬 가방을 줍게 된다면? 게다가 주인은 이미 죽은 것이 분명하고, 당신이 가져가는 걸 아무도 목격하지 못한다면? 살짝 위험해 보이는 이 행운을 움켜잡을 것인가, 아니면 외면하고 안전한 일상에 머무를 것인가? 차가운 물 속으로 뛰어드는 시원한 표지만큼 올 여름 더위를 잊게 해줄 만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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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하는 뇌 - 뇌과학자와 예술가가 함께 밝혀낸 인간 창의성의 비밀
데이비드 이글먼.앤서니 브란트 지음, 엄성수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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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동물들도 드문드문 창의력을 보이지만 인간만큼 뛰어난 창의력을 보이는 동물은 없다. 무엇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주는 걸까? 인간의 뇌는 감각적 자극과 반응 간의 구역에 보다 많은 뉴런이 있어서 신경회로에 더 많은 추상적 개념과 경로가 생길 수 있다. 더구나 인간은 유난히 사회성이 뛰어나 서로 상호작용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함으로써 서로에게 정신적 씨앗을 뿌린다. 때로 인간의 창의력은 기적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 간의 협력으로 뇌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p.67

2007 1 9일 스티브 잡스는 무대에서 "가끔 혁명적인 제품이 나와 모든 걸 바꿔 놓습니다. 오늘, 애플은 전화기를 재발명하려 합니다." 라고 말한다. 여러 해 동안 이어진 무성한 소문과 추측 끝에 드디어 아이폰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위대한 혁신의 특징이 그대로 담겨 있는 아이폰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었다. 대개 발명은 한 순간에 이뤄진다고 생각하지만, 갑자기 '유레카!'를 외치며 놀라운 계시 같은 걸 받는 건 아니다. 이런저런 사람과 아이디어가 한데 모이면서 힘을 축적해, 몇 개월 혹은 몇 년 또는 몇 십 년을 거치면서 혁신 기술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훗날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창의력은 그저 이것저것을 연결하는 일이라고. 그들은 단지 무언가를 봤을 뿐이고, 거기에 자신의 경험을 연결해 새로운 것으로 합성하는 거라고 말이다.

이 책은 세계적으로 촉망받는 뇌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 그리고 예술과 과학을 접목해 인간 정신을 연구해온 작곡가 앤서니 브란트가 뇌와 창의성의 비밀을 밝혀가는 지적이고 흥미진진한 여정을 담고 있다. 뇌과학자와 음악가라고 하니 어쩐지 너무 다른 분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창의성의 근원을 밝히는 것은 과학적 접근과 예술적 감각이 모두 필요한 것이기도 하니 그야말로 기가 막힌 조합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은 '넷플릭스' 화제의 과학 다큐 <창의적인 뇌의 비밀>의 원작이기도 하다.

우리의 뇌는 신축적이다. 뇌는 딱딱한 돌에 새기듯 고정불변을 지향하기보다 끝없이 그 자체의 회로망을 바꾸며 변화를 추구한다. 우리 뇌는 나이가 들어도 계속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신축성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놀라움을 안겨준다. 뇌 속 회로의 끝없는 재창조로 우리 삶은 날로 노련해지는 작품처럼 발전한다... 만약 인간의 창의성을 보다 잘 이해한다면 교실에서 중역 회의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p.224~225

저자인 뇌과학자와 작곡가가 함께 밝혀낸 인간 창의성의 비밀은 3가지 전략으로 정리할 수 있다. 바로 휘기(Bending), 쪼개기(Breaking), 섞기(Blending)이다. '휘기'에서는 원형을 변형하거나 뒤틀어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난다. 안무가 마사 그레이엄의 혁신적인 안무나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보여준 곡선 형태의 건축물, 영화 <300>에서 슬로 모션과 패스트 모션을 번갈아 사용하며 시간을 뒤튼 것이 그 예가 된다. '쪼개기'에서는 전체를 해체한다. 하나의 원형을 해체해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새로운 창조의 재료를 만드는 것이다. 피카소가 평면을 분해해 그림 조각 맞추기 같은 입체적 형상을 탄생시킨 것, 통신 지역을 셀(cell)로 나눠 현대 휴대 전화(cellphone)의 기반을 만든 것이나, 하나의 화면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세 결정 수백만 개로 이뤄진 LCD TV 기술이 여기에 해당한다. '섞기'에서는 2가지 이상의 재료를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한다. 이는 다른 유전적 조직을 하나의 개체에 담는 유전공학, 과거 음악의 노랫말이나 멜로디 등을 수정하고 섞어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힙합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인간의 창의성은 언제 어디서든 주변의 모든 것을 원재료로 삼아 휘고 쪼개고 섞고자 한다. 이 세 가지 전략은 각자, 때로는 둘 이상 협력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혁신을 완성한다. 인간의 창의성이 특별한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왜 소는 인간처럼 몸을 이용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춤을 안무하지 못할까? 왜 다람쥐는 나무 꼭대기까지 쉽게 먹이를 운반할 수 있는 승강기를 만들지 못할까? 왜 악어는 쾌속정처럼 훨씬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을 발명하지 못할까? 이 책은 그 답이 자신의 기대를 깨뜨리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가 발전해 만들어진일탈하는 창의성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역사 속 창조와 혁신의 비밀,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까지 수많은 창의적 아이디어로 가득한 이 책을 통해 인간 창의성의 비밀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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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의 과학 - 하나의 세포가 인간이 되기까지 편견을 뒤집는 발생학 강의
최영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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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배 속 아이의 발달 과정에 대해서는 정보가 많은데 임신 기간 동안 여성이 겪는 변화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관심이 적습니다.... 그래서 굳이 '엄마의 몸'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습니다. 수정란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최대한 불리는 난자, 자궁에 착상을 하면서 엄마 세포를 먹어버리는 배아, 자궁에만 잠자코 있지 않고 엄마의 혈액 속을 돌아다니는 배아의 DNA까지, 임신은 축복이고 기쁨이라는 미사여구를 걷어내고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품었을 때 벌어지는 일들을 과학의 눈으로 살펴봤습니다.    p.40

발생학이란 하나의 세포가 하나의 개체로 변화하는 과정을 공부하는 생물학의 한 분야이다. 이 책의 저자인 최영은 교수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면 생기는 건 달랑 세포 하나죠. 그런데 태어나는 아기는 사람 형태를 하고 있잖아요. 그 사이에 엄마 배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변화들이 바로 제 수업 내용입니다."라고 발생학이라는 생소한 학문에 대해서 간단하게 정리한다. 이 책은 약 2년 동안 《과학동아》에 연재된 '강의실 밖 발생학 강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발생학이란 낯선 학문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고 이론을 개괄한 데 그치지 않고 인간 배아 복제, 세포 치료제, 암 줄기세포, 인공 장기 등 과학과 의학의 경계에서 주목 받고 있는 이슈까지 망라하고 있어 굉장히 흥미진진하다.

 

이야기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과정부터 시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정자가 이동하는 데 자궁 근육의 도움을 받는 다는 것, 정자뿐 아니라 난자 역시 치열한 경쟁을 거친 존재라는 것 등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그 동안 우리는 정자의 관점에서 수정 과정을 이해해왔다. 그 무대에서 난자는 조연이었고 자궁은 배경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편파적이며, 낡은 정보였던 것이다. 과학은 사실을 밝히는 학문이지만, 진짜 목표는 '점진적으로 편견을 없애는 것'이라는 말이 체감이 되었던 순간이었다.

 

유전학은 예외가 허락되지 않는 뻣뻣한 학문이 아닌, 여러 가지 설명과 가설이 모여서 선보이는 풍부한 맛이 일품인 학문입니다. 하지만 대개는 딱 멘델의 법칙까지만 배우죠. 도미노 블록이 넘어지듯 성별이 결정되는 것도, 염색체 하나가 통째로 꼬깃꼬깃 구겨져 세포의 한쪽으로 치워지는 것도, 세포가 엄마 유전자와 아빠 유전자를 구별하는 것도 모두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쉽게 배울 수 없는, 그래서 있는지도 몰랐던 유전학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p.70

남녀 성별은 어떻게 결정될까? 머리는 왜 몸통 위에 있을까? 손가락 모양이 각기 다른 이유는 뭘까? 왜 엄마의 면역 시스템은 배아의 태반을 공격하지 않을까? 자연 유산의 대부분은 엄마의 행동과 무관하다. 엄마의 몸 속 태아가 항상 선한 천사는 아니다. 등등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운 정보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정자를 밀어 올리는 자궁의 힘, 엄마 세포를 먹어버리는 배아, 난자들의 치열한 경쟁 등 우리의 시작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정자와 난자의 만남부터 우리는 잘못 알고 있었다는 깨달음으로 시작했던 이 책은 하나의 세포가 인간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드라마처럼 그려낸다.

 

배아에서 시작해 머리부터 엉덩이, 등과 배 등 큰 부분들이 결정되고, 뇌와 손가락, 발가락 등 각종 기관이 만들어지고 점점 사람의 형태를 갖추어 간다. 하나의 세포가 인간이 되는 과정은 한마디로 경이로웠다. 두 세포가 만나 하나의 세포가 되고, 다시 이 세포가 하나의 인간으로 발달하는 과정은 셀 수 없이 많은 물질들과 구조와 규칙 속에서 모두가 쉴 새 없이 자기 몫을 해내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우리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시작은 특별했던 것이다.

 

이 책은 실제 연구에 기반을 둔 과학적 사실들을 소개하고 있음에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어 누가 읽어도 거부감 없이 과학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될 것 같다. 선생님도, 인터넷도 알려주지 않는 신선하고, 놀라운 발생학의 세계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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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별이 내리는 밤
메이브 빈치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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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멋져요." 마음이 진정되자 피오나는 마침내 그렇게 말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이 밤을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나도 그래요." 토머스도 그렇다고 했다. "우리는 이것을 공유하는 특권을 누린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벅차서 뭐라 말하지도 못했다.

그 순간 예상 밖의 맑은 목소리로 피오나가 말했다. "저 별들이 아테네에도, 우리의 고향집에도 비치고 있겠죠. 모두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우리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그들은 짐작이나 할까요."     p.163~164

지중해 푸른 바다의 빛깔을 닮은 곳 그리스, 아테네의 고대유물과 산토리니의 그림 같은 풍경, 크레타의 아름다운 카페, 미코노스의 슈퍼파라다이스 비치 등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곳들이 가득한 나라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곳 그리스의 작은 바닷가 마을 아기아안나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아기아안나는 낭떠러지 중간에 만든 마을이라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눈부신 바다와 항구가 보이는 곳이다. 그리고 지금 언덕 아래 항구에서 유람선 화재 사고가 발생해 선홍색과 오렌지색 불길이 아기아안나만에 떠 있는 배를 집어 삼키고 있었다. 푸른 바다 위에서 날름거리는 불길과 검은 연기는 마치 그림 한가운데에 찍어 놓은 그로테스크한 하나의 점처럼 보였다. 언덕 위에 자리한 음식점에서 우연히 함께 끔찍한 비극을 목격하고 있는 이들은 그 광경을 보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다들 언덕까지 올라오는 데 세 시간 정도 걸렸을 정도의 거리라 다시 내려간다고 해도 도움이 될만한 시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냥 설레이고,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할 것 같은 풍경 속에서 예기치 못한 우연으로 커다란 비극을 목격하게 된 여행자들은 그날 어둠이 내리고 별이 하나 둘 떠오를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국적도, 나이도, 직업도, 여행을 온 사연과 각자의 고민도 다른 네 명의 여행자는 어제 이맘때까지 만난 적도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오늘은 모든 문제에 대해 편하게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삶에 관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여행이 줄 수 있는 최고의 마법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스의 아름다운 바다와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누구나 할 법한 고민을 품고 있는 인물들의 삶을 보여 주면서 다정하고, 따뜻하게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소소하지만 그래서 더욱 공감이 가는, 내 주변 누군가에게는 일어났던 일처럼 느껴지는 그런 고민들이 여행이라는 비일상성이 주는 묘한 설레임과 만나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그런 게 정말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행운을 바라는 그 모든 사람들을 봐요. 복권을 사는 사람들,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그 많은 사람들, 별자리점을 보는 숱한 사람들, 네잎클로버를 찾으려고 하거나 사다리 밑으로 지나가지 않는 사람들 말이에요. 다 소용없는 거예요, 안 그런가요?"

"하지만 사람들에겐 희망이 필요해요." 피오나가 말했다.

"물론 필요하죠. 하지만 우리의 행운은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일이 잘될 수도 있고 잘 안 될 수도 있지만, 결정은 우리가 내리는 거죠. 앞에 검은 고양이가 지나간다거나 전갈자리로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 바깥에서 작용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p.307

독일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했던 엘자는 방송국 대표와 사귀다 그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깨닫고 직장을 그만 뒀다. 그리고 남겨 두고 온 어떤 것도 그리워하지 않으며, 장기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미국 대학의 영문학 교수인 토머스는 안식년을 맞아 일 년간의 여행을 계획했다. 사실 이혼한 아내가 재혼을 하게 되어, 전처와 아들이 조금 더 편하게 새로운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주고 있는 중이었다. 아일랜드의 간호사인 피오나는 남자친구를 반대하는 가족들로부터 도망쳐 그와 함께 여행 중이었다. 문제는 함께 여행 중인 남자친구 셰인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것과 그녀 만이 그런 그를 굳게 믿고 있다는 거였다. 영국인 청년 데이비드는 오직 사업과 돈 버는 데만 관심 있는 부모로부터 도망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세계여행 중이었다. 이렇게 너무 다른 네 여행자와 이곳의 마을 사람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각자의 삶을 괴롭히는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그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과는 조금씩 변화하고 성장해나간다.

작년 겨울에 <그 겨울의 일주일>이라는 작품으로 마음 시린 계절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이야기를 보여주었던 작가 메이브 빈치가 이번에는 눈부신 여름 풍경 같은 작품으로 돌아왔다. 다양한 삶의 모습을 그리며 인물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토닥이며 위로해주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그 마음이 페이지마다 느껴지는 작품이다. 누구나 살면서 삶의 전환점이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마련이다. 이 작품 속 네 명의 인물들처럼 말이다.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선택하는 순간 다시는 뒤로 돌아갈 수도, 선택을 번복할 수도, 취소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인생이고, 그럴 때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그 선택은 달라질 수도 있다. 누구도 혼자여서는 안 되는 밤, 서로의 곁을 지켜준 네 여행자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 여름밤이 선사하는 마법 같은 시간을 경험해 보자. 그리고 당신 곁에는 누가 있는지 떠올려 보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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