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바캉스 - 제2회 웅진주니어 그림책 공모전 우수상 웅진 모두의 그림책 23
심보영 지음 / 웅진주니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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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반복되는 하루, 오늘 아침도 만원 지하철에 끼여 헐레벌떡 출근하고 보니 또 지각이다. 상사에게 눈치를 받고 시작하는 아침, 어제와 같은 오늘이다.

 

"자네, 나 대신 어디 좀 다녀오지옹."

하지만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곤 하는 것이 또 인생이다. 바로 야옹 사장님으로부터 바캉스 티켓을 받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식당 바캉스 패키지' 여행을 떠나게 된다.

 

 

아침부터 바쁘게 보내지만, 뭐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것 없는 하루. 아마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숱하게 겪는 일상이 아닐까 싶다. 그러던 어느 날, 전혀 예상치 못한 여행 티켓이 생긴다면 어떨까? 지긋지긋한 일상을 잠시나마 벗어 던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게다가 이 여행 티켓은 어쩐지 수상하지만, 또 어딘가 재미있어 보인다. 여느 패키지 여행이 다 그렇듯 이 여행 또한 온천에서의 휴식과 공연 감상, 쇼핑과 꿀잠을 잘 수 있는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따끈따끈한 붕어빵 버스를 타고 출발하는 이 여정에선 뭔가 맛있는 냄새가 난다.

 

 

 

구불구불 골짜기를 따라가서 만나게 되는 풍경은 마냥 신기하다. 꽃게와 어묵이 가득 들어 있는 향이 좋은 어묵 온탕과 아삭아삭 오이와 반숙 달걀이 고명으로 얹어진 시원한 냉면 냉탕에서 피로를 풀고, 시금치와 애호박, 버섯과 반숙 달걀이 노른자가 터질 정도로 열정적인 공연을 선사한다. 귀여운 밤 가방과 새콤 달콤 딸기 가방, 가지 모양 부츠와 바삭바삭한 돈까스 소파 등을 보며 즐겁게 쇼핑도 한다.

 

무엇보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마음에 쏙 드는 침대를 골라 쉴 수 있는 꿀잠 시간. 폭신폭신한 식빵 침대, 달달한 계란말이 침대, 알록달록한 피자 침대, 따끈한 오무라이스 침대까지... 이불을 덮고 먹을 수도 있는 귀여운 침대 속에 들어가 잠시 일상 속 불안과 걱정은 잊어 버리고 꿈나라로 떠나 보자.

 

이 작품은 제2회 웅진주니어 그림책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이다. <대단한 수염> <! 내 모자> 등을 쓰고 그린 심보영 작가는 어머니가 오랫동안 운영했던 식당에서 바캉스를 즐기곤 했다고 한다. 지치고 힘들 때면 그곳에서 언제나 맛있는 이불을 덮고 꿀잠을 자곤 했다고 말이다. 그 따스한 온도에서 비롯된 유쾌한 상상이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신선한 그림책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보면 너무 좋아할 만한 그림동화이지만, 어른들에게도 힐링이 되는 마법 같은 시간을 선사할 그림책이기도 하다.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음식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게 이야기 속에서 재탄생하는 지 보는 것도 흥미롭고, 피곤하고 힘겨운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판타지로서도 매력만점이다. 특히나 바쁜 일상에 치여 휴가 조차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이렇게 맛있는 여행이라면, 책을 읽는 동안 만이라도 우리의 근심, 걱정들을 모두 날려 버려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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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친구 - 제2회 웅진주니어 그림책 공모전 대상 웅진 모두의 그림책 22
사이다 지음 / 웅진주니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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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잔디 빛깔의 표지가 '풀친구'라는 예쁜 이름처럼 색감으로 먼저 다가오는 그림책이다. 첫장을 펼치면 파릇파릇 잔디들이 페이지 가득하다.

"우리는 잔디, 여기에 산다."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고양이가 뛰어 다니고, 새들도 날아 다닌다. 잔디밭 한 곳에서는 스프링클러가 시원하게 물을 뿜어낸다. 이곳에선 결코 목마를 일이 없다고 말하는 잔디들의 말이 들려 온다. 주기적으로 물을 주고, 관리를 해주는 곳이니 아마도 인공적으로 조성된 잔디밭일 것이다.

잔디들은 시원한 물을 마시며 쑥쑥 자라나고, 기분 좋은 바람에 민들레 홑씨가 날려 오기도 한다. 그리고 애기똥풀, 토끼풀, 질경이, 망초 등이 잔디의 친구들이다. 그리고 조금 낯선 친구들인 개비름, 소루쟁이, 까마중, 방동사니 등도 있다. 고양이와 강아지는 뛰어 놀며 여기저기 응가를 하고, 그것들은 잔디들에게 자연 거름이 된다.

, 그리고 잔디들이 덥수룩하게 자라면 어김없이 나타나 이발을 해주는 친구도 있다. 화려한 형광 빛깔의 옷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친구가 오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기자기하고 예쁘고 귀엽게 시작되었던 이야기의 결말은 깜짝 놀랄 만큼 당혹스럽다. 그리고 그만큼 인상적인 여운을 남겨준다.

이 작품은 제2회 웅진주니어 그림책 공모전 대상 수상작이다. 그 동안 <가래떡>(2016, 반달) <고구마구마>(2017, 반달)를 통해 관습적인 상상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이고도 인상 깊은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 온 작가, 사이다의 작품이다. 아주 짧은 이야기 속에 현실이 반영되어 있고, 아름다우면서도 뭔가 낯선 느낌이 드는 그림들도 작품이 가진 목소리를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자본이 건설하고 조성하는 인공 낙원을 위해 사라져야만 했던 수많은 것들에 대해 돌아보게 만드는 그림책이었다. 점점 사라지고, 망가지고, 달라지는 우리의 환경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여기에 산다" 라고 말하는 수많은 자연 속 그것들을 우리가 삶의 편리함을 위해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나도 모르게 우리가 누구와 함께 살고 있는지를 잊어 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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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의 윤무곡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4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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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바 아니다. 어차피 과거가 알려지기 전부터 악덕 변호사 취급을 받았다. 예전의 악행이 폭로돼도 큰 변화가 있는 갓은 아니다. 미코시바는 새삼 인간 인식의 얄팍함을 떠올렸다. '악덕'의 관을 고매한 변호사에게 씌우면 교활이 되고, 범죄자에게 씌우면 흉악이 된다. 빈곤한 상상력이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데 방해가 되는 줄도 모르고 희희낙락 떠드는 모습은 우스꽝스럽다고 할 수밖에 없다.    p.109

<속죄의 소나타>,<추억의 야상곡>, <은수의 레퀴엠>에 이어지는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그 네 번째 작품이다.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는 아마도 유사한 장르의 시리즈물 주인공 중에서 가장 파격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그는 변호사가 되기 전 엽기적인 살인으로 시'체 배달부'라고 불리던 열네 살 소년 살인범이었다. 죄의 무게와는 상관없이 어린 나이 때문에 의료 소년원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만난 교관 이나미 덕분에 속죄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인생의 경로가 달라졌다. 덕분에 의료 소년원은 겨우 5년 만에 가퇴소했고, 3년 뒤 스물두 살 때 사법고시를 한 번에 합격해 변호사가 된 것이다. 잘 나가는 변호사로서 명성을 쌓았지만, 그 명성이라는 것이 변호사라기보다 사기꾼에 가깝고 논리에 속임수를 덧붙이는 등 거의 법 이론 울타리 밖에 있는 전법으로 승리를 거머쥔다는 거였지만 말이다. 거기다 돈 많고 질 낮은 범법자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변호해 주는 대가로 거액의 보상을 요구하는 악질 변호사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그는 시리즈 두 번째 작품에서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과거가 밝혀져 '시체 배달부'라는 예전의 별명을 되찾게 되었다. 그의 과거를 알게 된 모범적인 기업들이 연이어 고문 계약을 해지하는 바람에, 임대료를 내기 어려워 조금 저렴한 곳으로 사무소도 이전을 해야 했고 말이다. 과거 범죄 이력이 만천하에 드러난 덕분에 멀쩡한 의뢰인은 하나 둘 떨어져 나갔고, 큰손 고객이라고 하면 광역 폭력단 고류회 정도만 남아 있는 상태였지만 여전히 그는 변호사로 나름의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시리즈 세 번째 작품에서 의료소년원 시절 교관이었던 이나미가 살인 혐의로 체포되어 미코시바는 자처해서 이나미의 변호를 맡겠다고 나섰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 동안 소년원생들에게 가르쳤던 대로 자신 또한 벌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반드시 처벌받겠다고 주장했고, 악덕 변호사에게는 최악의 의뢰인이 되고 만다. 그리고 시리즈 네 번째 작품에서 그는 그 당시보다 더한 '최강의 의뢰인'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재혼한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자신의 친어머니 이쿠미의 변호를 맡게 된 것이다. 

“그런 괴물을 낳은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괴물을 그대로 괴물로 키운 건 부모니까. 하지만 정작 그 괴물이 고작 열네 살이었던 탓에 재판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어느 소년원에 들어갔고 결국 아무 죄도 묻지 못했다지 뭐요? 살해된 여자아이와 그 가족들만 딱할 따름이지. 그럼 적어도 범인 대신 부모가 책임을 지는 게 도리 아니겠소?”    p.177

이른 아침, 한 저택에서 '남편이 거실에서 죽어있다'라는 신고가 접수됐다. 신고자는 아내였고, 유서를 남겼다는 점에서 경찰의 최초 견해는 자살이었지만 그 뒤 이어진 수사로 타살 혐의가 떠오른다. 남편이 부자였고, 식구도 아내뿐이라 재산을 노리고 접근해 재혼하고, 살인에 이르게 되었다는 의심이 든 것이다. 물론 아내는 자신이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고 하고 있으며, 그들은 작년에 구혼 파티에서 처음 알게 되었고, 둘 다 재혼이었다. 딸은 어머니의 변호사를 구하려고 돌아다녔지만, 그녀가 오래 전 '시체 배달부'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고 모두들 의뢰를 거절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수십 년 인연을 끊고 살아온, 쌓이고 쌓인 원한으로 말도 섞기 싫은 오빠인 미코시바 레이지를 찾아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름을 바꾸고 과거를 버린 채 살아왔던 미코시바는 30년 만에 여동생 아즈사와 어머니 이쿠미를 만나게 된다. 과연 이쿠미는 재혼한 남편을 자살로 위장해 살인을 한 것일까. 과연 미코시바는 자신이 지은 죄를 짊어진 가해자 가족의 비참한 과거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과연 모자 2대에 걸친 살인 계보,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공식이 증명될 것인가.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에 유전적 요소가 작용하는가

시리즈가 거듭되면서 한 번 악인은 영원히 악인인가, 진정한 속죄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좀처럼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질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나카야마 시치리는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를 통해서 최강이지만 최악의 변호사인, 선과 악의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과연 선천적인 악인으로 태어난 것 같았던 그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변호사라는 직업으로,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인지부터, 법으로 심판 받지 않은 죄는 법 이외의 것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정의와 악, 죄와 벌, 그리고 속죄라는 것의 의미에 생각해 보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번 작품에서는 '살인자의 어머니가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사실로 살인 행위의 유전자가 대대로 이어지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물론 극중 미코시바 레이지는 자신이 '시체 배달부'가 된 것이 천성이 아니라 부모에게 기인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앞에서 어이없는 소리라며 비웃고 분노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마치 같은 선율을 반복하는 윤무곡 처럼' 끔찍한 살인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 작품은 시체 배달부의 어머니도 살인자일까,라는 미스터리 자체도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있지만, 냉정하고 비인간적인 괴물 변호사가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변호할 것인가,라는 법정극으로도 매우 흥미진진했다. 탄탄한 구성과 독특한 캐릭터,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빠른 전개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어 주는 긴장감도 여전했다. 시리즈 다음 작품은 '복수의 협주곡'이라는 제목으로 미코시바에게 늘 싫은 소리를 들어도 그만두지 않고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변호사 사무소의 사무원 요코의 이야기가 그려진다고 하니 매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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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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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이는 추운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혼자가 된다, 마르타와 분리되어, 다른 모든 사람과 분리되어 혼자가 될 것이며, 언제나 혼자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 물고기, , 그릇,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올라이는 생각한다     p.15~16

노르웨이의 작은 해안가 마을에서 늙은 어부 요한네스는 잠에서 깨어난다. 오늘은 뭘 해야 하나? 아내가 죽은 후로는 마치 모든 온기가 그녀와 더불어 떠나버린 듯 집안이 너무도 썰렁해졌다. 온종일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을 테니, 서쪽 만으로 산책이나 가볼까, 날씨가 그리 궂지 않으면 배를 타고 가까운 바다로 나가 낚시를 조금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매일 아침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날 역시 '모든 것이 여느 때와 같았다'. 그는 커피 물을 끓이고, 빵을 썰어 버터를 듬뿍 바르고는 브라운 치즈를 두툼하게 잘라낸다. 늘 먹던 음식인데, 도통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어쩐지 원래 그대로이면서 전혀 다른' 아침이었다. 그렇게 이 작품은 '여느 날처럼 모든 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 날은 '뭔가 여느 때와 사뭇 다른, 모든 것이 과거 어느 때와도 다른' 날이기도 하다.

현재 유럽을 넘어 전 세계에서 왕성하게 활동중인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가 2000년 발표한 소설이다. 고독하고 황량한 피오르를 배경으로 평범한 어부가 태어나고 또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을 꾸밈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작품의 시작은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어부인 올라이는 늙은 산파 안나에게 말한다. '사내아이라면, 요한네스라고 부를 겁니다'라고. 그에겐 딸이 있었지만 아내인 마르타는 그 뒤 다시는 태기를 보이지 않았고, 세월은 그렇게 흘러 갔다. 신이 더 이상 그들에게 아이를 보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침내 그녀가 아들을 낳으려 하는 중이다. 그는 생각한다. '이번에는 아들이 확실해, 확실치 않은 건 단지, 아이가 살아서 이 세상에 태어날 것인가 하는 것뿐, 이 험한 세상에, 문제는 그것뿐이다'라고. 그리고 잘생긴 사내아이가 태어나고,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하다. 아기 요한네스의 탄생을 담고 있는 짧은 서두가 지나 다음 장에 이르면 요한네스는 어느덧 노인이 되어 있다. 요한네스는 아내와 일곱 남매를 두었고, 그들도 각자 결혼해서 손주도 여럿이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의 하루가 막 시작된 참이다.

자 기운 내라고, 그가 말한다.

할 수 있어, 그가 말한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선 채로 고개를 끄덕일 뿐 더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가만히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자 페테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역시 늙는다는 건 고약한 일이야, 요한네스가 말한다.    p.73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등장 인물이 많은 것도 아니며, 화려한 미사여구로 치장한 이야기도 아닌데 이상하게 시종일관 눈을 뗄 수가 없는 마법 같은 작품이었다. 욘 포세는 연극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로 국내에도 희곡들만 출간되어 있다. 최근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꾸준히 거론되는 그는 희곡을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입센 다음으로 가장 많은 작품이 상연된 노르웨이 극작가로서 현대 연극의 최전선을 이끌고 있으며, 언어가 아닌 언어 사이, 그 침묵과 공백의 공간을 파고드는 실험적 형식으로 ‘21세기 베케트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짧은 페이지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연극의 독백처럼 천천히 읽히며, 한 사람의 생을 압축적으로 담아내고 있으면서도 과장되지 않게 담백하게 쓰여 있어 쉼표와 쉼표 사이 여백이 깊이 있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처음에는 마침표 없이 띄어쓰기와 쉼표로 이어지는 문장들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 작가 특유의 리듬이 특별한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어 어느 순간 그 나직하고 고요함 속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게 된다.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임을 보여주는 놀라운 작품이다. '어쩐지 모든 것이 다르면서 여느 때와 같고, 모든 것이 여느 때와 같으면서 동시에 다르다' 라는 문장으로 이야기 전체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하고도 아름답고, 슬프면서도 경쾌하고, 쉬우면서도 어려운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장 단순한 언어로 만들어낸 가장 심오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터넷 서점의 별점 방식을 별로 선호하진 않지만, 이 작품은 별점 다섯 개를 줘도 뭔가 부족하다는 기분이 든다. 별점 다섯 개 이상 주고 싶은, 수십 권 구매해서 주변에 선물해주고 싶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여러 번 필사하고, 문장들을 모조리 외우고 싶은 그런 작품이다. 올해 단 한 권의 책만 읽어야 한다면 무조건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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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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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방을 나가고 나서 침대에 누워 과거를, 오빠와 어머니와 내가 입술보다 마음으로 이야기할 때가 더 많았던 세월을 샅샅이 훑어 보았다. 은수카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것이 은수카에서 시작됐다. 이페오마 고모의 은수카 집 베란다 앞에 있는 작은 정원이 침묵을 밀어 내기 시작하면서. 지금 내게 오빠의 반항은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졌다.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쿠데타 이후에 정부 광장에서 녹색 잎을 흔들던 군중이 외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자유.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    p.27

 

고등학생 캄빌리는 나이지리아에서 식음료 사업체를 운영하는 아버지를 두었기에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권위와 폭력을 일삼으며 가족들에게 무조건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인물이었다. 어머니는 가정폭력으로 인해 수차례 유산을 했고, 최근에도 어렵게 아이를 가졌다 같은 일을 겪는다. 캄빌리와 오빠인 자자 역시 아버지가 짜 놓은 일과표 대로 움직여야 했고, 아버지의 명령은 무엇이든 따라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자가 영성체를 하지 않겠다고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캄빌리는 이 사건을 '우리 집이 풍비박산 나기 시작'했다고 여겼다. 그녀의 일상은 이 사건 이후로 엉망이 되지만, 그 과정에서 캄빌리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기 시작한다.

엄청난 고생 끝에 이룬 자수성가, 가톨릭교로 귀의한 원리주의자인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행하는 많은 것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딸의 발에 뜨거운 찻물을 붓고, 반항적인 행동을 했다고 발로 걷어 차는 등 폭력적인 면모도 그렇지만, 일상의 소소하지만 불합리한 명령들, 규칙들 역시 그러하다. 가족 내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사회적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고, 봉사와 헌신으로 추앙 받으며,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투사이기도 하니 말이다. 캄빌리는 다른 도시에 사는 고모네 가족을 만나면서 자신과는 다르게 자유롭고 자주적인 사촌들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억압적인 가부장제 속에서 침묵하던 소녀가 주체적인 자아를 찾아 나서는 여정은 만만치가 않지만 말이다.

 

 

 

성 베드로 예배당에는 성 아녜스 성당에 있는 것 같은 커다란 촛대나 화려하게 장식된 대리석 제단도 없었고, 여자들이 머리카락을 가능한 한 많이 가리게끔 두건을 묶지도 않았다. 봉헌 행렬을 위해 나올 때 보니 어떤 여자들은 속이 비치는 검은 베일을 머리에 쓰기만 했고 어떤 여자들은 바지를, 심지어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버지가 봤다면 노발대발했을 것이다. 여자가 하느님의 집에서 머리카락을 보이면 안 되지. 여자가 남자 옷을 입으면 안 되지, 특히 하느님의 집에서는! 아버지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p.291

 

이 작품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엄마는 페미니스트>로 세계에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전한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데뷔작이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문단의 격찬을 받으며 영미권 문단에 "아프리카 문학의 거장 치누아 아체베의 21세기 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고 한다. 전부터 궁금했던 작가였는데, 이번에아디치에, 소설읽기온라인 서포터즈로 만나게 되었다.

 

캄빌리의 일상이 마치 소설로 보는 나이지리아식 「스카이 캐슬」을 방불케 할 정도라는 소개 문구처럼, 이 작품 속에서 교육에 집착하는 아버지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녀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교육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본문에 나이지리아 토착어들이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 그리 두껍지 않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서사 자체가 쉽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인 면에서 우리와 너무도 먼 나라인 나이지리아의 그것이 한국인들에게 공감이 되거나 이해될만한 여지가 많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새로운 가족의 형태, 그리고 진정한 교육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아디치에, 소설읽기두 번째 작품인 '아메리카나'에 더 기대를 갖고 있다. 선명한 색상 대비의 인상적인 표지 때문이기도 하고,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을 발랄한 페미니즘으로 꼬집고 있다고 하니, 더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젊은 포토그래퍼 김강희와 콜라보레이션한 표지로 책을 읽기도 전부터 이미지와 작품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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