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냐도르의 전설 에냐도르 시리즈 1
미라 발렌틴 지음, 한윤진 옮김 / 글루온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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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 그는 널 무너뜨리기 위해 뭐든 할 거야. 내 책임이 크다. 네게 강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어."
트리스탄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아그네스와 내게 그런 충고를 했을 때 난 그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했어. 엘프들이 우리의 자유를 앗아갔으니까. 하지만 우리의 긍지와 용기만큼은 그들에게 빼앗겨선 안 돼. 그러니까 처음부터 강해지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은 없었던 거야."     p.197

 

인간이 에냐도르 대륙을 통치하던 먼 옛날에는 네 군주가 얼음처럼 차디찬 북부, 풍요로운 남부, 황량한 동부, 수산자원이 풍부한 서쪽 해안을 나누어 다스렸다. 하지만 대륙 전체를 지배하려는 욕망에 부푼 군주들의 탐욕이 위대한 마력을 지닌 대마법사와 만나 엘프, 드래곤, 데몬, 그리고 인간이라는 네 종족을 만들어 내게 된다. 반은 사람으로, 반은 짐승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형상으로 살아가는 드래곤은 허공에서 화염을 다루는 능력으로 다른 민족을 습격하고, 불태우고 파괴했다. 치명적인 눈빛만으로 타 종족을 굴복시킬 수 있는 데몬은 추악한 형상이었지만,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단단한 가죽의 피부로 인해 드래곤의 화염도, 인간의 칼도 해칠 수 없는 존재였다. 누구보다도 아름답지만 도도하고 쌀쌀맞은 엘프는 어떤 가죽과 살도 베어 낼 수 있는 강철 검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하여 드래곤은 엘프를, 엘프는 데몬을, 데몬은 드래곤을 공격하는 끝 모를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인간에게는 다른 종족으로부터 그들을 지킬 수 있는 마력이라는 능력을 얻었지만, 그 능력은 인간들 중 일부에게만 이어졌고 나머지는 그저 평범하게 살아 갔다. 그로 인해 인간은 엘프에게 복속되어 노예처럼 살 수밖에 없었는데, 매번 장남으로 태어난 인간은 엘프에게 징발당해 드래곤과의 전쟁터로 끌려갔다. 드래곤과 맞서 싸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리 없었고, 죽음이라는 예외 없는 결과에 사람들은 자신의 아들을 보내지 않기 위해 고아를 데려다 키워 엘프에게 선발되도록 했다. 이야기는 고아로 자란 열일곱 트리스탄이 엘프에게 징집되어 끌려가면서 시작된다. 트리스탄과 친형제처럼 자란 카이는 마법사였고, 인간들 중에 마법사를 색출하려는 엘프에 의해 그의 동생인 열다섯 아그네스가 대신 엘프족의 포로가 되고 만다. 결국 카이는 홀로 아그네스와 트리스탄을 구출하러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고, 아그네스는 마법 능력을 검증받기 위해 엘프의 성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엘프에 의해 수백 년 동안 죽지 않는 저주에 걸린 채 감금되어 있는 마법사 엘리야를 만나게 된다.

 

 

이조라는 그의 목소리,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 좋았다. 이런 감정은 그녀에게 몹시 낯설었고, 뭐라 말할 수 없지만 마치 마법 같았다. 긴 겨울 끝에 처음 본 따스한 햇살처럼. 해가 뜨고 아침이 되면 아엘프스탄의 협곡에 자욱하던 안개가 사라지고 다시 새날이 찾아오는 것처럼. 하지만 이조라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로리안이 이해되지 않았다. 제게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에서 머리카락이 뒤로 흘러내리자 이조라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달았다. 이 매혹적인 젊은 남자는 엘프가 아니었던 것이다!     p.401~402

 

데몬은 엘프에게 대항하기 위해 드래곤을 의지 무력화 상태로 만들어 이용했고, 엘프는 드래곤에 맞서기 위해 인간을 노예로 삼아 맞섰다. 최후에 누가 승리할지 아무도 모르는 끝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고, 데몬과 드래곤, 엘프, 그리고 인간은 수 세기에 걸친 전쟁의 참화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철전지 원수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데몬, 드래곤, 인간, 엘프가 진실이라는 하나의 핏줄로 이어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다는 예언이 있었다. 바로 불구대천의 숙적이 서로 표식을 나누어 가져 만들어지는 '파수꾼'이라는 존재가 각 왕국의 지배자가 되어 다스리게 된다면, 에냐도르에도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는 거였다. 제 종족과 적대적 관계에 놓인 종족의 대리인이 남긴 상처를 통해서, 인간과 엘프, 드래곤, 데몬의 파수꾼이 탄생하게 되는데, 과연 네 종족의 젊은이들은 고대의 숨겨진 예언대로 에냐도르의 평화를 위해 화합할 수 있을까. 이야기는 곧 출간될 에냐도르 시리즈 두 번째 이야기인 <에냐도르의 파수꾼>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독일의 판타지 작가 미라 발렌틴의 에냐도르 시리즈는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로 만나게 되었다. 작가는 도서박람회에 작품 속 등장 인물의 차림으로 참석할 정도로 늘 판타지 세계에 산다고 한다. 저널리스트로 일하다 이 작품의 큰 성공으로 인해 전업 작가가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판타지 덕후다운 면모가 곳곳에서 느껴지는 작품이라 대단히 재미있게 읽었다. 마법사와 드래곤이 등장하는 등 정통 판타지 작품다운 요소들이 가득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게 만드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전혀 감정이라는 것을 느낄 수 없는 차가운 엘프가 너무도 평범한 인간과 사랑에 빠지는 로맨스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모험 서사가 중심 플롯을 이루고 있고, 성격도 능력도 각각 다른 다양한 캐릭터들이 매력을 발산하고 있어 지루할 틈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단, 이 작품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재미 그 이상은 아닐 경우에 말이다. 무의미한 폭력, 빈곤과 비탄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잠시나마 소설 속 세계에서 위안을 구하는 일에 작품성과 의미와 가치를 굳이 따질 필요야 없지 않겠는가.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작품이 굉장히 재미있다는 것, 그리고 첫 번째 이야기를 읽었다면 반드시 두 번째 이야기도 읽고 싶어질 거라는 것이다. 판타지라는 장르가 주는 가장 큰 장점은 일상적인 풍경을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매혹적인 상상의 세계 안에 가져다 놓기 때문일 것이다. 자, 당신을 쉽고 재미있는 판타지의 세계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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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시대는 끝났다 - 기술 빅뱅이 뒤바꿀 일의 표준과 기회
대니얼 서스킨드 지음, 김정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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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많은 사람이 두려움에 떨었는데, 왜 지난날 기술 진보가 대량 실업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답은 이렇다. 지난 몇백 년 동안 실제로 일어난 일을 되돌아볼 때, 기술 변화가 일거리에 미친 악영향 즉, 우리 선조들을 불안에 사로잡히게 했던 폐해는 전체 이야기의 절반일 뿐이다. 물론 어떤 업무에서는 기계가 인간을 밀어냈다. 하지만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자동화되지 않은 다른 업무에서는 인간을 보완했으므로, 그런 일을 맡을 인력의 수요를 늘렸다. 기술과 일의 역사를 통틀어 보면 언제나 서로 다른 두 힘이 작용했다.     p.35

 

오늘날 세계는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이 우리의 삶 전반을 송두리째 바꾸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노동자 가운데 30퍼센트가 언젠가는 자신의 일자리를 로봇과 컴퓨터가 차지하리라고 믿고 있고, 영국 노동자의 30퍼센트도 20년 안에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믿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왜 이런 두려움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저자인 대니얼 서스킨드는 아버지인 리처드 서스킨드와 함께 <4차 산업혁명 시대, 전문직의 미래>에서 기술이 화이트칼라 노동자에 미칠 영향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왔던 지금까지의 세계는 끝났으며, 그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잘 사느냐’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첨단 기술과 인공지능은 인간이 잘 살기 위해 만들어낸 기술이, 언젠가는 인간의 삶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자각과 더불어 멀지 않은 미래에는 정말로 기계가 인간을 넘어설 수 있는 순간도 오게 될 거라는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는 흔히들 4차 산업혁명에 대해 '인공지능에 의한 일자리 감소와 빈부 격차 심화'라고 이해한다. 실제로 세계경제포럼에서도 앞으로 수백 만개의 일자리가 감소할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고 말이다. 전문가의 예측대로 10년이나 20년 후에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면 일자리가 줄어든 시대에서 개인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 책이다. 과학 기술이 노동 생태계를 어떻게 바꿀 지와 함께 앞으로 다가올 기술적 실업에 정부, 기업, 개인적 차원에서 어떻게 대처할지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일이 줄어든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정확히 말하기는 무척 어렵다. 얼버무리고 넘어가겠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정말로 그 시기를 모르겠다. 그런 세상이 다가오는 속도는 상상도 못하게 많은 개인과 기관이 경제 무대에서 저마다 자기 역할에 따라 차곡차곡 쌓아 가는 행동과 조치에 따라 다를 것이다. 몇 가지만 예로 들자면, 발명가들은 기술을 만들고, 회사는 그 기술을 활용하고, 노동자들은 기술과 어떻게 상호작용할지를 판단하고, 국가는 기술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파악한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확실히 아는 사실이라고는 기계의 성능이 오늘보다 내일 더 향상하여 한때 인간이 수행했던 업무를 더 많이 차지하리라는 것뿐이다.     p.180

 

기계의 능력이 제아무리 엄청나게 향상해도 인간에게 얼마쯤은 남은 업무가 있을 것이다. 자동화할 수 없는 업무, 자동화할 수는 있어도 수익성이 없는 업무, 자동화할 수 있고 수익성도 있지만 사회가 구축한 규제나 문화 장벽 때문에 여전히 인간에게만 허용되는 업무들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존재하는 많은 일자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아직 상상하지 못한 일자리를 포함하여 새로운 일자리가 설립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단, 인공지능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며, 일이 줄어든 세상은 어마어마하게 부를 가진 집단과 인적 자본도 거의 없는 집단으로 나눌 것이라고 경고한다.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경제적 풍요를 얻던 시대는 끝났다는 얘기다.

 

이 책은 오늘날 일을 하고 임금을 받는 사람들에게 기술 진보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실제로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지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20세기와 그 이전, 그리고 21세기의 노동의 시대를 살펴보며 일의 미래를 둘러싼 기존의 주장들을 짚어 본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21세기에 기술적 실업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그려보고, 일자리가 줄어든 세상 때문에 생기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정부, 기업, 개인적 차원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얻었던 주요 원천이 사라질 때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할까에 대한 사유가 매우 흥미로웠다. 코앞에 다가온 미래는 일이 곧 능력을 뜻하던 지금까지의 세계관을 비웃으며, 삶의 즐거움과 목적을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우리는 삶의 의미를 일과 직업에서만 찾던 시각을 버리고, 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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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봉우리
유메마쿠라 바쿠 지음, 이기웅 옮김, 김동수 감수 / 리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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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미터를 넘으면 한 걸음 내딛고서 1분 가까이 숨을 헐떡이고 다시 한 걸음 내딛는, 그런 반복이 무한히 연속된다. 인간이 순응할 수 있는 고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6,000미터 부근으로 알려져 있다. 즉 아무리 고도에 잘 순응했다 하더라도, 그 고도를 넘어서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잠만 자더라도 점점 체력을 소모하게 된다. 6,000미터를 넘는 고도에서 오랫동안 체재하면 대량의 뇌세포가 죽는다. 히말라야 등반이란 생물에게 있어 극한상황을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p.466~467

 

후카마치 마코토는 일본에서 에베레스트를 함락하기 위해 찾아온 원정대 소속의 카메라맨이다. 원정대는 희생자를 둘이나 내고도 등반에 실패했고, 멤버들은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고 그는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를 정처 없이 걷는 중이었다. 대학을 막 졸업한 스물한 살 때 처음 와보고, 살, 서른다섯 살을 거쳐 마흔이 된 지금 네 번째 방문하는 거였다. 그는 우연히 한 등산용품점에 들어가게 됐는데, 그곳에서 렌즈에 금이 가 있는 낡은 카메라 한 대를 발견하게 된다. 묘하게도 신경이 쓰이는 카메라였고,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기분 마저 들었다. 설마.. 했던 그 카메라는 맬러리가 1924년 등반에서 촬영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코닥 카메라였다. 만약 그 카메라에 있던 필름을 구해서 확인할 수만 있다면 히말라야 등반사가 뿌리째 뒤바뀌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대영제국이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최고봉을 밟기 위해 원정대를 보낸 건 1921년이었다. 원정대는 첫 등정 시도에서 8,225미터 고도까지 이르렀고, 다음에는 8,326미터까지 올랐다. 인류가 최초로 체험하는 고도였지만, 이들 모두 정상을 밟는 데는 실패했다. 원정대가 세 번째로 도전한 것은 1924년이었는데, 맬러리와 어빈이 정상 공략에 나섰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해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이후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게 된 건 29년이 지난 1953년이었다. 그런데 만약 맬러리와 어빈이 먼저 정상에 도달했던 거라면 어떨까.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은 거의 정상 직하라 해도 좋을 장소였고, 그들이 어떤 사고를 만나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고가 등정 전인지, 등정 후인지 그 누구도 알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맬러리가 정상에 섰다면 반드시 카메라로 촬영을 했을 것이고, 이는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될 것이다. 멜러리의 시체에 매달린 배낭 속에 카메라와 필름이 발견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전 세계 산악계를 뒤흔들 최대의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바로 그 카메라에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카마치는 그 비밀을 좇으면서 한때 일본 산악계의 전설로 불리던 하부 조지를 만나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전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장소에서도 눈사태가 일어난다. 경사면에 눈이 쌓이면 아무리 완만한 경사면이라 할지라도 눈사태는 일어나기 마련이라며 우리들에게 가르치려는 자가 있다... 아주 잠깐 순간적으로 인간은 방심한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미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어쩔 수 없다. 인간으로서는 선택할 여지가 없다. 누가 그 순간이 어느 때라고 선택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그 순간은 신이 선택한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p.701

 

일본에서 720만 부가 판매된 ‘음양사’ 시리즈의 작가 유메마쿠라 바쿠가 구상부터 집필까지 20년의 시간을 들여 완성해낸 산악 소설의 전설적인 걸작이다. 영화와 만화로도 만들어졌었고, 국내에서는 2010년에 출간된 적이 있다. 400자 원고지 1,700매라는 압도적인 분량은 이번 개정판 버전으로 페이지수가 824페이지에 달한다. 묵직한 책의 무게만큼이나 작가가 오랜 시간을 걸려 쓴 세월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 그만큼의 깊이가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유메마쿠라 바쿠는 이 작품을 구상하던 시기에 등반 역사상 최대의 미스터리라 불리는 맬러리의 실종과 조난 사건에 대해 알게 된다. 심지어 맬러리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을 가능성도 있었고, 그걸 알아낼 방법도 남겨져 있었다고 한다. 숨겨진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맬러리의 시체와 함께 존재할 카메라 속 필름을 꺼내서 현상하면 된다, 에서 이 소설의 아이디어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에베레스트 8,000미터 이상의 장소에 존재해야 할 카메라가, 카트만두 거리에서 팔리고 있었고, 그 카메라를 소유하게 된 사람이 일본인이라면.. 으로 이야기가 발전된다. 하지만 당시 20대 중반의 그는 히말라야에서의 경험이 한 번밖에 없었기 때문에, 최소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는 직접 다녀오고 나서 쓰고 싶었다. 결국 여섯 번째 히말라야를 다녀오고 나서야 소설 집필이 시작되었다. 

 

그가 오랜 시간을 들여 수차례의 취재를 통해 만들어낸 표고 8,000미터 고공에 대한 묘사는 매우 디테일하고도 압도적 스케일로 펼쳐진다. 산에 모든 것을 내던진 인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산에 관심이 없는, 산악 소설을 처음 만난 독자들이라도 누구나 매혹 당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새롭게 출간된 개정판에서는 등반기술과 이론에 기반한 한국 전문 산악인의 감수를 거쳐 리얼리즘에 만전을 기했다고 하니, 번역의 디테일과 정확도 면에서도 완벽할 것이다. 유메마쿠라 바쿠는 작가 후기에서 '이 이야기에 변화구는 없다. 직구, 온 힘을 다 쏟아 부은 스트레이트.'라고 말했다. 구석구석 온 힘을 다 기울였고, 정면에서 맞서 싸우듯이 전력을 다해, 전부 토해냈기 때문에 이제 다 쓰고 몸 안에 남아 있는 건 없다고 말이다. 작가가 이런 마음 가짐으로, 이런 생각으로 토해낸 작품이라니 독자 입장에서도 그만큼의 각오를 다지고 책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산악 소설'이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미스터리와 드라마로서 매우 빼어난 구조와 묵직한 이야기의 힘이 두툼한 페이지를 넘기는 데 주저함이 없게 만든다는 점도 이 작품의 매력이다. 재미와 감동을 모두 갖추고 있는 데다, 산악 소설이라는 쉽게 만나보기 어려운 장르가 가지고 있는 매혹, 그리고 전설적인 걸작이 마침내 복간되었다는 점에 있어서도 이 작품을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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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식과 이완의 해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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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연약하고 찰나이며 사람은 물론 조심하며 살아야 하지만, 나는 온종일 자는 생활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죽음을 감수할 참이었다. 그리고 나는 영리하니까, 약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미리 감지할 거라고 판단했다. 심장이 멈추거나, 혹은 뇌가 터지든 출혈을 일으키든 7층 창문 밖으로 떨어지라고 날 조종하든,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예고성 악몽을 꾸기 시작할 거라고. 온종일 잘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잘 돌아갈 거라고 믿었다.    p.41~42

 

사람들이 소설이라는 허구의 이야기를 읽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그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어떤 때일까. 아마도 극중 인물에게 '감정 이입'해서 '공감'하거나 '위로'받거나 혹은 '이해'하고 싶어졌을 때일 것이다. 그래서 비호감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의 경우, 독자 입장에서 그 작품을 좋아하기란 매우 쉬운 일이 아니다. 오테사 모시페그의 두 작품, <아일린>과 <내 휴식과 이완의 해> 모두 '비호감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스물 넷의 아일린은 옷차림도 보수적이었고 겉으론 조용하며 누구에게도 싫다고 말하지 못했지만, 항상 격분했고 부글부글 끓었으며 자기혐오로 똘똘 뭉친 소심한 성격에 야한 상상과 독특한 망상을 즐기는 여성이었다. 자기혐오와 망상으로 점철된 젊은 날을 통과해온 아일린의 삶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전개되었던 <아일린>은 나이든 아일린의 여유와 유머 깃든 통찰이 젊은 아일린의 불균형과 미성숙을 어느 정도 견딜 만 하게 만들어주었던 작품이었다. 그에 비해 <내 휴식과 이완의 해>에는 더 좋아하기 힘든 주인공이 등장한다.

 

스물 여섯의 주인공 ‘나’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고, 명문대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직장에서 해고 당했고, 현재는 직업이 없다. 하지만 부모의 유산 덕분에 고급 아파트에서 지냈고, 예금 계좌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이삼 년은 충분히 살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날씬하고 아름다웠다. 매일같이 지저분하고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돌아다녀도, 일주일에 겨우 한 번 씻고, 머리 빗기도 그만두었고 아파트에서 나가는 일도 드물었다. 모든 공과금은 자동납부로 처리했고, 재산세도 일 년 치를 미리 냈고, 약이 더 필요할 때만 잠깐 외출할 뿐이었다. 온갖 종류의 약을 하루에 열두 알도 넘게 먹었고, 술에 절어 지냈고, 무기력한 게으름뱅이가 되어 가고 있었던 그녀는 1년간 ‘동면’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동물이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사람이 일 년 동안 잠을 자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창밖으로 어두워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리에 낀 먼지를 문질러 닦아내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먼지가 창 반대쪽에 들러 붙어 있었다. 완전히 헐벗은 나무들이 흐릿한 눈송이들을 배경으로 까맣게 보였다. 이스트강은 잠잠하고 컴컴했다. 퀸스 지역 위로 하늘이 컴컴하고 무거워 보였고, 깜빡이는 노란 불빛의 장막이 끝없이 펼쳐졌다. 하늘에 별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볼 수는 없었다... 저멀리서 사람들은 삶을 살고 즐기고 배우고 돈을 벌고 싸우고 걸어다니고 사랑에 빠졌다가 이별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쓰러져 죽고 있었다.    p.131~132

 

자, 그렇다면 우리의 주인공이 '동면'이라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현실적으로 구현할 방법은 이렇다. 한 알로 무의식 상태를 사흘간 지속할 수 있는 인페르미테롤이라는 약을 충분히 모은다. 이 약만 있다면 밖에 나가 어떤 일에든 연루될 두려움 없이 중단 없는 잠 속에서 살 수 있었다. 지독한 불면의 고통과 빌어먹을 실패한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되는 셈이다. 그녀는 약을 먹고 사흘에 한 번씩 깨어나 달력을 보고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 목욕 등등을 하며, 매번 한 시간 동안만 깨어 있을 계획이었다. 그렇게 약에 의지해 몇 달을 통째로 망각 속에 흘려 보내고 나면,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혔던 온갖 기억과 상처, 사람에 대한 혐오와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시작부터 비호감 여주인공의 심리와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리고 있어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여주인공뿐만 아니라 그녀 주변 인물들이 모두 어딘가 뒤틀리고 병적인 면모가 가득해 이상하기 그지 없었다. 각자의 문제에 사로잡혀 자식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던 부모부터, 유일한 친구인 리바는 욕망과 질투의 화신이고, 전 남자친구인 월가 금융인 트레버는 비뚤어진 성의식을 가졌고, 약을 처방해주는 정신과 의사 닥터 터틀은 윤리 의식이라곤 찾기 힘들만큼 황당한 인물이었다. 그 와중에 주인공은 전 남자친구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 이상한 소리를 늘어 놓으며 집착을 해대고, 예쁜 외모임에도 늘 다이어트에 매달리는 유일한 친구 역시 숭배와 질투를 오가며 평범하지 않은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읽는 동안 페이지는 더디게 넘어 가고, 감정 이입이나 공감할만한 대목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어느 순간부터 사회 부적응자처럼 느껴지는 주인공의 어둡고 뒤틀린 면들이 안타깝고 애처롭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녀가 세상과 사람들을 싫어하게 된 것이, 내면이 죽어버린 것처럼 염세와 절망 어린 나날을 보내게 된 것이 어떤 면에서는 당연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멸 나는 현실에서 벗어나 잠을 자기로 결심한 것이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한 일종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즈음이면, 부디 그녀가 일 년간 원하는 만큼 자고 나서 새 삶을 살 수 있기를, 과거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그리고 이 휴식과 이완의 해를 통해서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 너무도 끔찍할 때, 당신은 눈을 뜰 것인가, 감을 것인가. 이 작품은 바로 그것에 대한 매력적인 블랙코미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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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알렉스에게 - 내 모든 연민을 담아 알마 인코그니타
올리비아 드 랑베르트리 지음, 양영란 옮김 / 알마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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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을 보세주르 대로의 널찍한 대형 아파트에 감춰진 블랙박스, 혹은 물건들이 신기하게 사라져버릴 때마다 우리끼리 쓰던 표현대로 “구멍”에서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부모님이 원해서 태어난 자식들이고, 귀염받고 자랐으며, 사랑받았다. 오해와 서투름은 모든 부모 자식 관계에 내재하며, 그것이 모든 걸 설명해줄 순 없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p.67

 

인생은 한 순간에 변한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전조도 없이, 우리가 알고 있던 인생이 멈춰버리기도 한다. 2015년 10월 14일, 내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알렉스는 신원 확인이 쉽도록 배낭 속에 신분증을 넣고, 몬트리올의 자크-카르티에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경찰이 늦은 오후에 집으로 찾아와 가족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고, 밤새 연락이 안 되었던 나는 다음날 아침에야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견디기 힘든 묵직한 무게가 결국 이겼다. 살아간다는 것이 내 동생을 죽였다. 내 동생, 그애는 마침내 행복해졌을까? 나는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감정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알렉스가 없는 삶, 내가 그토록 좋아하고, 좋아하는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마저도 좋아하게 만들어준 동생이 빠진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고, 회사에 나가 일을 해야 하고, 내 감정과 상관없이 세상은 돌아가고, 일상은 이어진다. 하지만 과연,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루를 살아낼 수 있을까.

 

알렉스는 부족함없이 사랑을 받으며 자랐지만, 늘 진짜 삶을 갈구하며 절망의 나락에서 허우적거렸다. 동생의 병명은 '기분부전증'으로 우울증의 하나로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경미하긴 하지만, 오랜 기간 지속되고 특별한 치료법이 없다는 점 때문에 평생 시달리는 고질병이 될 수도 있는 골치 아픈 병이다. 동생은 그로 인해 자신의 감정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술로 위로 받다가 요양병원에 입원하고, 행동으로 넘어가 정신병원에 들어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애는 그곳에서 잘 지낸다고 말했었고, 괜찮아지려고 했었다.

 

 

찬란했던 어제는 이제 흔들어주기만 하면 플라스틱 눈이 펑펑 내리는 공 모양의 기념품 속에서 잠잔다. 나는 언젠가 다시금 그 추억과 낭랑한 웃음소리를 흔들어서 불러내고 싶다. 그것들이 자크-카르티에 다리의 그림자로 뒤덮여 암전되기 전이라야 좋겠지.    p.249

 

사람들은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하면서 죽음이라는 사건이 지니는 거대한 비극을 지워버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저자는 사람들이 약간의 공감을 보태 입 밖으로 토해내는 상투어의 향연과 의미 없는 말의 나열이 싫었다. "다 지나갈 거야."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런데 다 지나가지 않는다면? 그녀는 동생의 죽음을 이해하고 싶었고, 죽은 자들을 배반하지 않으면서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동생을 기리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 애가 희생자인 동시에 죄인인 끔찍한 범죄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백지에 그 애의 빛나는 미소와 마지막 절규를 박아 넣기 위해서.

 

가족의 예기치 못한 죽음, 그리고 그것이 촉발시킨 부채감과 죄책감은 남겨진 이들의 몫이다. 남겨진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죽음이 휩쓸고 지나간 뒤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 혹은 지독하고, 집요한 상실의 슬픔과 애도를 그리고 있는 책들은 생각보다 많다. 사람들은 말로는 할 수 없었던 것을 표현하기 위해, 마음속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것들을 풀어주기 위해 글을 쓰곤 하니 말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동생의 삶을 연장하고, 자신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한다. 저자는 숨 쉬듯이 책을 읽으며 살아온 문학비평가이자 <엘르>의 부편집인이다. 수많은 서평과 칼럼을 쓰고, 더 많은 책과 온갖 글을 읽어왔지만, 자신의 책을 쓴 것인 이 책이 처음이다. '이제 너의 책을 써봐'라고 조언했던 남동생의 말에 기대어, 그 애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다시 살아나갈 용기를 얻기 위해서. 비탄을 음울하지 않게, 슬픔을 과장하지 않고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는 아름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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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0-04-02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오나님 책사진도 늘 참 이뻐요 ^^

피오나 2020-04-03 00:44   좋아요 0 | URL
ㅎㅎ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