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가 만만해지는 이과식 독서법 - 필요한 만큼 읽고 원하는 결과를 내는 힘
가마타 히로키 지음, 정현옥 옮김 / 리더스북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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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오래 참기 대회가 아니다. 세상에는 근성을 시험하기 위해 쓰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 난해한 책이 있다. 그럴 때 자기 머리가 나빠서라고 탓하는 사람이 많은데, 오히려 저자의 설명 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부분 저자의 머리가 나빠서이지 독자의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다. 백 보 양보해서 훌륭한 내용이 적힌 책이라 해도 글쓰기 방식이 나쁘고 초심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저자의 책임감 부족이다. 그런 책을 만났다면 읽기를 당장 그만두는 게 좋다. 더욱 알기 쉽게 쓰인 책을 분명 찾아낼 수 있다.   p.46

 

저명한 화산학자이자 교토대 교수로 학생들로부터 해마다가장 수강하고 싶은 교수 1로 꼽히는 저자는 명문대에 들어온 신입생들이 책 읽기를 고문처럼 여기며 전공서와 씨름하는 것을 보며 특별한 처방을 주고 싶었다고 한다. 이 책은 과학 연구와 행정, 교육직을 두루 거치며 수많은 책과 논문과 문서를 읽고 쓰는 것을 직업으로 해온 저자가 40년의 경험에서 추출한 자신만의이과식 독서 노하우를 명쾌하게 알려주고 있다.

물론 독서 방법에 관한 책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지만, 이 책의 특징은 바로 '책 읽기에 소질이 없는 사람을 위한 독서법 입문서'라는 점이다. 책 읽기가 어려운 초심자들에게, 독서가 너무 힘든 대학생들에게, 독서가 살아가면서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즐거움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일종의 처방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미 책 읽기가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저자가 알려주는 '아웃풋 중심의 독서법'을 통해서 '이과식 독서 노하우'를 배운다는 점에 있어서도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 같다.

 

이과계 사람들의 독특한 사고방식 중 하나로 '요소분해법'이 있다. 어려운 일에 직면하면 그 일을 먼저 개별 요소로 쪼개 해결하는 방식이다. 나도 현장에서 어려운 과제에 직면할 때마다 과제를 작은 요소로 분해해 해결의 실마리를 붙잡았다. 난해한 책도 마찬가지다. 미뤄두기와 요소분해를 활용하면 편리하다. , '모르는 것은 망설이지 말고 덮어버리기' 그리고 '조각 내어 생각하기' 기술을 접목하는 것이다. 길고 복잡한 문장 앞에서도 기죽을 필요 없다. 주어와 술어 짝에 표시를 해두고, 이 짝이 이루는 단문을 각각 읽어나가면 된다.   p.90

 

생각보다 책 읽기를 어려워하는 이들이 많다. 한 달에 한 권은 고사하고, 일 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이들이 대다수이고 책이라는 것이 자신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물건인 것처럼 취급하는 경우도 여럿 보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학창 시절에는 책을 꽤 읽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교과 과정을 따라 가기 위해 억지로 읽은 거였든, 그저 재미를 위해 시간 때우기 용으로 읽었든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여전히 책 읽기를 어렵게만 느끼는 것일까. 이 책에서 알려주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중에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바로 '책이 어렵다면 저자를 탓하라'는 항목이었다. 사실 책 읽기에 너무 익숙한 나 같은 독자도 가끔 아무리 읽어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내용이 어려워 알 수가 없는 그런 책을 만난다. 그럴 때 그 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독자인 내 탓이 아니라, 저자의 설명 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개는 실제로 그렇다, 라는 저자의 단언이 어쩐지 재미있으면서도 예리하게 진실을 꿰뚫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여기서 진짜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과 맞지 않는 책이라면 읽기를 바로 멈추자'는 것이다. 자신과 어울리는 책, 읽기 쉬운 책을 만날 때까지 끊임없이 갈아타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책읽기라는 것이 익숙해질 것이며, 책 읽기의 재미를 발견하리란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과 사람들은 편해지기를 꿈꾸는 종족'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에너지를 덜 쓰고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지 늘 궁리한다고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책 읽기에 응용한 '이과식 독서법'의 가장 큰 특징 역시 쉽고 간편하다는 것에 있다. 미뤄두기와 불완전법, 이과의 요소분해 사고법, 각종 속독법을 무시하는 방법인 '지독법' 등등이 그에 해당하는 방법인데 매우 흥미로웠다. 그리고 책을 고르고 정리하는 '이과식 책 정리'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책이 어렵다면 저자 탓, 작심삼일은 의지가 아니라 시스템 탓이라 단언하는 저자의 관점이 궁금하다면, 책과 마음의 담을 쌓은 사람이라면, 책 읽기가 너무 어려워 숙제처럼 느껴진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괴짜 이과대 교수의 특별한 읽기 처방이 당신의 고민을 싹 해결해 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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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살짝 비켜 가겠습니다 - 세상의 기대를 가볍게 무시하고 나만의 속도로 걷기
아타소 지음, 김진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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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잖아", "결혼 안 해?", "그런 옷 입고 다니면 남자한테 인기 없어" 같은 무례한 참견을 당하는 일도, 쓸데없는 말에 상처 받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할머니니까. "여자이길 포기했네", "여잔데 왜 그래?" 같은 말도 듣지 않게 될 거고. 만약 내 성별을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갖다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차라리 할머니가 되어 내게 필요 없는 여성적인 부분을 완전히 버리고 싶다.    p.42

이 책의 저자인 아타소는 외모에 자신이 없거나 연애와 결혼이 잘 안 풀린다고 고민하는 여자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글로 트위터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그녀 역시 자신의 외모를 싫어했고, 붙임성 없는 성격과 솔직하지 못한 점과 자신감이 없는 것 등등.. 수많은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특히나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자신감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주변 여자들과 스스로를 비교해, 같은 '여자'인 것이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부끄럽다고 생각할 정도이니, 사실 좀 심각하다. 하지만 그녀처럼 사회가 기대하는 대로 '여자답게' 행동할 수 없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거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한 위로이자 응원 같은 책이다.

저자가 못생기고 형편없는 외모를 오랫동안 콤플렉스로 가지게 된 것은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못난이라고 불렀던, 칭찬을 거의 하지 않았던, 무심한 어머니에서 비롯되었다. 다행히도 이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못난이로 살아온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과 거기서 느꼈던 감정들과 생각들을 글로 꺼내어 과거의 나를 구원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받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를 밝히고 있다.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이나 경제적 능력, 사회적 지위 등등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소심하지만 적극적으로나다운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사람을 기다리는 것, 남자에 의해 내 행복이 좌우되는 인생 따위는 분명히 재미없다. 자신보다 멍청해 보이는 여자와 결혼해서 여자보다 우위에 서려는 남자는 내가 먼저 거절한다. 나는 남자가 가져다 주는 행복을 기다리지 않는다. 혼자서도 똑바로 걸어갈 수 있다는 것, 내 능력을 인정해줄 곳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내 힘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고 싶다... 나는 인생에 기본적인 단계가 있음을 강요 받는 분위기에서 여전히 흔들리고 있지만 끝까지 내 안에서 행복을 찾길 바란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내가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p.161~162

여자다움이란 대체 뭘까. 여자라서 이래야 하고, 여자이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하고.. 세상에서 규정하는 여자다움이란 사실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여자니까 이래야 해. 남자는 이래야 돼. 라는 식으로 남녀의 선천적 특성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것들은 사실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기질은 아니다. 저자는 여자라면 겉모습을 깔끔하게 유지해야 한다거나, 요리를 잘한다거나, 손톱 정리와 화장을 빈틈없이 해야 한다거나, 외식을 할 때는 남자에게 술을 따라줘야 한다거나.. 하는 식의 사회적 시선에 반기를 든다. 급기야 가끔은 빨리 늙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한다. 할머니가 되면 여자이기 때문에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의 말은 최소한 듣지 않게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에 끼워 맞출 필요도, 눈치 볼 필요도 없다. 세상에는 외모가 예쁜 여자도 있고, 결혼 안 하는 여자도 있으며, 중성적인 스타일로 옷을 입는 여자도, 털털한 선머슴 같은 성격의 여자도, 화장을 하지 않는 여자도 있으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나답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저자와 같은 고민들을 해본 적은 없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이야기들이 대부분 공감되고, 이해가 되었다. 남자들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조금도 노력한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이기에 느끼는 욕망과 여자로서 날씬해지고 사랑스러워지고 싶은 자신의 감정에는 솔직한 그녀의 모습이 사회의 기준과는 다를지라도 멋지게 보였기 때문이다. 남이 정해준 행복은 필요 없다. 나는 내가 가장 나다운 모습일 때 행복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여자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하는 그녀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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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아메리카나 1~2 - 전2권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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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아메리카나'라는 단어와 비시 생각에 박장대소하며 신이 나서 네 번째 음절을 길게 늘여 발음했다. 비시는 그들보다 한 학년 아래의 여학생이었는데 여행차 잠깐 미국에 갔다 오더니 갑자기 요루바어를 못 알아듣는 척하고 모든 영어 단어에 흐릇한 r을 덧붙여 발음하는 등 이상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근데 기니카, 난 지금 네 입장이 될 수만 있다면 정말 뭐든 할 것 같아." 프리예가 말했다. "네가 왜 가기 싫어하는지 모르겠어. 언제든 돌아오면 되잖아."    -1, p.115

이페멜루는 나이지리아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십삼 년이 된 어느 날, 나이지리아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현지에 있는 가족들은 미국 생활이 그녀를 돌이킬 수 없게 바꿔 놓았을 거라고 생각해 돌아와서 적응할 수 있겠느냐, 미국 시민권이 있으니 언제든 돌아갈 거라고 생각한다. 미국에 있는 동료나 지인들은 그녀가 미국에서 십오 년이나 살았는데, 다시 나이지리아로 돌아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녀와 삼 년 동안 함께했던 남자친구 블레인 역시 그녀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놀라고,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사실 그녀에겐 이유랄 게 없었다. 그저 켜켜이 쌓여 왔던 불만이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마침내 그녀를 움직였던 것뿐이다. 그렇다면 대체 미국에서의 무엇이 그녀의 삶을 다시 나이지리아로 향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녀는 익명으로 <인종 단상 혹은 (과거에는 니그로로 알려졌던) 미국인 흑인들에 대한 비미국인 흑인의 여러 가지 생각>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인종 문제는 완전히 과대 포장되어 있다는 걸 흑인들은 깨달아야 한다. 이제는 계층 문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문제만이 중요하다. 드레드록 머리를 한 미국인 백인 남자라고 해서 전부 다 흑인 편은 아니다. 등등 특유의 독설과 유머를 혼합해 그녀가 실제로 미국에서 겪어 온 인종 차별의 순간들을 매우 현실적이고도 발랄하게 표현해 왔다. 한편 중학생 때 처음 만나 사랑을 키웠던 그녀의 첫사랑 오빈제는 이제 결혼해서 처자식이 있었다. 그녀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 버린 뒤로, 그들이 서로 연락하지 않은 지도 수년이 흘렀다. 이페멜루는 나이지리아로 돌아가기로 했다는 소식을 오빈제에게 이메일로 알리고 계속 연락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야기는 이페멜루와 오빈제가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역경을 겪고, 변화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한 성장 소설의 배경에는 나이지리아와 미국의 정치 경제, 인종, 종교, 이민, 페미니즘, 계급 갈등 등 수많은 사회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알렉사와 다른 손님들, 어쩌면 조지나조차도 누군가가 전쟁으로부터, 또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가난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억압적인 무기력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욕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오빈제 같은 사람들, 즉 유복하게 자랐지만 불만에 빠져 있고 태어날 때부터 고국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도록 길들여진, 진정한 삶은 그 다른 곳에 있다고 영구불변하게 확신하는 사람들이 단지 떠나기 위해 - 그중 어느 누구도 굶주리거나 강간당하거나 마을이 불타지 않았지만 그저 선택의 가능성과 확실성에 목말라서 - 위험한 일, 불법적인 일을 하기로 결심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2, p.87

‘아디치에, 소설읽기온라인 서포터즈로 만나게 된 두 번째 작품이다. 지난 번에 읽었던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응고지 아다치에의 데뷔작으로 2003년 작이었고, 이번에 읽은 <아메리카나>는 그로부터 10년 뒤에 쓰여진 2013년 작품이다. 그녀가 작가로서 그 기간 동안 얼마나 놀라운 성장을 했는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라, 읽으면서 내내 감탄했다. 사실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좋은 작품이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술술 잘 읽히는 작품은 아니었기에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그에 비해 <아메리카나>는 첫 장부터 시선을 확 사로잡는 문장과 사유들이 인상적이었고,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이라는 다소 예상 가능한 플롯으로 쓰여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강렬하게 현실을 그려내고 있어 지금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동시대성이 피부로 고스란히 와 닿았던 것 같다.

특히 이 작품은 2015년 민음사 모던클래식을 통해 출간되었는데, 이번에 젊은 포토그래퍼 김강희와 콜라보레이션한 표지로 번역 편집 전반을 다듬어 출간되었기에 이번 기회에 만나 보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선명한 색상 대비의 인상적인 표지는 책을 읽기도 전부터 이미지로 작품의 분위기와 이야기를 전달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솔직하고 톡톡 튀는 묘사로 미국 인종주의의 민낯을 보여주고,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을 발랄한 페미니즘으로 꼬집고 있는 이 작품이야 말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묵직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소설 자체는 전혀 어둡거나 무겁게 느껴지지 않도록, 시종일관 경쾌하게 풀어나가는 방식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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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곤베리 소녀
수산네 얀손 지음, 이경아 옮김 / 검은숲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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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지금까지 믿었던 현실이 쩍 갈라지면서 자신이 그 틈으로 떨어져 말이 존재하지 않고 시간조차 사라진 장소로 굴러 들어간 것 같았다. 지금까지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곳으로 말이다. 구조물이 폭발해 산산조각이 되고 나서야 현재의 순간은 물론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과도 원래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만 같았다. 그녀가 그 순간'이었다'고 말이다.  다음 순간 극렬한 반사작용처럼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내가 무슨 경험을 하고 있는 거지?'    p.53

생물학자인 나탈리에는 온실효과가 습지의 부패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연구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14년 전 이곳 모스마르켄을 말없이 떠났었다. 이곳은 달슬란드와 베름란드 사이 습지에 자리 잡은 황량한 곳이었다. 늪지로 유명한 외딴 마을이었고, 오래 전 기원전 300년에 인신공양의 제물이 된 소녀가 시체로 발견된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현재는 '링곤베리 소녀'라 이름 붙여진 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늪지는 산소가 부족하고 산성인 환경 덕분에 부패가 매우 천천히 진행되는 곳이다. 덕분에 당시 발견된 소녀는 거의 부패되지 않은 채로 머리카락과 의복, 금장신구가 남아 있는 미라 상태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 시신을 품고 있었던 장소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눈앞으로 보이는 풍경은 너무도 평화로운 곳이기도 하다. 여기저기에 키 작은 소나무들이 누러 바다에서 튀어나온 앙상한 팔처럼 서 있고, 거대한 하얀 하늘 아래로 누르께한 풀과 이끼의 파도가 치는 것처럼 보이는 장소이니 말이다.

한편, 저명한 사진작가인 마야는 어머니가 경찰이었던 관계로 어릴 때부터 예술과 경찰의 세계를 하나처럼 느껴왔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평범하지 않은 부업인 법의학 사진가 일을 20년 가까이 해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레이프 형사와 함께 늪지 근처에서 청년이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해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된 사건을 조사 중이다. 그녀는 현장을 촬영하면서 늪지의 풍경과 그곳에 가라앉은 것들에 관심이 생기게 되고, 오래 전 발견된 '링곤베리 소녀'와 현재 벌어진 사건 사이에 기묘한 연결 고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늪지에서는 지난 14년 동안 실종되었던 사람들의 시신이 연이어 발견되기 시작한다.

"아니, 나탈리에. 그런 건 없어." 그가 대답했다.

"아저씨가 유령이 정말 있다고 말하신다고 엄마가 그랬어요."

다시 침묵.

"유령은 존재하지 않아, 나탈리에. 그게 바로 유령이야." 그가 말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 말이야. 그러니 유령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은 그 자체로 모순이야."    p.147

모스마르켄 근처에서는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이야기가 항상 돌곤 했다. 아주 오래 전에 사람들이 그곳에서 제물을 바쳤다는 말이 있었고, 실제로 링곤베리 소녀를 비롯해 미라로 발견된 존재도 있었으니 그냥 전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늪지에서 지난 14년 동안 사람들이 실종되었다. 과연 사라진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것은 연쇄적으로 벌어지는 범죄일까, 늪지라는 괴물이 사람들을 데려간 것일까. 이야기는 나탈리에가 14년 전에 겪었던 비극에 대한 미스터리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조사하는 마야의 시선으로 진행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늪지는 수수께끼와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띄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곳을 제의나 영적 세계와 소통하는 장소로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늪지는 떠돌이들을 매장할 완벽한 장소로 여겨지기도 했다. 사회와 대중의 의식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불모지이자 쓸모 없는 땅이었으며 무엇보다 사람들이 찾을 이유가 없는 장소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 작품의 가장 뛰어난 점은 바로 이러한 늪지의 풍경들을 완벽하게 묘사해서 실제로 안개 자욱한 늪지 한가운데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검은숲 독서클럽 1주차 도서로 만나게 된 수산네 얀손의 데뷔작이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스웨덴 작가이기도 하고, 북유럽 스릴러의 가능성을 확장시켰다는 평을 듣는 작품이기도 해서 기대가 되었다. 이 작품은 주로 마약과 살인 등의 범죄를 적나라하게 그려온 여타의 북유럽 스릴러의 흐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늪지 서스펜스라는 장르적 재미, 그리고 피 한 방울 없는 죽음을 묘사해 오싹한 분위기를 극대화하고 있기도 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에서 묻어 나오는 공포까지 버무려져 색다른 북유럽 스릴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스웨덴의 습지 풍경들을 검색해봤는데, 정말 놀라울 만큼 아름다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 더욱 오싹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산소가 결핍된 늪 속에서 자연 방부처리 되어 마치 잠에 빠진 듯한 늪지 시신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려졌다. 육지와 바다 사이의 경계, 마른 곳과 젖은 곳의 경계, 부드러운 것과 단단한 것 사이의 경계,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이기도 한 매혹적인 그곳으로 떠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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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리학 이야기 - 알아두면 전혀 무서울 것 없는
나카노 토오루 지음, 김혜선 옮김, 박성혜 감수 / 영진.com(영진닷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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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있어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뿐이다. 사람이 죽으면 몸의 세포도 역시 죽는다. 그렇다면 세포가 죽으면 사람도 죽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인데 어느 장기의 세포가 어느 정도 죽는지, 또 어떤 속도로 죽는가에 따라 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면 세포가 죽어도 괜찮다. 게다가 아폽토시스(세포자연사)라고 불리는 병이 아닌 생리적으로 세포가 죽어가는 현상마저 알려졌다.   p.31

 

'병리학'이라고 하면 어쩐지 딱딱하고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 뜻을 보면 질병의 분류, 기재 및 그 특성과 병인 및 진행 과정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라 되어 있으니 더욱 그렇게 보이고 말이다. 하지만 쉽게 말하자면 병이 어떤 이유를 발병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보면 된다. 일생 동안, 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을 없을 테니 어느 정도 알아두면 도움이 될 수밖에 없는 학문이기도 하다.

 

 

 

 

 

 

의과대학 교수인 저자는 의료계와 관련 없는 보통 사람도 어느 정도는 병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낯설 수도 있는 분야이니 읽다가 어렵게 느껴지는 내용도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금방 알기 쉬운 내용으로 돌아오므로 어려운 부분은 일단 건너뛰어도 지장이 없다고 미리 서문에 밝히고 있어, 오히려 부담 없이 술술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의료계에서는 '내과의는 뭐든지 알고 있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외과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무슨 일이라도 한다. 병리의는 뭐든지 알고 있고 뭐든지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때를 놓친다'라는 농담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이 병리의가 하는 일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말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병리의는 환자의 병소에서 떼어 낸 조직, 형태에 의한 진단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사망한 환자의 병에 관해 부검을 통해 조사하는 일도 한다고 하니 말이다.

 

 

 

 

병이라는 것은 세포의 기능이 여러 가지 상해를 끊임없이 받게 되어 파탄 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되더라도 바로 죽는 것은 아니다. 병이 난 세포들은 정상과는 조금 다른 상태에서 좀 전문적인 단어가 되겠지만 '병태생리'적으로 새로운 평형 상태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 어르고 달래서... 왠지 모르게 세포와 삶을 함께하는 느낌이 들지 않나?    p.94

 

우리의 몸은 대략 200종류의 약 6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많은 세포가 각각의 역할을 완수하고, 나아가서는 협조화여 가능한 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사람의 인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세포가 손상이 되는 것을 우리는 병이 난다고 한다. 정신 질환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질병의 원인은 세포에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책은 바로 그 세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세포가 스트레스를 어떻게 참아 내는가부터 시작해 세포의 죽음, 노화 등의 이야기를 거쳐 암과 함께 가장 높은 사망 원인으로 꼽히는 심혈관 장애를 중심으로 몸 속 혈액에 관해 알아 본다. 그리고 '병의 황제'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이라는 질환의 발병 원인부터, 어떻게 증식하는 지와 같은 암의 진화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장에서는 자궁경부암, 위암, 간암 등에 관한 이야기를 거쳐 멀지 않은 미래에 의학계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될 AI나 분자표적약 등에 관한 내용도 수록되어 있어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나 '실마리도 없는 잡담을 하듯이 질병의 메커니즘을 웃음과 함께 설명하는 지적 여행'이라는 소개 문구처럼, 마치 별로 어렵지 않은 이야기를 일상 속 잡담하듯이 풀어내고 있어 의학과는 전혀 무관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보통의 독자들도 재미있게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병에 걸리면 다양한 약이 처방된다. 그러한 약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효과를 나타내는가를 이해하려면, 병의 발병에 관한 병리학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요즘은 처방전에도, 약국에서도 각각의 약에 대한 기능과 효과에 대해 자세히 기재되어 있고, 설명을 들을 수 있어 자신이 처방 받는 약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의학이 크게 진보한 만큼 일반인들도 그에 걸 맞는 의학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의학적 지식과 그에 대한 해석,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통해서 평소 궁금했던 여러 질병의 발병원인과 진행과정 등에 대한 의문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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