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진 하늘
루크 올넛 지음, 권도희 옮김 / 구픽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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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된 거야? 정상적인 대화조차 할 수 없게 됐잖아." 내가 말했다.

"우리 아들이 죽어가고 있어. 그게 우리한테 일어난 일이야." 애나가 말했다. 이미 그녀가 쓰는 어휘가 나와 달랐다. 내가 호스피스라는 단어를 아주 조심스럽게 작은 소리로 말하려고 애쓰는 동안, 애나는 '말기'라든가, '죽어간다'는 말을 편안하게 쓰고 있었다.

"그래." 나는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끔찍하다는 건 알아. 이보다 더 끔찍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우린 같은 편이잖아."     p.250~251

 

롭과 애나, 그리고 다섯 살난 아들 잭은 평범하고 행복한 가족이었다. 잭은 힘겹게 생긴 아이였다. 애나는 두 번 유산했고, 세 번째로 임신했을 때도 불안해했지만 결국 아이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는 어느 덧 다섯 살이 되었고, 통통하기만 하던 다리가 길어지고 아기 같던 말투도 사라져갔다. 롭과 애나의 세상은 도서관 책들과 부모로서의 저녁시간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어린 자식을 두고 있는 세상 모든 부모가 그러하겠지만 말이다. 잭은 평범하게 자라고 있었고, 가끔 놀다가 의식을 잃거나 기절하듯 쓰러지곤 했다. 그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병원에서 뇌종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된다. 성상세포종으로 수술로 제거할 수 있다고 했지만, 결과가 좋았음에도 암은 곧 재발하고, 잭의 병세는 깊어만 간다.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지푸라기 하나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롭은 점점 아들의 치료에 관해 집착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게 되고, 급기야 온라인 게시판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치료법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인 애나는 이를 반대하고, 그들의 관계는 점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향한다. 거대한 슬픔 앞에서 그것을 극복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결코 누가 누굴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해서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당신은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결코 당사자가 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검증되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방법이라도 시도해봐야 한다는 것과 이미 돌이킬 수 없다면 보내주어야 할 때를 받아들이고 그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 모두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고, 이해하고 싶었고, 응원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세상은 아침 서리가 내린 것처럼 바삭거린다. 너무 연약하고 깨끗해서 걸음을 내딛기가 두렵다. 주위를 둘러보니 전에는 보지 못했던 세세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선반의 닳은 가장자리. 가로등 그늘 사이로 반사된 햇살이 양탄자 위에 만들어낸 빛의 무지개. 왜냐하면 이제 나는 제대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구름다리 아래 조용히 앉아 있을 때면 바람의 숨결과 대기 중에 떠도는 강물의 짭짜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새로운 과민증으로 이 세상을 느끼고, 보고, 듣는다. 마치 귀를 틀어막고 있던 장애물이 사라진 것 같다. 나는 이제 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p.354

 

저자인 루크 올넛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의 마지막 몇 달을 담담하게 다룬 논픽션을 자비출간해 호응을 받았고, 이후 30대 중반의 나이에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아 오랜 투병 기간을 거쳤다. 암 진단 이후에 둘째 아이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되어 자신의 병과 아이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겪어야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는 자신의 병을 극복했다. 그렇게 질병으로 인한 죽음과 그 과정을 이겨낸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이 책을 쓰게 된다. '자전적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그의 가족이 어린 아들을 불치병으로 떠나 보낸 것은 아니라서 독자로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의 모든 죽음이 비극이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지만, 부모라는 존재에게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내는 일은 그것이 타인의 경험이라고 하더라도 너무도 끔찍하고, 참담한 슬픔을 동반하는 것이니 말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병으로 잃은 경험과 작가 자신의 긴 투병 기간이 있었기에, 이렇게 사실적인 작품을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가족을 잃은 슬픔 그 자체를 클라이막스로 만들지 않고, 그 과정을 용기 있게 겪어 내는 과정과 남겨진 가족들의 삶에 대해 그리고 있어 더 뭉클했던 작품이었다. 작가의 말처럼 '희망은 누군가를 미치게 만들기도 하고, 끔찍한 선택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싶어 하는 절망적인 사람들이 종종 이 작품 속에서 벌어진 것 같은 일에 휘말리게 되기도 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한 모든 과정은 직접 겪어 보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가 없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서 그러한 일들을 간접 경험하면서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소중하게 지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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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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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는 그 시절 내가 겪어야 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다름' '섞임'의 세계가 있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수많은 벽이 있었다. 그 벽에 드리워지는 빛과 그림자의 명암도 뚜렷했다. 하지만 각기 다른 바위에 부딪쳐 다른 지점에서 구부러지는 계곡물처럼 모두의 시간은 여울을 이루며 함께 흘러갔다.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 우리 모두는 막연하나마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지금과 다를 거라고 믿었다.    p.193

나란히 서서 같은 방향을 보고 있더라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공유했더라도.. 내가 보는 것과 네가 보는 것이 같을 수는 없다. 그것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기억의 취약성 뿐만 아니라, 애초에 그 순간 같은 것을 보면서도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에겐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가장 오래된 친구가 있었다. 40년 전, 1977년 대학 신입생 기숙사에서 처음 만나 그런대로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그녀와의 인연은 기숙사를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어렵게 취직한 광고 회사 출판부에서 다시 이어졌다, 직장을 옮기며 연락이 끊어졌다가 어느 카페의 개업식에서 우연히 만나고, 그 카페의 단골들과 어울리던 그룹으로 이어지며 세월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그다지 유명해지지는 못했지만 여덟 권의 책을 낸 소설가가 되었고, 동시에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들의 기숙사 시절을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라는 이름의 소설로 발표한 적이 있었다. 오래 알고 지내면서도 그녀의 책을 산 적도 읽은 적도 없었던 나는 그 책을 주문해서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가 본 세상이 자신이 본 것도 너무나 달랐다는 것을 깨닫는다. 게다가 소설에 묘사된 스무 살의 내 모습 또한 너무도 낯설었다. 너무도 다른 그녀의 기억과 나의 기억은 그렇게 과거 속에서 부딪치고 있었다.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가 알고 있는 ''란 누구인가. 내가 알고 있는 내 삶은 실제 내가 살아온 삶과 다른 것인가. 작가는 이 작품에서 1970년대의 문화와 시대상을 세밀하게 서술하면서 갓 성년이 된 여성들이 기숙사라는 공간에서 만나 서로의 다름을 인지하고, 이런 저런 관계를 맺으며 섞이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그렇게 2017년을 사는 김유경이 기억하는, 1977년의 공기와 풍경들이 2019년에 책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소환된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에게 있는 자신만의 기억을 되짚고, 과거의 시간들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시대가 다르고, 배경이 다르더라도,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꿈이 아니었다. 시간 속에 스몄던 지속되지 않는 사소한 인연들, 그리고 삶이라는 기나긴 책무를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수긍이라는 재능이었다.

과거의 빛은 내게 한때의 그림자를 드리운 뒤 사라졌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며 뭔가를 욕망하거나 탄식할 나이도 지났으며 회고 취미를 가질 만큼 자기애가 강하고 기억을 편집하는 데에 능한 사람도 못 되었다. 뜨거움과 차가움 둘 다 희미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술과 장미의 나날' 시절의 혼란과 환멸을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p.281~282

책을 사서 볼만큼 용돈이 충분하지 않던 어린 시절. 나는 동네 책방이나 도서관에 가서 주로 책을 빌려 보았다. 책은 읽어야 하는 기간이 지나면 반납을 해야 했고, 반납하고 나면 다시는 볼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가능한 많은 문장들을 머리 속에 집어넣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많은 문장들을 다 외울 수는 없었으므로, 맘에 드는 구절들을 노트에 메모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정말 매혹적인 작품을 만나면 아예 전체 책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가슴을 철렁 내려 앉게 만드는 섬세한 어휘들과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그 문장들은 나의 감수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그렇게 나는 수많은 책들과 함께 질풍노도의 시절을 흘려 보냈다. 문장과 문장을 이어 단락을 만들고, 그 단락들을 이어 하나의 글이 만들어 질 때마다, 시시해 보이는 나의 일상들이 근사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시절 가장 많이 내 손을 탔던 책이 바로 은희경 작가의 작품들이었다. 당시에 나는 구할 수 있는 그녀의 모든 책을 읽었는데, 아름다운 문장들과 예리한 표현들은 매 페이지마다 밑줄 긋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켰었다. 소설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허구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녀의 작품 속에서만은 그 인물들이 모두 다 '진짜'처럼 느껴졌었다.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오랜만에 책장 구석에 꽂혀 있는 '타인에게 말 걸기' 책을 꺼내 보았다. 무려 17년 전에 구입했던 책인데, 당시에 얼마나 여러 번 읽었던지 까맣게 손 때가 타서 낡은 책이다. 요즘은 아무리 좋은 책도 두 세 번 이상은 읽을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손 때가 탈 때까지 읽게 되는 경우란 찾아 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 책도 대여해서 읽고 또 읽다가, 결국에는 용돈을 모아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던 작가가 여전한 필력으로 신작을 발표하고 있어 독자로서 마음이 뿌듯하다. 은희경 작가가 <태연한 인생> 이후 7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 역시나 오래 전 그녀의 작품을 읽으며 밤잠을 설쳤던 그때만큼이나 설레이는 기분으로 읽었다. 살면서 가끔 생각한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와 결코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나를 누구라고 알고 살아 왔던 것일까. 잃어버린 나를 찾고 싶을 때 나는 책장에 꽂힌 책을 꺼내어 페이지 속으로 숨곤 했다. 책 속의 어떤 문장에서 오래 전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어느 행간에서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극중의 그녀처럼 기울고 스러져갈 청춘이 한 순간 머물렀던 날카로운 환한 빛을 향해 손을 뻗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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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예찬 - 숨 가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품격 있는 휴식법
로버트 디세이 지음, 오숙은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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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독서를 하는 이유는 대체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다. 꼼짝도 하지 않은 채로 모험을 하기 위해서. 내가 독서를 하는 이유는많은 사람이 되어보기 위해서…’라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아마도더 많은 측면에서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더 과감하고, 더 다채롭고, 더 솔직하고, 더 교활하고, 더 깊고 더 다면적인 나 자신 말이다(그러고 보니 이건 거의 정신 함양이 아닌가?).     p.75~76

사실 나의 로망은 단 며칠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한 번쯤 가져 보는 것이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 하루를 시작할 때부터, 늦은 새벽 잠이 들 때까지 거의 단 한 순간도 별 생각 없이,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간이 없으니 말이다. 하루에도 열 몇 개씩 알람을 해두고,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들을 채워 넣어 바쁘게 달려가는 것이 내 일상이다. 여행을 가서도 먹어야 하는 것, 보아야 하는 것, 해봐야 하는 것들을 하느라 일정 내내 좀처럼 쉴 틈이 없다. 소위 '멍 때린다'는 표현이나 '무위도식' 한다는 말을 한 번도 체감해보지 못하고 살았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진짜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다양한 문학 장르를 넘나드는 글을 쓰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작가 로버트 디세이가 진정한 휴식에 대해, 삶을 더 현명하게 즐기기 위한 게으름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 요시다 겐코의 <쓰레즈레구사>, 시트콤 '핍 쇼'와 다큐멘터리 '스시 장인: 지로의 꿈' 그리고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경유하여진정한 휴식이라는 키워드를 편안하고 위트 있게 풀어내고 있어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무슈 귀스타브가 로비 보이 제로에게 했던 말, 무엇을 하든 아무 소용이 없다던 말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전부 끝나거든.... 그러고 나면 사후 경직이 시작되지." 바쁜 남자가 할 법한 그런 말이다. 봄날의 말벌처럼 바빴던 무슈 귀스타브는 좀 더 빈둥거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가 미처 삶을 알기도 전에 삶이 날아가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당신은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서 행복해야 한다. 행복하기 위해 게으름을 피워야 하는 게 아니다.   p.142~143

정신 없이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휴식을 위한 시간이 너무도 필요하다.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의미인 워라벨(Work-life Balance)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매우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실천하기가 마냥 쉽지만은 않다. 성공지향주의, 완벽함에 대한 갈망, 스마트폰 등의 대중화는 점점 일과 개인의 삶을 분리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시간이 곧 돈인 세상에서 목적 없이 걷는 것은 낭비처럼 보이고, 늦잠 자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인맥에 상관없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불필요한 일 같고, 인터넷에 접속하는 대신 소파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것이 정보화 시대에서 나만 뒤처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올해 70대 중반을 맞이한 저자는, 빈 시간에 무언가 실용적인 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여가를 즐긴다는 것은 사실 삶을 즐기는 것, 삶 속에서 뛰노는 것, 인간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 깊이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점점 늘어나는 여가 시간을 현명하게 활용했을 때 우리 삶에 깊이가 생기고 행복으로 가까워진다고 말이다. 여가란, 결코 물질적 이익을 바라지 않고 순전히 그 즐거움을 위해서 자유로이 선택한 것, 빈둥거리고, 깃들이고, 단장하고, 취미 활동을 하는 등 광범위한 영역을 두루 아우를 때 쓰는 단어라는데, 우리는 그 동안 그 뜻을 너무 모른 채 앞만 보면서 살아온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느긋하게 있을 때, 가장 치열하고 유쾌하게 인간다울 수 있다는 말이 궁금하다면, 워라밸의 시대, 황금 같은 휴식 시간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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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보는 그리스신화 - 오늘, 우리를 위한 그리스신화의 재해석
박홍순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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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이카로스의 실패한 시도에서 미래에 대한 기대를 찾으려는 것일까? 중용을 벗어난 무모한 도전이 초래한 비극적 최후라는 교훈과 달리 왜 그의 도전에서 희망을 발견하려 할까? 다이달로스가 경고한 위험 요소인 태양의 열기와 바다의 습기는 자연의 보편적 질서에 해당한다. 인간 세상에 적용하면 사회의 질서가 된다. 신화는 도전하더라도 자연이나 사회의 보편적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는 틀 내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극단으로 향하거나 지나칠 경우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경고다. 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수준의 교훈임에도 왜 사람들은 이카로스를 기다릴까?    p.127~128

그리스신화는 3천 년도 더 된 유서 깊은 고전이다. 대표적인 신화의 줄거리나 인물 정도는 알고 있을 정도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창시절부터 그리스신화를 접해 왔다. 하지만 그리스신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줄거리를 암기하는 방식이나 비유로 사용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역사적, 철학적 맥락과 연결시켜 해석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각 신화가 갖는 의미를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섬세하게 적용해서 통찰하고, 반드시 현대적 재해석 과정을 동반해야 한다. 그리스신화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글이나 말을 통해 거듭 거론되는 것은 이것이 현대의 인간과 사회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일 테니 말이다.

이 책은 현대 서구 문명의 중요한 축인 그리스신화의 주요 골자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소포클레스, 베르길리우스 등 고대 그리스의 저작을 중심으로 신화의 의미를 분석하고, 관련된 미술 작품을 통해 이해를 돕고 있다. 서양 미술사에서 나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화가의 작품들 중에 신화의 이해와 재해석 과정에 필요한 그림들을 엄선했다고 한다. 미술과 인문학으로 읽어내는 그리스신화라서 더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문화로부터 콤플렉스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콤플렉스로부터 문화가 만들어진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근친상간을 엄격히 금하고 있는데, 욕망이 없다면 구태여 금지할 이유가 없다. 근친상간이 금지되고 있는 것은 금지라는 문화적·사회적 조치 이전에 이미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욕망과 실제 행위에 뒤이어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명령과 법이 만들어진다. 금지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에 대한 억압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렇듯 문화라든가 존재 이전에 욕망이 있고, 이에 대한 억압이 생긴다. 욕망은 외부적인 조건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내부로부터 나온다. 그 핵심에 성적인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p.322

시시포스는 제우스의 분노를 사 저승에 가게 되자 저승의 신 하데스를 속이고 장수를 누렸다. 그리고 그 벌로 저승에서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신화에서 신이 인간에게 내린 형벌을 워낙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내용이어서 많은 화가들이 극적인 장면을 연출해 작품으로 남겼다. 그런데 대부분의 화가가 신화 내용에 충실하게 바위를 굴려 올리는 방식을 그린데 비해, 타치아노는 독특하게 무거운 바위를 등에 지고 나르는 모습으로 신화의 이미지와 살짝 다르게 묘사했다. 저자는 타치아노의 관심이 시시포스가 얼마나 큰 '고통'을 받는지를 드러내는 것보다는, 어딘지 '고뇌'로 향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한다.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시시포스의 고통을 안쓰러워하기보다는 그를 보면서 깊이 있는 생각에 잠기기를 권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영원히 되풀이되는 '반복' 자체가 당장의 육체적 고통 이상의 형벌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시시포스의 형벌 이야기와 타치아노의 그림을 가지고 시시포스 처럼 쳇바퀴에 갇힌 현대인의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재해석'에 중점을 두고 있는 이 책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왜 저주였던 것일까. 권력은 왜 질서를 선이라 강조할까. 이카로스의 이야기는 무모한 도전일까, 무한한 도전일까. 전쟁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가. 선과 악을 딱 잘라 구분할 수 있는가. 욕망은 곧 타락의 화신인가. 오이디푸스의 비극에 담긴 터부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등등... 그리스 신화 속에서 인간과 세계, 문명과 국가, 이성과 감성, 여성과 남성 이라는 네 가지 테마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어 흥미로웠다. 미술과 인문학으로 새롭고 신선하게 해석하는 그리스신화, 지금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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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그 섬에서
다이애나 마컴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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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지만, 그 사람들이 내게 뭘 바라나 싶어서요. 저한테 뭘 기대하는 거 같아요?"

"누구나 바라는 걸 바라겠죠. 자기들 이야기를 알아줄 사람을 바랄 거예요. , 그리고, 그 이야기라는 게 당신 이야기의 일부가 될지도 모르죠."

그는 내가 놓친 걸 콕 집어줬다. 내 이야기라니.     p.53

대서양 한복판에 있는 신비한 아홉 개의 섬, 아조레스 제도. 한여름 투우와 축제가 끊임없이 열리고, 연보랏빛 수국 덤불과 푸른 초원, 바다가 펼쳐진 아름다운 섬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아조레스 제도'라는 이름 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곳이 실제로 어떤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구글에 이미지 검색을 해봤더니 정말 입이 떡 벌어지는 풍경들이 펼쳐졌다. 자연이 줄 수 있는 극강의 아름다움과 그 속의 사람들 모습 자체가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가끔 모든 걸 털어버리고 떠나고 싶을 때, 바로 그런 순간 달려가고 싶은 그런 곳이었다.

저자인 다이애나 마컴은 취재차 캘리포니아 외곽에 정착한 아조레스 이민자들을 만나면서 아조레스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취재기자이자 퓰리처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녀의 자전적 에세이로 아조레스와 그곳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폭풍 같은 한 주를 보내며 온갖 일을 겪어 몸과 마음이 더할 수 없이 피곤할 때, 잠시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은 바로 그런 순간에 위로가 되어주고, 삶을 돌아보며 휴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주방장은 나처럼 아조레스에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이 이곳에 이렇게 매료되었다면, 거기에는 분명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목적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주변을 좀 보세요. 화산이며, 바다며, 꼭 잃어버린 시간 속에 들어온 것 같잖아요. 누군들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어요?" 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넘어오려는 걸 꾹꾹 참으며, 입을 앙다물고 초 치는 소리를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부름 받은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좋아서였다.    p.144

이 책을 읽으면서 '열 번째 섬'이라는 개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아조레스 이민자 중 한 사람인 알베르투는 이렇게 말했다. "열 번째 섬은 마음속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라오. 모든 게 떨어져 나간 뒤에도 남아 있는 것이죠." 라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든 떠난 적 없는 장소'라니 얼마나 든든한가. 나만의 비밀 공간, 내 영혼이 머무는 곳, 그리고 깊은 그리움이 되는 그런 곳 말이다. 저자에게 아조레스 역시 점점 그런 장소가 되어 갔을 것이다. 직업적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뜻하지 않게 아조레스에서 세 번의 여름을 보내면서, 자기 안의 상실과 갈망을 마주하고 스스로 바라던 많은 것들을 찾아나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시종일관 유쾌하고 긍정적인 섬사람들이 보여주는 삶의 태도 역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과거를 기억하고 슬픔을 간직하되 오늘을 잃지 않아야겠다고 말이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앨리스의 거울, 나니아의 옷장, 해리포터의 9 4분의 3번 승강장, 또는 무엇이 됐든 소설 속 주인공을 원래의 현실 세계로 돌려보내주는 통로를 통해 '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그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여지없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곳에서 경험했던 모든 순간들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본 기억이 우리의 발목을 움켜잡고 시공간을 뛰어넘어 그곳으로 데리고 가서 그곳의 냄새를 맡고 바람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대항해시대의 첫 번째 행선지이자 화산 폭발의 자연재해를 입은 곳이기도 하며, 독재와 냉전시대를 겪어낸 역사가 숨 쉬고 있는 섬. 나도 언젠가 꼭 한번 그곳에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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