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 인 윈도 모중석 스릴러 클럽 47
A. J. 핀 지음, 부선희 옮김 / 비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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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신경질적으로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진실 혹은 거짓, 둘 중에 골라보게. 자네는 남편에게도 이렇게 빡빡하나?"

"엄격히 말해서 진실은 아니네요."

그는 코웃음을 쳤다. "엄격히 말해서 진실인 것은 없어." 그가 말한다. "그저 진실이거나 그렇지 않은 것 둘 중 하나지. 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니거나."    p.152

애나는 광장공포증을 겪고 있어, 거의 일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살고 있다. 지금은 8주에 걸쳐 다섯 번 정도, 밖으로 나가려고 시도 중이다. 집 뒤의 정원으로, 그것도 우산을 방패 삼아 문을 열며 겨우 몇 걸음 떼는 게 고작이지만 말이다. 그녀가 열린 공간에 대한 공포, 일련의 불안장애를 겪기 전에 직업은 정신의학을 공부하고 아동심리상담사로 활약했던 의사였다. 현재는 비슷한 처지의 다른 환자들에게 온라인으로 상담을 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녀는 매일같이 이웃들의 일상을 훔쳐보고 촬영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남편과는 별거 중인데, 딸은 남편과 함께 거주하고 있어 그들과 가끔 통화하는 것이 전부이다.

어느 날, 건너편 집에 러셀 가족이 이사를 오게 되는데, 엄마와 아빠, 아이 하나가 있는 가족 구성이 예전 자신의 가족의 정확한 복사판이라고 생각해 더 관심있게 지켜보게 된다. '내가 속했던 가족이, 내 것이었던 삶이, 잃어버렸다고 여겼던 삶이' 바로 공원 건너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현실은, 공원 이편에 있는 자신의 삶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거였지만 말이다. 제인 러셀은 아들인 이선을 시켜 이사 선물로 양초를 보내고, 자신이 직접 애나의 집을 방문해 와인을 함께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들에게 어렵사리 마음을 열게 된 애나는 더욱 그 가족에게 관심을 쏟게 되는데, 그 집에서 비명 소리를 들은 다음 날, 제인이 누군가에게 칼에 찔려 피를 흘리는 장면을 창문 너머로 목격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살인사건을 목격했다고 경찰에 주장하지만, 경찰을 비롯해 어느 누구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실제로 아무 일도 없었다고, 어쩌면 애나가 복용하는 각성제들과 술로 인해 환각을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애나는 생각한다. 나는 미치지 않았어. 내가 상상한 게 아니야. 과연 애나는 살인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일까. 아니면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 그저 약물과 알콜로 인한 환각 작용이었던 걸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폭스 박사님.” 리틀 형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아무에게도요.”

나는 그를 바라본다. “무슨 말이죠?”

그는 허벅지 부근의 바지를 끌어올리며 내 옆으로 와서 쪼그리고 앉는다. “제 생각에는그가 말한다. “박사님께서 마신 메를로 와인과 복용하신 약, 그리고 보고 계셨던 영화 때문에 조금 흥분하셔서 일어나지 않은 무언가를 목격하신 것 같군요.”

나는 그를 노려본다. 그는 눈을 껌뻑인다.

“내가 다 지어냈다는 거예요?” 파리한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p.261

2018, 출간과 동시에 <뉴욕타임스> 1위로 뛰어올라 지금도 40주째 베스트셀러 목록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화제의 작품이다. 길리언 플린, 스티븐 킹, 루이즈 페니 등 쟁쟁한 작가들의 추천평도 화제였고, 에이미 애덤스, 게리 올드먼, 줄리언 무어가 주연한 영화 <우먼 인 윈도> 2020 5월 개봉 예정이라 영화화에 대한 기대감도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21세기의 히치콕'이라는 평가처럼 애나의 집과 러셀 가족의 집이라는 극도로 제한된 배경, 연극을 보는 듯 수직과 수평으로만 이동하는 시선이 인상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화자'라는 방식으로 점점 그러한 의심에 무게감을 실어주며 차곡차곡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간다. 창문 너머로 목격한 믿을 수 없는 이웃집의 살인 장면, 그럼에도 실제로 살인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 온라인을 통해서만 사람들과 교류하는 애나의 폐쇄적인 삶, 그리고 애나의 가족과 관련된 과거의 그날, 그 사건은 곳곳에 숨겨져 있는 복선과 겹겹의 반전으로 6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페이지를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놓치지 않도록 휘몰아치며 달려 간다. 세상 밖에 갇혀 있는 한 여자, 영웅도, 탐정도 아닌 그저 가여운 여자. 가족과 별거 중인데다 술과 약에 절어 사는 이상한 여자. 공원 건너편에서 한 여자가 칼에 찔리는 장면을 목격했지만, 그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눈치재지 못했고, 믿지도 못하는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과연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문은 잠겨 있고, 창문은 닫혀 있고, 말 그대로 자신의 집에 스스로가 원해서 감금되어 있는 상태에서 말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 말미에 극중 애나가 보던 영화들의 리스트를 수록해 두었다. 매일 매일 그녀가 틀어 놓은, 그녀가 보고 있던 영화들은 물론 작품에 굉장히 큰 영향을 주고 있어 더욱 흥미로운 리스트가 아닐 수 없다. 저자인 A.J.핀은 '작가와 독자가 훔쳐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우리가 허구인 줄 알면서도 타인의 삶을 경험하고 그들의 모험을 즐기기 위해 소설을 읽는 이유'라고 말이다. , 그러니 망설일 것 없다. 우리도 애나가 바라본 그것을, 그녀의 창문 너머로 훔쳐보자. 과연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누가 거짓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진짜 현실은 어디에 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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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서양철학 - 쉽게 읽고 깊게 사유하는 지혜로운 시간 하룻밤 시리즈
토마스 아키나리 지음, 오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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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변화를 면할 수 없다. 삼라만상의 온갖 것들이 이 섭리를 벗어날 수가 없는 처지다. 생각해보면 고민이라는 것은 모두 변화에서 탄생한다. 몸이 변하지 않으면 질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고 죽지도 않을 것이다. 연인끼리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면 실연도 없고 이별도 없을 것이다. 변화가 없으면 서로 빼앗는 일도 없을 테니 다툼도 없고 항상 채워져 있는 상태일 것이다.   p.67

<하룻밤 시리즈>는 역사, 철학, 고전, 종교 등 다양한 분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리즈 중에서 이번에 새롭게 개정판으로 출간된 것은 바로 '서양철학' 이다. 저자인 토마스 아키나리는 서문에서 이 책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깊게 고민할 때 그 고민을 잘 살필 수 있는 거울, 해결할 수 있는 도구 같은 철학을 제시'하고 싶다고. 그러니까 딱딱한 이론과 복잡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는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것이다. 서양의 사상가들이 3천 년 동안 도출해낸 성과를 일상에서 마주하는 것들에 응용하기라니, 굉장히 기대가 되었다.

저자는 '철학적인 사색이 사실 대단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특별할 게 없는 빨간 꽃을 보고 빨간색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 또한 훌륭한 철학적 실천이라는 것이다. 빨간 꽃을 보며 빨간색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은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을 모두 포섭한 주장을 제시했던' 플라톤의 이데아로 연결된다. 눈앞에 있는 꽃은 이윽고 시들어 없어지겠지만, 이후에 어딘가에서 또 다른 형태의 빨간색을 만나 그 꽃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하는 이 세계의 일정한 질서가 유지되도록 하는 만물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연인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해보자. 친구가 어깨를 두드리며 "네가 차인 것은 변증법에 따른 현상이었어. 연애라는 안정된 관계에 모순이 생겼고 그 모순을 계기로 발전된 결과가 현재라고. 그러니까 모든 게 잘될 거야" 하며 위로를 한다면 전혀 위로 받은 느낌이 들지 않을 것이다. "지금 버림받은 상태를 부정하는 새로운 만남이 찾아오면, 새로운 연애가 시작될 거야" 라고 말해주면 다소 격려를 받은 느낌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변증법에 따르면 앞으로의 그 만남도 다시 헤어짐으로 이어진다.   p.163~164

이 책은 고대, 중세의 사상과 근대의 사상, 그리고 현대의 사상으로 크게 카테고리가 나뉘어, 그 속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니체, 프로이트 등으로 각각 철학자들의 사상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각 카테고리 안에도 짧은 글들이 여럿 수록되어 있어서, 읽기에 전혀 부담이 없는 것도 흥미로웠다. 왜 남을 위해 봉사하면 행복해지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해 '성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복권에 당첨되어 수십억 원을 손에 넣으면 행복해질까에 대한 의문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고백론을 이야기한다. 현상을 보고 그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철학자의 모습을, 일상에서 문제나 고민을 떠안는 익숙한 우리의 모습으로 빗대어 설명하는 식이라 굉장히 술술 읽히는 글들이었다. 서양철학을 이렇게 쉽게, 막히지 않고 읽을 수 있다니 놀라웠다.

물론 가장 큰 장점은 '난해하고 어려울 것 같은' '추상적이고 실제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철학이 사실 우리 삶에 넓게 퍼져 있고, 인생의 걸림돌을 극복할 유용한 지침이라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던 철학 이론들에 대해 알아 보고 싶다면, 일상의 수많은 고민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하다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부족한 점들을 채워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내면을 깨우고 삶을 채우는 19가지 사색들이 생각의 폭을 넓히고, 일상을 비춰줄 거울이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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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클리벤의 금화 1
신서로 지음 / 황금가지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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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겠습니다. 저를 서리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실컷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먹으려 했다."

"하오면, 왜 먹지 않겠다고 하셨습니까?"

"먹고 싶지 않아졌으니까."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바로 그런 걸 묻고 있기 때문이다."     p.19

 

영주의 딸이 용에게 납치되었다. 행여나 용이 식사 거리가 아니라 노예나 시종으로 부리기 위해 잡아간 것이라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용이 그러한 습속을 갖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바가 없다. 그러니 가난한 남작의 여덟 번째 딸인 울리케 피어클리벤은 용의 한 끼 식사로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운명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애를 쓰고 운이 따라준다 해도 용의 소재지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날이 지나갈 테니, 그 동안 울리케가 무사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애초에 지상 최강의 포식자이자 맹수인 동시에 신화의 계보를 증거하는 실재의 현현인 용을 인간의 군사력으로 격퇴하는 것 또한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러한 가혹한 사태 앞에서 부정을 애써 꾹꾹 눌러 삼키며 영주가 침통해하고 있을 때, 용에게 잡혀간 울리케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이야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지점에서 시작된다. 무시무시한 포식자가 자신의 먹이에게 "너를 먹겠다."는 선언 뒤에 이어지는 장면이 살육의 현장이 아니라 이상한 대화였기 때문이다. 울리케는 감히 용에게 말한다. "저는 제가 식용에 적합하다는 근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신에 식은땀이 축축했고, 얼굴도 창백히 질려 있었지만 울리케는 까무러칠 것 같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용과 침착하게 대화를 시작한다. 이게 대체 무슨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설득과 이해가 가능한 판타지 세계라니, 우리는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놀라운 서사 속으로 시작부터 빠져들고 만다. 사슴을 능숙하게 발라내고, 자신을 한 끼 식사로 처리하려는 용을 상대로 화려한 언변으로 협상을 시도하는 공주와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는 대신 인간의 이야기를 듣고, 인간과의 대화를 통해 원하는 바를 얻으려는 드래곤이라니.. 그야말로 놀라운 상상력의 끝판왕이 아닐 수 없다.

 

 

너무 기가 막혀 잠에서 깨버린 울리케는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용의 음성이 귓가에 아직도 생생하였다. 그들은 허락을 구할 줄 모른다 -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새삼 자랑할 줄도 모른다 - 원래 그냥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숱하게 용사한다 - 가장 강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즈음에서야, 울리케는 어떤 호의를 갖고 있건 간에 이 용이 결코 만만치 않은 대화상대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p.358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에서 최장기간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인기작이 종이책으로 출간되었다. 이번에 1권과 2권이 출간되었고, 시리즈는 8권으로 완간 예정이라 이야기는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3, 4권이 2020년 초 출간될 예정이라 출간된 책의 이후 내용이 궁금하다면 브릿G에서 온라인 연재로 다음 이야기를 미리 만나보아도 좋을 것 같다. 이영도, 하지은을 잇는 한국 정통 판타지 문학의 귀환을 알린 작품이라는 평가를 듣는데, 바로 그러한 판타지의 전형을 깨트리는 인물과 서사가 매우 인상적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판타지 소설들이 전쟁을 주요 무대로 하거나, 분쟁의 해결 방안이 전투인 것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전투 대신 대화를 통해 '교섭'을 한다. 그리고 그 '교섭'이라는 장면의 대화들이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큭큭대는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고, 기발함에 혀를 내두르기도 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사실 '용에게 잡혀간 공주'라는 모티브는 신화에서부터 현대 판타지까지 단골 등장 소재이다. 흉포하고 절대적인 악 ''과 구원받아야 할 '공주', 그리고 용을 물리칠 '기사'. 그러나 이 작품에서 공주를 구하는 기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먹잇감으로 잡혀왔음에도 당당히 용과 입씨름을 하는 소녀 울리케와, 속내를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인간 세상을 바라보는 용이 등장한다. 특히 도입부의 90여 매에 이르는 용과 울리케의 먹히고 먹는 자의 '음식'에 관한 흥미로운 토론은 특히 백미이다. 이야기의 서두부터 낯선 전개에 당황스러웠지만, 페이지를 넘길 수록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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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양사전 -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잘난 척 인문학
김대웅 엮음 / 노마드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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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방향지향성과 기억력은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경우와 그것에 대처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게 했다.... 따라서 여성들은 준비성, 조심성, 다양성 등에서 남자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아내가 사소한 것까지 지적하는 것이 목표지향적인 남편들에게는 부질없는 잔소리로 들리지만, 따지고 보면 거의 모두 남자들의 생존에 꼭 필요한 조언과 충고인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목표지향적인 남편은 무용지물일까?   p.66

우리는 정보와 지식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을 비롯한 온라인 매체, 각종 매스컴 등이 온갖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쏟아놓고 있는데.. 그 중에서 나에게 꼭 필요한 것, 내가 알고 싶은 지식은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 책은 그런 독자들의 아쉬움을 해소시켜주기 위해 기획되었다.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갖가지 담론들과 알아두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지식들이 가득한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다.

인류의 진화에서 시작해, 유전자와 진화론을 거쳐 남자의 폭력과 여자의 잔소리, 평균수명, 결혼제도, 후손에 이르는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민주주의와 극단주의, 한민족, 유대인, 외계 생명체, 유령, 귀신 등의 실체에 관한 정보도 재미있었고, 인간의 본성과 트라우마, 결정장애, 인간성과 기억 등 심리학 적인 요소들에 대한 이야기도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문명, 세대, 현대사회의 키워드 등 사회적인 변화에 관한 이슈도 다루고 있으며, 그 속에서 미투와 불평등을 거쳐 정치적인 문제도 놓치지 않고 있다. 유전자, 유전공학과 우생학, 영아살해, 위약효과와 비만 등에 관련된 과학 정보도 어렵지 않으면서 새로운 정보로서 활용할 수 있을 만한 지식들이라 도움이 될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최근에도 이른바 '재판 거래'가 큰 이슈가 되고 있지 않은가? 사법부가 정권의 요구에 따라 재판을 한없이 미루고, 부당한 요구에 맞춰 판결을 내린 사례들이 문제가 된 것이다. 흔히 말하는 사법농단이다. 사법부가 목표하는 준법, 정의, 평등, 공평이 한때나마 모두 무력해진 것이다. 또한 뚜렷한 확증 없이 정황증거만으로 법적 판단을 내리는 경우도 매우 많다.   p.324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시리즈 신간은 바로 '문화교양사전'이다. 그 동안 영어, 우리말,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상식들을 다루어 왔는데, 교양, 상식이라는 점에서는 이번 신간이 가장 보편적으로 도움이 되어줄 만한 지식들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이 시리즈는 인문학적 교양을 필요로 하는 청소년과 일반인들에게사전답지 않은 사전, 사전 이상의 사전'으로서 역할도 충분히 하고 있어 매우 흥미진진하다. 국내외의 다양한 문헌을 근거자료로 하여 백과사전에서 제공하지 않는 풍부한 상식과 정보를 담고 있어 전혀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는 점도 장점이다. 기존에 영어잡학사전과 우리말 어원사전을 읽었었는데, 시대와 교감할 수 있는 온갖 지식들이 펼쳐지는 책이라 두고 두고 필요할 때마다 찾아서 읽고 싶은 책이었다.

억지로 암기하는 지식이 아니라 연상 작용을 통해 기억하게 되는 살아 있는 교과서가 필요한 학생들, 그리고 직장인들을 비롯해 내가 아는 상식보다 한 걸음 더 깊은 지식이 필요한 많은 분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각각의 테마에 맞게 역사적 배경과 의미 등을 읽으면서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 책을 읽는 데 크게 시간이 필요하거나, 이해하는데 노력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저 재미있게 읽으면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상식과 교양으로 고스란히 자신의 지식이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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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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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교회에 간다는 걸 아는 사람은 몇 명 안 돼요."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럼 당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걸 말해봐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팅커는 진지했다.

"아무도 모르는 것?" 내가 말했다.

"딱 하나면 돼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약속해요."

그는 자기 말을 증명하려는 듯이 심장 앞에서 성호를 그었다.    p.76

1966, 케이트와 밸 부부는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한다. 1930년대 말에 뉴욕 지하철에서 몰래카메라로 찍은 인물사진들을 전시하는 자리였다. 남자, 여자, 젊은이, 노인, 말쑥한 사람, 칠칠치 못한 사람.. 사진 속 사람들의 얼굴들은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을 포착하고 있었다. 사진 속의 많은 이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의 자아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공황이 시작됐을 때 열여섯 살이었던 케이트는 당시의 시대 풍경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진을 보다 30년의 세월과 만남의 협곡을 건너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얼굴을 발견한다. 팅커 그레이의 미소를 다시 보게 되면서, 케이트의 마음은 1937년의 뉴욕으로 돌아간다.

미국 중서부 출신의 놀랄 만한 미인인 이브는 케이트의 하숙집 룸메이트였다. 이브와 케이트는 신년 전야에 클럽에서 굉장한 미남에 값비싼 외투를 입고, 상냥하면서도 정중한 말투를 쓰는 신사 팅커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팅커와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 맨해튼 사교계에 발을 들이게 되는데, 함께 영화를 보고, 재즈 음악을 즐기고, 술을 마시고, 토론을 하며 서로에게 이끌린다. 비서로 일하는 케이트는 점심시간에 우연히 팅커를 만나 커피를 한잔 하게 되고, 그 일은 이브의 질투를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그들 셋에겐 아직 사랑보다 우정이 더 중요한 시기였고, 그들은 즐거운 분위기에서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고 나와서 함께 차에 탔던 세 사람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팅커와 케이트는 무사했지만 이브는 얼굴을 심하게 다쳐 여러 번 재건수술을 받게 되는 처지가 된다. 운전을 했던 팅커는 자책감에 이브의 삶을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퇴원하는 그녀를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간다. 성공을 위해 조지 워싱턴의품위의 규칙을 성실히 따르던 남자, 팅커의 충동적인 결정으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이제는 누가 누구의 것이고, 극장에서 누가 누구 옆에 앉을 것인지를 따질 수 없어져 버렸으니 말이다.

 

인생은 여행보다는 허니문 브리지와 더 가깝다. 20대 때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 그래서 뚜렷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수많은 꿈을 좇다가 다시 방향을 바꿔도 시간이 충분할 것처럼 보인다. 게임을 하면서 카드를 하나 뽑으면 그 카드를 그냥 갖고 다음 카드를 버릴 건지, 아니면 먼저 뽑은 카드를 버리고 그 다음 카드를 가질 건지 곧바로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탁자 위에는 우리가 뽑을 수 있는 카드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방금 내린 결정들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우리 인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p.517

에이모 토울스의 눈부신 데뷔작 <우아한 연인>이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2013년에 국내 출간되었을 당시에 읽고는 완전히 사랑에 빠졌던 작품이기도 하다. 새롭게 현대문학에서 출간되면서 <모스크바의 신사>와 같은 느낌의 디자인으로 새 옷을 입었는데, 너무도 우아하고, 아름답다. 에이미 토울스는 한 작품의 완성에 4년의 집필과 1년의 독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4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발표한 데뷔작 <우아한 연인> 2011년 작이고, 두 번째 작품인 <모스크바의 신사> 2016년 작이다. 그러니 지금 집필 중인 195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아마도 2020년 이후에나 만나게 될 것이다. 그의 신작을 기다리는 동안, 절판되어 구할 수 없었던 그의 데뷔작을 만나 보자. 그리고 지금 책 구매 시 영어 원문이 포함된 젊은 조지 워싱턴의 <Rules of Civility> 미니북을 받을 수 있다. <우아한 연인>의 남자 주인공 팅커가 성공을 위해 조지 워싱턴의품위의 규칙을 성실히 따르던 인물이기 때문에, 미니북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게다가 이 작품의 원제인품위의 규칙(Rules of Civility)’ 또한 조지 워싱턴의 '사교와 토론에서 갖추어야 할 예의 및 품위 있는 행동 규칙'에서 가져온 것이니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민자의 딸이자 노동 계층인 케이티와 할리우드 드림을 꿈꿨던 이브, 그리고 젊고 유망한 은행가 팅커, 이들 세 사람의 운명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와 팅거의 충동적인 결정으로 인해 완전히 달라진다.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등장하지만, 흔해빠진 삼각관계나 애정관계 없이 세 인물의 관계가 담백하게 진행되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중심 서사만 따지자면 언뜻 전형적인 구성으로 보이지만, 사실 줄거리 요약만으로는 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극 중 팅커는 오래 전 케이트가 무인도에 난파할 때 소로의 월든을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그 책을 읽기 시작한다. 케이트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를 만나 월든을 여러 번 읽은 흔적을 발견한다. 나 역시 6년 전에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월든을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케이트가 엄청난 책벌레였기 때문에 이 작품은 곳곳에서 고전 문학들을 배경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이브에게 헤밍웨이를 읽어 주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힘든 시기를 겪으며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들을 통해 위로 받기도 하는 등, 중요한 장면마다 배경에는 항상 고전 문학 작품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극 초반, 점심시간에 우연히 마주친 케이트와 팅거가 나누었던 대화는 한 번이라도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면 가슴을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팅거는 케이트에게 묻는다. "당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걸 말해봐요." 그리고 이들 세 사람의 운명이 폭풍 같은 격랑에 휩쓸리고 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두 사람. 이번에는 케이트가 팅거에게 묻는다. "당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사실 하나만 얘기해줘요." ,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이 작품을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만들어 준다. 아직까지 이 장면의 페이지까지 이르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나는 이 장면을 가슴이 시리도록 매우 사랑한다. 완벽하게 재현된 1930년대의 뉴욕을 배경으로 섬세하고, 우아하고, 아름답게 그려진 이들의 이야기를 꼭 만나 보길. 당신도 이 작품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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