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도에서 넘어지며 인생을 배웠다 - 넘어져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법
캐런 리날디 지음, 박여진 옮김 / 갤리온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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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겪은 험난한 파도들은 내가 서핑에, 인생에 그리고 생존에 얼마나 미숙한 존재인지를 낱낱이 드러내주었다. 나는 그 파도를 통해 세 가지 답을 얻었다. 약함을 받아들이기, 감사하기 그리고 전혀 쿨해지지 않기. 이 세 가지 모두 내가 정말 못하는 일이다. 특히 쿨해지지 않기는 정말 못한다. 이 모든 것이 일상을 살아가게 하고, 나를 일으키고, 고개를 들어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게 한다.    p.132

 

누구나 처음은 엉망이다. 그럴 수 있다. 처음부터 타고난 천재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하는 일을 완벽하게 잘할 수 없다. 시도해보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그만두면 된다. 물론 어느 정도의 연습 끝에 잘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5년이라는 시간을 들여서 자신이 못하는 게 분명한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5일도 아니고, 50일도 아니고, 5년이라니, 그 무슨 터무니없이 불합리한 시간이란 말인가. 그 정도쯤 해봤으면 이건 나랑 맞지 않는다고 포기해야 하지 않나 싶을 만큼의 시간이다. 그런데 여기, 첫 서핑 수업을 받은 후 파도를 잡기까지 무려 5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사람이 있다. 파도의 페이스를 미끄러져 내려올 수 있을 때까지, 실제로 서핑을 하기까지 5년이 걸렸다고 한다면, 누구나 미련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저자는 그 5년이라는 시간이 실패와 깨달음으로 충만한 나날이었다고, 절대 공허한 시간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하퍼콜린스 편집장이자 20년간 에디터로 살아온 저자는 마흔 살에 처음 서핑에 도전하고, 17년간 고군분투한 자신의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 17년간 노력했지만 뛰어난 서퍼가 되지도 못했으며, 그것이 돈을 벌게 해주는 일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히 무모하고, 터무니없이 보이는 일처럼 보일 것이다. 저자가 17년간 서핑을 통해 배운 것은, 인내심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용기, 문제에 직면하는 법 등 인생에 대한 태도였다고 한다. 그녀는 말한다. 살면서 정말 하고 싶은 못하는 일을 찾아 보라고. 그러니까 이 책은 일종의 '못하는 일을 하기 위한 안내서'이기도 하다. 잘하고 싶은 일, 잘 할 수 있는 일만 해도 바쁜 세상에, 일부로 못하는 일을 찾아서 무수한 시도와 실수와 실패를 경험하라니 대체 무슨 이유일까 궁금해졌다.

 

 

일어났던 모든 일 중에 조금이라도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을 이 상태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모든 순간은 '그 순간' 바로 전에 일어난 순간에 달려 있다. 마지막 한순간도 '그 순간' 전의 순간에 달려 있다. 이것이 무한히 반복되고, 현재의 순간에서는 무한히 긴 과거와 무한히 긴 미래가 다르다.   p.220

 

이 책은 저자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한 편의 칼럼에서 출발했다.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성공담이 아닌, 끝없이 패들링을 하고 파도를 타기 위해 일어나지만 물에 빠지는 순간이 대부분인 형편없는 서핑 실력에 대한 글이었다. 그 글은 사람들에게 전폭적인 공감과 지지를 받았고, 10만 회 이상 공유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못하는 일에 도전할 용기를 주었다. 이 책에는 서핑에 대한 고군분투기 말고도 저자가 겪어 온 수많은 많은 실패담들과 살면서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마주한 순간들이 솔직하게 그려져 있다. 저자는 회사에서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다는 통보와 함께 걱정한 적도 없던 유방암 선고를 받았다. 살면서 걱정조차 해본 적 없는 암 진단과 그 이후에 이어진 일련의 시간들은 저자에게도 만만치 않았다. 다섯 번의 외과수술과 일곱 달에 걸친 화학요법으로 몸은 지칠 대로 지쳐갔고, 정신은 거센 파도에 휩쓸린 듯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 험난한 과정을 간신히 버텼고, 그리고 다시 바다로 나간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본 것이 언제인지,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새로운 일을 시도한 게 언제인지 떠올려 보자. 특히나 자신이 형편없이 못하는 일에 도전해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시도해본 적이 언제인지 말이다. 저자는 서핑을 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벌게 해주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했고, 힘들게 번 돈을 아낌없이 서핑에 투자했다. 그리고 여전히 서핑을 잘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서핑을 사랑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의지,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다시 시작하고 나아지려는 의지 말이다. 이 책은 놀라운 성공담을 들려주지도, 어떤 분야에 통달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그저 우리가 '형편없이 못하는 일에 끝없이 도전'하게 되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 그것이 우리를 어제보다 나아지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못하는 일을 아주 오래 하다 보면, 조금은 덜 못하게 된다'는 저자의 말이 뭉클하게 와 닿았던 책이었다. 못하는 일을 하면 그 불편함이 아름다운 무언가로 바뀐다는 걸, 나도 경험해보고 싶어 졌다. 나는 이 책을 덮고 '새로운 못할 거리'를 찾아볼 생각이다. 어제보다 나아지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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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바산장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산장 3부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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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 부인은 아무것도 없어서 온다고 했지만 사실은 반대가 아닐까?”
“반대?”
나오코는 몸을 일으켰다.
“무슨 소리야?”
“잘은 모르겠지만…….”
마코토는 예리한 눈빛으로 나오코를 봤다.
“여기에 모두 모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p.62

 

나오코는 친구 마코토와 함께 하쿠바에 있는 '머더구스 펜션'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곳은 1년 전에 나오코의 오빠 고이치가 자살한 곳이었다. 당시 나오코가 전해 듣기로는 오빠가 산속에 있는 어떤 펜션에서 음독 자살을 했다고, 침대에 쓰러져 있던 그의 머리맡에서 독약이 발견되었고, 방은 잠겨 있어서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던 상태였다고 한다. 게다가 대학원 시험에 떨어지고, 취직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노이로제 상태였다는 것을 자살 동기로 보고, 별다른 타살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경찰은 '우울증에 의한 자살'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상한 것은 오빠가 죽기 전, 여동생 나오코에게 보낸 엽서에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는 거다. 나오코는 오빠가 어떤 곳에서 어떤 상태로 죽었는지,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문제의 펜션을 찾기로 결심한다.

 

매년 비슷한 시기에 같은 사람들이 대부분의 방을 예약하기에, 작년에 묵었던 손님들이 다 모이는 시기에 나오코와 마코토는 펜션으로 향한다. 여덟 개의 방에는 모두 신문 한 면 크기 정도의 벽걸이가 걸려 있었고, 거기에는 영국동요인 <머더구스>의 기괴한 노랫말들이 시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작년에만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지난해에도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숙소 뒤쪽에 깊은 계곡이 있는데, 거기 걸려 있는 낡은 돌다리에서 떨어졌다는데 유서가 없어 자살도 아니고, 범인을 짐작할 수 없어 타살도 아니라 사고사로 대충 정리가 되었다고 한다. 산장에 무언가가 있음을 직감한 나오코와 마코토는 오빠의 행적을 추적하던 중, 또 하나의 기이한 죽음과 맞닥뜨리게 된다. 매년 같은 곳에서 같은 사람들이 모이면 일어나는 사건은 정말로 우연인 걸까.

 

 

“2년 전에도 여기서 사람이 죽었습니다.”
마코토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무라마사는 잠깐 숨을 멈추고, 한참 뒤에 “예” 하고 대답했다. 그 호흡이 나오코의 마음에 걸렸다.
“3년 연속 사람이 죽었어요. 게다가 똑같은 시기에.”
“우연이라면 무서운 일이죠.”
“아니요.”
마코토가 형사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우연이 아닌 경우가 무서운 일입니다.”      p.188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1985년 데뷔 이후 이듬해 발표한 초기작이다. 국내에는 <백마산장 살인사건>이라는 제목으로 2008년에 소개되었었고, 이번에 새로운 표지와 제목으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밀실 트릭, 연쇄살인, 영국동요 <머더구스>에 얽힌 암호 등 본격 추리소설과 고전 추리소설의 여러 요소들이 잘 어우러져 지금 읽어도 여전히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작품의 주요 소재인 '머더 구스'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기보다는 쓰일 당시 사회의 상황이나 부조리를 부정적이며 잔인하게 묘사한 것이 많아서, 엘러리 퀸, 애거서 크리스티, 반 다인을 비롯해 추리 소설의 소재로 자주 사용되곤 했다. 운율을 우선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내용과 등장인물이 간혹 엉뚱하거나 기괴한데, 아이들은 가사에 개의치 않고 리듬을 따라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성인들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작품 속에서 잔혹한 동요 <머더구스>의 가사들을 영어 원문과 번역된 문구로 많이 수록하고 있어 가사를 일종의 암호로 해석하는 독특한 미스터리 속으로 빠져 들도록 한다.

 

개별적으로 전혀 연관성이 없는 듯 한 동요들이 어떤 규칙에 의해 재조합되며 서서히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는 것이 상당히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극중 탐정 역할을 맡은 여대생 콤비, 나오코와 마코토의 활약도 인상적이다. 나오코는 예쁜 외모에 가냘픈 이미지인데 반해, 마코토는 큰 체격에 옷차림과 말투가 남자 같아서 늘 남자로 오해 받곤 한다. 완전히 대조적인 분위기의 두 사람이 각각 역할을 분담해 사건을 풀어가는 재미 역시 이 작품 만의 매력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신인 시절에 썼던 작품이지만, 그의 최근 작품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선사하는 정통 추리소설의 정수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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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도키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9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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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대체 정체가 뭐야? 정말로 먼 친척 맞아? 거짓말이지?"
다쿠미의 말에 도키오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표정에 평소의 부드러움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똑바로 다쿠미를 바라보았다.
"맞아. 친척 같은 거 아냐."
"역시 그랬군. 그렇다면 너는 대체....."
"나는........" 도키오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미야모토 다쿠미씨, 당신 아들이야. 미래에서 왔어."    p.322

 

다쿠미와 아내 레이코는 여러 대의 생명유지장치에 둘러 싸인 채 투명한 벽 안쪽에 누워 있는 아들을 보고 있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만약 돌아온다 해도 아마 그게 마지막일 거라는 의사의 담담한 말투에 미야모토 부부는 너무나 슬펐지만 충격은 없었다. 왜냐하면 오래 전 다쿠미가 레이코에게 청혼을 할 때부터, 이는 어느 정도 예정된 수순이었기 때문이다. 레이코의 가족들은 희귀병 발병유전자를 가지고 있었고, 뇌신경이 차례차례 죽어버리는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은 치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병이 유전될 확률은 50퍼센트였고, 그들은 어떤 결과가 나와도 후회하지 않고 태어날 아이를 사랑하고 행복해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결심했었다. 아들 도키오는 십대 중반까지는 아무런 징후 없이 정상적으로 살았지만, 그 시기를 경계로 운동신경을 서서히 잃고 결국 식물인간 상태가 되고 말았다.

 

사실 희귀병 때문에 레이코가 결혼을 망설이던 순간에도,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고 어쩔 수 없이 지워야 하나 고민할 때도 다쿠미에겐 그녀를 설득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바로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라고 했던 어떤 청년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도키오의 마지막이 가까워지는 순간에 다쿠미는 레이코에게 고백한다.  옛날에 도키오를 만난 적이 있다고. 그때 자신은 스물세 살이었다고. 도키오는 시간을 거슬러 자신을 만나러 왔었다고. 그러니까 지금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도키오는 곧 스물세 살의 자신을 만나러 과거로 갈 거라고. 이게 다 무슨 소리일까. 아들의 죽음을 앞두고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걸까. 그렇게 이야기는 이십 년도 더 된 과거로 돌아간다.

 

 

"좋아하는 사람이 살아 있다고 확신할 수 있으면, 죽음 직전까지도 꿈을 꿀 수 있다는 말이라고. 당신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미래였어. 인간은 어떤 때라도 미래를 느낄 수 있어. 아무리 짧은 인생이어도, 설령 한순간이라 해도 살아 있다는 실감만 있으면 미래는 있어. 잘 들어.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 그건 마음속에 있어. 그것만 있으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어. 그걸 알았기에 당신 어머니는 당신을 낳은 거야. 그런데 당신은 뭐야. 불평만 하고, 스스로 무엇 하나 쟁취하려 하지도 않아. 당신이 미래를 느끼지 못하는 건 누구의 탓도 아냐. 당신 탓이야. 당신이 바보라서."    p.396

 

스물 셋의 다쿠미는 끈적끈적한 인간관계 따윈 질색, 허세든 뭐든 좋으니 큰 거 한 방을 노리며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게 고작인 청년이었다. 여자친구가 지인에게 부탁해 어렵게 구해 준 면접 자리에 가서도 홧김에 자리를 박차고 나올 정도로 대책 없는 그에게 나타난 알 수 없는 청년 도키오.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도키오로 인해 다쿠미의 일상이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사실 현재 시점에서 진행되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분량은 굉장히 짧고, 이야기의 대부분은 젊은 시절의 아빠를 만나러 온 아들과의 과거의 시점으로 펼쳐진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작품에 대해 작가가 되고 가장 즐겁게 써내려간 소설이라고, 주인공 다쿠미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캐릭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잘난 것도 없고, 성실하지도, 뛰어나지도 않았던, 지극히 평범하거나 오히려 그보다 못해 보이는 인물이 점차 성장하게 되는 스토리라 작가의 애정만큼 독자 입장에서도 그에게 감정 이입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도키오>라는 제목으로 200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8년에 소개되었었다. 이번에 비채의 히가시노 게이고 컬렉션으로 새로운 옷을 입고 개정판이 나왔다. 한층 더 원문에 가까운 새 번역과 새로운 표지 디자인, 그리고 작가와의 면밀한 상의를 통한 새 제목 등 전면적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식물인간이 된 아들의 영혼이 과거로 날아가,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모든 매력이 한 권에 압축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타임슬립이라는 SF적인 설정으로 시작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여자 친구를 추적하는 스릴과 미스터리를 거쳐 스물 셋의 아버지와 열아홉 아들 부자간의 특별한 모험 여정이 안겨주는 휴먼 드라마의 감동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내 아이로 태어나 행복했느냐고 물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든 다음 부모에게 그 답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어떨까” 하는 발상이 소설의 출발점이라고 밝힌 바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누군가의 부모이고, 누군가의 자식이기에 이 작품을 읽으며 뭉클한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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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지 오웰 지음, 김욱동 옮김 / 비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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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동무들, 지금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떻습니까? 이 문제를 한번 직시해봅시다. 우리의 삶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우며 또한 짧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겨우 숨 쉬며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먹이를 받아먹고 있습니다. 우리 중 노동력이 있는 동물은 마지막 힘까지 강제로 혹사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쓸모없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끔찍하고 잔인하게 도살을 당하지요. 태어난 지 1년이 지난 뒤에는, 이 영국 안에 사는 그 어떤 동물도 행복이나 여가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영국에 사는 어떤 동물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소이다.     p.15~16

 

그날 밤 '장원농장'의 존스 씨가 술에 취해 잠이 들자마자, 농장 건물 전체가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농장에서 가장 존경을 받고 있는 흰 수퇘지 메이저 영감이 동물들을 헛간으로 모은다. 이제 자신은 몇 달 남지 않은 것 같고, 죽기 전에 자신이 터득한 지혜를 동물들에게 전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메이저 영감은 동물들이 비참한 노예생활을 하는 것은 모두 그들이 힘들여 생산한 것을 인간이 모두 빼앗아가기 대문이라고 말한다. 동물들이 겪고 있는 삶의 재앙은 모두 인간들의 횡포 때문이므로, 인간들만 추방하면 자신들이 노동한 대가를 고스란히 얻을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러니 반란을 일으키자고, 인류 타도를 위해 철저하게 단결하고 대동해야 한다고, 그렇게 '모든 인간은 적, 모든 동물은 동무'가 된다.

 

그로부터 사흘 밤이 지난 뒤, 메이저 영감은 잠을 자다가 조용히 숨을 거두었고, 그 뒤 석 달 동안 모두가 비밀리에 바쁘게 움직인다. 메이저 영감의 연설 덕분에 농장 안에서 좀 더 똑똑한 동물들이 전과는 전혀 새로운 눈으로 삶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들 중 세 마리가 메이저 영감의 교훈을 하나의 완전한 사상체계로 다듬어 그것에 '동물주의'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동물들의 반란은 예상 밖으로 빨리, 그리고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존스는 쫓겨났고, '장원농장'은 동물들의 소유가 된 것이다. 이렇게 동물들에게 해피 엔딩이 되면 좋겠지만, 이건 그들에게 벌어지게 될 모든 일들의 시작에 불과했다.

 

 

"하긴 젊었을 때도 저 글씨를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지만. 하지만 내 눈에는 어쩐지 저 벽이 달라진 것처럼 보여요. 벤저민, '일곱 계명'은 예전과 마찬가지인가요?"
벤저민은 이번만은 자신의 규칙을 깨뜨리기로 작정하고, 벽에 쓰인 글씨를 클로버에게 읽어주었다. 벽에는 이제 '계명'이 하나밖에는 써 있지 않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p.181

 

이 작품은 1945년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는 '고전'이다.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후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이 더욱 굳어졌고, 이후 '소비에트 신화'의 실상을 고발하기 위해 이 작품을 집필했다. 그는 온갖 이념과 이상이 소용돌이치던 격동의 시대를 살았음에도 당대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부조리함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던 걸로 유명했는데, 이 작품 역시 그런 그의 사상이 고스란히 녹아 들어 있다. 이 작품은 동물을 의인화해 인간의 삶을 동물의 행태에 빗대어 그리고 있는 동물우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오웰은 이 책을 첫 출간할 때 제목에 '동화'라는 부제를 사용했지만, 사실 이 이 작품은 '동화' 보다는 '풍자소설'에 가깝다. 혁명이 성공한 뒤에 그것이 어떻게 변질하게 되는지, 권력을 잡은 지도자들이 어떻게 국민을 속이고 핍박하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고전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다양한 출판사에서 출간이 되었는데, 비채의 '모던 앤 클래식' 시리즈로 출간된 <동물농장>은 영미문학 번역의 대가 김욱동 교수의 번역으로 만날 수 있다. 김욱동 교수는 우리말 토착어를 살리면서도 원어를 훼손하지 않는 표현을 섬세하게 담아냈으며, 각주와 해설 등을 꼼꼼하게 수록했다. 작품의 분량 자체가 이백 페이지도 안 되는데, 거기에 작품 해설만 팔십 여 페이지나 되어 작품의 이해를 도와준다. 원작자의 생애 및 당시 시대를 반영한 상세한 주석은 물론 저자의 문학관과 정치관을 상세히 소개한 탄탄한 해설과 함께 더 쉽고, 깊이있게 고전을 만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오래 전에 쓰였지만 여전히 현대의 권력 구도를 비롯해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시사하는 바가 많고, 고전 치고는 가벼운 분량에, 동물 우화 형식이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으니 이번 기회에 다시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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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사라진 밤
루이즈 젠슨 지음, 정영은 옮김 / 마카롱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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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얼굴은 내 얼굴이 아니었다. 말도 안 돼.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거울 속 여자의 긴 금발 머리도 흔들렸다. 거울 속의 나는 나인데 내가 아니었다. 이목구비가 전혀 달랐다. 나는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건 도저히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생생한 꿈을 꾼 적이 있었던가? 창밖으로 지나가는 차의 엔진 소리도, 손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도, 방금 손을 씻을 때 사용한 비누의 라즈베리 향도 모두 너무 생생했다. 하지만 이게 현실일 리 없다. 그럴 리 없다.   p.20

 

뭔가 잘못됐다. 일요일 아침 잠에서 깬 앨리슨은 그 생각부터 들었다. 두통으로 인해 정신이 멍하고 머리가 울렸으며, 방 안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게다가 기억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텅 빈 공백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지? 그녀는 남편인 매트와 별거 중인 상태였고, 친구인 크리시와 줄리아의 권유로 데이트 앱에 가입해 누군가를 만나러 갔었다. 전날 밤 데이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고, 함께 살고 있는 크리시라면 뭔가 알지 않을까 싶었는데 집에 들어오지 않은 듯 했다. 그런데 상처를 살피기 위해 거울을 마주한 앨리슨은 혼란과 공포에 빠지고 만다. 거울 속에는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던 거다. 분명 거울 속의 나는 내가 분명한데, 자신이 기억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병원에 간 앨리슨에게 의사는 뇌출혈이 조금 있었고, 인간의 안면인식 능력을 관장하는 신경계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말한다. 안면인식장애는 딱히 치료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일시적인 현상일지 다시 얼굴을 인식하는 능력이 돌아올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얼굴을 알아 볼 수 없다면, 자신이 만났던 남자가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그를 알아볼 방법이 없다는 거다. 만약 정말 데이트앱으로 만난 이완이라는 남자가 그녀를 공격한 거라면,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 다시는 안전해질 수 없다는 얘기였다. 혼란에 빠진 앨리슨 앞으로 협박 편지가 도착한다. ‘데이트는 좋았어? 이 나쁜 년아. 경찰에는 알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 손에는 피가 묻었거든.’ 그럼에도 그녀는 경찰에 신고를 할 생각은 없었다. 과거에 믿었던 경찰들로부터 가족이 위험으로 내몰렸던 경험이 있어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걸까,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날 밤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이모는 진실의 무게에 눌려 쓰러졌다. 이모도 우리가 겪은 그 많은 아픔을 견디기 위해 나처럼 오랜 세월 기억을 덧씌웠을까? 하지만 비밀은 아무리 덮어두려 해도 언젠가 드러난다. 추악하고 어두운 비밀은 어떻게든 밝혀져 우리를 파괴한다. 나는 절벽 앞 다 무너져가는 집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앞에서 소풍을 즐기던 우리 가족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을 지탱하고 있던 그 작은 선의의 거짓말들. 서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했던 거짓말들. 진실이 너무나 추악해서, 너무나 잔인해서 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거짓말들.     p.390~391

 

안면인식장애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태어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한데, 자신에게 안면인식장애가 있다는 걸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냥 얼굴을 잘 외우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별로 닮지 않은 사람을 닮았다고 생각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몇 년 전 방송에서도 한 연예인이 안면인식장애를 고백하면서, 1시간 넘게 이야기를 해도 다시 만났을 때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털어 놓은 적이 있다. 그 밖에도 일상에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는 게 어렵다고 말한 연예인들이 꽤 많을 정도로, 이는 생각보다 흔할 수도 있는 장애이다. 반면 외부의 충격이나 두부 손상으로 인해 후천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하다고 한다. 이는 영구적인 손상일 가능성이 커서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이 작품 속 주인공 앨리슨이 겪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후천적 안면인식장애이다. 티비 속 유명인들은 물론, 가족, 친구, 그리고 자신의 얼굴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을 협박하고, 위협하고 있는 그 남자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어 오싹해졌다.

 

이야기는 안면인식장애를 겪게 된 여성의 심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폭력과 스토킹, 불법 촬영, 협박 등 현재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범죄로 인한 공포와 범인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더라도 알아볼 수 없게 된 안면인식장애라는 특수성이 자아내는 오싹한 긴장감이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빠르게 만들어 준다. 몇몇 복선들로 인해 중반 이후에 범인의 정체가 어느 정도 짐작이 되는데, 그런 독자들의 기대를 배신하듯이 작가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간다.  단기기억상실증과 안면인식장애를 가지게 된 여성 주인공을 둘러싼 매우 현실적인 범죄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점차 가족 문제와 사회적 문제까지 포괄하며 묵직한 메세지를 전달한다. 지루할 틈 없이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는 심리 스릴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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