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니 트윌과 대마법사 시어니 트윌과 마법 시리즈 3
찰리 N. 홈버그 지음, 공보경 옮김 / 이덴슬리벨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갈색 유리 파편에 담긴 과거의 기억들은 점점 더 빨리 뒤로 흘러갔다. 유리 마법 견습생이 견습 첫해에 주로 배우는 이 마법은 시어니가 알고 있는 종이 마법을 거의 다 합친 것보다 더 복잡한 수준이었다. 영국에서 종이 마법의 인기가 왜 시들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낮, 밤, 낮, 다시 밤. 떨어지는 빗방울. 맥주병의 파션 속에 흘러가는 기억들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아직까지 쓸모 있는 장면은 없었다.    p.118~119

 

이 작품은 '시어니 트윌과 마법 시리즈' 그 세 번째 이야기이다. 시리즈의 시작은 태기스 프래프 마법학교의 최우수 졸업생인 시어니 트윌은 금속 마법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해왔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종이 마법에 배정되는 걸로 포문을 열었었다. 현재 활동 중인 종이 마법사의 수가 너무 적다는 이유로, 인기가 없어 아무도 원치 않는  ‘종이 마법’ 견습생이 되고 만 시어니는 유리, 금속, 플라스틱, 고무 등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마법 재료 등이 많았는데, 고작 사양의 길을 걷게 된 종이 마법이라니 한숨이 나왔지만, 견습생 생활을 하게 된 에머리 세인 마법사의 집으로 간다. 그리고 그에게 종이 마법을 전수받으면서 차츰 종이 마법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1권에서는 금지된 마법을 행하는 흑마법사 리라가 훔쳐간 세인의 심장을 되찾기 위한 위험천만한 모험이 펼쳐졌었다. 그리고 2권에서는 영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신체 마법의 공격에 맞서 필사적으로 싸우게 되는 시어니와 에머리의 이야기가 그려졌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어니는 마법사는 엄청난 비밀인 '평생 한가지 재료만을 사용할 수 있다는 법칙'을 깨는 방법을 알게 된다.

 

이어지는 3권에서는 원래 끊을 수 없게 돼 있는 종이와의 결합을 몇 번이나 끊었다가 다시 이어 붙이며 다양한 재료로 여러 마법 들을 시도해 본 상태의 시어니가 등장한다. 그녀는 에머리 세인 마법사 밑에서 견습을 시작한 지 2년하고도 일주일이 되는 날 마법사 자격시험을 치를 계획이었고, 이제 겨우 몇 달 뒤면 바로 그 날이었다. 특히나 그녀가 자신의 계획대로 마법사 자격시험을 통과해야만 하는 이유는, 에머리와 그녀의 사랑을 눈치채기 시작한 사람들에 의해 앞으로는 동성인 다른 마법사 밑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마법사와 성별이 다른 견습생을 금지하기로 결정이 났고, 그래서 백 명 이상의 견습생들이 재배치될 예정이었다. 에머리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시험관을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베일리 마법사로 바꾸고, 시어니는 시험을 치르기 전 2주일 동안 베일리의 집으로 가서 그의 견습생과 함께 지내야 했다. 에머리와 베일리는 서로 아주 싫어하는 관계였고, 메일리의 성격 또한 만만치가 않아 시어니가 과연 시험을 제대로, 공정하게 치를 수 있을지가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된다. 그리고 2권에서 시어니의 친구를 죽게 만들었던 신체 마법사 사라즈가 사형 집행을 위한 이송 중에 탈출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시어니는 사라즈에 맞서기 위해 그의 뒤를 쫓는다.

 

 

시어니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지만 눈 중앙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 순간 시어니는 자신이 아무리 대단한 힘을 가졌고 만반의 준비가지 했다 해도 에머리의 심장을 마냥 편하게 해줄 수는 없음을 깨달았다. 그의 심장은 이미 부서지고 상처받았다. 적어도 떨리는 심장만큼은 진정시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온전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p.320

 

'시어니 트윌과 마법 시리즈'는 총 3권과 1권의 번외편으로 이루어져있다. 지난 4월에 1권과 2권이 함께 출간되었고, 이번에 3권이 나왔으며, 곧 외전도 나올 예정이다. 이 시리즈는 곧 디즈니플러스에서 영화로도 만들어 진다고 하니 제2의 해리포터처럼 될 지 기대가 된다. 사실 이 작품은 표지 이미지에서부터 느껴지듯이, 해리 포터류의 성장 서사보다는 로맨스 드라마에 가까운 장르이다.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마법 소녀가 견습생에서 정식 마법사가 되는 과정, 그리고 어둠의 마법을 사용하는 악의 무리와 겪게 되는 모험 서사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무엇보다 인간이 만든 재료들인 종이, 유리, 금속, 고무, 플라스틱 등과 결합한 마법사들이라는 독특한 소재가 흥미로운 시리즈이다. 이야기의 배경인 20세기 초 런던의 풍경과 작가가 만들어낸 마법 세계관이 잘 어우러져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종이라는 재료로 동식물과 같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는 물론, 눈송이 같은 자연물, 폭탄이나 장거리 메신저까지 만들어내는 '종이 마법' 또한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에서는 시어니가 모든 재료의 마법을 다루게 된 상태로 등장하기 때문에 더욱 흥미진진하다. 다양하고, 화려해진 마법 장면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1권, 2권에 비해 마법사들과의 대결 장면에서의 볼거리가 압도적으로 많으니 말이다. 그리고 마법사 자격시험을 앞두고, 그 동안 서서히 쌓아왔던 시어니와 에머리의 가슴 설레는 로맨스 역시 점점 완성 단계로 향한다. 판타지와 로맨스가 함께 하는 시리즈이지만, 전혀 유치하지 않고, 오글거리지도 않고 그 중간에서 딱 균형을 잡고 있어 누구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깨어난 장미 인형들
수잔 영 지음, 이재경 옮김 / 꿈의지도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요즘 여자애들은 외모를 중요시하지 않아." 펜션트 교수가 훈계했다. "파자마 차림으로 영화관에 가고, 지저분한 머리로 슈퍼마켓에 가고." 그는 그런 부류의 여자애들이 역겹다는 듯 코를 찡그렸다. "하지만 너희는 자나 깨나 외모를 뽐내야 해. 어떠한 예외도 없이. 왜 그렇지?"
"아름다움은 우리가 가진 최고의 자산이니까요." 우리는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이 적절한 대답이라는 것을 아니까. 우리가 그걸로 점수 매겨진다는 것을 아니까.    P.52~53

 

외딴곳에 고립되어 있는 사립 여학교 이노베이션스 아카데미에는 장미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소녀들이 있다. 소녀들은 방학 때도 집에 가지 않고 일 년 내내 교정에 갇혀 집중 교육을 받으며, 학교로부터 과한 보호를 받고 있다. 최근에 아카데미는 과목 수와 훈련 양을 늘리며 교육과정의 강도를 높였고, 그 상향 조정된 기준에 따라 선발된 열두 명의 소녀들은 최고의 재색을 갖추고 있었다. 필로미나는 현장학습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잠시 들른 주유소의 매점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학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이유로 사감에게 폭력적 훈계를 듣고, 밸런타인은 그에게 반항적인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충동억제치료를 받게 된다. 충동억제치료는 계도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판단될 때 받는 벌로, 보통 울면서 들어갔다가 24시간 후에 좋아져서 나오게 되는데 치료가 끝나면 기억이 알아서 지워져 어떤 치료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모두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 하는 과정이라 소녀들은 그저 학교와 관리자들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인 레논로즈가 사라지고 필로미나는 그녀의 방에서 작은 가죽 장정 책을 발견한다. '가장 날카로운 가시들'이라는 제목의 시집이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도 폭력적이고 분노가 어려있었다. 소녀들이 상황을 바꾸고, 자유를 얻고, 주도권을 잡는다는 식의 이야기는 생전 처음 읽어본 필로미나에게 그 책은 지금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어온 모든 가치관을 뒤흔들리게 할 만큼 강력한 충격을 선사한다. 그리고 자신이 매일 먹던 비타민이라는 이름의 캡슐에 뭔가 수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친구들에게 그에 대해 알리고, 함께 책을 읽으며 학교의 의심스러운 점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그들이 교육받고, 갇혀 있고, 훈련 받는 방식에 대해서 지금까지 속아왔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착하고 상냥하던 소녀들이 스스로 깨어나 학교의 엄청난 비밀을 파헤치기 되면서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너는 시키는 대로 한다." 그가 읊조린다. "너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들에 감사한다.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몇 달 후 학교와 부모가 너의 미래에 대해 내리는 결정에 무조건 따른다. 너의 미래는 우리가 결정해. 너는 거기에 신경 쓸 필요 없어." 그가 말을 멈추고 허리를 굽힌다. 그의 얼굴이 보인다.
"너는 아름다운 장미야, 필로미나." 그가 말한다. 마치 그게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인 것처럼. "우리가 완벽하게 가꾼 장미. 너는 모든 남자가 꿈꾸는 트로피가 될 거야."      P.267

 

사교 에티켓의 폭넓은 훈련을 통해 엘리트를 양성하는, 전국에서 가장 명망 있는 예비신부학교라는 설정부터 수상하기 그지 없는데, 이런 곳에 자녀들을 보내는 재력가 집안의 부모들 역시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소녀들은 매일 밤 사감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타민이라 불리는 약을 먹고 잠을 자고, 마치 화원 속의 장미처럼 남자들에 의해 배양되고 있다. '오직 아름다운 것들만이 가치 있다'고 부르짓는 교수들, 언제나 남자들이 기대하는 최고의 품행을 보여야 하고, 그들에게 상냥함과 정숙을 보여주는 아름답고, 공손하고, 순종적인 신붓감이 되는 것이 소녀들의 당연한 목표였다. 그녀들에게는 아카데미의 투자자들과 후원자들에게 '아름답고 순종적인 소녀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보여주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순응은 매력적인 자질이야. 사람들은 너희 의견을 반기지 않아. 입 다물고 듣기만 해. 이것이 모든 젊은 여자들에게 필요한 교훈이야.”라는 극중 교장의 말도 이상하지만, 그에 대해 아무런 의견이나 반항 없이 그저 순종하는 소녀들의 모습 또한 어딘가 비정상적이다. 그랬던 소녀들이 질문하기 시작하고,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그 모든 거짓과 기만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저자인 수잔 영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 특별한 헌사를 담았다. 이 책은 오랫동안 고통당하며 투쟁해온 소녀들을 위한 것이라고,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그녀들을 믿고, 함께 싸우겠다고 말이다. <시녀 이야기>의 계보를 이을 젊은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홍보 문구 만큼의 서사를 그리고 있지는 않지만, 이 작품이 오늘날 가장 논쟁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첨예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아름답고 비범한 소녀들이 세상을 향해 펼치게 될 반격을 만나 보자. 장미는 아름답지만, 그게 장미의 전부는 아니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김수현 지음 / 놀(다산북스)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특별한 것과 소중한 것은 다르다. 우리의 가족, 친구, 연인이 특별하고 우월한 존재여서 소중한 게 아니라 우리가 마음을 주어 소중해지는 것처럼, 나 자신과 내가 가진 것을 그 자체로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자존감은 채워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종종 자존감이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는 마음이라 착각하곤 하지만, 자존감은 특별하지 않더라도 그런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현실을 잊게 하는 마취제가 아닌, 현실에 발을 딛게 하는 안전장치인 것이다.     p.44

 

2016년에 출간되어 100만 부를 돌파한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의 저자 김수현의 신작이다. 당당하게 "나로 살기로 했다"고 외치던 저자는 4년 만에 한층 성숙해진 모습으로 돌아와 "나를 지키는 관계 맺기"를 이야기한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큰 고민거리가 없었던 저자는 어느 날 깨닫게 된다. 내가 완벽하게 신뢰했던 관계를 상대는 전혀 다르게 여기고 있었고, 상대의 마음을 잘 다루는 줄 알았던 자신의 실체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이 뭘 잘못한 건지, 뭘 놓친 건지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점차 관계가 어려워졌다. 이 책은 어떻게 관계를 맺고, 마음을 표현하고, 상대를 사랑해야 하는지 오랜 고민의 결과를 담고 있다. 자존감을 지키며 나답게 사는 법, 타인과 조화롭게 지내면서 당당하게 사는 법, 마음을 표현하는 법, 그리고 사랑을 배우는 과정을 너무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풀어내고 있다

 

언젠가부터 '인싸'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는데, 타인의 관심을 목말라 하는 현대인의 특성상 누군가가 인싸가 되면 또 누군가는 아싸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꼭 무리에 잘 섞여 노는 사람,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사람, 화제의 중심에 있는 인기 있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을까. 이 책에 따르면 삶에 필요한 인간관계의 양은 사람마다 다른데, 소속감이나 친밀감에 대한 욕구 역시 사람마다 차이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니 무'조건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보다 중요한 건 내가 가진 욕구를 이해하고 자신에게 맞는 관계의 양을 찾아가는 일'이라는 거다. 저자는 어릴 때 어른들에게 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말을 들어 왔지만, 이제는 '가끔은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 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인간관계가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 만큼 중요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나 자신보다 중요한 관계란 없다. 그러니 우리 모두 인싸가 아니라도 괜찮다. 인싸고 나발이고, 일단 나부터 행복하고 볼 일이다.

 

 

대단한 무언가를 이루지 않았을지라도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힘겨웠던 순간들과 버거웠던 감정들은 이미 온 힘을 다해 삶을 지켜낸 증거다. 그래서 나는 수고했다는 그 평범한 인사가 그렇게도 좋았다. 주저앉지 않기 위해 애써온 당신에게 내가 담을 수 있는 모든 무게를 담아, 한 번쯤 꼭,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지나온 모든 순간은 그대의 최선이자 성취다. 사느라 너무나도 애썼다. 그리고 잘 버텼다. 정말, 수고했다.    p.90~91

 

저자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던 당시에, 작업물의 가격을 책정하는 게 워낙 업체마다 제각각이었다고 한다. 정해진 규정이 따로 없다 보니 가끔 최저 시급의 절반에도 못 미칠 금액으로 의뢰가 들어오기도 하고, 무제한 이용권이라 생각하는지 추가 작업을 계속해서 요구 받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라도 해서 돈을 버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가도, 결국에는 거절하곤 했는데 무리한 요구라고 '당당하지만 정중하게' 말했다고.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무리한 요구를 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면, 상대는 다른 사람에게도 당당히 부당한 요구를 하게 된다는 거다. 그건 결국 시장 전체를 망치게 되고, 피해를 다른 사람과 나눠 갖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는 얘기다. 내가 한 번 참고 넘어가 버려서 모두가 참아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때론 부당한 요구에 응하지 않는 게 최선의 선의이자, 연대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개인의 선의가 꼭 전체의 정의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므로, 선의는 신중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절로 공감하게 되었다. 나만 참으면 끝나는 일은 없다는 것, 세상의 수많은 '을'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수많은 사람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산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지금처럼 사회적 함의나 개인의 상식이 천차만별인 세상이라면 더욱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때로는 '타인에게는 상식이 나에게는 무례일 때도 있고, 나에게는 선의가 타인에게는 오지랍'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걸 꼭 말로 해야 아느냐고'가 아니라 '그걸 꼭 말로 해야 압니다'인 것이고, '왜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지?'라고 묻기 전에 '내가 제대로 표현을 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어떻게 해야 나답게, 편안하게 관계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단호하면서도 다정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어 재미있게 술술 읽을 수 있다. 따뜻한 공감과 시원한 솔루션이 담긴 글과 그림을 통해 ‘나를 지키는 관계 맺는 법'을 배워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독자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5
M. C. 비턴 지음, 지여울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한 가지 얘기하지 않은 일이 있어요." 해미시가 말했다. 그는 토미가 신도였던 것 같은 해돋이 교회를 찾아갔던 일부터 휴가를 내고 그 교회에서 일자리를 구한 것까지 털어놓았다.
샌더스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왜 블레어 경감이 당신을 경찰의 제일가는 골칫거리라고 하는지 이제야 좀 이해가 가네요. 아니, 혹시 누가 당신을 알아보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그런 위험 정도는 감수하는 거죠."     p.101

 

스코틀랜드 북부의 험준한 산자락에 자리한 평화롭고 한적한 로흐두 마을, 그저 한가하게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소문이나 주워듣고 밀렵이나 하고 공짜 차나 얻어먹으며 살고 싶은 순경이 있다. 해미시는 그 날도 여기 농장에서 차 한잔, 저기 회반죽을 칠한 농가에서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시면서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이 마을에서 순찰은 단순한 사교 방문에 불과했다. 그런데, 로흐두 인근 글레넌스테이 마을에서 한 청년이 마약 과다 투여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악의 소굴과도 같은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스코틀랜드 고지도 더 이상 마약 청정지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해미시는 약물 소지죄로 체포된 이력이 있던 그 청년을 직접 만났었고, 지금은 약물을 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을 믿었다. 그래서 그가 약물 과용으로 숨졌다는 것이 의심스러웠고, 사망자의 유족이 사고사가 아니라 살인 사건이라고 그를 찾아 오자, 본부 몰래 조용히 수사를 진행하기로 한다.

 

해미시는 청년이 신도였던 것 같은 교회를 찾아갔다 수상스러운 정황을 발견하고, 휴가를 내고 신분을 감춘 채 교회에서 일을 하게 된다. 위장 취업은 시작에 불과했고, 마약 밀매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대책도 없이 허세를 떨다가 마약 카르텔 수뇌부를 만날 지경에 처하게 되는데, 뒤늦게 이 일을 보고받은 경찰 본부가 오히려 이를 기회 삼아 함정 수사를 계획하게 되면서 일은 점점 커지게 된다. 그러다 졸지에 글래스고에서 파견 온 올리비아 체이터 경감과 부부로 위장해 거물 마약상 행세를 하게 되는데, 해미시의 예측 불허한 종횡무진 수사는 과연 어디로 향하게 될까.

 

 

"왜 당신처럼 총명한 인재가 시골 마을 순경으로 썩고 있답니까?" 각자 술잔을 들고 자리에 앉자 배리가 입을 열었다.
해미시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설명하기도 지겹군요. 나는 순경 일이 좋습니다. 로흐두도 좋아하고요."
"하지만 그러면 인생은 어쩝니까? 재미는 어디서 보고요?"
"한순간의 재미 따위, 인생의 행복하고 별로 상관이 없다는 걸 알아서요." 그가 참을성 있게 대답했다.     p.195~196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그 열 다섯 번째 작품이다.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는 영국 추리소설의 황금시대라 불리는 20세기 초 고전들의 유산을 계승한 정통 코지 미스터리이다. 1985년 <험담꾼의 죽음>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34권의 시리즈가 출간되어 있다. 작가인 M. C. 비턴이 작년 12월 말에 돌아가셨으므로, 이 시리즈는 34권으로 마무리가 될 것이다. 무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세계의 사랑을 받는 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무사태평, 유유자적, 행방은 늘 ‘오리무중’인 로흐두 마을의 유일 공권력인, 야망 없는 시골 순경을 주인공으로 말이다. 엄청난 카리스마와 천재적인 수사 실력과 비인간적인 외모의 경찰들은 사실 현실성이 너무 떨어지게 마련인데, 대부분의 유명한 시리즈 캐릭터들이 다 그렇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너무도 평범해서 고개를 돌리면 어느 거리에서나 만날 법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스토리라 그런지 어딘가 친근함으로 무장한 매력으로 중독성있는 재미를 보장하고 있다.

 

특히나 이번 작품에서는 해미시가 난생처음으로 해외에 나가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한층 더 스펙터클한 모험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만의 특별한 점이 바로 '할리퀸 로맨스와 정통 문학 작품의 경계에 서 있다'는 건데, 그 부분에 있어서도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전작까지는 야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남자와 상류사회의 우아한 여인이 만들어 내는 로맨스가 있었다면, 이번 작품은 그녀와 파혼한 이후 다시 솔로가 된 해미시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시리즈물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매력을 좋아한다면, 이 작품을 통해 캐릭터가 설계되고 발전하고 만개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대체 어떤 캐릭터이길래, 무려 30년 넘게 사랑을 받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수십 년 전에 쓰였던 아늑한 고전 추리물이 현대에도 여전히 읽히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를 만나보길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에 대하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뒤에는 새로운 사람, 동물, 꿈, 사건이 생기지 않는다(아주 어린 나이에 이렇게 되는 사람도 있다). 모두 전에 겪었던 일, 전에 만났던 사람이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날 뿐이다. 옷차림, 국적, 색깔이 달라졌어도 모두 똑같다. 모든 것은 과거의 메아리이자 반복이다. 슬픔도 없다. 순전히 죽음을 앞둔 아주 작고 마른 고양이 때문에 엄청난 괴로움, 외로움, 배신감 속에서 몇 날 며칠 눈물을 흘리던 오래전 기억과는 조금 다른 경험 앞에서도 마찬가지이다.   p.34

 

수 세기 동안 미술가, 작가, 과학자, 철학자 등 수많은 남성들이 자신의 서재와 스튜디오를 고양이들과 공유해왔다. 찰스 디킨스, T.S.엘리엇, 레이먼드 챈들러, 어니스트 헤밍웨이, 무라카미 하루키 등 고양이에 매혹된 작가들의 명단만 해도 꽤 많다. 이들의 고양이에 대한 무한 애정 공세는 그들의 삶과 그 궤적을 같이 해 특별한 감동을 안겨 주는데, 공통점은 바로 고양이가 인간의 진정한 친구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반려 동물들은 그저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무슨 일인지 귀찮게 물어보지 않고, 왜 그러느냐고 짜증나게 몰아치지 않고,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동물들이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고양이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고양이와 사람이 어울려 사는 당연한 풍경은 너무도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인다. 하지만 도리스 레싱이 보여주는 고양이와 함께 하는 삶의 풍경은 조금 더 치열하고, 거칠다.

 

겉모습은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그 속에 영역과 서열을 다투고 짝 하나를 두고 경쟁하며, 때론 돌볼 여력이 없는 새끼를 미련 없이 버리는 모습들 또한 공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고양이들을 지켜보는 레싱의 다정함은 단순히 동물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삶을 살아가는 대등한 존재처럼 보여서 더욱 놀라웠다. 이미 고양이를 두 마리 키우고 있던 상태에서, 길에서 데려온 한 마리까지 세 식구가 되어 살아온 시간을 그리고 있는 '살아남은 자 루퍼스'라는 글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 고양이의 지능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인데, 루퍼스는 생존자의 지능을, 찰스는 과학적인 지능을, 장군은 직관적인 지능을 갖고 있다고 표현한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상처와 충격 때문에 데려온 지 사 년이 지나서야 레싱에게 애정 표현을 하는 루퍼스, 호기심이 많아 다양한 기계들에 관심을 가지는 찰스, 그리고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행동을 할지 직관적으로 알아차리는 장군까지.. 나는 이 고양이들을 실제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에 대해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싱의 고양이들에 대한 애정과 다정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글들이었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것은 정말 대단한 호사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충격적이고 놀라운 즐거움을 맛보고, 고양이의 존재를 느끼는 삶. 손바닥에 느껴지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털, 추운 밤에 자다가 깼을 때 느껴지는 온기,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고양이조차 갖고 있는 우아함과 매력. 고양이가 혼자 방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우리는 그 고독한 걸음에서 표범을 본다. 심지어 퓨마를 연상할 때도 있다. 녀석이 고개를 돌려 사람을 볼 때 노랗게 이글거리는 그 눈은 녀석이 얼마나 이국적인 손님인지를 알려준다.    p.264

 

이 책은 도리스 레싱이 1967년, 1989년, 2000년에 발표한 글을 한 권으로 엮은 산문집이다.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불행하게 보낸 유년 시절을 함께한 고양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작가로서 성공한 후, 당시 곁에 있었던 다리 하나를 잃은 늙은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곁에 있어준 고양이들을 바라보는 레싱의 시선은 여타의 고양이 에세이에서 만날 수 있는 아기자기한 사랑의 그것만은 아니다. 특히나 그녀와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야생 고양이들에 대한 기억은 치열하고, 날 것 그대로의 생존 투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놀라웠다. 야생 고양이들의 수가 마흔 마리를 넘기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가족이 직접 살처분을 해서 개체 수를 조절할 수밖에 없었던 야만스럽고, 끔찍한 기억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참혹했다. 이렇듯 그 어떤 고양이를 다루고 있는 에세이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고양이'들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어 그들의 진짜 삶을 만나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고양이들의 발정, 출산, 육아 등의 모습들 역시 사랑스럽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했다.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도, 특별히 싫어하는 편도 아니지만 우리 동네에서도 거의 매일 길고양이들을 만난다. 대부분의 길고양이들은 사람들을 피해 훌쩍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곤 한다. 길고양이들은 잘못된 속설 탓에 미움의 대상이 되어 왔고, 쓰레기봉투를 뜯고 시끄럽게 운다는 이유로 잡혀가 안락사를 당하거나 텃밭을 파헤쳤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이제는 무심히 지나쳤던 길고양이들을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인간이나 고양이나 살아간다는 건 혹독하고 냉엄한 국면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과 고양이, 그 둘 사이에 놓인 벽을 넘으려 애쓰는 레싱의 따뜻한 글을 통해서 사람과 고양이가 공존하는 세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