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늘에서 떨어졌을 때 - 삶, 용기 그리고 밀림에서 내가 배운 것들
율리아네 쾨프케 지음, 김효정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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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이후로 나와 다른 이들이 품은 가장 큰 의문은 3킬로미터 가까운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내가 어떻게 경미한 상처만 입고 살아남을 수 있었나 하는 점이었다. 비록 한참 후에는 의식을 되찾은 순간에 감지한 것보다 부상이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추락의 심각성을 감안하면 내 상처는 대수롭지 않은 수준이었다. 쇄골을 제외하면 부러진 데가 없었고 피부에 입은 상처도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기적이었을까? 아니면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이유가 있을까?   p.118~119

1971 12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열일곱 살 소녀 율리아네 쾨프케는 엄마와 함께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푸카이파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로 겨우 1시간 거리였고, 오전에 이륙한 비행기의 처음 30분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륙 20분 후 샌드위치와 음료로 구성된 간단한 아침식사가 나왔고, 10분 뒤에는 승무원들이 식사 뒷정리를 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승객들은 저마다 한껏 들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행기가 폭풍전선을 만났다. 조종사는 뇌우를 피하지 않고 지옥의 먹구름 속으로 똑바로 돌진했고, 환한 대낮이 밤처럼 어두워졌다. 사방에서 끊임없이 번개가 내려쳤고, 열린 짐칸에서 머리 위로 물건들이 쏟아져 내리고, 물건들이 날아다녔고,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울부짖었다. 그렇게 급속하게 비행기는 추락했고, 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기적처럼 단 한 명만 빼고는 말이다.

율리아네 쾨프케는 3000미터 상공에서 페루의 다우림으로 추락했지만,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했다. 인적이 없는 깊은 밀림 속에서, 쇄골이 부러지고 다리에 찢어진 상처를 입은 채 깨어난 그녀는 극적으로 구조될 때까지 무려 11일간 홀로 사투를 벌이고 살아남는다. 무려 3킬로미터 가까운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어떻게 경미한 상처만 입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도 신기한 일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었다면 기적은 딱 거기까지였을지도 모른다. 밀림을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다우림은 살벌하기만 한 곳일 테니 말이다. 그곳은 온갖 생명이 들끓는 곳이지만 인적은 찾아 볼 수 없고, 질척대는 습기와 각양각색의 곤충들과 악어와 뱀, 왕대머리수리 등 목숨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요소들이 차고 넘치는 곳이다. 율리아네 쾨프케의 부모님은 동물학자였고, 어려서부터 많은 것들을 경험해왔으며, 실제로 밀림에 들어가 살아본 적도 있었다. 당연히 야생 생활에도 익숙했고, 수많은 곤충과 동물들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정말 영화 같은 생존 실화가 아닐 수 없다.

 

"이 주위에 딱정벌레, 개미, 풍뎅이, 진드기 같은 생물이 몇 마리나 기어다니고 날아다니는지 알아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한테 무슨 소용이 있죠?" 나는 종종 이런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연구를 통해 잘 알게 된 대상만 제대로 보호할 수 있습니다. 숲과 생물다양성을 눈앞의 이익을 위해 파괴하는 것보다 보존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유익하고 가치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될 겁니다."    p.246

비행기 추락사고에서 홀로 살아남은 열일곱 소녀는 이제 쉰여섯이 되었다. 그녀를 유일한 생존자로 만든 그날의 추락 사고는 그녀의 나머지 인생 전체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그녀의 삶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지금의 자리에 이르게 했다. 그녀가 떨어졌던 팡구아나 밀림이 일생을 걸고 지켜야 할 삶의 목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사고 이후 무분별한 개발에 맞서 페루 밀림을 보호하기 위해 동물학자로서 평생 헌신해왔다. 유명한 동물학자인 부모님을 두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전 세계의 생물다양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따라야 할 행동 규칙들을 숙지하며 밀림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덕에 기적처럼 추락 사고 후에 생존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녀의 인생 행로가 정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민가에서 한참 떨어진 열대 우림 한가운데서 11일 동안 헤매는 일을 아마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견뎌내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은 1971년 비행기 사고가 일어난 지 꼭 40년 만인, 2011년에 독일과 미국에서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다. 물론 그 동안 수많은 곳에서 출간 제의를 받았지만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독일의 거장 영화감독 베르네 헤어조크를 만나 그와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희망의 날개>라는 다큐멘터리를 찍게 되면서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왕좌의 게임>에 출연한 소피 터너가 영화화 판권을 사들여 조만간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엄마를 잃은 슬픔과 홀로 살아남았다는 자책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 한 여성의 성장기이자, 무분별한 개발에 맞서 페루 밀림을 보호하기 위해 헌신한 한 동물학자의 분투기는 놀라울 정도로 감동적이다. 실화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드라마틱한 스토리라서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한 작품이기도 하다. 기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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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병 - 인생은 내 맘대로 안 됐지만 투병은 내 맘대로
윤지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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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고 나서 좋은 점은

생각지도 못한 소중한 이들이

내 옆에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p.180

그림책 작가 윤지회, 어제까지 두 돌도 안 된 아들과 씨름하며 겨우 어린이집에 보내고 그사이에 정신 없이 일하며 저녁 반찬을 걱정했던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위암 4기라는 믿을 수 없는 선고를 받게 된다. 위암 4기 환자의 5년 이상 생존율은 7%, 그 말은 그녀가 5년 안에 죽을 확률이 93%라는 말이다. 대부분 항암 치료를 받다 악화되거나 수술을 해도 재발, 전이로 고통 받다 죽는다고 한다. 이 책은 윤지회 작가가 '위암 4' 선고를 받은 날부터의 기록을 그림과 글로 엮어 낸 그림 일기이다.

 

위암 투병기라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이거나 감정의 저 밑바닥까지 내려간 구질구질한 서글픔을 예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상큼 발랄한 표지 색상과 일러스트가 의미하듯이, 이 책은 온갖 항암 치료와 약으로 육신이 너덜너덜해진 순간에도 소소한 기쁨과 행복, 그리고 희망과 웃음을 잃어 버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고통이나 슬픔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래서 신파나 멜로 드라마를 그다지 즐겨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프지만 사랑스럽고, 슬프지만 씩씩해서 참 좋았다.

 

모두들 각자의 어려움을 안고 산다.

때로는 정말 지치고 힘들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

조금씩 변하고 자라는

내 모습을 마주한다.    p.372

병원 나이 38 2개월, 두 돌 아기 엄마이자 무뚝뚝한 남편의 아내, 그림책에 그림을 그리고 무민 캐릭터와 SF 영화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책 이야기를 즐겨 하고, 아이를 재우고 웹툰을 보면서 피로를 풀고, 무서운 영화는 절대 못 보고 동물 학대와 장보기를 싫어하는, 그저 평범한 일상을 누리던 여자 사람. 하지만 지금은 8차 항암 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항암 약만으로 치료를 받으며이제 좀 살만 하다.’를 느낄 새도 없이, 발병 1 6개월 만에 암이 다시 난소로 전이되어 다시 수술을 받고, 표적 항암 치료를 받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되었건 ‘1년 안에 재발할 확률 80%’를 무사히 지나왔으며, 아이는 이제 말을 배우기 시작한 네 살 꼬마가 되었다. 여전히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그녀는 살아 있다.

계획한 대로 펼쳐지는 인생은 없고,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간이라고들 하지만, 이 책은 작가가 온몸으로 겪은 그 빗나감의 기록이기도 하다.

 

항암 치료 중에도아기는 나중에 가져요.’라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의사, 난데없이 푸시킨의 <>을 이야기하며 수줍게 마음을 고백하는갱상도 사나이아버지, 무뚝뚝한 걸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남편이지만 요동하지 않는뚝심력으로 묘한 위로를 선사하는 남편, 놀이터를 제 방 뛰놀 듯 천방지방 뛰다가도 이내 꽃잎 한 장을 주워 엄마 손에 꼬옥 쥐어 줄 줄 아는 아이, 이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녀의 투병기를 우울하고 칙칙한 색깔이 아닌 화사하고 따뜻한 색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불만이 쌓이고, 짜증이 나고, 화가 날 때 그녀처럼 되뇌어 보자.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데 뭘, 그냥 넘기자' 라고. 그렇게 예전보다 아주 조금은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그녀의 이야기에 마음이 울컥해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나의 일상을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사기병이라는 제목은 '내 인생에 사기 같은 병, 위암사기병'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거짓말 같은 상황에 처할 때 이렇게 소리치고 싶어 진다. "이건 사기야! 말도 안 돼!"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현실이고, 오늘을 버티고 살아내야 할 조건이다. 작가의 이야기는 매일매일 누리는 일상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고,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책을 읽자마자 윤지회 작가님의 SNS를 찾아가 팔로우를 했다. 작가님이 1년을 무사히 살아 왔고,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오늘도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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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초
T. M. 로건 지음, 천화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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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은 세 가지였다.

72시간 안에 이름 하나를 말해야 한다.

거절하면, 제안은 사라질 것이다. 영원히.

받아들이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선택을 번복할 수도 없다.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놓을 것이 거의 확실한 거래.

악마와의 거래였다.  p.11

<리얼 라이즈>에 이은 T. M. 로건의 두 번째 작품은 내에서도 뜨거운 화두인직장 내 괴롭힘성희롱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쩌면 당신에게도 벌어졌을, 언젠가 나도 겪었을 심각한 사회적 현상을 다루고 있어 묵직한 이야기지만, 시종일관 긴장감 넘치는 플롯과 예측할 수 없는 반전으로 인해 매우 속도감 있게 읽히는 작품이다. 전작에서 현대인의 삶에 뿌리 깊이 침투해 있는 SNS와 그 역기능에 대해 공감하고 있을 사람들의 심리를 건드려 공포심을 극대화시켰던 T. M. 로건은 사회적 불의 속에서 평범하고, 힘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통쾌한 메시지를 던져 준다. 놀라운 데뷔작만큼이나 흥미롭고, 매혹적인 작품이다.

, 누군가 당신을 위해서 대신 복수를 해주겠다고 제안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내게 이름 하나만 주시오. 감쪽같이 사라지게 해주지, 이 세상에서 영원히.” 누군가 당신을 위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대상을 사라져버리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모든 것을 뒤바꾸는 '29'의 결정, 제목인 29초는 그 돌이킬 수 없는 찰나의 선택을 의미한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제안을 받게 된 세라가 그것을 수락할지 말지 결정하는 그 순간. 상사인 러브록 교수에게 매일같이 각종 괴롭힘과 협박에 시달리고 있었던 세라는 과연 그 제안을 수락할 것인가. 그리고 러브록의 이름을 그에게 넘겨줄 것인가. 

 

인생에는 단 세 가지의 선택지가 있단다, 세라.

달아나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고

절차를, 제도의 힘을 믿을 수도 있다.

아니면 맞서 싸울 수도 있어.

세라는 맞서 싸우는 쪽을 택했다. 설령 그것이 상대와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비열하게 싸우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p.476~477

대학 시간강사인 세라는 승진심사를 앞두고 있었다. 이는 자신을 괴롭히고 성적인 압박을 가해오는 상사 러브록 교수의 행태를 더 참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인사권을 가지고 있었고, 공식적으로는 TV 출연 유명 교수에다 매력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러브록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거부 의사를 표하지만, 그는 전혀 거리낌없이 계속 그녀에게 추근대는 행동을 한다. 급기야 승진여부가 결정되는 날, 러브록은 세라를 승진 심사에서 탈락시키기로 했다며, 다시 승진 대상에 이름을 올리고 싶다면 학과에 대한 헌신을 자신에게 보여달라고 대놓고 요구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러브록의 행태를 참아낼 수 없었던 세라는 좌절감과 굴욕감에 치를 떨며 분노에 휩싸인다. 내년을 기약하며 승진을 포기해야 할지, 인사부에 그를 고발하고 이의를 제기해야 할지 고민하지만 어느 쪽으로도 결정할 수가 없다.

그때,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우연히 교통 사고 현장을 목격하고, 어린 소녀를 도와주게 된 대가로 일생일대의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인볼코프에게서누구든 원하는 사람 한 명을 없애주겠다.’는 제안을 듣게 된 것이다. 누구든 마치 존재한 적도 없는 것처럼 지구상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게 만들어 주겠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어떨까. 자신의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고, 잡혀서 처벌받을 일도 없고, 결과에 대한 책임 없이 뭔가를 할 수 있는 평생 한 번 있을 기회였다. 게다가 하필 세라에게는 미칠 듯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자신의 커리어를 가로막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제안을 받자마자 세라의 머릿속에는 단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른다. “누구나 벌을 내리고 싶은 사람이 한 명쯤은 있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주 조금의 정의라도 더 맛보길 원하는 거죠.” 그의 말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 누구든, ‘없애고 싶은이름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든, 내 앞길을 방해하는 사람이든, 혹은 사회 정의를 위해 사라지는 게 나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든 말이다. 이 작품은 사회적 약자인 자신을 보호해줄 제도적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가운데, 선택의 기로에 선 세라의 행동을 통해서 무언의 희망을 보여준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이야기는 예상과 전혀 다르게 펼쳐지고, 평범한 여성인 세라가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제대로 복수를 해내는 모습이 너무도 통쾌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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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 에프 모던 클래식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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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메리는 갈라파고스 제도에 대한 마지막 수업을 하던 중에 어떤 의문이 들어 말을 중간에 5초 정도 멈추게 된다. 그 의문을 말로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냥 거리를 헤매다가 이 교실로 들어와 이 어린 아이들에게 생명의 신비에 대해 설명해 대기 시작한 미친 여자일지도 몰라. 그리고 이 아이들은 내 말을 믿고 있어. 내가 모든 것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데도."    p.53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백만 년 전인 서기 1986년에서 시작된다. 당시만 해도 인류는 3킬로그램짜리 거대한 뇌를 가지고 있었던 시대였다. 그곳에서 제임스 웨이트라는 이름을 지닌 서른다섯의 미국인 사내가 2주간의 유람선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그 배의 첫 번째 갈라파고스 항해는 '세기의 자연 유람선 여행'으로 전 세계에 걸쳐 대대적으로 홍보되고 광고되었다. 백만장자인 웨이트는 사실 대단한 사기꾼이기도 했다. 무려 열일곱 명이나 되는 여자들을 꾀어 결혼한 뒤, 그녀들의 재산을 몽땅 다 털고는 잠적해 버린 고도의 협잡꾼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갈라파고스 제도로 가는 길에 과야킬에 왔을 즈음, 세계의 실상은 이러했다. 세계적인 금융 위기로 인해 자산의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거의 모든 곳에서 관광업이 망해 버린 상태였다. 따라서 아직 문을 열고 있는 호텔도 엘도라도 호텔이 유일했고, 항해할 준비를 갖춘 유람선 또한 바이아데다윈호 하나뿐이었다. 이백 개의 침상을 갖춘 그 호텔에 손님이라고는 웨이트를 포함해 여섯 명이 전부였다.

 

여기서 커트 보니것의 상상력은 휴가차 떠나는 유람선 여행을 진화의 여정으로 바꾸어 버린다. 인류가 종말을 맞는 바람에 갈라파고스 제도에 좌초된 생존자들이 완전히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어 버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인류 최후의 생존자들과 함께하는 진화의 여정이 만만치는 않다. 이야기가 현재에서 과거로, 또 미래로 계속 바뀌고, 진화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가 유람선의 승객들과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화자 사진의 사연을 들려주는 등 정신 없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보니것이 비판하고 풍자하고자 했던 것들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도 쉽지 않다. 물론 보니것식 풍자와 블랙 유머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모든 것들을 위트와 유머로 읽어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때 또다시 현실이 끼어들었다. 진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태양을 보니 작은 문제가 하나 있었다. 선장은 밤새 내내 자기가 정확히 서쪽으로 항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면 태양이 정확히 고물쪽에서 떠오르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 태양은 분명 고물 쪽에서 떠오르기는 했지만 우현 쪽으로 무척 많이 치우쳐 있었다. 그래서 그는 태양이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위치할 때까지 배를 좌현 쪽으로 돌렸다. 그가 바로잡은 이 실수에 대해 책임이 있는 커다란 뇌는 그의 영혼에게 그 실수는 사소한 것이고 금방 바로잡았으며, 여명이 밝아 오면서 별빛이 흐릿해지는 바람에 일어났던 실수라고 납득시켰다.   p.254

갈라파고스 제도는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천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태평양에 위치해있다. 19개의 섬과 주변의 해양 자원 보호 구역은 '살아 있는 박물관과 진화의 전시장'이라고 할 정도로 매우 독특한 해양 생태계를 이루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세 개의 해류가 만나고, 지진과 화산 활동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다, 다른 섬들과 떨어져 있다는 고립성 때문에 희귀한 생물들이 많다고 한다. 찰스 다윈은 1835년에 이 섬을 여행했고, 이곳의 생물들을 보며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을 주장하는 데 큰 영감을 받았다고 하며, '갈라파고스'는 바로 그 다윈의 진화론으로 유명해진 섬이기도 하다.

 

블랙 유머와 풍자의 대가이자 미국의 대표적인 반전 작가인 커트 보니것 또한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영감을 얻어 인류의 멸망과 신인류의 탄생 과정을 그리는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극중 화자는 백만 년에 걸쳐 인류의 진화를 목도하고 생존자들을 굽어보면서 결국 희망을 놓지 않는다. '공중에서 봤을 때 한때는 아름답고 풍요로웠던 이 행성이 지금은 부검대에 노출된 불쌍한 로이 헵번의 병든 장기들과 비슷하단 것을? 그리고 네가 사랑하는 인간들의 도시는 오직 성장만을 위해 성장하고 뭐든 닥치는 대로 다 먹어 치우며 망가뜨리고 있는 암세포들과 비슷하단 것을?'이라는 극중 문구처럼 인류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만들어 냈지만, 전쟁을 통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보니것은 형편없이 크기만 한 인류의 뇌와 그 뇌가 말미암은 무수히 많은 인간들의 잘못을 끊임없이 비꼬고 풍자한다. 그리고 백만 년 후의 새로운 인류는 뇌의 크기가 점점 작아져 현 인류처럼 쓸데없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도록진화하기에 이른다. 보니것이 그려내는 20세기 최후의 인류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길. 엉뚱하고, 다소 정신 없지만, 독창적이고 놀라운 상상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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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세 시대가 온다 - 실리콘밸리의 사상 초유 인체 혁명 프로젝트
토마스 슐츠 지음, 강영옥 옮김 / 리더스북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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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의학의 열쇠는 데이터가 쥐고 있다. 최대한 많은 생체표지자에 대한 수많은 테스트를 거쳐 선별된 데이터 말이다. 미국의 약국에서는 최고의 약효를 얻기 위해 이미 유전자 테스트와 마이크로비옴 분석을 실시하고 있다. 기계가 수집, 평가, 분석, 저장해둔 데이터를 기업에서 '처리'한다. 우리의 건강 데이터로 돈을 벌기 위해서다. 이제 의사는 단순한 치료자이자 처방전 발급자가 아니라 건강 코치이자 건강 데이터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   p.15

인간의 평균 수명은 현재 80세 안팎이다. 70년대만 하더라도 63세 안팎이었으니.. 그 동안 꽤 높아졌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고령화 사회가 되었고, 지금은 '100세 시대'라는 말로 미리 노후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그런데, '200세 시대'라니 웬말인가. 과연 인간이 200세까지 산다는 것이 가능한 말인가. 전혀 실감이 되지 않는다.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영생에의 꿈이 실제로 다가 오고 있다면 말이다. '무병장수'는 인류의 오랜 숙원이었지만, 사실 그것은 결코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우리의 욕망이 아니었던가.

여기서 더 흥미로운 대목은 질병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인간 수명을 연장시키려는 것이 바로 '실리콘밸리'라는 점이다. 저자인 《슈피겔》 실리콘밸리 지사 편집장이자 미국 수석 특파원인 토마스 슐츠는 2015 IT 기업 구글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그들의 미래 전략을 집요하게 취재해 <구글의 미래>를 썼다. 당시 많은 독자의 주목과 극찬을 받았던 그가 이번에는 실리콘밸리의 극비 연구소를 취재했다. 이 책에는 10년간 실리콘밸리의 대기업 본사와 연구소를 취재하며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연구자, 기업 경영인, 투자자, 생명공학 전문가, 의학자, 윤리학자와 함께했던 150건의 인터뷰도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복잡하고 세계적으로 중요한 질문이다. 모두 2~3년 전만 하더라도 단지 윤리학 연구를 위한 이론 혹은 SF소설 소재로나 등장하던 질문들이다. 하지만 이제 이런 질문들은 더 이상 이론에만 머물지 않는다. 앞에서 묘사된 시나리오는 지난 6개월 동안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다. 배아 단계에서 DNA 조작으로 심장 질환을 차단했다. 더 강한 식물로 성장하도록 유전자에 명령을 내려 토마토 덤불에 세 배나 많은 열매가 열렸다. 뿔의 성장과 연관된 유전자를 제거해 뿔이 없는 소가 태어났다.   p.169~170

2011, 췌장암 말기였던 스티브 잡스는 치료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아직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들을 찾았다. 암은 유전 질환이기 때문에 유전자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자신의 게놈과 종양에 대한 분석을 의뢰하기에 이른다. 불가능에 가까운 무질서하고 방대한 데이터였기에, 분석에만 몇 주가 걸리고,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물론 우리 모두 알다시피 잡스는 끝내 암을 극복하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그가 자신의 암을 분석해달라고 의뢰했던 것은 신기술에 속했지만, 현재 기술로는 게놈 전체를 분석하는 데 반나절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만약 그렇게 분석한 유전정보를 바탕으로 분자의 특성과 개인의 변이 상태에 맞춘 새로운 맞춤형 치료제를 찾았더라면, 종양의 성장을 억제했을 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우리는 세기의 천재를 그렇게 빨리 떠나 보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이 책에서는 빅데이터, 인공지능, 유전자 조작, 3D프린터 등을 결합해 질병을 극복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디지털 의학 연구의 흥미로운 현장들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기존의 첨단 의학 기술에 IT 기술이 더해짐으로써, 실리콘밸리는 이제 의학 혁명의 최전선이 되었다. 이미 유니콘 기업들은 유전학, 생물학, 로봇 공학, 빅데이터와 AI 등을 이용해 암과 알츠하이머를 정복하고 200세 시대를 열 수 있는 각종 신약과 기술을 임상 실험하는 단계에 있다고 하니 머지않아 이러한 기술들이 상용화된다고 해도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AI 주치의가 우리의 건강을 실시간으로 관찰하고 미리 처방을 내려주고, 태어나기도 전에 유전자 치료를 받고, 장기는 부품처럼 대체되어 수명은 한없이 연장될 것이다. 이들이 도전하고 있는 알츠하이머와 암은 물론, 노화와 죽음에 대한 궁극의 미래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IT 기술을 등에 업은 지금이 바로 의학 개발의 황금기이고, 바로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심대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중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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