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 현재의 탄생 - 오늘의 세계를 만든 결정적 1년의 기록
엘리사베트 오스브링크 지음, 김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9월
평점 :
절판


 

9, 스톡홀름, 마당이 내다보이는 방에 앉아 한 여성이 글을 쓰고 있다. 사방에 장식이라고는 없는 리넨 천을 널어놓은 아주 작은 주방이다. 둥지, 마음, 내부. 마치 안팎을 뒤집어놓기라도 한 듯, 이 방은 방 자체를 제외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차분하고 고요하며 외로운 밤이 되면 그는 글을 쓴다. 어머니의 숨소리와 벽 안쪽 파이프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뚫고 들려온다. 조만간 적대적으로 변하게 될 또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메시지. 그는 밤을 쓴다. 아니면 밤이 그를 쓴다고 해야 할까?   p.249

팔레스타인의 작은 마을에 사는 열여섯 소녀 함므다 좀마는 사진을 움직이는 마법에 푹 빠져든다. 움직이는 사진을 가지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남자에게 이야기 값을 내느라 엄마 몰래 빵을 훔치기도 하고, 상점에서 렌틸콩을 슬쩍하기도 한다. 그녀는 영웅과 자유의 전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세계가 확장되는 기분을 느낀다. 워싱턴의 트루먼 대통령은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에 앉아 일기를 쓰는 중이다. 그곳은 희고 거대한 감옥, 홀로 지내기에는 지옥 같은 곳이다. 노령의 대통령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수심으로 가득하다. 런던 교통국에서는 근무하는 여성 500명에게 해고 통보를 한다. 이제부터 수개월에 걸쳐 런던의 모든 버스 및 전차의 여성 안내원들이 직장을 잃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남자들이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1947 1 1, <타임스>는 영국인들을 향해 더 이상 시계를 믿지 말라고 알린다. 사람들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BBC 방송에 다이얼을 맞춘다. 전기식 시계는 빈번하게 발생하는 정전의 영향을 받았고, 기계식 시계는 정기적으로 점검을 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났지만, 유럽 전역에 걸쳐 피해가 속출했다. 수십 만 채의 건물이 사라졌고, 소도시와 마을이 잿더미로 변했으며, 수천 명의 노숙자가 생겼고, 모두들 물과 전기의 제한적인 공급에 대비해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시계를 훔치고, 숨기고, 엉뚱한 곳에 두고, 잃어버린다. 이 책은 바로 그 사라진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12, 뉴욕, 시간은 균형을 이루어 흐르지 않는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흐르며, 되돌릴 수도 없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잔과 같아서, 깨진 조각들은 이전의 상태로 완벽하게 복원될 수 없다. 또한 어떤 시점이 다른 시점보다 더 현재인지를 가리기란 불가능하다.

어쩌면 내가 한데 모으고 싶은 것은 1947년이 아닌지도 모른다. 내가 모아 맞추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하나로 뭉쳐져야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나 자신, 그리고 계속해서 떠오르는, 산산이 조각난 슬픔이다. 폭력에 대한 슬픔, 폭력에 대한 부끄러움, 부끄러움에 대한 슬픔.    p.333

1947년 한 해 동안 세계에서 벌어진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세밀한 고증과 문학적 언어로 재구성하고 있는 책이다. 스웨덴의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인 엘리사베트 오스브링크는 1947년을 오늘의 세계가 태동한 결정적 순간으로 보았고, 그 한 해 동안의 세계사를 다룬 독특한 르포르타주를 써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되고, 사람들은 과거의 비극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 한다. 냉전의 열기는 점점 타오르고, 미국은 CIA를 창설하고, 소련은 핵 보유국이 된다. 파리에서 디올은 뉴룩을 선보여 세계 패션계를 뒤집어놓고, 시몬 드 보부아르는 < 2의 성>을 썼고, 조지 오웰은 죽음을 앞둔 채 <1984>를 탈고한다. 프리모 레비는 숱한 거절 끝에 자신의 회고록을 출간해줄 출판사를 만난다. 빌리 홀리데이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동시에 마약 투약 혐의로 수감된다. 최초의 컴퓨터버그가 발견된다.

이처럼 1947년은 너무 많은 일들이 너무 빠르게 벌어졌던, 역사의 또렷한 단층을 만들어낸 시기였다. 저자는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선별하고 재배치해서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역사를 현재로 가져온다. 1년 열두 달, 154개의 시공간, 220명 이상의 등장인물로 1947년의 정치, 사회, 문화적 변혁을 재구성했다는 것도 뛰어나지만, 문장이 유려하고 매력적이어서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역사 이야기이다. 게다가 평범한 개인의 역사와 당대를 뒤흔든 사건들이 교차 진행되고, 모두 현재형으로 쓰였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변화들의 동시대성이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잔혹한 어머니의 날 1~2 - 전2권 타우누스 시리즈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덴슈타인은 밝은색 옷감이 든 비닐봉투 하나를 들어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그것이 분홍색 면 팬티임을 안 순간 그는 슬픔에 휩싸이고 말았다. 속옷의 주인은 죽은 날 아침 옷장서랍에서 이것을 꺼내 입었으리라. 언제나 그랬듯이. 그날이 마지막 날이 될지는 꿈에도 모른 채. 얼마나 많이 세탁하고 다림질했을까? 그녀는 그날 왜 하필 이 속옷을 골랐을까? 옷을 고를 때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꼈을까? 그에게 사건이 개인적인 일로 다가오는 순간은 바로 이런 사소한 것들에서 비롯되었다. 누군가 그녀를 죽이기로 결심하기 전까지는 눈 앞에 누워 있는 이 시체도 멀쩡히 살아 숨쉬는 인간이었을 터였다.    -1, p.200

부활절 연휴가 끝나자 마자 몰스하인의 오래된 저택에서 남성 변사체 한 구가 발견된다. 개 한 마리와 함께 홀로 살고 있던 80대 노인인 테오도르 라이펜라트는 이미 죽은 지 10여 일이 지난 듯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왜 그 동안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었을까. 얼핏 보기엔 자연사인 것처럼 보였다. 노인이 키우던 개 역시 아사 직전인 상태로 발견되는데, 놀랍게도 견사에 널려 있는 뼈들이 인골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덕분에 또 하나의 고독사 사건으로 치부되어 부검 없이 서류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사건이 본격적으로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검안 과정에서 두부손상이 발견되어 그가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을 가능성이 보이는데, 수사 결과 사망자의 자택에서 여성 유해 세 구가 발굴되었고, 그들 모두 5월 어머니의 날 전후 실종된 것으로 밝혀진다. 과연 노인은 연쇄살인범일까, 아니면 연쇄살인의 또 다른 희생자일까.

라이펜라트 부부는 전쟁 때 전쟁고아들을 맡아 키우던 수녀원이었던 건물을 사들여 지난 20여 년간 인근 보육원에서 수많은 아이들을 입양해 보살펴왔다. 리타 라이펜라트 부인은 1995년부터 실종된 상태인데, 아직도 마을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말한다. 하지만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민낯이 드러나는데, 그녀는 아무 힘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 욕조에 처박고 아이스박스에 가두고 우물에 던져 넣고 랩으로 몸을 감싸는 등 무자비하고 가혹한 체벌을 일삼아왔던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폭력과 억압이 어떻게 거대한 비극으로 발전하게 되는지를 그리고 있는 거대한 서사는 세 가지 미스터리가 교차 서술되면서 진행된다. 가족을 비롯한 가까운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란 대부분 아주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이면서 어느 순간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폭력의 산사태가 일어나고 마는 것이다. 이 작품은 방대한 분량만큼이나 탄탄한 구성과 다양한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플롯으로 인해 시선을 뗄 수 없는 마력을 발휘하고 있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더욱 정교해지고, 깊이 있어지는 넬레 노이하우스의 필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저는 이 흉악한 살인자에게 희생된 피해자들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맡을 때 적어도 피해자와 유족들의 원한은 풀어줘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살인사건 전담반의 동료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강력범죄의 피해자를 탈개인화하는 것은 결코 그들을 존중하지 않아서, 혹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수사를 하면서 객관성을 유지하고 감정적 타격을 받지 않기 위한 자기보호 차원입니다. 세상의 악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서 우리가 이런 것들을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인 겁니다."    -2, p.138~139

넬레 노이하우스의타우누스 시리즈아홉 번째 작품이다. 타우누스 시리즈는 단 한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는데, 이번 작품 역시 시리즈 정점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읽었다. 이 시리즈는 '고전적인 추리소설의 미덕과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흡인력을 동시에 갖추고' 있어 더욱 특별하다. 그리고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재미를 더해간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사건과 범인, 그리고 해결되는 과정만 있어도 미스터리 스릴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복잡한 스토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굴러갈 때의 그 짜릿한 즐거움과, 등장인물에게 이입되어 울컥하는 감동까지 주기란 쉽지가 않으니 말이다.

출간된 타우누스 시리즈의 순서는 아래와 같다.

01 사랑받지 못한여자  (원제 : Eine unbeliebte Frau)
02 너무 친한 친구들  (원제 : MORDSFREUNDE)
03 깊은상처  (원제 : Tiefe Wunden)
04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원제 : Schneewittchen muss sterben)
05 바람을 뿌리는자  (원제 : Wer Wind Sat)
06 사악한 늑대  (원제 : Boser Wolf)
07 산 자와 죽은 자 (원제 : Die Lebenden und die Toten)
08 여우가 잠든 숲 (원제 : Im Wald)
09 잔혹한 어머니의 날 (원제 : Muttertag)

넬레 노이하우스의 작품 특징은 무엇보다 퍼즐을 맞추는 즐거움에 있다고 하겠다. 일반적인 미스터리 물에서 흔히 치중하는 단순히 범인 찾기, 혹은 반전이나 트릭에만 집중하지 않는 대신, 그녀의 작품은 꼼꼼한 복선과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치밀하게 엮어서 한 편의 거대한 퍼즐이 완성되는 식이다.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인물들, 그냥 스치듯 지나가는 대사 한 마디, 누군가의 행동들이 결국엔 모두 한 방향으로 흘러 마지막 결론에 이른다. 단순히 깜짝쇼처럼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되어 감탄사를 불러 일으키는 결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굉장히 많은 편인데도 그들 각각이 어떻게든 관계를 가지고 있어 사건이 진행되면서 그에 대한 퍼즐을 추리하는 재미 또한 굉장하다. 전작이었던 <여우가 잠든 숲>에서 수사반장 보덴슈타인의 과거와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었던데 비해, 이번 작품 <잔혹한 어머니의 날>에서는 피아 형사의 가족사를 비롯해 그녀의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가 연루되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노인의 고독사, 아동 학대 등의 사회적 문제와 가족이라는 허상, 세상 모든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까지 담고 있어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많은 생각을 안겨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2권 말미에는 넬레 노이하우스 작가 인터뷰와 시리즈 각 권의 내용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으니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하겠다. 아직까지 타우누스 시리즈를 만나보지 못했다면, 이번 기회에 이 작품으로 넬레 노이하우스의 진면목을 만나보길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명화 한 편을 감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10초나 30? 아니면 꼬박 2? 중요한 화가의 전시회에는 300점을 거는 것이 표준이 되어 있는데, 그러면 그런 곳에서는 좋은 그림 한 점을 감상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일까? 그림 한 점에 2분을 쓴다면 300점을 모두 보기까지 열 시간이 걸린다(점심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화장실에 가는 시간은 셈에 넣지 않았다). 마티스나 마그리트나 드가의 전시회에 가서 열 시간 동안 그림을 본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세요. 나는 그런 적이 없다.    p.116

줄리언 반스의 첫 예술 에세이집이다. 그는 1989,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제리코의 그림 한 점을 두고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2013년까지 25년간 반스는 <현대 화가>, <런던 리뷰 오브 북스>, 〈가디언〉 등 다양한 예술, 문학 잡지에 예술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 이 책은 그 중에 제리코에서 들라크루아, 마네, 세잔을 거쳐 마그리트와 올든버그, 하워드 호지킨까지 낭만주의부터 현대 미술을 아우르는 17편의 이야기를 선별해 엮었다. 시중에 그림 읽기와 관련된 가벼운 에세이들이 워낙 많기도 하고, 소설가가 읽어주는 그림 안내서라고 하니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에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깊이 있고, 놀라울 정도로 전문적인 책이라 '아주 사적인' 미술 비평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수준 높은 책이었다.

 

인물 사진을 많이 그렸던 드가하면 발레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먼저 떠오른다. 대개 리허설이나 공연이 끝난 직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여성 발레리나들의 그림들은 누구나 하나쯤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런데 당시에 드가를 가리켜 "여자의 은밀한 모양을 품위 없게 그리는 일에 주력하는 화가"라는 주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여자들을 싫어했으며, 그들을 경멸하는 그림을 그렸다는 건데 아름다운 발레리나들의 모습을 그렸던 화가가 여성을 혐오한다는 혹독한 오해를 받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외에도 보나르는 한 여인의 그림을 385점이나 그려 지독한 사랑의 상징이 되었고, 세잔은 모델에게 사과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호통 치다 화가 나면 붓을 내팽개치고 화실을 뛰쳐나갔다고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미술에서 단 하나 중요한 건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브라크의 말이다. "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 눈이 있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과 언어가 서로 얼마나 무관한지 안다." 나아가 그는 "어떤 것을 정의하는 일은 그것을 정의로 대체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전기를 쓰는 일은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았던 인생을 전기로 대체하는 일이며 잘해야 난감한 일일 뿐이지만, 브라크의 도덕적 진실을 접할 수 있는 한 그런대로 괜찮으리라.    p.304

줄리언 반스. 소설뿐 아니라, 음악과 요리,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깊이 있는 평론을 써온 걸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 출간된 에세이만 해도 벌써 네 번째 책이니 말이다. 최근에 읽었던 그의 요리 에세이도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어려서 요리를 배울 기회가 충분치 않았던 줄리언 반스가 중년이 되어 뒤늦게 낯선 영역이던 부엌에 들어서서요리를 책으로 배우며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까칠한 부엌의 현학자가 투덜거리는 말들이 너무 공감이 되어 재미있게 읽었었다. 백 권이 넘는 요리책을 사 모으며 요리 경험과 교훈을 쌓아나가는 와중에 모호한 요리책에는 혹독한 독설을 퍼붓곤 했는데, 그 모든 것들이 그냥 투덜거림이 아니라 핵심을 찌르는 위트라서 인상적이었다.

 

이번에 만난 미술 에세이 역시 어느 책에서도 말해주지 않았던 지극히 사소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그의 독창적인 시선과 소설가다운 탁월한 상상력, 문화 전반의 깊은 지식을 토대로 풀어내고 있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미술사학자의 책도, 예술가의 책도 아닌, 그저 예술을 감상하는 비전문가의 글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소설가라는 사실이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 상상력으로 완전히 다른 창조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 말이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그림을 두고 작품의 배경이 된 사건과 그림이 탄생할 때까지의 과정, 그리고 화가의 삶과 다른 이들의 감상까지 조사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소설가 특유의 상상력을 가동해 한 편의 드라마로 엮어내고 있다. 사실 에세이라고 하기엔 내용들이 조금 어렵고, 낯선 배경 지식들이 익숙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홀린듯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것이 줄리언 반스의 힘이 아닐까 싶다. 소설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특별한 그림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의 기원 톺아보기
찰스 로버트 다윈 지음, 신현철 옮김 / 소명출판 / 201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자연선택은 매일 매시간 전 세계에 걸쳐 아주 사소한 변이라도 모든 변이들을 속속들이 조사하는데, 나쁜 변이는 버리고, 좋은 것들은 보존하고 더해간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자연선택은 기회가 언제 또는 어디에서 나타나든지 상관없이 아주 조용히 알아차리지 못하게 살아가는 생물적, 무생물적 조건과 관련하여 생명체 하나하나를 개선하도록 작동한다. 시계 바늘이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지나갔음을 표시할 때까지 우리는 서서히 발전해가는 변화들을 전혀 볼 수는 없다. 게다가 우리는 과거에 지나가 버린 지질학적 시대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가 너무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생명 유형이 과거와 현재가 다르다는 점만 알 수 있다.    p.122~123

인류를 뒤흔든 과학적 발견이야 많지만 다윈의 진화론만큼 심하게 세상을 흔든 것은 없을 것이다. 다윈의 이론은 인간 자신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시각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의 주장은 '생명은 신이 직접 개입할 필요 없이 유전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변화에 이끌려 조금씩, 그리고 영원히 달라져간다는 그의 말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신의 창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진화의 산물은 수많은 종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진화론은 교과 과정에서 적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전공자가 아닌 이상에야 접하기 어렵다. 그저 '진화론'을 다루고 있는 교양 과학서를 통해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나 역시 그러했고 말이다.

사실 <종의 기원>은 그 유명세만큼이나 읽기 어렵다는 악명이 높은 책이기도 하다. 다윈 시대의 생명과학 지식과 용어에 대한 이해 부족, 엄청나게 다양하고 또 매우 생소한 생물들에 대한 관찰 결과와 수많은 인물들의 조사 결과가 인용되어 있으나 이들을 거의 알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본문에 소제목이 없어 읽어 내려가기가 매우 힘들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 등이 그 요인이라고 한다. 그러던 차에 이번에 만나게 된 책은 1859년에 출간된 '종의 기원' 초판을 주석과 함께 완역하여, 더 깊이, 낱낱이 톺아볼 수 있도록 하고 있어 매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주석이 무려 2,200여 개에 달하는데다, 굉장히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많은 용어들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어 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가 읽기에도 조금 수월해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좀 더 자세히 내가 의도하는 바를 설명해야만 한다. 다른 무리와의 연관성과 종속성에 따라 강 하나하나의 무리를 배열할 때 자연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엄밀한 계보에 근거해야만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몇몇 분지나 무리들에서 발견되는 차이의 정도가, 비록 이 무리들이 공통조상에서 시작한 혈통에서 같은 수준으로 묶인 동류일지라도, 이들이 겪은 변형의 서로 다른 정도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서로 다른 속, , 절 또는 목이라는 계급에 유형이 소속되는 것으로 표현된다.    p.546~547

1859, 모든 생물은 완벽하게 창조되었기에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던 시대였다. 신이 이 자연을 설계했다고 주장하는 자연신학이 주류였지만 찰스 다윈은 그러한 믿음에 의심을 품었다. 그는 남미와 대서양·태평양·인도양을 넘나들며 수많은 동물·식물을 채집하여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20여 년 동안, 진화론을 입증할 방대한 증거와 자료들을 수집했다. 그리고 그가 발표한 <종의 기원>은 당시 사회의 시대사조를 뒤집어엎는 혁명적인 사건이 된다.

생물학 전공자들도 어렵게 느낀다는 <종의 기원>이기에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이 읽고 이해하기에는 여전히 낯선 내용들이 너무 많은 책이긴 했다. 하지만 역자의 친절하고 자세한 주석들이 길을 잃고 헤맬때 마다 붙잡아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생물학 강의를 듣는 것처럼 어려운 대목, 설명이 필요한 용어들이 등장할 때마다 잠깐 멈추고 주석을 읽으면서 숨을 고른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읽어야 하는 책이다. 누구나 다윈의 <종의 기원>을 알고 있고, 그가 말하는 진화론의 요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바로 지금이야말로 진짜 <종의 기원> 완역본에 도전해 볼만한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의 책 - 우리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물건의 역사
키스 휴스턴 지음, 이은진 옮김 / 김영사 / 2019년 9월
평점 :
절판


파피루스에 글씨를 쓰는 경험이 불만스럽더라도, 파피루스를 생각해낸 것 자체가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파피루스처럼 가볍고 유연하고 내구성이 좋은 필기 재료가 없었으면 두루마리가 존재할 수 없었을 테고,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없었으면 책이란 것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이 살려면, 먼저 파피루스가 죽어야 했다.    p.41

도서관에서 가면 특유의 냄새가 있다. 오래된 종이의 냄새, 책들이 많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만 맡을 수 있는 그런 냄새를 좋아한다. 한때는 그 냄새가 좋아서 도서관에 책을 읽으러 간 적도 있을 정도로 내게는 친숙함을 불러일으키고, 안정감을 주고, 편안한 기분이 들게 하는 그런 냄새다. 아마도 아주 어릴 때부터 책과 함께 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런 종이의 냄새에 반응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종이책을 사랑한다. 책들을 보관하는 문제 때문에 전자책을 사서 보던 시기도 있었지만, 결국은 종이책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종이를 한 장 넘길 때의 그 소리와 촉감, 냄새를 사랑하고, 책이라는 물건이 지니고 있는 무게와 품격, 그리고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을 때의 그 존재감을 사랑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덕분에 서재의 전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책꽂이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바닥에 쌓이기 시작한 책들로 인해 지금은 마치 미로처럼 발 디딜 곳을 찾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말이다.

키스 휴스턴의 <책의 책>은 바로 그렇게 종이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을 위한 완벽한 선물 같은 책이다. 책이 사물로서 갖는 물성, 즉 책의 몸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책이라는 매혹적인 공예품에 관한 러브레터, 책에 바치는 오마주, 책을 책이게 한 책 덕후들의 이야기이다. 종이와 잉크, 판지, 풀로 이뤄진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장치로서의 책, 질량과 냄새가 있고, 무게가 있고, 촉감을 느낄 수 있는 사물로서의 책 말이다. 저자는 점토판과 파피루스 두루마리에서 지금의 하드커버와 페이퍼백으로 진화해온 책이라는 물건의 흥미로운 2,000년 역사를 속속들이 파헤친다.

 

레코드판에서 CD로 넘어간 음악 애호가들이나 DVD에서 블루레이로 갈아탄 영화광들,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 넘어간 독자들이라면, 마르티알리스의 마케팅 전략에 전율할 것이다. 시인 마르티알리스는 글 몇 줄로 '양피지로 만든 소책자'라는 새로운 미디어 형식을 소개하고, 이 새로운 매체로 제작한 자기 책을 사라고 독자들을 부추기고, 정확히 어디로 가면 자기 책을 파는 서점을 찾을 수 있는지까지 알려준다.    p.393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두루마리에서 시작해 동물 가죽으로 만드는 양피지 시대가 온다. 하지만 양피지의 불가사의한 매끄러움과 고혹적인 외양에도 불구하고 이는 동물의 죽음에서 시작된 유혈이 낭자하고 아주 폭력적인 기나긴 과정의 산물이었다. 잔인한 해부 과정을 하나하나 거친 끝에야 겨우 양피지 한 장이 나온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고대 중국에서 최초의 종이를 발명하게 되는데 종이의 제작 방법과 발전하게 되는 과정 또한 매우 흥미로웠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72단계나 거쳐야 겨우 한 장 나오는 종이 생산 과정이 기계화하면서 효율을 높이게 되었고, 19세기 중반 목재 펄프로 종이를 만들게 되면서 원재료인 넝마 품귀 현상이 해결되었다고 한다.

, 이렇게 종이의 탄생과 생산 과정을 거쳐 다음에 이어지는 항목은 '본문'이다. 인쇄술에 관한 흥미로운 역사가 펼쳐지고, '삽화'를 거쳐, '무선 제본' '페이퍼백 장정' 등으로 책이라는 것이 점점 더 진화해오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섞인 구성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책의 원형은 15세기 말 무렵 한 인쇄공의 손에서 결정되었고, 1,000년이 넘는 책 제작 전통을 바꿀 접착식 제본으로 특허를 신청하고 나서 몇 년 뒤 영국의 기차역에서는 통속적인 페이퍼백 염가 소설책이 팔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 인쇄, 제본, 삽화 등 책의물성이 그려온 역사를 인류 문명의 결정적 장면들과 교차해 풀어간 책의 생애사 자체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사실 이 책은 남다른 디자인과 제작 방식으로 구현한 책의 구조로 읽기도 전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평범한 양장본은 표지로 쓰는 두꺼운 판지를 천이나 가죽으로 감싸는데, <책의 책>은 판지를 그대로 노출했다. 제목은 백박으로 제작했으며, 부제나 저자, 역자명은 검정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했고, 책머리’ ‘책등등 책의 각부 명칭을 표시했다. 내지에도각주’ ‘캡션등 구성 요소의 명칭을 넣어 책의 신체 구조를 환기할 수 있게 해서 '사물로서의 책' 그 자체를 고스란히 느끼면서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매혹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