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책
니나 게오르게 지음, 김인순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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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 상태에 있는 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부인을 사랑한다고 절대 말하지 않을 사람과 결혼하는 것과 같아요." 닥터 사울이 좀 더 조용히 말한다. "그런데도 부인은 부인의 모든 애정과 에너지를 그에게 쏟아 부어야 합니다. 부인의 모든 사랑을. 부인이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면 말이죠. 행복한 결말 없이. 현재하지 않는 사람과 부인 인생의 많은 부분을 보내게 될 겁니다."

그게 무슨 대수라고? 그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헨리와 함께 지낼 때는 늘 그랬다.    p.106~107

템스강을 오가는 유람선에서 배의 난간 옆에 서 있던 어린 소녀가 강물로 떨어진다. 해머스미스 다리 위에 있던 사람들은 아이가 떨어지는 걸 보지만 모두 너무 놀라 꿈쩍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수영을 한 게 25년 전임에도 망설임 없이 물 속으로 뛰어 내리는 한 남자가 있다. 종군 기자로 전쟁터를 누비던 헨리는 그 시절 만났던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헨리는 무사히 아이를 구하고 나오지만, 역광 때문에 그를 보지 못한 운전자가 모는 자동차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하고 만다. 그 사고로 그는 의식불명 상태, 즉 코마에 빠진다. ‘코마라는 단어가 그리스어로깊은 잠을 뜻한다고 하는데, 충격적인 사고로 헨리는 깊은 잠 속에 빠져 들고 만다.

그리고 15일 뒤, 열세 살 샘은 아빠를 만나러 병원에 온다. 벌써 열네 번째 방명록에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고, 그러느라 학교에서 이 수업 저 수업을 한 시간씩 빼먹고 있다. 샘은 멘사 클럽에 가입한 수재이고, 공감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래보다 매우 성숙한 소년이다. 샘은 가족은 엄마와 새아빠 스티브와 동생 맬컴이지만, 언제나 아빠인 헨리를 그리워해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이 병원에 인위적 혼수상태에 빠진 상태로였지만 말이다. 샘은 아빠를 만나러 오면서 다른 병동에 역시 의식불명 상태로 입원해 있는 또래의 여자아이 메디를 만나게 된다.

 

런던은 두 세계를 가르는 이른 아침의 안개에 뒤덮여 있다. 불안한 걸음걸이로 밤의 어둠을 헤매는 방랑자들의 세계. 나도 한 때 이 세계에 속했다. 한편 일터로 출근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야 하는 사람들의 세계. 두 개의 평행 세계. 두 세계가 마주치는 곳에서, 튜브에서, 버스에서, 이른 아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집에서,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무시한다.

밤의 방랑자들은 자신들 인생의 또 하루가 지나간다는 걸 참지 못하고, 끈을 놓치지 않으려 그 하루를 어둠 속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은 자신들 앞에 있는 하루를 허비하지 않으려 한다.    p.246

책을 읽다 보면 누구나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문학의 마법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읽고 뭔가 달라진다. 허구의 이야기가 우리의 현실에 금이 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페이지의 한 문장, 하나의 단락, 그리고 숨겨진 여백을 통해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아주 잠깐이라도 주마등처럼 스치는 우리의 일생을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순간은 책을 덮어도 잊을 수 없다. 앞으로 펼쳐질 기나긴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사실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책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런 작품을 만나게 되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참 설레인다. 바로 이 작품처럼 말이다. 이 작품은 '우리가 살 수도 있을 다른 삶들이 존재한다는 걸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보통 불의의 사고가 등장하고, 코마 상태에 빠진 인물이 나오는 작품이라면 앞으로 이어질 서사가 어느 정도 예상이 될 것이다. 치료 과정에서 오는 슬픔과 고통, 주변 사람들의 삶과 그 이후에 벌어지게 되는 비극으로 인해 신파성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서사를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인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헨리가 겪는 꿈의 세계와 코마 상태에 빠진 그를 지켜보는 이들의 진짜 현실을 교차 진행시키고 있다. 그가 현실에서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그의 아들과 사랑을 마음속에 품은 채 말하지 않아 오래도록 함께 하지 못했던 전 연인이 병원에서 만나게 되고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단순한 슬픔이나 눈물이 아니라 감정을 공유하는 이해의 순간이다. 그리하여 과거와 현재가 헤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하고, 삶과 죽음이 만나는 경계에서 현실과 환상이 어두운 꿈속을 유영한다. 이 작품은 오래 전 <종이 약국>이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니나 게오르게의 신작이다. 전작에서는 손님의 상처와 슬픔을 진단하고 그에 맞는 책으로 처방하는 독특한 약국이 등장해 책의 힘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뭉클하게 펼쳐졌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사변 소설을 출간하는 출판사를 운영하는 에디를 통해 문학의 힘과 역할을 보여준다. 누구라도 상처의 이면을, 상실의 바깥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운 것을 해내는 것이 바로 문학이고, 이야기의 힘이다. 오랜 만에 눈물 범벅이 되어 읽은 작품이다. 꿈 같은 소설이지만, 그 어떤 작품보다 현실과 맞닿아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작가가 자신의 최근 작품들에 직접 이름 붙인삶과 죽음 3부작의 마지막에 해당되는 작품이라고 하니 다른 작품들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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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손을 보다
구보 미스미 지음, 김현희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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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동안에 푹푹 쌓인 잡동사니와도 같은 기억을 품고 있다가 비눗방울이 터지듯이 그 기억들이 하나둘 사라져버릴 때, 과연 난 누구의 이름을 부를까? 혼다 씨의 작고 둥근 등을 바라보면서, 일본식 주점 현관에서 보앗던 미야자와의 등을 떠올렸다. 미야자와가 지난번 우리 집에 온 날로부터 어느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장마가 끝나고, 벌써 7월의 끝자락이 다가오고 있었다.   p.47

소노다 히나는 노인요양시설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다. 부모님을 사고로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랑 단 둘이 살면서 언젠가 할아버지를 병간호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작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현재는 혼자 살고 있다. 혼자 남겨진 외로움에 노인요양복지전문학교에서 만난 동창 가이토와 연애를 했지만,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더욱 고독해진다는 것을 깨닫고 헤어졌다. 하지만 헤어진 후에도 가이토는 이런저런 핑계를 들며 그녀를 찾아왔고, 그녀 역시 특별히 그를 밀어내지 못하며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모교의 입학 안내 팸플릿을 제작하기 위해 찾아온 광고회사의 미야자와를 만나게 되면서 가이토와 함께 할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야기는 소노다 히나의 시점에서 시작해 광고회사 사장인 미야자와, 히나의 전 남자친구인 가이토, 그리고 가이토의 직장에 신입으로 들어온 하타나카의 시점으로 계속 교차 진행된다. 하나의 장이 끝날 때마다 앞 장에서 벌어진 사건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사실 그때 상대가 올랐던 각자의 상황은 무엇이었는지 여러 인물의 시점으로 보여진다. 사랑에 모든 걸 쏟아 부을 만큼 외로운 여자와 자신을 원하지 않는 여자에게 마냥 집착하는 남자, 사랑 따윈 내 삶에 필요 없다고 여기는 여자와 타인을 사랑할 수 없는 남자, 사랑에 대해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네 남녀의 이야기는 연애의 여러 모습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어째서 나는 이 바다가 보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내 안에도 저 바다의 파도처럼 나와 타인을 갈기갈기 찢어서 갈라놓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나는 아무와도 마음을 깊이 통하고 통하고 싶지 않다. 타인에게 나 자신을 이해받고 싶지도 않다. 누군가에 대해서 쉽사리 잘 아는 척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 나는 누군가와 마음을 서로 통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나 자신도 그 사실을 훨씬 이전부터 어렴풋이 눈치 챘을 것이다. 나 혼자의 세상에서만 나는 살아갈 수 있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는 것이다.    p.234~235

대담하고 파격적인 장면 묘사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제159회 나오키상 최종 후보작으로 섬세한 문장과 뛰어난 심리묘사로 연애의 달콤함과 씁쓸함을 담고 있다. 아내와 별거 중인 미야자와는 히나와의 만남을 계기로 살아갈 의미를 되찾지만, 그녀의 곁에 계속 머무를 수 없다. 가이토는 히나를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선 힘을 써서 억지로 그녀를 품고, 상처를 주고,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대놓고 추근대며 접근하는 하타나카를 만나 히나를 잊으려고 한다. 남편과 이혼한 하타나카는 한 달에 한번 남편의 요구로 아이를 만나러 가지만, 모성이라는 게 일절 없어 겨우 그 한 시간이 고역이기만 하다. 정작 자신이 낳은 자식한테는 상냥하게 대하지 못하면서, 하루하루 죽음에 다가서는 노인들에게는 상냥하게 대할 수 있는지 스스로도 신기해하는 그녀를 이해하기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늙어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을 보살피는 일을 하는 히나에게 어린 소녀가 묻는다. "사람은 언젠가 죽잖아요. 근데 왜 태어나는 거죠?" 소녀의 순진한 질문에 명쾌하게 대꾸할 수 있는 정답을 가지고 있는 어른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언젠가 죽게 되어 있는데 왜 태어나는 걸까, 어차피 언젠가 헤어지고 말 거라면 대체 왜 모든 걸 다 바쳐서 사랑하는 걸까. 사랑의 끝에 쓸쓸함만 남는 거라면, 영원할 수 없는 그 감정을 우리는 왜 갈구하는 것일까. 감각적인 문체로 섬세하게 사랑의 감정들을 묘사하고 있는 연애 소설이지만, 삶이란 무엇인지,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작가는 한국 독자들을 위한 메시지로 첫 장에산다는 것의 애달픔을 마음껏 음미해주세요라고 썼다. 이 책 속 이야기를 읽는 동안, 그렇게 애달픈 마음으로 삶을, 사랑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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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표 영어에 입시를 더하다 - EBS 스타강사 혼공샘의 우리 아이 영어 공부법
허준석 지음 / 북폴리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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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의도한 대로 따라주지 않을 때는 부모가 의기소침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시행착오는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엄마표 영어의 영역이다. 대부분의 엄마 아빠들은 오랜 시간 끈기 있게 영어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한다. 바로 '시작점 낮게 잡기!'

'숫자'는 중, 장기 목표이지 시작할 때의 분량이 아니다.    p.39

이 책은 현직 고등학교 영어교사이자 EBS 스타강사로 활동해온 혼공쌤 허준석 선생님의 '엄마표 영어'에 대한 새로운 영어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중.고등학교에서 15, EBS에서 12년을 가르치며 특별한 교육 경험을 쌓았고, 공교육과 사교육 현장에서 체득한 소중한 경험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학교 선생님들과 소통하며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EBS에서 다양한 강사들을 만나면서 학교 밖의 교육 생태도 잘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가 두 아이의 아빠가 되고 나서 학부모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취학 전부터 초등 고학년까지 영어 교육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게 된다.

수학과 마찬가지로 영어도 초등학생 때부터 속칭 '영포자(영어 포기자)'가 속출하고 있으며, 이런 아이들에게는 공교육 자체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되어 버린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부모가 영어를 잘하지 못해도, 사교육 걱정 없이, 아이들이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거북이형' 공부법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일반 부모들도 충분히 따라 할 수 있도록 천천히 영어 걸음마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자녀의 영어 교육에 관심이 많은 모든 부모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한국의 중, 고등학생들은 '내신 영어' '실제 영어'를 병행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2가지 모두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 이 시기에 부모는 '내신 영어'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초등학교 때까지 잘 만들어왔던 '실제 영어' 근육이 점점 퇴화한다. 그렇게 중, 고등학교 6년을 보내고 나면 시험 영어만 잘하게 된다.

중학교 입시 영어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영어 독서 근육을 튼튼히 키우는 일이다.    p.170~171

그렇다면 '엄마표 영어'란 과연 무엇인가. 보통 공교육에서 영어를 배우는 시점은 초등학교 3학년이다. 이 시기 '이전'부터 집에서 오디오 자료와 원서를 활용해서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을 소위 '엄마표 영어'라고 한다. 물론 부모가 직접 가르치거나 함께 영어 공부를 하기 힘든 경우도 있으니, 사교육도 보완재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기준 없이 사교육 시스템에 맡겨버린다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거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어떤 교육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진지하게 토론해서, 부모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해 그에 맞추어 영어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어느 한 사람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교육이 완성되는 시대는 지났으니 말이다. 학원을 보내야 하는 타이밍, 아이가 영어를 거부할 때 공부로 느끼지 않도록 하는 방법, 영어 공부의 적기는 언제인가, 그리고 초등학교 전부터 1~2학년, 3~4학년에서 중,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별로 영어 공부의 중요한 키포인트를 짚어주고 있어 매우 실용적인 팁이 되어 주는 책이었다.

엄마표 영어는 사실 초등학교까지가 최적기이고, , 고등학교에는 방목형으로 가되 온 가족이 소통하는 부분적 참여형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아이에게 영어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은 아마도 모든 부모들이 절감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시작할지, 중간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부모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면서 로드맵을 그려야 할 것 같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아이의 특성을 고려하고, 비용과 목표를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적절하게 조절해야 할 것이다. 영어 자체를 위한 '인생' 보다 인생을 위한 '영어'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저자의 말이 와 닿았다. 물론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느리고, 천천히 가려면 흔들리지 않고 뚜렷한 중심을 잡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현실적으로 꼭 필요한 책이 될 것이고, 아이가 없더라도 영어에 대한 거부감 없이 쉽게 배울 수 있는 방법 자체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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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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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바다야?"

"바다 소리가 가장 음악 같거든."

입을 꾹 다물고 들을 준비가 된 표정을 짓는 나에게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음악이 없으면 서랍 같은 걸 엄청 많이 사야 될 거야. 원래는 음악 속에 추억을 넣고 다니니까.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온 추억도 새로 산 서랍 속에 넣고는 겉에 '작은 별'이라고 쓴 테이프를 붙여놓아야 할걸. 아마 번거롭겠지. 근데 그럴 필요까진 없어. 우리에겐 바다가 있으니까. 바다는 아주 큰 서랍이야. 우린 먼 훗날 바다 앞 모래사장에 걸터앉아서 오늘을 떠올릴 수도 있어."   p.52

만약에 음악이 없으면 우리 삶은 어땠을까. 글쎄, 한 번도 음악이 없는 삶을 상상해 본적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이 얼마나 낯설고 삭막할지 아마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최초의 음악은 기록되지 못한 채 사라져버렸지만, 음악이 아득히 먼 옛날부터 존재했다는 흔적들은 곳곳에 남아 있다고 한다. 고대문명에도 갖가지 형태의 음악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고학자들이 찾아 냈으니, 음악이란 우리가 짐작하기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 분명하다.

 

이 소설에서 극중 해야는 선에게 묻는다 만약에 음악이 없으면 어떨 것 같냐고. 그에 대한 대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럼 난 터벅터벅 걸었을걸?"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일까 싶었다. 극중 해야 역시 흥미가 번진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 난 음악을 들으며 걸을 땐 조금 다르게 걷거든. 예를 들면 '타닷타닷' 이라든가 '퐁퐁퐁' 걷는 거지."

이 한 장면에 이 작품의 특별함이 모두 담겨 있다. 저자가 그 동안 음악을 계속 만들어오던 사람답게 소설에서도 특유의 리듬감이 느껴지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문장에서, 단어에서, 그리고 장면마다 어디선가 음악이 흐르고 있다는 착각이 드는 그런 작품이었다.

 

 

 

"가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잊어버려. 그래서 아주 사소한 걸 두려워해. 예를 들면 자신을 따돌리는 아이나, 제시간에 마감하지 못할 업무 따위를."

그녀는 여전히 정면을 응시하였다.

"이런 걸 보면 비로소 깨닫게 되지. 내가 두려워하던 건 이 거대한 파도 앞에 아무것도 아니구나. 심지어 내 죽음도 여기서는 너무 작은걸."    p.81~82

악동뮤지션 이찬혁의 소설 데뷔작이다. 얼마 전에 발매된 악동뮤지션 정규앨범 <항해>와 세계관을 공유한 작품으로 삶의 가치관과 예술에 대한 관점을 이 소설을 통해 은유적으로 녹여냈다고 한다. 실제로 앨범에 수록된 곡들의 제목이 소설 속 차례의 제목들과 공유되고 있어서, 소설과 노래가 하나로 흐르는 듯한 느낌도 든다. 거센 파도가 부서지는 새파란 바다의 질감이 고스란히 표현된 표지의 이미지부터, 페이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파란색 글씨까지 이 소설은 바다의 푸른빛을 공감각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극중 앨범 발매를 앞두고 녹음 작업을 하던 선은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가로서의 삶이 지금 이곳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작업을 중단하고 1년간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여행을 하며 수많은 예술가들을 만났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세계에 도취되어 있었고 선의 갈증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예술 그 자체보다 '모든 예술가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단발 머리의 한 여자를 구하게 되면서, 그토록 헤매던 삶의 답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게 된다.

 

귓가에 넘치는 바다, 눈을 감고 느낀다

난 자리에 가만히 앉아 항해하는 법을 알아

 

가짜로 살기에는 허상에 가득 찬 그들을 증오하며 인정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진짜로 살기엔 아직 진짜의 면모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던 나, 선은 그런 자신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바다를 사랑하고, 바다 소리가 가장 음악 같다고 말하는 그녀와 함께 여행을 하며 점점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아 간다. 예술가의 감성과 깊이, 그리고 음악에 대한 고민이 묘하게 녹아 들어가 있는 소설이라 허구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뮤지션 이찬혁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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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나는 나일 때 가장 편해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투에고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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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구름이 하늘 위에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막상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가 보니 구름도 하늘 밑에 있더라.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

내가 가진 불안과 긴장도 다시 보면 별거 아닐지도 몰라. 모두 내 안에서 비롯된 거잖아.    p.51

카카오프렌즈 에세이 시리즈 그 네 번째 작품은 토끼옷을 입은 단무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무지가 주인공이다. 그 동안 라이언과 전승환, 어피치와 서귤, 튜브와 하상욱이라는 조합에 이어, 무지는 투에고 작가와 만났다. 무지는 그냥 보면 장난기 가득한 토끼처럼 보이지만, 사실 토끼옷을 벗으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단무지이다. 그리고 묵묵히 무지의 뒤를 지켜주는 캐릭터인 콘도 함께 등장한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카카오프렌즈의 캐릭터들이 젊은 작가들과 만나 진행되는 이 시리즈는 툭툭 가볍게 읽히는 글들이지만, 페이지 구석구석에서 사랑스럽고, 귀여운 캐릭터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느낌을 안겨 준다.

누구나 한두 가지쯤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모습이나,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들을 숨기고 싶은 마음이란 사실 두려워서 도망치고 싶고, 부끄러워서 피하는 일종의 방어기제 같은 것이다. 무지가 단무지인 자신의 모습을 토끼옷으로 감추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콘은 가장 미스터리한 캐릭터인데, 항상 곁에서 무지를 지켜주는 모습은 누군가의 뒷모습처럼 익숙하기도 하다. 곁에 있을 때는 공기처럼 소중함을 모르다가, 그 존재가 사라지고 나서야 우리는 누군가의 소중함을 깨닫곤 하니 말이다. 그래서 무지와 콘은 사실 우리가 현실에서 쉽게 투영해볼 수 있는 내 모습, 혹은 우리 주변에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다.

우리는 무지해. 나도, 너도 무지해.

모든 걸 완벽히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때로는 내가 모르는 걸 수도 있다고, 때로는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고

그렇게 전제하고 출발해보기로 했어.

그러면 다수가 손을 들었다고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지.

'우리' '모두' 같은 말로 뭉뚱그려서 누구에게 강요할 수 없어.   p.122

이 책에 수록된 글들 중에 가장 마음이 와 닿았던 것은 바로 기억의 옷장에 관한 대목이었다. 어쩌면 나 역시 '걸려 있는 옷의 개수만큼이나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제법 괜찮은 사람, 누군가에게는 고민이 많은 진지한 사람, 누군가에게는 슬픔에 젖어 우울한 사람,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줬던 매정한 사람으로.. 기억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나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물론 모두에게 좋은 모습으로 남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까울 테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떤 모습이든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것, 내가 나를 기억하는 것이 정말 소중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를 기억하는 것이 그다지 나쁜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진심과 가식과 거짓과 진실이 모두 뒤섞여 있지만, 그 모습 그대로가 자신의 모습이라면 그것도 그런대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모든 사람이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하게 된다면, 세상은 더 심각한 소통 불능으로 아마 대혼란이 일어날 테니 말이다. 그러니 내 마음 속 두 얼굴, 내 속의 서로 다른 ''들에 대해서 너무 스트레스 받지는 말자. 세상이 나를 바라보고, 누군가 나를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짜 필요한 것은 스스로 가장 편한 모습으로 있는, 보이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찾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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