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대한 예의
권석천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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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도, 소현도, 지수도, 그 누구도 불행의 중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영화 마지막 장면, 제인은 클럽 '뉴월드'에서 노래를 부르기 전 마이크를 잡고 말한다.
"어쩌다 이렇게 한번 행복하면 됐죠. 그럼 된 거예요. 자,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그리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또 만나요. 불행한 얼굴로. 여기 뉴월드에서."
어쩌다 한번 행복하게,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면서, 누구도 혼잣말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곳. 우리가 살아야 할 뉴월드, 우리의 신세계는 그런 곳이다.    p.59

 

그저 '사람답게' 사는 것조차 너무 힘든 세상이다. 어느 순간 '사람은 못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영화 속 대사가 현실 속에서 그대로 구현되는 듯한 기분마저 들고 있으니 말이다. 분명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는 짓은 괴물보다 더 끔찍한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는 매일 여러 매체를 통해 보면서 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말에서 묻어나는 어감에 괜시리 뭉클해졌다. '오롯이 인간으로서 살고자 하는 마음, 악에 무릎 꿇지도, 용서하지도 않겠다는 마음'을 놓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을 의심해'본다.

 

칼럼이 나오는 날이면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독자들이 돌려가며 읽는 거의 유일한 글쟁이, ‘중앙일보의 송곳’으로 불리는 JTBC 보도총괄 권석천의 신작이다. 워낙 유명한 저널리스트이지만 굳이 그의 글을 찾아 읽지는 않았던 나로서는, 사회와 정치를 다루고 있는 글들이라 딱딱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어 놀라웠다. 영화 <조커>로 시작해 <곡성>, <스포트라이트>, <택시운전사> 그리고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악인>, 정세랑의 <지구에서 한아뿐> 등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 속 이야기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희비극을 읽어내고 있어 누구라도 함께 공감하고, 분노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어주는 글이었다.

 

 

"여러분이 나아갈 사회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나쁜 일'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스스로를 하찮게 여겨서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니까요. 차라리 불편한 사람이 되십시오. 불편한 사람이 된다는 건 다시 말해서 자신만의 원칙을 가지고 산다는 뜻입니다... 원칙을 지키다 보면 여러분 생활이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해고되진 않을 겁니다. 우리 사회가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히려 빛나는 경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불편해지겠다는 각오만 있다면 여러분이 그 어려움들을 돌파해내리라 믿습니다."   p.200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는 뉴스들은 눈을 의심케 하는 일들로 가득하다. 최근에 너무 충격적이었던 사건 중 하나는 강북구 아파트 경비원 자살사건이었다. 차를 만졌다는 이유로 아파트 입주민에게 폭행을 당한 50대 후반의 경비원은, 이후 관리사무소에 끌려가 퇴직을 종용 당했고, 계속해서 협박과 폭행을 견뎌야 했다.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야 말았는데, 대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이들의 무자비한 폭력과 이기심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왜 사회는 점점 더 살기 좋아지려고 변화하는데, 사람의 가치는 점점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일까. 사람에 대한 예의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최근 또 학대 받는 아이들에 대한 보도가 계속되고 있어 마음 한 켠이 시큰해진다. 우리는 왜 사람을 사랍 답게 대하는 법을 잊어 버리는 걸까. 태어날 때부터 악한 사람은 없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그들을 저렇게 만든 것은 우리 사회가 아닐까. 이 책은 극단적인 대립, 각자도생의 한국 사회를 통과하며 우리가 놓쳐버린 가치들을 되돌아본다. 착한 갑질과 나쁜 갑질은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지,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믿음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저자의 사유가 그럭저럭 괜찮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를 돌아보게 만들어 주었다.

 

"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느냐?" "왜 세월호에 올랐느냐?" "그 위험한 장소에 왜 갔느냐?" 가해자의 책임을 피해자의 책임으로 떠넘기려는 음모, 무고한 피해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모함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강남역 살인 사건 추모제 등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문제들로부터 록산 게이의 자전적 에세이 <헝거> 등으로 연결되는 서사는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깨닫게 만들어 준다. 피해자에게 "합의하고 잊어버리라"고 종용하고, 가해자에게 "반성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지, 과연 나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제대로 지키면서 살아 왔는지 생각해 보게 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우리가 계속해서 무언가를 쓰고 있는 그 순간, 무엇이 진실인지 고민하는 그 순간, 반딧불이처럼 작은 진실들이 깜빡 거리며 캄캄한 밤을 밝히고 있는 것(p.236)'이라는 저자의 말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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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의 바다 Project LC.RC
김보영 지음 / 알마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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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세상의 악의를 다 끌어모은 것처럼 생겼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에 툭, 하고 돌이 얹혔다. 이 사람에게 가졌던 호의를 포함하여 애인이나 가족에 대해 물어볼까 하며 두근두근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차게 식었다.
"악마 같다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어요.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추하죠."
내가 말을 끊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추해졌어요. 하지만 추함은 악과 관계가 없어요. 둘은 서로 빗댈 것이 아니에요."      p.75

 

경호 회사에 다니는 무영은 엄마보다 이모가 더 좋다는 조카 현이와 함께 동해로 떠나는 기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언니와 형부는 출장 다녀와서 내일 기차로 올 예정이라, 그들만 미리 출발하는 거였다. 그런데 출발 직전 재난문자가 울렸고, 대합실 TV 화면에는 동해안에 강도 6.2 지진이 발생했고, 해저화산 분출 가능성에 대한 속보 자막이 흐른다. 역무원들은 허둥지둥했지만 전광판에 탑승 안내는 예정대로 떴고, 사람들은 수군거리면서도 관성적으로 기차에 오른다. 현이는 지진이 더 나서 집에 가는 차가 끊기면 좋겠다고, 그럼 집에 안 가고 이모랑 둘이서 살 수 있을 거라며 신나 했다. 그리고 무영은 오래도록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곤 한다. 그때 현이를 잡았더라면.. 무슨 일이 났는지 알아보고 다음 차 타자고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리고 삼 년 후, 동해안의 해원마을에서 무영은 자가격리를 어긴 괴인들을 잡는 자경단으로 살고 있다. 지진이 난 그날 밤 해저화산 폭발과 함께 새 섬이 생겼고, 그로 인해 연안은 늪처럼 변해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감염병이 창궐했다. 피부병과 골격 기형에 생선 비린내 같은 악취증을 동반하는 그 병은 현대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세균에서 비롯된 것을 추정되었고, 감염 경로가 명확하지 않아 마을은 삼 년 째 격리 상태였다. 마을 주민 반은 격리 조치를 받은 중환자였고, 나머지 반은 그들을 돌보는 가족이었다. 현이는 병이 창궐한 지 며칠 만에 죽었고, 무영은 삼 년 째 밤마다 고통 속에서 청량리역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그날 기차를 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다시는 되돌릴 수 없지만, 그럼에도 시간의 끝을 잡고 다시 한 번 돌아가고 싶은 그 마음. 회한의 순간들. 하지만 현실은 썩은 생선과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점령한 해안, 온몸을 더러운 천으로 둘러싼 병자들 틈에서 기약 없는 정부의 백신 개발만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여행 가방을 든 멀끔한 행색의 남자가 마을에 도착한다. 감염학 연구소 직원이라는 그는 현장 조사를 위해 마을 출입 허가를 받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이 무시무시한 풍경 속에서 무사히 조사를 마치고 보고를 할 수 있을까.

 

 

나는 모든 것이 다 어그러진 세상에서 어떻게든 이성의 끈을 붙들어보고자 하는 최후의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물고기 껍질처럼 늘어진 괴물을 애써 외면했다. 사실은, 내가 괴물과 마주쳤고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외계의 적을 처치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윤희의 눈은 절망 속에서 말하고 있었다. 설령 어떤 상황이었더라도, 내 남편이 인간의 모습이었다면, 조금이라도 인간처럼 보였다면 그런 식으로 목에 칼을 꽂지는 않았을 거라고.      p.93~94

 

작년에 공포 소설의 거장 러브크래프트의 문제작 <레드 훅의 공포>를 파격적으로 재해석한 빅터 라발의 <블랙 톰의 발라드>라는 작품을 만난 적이 있다. 이번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SF 작가들이 공포문학의 거장 러브크래프트를 재창조하는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이름하여 'Project LC.RC'로 Project Lovecraft Recreate라는 뜻이다. 참여한 작가들은 홍지운, 김성일, 송경아, 은림, 박성환, 그리고 김보영, 이서영, 최재훈, 이수현 작가로 총 9인의 작가가 소설 7편과 그래픽노블 1편을 완성시켰다. 특히나 그로테스크하지만 아름다운 표지 이미지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여덟 편의 작품들을 전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러브크래프트는 ‘크툴루’로 대표되는 독특한 신화적 세계관을 창조하여 오늘날까지도 굳건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작가이지만, 인종차별주의자 작가로도 유명하다. 이번 프로젝트는 러브크래프트의 새로운 공포와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모호한 세계관, 기괴하고 음산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오마주하면서, 그의 인종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낡은 관념을 전복적 시각으로 다시 썼다고 하니 더욱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여덟 편의 작품 중에서 내가 만난 것은 한국의 대표적인 SF 작가로 꼽히는 김보영 작가의 <역병의 바다>이다. '전염병이 창궐한 어촌을 배경으로 광기와 혐오의 비린내 가득한 SF 활극'인데, 전대미문의 팬데믹으로 격리와 혐오를 직접 체험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현실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소설 속 역병과 코로나는 감염의 양상이 전혀 다르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고 있는 공포의 실체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의성이나 공포문학의 전설을 오마주한다는 의의를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매혹적이고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 러브크래프트는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감정은 공포'라고 말했다. 그 실체를 할 수 없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를 오롯하게 느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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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미래를 찾는 여행, 타이베이 - 대만의 밀레니얼 세대가 이끄는 서점과 동아시아 출판의 미래 책의 미래를 찾는 여행
우치누마 신타로.아야메 요시노부 지음, 이현욱 옮김, 박주은 감수 / 컴인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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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독립서점이 늘어나는 건 무척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시장이 커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작더라도 내가 사는 동네에 서점이 있으면 멀리 가지 않아도 책을 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다만 젊은 사람들이 이상을 가지고 서점을 시작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과연 수익을 내면서 운영을 할 수 있을지, 서점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어요.... 서점 경영이 어렵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을 거예요. 저 역시도 항상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죠. 그럼에도 서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p.30

 

몇 년 전 일본을 대표하는 북 디렉터와 여러 라이프스타일 베스트셀러를 기획한 편집자인 저자는 도서 출간 기념 강연 차 한국을 방문했다가 유례없는 동네 서점 붐과 독립출판물의 인기를 만나고는 서울에서 '책의 미래를 찾는 여행'을 기획한다. 그렇게 북디렉터 우치누마 신타로와 편집자 아야메 요시노부는 서울을 대표하는 여러 서점과 서점인, 출판인 등을 직접 만나 취재하고 인터뷰한 내용을 엮어 《책의 미래를 찾는 여행, 서울》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한국의 서울에서 시작된 ‘책의 미래를 찾는 여행’, 이번에는 대만 타이베이를 찾아갔다. 이들은 7앨 동안 20곳 이상의 독립서점과 독립출판사를 방문했고, 타이베이의 출판계에서 '관광'을 훌쩍 뛰어넘는 어떤 '움직임'을 발견하게 된다. 타이베이 역시 출판업의 어려운 상황은 마찬가지였고, 1980년대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 세대가 자신들의 힘으로 서점이나 출판사를 시작한다는 점도 비슷했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책방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독립 출판 시장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는 타이베이의 풍경은 서울과 닮은 점이 많아 더욱 흥미로웠다.

 

 

각각의 독자에게는 각각의 구매 스타일이 있기 때문에 온라인에서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오프라인 서점에 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책을 단순한 상품으로 유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독서를 습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콘텐츠를 개발하는 거예요. 그래야 출판 산업이 장기간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이 저희의 중요한 목표예요... 이 활동도 직접적으로 매출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만 독자 육성과 온라인 서점의 신뢰 구축을 위해서 앞날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p.135

 

이 책은 지금 타이베이 출판 문화의 최전선에 있는 젊은 출판인 31명을 찾아가 인터뷰하고 취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트, 디자인 계열의 책과 잡화가 세련된 공간에 진열되어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을 지향하는 콘센트 서점 '폰딩', 라이프스타일 디자인 잡지를 바탕으로 새로운 공간 큐레이션을 제안하는 '샤오르쯔', 전 뉴스캐스터가 운영하며 대담과 강연 등을 인터넷 생방송으로 하고 있는 '파랑새서점', 음악을 하는 동료들과 시작한 힙한 셀렉트숍 '웨이팅룸', 온라인 서점으로는 대만 최대 규모이며, 독자적인 독서 사이트도 운영하는 '보커라이', 츠타야 서점이 영감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한 '청핀서점',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독립출판사 '콤마북스' 등 현재 출판과 콘텐츠 분야에서 다양한 실험과 시도를 거듭하고 있는 대만의 독립서점들과 젊은 출판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무엇보다 저자인 두 사람이 일본에서 '책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뛰어난 현직 출판인이자 전문가라서 질문 자체도 매우 날카롭고 시의성이 있어서 책과 서점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관심 있게 읽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들이 '지금 현재'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출판 산업이 장기간 이어질 수 있는 '지속성'에 가치를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종이책의 생산량이 점차 줄어들고 있고, 다양한 플랫폼의 등장으로 인해 사람들은 새로운 콘텐츠와 정보를 책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는 경우가 많은데, 타이베이의 출판인들은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자신만의 길을 모색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장 직접적으로 매출이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으로 책과 관련된 미래를 그려나가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서울의 독립서점들은 주인의 취향에 따라 책이 진열되고, 뚜렷한 테마를 가지고 있어 더욱 매력적인 곳들이 많다. 요즘엔 지방에도 아기자기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개성 있는 독립서점들도 눈에 뛴다. 거기다 강좌나 사인회, 낭동회 등 다양한 책과 관련된 부가 서비스로 차별화를 두고 있어 독자들의 발걸음을 이끈다. 그리고 출판사들이 앞장서서 서점들과 연계해 독립서점에서만 판매하는 책이나 그곳에서만 받을 수 있는 사은품 등을 제작하고 있기도 한다. 덕분에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온라인에서 한 번, 오프라인에서 또 한 번 사게 되는데, 한 권의 책을 두 가지 버전의 표지로 만나는 일 또한 책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설레는 일이다. 서울에 이어, 타이베이로 떠난 '책의 미래를 찾는 여행'은 새로운 책의 미래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었다. 서울, 도쿄, 타이베이를 넘어 동아시아 출판 시장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이 시리즈가 앞으로 또 어떤 나라로 향하게 될 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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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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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남자가 일하기에는 아주 좋다. 남자가 일감을 가져오는 집은,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고 일하기에 딱 좋도록 남자 중심으로 새로 배치할 수도 있다. 남자에게는 일이 있다는 걸 누구나 알아준다. 따라서 으레 전화를 받는 일도, 어디 두었는지 모를 물건을 찾는 일도, 아이들이 왜 우는지 알아보는 일도, 고양이 먹이를 주는 일도 기대하지 않는다. 방문을 닫아걸어도 무방하다... 여자에게 집이란 남자와 같은 곳이 아니다. 여자는 누구들처럼 집에 들어와서 이용하고 마음대로 나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여자는 곧 집이다. 떼려야 뗄 수 없다.      - '작업실' 중에서, p.13

 

어느 날 저녁, 그녀는 셔츠를 다림질하다 말고 남편에게 말한다. 아무래도 작업실을 얻어야겠다고. 스스로 말을 하면서도 너무 허황된 소리가 아닌가, 잔뜩 제멋에 겨워 유난을 떠는, 같잖은 요구처럼 들리지는 않을까, 그녀는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글을 쓰는 데는, 타자기나 연필 한 자루와 종이 몇 장에 책상과 의자만 있으면 그만이니 말이다. 쾌적하고 널찍하고 바다가 훤히 보이는 데다 정원까지 있는 전망 좋고 넓은 집을 놔두고 굳이 글을 쓰기 위한 작업실이 필요했던 이유를, 아마도 대부분의 여자들은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혼한 여성에게 그저 우두커니 앉아서, 허공을 응시한 채 남편도, 자식도 바라보지 않는 시간이란 게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가족들과 집안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단 집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숨 쉬고 사유할 수 있는 사적인 공간과 '작업실'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위엄 있고 안온한 분위기가 그녀에겐 필요했다. 물론 아직은 '작가'라고 부를 수 없는, 그저 습작을 하는 단계였지만 말이다.

 

남편의 반승낙을 받고 그녀는 타자기와 책상, 의자 등 꼭 있어야 할 가구만 갖추고 빈 사무실을 구한다. 하지만 집주인 남자가 매일 같이 찾아와 편의를 봐준다는 명목으로 각종 선물을 가져 오면서, 작업실에 어물쩍 눌러앉아서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간절하게 필요해서 구한 작업실인데, 그는 결국 그녀의 공간을 침해하고 위협하기에 이른다. 평범하게 살림을 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남편의 치다꺼리를 하며 살았던 주부가 가정에만 얽매여 살았던 삶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신의 자아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예상치 못했던 벽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과연 그녀는 자신의 작업실과 혼자 있는 시간을 지킬 수 있을까. 이 소설집에 수록된 제일 첫 번째 작품 <작업실>의 이야기이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듣고도 어떻게 얼굴 들고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그것은 내가 겪은 불행이 끔찍하면서도 매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상만사란 게 다 그렇지 않던가. 내가 그것을 즐겼다는 건 아니다. 나는 자의식이 강한 소녀였고 그 사건이 동네방네 소문나면서 상당히 큰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그 토요일 밤에 벌어진 사건들에 나는 매혹되었다. 파렴치하고 터무니없고 철저히 부서뜨리는 부조리를 살짝 맛보고 나서 소설은 아니어도, 삶의 이야기를 즉석에서 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하여 나는 눈을 돌릴 수 없었다.     - '하룻강아지 치유법' 중에서, p.177~178

 

앨리스 먼로 문학 세계의 정수를 담은 세 작품이 '앨리스 먼로 컬렉션'으로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출간되었다. 앨리스 먼로의 첫 소설집인 <행복한 그림자의 춤>, 그녀의 열 번째 소설집인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그리고 앨리스 먼로의 필력이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 받는 <런어웨이>이다. 이번에 만난 책은 <행복한 그림자의 춤>으로 총 열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는 와중에 글을 쓰는 주부가 혼자만의 방을 꿈꾸는 <작업실>, 두 소녀의 동화 같은 스토리 <나비의 나날>, 학교에 적응을 잘 못하고 있는 소녀가 참석한 댄스파티 이야기 <붉은 드레스 - 1946>, 신도시의 주택단지를 배경으로 집값이 떨어지는 걸 걱정하는 지역주민들이 등장하는 <휘황찬란한 집>, 경제 공황의 영향으로 외판원 일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 등등 각각의 짧은 이야기 속에 '삶에서 마주치는 직관의 순간들'이 그려져 있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주변 사람들의 행동과 말을 관찰하고, 경험하고, 판단하며 자신만의 삶을 꿈꾼다. 사는 게 다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으면서도, 가까이 가서 보면 모두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누구나 그렇게 먼로의 작품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읽어 내게 될 것이다. 곪아터진 상처와 흉터, 여인이면서 사람이기도 한 하나의 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정. 우리의 머릿속에서 매일 같이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들이지만 한번도 제대로 입 밖으로 표현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콕 집어 글로 새겨놓은 문장들이야말로 내가 앨리스 먼로의 작품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유려하고 단단한 문장들은 생생하고, 아름답게 가슴으로, 머리로, 귀로 삶을 체감하게 만들어 준다. 먼로의 이야기들은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문장마다, 낱말마다 마법처럼 많은 이야기가 빼곡히 담겨 있다. 그래서 작가들이야말로 진정, 나이가 들수록 더 현명해지고, 더 깊어지며, 더 섬세하게 빛나는 존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노 작가의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심장을 쿡쿡 찌르는 문장들을 만나 보자. 왜 앨리스 먼로가 단편 작가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지, 어떻게 장편소설의 그림자에 가려진 단편소설을 가장 완벽하게 예술의 형태로 만들어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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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숨결
박상민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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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 보이까, 후회를 안 하는 게 중요한 기라. 우리 동네 아들 이제 내 빼고 다 저세상 가 삐렸는데 금마들 하나같이 하는 말이 지가 다시 태어나믄 뭘 할 끼고, 이건 안 할 끼고 다들 이칸다 아이가. 그란데 그게 무슨 소용이고. 진작에 그랬어야재. 안 그러나?"
오랜 노동으로 거칠어진 그의 얼굴을 푸근한 미소가 데웠다.
"어르신은 후회하시는 거 없으세요?"
"내라꼬 와 없겠노. 그래도 이제는 마, 혜림이 이렇게 만나 봤으이 내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p.184~185

 

대학생 수아는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응급실로 실려 간다. 하필 그녀가 도착한 병원은 혜성대학교병원으로, 그곳은 다섯 달 전 아빠가 뇌출혈로 돌아가신 곳이었다. 게다가 수아는 아빠가 뇌출혈로 죽은 게 아니라, 그 죽음의 배후에 엄마가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수아의 병명은 급성 충수돌기염으로 다음달 수술 일정이 잡혔고, 그녀의 주치의로 외과 레지던트 1년차 현우가 배정되었다. 현우는 수아가 엄마를 대하는 태도가 평소 그녀의 성격과 달리 너무 적대적이라 이상했고, 아빠의 죽음 이후로 갑자기 수아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아는 현우에게 아빠가 엄마 때문에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리를 하면서, 당시 상황에 대해 의심스러운 점들을 조목조목 이야기한다. 현우는 수아의 엄마가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 없다고 생각했고, 어떻게든 모녀 사이를 회복시켜주고 싶다는 마음에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그날 밤의 진실을 알아내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라고, 자신에게 과거 기록에 접근할 권한이 있으니 한번 찾아보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일은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다.

 

홀로 조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확실히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정확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환자들이 갑작스럽게 사망을 하면서 정신적으로도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다른 과에서 지난 일을 뒤지고 다니는 레지던트를 좋게 볼 리 없었고, 여기 저기서 항의가 들어오자 담당교수에게 불려가 혼이 나기 일쑤였다. 진실을 밝히려는 그를 도와주는 이 아무도 없는 병원에서, 과연 그는 외로운 싸움을 계속 해나갈 수 있을까.

 

 

방 안에 들리는 거라고는 그녀의 광기 어린 목소리뿐이었다.
"진실이 항상 옳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천만의 말씀. 주변을 둘러봐요.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알고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네? 당장 쌤도 고작 그놈의 진실 땜에 이 세상에서 사라지실 예정이구. 쯧쯧."
이렇게 죽는 걸까. 이것은 그가 원하던 평화로운 죽음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처절한 고통 속에서 생명의 빛을 잃어 가는 것만큼이나 비극적인 죽음이 또 어디 있을까.    p.403

 

이 작품은 우선 '현직 의사가 쓴 감성 메디컬 미스터리'라는 문구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국내에서는 아마도 처음 시도되는 장르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로빈 쿡이나 치넨 미키토 등 일본이나 영미권에는 현직 의사이면서 미스터리, 추리물을 쓰는 유명 작가들이 있지만, 국내에는 의사로서의 경험담을 쓴 에세이는 몇몇 있었어도 메디컬 미스터리로 풀어나가는 경우는 거의 못 보지 못한 것 같다. 게다가 이 작품을 쓴 박상민 작가는 한국추리작가협회 신인상도 수상하신 이력이 있어, 제대로 된 메디컬 미스터리를 보여주시지 않을까 기대도 되었다.

 

우선 현직 의사로서 대학병원에서의 근무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쓴 거라, 현실성과 리얼리티는 디테일하게 잘 그려져 있었다. 물론 기존의 메디컬 미스터리들과는 다르게 '감성' 메디컬 미스터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어, 조금 분위기가 다르긴 하다. 그렇다고 해도 여대생과 레지던트의 로맨스를 부각시키거나 하는 식은 아니었지만,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미스터리보다는 휴먼 드라마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꽤 두툼한 페이지 내내 의료계 내부의 문제를 폭로하는 식으로 진행되던 서사는 후반부에 이르러 의외의 범인이 등장하며 전혀 다른 느낌의 결말로 마무리가 되었고, 두 가지 버전의 엔딩 또한 색다른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시종일관 진행되던 서사의 방향대로 풀어나가서 사회파 미스터리처럼 묵직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메디컬 미스터리라고 해서 전부 비슷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메디컬 미스터리, 휴먼 드라마에 로맨스까지 다양한 장르를 만날 수 있는 퓨전 미스터리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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