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시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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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너무 일찍 죽었어. 열세 살이었지."

"안됐군. 당신 같은 사람이라도."

"그렇지." 두 사람은 이제 갑판에 올라왔다. 도로는 바다를 보며 말했다. "나는 삼천칠백 년을 넘게 살았고 수천 명의 자식을 가졌어. 여자가 되어 아이를 낳아보기도 했지. 그런데 아직도 내 몸으로 낳은 아이가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다니. 나처럼 다른 존재가 태어났을까?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갔을까?    p.120

도로, 그의 일족 말로는 동쪽,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그는 삼천칠백 년을 살아온 인물로, 다른 사람을 죽이고 그의 육체를 옷처럼 입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불사의 존재다. 그렇게 그는 젊음과 힘을 유지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일족을 만들고 지키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찾아내 자신의 아이를 갖게 하거나 서로 교배시켜 새롭고 강한 일족을 만들며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아프리카의 한 부족마을에서 아냥우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태양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녀는 삼백여 년을 살아왔다.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원하는 대로 형상을 바꿀 수 있어 동물로도, 남자로도, 노인과 젊은 여성으로도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냥우는 도로의 일족이 아닌, 야생종(Wild Seed)이었다.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도로는 아냥우에게 제안한다.

“나와 함께 가면 당신 손으로 땅에 묻지 않아도 되는 아이를 보게 될지도 몰라... 내가 당신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자식을 주지."

불사의 존재라는 건 자신이 낳은 자식들이 나이 들어 죽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오랫동안 많은 이들을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떠나 보내며 살아온 아냥우이기에 그녀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와 함께 떠난 아냥우가 마주하게 되는 현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사람은 삼천칠백 년 넘게 살았어요. 그리스도가, 그러니까 이 식민지의 백인 대부분이 믿는 신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도 도로는 이미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래 산 후였다고요.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찰나를 스쳐 지나가는 존재였을 거예요.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부족이나 나라, 신과 악마조차도요. 모든 존재가 그를 남겨둔 채 사라지니까요. 하지만 당신, 태양의 여자인 당신은 예외일지도 몰라요. 당신이 다른 사람과는 다른 존재라는 점을 일러 주세요. 느끼게 만드세요.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세요."     p.256

2011 <야생종>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출간되었다 절판되고 나서, 중고 시장에서 꽤나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었던 옥타비아 버틀러의 걸작이다. 초능력자를 흑인 노예에 빗대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역사를 폭로하고 있는 이 작품은 실제로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과 교차되며 비현실적일 만큼 폭력적인 현실을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도로와 아냥우가 처음 만나는 17세기 말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19세기 중반 남북전쟁 전 미국에서 끝 중에 떠 있으면 읽는 동안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어 감정 이입이 어려워지곤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출발한 이야기라면, 어느 정도의 비약과 과장마저도 마치 진짜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가 넓어진다. 그런 면에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들은 출간된 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당대의 현실 속에서 읽힌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근대에 횡행한 노예제도의 폭력성을 고발하려고 도로와 아냥우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초능력자들을 교배시켜 불사의 존재를 만들려는 남자 도로의 모습은 미국 남부에서 흑인 노예를 인위적으로 교배시킨 사건을 상징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단순하게 이분법으로 그려낼 수 없는 것이고, 버틀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양 극단의 캐릭터 도로와 아냥우를 통해 그것을 한츰 더 깊이있게 그려내고 있다. '무언가를 얻을 때는 무언가를 잃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자신의 가치관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캐릭터라고 그녀 스스로 말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용당하는 가임여성, 인종차별과 노예제, 강자와 약자 사이의 관계,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사라지고 있는 비극까지.. 현실 세계의 갈등과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작품이라 묵직한 무게감을 안겨준다. 이 작품은패턴마스터 시리즈에서 네 번째로 출간된 작품이자 프리퀄이라고 한다. 국내에서도 이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을 곧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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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하다
선현경 지음, 이우일 그림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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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란 그냥 아는 사람과는 다르다. 나만 알고 있는 뭔가가 있다. 그런 특별함이 친구의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로 포틀랜드와 호놀룰루는 내게 친구 도시다. 자주 가는 공원이 있고, 거기엔 내가 좋아하는 특별한 나무 그늘이 있으며, 넓은 해변의 모래사장에는 나만 알게 된 좋은 자리가 생겼다... 새로 생긴 식당이나 멋진 가게는 관광객이 더 잘 안다. 나만 아는 냉이향이 풍기는 길모퉁이가 있고, 나만 알게 된 바다의 암초가 있으며, 나만 알게 된 파도가 잘 오는 장소가 있다. 그냥 깊어졌을 뿐이다. 친구처럼.    p.149~151

2015년 가을 어느 날, 그림책 작가인 아내 선현경과 이우일은 익숙한 서울의 일상을 잠시 멈추고 미국 오리건 주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로 날아갔다. 세상 모든 여행자들의 로망인 현지인처럼 그곳에서 눌러앉아 직접 살아보기를 실천한 그들의 이야기는 <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이라는 여행 산문집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단순히 몇 주나, 몇 달 여행을 다녀온 경험을 쓴 것이 아니라, 아예 그곳에 이 년이라는 시간 동안 눌러 앉아 살아본 것 일상을 풀어낸 거라서 여타의 여행 에세이들과는 완전히 달랐던 기억이 난다.

 

2017 10, 부부는 포틀랜드를 떠나 또 한 번 낯선 도시 하와이 오하우 섬에 짐을 푼다. 이 책은 하와이에서 파도 타고, 글 쓰고, 파도 타고, 그림 그리며, 일년하고도 십 개월을 여행과 일상의 사이 그 어디쯤에서 만들어졌다.

이 책의 제목인 '하와이하다'는 포르투갈어 '창문하다(janealar)'에서 힌트를 얻어 새롭게 탄생한 말이라고 한다. 창문을 통해 세상을 만나고 생각한다는 의미의 '창문하다'처럼, 하와이를 통해 세상을 만나고 생각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선현경 작가 특유의 솔직하고 깊은 통찰을 담은 145편의 에세이와 이우일 작가만의 촌철살인의 유머를 담은 200여 컷의 일러스트가 만나 652일간의 조금 길고 특별한 하와이 살이가 펼쳐진다!

"지금보다 더 좋아지기를 바란다는 건 욕심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앞으로 내게는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가 없더라고. 시간이 가면 몸은 더 늙고 힘들어질 거야. 지구 환경도 더 나빠져 바다에 못 들어갈지도 몰라. 그래서 오늘에 더 충실하려고."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건 정신병 초기 증세라고. 다른 미래를 원한다면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부터 다르면 된다. 우린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좋은 오늘을, 함께 살아가겠구나.    p.191~192

동화 작가 선현경과 만화가 이우일 부부는 프로 여행러, 혹은 여행 중독자라고 칭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일상을 여행처럼 보내고 있다. 올해가 결혼 이십 주년이 된다는 이 부부는 결혼식도 아무 이벤트 없이 가까운 성당에서 식을 올리고, 긴 신혼여행을 해보자며 편도 티켓으로 유럽행 비행기를 탄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빙자해 마구잡이로 떠돌아 다니다 보니 일 년을 그렇게 여행을 다녔었다고 한다. 포틀랜드에 갈 때도 별 생각 없이 짐을 싸서 갔었고, 온 김에 하와이도 살아보자며 떠돌다 보니 어느 새 한국을 떠나 온 지 사 년이 지나고 있다고 하니 참 유별난 부부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그 무모함과 자유로움과 열정이 질투가 날 만큼 부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많은 여행을 함께할 수 있는 취향과 사고방식이 맞는 부부라서 부럽고, 일상의 익숙함이 지겨울 때마다 낯선 곳으로 가 그 소중함을 확인하고 돌아올 수 있는 여유와 용기 있는 도전 정신이 멋지게 보였다.

 

북태평양의 동쪽, 아름다운 남국의 섬 하와이. 청량한 공기, 전세계 서퍼를 유혹하는 에메랄드빛 바다, 마성의 파도, 명랑한 훌라댄스, 소박한 우쿨렐레, 건강한 먹을 거리, 그리고 모두를 반기는 '알로하 스피릿'의 친절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책이다.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화와이의 냄새와 색깔이 물씬 느껴지는 책이기도 하다. 심플한 겉 표지를 벗겨 내면 만나게 되는 속표지가 알달록 하와이안 꽃 무늬인데다, 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예쁜 색채감의 하와이 스케치들이 8장이나 수록되어 있어 눈부터 즐거워진다. 이우일의 유머러스한 일러스트들은 웃음을 자아내면서, 유쾌하고, 따뜻하다. 선현경의 솔직하고 담백한 글은 이십 년차 부부의 투닥거림과 알콩달콩 귀여운 일상들을 손에 잡힐 듯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언젠가부터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모 회사의 캠페인 슬로건처럼 이제 여행은 꽉 짜여진 스케줄에 따라 이곳 저곳을 단기간에 누비는 것이 아니라, 여행지에 머물면서 현지인처럼 진짜 그곳의 삶을 살아보고, 그 도시의 진짜 삶을 맛보는 것이 여행 트렌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을 때면 나도 한 번쯤은 이렇게 제대로 현지의 공기를 마시며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잠시 다녀오는 여행이 아닌, 이들처럼 그곳에 눌러 앉아 살아보는 그런 여행 말이다. 2019년 늦여름, 이제 이들 부부는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다음에는 어느 나라에 가서 살게 될 지, 또 어떤 유쾌하고 기분 좋은 여행이야기를 들려줄 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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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희의 황금 레시피 - 집밥의 품격을 높이는 비법 노트
황지희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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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최고의 요리비결등 여러 요리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집밥 요리를 선보인 황지희 요리연구가의 '제대로 된 집밥 레시피' 북이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반찬부터 뜨끈한 국물의 국과 찌개, 한국인의 소울푸드인 김치 요리, 쉽지만 고급스러운 손님 초대 요리, 그리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나를 위한 한 그릇 요리까지.. 누구나 엄마의 손맛이 가득 담긴 밥상을 차릴 수 있도록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는 요리책이다.

본격 집밥 레시피라 사실 메뉴 이름들만 보면 주부라면 누구라도 알만한 기본 메뉴들이 가득하다. 이런 건 굳이 레시피를 볼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평범하고, 기본적인 메뉴들인데, 내용을 보면 사실 평범하지 않다.

예를 들어 진미채 무침을 할때 소주 3큰술을 종이타월에 부은 다음 축축한 상태로 진미채를 감싸주면, 진미채의 잡내를 제거하고 살균작용을 해준다거나, 연근 조림을 할 때 연근을 흑설탕에 넣어 버무리고 5분 정도 지난 후 흑설탕이 어느 정도 녹은 다음에 끓인다는 것, 그리고 폭탄 달걀찜을 할때 달걀과 함께 튀김가루 또는 밀가루를 반큰술 넣어준다는 팁은 바로 실전에 사용해보고 싶은 아이디어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마 같은 요리를 숱하게 해보았다고 하더라도 이런 내용들은 알지 못했던 경우도 많을 것이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고, 실제로 요리를 매일 하고 있기도 하고, 하다 보니 매일 하는 집밥의 종류와 메뉴가 사실 거기서 거기라 나도 요리책을 꽤 많이 본 편이다. 그런데 점점 사람들이 복잡한 요리보다는 쉽고, 빠르게, 간편하게 할 수 있는 요리들을 선호하다 보니 요리책에 실려 있는 레시피들도 굉장히 간단하다. 설명이 적고, 과정도 간소화된 책들이 많아서, 실제로 해당 레시피로 요리를 하다 보면 좀 헤매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시작부터 목적이 '정확한 레시피의 공유'라고 하고 있는 만큼 구체적인 레시피들을 수록하고 있어 매우 실용적이다.

 

언젠가부터 집밥 열풍이 뜨거워졌다. 흰 쌀밥과 정갈하게 차려진 반찬이 나오는 한식당들이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끼니는 챙기고 살자는 취지의 먹방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모아 요리하는 과정 자체에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쏟기도 한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어떤 재료가 들어가고, 어떤 방식의 조리방법이 쓰이는지 알려면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요리를 전혀 안 해본 사람이라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수도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기본에 충실한 레시피북이 아닐까 싶다. 바로 이 책처럼 말이다.

 

요리를 처음 시작하는 요리 초보부터 요리 조금 할 줄 안다는 경력직 주부까지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책이다. 그것도 '맛있고 건강하게' 밥상을 채우는 비법이 담겨 있어 더욱 특별하다. 재료를 준비하고, 음식을 만들고, 그리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요리와 일상을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집밥은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완성시켜주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반찬들이지만, 그 평범한 맛에 '엄마의 손맛'을 더한다면 최고의 집밥 메뉴가 될 것이다. 이 책과 함께 요리 초보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주부 9단은 맛을 더해주는 비법들만 활용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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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해자들에게 - 학교 폭력의 기억을 안고 어른이 된 그들과의 인터뷰
씨리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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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 가면서 이런 게 얄미웠어요. 가해를 했던 애들이 두 부류로 나뉘어요. 어떤 애들은 잘 안 풀리는데, 그러면 뭐 좋은 마음이 들진 않아도 최소한 화는 덜 나요. 근데 너무 잘 풀린 애들을 많이 봤어요. 누가 들어도 알 만한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는 애도 있고, 굉장히 좋은 친구로 평판이 나는 애도 있고, 허탈해지는 느낌 있잖아요. 저지른 사람은 없고 당한 사람만 있구나, 결국에는. 그 생각이 제일 많이 들었어요.    p.50~51

최근에 유명 연예인의 과거 학교폭력 행적을 피해자들이 폭로하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연예인들 중 일부는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며 잘못을 부인하거나, 피해자와의 사이에서 오해가 있었다는 식으로 변명하거나, 혹은 그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활동을 중단하기도 한다. 고등래퍼, 프로듀스 101 등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출연자가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것이 밝혀져 논란을 불러 일으켜 소속사에서 방출되거나 프로그램에서 하차되는 경우가 있었다. 대체 그들은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질러놓고서 아무렇지도 않게 방송에 출연할 생각을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가해자들에게는 그 당시가 그저 어리석은 날들의 실수 내지는 이미 지나가 버린 순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피해자들은 학교폭력 경험의 순간을 10, 20년 계속 끌어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언제나 가해자는 사라지고 피해자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10대 시절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한 채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온전히 담고 있다. 인터뷰어이자 이 시리즈를 기획한 최윤제 피디를 비롯해, 인터뷰이 10명 모두가 학창 시절 왕따였던 기억을 갖고 있으며, 그 일로 인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간진한 채 살아왔다고 말한다. 이들뿐만 아니라 그외 392명의 설문 응답자들이 모두 학창 시절 왕따였으며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다. 당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상을 하기도 했고,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던 이들도 있었으며, 어른이 된 후에도 지독한 트라우마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소외를 경험한 이들 대부분이 당시 무너졌던 존엄성이 회복되지 않은 채로 어른이 되어 버렸다. 정신과 의사들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의 아픔을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나 사실 왕따였어."라는 고백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이유가 있든지 간에 폭력을 정당화해선 안 돼요, 절대로. 그리고 내 편 없이 힘들 때 그래도 믿어요, 자신을. 이렇게 같이 싸워 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니 혼자 있지 마요. 내가 겪은 아픔들을 조금이나마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꼭 우리가 아니어도 괜찮으니 누군가에게 말해 줘요. 숨 막힌다고. 괴롭고 힘들다고. 살려 달라고. 같이 있어 줄게요. 포기하지 마요. 그리고 미안해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주지 못해서요. 더 노력할게요. 힘내요. 우리.     p.259

<왕따였던 어른들 Stop Bullying> 프로젝트는이렇게 시작되었다. 2019 4월 유튜브, 학창 시절 '왕따'를 당했던 끔찍한 기억을 여린 몸에 새긴 채 그대로 어른으로 커 버린 이들 10명이 모여 각자 자기 경험담을 털어 놓는 방식의 이 인터뷰 영상 2편이 올려진다. 이 인터뷰 영상물들은 순식간에 조회 수 300만 회를 넘기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그에 힘입어 2편의 영상물이 더 제작되었다. 이 시리즈는 6개월여가 지난 지금까지 누적 조회 수 300만 회를 기록하며 더 많은 이들에게 퍼져 나가고 있다. <나의 가해자들에게>는 바로 이 영상물에 담긴 인터뷰 전문을 다듬어 실은 책이다. 영상물들의 재생 시간은 고작 20여 분 남짓이지만, 실제 인터뷰하고 이야기 나눈 시간은 5시간이 훌쩍 넘는다.

학교폭력은 점점 더 은밀해지고, 잔혹해지고 있다. 가끔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 끔찍해졌는지 무섭기도 하다. 게다가 피해학생이 학교폭력 사실을 털어놓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부모님에게 걱정 끼치기 싫어서, 문제를 더 키우기 싫어서, 말해봤자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체념해서, 더 큰 보복이 두려워서 등등의 이유로 입은 다무는 아이들이 많다. 하지만 침묵은 가장 나쁜 대응 방식이다. 학교폭력을 남의 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지만,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학교와 사회가 더 적극적으로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피해자들이 날것 그대로 전하는 생생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왕따가 실제로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실히 인식하는 계기가 되고, 같은 아픔으로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 더 없는 공감과 위로가 되어준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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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안 맞네 그럼, 안 할래
무레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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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만든 하이힐은 정말로 아름답다. 그건 인정한다. 샌들도 놓여 있는 것만으로 아름다운 게 있지만, 마찬가지로 놓여 있는 것만으로 자태가 아름다운 하이힐이 있다. 나는 크리스찬 루부탱의 하이힐을 실물로 보고, 세련된 사람들이 루부탱이라면 설레는 이유를 절실히 이해했다. 하나같이 작품이고, 너무나 아름다운 구두였다. 다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과 자기가 신고 싶다, 신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절대로 내게는 어울리지 않을 구두였다. 내게는 내 체형에 어울리는 구두가 있다.   p.99~100

<카모메 식당>, <모모요는 아직 아흔 살>, <결국 왔구나> 등의 작품으로 만나왔던 무레 요코가 쓴 '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들에 관한 에세이이다. 이제 60대를 맞은 무레 요코는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상이 강요되었던 일본 사회에 나타난 돌연변이 같은 존재라고 한다. 온갖 편견과 고정관념 중에서 자신에게 불편한 것들을 '정중하게, 그렇지만 단호히' 거부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하기를 거부하는 목록들이 뭐 거창하고 대단한 것들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울 수도 있는 그런 것들이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당연히 결혼을 해야 한다. 그리고 결혼하면 또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들 하는데, 대체 그 당연함은 누가 만든 것일까. 모두 세상이 만든 '당연함'인데 다들 너무 신경쓰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사회적 관습이나 규칙들에 반발하고 싶지 않아서, 내지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눈치를 보느라, 정작 나다운 모습을 잃어 버리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레 요코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이 자주 다투는 모습을 보면서 결혼에 대한 이미지가 아주 나빴다고 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는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우선이었던 데다, 심리적,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을 때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괜찮은 남자들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육아를 하면서 일을 하기는 힘들었고, 사람들의 시선 또한 당연히 여성이 결혼을 하면 일은 그만두는 게 다반사였다. 그녀가 바라는 건 혼자서도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일이었지, 남편이나 자식이 있는 가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기준에 너무도 당당하게 ''라고 할 수 있는 그녀의 인생이 멋지게 보이는 건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사람은 '한다, 하지 않는다'를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옛날부터 들어온 여자의 행복, 즉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늙으면 자식과 손자들이 부양해 주고,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저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루트를 완전히 무시했다. 전부 하지 않고 살고 있다. 결혼은 번식의 근본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도 있다....예스보다 ''라고 말하기가 어렵지만, 10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0가지 삶의 방식이 있는 게 당연하다. 자신감을 갖고 세상의 기준에 ''라고 할 수 있는 인생도 좋다고 생각한다.    p.155~156

누구나 다 이용하는 인터넷 쇼핑은 편리하지만, 오배송이 되는 경우도 있고 택배 상자 처리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몇 번 그런 일들을 겪고 나서 이제는 옷도 책도 인터넷으로 사지 않고 보니, 너무 편해졌다고. 좋다는 화장품도 이것 저것 써보았지만, 정작 피부에 맞지 않는 것들이 많아서 오히려 트러블이 생기는 경험을 하고 나서 지금은 최소한의 제품만 사용한다고. 그렇게 그녀는 예뻐지는 것보다는 트러블이 생기지 않는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신용카드 대신 현금을 사용하고, 커피를 너무 좋아했지만 몸에 무리가 오자 이제는 카페인리스 제품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하이힐, 스마트폰, SNS, 포인트 카드 등등... 사람들이 다 하니까, 누구나 필요하다고 하니까 나까지 굳이 할 필요는 없다는 그녀의 목록들이다. 나다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맞는 것과 안 맞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본다. 눈치 볼 것 없이, 스트레스 받지 않고, 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 두 달 정도 남은 올해에는 무엇을 하지 않을지, 그리고 다가올 2020년에는 또 무엇을 하지 않겠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지 말이다. 예전부터 쉬는 날 집에 가만히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 어쩐지 낭비처럼 느껴지곤 했었다. 항상 시간을 쪼개고 나누어서 바쁘게 사는데 너무 익숙해서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간을 견디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별일 없이 그냥 뒹굴뒹굴 시간을 보내는 걸 나는 참 못한다. 항상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간이 흘러 가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고, 가끔은 몸도, 마음도 좀 쉴 수 있는 여유를 스스로에게 안겨 주고 싶다. 무레 요코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만들어가는 방식을 읽다 보니, 나도 조금은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귀찮은 일은 그냥 미뤄보기도 하고, 가끔은 아무 것도 안 하는 채로 시간을 흘려 보내기도 하고, 뭐 어때. 그게 나야. 라고 말할 수 있는 내일을 고대하면서 말이다.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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