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라는 남자 비채×마스다 미리 컬렉션 4
마스다 미리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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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가 '불같이' 급한 우리 아빠. 빨리빨리 먹지 못하는 요리가 식탁에 나오면 곧잘 도중에 벌컥 성질을 부리고는 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선 잔가시가 많은 작은 생선은 거의 금지였다. 아버지가 잔가시에 부글부글하다가 결국 화를 내기 때문이다. 뜨거운 음식도 안 된다. 아버지가 빨리빨리 드시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은 매일 저녁 갓 지은 따끈한 밥이었지만, 아버지만은 언제나 어제 한 찬밥이었다. 따끈따끈한 밥은 빨리 먹지 못하니까 싫으시단다.     p.54

 

'아빠는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는 것이 아마 세상 모든 딸들의 감정 아닐까. 나와 수십 년 동안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함께 밥을 먹고 지낸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까운 존재이지만 가끔은 너무 먼 존재처럼 느껴지곤 하는 게 바로 '아빠'이니 말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의 대부분 아빠를 이해하지 못한 채 보냈다. 자주 버럭 하는 성격도, 엄마에게 다정하지 않은 태도도, 주말 아침마다 가족들을 강제 기상시키는 클래식 음악 취향도, 아빠가 싫어하는 음식이 식탁에 올라오지 않는 것도.. 그렇게 이런 저런 소소한 것들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무뚝뚝하고 애정표현에 서투른 그 모습 그대로의 아빠를 인정한다. 분명 어린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을 테고, 자식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아빠의 본 모습도 있었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한다. 이제는 그만큼 내가 어른이 되었고, 세상을 겪었으니 말이다.

 

마스다 미리가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난 뒤의 작품 <영원한 외출>과 <오늘의 인생>을 읽었기에, 오래 전에 쓰인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녀가 아빠와 함께한 일상과 추억들이 다 애틋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굉장히 특별한 사건이나, 엄청난 감정의 변화를 겪게 만드는 일들이 펼쳐지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매일 겪는 일상의 수많은 순간들을 떠올리게 만들어주는 책이었다.

 

 

창피했다. 아버지와 외출하는 게 어릴 때는 창피해서 싫었다. 길을 걷다가 예사로이 방귀를 뀌고, 가게에서 밥 먹다가 '이거, 맛이 별론데....' 같은 말을 한다. 목소리가 우렁찬 것도 난처한 점이다. 쇼핑하다 말고 점원의 태도가 나쁘다면서 벌컥 화를 내며 나가 버리는 일도 숱하게 있었다.... 어째서 대외용 얼굴을 하지 못할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같은 반 친구들한테 이런 아빠인 걸 들키면 창피해서 학교도 못 갈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래서 외출해서는 늘 아버지와 떨어져 걷고, 일행이 아닌 것처럼 굴었다.    p.96~97

 

마스다 미리는 이 책에서 아빠와 함께한 일상을 짤막짤막한 에세이와 만화에 담아 추억한다. 국내에는 2011년에 소개되었던 작품인데, 마스다 미리 작가의 제안으로, 산뜻한 표지로 옷을 갈아 입고 최대한 원문에 가까운 번역으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찾는 물건이 눈에 띄지 않으면 늘 엄마 탓처럼 말하는 아빠, 외출했다 들어와도 자주 손을 씻지 않는 아빠, 딸이 아프면 걱정을 표현하는 일이 서툴어 언짢아하는 아빠, 성미가 급하고 주의 산만한 아빠, 잡학 상식을 좋아하는 아빠, 어쩐지 둘만 있으면 서먹서먹해지는 아빠와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가볍고 유쾌하게 그려져 있다.

 

 

뭐 맛있는 거 좀 없나~ 라며 수시로 간식을 찾는 아빠의 모습, 티비 프로그램을 보며 기어코 엄마한테 안 해도 될 말을 한마디씩 하는 모습 등 여느 집이나 아빠들의 모습은 비슷한 것인지 마스다 미리가 그려내는 아빠의 모습에서 우리 아빠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아빠의 모습에서도 장점도 있고, 좋아하는 부분도 있지만, 이런 사람이 애인이라면 절대로 싫다고 말하는 마스다 미리의 모습에 빵 터지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빠라면 괜찮지만, 애인으로서는 빵점인 남자, 아빠라는 존재는 참 알다가도 모를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 들기도 했다. 이러나 저러나 나의 절반을 만들어 준 존재가 바로 아빠이고, 내 얼굴 어딘가 한 부분은 아빠를 닮았으며, 내가 가장 싫어하는 아빠의 성격 중 하나도 나에게 내제되어 있다. 따뜻하고, 코믹하게 풀어내는 만화와 에세이였지만, 읽으면서 지금은 세상에 부재하는 아빠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 너무 좋았다. 누구라도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아빠가 보고 싶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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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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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니, 단 한 사람 마음에 걸리는 아이가 있다고 해야 할까. 그 소년이었다. 입학식 때, 유사쿠를 빤히 보던 소년. 자기하고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다. 그 인물에게 매력을 느낀 것도 아니고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째선지 그 얼굴을 보면 마음이 어수선해진다. 유사쿠에게 그 소년은 그런 존재였다.    p.82~83

 

이야기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전기기기 제조업체인 UR전산의 대표인 우류 나오아키가 암으로 투병하다 임종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들인 아키히코는 아버지의 사십구재 전에 그가 소장했던 대량의 장서와 미술품을 처분하기로 하고 사람들을 부른다. UR전산은 우류가와 친척인 스가이가 양쪽이 번갈아가며 실권을 잡아 왔지만, 장남인 아키히코는 아버지의 뒤를 잇지 않고 의사가 되는 길을 선택했기에, 지금은 스가이 가에서 실권을 잡고 있는 분위기였다. 우류 나오아키는 대부분의 재산을 아들인 아키히코에게 남겼기에, 남은 미술품들을 친척들에게 보여주고 나눠주기로 해 집은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때, 현재 UR전산의 대표이사인 스가이 마사키요가 살해되었다는 연락이 온다. 게다가 흉기는 우류 나오아키의 유품인 석궁이었다.

 

 

해당 사건을 조사하게 된 형사 와쿠라 유사쿠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기묘한 경쟁 관계에 있었던 우류 아키히코와 다시 만나게 된다. 두 사람 모두 공부를 잘했지만 유사쿠가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아 언제나 학급의 리더였던 데 반해, 우류는 뛰어난 실력에 비해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전혀 관심이 없어서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유사쿠는 우류와의 대결에서 공부든, 운동이든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살인 사건에 연루된 관계자로 다시 만나게 된 그들은 대체 무슨 악연인지, 우류의 아내는 바로 유사코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 미사코였던 것이다. 오래 전 입시를 준비하던 당시 아버지가 쓰러지고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지망하던 의대 대신 경찰의 길을 택했던 유사쿠는 당시 연인이었던 미사코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이별을 했었던 것이다.  게다가 미사코는 자신이 우류와 결혼하게 된 것부터 현재 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운명의 ‘실’에 조종당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들 세 사람 사이에 얽힌 과거와 현재의 살인 사건 수사가 함께 진행되면서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멈추지 못하게 만든다.

 

 

"당신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녀석이 하는 일 하나하나가 묘하게 거슬렸어. 하지만 녀석을 잘 알기 전부터 나는 그 녀석을 의식했던 것 같은 기억이 나. 어째서일까. 파장이 맞지 않는다고 할까, 하여간 본능적으로 배척하려고 했어. 마치 자석의 S와 S, N과 N이 서로 반발하는 것처럼 말이야."     p.184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1993년 작으로 국내에는 2007년에 출간되었었다. 이번에 새로운 표지로 옷을 갈아 입고, 번역도 새롭게 다시 해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상징적으로 그려 넣은 표지도 인상적이고, 작품이 발표된 지 이십여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군더더기 없이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은 최근작도 물론 좋지만, 초기작들도 그에 못지 않은 완성도와 필력을 보여주고 있어 읽을 때마다 새삼 감탄하게 되는 것 같다.

 

이야기는 한 대기업의 대표이사가 독화살로 살해되는 사건에서 출발하지만, 중심 플롯은 범인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라이벌이었던 두 남자,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한 여자의 운명 같은 드라마에 더 치중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관계가 시작하게 된 과거에 숨겨진 비밀이 다가갈 수록 뇌의학, 전두엽 절제수술 등 첨단 의학을 악용하려는 인간의 탐욕스러운 마음이 3대에 걸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통해 보여지고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 동안 과학과 의학의 최첨단 소재들을 자주 작품 속에서 다루어 왔는데, 이 작품에서는 비인간적인 인체 실험 자체보다는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들과 이후에 나타나는 결과들을 통해 얽히고설킨 두 남자의 삶과 운명을 장대한 드라마로 그려내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얼마나 끔찍한 무게일까. 날 때부터 타고난, 이미 정해져서 자신의 의지대로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다면 말이다. 그렇게 끊을 수 없는 운명으로 묶인 두 남자의 치열한 삶 속에서 펼쳐지는 매혹적인 드라마 속으로 떠나보자. 히가시노 게이고가 왜 '휴먼 미스터리' 분야에서 최고인지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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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지구, 물러설 곳 없는 인간 - 기후변화부터 자연재해까지 인류의 지속 가능한 공존 플랜 서가명강 시리즈 11
남성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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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기후변화 시나리오대로 지속될 경우 2100년까지 3도의 기온 상승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 이 경우 전 지구적인 생태계는 큰 재앙을 맞을 수밖에 없다. 인류가 인위적으로 지구의 기온을 상승시킨 만큼, 다시 인위적인 노력으로 기온 상승을 억제해야 한다. 유엔 중심의 국제적인 대응 노력이 무엇보다 절실한 이유다. 이를 위해서는 기후를 조절하는 해양과 극지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과학에서부터 그 답을 찾아가려는 것은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여러 지구환경 문제를 진단해 문제를 자각하게 한 것도 과학이었듯, 이 문제를 푸는 해결책을 찾는 것 또한 과학이다. 결국 과학에서 출발해야 한다.    p.136~137

 

현직 서울대 교수진의 강의를 엄선한 ‘서가명강(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시리즈의 열한 번째 책이다. 역사, 철학, 과학, 의학, 예술 등 각 분야 최고의 서울대 교수진들은 2017년 여름부터 ‘서가명강’이라는 이름으로 매월 다른 주제의 강의를 펼쳤으며, 이 배움의 현장을 책으로 옮긴 것이 바로 서가명강 시리즈이다. 이 책은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남성현 교수가 남극, 태평양, 인도양 등 수십 차례의 해양 탐사 경험을 바탕으로 지구의 환경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커피전문점, 패스트푸드점 등에서 일회용컵 사용을 금지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이 년 가까이 되었다. 플라스틱 쓰레기 대란 이후 일회용품 줄이기에 발벗고 나선 것인데, 매장 안에서 일회용컵 사용이 적발될 경우 과태료를 부과하기 때문에 초반에는 꽤 많은 업체들이 신경 써서 지켰던 것 같다. 하지만 점점 지키지 않는 곳이 많아 졌고, 올해 초 코로나 사태 이후 그마저도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가 점점 심각해지는 지구환경에 대해 우리가 '행동'으로 뭔가 하는 전부가 아닐까 싶을 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경문제에 대해 무심하다. 그런데 인간이 지구에 끼치는 영향과 지구가 인간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직접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거친 바다와 싸우며 직접 데이터를 수집하는 과학자들이다. 그렇다면 지구과학자, 해양과학자라 불리는 이들은 왜 바다로 향하는 것일까. 저자는 말한다. 자연재해와 미세먼지, 지구온난화 문제와 거대 쓰레기와 자원 및 식량 부족 문제까지 지구가 겪고 있는 모든 위기의 희망은 결국 '바다'에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을 바다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지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해수와 수문 순환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면 푸른 행성 지구의 물부족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또한 식량, 에너지, 자원 문제도 해양에 대한 과학적 이해에서 시작한다. 이를 근간으로 심해저 탐사, 해양생태계 관리, 에너지 추출 등의 기술을 발전시키면 무궁무진한 수산자원, 심해저 광물자원, 에너지 등을 본격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답은 바다에 있고, 바다로 들어가는 길은 과학으로 열린다.    p.191

 

이 책은 태풍, 지진, 쓰나미 등 자연재해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러한 자연재해들을 실제로 경험해본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해도, <볼케이노>, <투모로우>, <해운대> 등의 영화를 통해서 자주 봐왔기에 자연이 인간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이 어떤 것인지는 대부분 알 것이다. 사실 자연 재해를 인간이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저자는 지구의 작동 원리를 알아야 자연재해를 미리 예측하고 재난과 재앙으로부터 대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대규모 지구환경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지구온난화와 미세먼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몸으로 체감하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미세먼지와 오존 농도의 증가 등으로 대기의 조성 자체가 바뀌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대두되고 있는 인위적으로 환경을 조절하려는 지구 공학적 접근보다는 '과학'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연 우리 인류는 기후변화 등으로 전례 없던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지구에서, 앞으로도 생존할 수 있을까, 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만들어 준 책이었다.

 

자연재해, 기후변화, 환경오염과 관련한 지구의 위기를 꼼꼼하게 분석하면서 짚어본 뒤, 마지막 장에서는 지구 관측과 데이터 과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제시하면서 앞으로의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바다가 갖고 있는 잠재력'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하는 이유와 해양관측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지와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이야기도 매우 흥미로웠다. 우리가 직면한 지구환경 문제들을 과학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이 책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지구과학이라는 학문이 어떤 역할을 하는 지 알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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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코스트 블루스
장파트리크 망셰트 지음, 박나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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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조르주드디돈으로 얼른 돌아갈 생각이야. 당신은 내가 저지른 이 소박한 일탈을 이해할 수 없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조차도 잘 이해가 안 돼. 나중에 설명할게. 분명 정신적 스트레스 문제인 것 같아. 난 늘 필사적으로 싸워왔어. 그런데 대체 무얼 얻겠다고 이러는 걸까? (그는 줄을 그어 이 문장을 지웠다.) 올해는 특히 힘들었어, 전력투구했다고. 가끔은 우리가 모든 걸 다 내려놓고선 산에 올라가 채소를 기르고 양을 치며 살았으면 싶기도 해. 걱정 마, 그게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아니까.     p.87

 

마흔이 채 되지 않은 사내, 조르주 제르포는 파리의 대기업 중간급 임원이다. 어느 날 새벽, 메르세데스를 타고 19번 국도를 달리는 중에 자동차 사고 현장을 목격한다. 그냥 지나치려던 그는 사고 차량 안에 사람이 있을지 모르고, 구조 의무를 등한시한 자신의 차 번호를 기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멈춰 선다. 그는 부상을 입은 남자를 병원에 데려다 주고, 수속을 밟으라는 간호사의 말을 무시한 채 다시 바깥으로 나와 버린다. 아내인 베아는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와버리면 어쩌느냐고 제정신이냐며 그를 타박하지만, 그는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게 싫었을 뿐이다. 며칠 뒤, 그들 가족은 여느 때처럼 휴가를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명의 살인 청부업자들에게 살해당할 뻔한다. 그들은 바다 속에서 갑작스럽게 제르포를 가격했고, 겨우 그 상황에서 빠져 나온다. 제르포는 며칠 전 자신이 병원에 데려다 준 교통사고를 당한 남자 때문에 누군가 자신을 제거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고, 분명한 건 두 남자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는 거였다. 제르포는 아내와 아이들을 휴가지에 그대로 놔둔 채, 경찰에 알리지 않고 무턱대고 도망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뒤를 쫓기 시작한 살인 청부업자들에게 반격을 하다 그 중 한 사람이 죽게 된다. 이성을 잃고 화제 현장에서 달리던 제르포가 정신을 차려 보니 알프스 산맥을 횡단하는 화물열차 안이었고, 그때 만난 부랑자에게 수표책을 빼앗기고는 기차 밖으로 추락하고 만다. 죽어가던 낯선 남자에게 베푼 아주 약간의 선의 때문에, 안정적이고 평탄했던 제르포의 삶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평범한 중년 남자는 전문 암살자의 추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며 몸을 다시 일으켰다. 진심으로 놀란 것은 아니었다. 안락한 유년기와 성공적인 사회적 신분 상승으로 점철된 청년기를 보낸 후 겪은 최근 사건들로 인해, 그는 자신이 무적이라고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된 차였다. 하지만 위험천만한 우여곡절을 거쳐 간신히 도달한, 이 있음 직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에 깜짝 놀라는 것이 더 흥미롭고 어울려 보이는 것 같았다. 지금 제르포가 생각하는 본인의 이미지는 10년 전에 읽은 추리소설, 그리고 작년 가을 올랭피크 영화관에서 본 짤막하고 형이상학적인 고전 웨스턴 영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p.114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장파트리크 망셰트는 '네오폴라르'라는 새로운 범죄소설 장르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이다. 1950~1960년대의 정형화된 추리 소설을 탈피해 사회 비판과 실존적 탐구의 장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기존의 범죄소설들과는 조금 분위기가 다른 편이다. 우선 분량이 굉장히 컴팩트하다. 판형도 살짝 작은 편이고, 페이지도 이백 이십여 페이지로 대부분의 범죄 소설들에 비해 가볍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건조한 문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풍경을 담담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

 

게리 멀리건, 지미 주프리, 버드 섕크, 치코 해밀턴의 웨스트코스트 스타일 재즈를 들으며 외곽순환도로를 달리는 조르주 제르포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했던 작품은 그가 겪은 파란 만장한 피투성이 모험 이후 다시 같은 장면으로 마무리 된다. 여전히 시각은 새벽 두 시를 넘었고,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웨스트코스트 음악, 주로 블루스였으며, 메르세데스는 시속 145킬로미터로 달리는 중이다. 제르포가 일상에서 부재했던 기간이 열한 달이었지만, 그는 다시 회사의 임원직을 되찾을 수 있었고, 아내인 베아는 다시 나타난 남편을 너무도 소중히 대했다. 8월에 그들 가족은 전처럼 휴가를 떠났고, 그들은 무척 근사하고 편안한 숙소에서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겉으로 보기에 제르포의 일상은 전과 다름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사념을 잠재우고 음악을 들으며 외곽순환도로를 달리고 있었고, 그의 삶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색다른 범죄소설을 만나보고 싶다면, '프랑스 누아르의 혁신'이라 불리는 장파트리크 망셰트의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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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쌍곡선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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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상황이 좀 비슷한 것 같지 않나요?"
"상황이라고 하시면?"
"이곳도 눈보라가 치면 외딴섬과 비슷한 조건이 만들어질 겁니다. 편지를 써서 초대한 것도 닮았고요."
"그렇군요." 이가라시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립된 호텔에서 투숙객이 한 명씩 누군가에게 살해될 거라는 말씀이시죠?"
"네. 물론 말도 안 되는 건 저도 압니다만."    p.65

 

교코와 모리구치는 내년 가을에 결혼할 예정이라 돈을 아끼느라 설 연휴를 어떻게 보낼 지 고민중이었다. 그런데 눈으로 뒤덮인 산속에 있는 호텔의 사진과 함께 무료 숙박 초대장을 받게 된다. 개점 3주년을 기념에 도쿄에 거주하는 몇 명을 무료로 초청하는 이벤트를 하는데, 숙박비와 여행비를 모두 부담 할테니 방문해서 설경을 마음껏 즐긴 다음에 입소문을 내주기만 하면 된다는 거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도착한 것이 신기하긴 했지만, 그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도호쿠의 호텔 관설장으로 향한다.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라 기차 역에서 호텔까지 설상차를 타고 두 시간 정도 들어가야 했다. 호텔에 초대된 것은 여섯 명이었고, 호텔 주인은 그들이 어떤 공통된 이유로 선정이 됐는지 여행이 끝날 때까지 이유를 맞힌다면 상금으로 10만 엔을 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회사원, 마사지 전문점 종업원, 철강회사 직원, 범죄학을 연구하는 대학원생, 택시 운전 기사 등 나이도, 직업도 제각각인 여섯 명은 어떤 이유로 함께 초대된 것일까. 

 

 

한편 도쿄에서는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강도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돈을 갈취한 다음 자신이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세상이 나빠서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강도는 사흘 동안 가게 세 곳에 연속으로 들어간 탓에 목격자들의 진술로 몽타주를 만들 수 있었다. 갈색 반코트에 흰 장갑, 권총, 똑같은 대사, 게다가 세 번 모두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드러낸 것도 이상한 범인이었다. 게다가 얼굴은 드러내면서 흰 장갑을 끼고 지문을 절대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범인을 목격한 사람의 제보로 강도 행각을 벌인 인물을 검거하게 되지만,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닮은 수준이 아니라 판에 박은 듯이 닮은, 쌍둥이 형제였던 것이다. 문제는 두 사람이 공범이라는 증거도 없었고, 그들 중에 강도질을 한 사람이 누군지 밝혀내지 못한다면 두 사람 모두 기소할 수 없다는 거였다. 공범 관계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한 명은 범인이지만 한 명은 아니라는 말이 되었고, 둘 중 누가 범인인지 증명하지 못한다면 의심만으로 처벌할 수 없으니 두 사람 다 무죄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쌍둥이인 점을 악용한 형제의 강도 행각은 갈수록 더 치밀해지고, 대담해지는데 과연 형사들은 그들의 범행을 막을 수 있을까.

 

 

왼편에 검은 계곡이 입을 쩍 벌리고 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계곡 쪽으로 깊은 눈 속을 기어갔다. 계곡 바닥에 떨어지면 눈이 온 몸을 감쌀 것이고, 그 눈은 한참을 녹지 않고 남아 몇 년이 흘러도 시신을 감춰줄 것이다.
경사가 급해진다. 이제는 기어갈 필요도 없다. 계곡을 향해 몸이 조금씩 미끄러져 간다. 시간이 갈수록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깊은 계곡과 눈이 온몸을 집어삼켰다. 입가에 문득 미소가 떠올랐다. 이걸로 됐다. 한 사람의 죽음이 한 사람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으니까.     p.301~302

 

정말 오랜 만에 국내에 신간이 출간된 니시무라 교타로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종착역 살인사건>과 <명탐정 따위 두렵지 않다>를 통해 만나봤었는데, 그게 벌써 6년 전이니 말이다. 니시무라 교타로는 데뷔 이후 6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누적 판매부수 2억 부를 돌파한 일본의 국민 추리소설가이다. 특히 열차나 관광지를 무대로 도쓰가와 경부가 활약하는 트래블 미스터리로 유명한데 국내에서는 작품들이 그다지 많이 소개된 편은 아니다. 이번 작품은 그의 초기작으로 클래식 본격 미스터리의 정수라고 불리는데,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연상시키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실제 극중에서 등장 인물들이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사실 고립된 공간에 초대된 인물들이 한 명씩 누군가에게 살해된다는 설정은 여러 영화나 소설 등에서 자주 활용되는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거기에 여러 가지 설정들이 더 추가되어 탄탄한 트릭과 수수께끼로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만든다.

 

작가는 서두에서부터 '이 추리소설의 메인 트릭은 쌍둥이를 활용한 것'이라고 독자들에게 밝히고 있다. 쌍둥이를 활용한 역할 바꾸기 트릭은 사전에 독자에게 알려야 공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진짜 트릭을 독자들이 알아내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무려 40여 년 전에 쓰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낡거나, 진부하다는 느낌이 들 지 않는 본격 미스터리의 고전으로서의 매력도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도호쿠의 눈 덮인 호텔에 초대된 인물들에게 벌어지는 사건과 도쿄에서 벌어지는 쌍둥이 형제의 강도 사건은 어떻게 추리를 하더라도 전혀 연관성이 보이지 않을 만큼 별개의 이야기로 따로 진행되는데, 후반부에 이르러 두 사건이 교차점에서 만나게 되면서 만들어지는 결말 또한 너무 흥미로웠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출발하지만, 결말은 전혀 다른 느낌의 색다른 미스터리로 풀어내고 있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계기로 니시무라 교타로의 수많은 작품들이 국내에 더 많이 소개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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