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 헌터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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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난 죽을 수 있다.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으니까.

난 아무것도 아니다. 오래 전부터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였다.

숨 쉬고, 말하고, 걸어 다니는 산송장이었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다.

그런데 뭐가 이토록 두려운 거지?    p.76~77

레미는 36년을 살아오면서 그 중 4년 동안 거리에서 노숙을 하며 지내는 중이다. 그도 한때는 성공한 남편이자 사랑하는 딸의 자상한 아빠, 중소기업의 전도유망한 기술자로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살았다. 그는 딱 한 번, 사장의 아내와 부정한 행위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가정과 직장을 비롯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사장은 그 사실을 조용히 덮어주는 대가로 자진 퇴사를 요청했고, 아내는 이혼 절차를 밟기 시작했고, 친구들을 그를 외면 했다. 구직 활동도 여의치 않았고, 기댈 형제도 없었던 터라 그렇게 노숙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벤츠에 타고 있는 남자를 공격하는 괴한 둘을 목격하게 되고, 남자는 자신을 도와준 대가로 레미에게 값비싼 저녁을 대접한다. 게다가 안 그래도 직원을 고용할 참이었다며 그에게 보답으로 일자리를 제안한다. 그러나 넉넉한 월급에 성에서 숙식까지 제공되는 일자리는 사실 그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그에게 주어진 일자리는 정원사가 아니라 인간사냥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었다.

사진작가인 디안은 세벤트 산맥의 외진 숲으로 업무 차 출장을 오게 된다. 그곳에 도착해 장엄함이 절로 느껴질 정도로 비현실적인 적막과 무한대로 펼쳐진 것만 같은 거대한 공산 속의 생생한 색감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다. 연인에게 버림받은 뒤 오로지 일에만 매달려왔던 그녀에게 일은 도피처이자 살아갈 이유이고,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식사를 하러 들어간 산장에서는 남자들이 인근에 위치한 숲 속에서 젊은 여성이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이야기에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경찰도 해결하지 못한 미제 사건이라 혼자 숲 속으로 들어갈 때는 각별히 조심하라는 얘길 들었지만, 그녀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촬영을 하던 중에 산장에서 만난 남자들이 한 남자를 우발적으로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고, 목격자를 없애기 위한 그들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계획적인 살인이지만 살해 동기는 어디에도 없는 그런 범죄.

정말로 살해 동기가 없었을까?

있다면 딱 하나 있긴 했다. 바로 쾌락. 그 짜릿한 느낌.

조만간 또 다시 나설 것이다.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멈추는 순간, 자신이 죽을 것만 같기 때문에... 참을 수 없는 금단현상으로.    p.191

인간사냥에 참여하는 이들은 돈을 아주 많이 지불하고 전세계에서 온 부유한 사람들이다. 법적으로는 절대 죽일 수 없는 사냥감, 한 번도 사냥해본 적 없는 사냥감을 찾던 이들은 노숙자, 불법체류 외국인 등 세상에서 당장 사라져도 아무도 찾지 않을 만한 사람들을 데려와 게임을 시작한다. 네 명의 사냥감, 그리고 네 명의 사냥꾼, 이들은 각자 목표물을 고르고 숲을 향해 도망가는 사냥감들을 추적한다. 그저 총을 난사해 사냥감을 학살하고, 살육을 즐기기 위해 거액의 참가비를 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이들은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우발적인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목격자를 쫓는 마을의 남자들 역시 겉으로는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사실 인간사냥에 참여하는 이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이 작품은 노숙자 레인과 사냥감으로 선정된 세 명과 사진작가 디안의 시점으로 각각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교차로 진행된다.

이 작품은 국내에 출간된 카린 지에벨의 여덟 번째 장편소설이다. 대부분 페이지 수가 많아 두툼한 작품들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그 중에서도 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그만큼 군더더기 없고, 빠른 전개가 돋보이는 작품인데, 쫓기는 인물들의 심리 묘사를 통해서 공포와 서스펜스를 체감하게 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만든다. 기존에 국내에 출간된 카린 지에벨의 작품들을 대부분 읽어 보았는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임팩트 있는 한 방을 보여주는 그녀의 단편도 괜찮았고,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심리적 요소들을 끄집어 내어 복잡다단한 심리변화를 포착해내는 장편도 탁월했다. 사이코 패스 혹은 소시오 패스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작품들이 많았는데, 이번 작품에 등장하는 사이코 헌터는 무자비하고 냉혹하다는 점에서 그 연장선상에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해서 도덕적인 고민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점은 전형적인 악인 같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들은 거짓된 가면을 쓴 지극히 평범한 인물들이라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양심의 가책을 벗어 던진 살인범이 무고한 시민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닮았다는 점은 실제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눈곱만큼의 자비도 허락하지 않는, 무자비하고 숨 막히는 추격전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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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르네 놀트 그림,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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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들이 착용하는 것은 모두 빨갛다. 피의 색, 우리를 정의하는 색이다.

가리개 또한 규정된 보급품이다. 우리의 시야를 제한하는 동시에 우리를 드러내지 않게 해준다.

나는 결코 붉은 옷이 어울리지 않았다. 빨강은 내 색깔이 아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버전이다. 원작 소설의 주제의식을 잘 살려낸 색감과 긴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압축한 각색으로 해외 언론으로부터 '드라마 영상보다 더 뛰어나다'라는 호평을 받았다고 해서 매우 궁금했다. 게다가 텍스트로 읽으면서 상상했던 공간과 배경, 인물들의 이미지를 이미지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설레이기도 했다.

 

 

<시녀 이야기> 1985년 발표 당시 여성을 오직 자궁이라는 생식 기관을 가진 도구로만 본다는 설정 때문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으며, 출간한 지 30년이 되어가는 오늘날에 와서는 성과 가부장적 권력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친,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으로 인해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으로 평가 받고 있다. 최근 Hulu 채널을 통해 드라마로 새롭게 선보이며 또다시 주목 받고 있으며, 드라마는 시즌 3까지 나올 정도로 화제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속작인 <증언들>이 올해 부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시녀 이야기> 이후 무려 34년 만의 후속작인 <증언들>도 곧 국내에서 만날 수 있다니 매우 기대가 된다.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서 생각한다. 아침에는 내 집에서 잠을 깨게 될 거라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 있을 거라고.

오늘 아침에도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 혹은 근 미래를 배경으로 길리어드 공화국, 여러 가지 원인들이 겹치고 겹쳐 인류에게 끔찍한 재앙이 벌어진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임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국가에서는 임신이 가능한 여성들을 강제로 징집해 관리하고 통제하기 시작한다. 여성들은 신체적 기능에 의해 하녀, 아주머니, 시녀, 아내 등등의 역할로 규정되고 그들에게 더 이상의 개인적인 삶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 작품의 주인공이기도 한 '시녀'는 출산이 가능한 생식능력을 가진 여성으로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이들은 국가를 지배하는 고위층 부부들에게 할당되어, 그 집의 주인 남자들과 주기적으로 관계를 갖고 임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부여 받는다.

"나는 씻기고 솔질하고 배불리 먹인 한 마리의 경품용 돼지처럼 기다린다"

시녀는 주인 남자의 정부나 애인이 아니라, 그저 의무적으로 그들 부부에게 '자궁'만을 임대해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쾌락, 욕망, 연애 감정 따위는 사라져 버렸고, 오로지 종족 번식을 위한 끔찍한 의례이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함께 관계를 맺는 장소에서 그 행위를 돕고 지켜봐야 하는 고위층 아내들의 상황 역시 결코 행복할 수 없겠지만, 붉은 색의 드레스와 구두, 하얀색 가리개로 얼굴까지 가리고 어딜 가든지 감시를 받으며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여자의 처지는 가슴이 서늘해지도록 섬뜩하다.

 

르네 놀트는' 피의 색인 빨강과 그 전조를 암시하는 주황, 진홍, 적갈색의 색채 활용'을 통해 극중 인물들의 감정을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통제된 사회 이전의 과거 회상 장면의 채도와 반복되는 악몽의 느낌을 다르게 보여주고, 강렬한 소설의 서사를 압축해서 임팩트있게 전달하면서도 이야기의 여운을 남겨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사실 원작 소설은 오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다 이야기가 담고 있는 무게 때문에 읽기에 만만치가 않다. 그러니 만약 원작 소설을 아직 읽기 전이라면 그래픽 노블 버전으로 먼저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곧 출간될 <증언들>을 만나기 전에 미리 읽어보면 더욱 좋을 테고 말이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는 소설이 지닌 깊이 있고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만화가 지닌 시각적 효과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점에 있어 굉장히 훌륭한 장치이다. 어른들의 만화라고도 불리며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을 띠고 있다고 보면 되는데, 보통은 매우 길고 복잡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고, 함축적이고 은유적인 이미지로 전개가 빠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촘촘히 글자가 박힌 소설책보다는 눈의 피로도 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좋은 반면에, 조금 내용이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렇게 원작 소설이 이미 존재하고, 그 뒤에 그래픽 노블이 나온 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래픽 노블이 가진 장점과 소설의 단점이 적절하게 손을 잡은 느낌이랄까. 그래픽 노블의 장르적 특성이 빡빡한 지면 구성, 때론 실험적인 내용들인데, 원작이 있는 경우에는 그런 점이 오히려 문학성 높은 만화 혹은 예술적 성향이 강한 만화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그래픽 노블이 가격대가 좀 비싼 편인데, <시녀 이야기>는 가격도 아주 착하다. , 모두들 이 특별한 기회를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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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작 - 잠 못 드는 사람들 / 올라브의 꿈 / 해질 무렵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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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운명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나는 슬픔이라고, 무언가에 대한 슬픔이거나 아니면 그냥 슬픔이라고 답할 게다, 음악 속에서 그 슬픔은 가벼워질 수 있고 떠오를 수 있게 되는 거고 그 떠오름은 행복과 기쁨이 될 수 있어, 그래서 음악이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나는 연주를 해야만 하는 거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겐 이 슬픔의 무언가가 남아 있는데 그게 수많은 사람들이 연주를 듣는 걸 즐기는 이유야, 음악이 그들의 삶을 들어 올리고 고양시켜 주거든,     p.49

이야기는 17세 두 연인이 머물 곳을 찾아 헤매는 것으로 시작한다. 연주자인 아슬레와 현재 임신한 상태인 알리다는 몇 시간이나 거리들을 돌아다니고 있지만, 그 어디서도 방을 빌린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들이 아직 결혼을 치를 요건이 되지 않는 어린 나이 아직은 떳떳하지 못한 관계로 보여서 일수도, 혹은 알리다가 만삭이라 언제 출산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늦가을이고, 어둡고, 춥고, 곧 비도 내리기 시작할 것 같았다.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겨우 어느 집에 들어가게 되고, 알리다는 그곳에서 아기 시그발을 낳는다. 1 <잠 못 드는 사람들>은 그렇게 아기의 탄생에 이르는 과정으로 끝이 나고, 2 <올라브의 꿈>이 시작된다.

아슬레는 이제 올라브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살고 있었고, 반지를 사기 위해 도시를 헤맨다. 그러다 자신을 아슬레라고 부르는 어딘가 낯설지 않은 노인을 만나게 된다. 노인은 한 남자와 어떤 여인이 죽은 채 발견되었고, 그 후로 딸이 자취를 감추고, 한 늙은 산파 여인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렇게 과거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올라브의 발목을 잡는다. 누구나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하는 법, 모든 것은 결국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3 <해질 무렵>에서는 시간이 꽤 흘러 아슬레가 곁에 없는 알리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알리다와 아이는 여전히 살 곳이 없어 거리에서 지내는 중이었고, 제대로 먹지 못해 무척 야윈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알아보는 오래전 동네 어른을 만나 아슬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전해 듣는다. 그러나 알리다는 자신과 아슬레가 여전히 서로 함께 한다고, 자신은 그 안에 있고, 그는 자신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존재하고 있어, 앞으로도 늘 그럴 거야, 그럼에도 그녀는 아이와 함께 살아 가야만 한다.

너 거기 있구나, 우리 착한 아기, 넌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기야,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지, 여기 반짝, 저기 반짝, 겁내지 말렴, 우리 아기, 우리 소중한 아기, 그러자 아슬레는 푸르게 반짝이는 피오르 위로 떠오른다 그리고 알리다가 잘 자라 우리 아기, 너는 그저 떠오르고, 너는 그저 살아가고, 너는 그저 연주하렴, 우리 착한 아기, 라고 말하자 그는 푸르게 반짝이는 피오르를 넘어 높이 푸른 하늘로 떠오른다, 그리고 알리다가 아슬레의 손을 잡고 그는 일어서서 알리다의 손을 잡는다    p.187

욘 포세의 작품을 처음 만난 건 얼마 전 출간되었던 <아침 그리고 저녁>이었다. 고독하고 황량한 피오르를 배경으로 평범한 어부가 태어나고 또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을 꾸밈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던 그 작품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등장 인물이 많은 것도 아니며, 화려한 미사여구로 치장한 이야기도 아닌데 이상하게 시종일관 눈을 뗄 수가 없는 마법 같은 작품이었으니 말이다. 이번에 만난 작품은 전작에 비해 최근에 발표된 이야기들이다. 「잠 못 드는 사람들Andvake(2007)과 「올라브의 꿈Olavs draumar(2012) 그리고 「해질 무렵Kveldsvævd(2014) 세 편의 중편 연작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으로 2015년 북유럽 문학 최고의 영예인 북유럽 이사회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3부작>은 세상에 머물 자리가 없는 연인과 그들 사이에 태어난 한 아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세 작품 모두 줄거리 자체는 간단하고, 분량도 길지 않지만 사실 읽기는 만만치 않다. 마침표와 구두점 없이 쉼표로만 이어진 텍스트는 작품을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덩어리로 보이게 하고, 반복되어 사용되는 어휘와 구절은 소설을 자유시나 음악처럼 읽히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작가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욘 포세는 일찍이 음악 활동을 했었고, 음악을 그만두고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음악의 형식을 글쓰기에 적용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고유한 구조와 수많은 반복을 지니게 되었고 간결한 문장을 사용하면서, 동일하거나 유사한 어구를 반복하고 그 리듬을 살리는 수사법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에서도 역시나 최소한의 인물과 최소한의 대사로 구현되는 이야기이지만,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여러 번 읽고,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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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중인 시체 Corpse on Vacation K-픽션 스페셜 에디션
김중혁 지음, 정이정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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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다 가둔 거예요?"

"나는 버스에 갇혀서 오래 살 거예요. 엄청나게 오래살 거야. 심장을 기계펌프로 바꾸고, 팔다리는 그거 알죠? 나와라 만능 팔, 가제트. 다리는 무쇠다리. 아니, 다리는 무쇠바퀴. 머리도 컴퓨터로 바꿀 건데 절대로 업데이트 안 하고, 옛날 기억만 계속 재생시킬 거야. 그래서 아주아주 오래 살 거예요."     p.19~20

버스에다 '나는 곧 죽는다'라고 붙여 놓고, 전 재산을 싣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프리랜서 논픽션 작가인 ''는 새로운 아이디어도 없었고 새로운 생각을 발전 시킬 배터리도 없는 상태였다. 경제인들의 인터뷰집을 출간해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던, 짧았던 그 전성기가 지나가고 나서 그는 첫 번째 삶이 끝났다는 생각을 한다. 그즈음 그의 고민은 두 번째 삶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였고, 두 번째 직업을 찾아야 했지만 걸맞은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 방송에서 버스 여행자의 모습을 보고는 그의 얼굴과 눈빛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아 그를 찾아가기로 한다.

 

그렇게 ''는 개조한 버스로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여행을 다니는 주원 씨(가명)와 함께 버스 여정을 함께 하게 된다. 처음에는 주원 씨에게 버스 여행을 시작하게 된 계기라든가 여러 가지에 대해서 인터뷰를 시도했었지만, 그는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해댔고 ''는 언젠가부터 인터뷰를 포기하고 그저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기로 한다. 그리고 그의 과거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들에 대해 끊임없이 그와 대화를 나눈다. 그가 왜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인지, 그가 밤에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는 이유에 대해, 어느 순간 '' ''의 삶을 온전히 경험하게 된다. '휴가 중인 시체'라는 제목만 보고 추리 소설이나 스릴러를 예상했는데, 시체라는 단어의 의미는 상징적인 은유였다. ''가 첫 번째 삶을 끝내고, 주원 씨와 함께 버스 여행을 다니며 두 번째 삶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여태껏 한 번도 죽지 않고 계속 살아 있는 존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죽음과 삶이 반복되는 그 어딘가에서 이 작품은 우리에게 묻는다.

 

 

"아주아주 간단한 실수를 했을 뿐인데 큰 벌을 받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비극이 다 그렇지 않나요? 신화 속의 주인공들도 그렇고."

"신화라... 그렇네요. 신화 속 인물들이 그렇죠. 그런 사람들에게는 벌이 곧 용서일까요? 벌을 충분히 받았다면 그걸로 용서받은 것으로 생각해도 되는 걸까요?"    p.71~72

<K-픽션> 시리즈는 최근에 발표된 가장 우수하고 흥미로운 작품을 엄선해 한영대역으로 소개하는 시리즈로, 한국문학의 생생한 현장을 국내외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기획되었다고 한다. 매 계절마다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있으며 현재 총 25권이 출간되었다. 박민규 작가를 시작으로 손보미, 황정은, 천명관, 장강명, 김애란, 김금희, 최은영, 구병모, 조남주 등등 지금 가장 주목받는 작가들의 작품을 모두 만나볼 수 있는 시리즈이다. 무엇보다 매 페이지마다 왼쪽에는 한글로, 오른쪽에는 영어로 함께 수록하고 있어 더욱 흥미롭게 읽히는 시리즈이기도 하다.

번역은 제2의 창작물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문화적 배경이 다른 한 나라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지난한 작업의 결과물이다. 한강 작가가 맨부커상을 수상했을 때도 번역가와 함께 상을 받고, 번역가도 작가만큼이나 주목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작품의 내용을 고스란히 포함하면서도 다른 언어권 독자들이 읽을 때에 문장의 호흡과 여백의 분위기까지 살려주어야 하니, 번역이란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다. <K-픽션> 시리즈의 영어 번역은 세계 각국의 한국문학 전문 번역진이 참여했으며, 번역과 감수, 그리고 원 번역자의 최종 검토에 이르는 꼼꼼한 검수 작업을 통해 영어 번역의 수준을 끌어올렸다고 한다. 분량이 짧은 단편소설인 만큼 먼저 원작을 쭉 읽고 나서, 영어 번역 페이지로만 다시 한번 읽어 보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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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시즌2 : 10~14 세트 - 전5권 (리커버 에디션) 미생 (리커버 에디션)
윤태호 글.그림 / 더오리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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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하는 건 좋은데 너무 힘들게 일하진 말아요.

힘들게 일하면 일로 보상을 받고 싶고, 일로 성취하고 싶고 일로 만족하고 싶어져요.

가족은 상관없어져요. 자기 자신도요.    -14, p.249~250

<미생>이 리커버 에디션으로 새롭게 옷을 갈아 입었다. 이 작품은 2012 1월 처음 연재를 시작해, 2016 1월 시즌 2의 이야기로 이어졌고, 작년 봄 시즌 2 13권까지 출간이 된 상태였다. 이번에 바로 다음 이야기인 14권이 새롭게 출간이 되었는데, 출판사가 바뀌면서 기존의 표지와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리커버 에디션의 표지는 실재의 공간에 가상의 인물을 그려 넣는 식으로 표현되어 있어 더욱 인상적이다. 만화 속 인물들이 실제 극 중에서 매일같이 드나들어야 하는 곳을 실사로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어 더욱 생생하게 현실처럼 그려져 있다.

 

 

<미생> 2012년 첫 연재 후 수많은 직장인들의 공감을 자아내며 가히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다. 2014년에는 tvN 드라마로도 방영이 되어 최고의 드라마라는 평가를 얻기도 했다.

기존에 출간된 버전으로 13권까지 읽어 왔다면, 계속되는 이야기이므로 이번에 새롭게 출간되는 14권만 구매해서 읽으면 될 것이다. 혹은 이 작품이 궁금했는데 분량이 많아서 선뜻 도전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시즌 2의 이야기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시즌 2는 아직 5권 밖에 출간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시즌 1의 이야기를 읽지 않았더라도 상관없이 읽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늘상 말하곤 한다. '일이나 해.' 무시당하거나 인정받지 못하거나 배려 받지 못하고 힘들어질 때 위로처럼 툭 던져주는 그 말. '일이나 해.'

하지만 모두 알고 있다. '일이나' 하기엔 '일이나'로 끝나는 ''은 없다는 걸.

어떤 일은 잘하고 싶어서, 어떤 일은 하기 싫어서, 고과에 반영되니,  회피하고 싶으니, 내 능력으론 안 되는 일이니... '일이나' 하고 있기는 매우 힘들다.

돈 받은 만큼만 일하고 싶지만 돈 때문에 일하는 것 또한 빈궁하고 무참하여 일에 나를 얹는다.      -14, p.256~258

시즌 1의 이야기가 대기업의 이야기였다면, 시즌 2는 위태로운 중소기업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대기업 계약직 사원인 장그래는 중소 기업의 사원이 되었고, 오상식 과장은 오상식 부장으로, 김동식 대리는 과장이 되었다. 특히나 신간인 14권에서는 전체의 프리퀄 스토리인 오상식의 과거 젊은 시절을 담고 있다. 또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빨간 눈에 담긴 사연이 드디어 밝혀지고 있어 이 시리즈의 팬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13년 기준 한국의 대기업이 약 3천개, 고용 인원이 192만 명이라면, 한국의 중소기업 수는 340만개, 중소기업 고용 인원은 1,342만 명이라고 한다. 전체 노동자의 12.3프로가 대기업 현관을 향할 때, 대기업의 1천 배에 육박하는 중소기업을 향해 전체 노동자의 87프로에 달하는 종사자가 크고 작은 골목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마도 시즌 2의 이야기에 더 공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월급날 월급은 자연히 입금되는 것이라 생각했던 대기업 인턴 장그래가 직원 7명의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면서 회사가 월급날 직원들에게 월급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엄청나고 엄청난 성과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처럼, 대기업에서는 당연하던 많은 것들이 중소기업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장그래는 자신이 버는 돈이 눈에 들어오는 회사에서 '내 몫'의 월급 이전에 '내 몫'의 일을 하고 있는지를 더 첨예하게 고민한다.

오늘도 당연히 일을 했고, 내일도 여전히 일을 하고 있을 당신에게 이 작품은 묻는다.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여전히 '미생'인 당신이 '완생'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가 완전히 살아 있는 자가 되기를 응원한다. 세상 모든 직장인들을 위한 작품 <미생> 그리고 새롭게 시작되는 발걸음, 시즌 2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 긴 여정을 독자로서 함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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