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패시지 1~2 - 전2권 패시지 3부작
저스틴 크로닝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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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때가 왔어.'

그 순간 그레이는 마침내 모든 것이 기억났다. , 그리고 격납실에 앉아 제로를 바라보고, 제로의 목소리를 듣고, 제로의 이야기를 듣던 매일 밤이. 뉴욕도, 매일 밤 바뀌던 여학생들도 기억났고, 어둠이 자신의 몸속을 타고 움직이는 것, 그들을 덮칠 때 턱에 느껴지던 부드러운 쾌감도 기억났다. 그는 그레이인 동시에 그레이가 아니었고, 제로인 동시에 제로가 아니었다. 그는 모든 곳에 있었고 아무 데도 없었다.     -1, p.297

앤서니 로이드 카터는 약물 주입 사형을 선고 받은 수감자였다. 그는 자신에게 잔디를 깎는 일을 시키던 고용주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인 레이철 우드를 살해한 죄로 지난 1332일간 교도소 격리관리구역에 수감되어 있었다. 사형 집행일은 머지않았고,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마음을 텅 비운 채 누워 있는 채로 보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그를 면회하러 온다. 그를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년 전 살해된 여자의 남편이 찾아왔던 뒤로 그를 면회하러 온 사람은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그를 찾아온 건 특수요원 울가스트와 도일이었다. 군에서는 '노아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약물 실험 3단계에 참여할 10명에서 20명 정도의 사형수를 구하고 있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으로 형이 낮아진다. 이는 국가안보에 관련된 프로젝트라 이들은 서류상으로 죽은 사람으로 처리되고, 이후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된다.

사형을 당하든지, 아니면 커튼 뒤에 숨겨져 있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두 번째 선택지를 받아들이든지.. 대부분의 사형수들은 두 번째 선택을 할 것이다. 그렇게 누구도 찾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사형수들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겠다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비밀 시설로 옮겨진다. 한편 그럭저럭 임무를 해가던 울가스트에게 엄마로부터 버림받아 수녀원에 있는 여섯 살 소녀 에이미를 마지막 실험체로 데려오라는 연락이 온다. 그는 사형수가 아니라 일반인, 그것도 어린 소녀를 실험체로 사용한다는 것에 반발해 정부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아직까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사실 이 소녀는 이후에 '천 년을 산 최초이자 마지막이며 유일한 자'가 될 예정인,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또 다른 자'가 있었다. 제로도, 트웰브도 아닌 '또 다른 자'. 같은 것인 동시에 다른 것. 자세히 보려고 정신을 집중할 때마다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새처럼 그를 괴롭히는, 그림자 뒤의 그림자. 그리고 그의 자손이자 위대하고 무시무시한 동료인 '다수' 역시 그녀의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녀가 끌어당기는 거센 힘을 느꼈다. 오래전 어린 시절, 담배의 발갛게 불타는 끝이 살에 짓눌리고 불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느끼던 그 무력한 사랑처럼.    -2, p.304

만약 세상에 암도, 심장병도, 당뇨병도, 알츠하이머도 없다면 인간의 수명은 어디까지 길어질 수 있을까? 노화를 늦추고, 오래 살고자 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의 욕망이었다. 뱀파이어의 이빨, 피를 향한 굶주림, 어둠과의 영원한 결속. 만약 이런 것들이 단순히 판타지가 아니라 어두운 힘을 인간의 DNA에 아로새긴 영겁의 기억이라면? 다시금 깨워내고, 제련하고, 통제할 수 있는 그런 힘이라면 어떨까. 정부는 남아메리카의 희귀한 박쥐에게서 추출한 바이러스가 모든 질병에 맞서고, 인간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 아래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노아 프로젝트'의 목표는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백신을 발견하는 거였다. 성경에 등장하는노아의 이름을 따노아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인 이 프로젝트는 사형수들을 실험체로 모집해 약물 실험 3단계를 비밀리에 시행한다. 하지만 바이러스를 주입 받은 사형수들은 온 몸에서 녹색 빛을 발하며 사람이 바깥으로 풀려나게 되면서 바이러스는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끔찍한 악몽이 시작된다. 이는 하나의 세계가 죽고 다른 세계가 태어나게 되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 작품은 <패시지>, <트웰브>, <시티 오브 미러>로 구성된 '패시지 3부작' 1부에 해당된다.  1권이 528페이지, 2권이 576페이지인 작품이 1부이니, 2, 3부 역시 각각 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일 것이다. 게다가 글자 크기가 작고 빽빽한 편이라 읽기에 만만치가 않다. 그리고 서사 자체도 여느 판타지 작품들에 비해 밀도 있게 꽉 채워져 있어 어느 한 단락 예사롭게 흘려 보낼 수가 없는 작품이다. 영화로 치면 한 두 장면이면 끝날 엑스트라 급의 캐릭터에게도 각각의 서사를 부여하고, 수십 페이지의 이야기를 만들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으니 애초에 전체 분량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간단히 몇 줄로 줄거리 요약을 하는 것이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 우리가 흔히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장르를 예상했을 때의 그런 수준을 가뿐히 넘어서 굉장히 묵직하고, 깊이 있는 서사를 들려주고 있는 놀라운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야기 자체가 쉽게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재미있다. 다가오는 세상의 종말 앞에서 인류를 구원할 소녀에이미가 떠나는 거대한 여정의 이제 첫 걸음이다. '패시지 3부작'의 다음 작품도 어서 빨리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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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 아는 농담 - 보라보라섬에서 건져 올린 행복의 조각들
김태연 지음 / 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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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는 지구를 구하는 것처럼 반짝거리는 일이 아니어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잠깐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이거나, 그저 지루함을 버텨내는 일이거나,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일이어도 괜찮다. 상대에 따라 전부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닌 일들. 운이 좋다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낼 수도 있는 일들.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쓸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각각의 일들을 지나오는 동안 우리가 조금씩 성장해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무리 작은 일도, 무의미한 일도 그래서 모두 의미가 있다.    p.57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소시에테 제도에 있는 조그마한 섬 보라보라는 '태평양의 진주'라고 불리며 휴양지로 익히 알려진 곳이다. 신혼여행의 끝판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여행자들의 버킷리스트에 올라 있는 꿈의 여행지이기도 하다. 사파이어빛 바다, 형형색색의 산호초로 가득한 그곳은 인터넷으로 검색한 이미지만으로도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탄성부터 내지르게 된다. 이렇게 누구나 꿈꾸는 '지상 최고의 낙원'이지만, 사실 여행자로 그곳에 머무는 것과 현지에서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집을 떠나 이곳의 외딴 바다 마을 섬에서 10여 년을 살았던 사람이 있다.

라이프스타일 잡지 어라운드의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외딴 바다 마을에서의 간소하고 잔잔한 삶을 꿈꾸며 유유자적, 자급자족, 그러니까 '슬로우 앤드 미니멀 라이프'에 대한 로망을 안고 집을 떠나 섬에서의 생활을 해왔다. 이 책은 그녀가 남태평양의 외딴섬 보라보라에서 9년간 생활하며 배운, 단순하고 조화로운 삶의 태도에 대한 에세이다. 그녀는 맨몸으로 바다를 헤엄치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별자리를 바라보며 온갖 나무와 꽃 이름을 알게 되는 근사한 삶을 꿈꿨지만, 사실은 암막 커튼을 쳐놓고 넷플릭스를 보는 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데, 현실과 이상은 언제나 다른 법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를 믿는 어른이 없는 것처럼, 바로 그 진짜 현실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매우 흥미롭다.

세상은 더하고 빼면 남는 게 없는 법이라더니, 보라보라 섬이 딱 그런 것 같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도 있고, 좋은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쁜 일도 생긴다. 행복하다기엔 만만치 않고, 불행하다기엔 공짜로 누리는 것 투성이다. 깨끗한 공기, 따뜻한 바다, 선명한 은하수... 어디든 더하기만 있거나, 빼기만 있는 곳은 없을 거다. 그건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안다. 늘 까먹으니 문제지. 지금 같아서는 된장국에 밥 말아 먹는 더하기 하나를 꼭 받고 싶다. 음식에 대해 쓰고 나니 그 생각뿐이다 콩이라도 키워야 하나.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    p.118~119

그곳에는 시장도, 극장도, 서점도, 도서관도, 아이스 라테를 파는 카페도 없다. 넓고 넓은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보라보라섬의 각종 ''들은 저렴하지 않았고, 수입은 통장을 중간 경유지로 알고 금방 빠져나가 버린다. 모기떼의 습격을 받고는 보라보라의 진료실에 갔다가, 종합병원이 있는 타히티까지 무려 비행기로 응급 후송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도시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답게, 마트에서도 물건이 자주 동나는 바람에 겨우 달걀 하나 사는데도 몇 주가 걸리고, 심심찮게 찾아오는 정전에 반사적으로 냉동실의 음식을 먹어 치우게 된다. 직항은커녕 경유 비행편도 며칠에 하나씩 있는 곳에서의 삶은 단조롭고 고립감에 시달리는 일상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별 수 있나' 하는 담담하고 단순한, 그리고 단단한 마음으로 그 모든 상황들을 그저 웃어넘긴다

세계 제일의 영화감독이 되어 칭찬받고 싶지만 영화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고백하는 사람. 아이를 갖고 싶다는 100퍼센트의 확신을 기다리다가도, 계속해서 달라지는 마음 하나하나를 애틋하게 여기는 사람. 헤어짐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누구나 언젠가는 헤어진다는 비관으로 멋지게 추락할 줄 아는 사람. 열아홉 시간의 시차만큼이나 멀리 떠난 곳에서 심심하게 살아가는 일상을 자신 있게 소개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시시콜콜한 오늘을 나누고, 우리를 괴롭히는 사소한 일들에 다시 사소한 위로로 맞서는 일이 안겨주는 대책 없는 낭만과 행복의 조각들을 느끼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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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 하찮은 체력 보통 여자의 괜찮은 운동 일기
이진송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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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운동의 참맛을 깨닫고 운동과 인생의 의미를 연결하는 경지에 오르지도 못했다. 생리가 시작되면 관절이 약해지니까(사실) 운동하면 안 된다며(게으름) 드러눕고, 비가 오면 갈까 말까 망설이고, 그나마 등록비가 아까워서 억지로 몸을 일으킬 때면 걸음걸음이 울고 넘는 박달재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내가 한없이 초라하고 남루하게 느껴지는 날, 사소한 일에 서운함이 폭발하고 누군가 원망스러운 날, 살아보겠다고 운동을 꿈지럭꿈지럭 하는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이 드는 날, 바로 그 순간에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려야 한다.     p.17

나이가 들 때마다 가장 먼저 체감하게 되는 것은 바로 체력의 한계가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밤을 꼬박 새우고도 아침 일찍 일어나 에너지 넘치는 하루를 보내기가 예사였는데, 이제는 새벽 두세 시만 지나도 몸이 천근만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잠이 와서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라는 게 아니라, 잠이 오질 않더라도 체력이 떨어져서 그 시간을 더 버티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또 하나, 체중이 쉽게 줄지 않다는 것. 분명 예전에는 한두 끼만 굶어도 배가 쏙 들어가고, 어느 정도의 체중 감량은 마음만 먹으면 가능했었는데 말이다. 이제는 웬만하면 체중이 쉽게 줄지 않는 몸이 되어 버렸다. 나이가 들면서 신진 대사율이 떨어지고, 끼니를 제때 안 챙겨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지 않은 시간들이 쌓여서 일어나는 변화들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제목부터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아마도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하면서 온갖 핑계들을 만들어서 내일부터 해야겠다며 미루기 일쑤였던 적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라서, 회사에서 너무 시달렸더니 피곤해서, 내일 중요한 일정이 있으니 쉬어야 해서, 코치가 마음에 안 들어서 등등... 이유는 다양하지만 사실 딱 한가지 아닐까. 그냥 운동하러 가기 귀찮아서, 운동이 재미없고 지루해서 말이다. 이 책은 '운동하는 멋진 여성'을 동경하면서도, 막상 운동에 도무지 재미를 붙이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한 운동 에세이이다. 저자는 수많은 운동에 도전했지만 매번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럼에도 운동을 멈추지 않는 단단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그녀가 어느 순간 갑자기 달라저서 운동에 눈뜨는 기적을 보여주지 않고, 그저 하찮은 체력 보통 여자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더 공감되고, 이해되는 이야기였다.

이제 나는 운동 시간을 확보하려고 기꺼이 여러 가지를 포기한다. 서른 살 이전, 영양가 없고 의무뿐이던 인간관계를 정리하면서 나의 생활은 아주 간결해졌다. 변수가 많고 야근이 잦은 일을 그만두었다. 아무리 바빠도 씻고 자는 시간을 뺄 수는 없듯, 운동을 그 정도로 중요한 일정으로 만들었다. 같은 운동을 100일 넘게 하고 있다. 곰이 인간이 되는 극적인 변신은 없어도, 아침에 일어나기 쉽다거나 발목 통증이 줄었다는 사소한 변화에 쉽게 감동하며 지낸다.    p.107

저자는 정말 다양한 종류의 운동을 전전하며 오랜 세월을 운동 센터회원님으로 살아왔다. 물론 실제로 출석한 날은 합산해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빠진 날이 더 많고, 그만두고 환불 받는 경우도 많았지만 말이다. 헬스클럽, 요가, 커브스, 수영, 승마, 스노보드, 댄스, 스쿼시, 복싱, 아쿠아로빅, 배드민턴, 복싱, 필라테스 등등을 거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운동을 하러 다닌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이 대부분의 보통 여성들에게 폭풍 공감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을 선사하고 있다. 많은 여성들이 오직 체중 감량을 위해 운동을 하고, 운동과 즐거움을 연결 짓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물론, 그나마 운동을 꾸준히 하러 다니는 사람들은 다행이지만, 대다수는 머리로만 운동해야지, 라고 생각할 뿐이다. 

매우 유쾌하게, 재미있게 읽히는 글이지만 그 속에는 날카롭게 핵심을 간파하는 지점들이 있다. 보통 여자들이 운동과 좀처럼 가까워지기 힘든 데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부터건강한 몸이 아니라아름다운 몸’, 마른 몸'을 요구하는 사회적 시선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운동을 재미있게 느낄 수 없는 이유를 명백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운동의 초점이내 몸이 아니라남에게 보이는 내 몸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보통 여자들은 더더욱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릴 필요가 있다는 거다. 무엇보다 운동을 대하는 저자의 마음가짐이 너무 와 닿았고, 멋있었다. 남 보기 예쁜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내가 쓸 체력을 비축하려고, 더 강한 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약점과 아픈 몸이라도 그대로 살아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운동을 하고 있다니 말이다. 보통 여자들의 진짜 운동 이야기는 이렇게 잘하지 않아도, 꾸준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와 함께라서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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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후지사키 사오리 지음, 이소담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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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마음을 나는 '슬픔'이라고 불렀다. 누군가의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지만 그 누구에게도 특별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비참함을 '슬픔'이라고 표현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서, 누군가에게 소중하게 여겨지고 싶어서 나는 울었다. 그래서 그때, 눈물을 흘릴 만큼 간절하게 바라던 말을 해준 쓰키시마를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p.22

열네 살 소녀 나쓰코는 친구를 어떻게 사귀면 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래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시작했던 피아노가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무렵부터 여자애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곤 했는데, 부모님은 맞벌이라 늘 집에 안 계셨고 항상 혼자였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에 막 올라갔을 때, 한 학년 선배인 쓰키시마와 가까워지게 되어 함께 산책을 하고, 서점이나 음반 가게에 가고, 영화를 보며 대화가 잘 통하는 속 깊은 이성 친구가 된다. 시간이 흘러 쓰키시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가 사라진 학교에서 나쓰코는 중학교 3학년이 된다. 몇 개월 만에 연락이 된 고등학생 쓰키시마는 조금 어른스러워 보인다. 그는 고등학교가 재미없고, 노력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고 지루해하다 결국 학교랑 맞지 않는 것 같다며 그만두고 미국에 가게 된다.

서로 너무도 상극처럼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닮아 보이기도 하는 두 사람이다. 나쓰코와 쓰키시마는 그렇게 서로 다른 듯 닮은 모습으로 중학교 시절부터 우정을 나누며 성장한다. 나쓰코에게 쓰키시마가 약간 첫사랑 같은 느낌이라면, 쓰키시마에게 나쓰코란 어떤 존재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는 나쓰코에게 난 너를  쌍둥이라고 생각해라고 말하지만, 거리낌없이 좋아하는 애가 생겼다고 고백을 하는 등 그녀를 이성으로 여기는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녀 역시 우리 관계를 어떤 말로 표현하면 좋을까, 라고 생각하며 우정인 듯 사랑인 듯 알 수 없는 독특한 관계가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나쓰코와 쓰키시마는 왕따와 우울증, 유학 실패로 인한 정신병원 입원 등의 방황하는 시기를 거쳐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함께 음악을 하는 것이 마침내 자신들이 있을 곳이라는 것을 찾게 된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쌍둥이 같으면 좋을 텐데. 경계선이 사라져서 뭐든지 다 공유하면 좋을 텐데. 그러면 지금 네가 보는 세계를 나도 볼 수 있을 텐데.

나는 지하실에서 다른 세계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 목소리를 더 멀리까지 울려 퍼뜨리고 싶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p.291

이 작품은 밴드의 멤버가 쓴 데뷔 소설로 제158회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던 화제작이다. 돌연 음악계에 등장해 압도적인 팝 센스와 친근한 존재감으로세카오와 현상을 일으키며 인지도를 얻은 4인조 밴드 SEKAI NO OWARI. 이 독보적인 인기 밴드에서 피아노 연주와 라이브 연출 전반을 담당하고 섬세한 감성의 곡을 만드는 멤버 Saori의 데뷔작이다. 평소에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했고, 그걸 바탕으로 독서에 관한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이번 소설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밴드의 결성 과정을 그려 음악 팬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쌍둥이, 마치 이 세상에 같은 타이밍에 태어나 같이 살아온 존재 같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완벽하게 다른 성향을 지니고,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두 존재가 만나 '사랑'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한 몸을 나누고 태어난 것 같다는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는 생소하면서도 공감이 되기도 하고, 낯선 느낌이면서도 익숙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내 인생의 파괴자인 동시에 창조자였다"는 말이 뭉클하게 와 닿았다. 쓰키시마는 나쓰코가 그의 쌍둥이가 되고 싶어서 괴로워했던 시간도, 그리고 쌍둥이가 되고 싶지 않아 혼자 울던 밤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다. 화창한 날도, 비 오는 날도, 건강한 날도, 아픈 날도, 넉넉할 때도, 빈곤할 때도 말이다. 소중한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의 의미와 책임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하고 슬퍼하기도 했던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다면, 당신도 이 작품을 읽으면서 뭉클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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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하다
조승연 지음 / 와이즈베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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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힘은 밀도다. 브롱스에는 전통적으로 캐리비안 해안과 미국 남부에서 인종차별을 피해 북부로 도망친 흑인들이 정착했다. 퀸즈에는 그리스, 동유럽 그리고 한국과 중국 이민자 동네들이 있다. 그보다 남쪽에 있는 브루클린은 전통적으로 유태인과 이탈리아인의 동네로, 수많은 마피아 영화의 명소이기도 하다. 뉴욕에 있는 약 800가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민족들은 뉴욕 자체를 다채로운 색채를 가진 수채화로 만든다.    p.66

《시크:하다》에서 우리와는 다른 프랑스인들의행복에 대한 관점을 소개했던 조승연 작가의 신간이다. 《리얼:하다》에서는가식적이지 않고 당당하게살아가는 뉴요커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인문학적인 관점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는 한 도시의 매력은 화려한 랜드마크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거라고 말한다. 뉴욕을 뉴욕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뉴요커들 덕분이라고 말이다. 터무니없이 비싼 호텔 숙박비에다가 엄청난 팁을 지불하면서도 웨이터에게 온갖 푸대접을 받는 곳, 세상에서 가장 열악하면서도 주거비용이 비싼 도시 중 하나인 뉴욕!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살아보고 싶어 하고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파리 사람들까지 동경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사업가, 디자이너, 예술가들은 뉴욕에서 인정받는 것을 최고의 성공으로 여기고,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 뉴욕에서 한번쯤 살아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뉴욕은 판타지를 안고 오는 이들에게 반전을 제시한다. 뉴요커는 말이 빠르고 거칠며, 무례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뉴욕을 찾는다. 왜 그럴까? 저자는 1999년 대학 신입생으로 뉴욕에서 살기 시작했고, 중간에 1년 휴학하는 동인 할 일 없이 뉴욕의 길거리를 배회하고, 할일 없이 공원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들과 말동무를 하면서 학교나 사무실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뉴욕의 속내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책에서 '뉴욕'보다는 '뉴요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뉴욕이라는 도시를 만들어낸 뉴요커의 철학, 세상을 사는 방식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동네마다 색채가 전혀 다른 뉴욕은 마치 전 세계의 문화를 압력솥에다 넣고 끓이고 있는 곳 같다. 그리스와 중국이, 자메이카와 아프리카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서로 경계하면서도 생각과 삶의 방식을 주고받고 배우면서 또 싸우는 과정에서 세계에서 가장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도시문화를 형성하며 거듭난 것이다. 이것은 프리드먼이납작하고, 덥고, 사람이 너무 많다라고 묘사한 지구 전체의 미래 모습과도 비슷하다.     p.161

뉴요커는 이민 이후의 생존 경험을 통해, 주변 사람의 부러운 시선이나 허울 좋은 체면치레 같은 것은 생존에 도움이 전혀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진정한 자유와 존재감은 경제적 자립에서만 온다는 것이 뉴요커의 행복 공식이다. 또한 뉴요커들은 일할 때 고도의 집중력과 긴장도로 임하지만, 인생을 즐길 때는 아예 풀어져 있다. , '할 때는 하고, 안 할 때는 안 한다'를 철저히 지키는 것이 그들의 인생에 대한 태도인 것이다. 뉴요커들의 무례함은 가히 전설적인데, 사실 알고 보면 그들의 무례함은 겉치레가 없는 것이지, 진짜 필요한 순간에 인간성을 저버리는 무도함은 아니라고 한다. 그 밖에도 뉴욕의 부자가 사는 방법, 뉴요커가 가르쳐주는 외롭지 않게 사는 법, 뉴욕의 사교육에 관한 것까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시선을 사로잡는 책이었다.

아웃사이더의 천국,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를 생성하고 전파하는 도시 뉴욕이 가진 힘의 원천은, 전 세계에서 건너온 수많은 민족의 독특한 스타일과 말투, 제스처, 색감, 안목이다. 인간은 좋은 것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그러니 굳이 타인의 호불호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다르다는 것만 인정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뉴욕이라는 도시가다양성이라고 하는 과제와 끊임없이 씨름하며 깨달은 결론이라는 거다. 이 책을 통해 뉴요커들이 일과 가족, 연애, 우정, 문화,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인간관계와 삶을 영위하는지, 문화적 맥락 속에서 관찰한 그들의 삶을 만나고 보니 내가 막연히 생각해왔던 뉴욕과 뉴요커에 대한 이미지가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항상 생존모드를 장착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면서도 인생의 멋을 스스로 터득하고, 언제나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뉴요커들의 모습이 멋졌고, 그렇게 내 멋대로 사는 삶 속에서 진짜 행복을 발견하는 그들의 삶에 대한 태도를 배우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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