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 철도의 밤 인생그림책 5
미야자와 겐지 원작, 후지시로 세이지 글.그림, 엄혜숙 옮김 / 길벗어린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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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는 정신없이 내달렸어요. 그리고 곧장 반대쪽 어두운 언덕 위로 올라갔어요.
하늘의 은하수가 희끄무레하게 남쪽부터 북쪽까지 닿아 있는 것이 보였어요. 꿈속에서도 향기가 날 것 같은 초롱꽃과 들국화가 그 근처에 온통 피어 있었어요.
‘나는 왜 이렇게 쓸쓸한 기분이 드는 걸까. 할 수만 있다면 어딘가 먼 곳으로 가고 싶어……. 그런데 캄파넬라가 함께라면 얼마나 좋을까…….’

 

어린 시절에 어렴풋하게 밤하늘을 가르는 기차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을 본 기억이 아직도 난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선명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여전히 생생하다. 이후에 조금 더 자랐을 때 <은하철도 999>라는 작품을 제대로 보게 되었지만, 그 만화의 원작이 따로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일본 최초의 SF 작가인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은하철도의 밤>이 원작이라고 한다. 내용상으로는 만화와 동화가 상당히 다르지만, 가장 중요한 소재인 우주를 가로지르는 기차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화가 탄생했다고 하니 말이다.

 

 

특히나 이번에 만난 작품은 그냥 동화책이 아니라 그림책이라 더욱 인상적이었다.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그림자 회화’ 카게에로 일본 화단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후지시로 세이지의 그림자그림은 정말 너무 아름다웠다. 동화적인 상상력의 세계’를 환상적으로 표현해내는 그림자그림은 환상적인 색감과 그림자로 각각의 장면들이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졌다. 이 그림책은 후지시로 세이지가 그림만 그린 게 아니라, 글도 고쳐 썼기 때문에 원작 동화와 완전히 같지는 않다. 원작에서 빠진 부분도 있고, 원작에 없는 부분이 추가된 것도 있어 동화로 원작을 만났던 이들에게도 특별한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덜컹, 덜컹덜컹. 기차는 찬란하게 파란빛으로 반짝이는 강가를 힘차게 나아갔어요. 올리브 숲 위로 이따금씩 공작새가 휙휙 닫ㄹ리는 모습도 보였어요. 날개를 접었다 펼 때마다 드문드문 푸른빛이 반사되었지요. 은하수에서 검게 반질거리는 머리를 한 돌고래가 튀어나오더니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보였어요... 수정으로 만든 것 같은 투명한 작은 궁전이 구름을 타고 남색 하늘 가운데에 떠 있었어요.

 

이 날은 일 년에 한 번 있는 은하 축제날인 켄타우루스 축제날이었다. 수업이 끝나자 친구들은 밤에 있을 은하 축제에 갈 준비를 하지만, 인쇄소에서 일을 해야 하는 조반니는 그들이 마냥 부럽다. 조반니의 아버지는 바다로 돈을 벌러 가서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어머니는 아파서 줄곧 누워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학교를 마치면 언제나 마을의 인쇄소로 일을 하러 다녀야 했다. 조반니는 겨우 일을 마치고 부랴부랴 거리로 나서지만, 반 친구들은 여느 때처럼 돌아오지 않는 조반니의 아버지에 대해서 놀려 댄다. 슬퍼진 조반니는 정신 없이 내달려 반대쪽 어두운 언덕 위로 올라가고, 그곳에서 특별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하늘이 수천 수만 빛의 알갱이로 반짝반짝 계속 빛이 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은하 철도를 달리는 기차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는 캄파넬라를 발견한다. 조반니는 캄파넬라와 함께 기차를 타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여러 사람들과 신비로운 풍경들을 경험하게 된다. 텅 빈 보라색 하늘에서 눈 내리는 것처럼 내려오는 수많은 백로, 올리브 숲 위로 휙휙 달리는 공작새,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아름다운 옥수수 밭 등등.. 조반니가 보고 느끼는 감정들이 매혹적인 그림자그림으로 눈에 보일 듯,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이번 작품은 아이와 어른이 함께 즐기는, 길벗어린이의 '인생 그림책’ 시리즈 그 다섯 번째 책이다. 아름다운 그림이 눈을 사로잡고, 환상적인 묘사가 우리를 은하 철도를 달리는 기차 속으로 데려간다. 아이와 함께 읽어도 좋을 것 같고, 어른이 읽기에도 너무 힐링이 되는 특별한 그림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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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떡볶이로부터 - 떡볶이 소설집
김동식 외 지음 / 수오서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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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볶이에서는요, 골목 냄새가 나요. 골목 냄새가 뭐냐면, 담이 낮은 집들이 쭉 늘어섰고 고무줄놀이도 겨우 할 만큼 좁은 골목들이 막 엉켜 있는데요, 초입에 붉은 포장을 친 떡볶이집이 있거든요. 합판을 몇 장 겹쳐 만든 긴 의자에 올라 앉아 다리를 대롱거리며 백 원짜리 동전 몇 닢을 아줌마에게 건네면 비닐을 씌운 멜라민 접시에 빨간 떡볶이를 가득 담아줘요. 이쑤시개로 밀떡 하나 집어 입에 넣으면 참 달콤도 하지. 종이컵에 부어주는 어묵 국물 후후 불어 무시면 등 뒤로 저녁 바람이 스쳐요.    


 -김서령, '어느 떡볶이 청년의 순정에 대하여' 중에서, p.47

 

생각해보면 떡볶이를 결코 특별히 좋아한 적이 없는 나에게도, 학창 시절 떡볶이와 관련된 추억이 한 두 개쯤은 있다. 학교 앞 분식집에서 친구들과 먹던 떡볶이와 사회인이 되어 일부러 찾아간 떡볶이 맛집의 그것은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음식이었다. 함께 했던 이들도, 사회적인 풍경도 너무도 달랐지만 그 속에 떡볶이라는 음식이 자주 등장했던 걸 보면 한국인에게 떡볶이는 일종의 소울 푸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번에 만난 책은 바로 그 '떡볶이'를 소재로 10명의 작가가 모여 만들어낸 소설집이다. 

 

참여한 10명의 작가는 김동식, 김서령, 김민섭, 김설아, 김의경, 정명섭, 노희준, 차무진, 조영주, 이리나. 소설가도 있고, 소설을 처음 써본 작가도 있고, 전문 번역가도 있으며, 소설가들도 각기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니 이들 10인의 소설이 각양각색으로 전부 다를 수밖에 없다. 떡볶이도 순한맛, 매운맛, 아주 매운맛으로 맵기가 다 다르고, 들어가는 재료나 양념에 따라 종류가 달라지듯이 말이다.

 

 

인간에게 말이 아니라, 파장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면. 너희중 99퍼센트는 지금과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을 텐데. 그런 것도 모르고 너는 네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 어쨌거나 사업이 잘 되었으니까. 무서울 정도로 번창하고 있었으니까.
‘사랑이 어딨어. 다 뇌의 착각이지.’
네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야. 그런데 무서운 얘기 해줄까? 사랑이 뇌의 착각이면, 삶도 통째로 착각이야. 어차피 다 착각인데, 왜 사랑만 착각이라고 말한 거였을까 너는?


-노희준, '떡볶이 초끈이론' 중에서, p.178

 

하교길에 사먹는 500원짜리 컵떡볶이의 떡볶이 개수가 늘 자신보다 친구의 것이 하나가 더 많은 것이 불만이었던 주인공이 고민 끝에 세우는 계획이 귀엽게 펼쳐졌던 <컵떡볶이의 비밀>이 수록된 첫 작품이다. 그래서 가볍고, 아기자기한 작품들이 이어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바로 다음 작품 <어느 떡볶이 청년의 순정에 대하여>를 읽으며 눈물이 핑 돌았다. 이건 너무 현실에서 벌어질 법한 이야기였고, 여성이라면 특히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초반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나가다 후반부에 갑작스럽게 펼쳐지는 이야기 전개에 나 역시 주인공인 한수정 대리처럼 왜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이렇게 될 줄 알았어야 했는데 싶은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작품 뒤에 이어지는 작가의 말에서 또 한번 울컥 감정이 올라오고 만다. 부디 현실에서 또 다른 한수정 대리가 더 이상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이 소설집에 무거운 작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떡볶이가 되어 세상을 살아본다면 어떨까에서 시작한 전지적 떡볶이 시점의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미래에서 과거로 온 마약 떡볶이 때문에 칼부림이 일어나고, 좀비가 창궐한 세상에서 떡볶이가 도전이자 희망이 되기도 한다. 씁쓸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도 있고, 그 시절 추억에 잠기게 만드는 작품도 있고, 60대 여성의 떡볶이 복수극도 있고, 떡볶이 한 그릇에 위로를 받는 청춘의 이야기도 있다. 그야말로 '개성 넘치는 10명의 작가가 준비한 100% 수제 떡볶이 소설집'이라는 호칭에 맞게, 다양한 맛을 가진 떡볶이의 온갖 희로애락을 담고 있는 듯한 이야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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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켄 리우 한국판 오리지널 단편집 1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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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시간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기에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선택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삶을 낭비했다. 그래서 기꺼이 내 삶에 플라스티네이션 처리를 했다. 고치 속에 숨은 누에처럼. 세계 곳곳에서 삶이 영원히 이어졌지만, 사람들은 전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함께 나이 들지 않았다. 함께 성숙하지도 않았다. 아내와 남편은 결혼식 때 한 선서를 지키지 않았고, 이제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권태였다.    

-'호' 중에서, p.59

 

열여섯 레나는 남자 친구와 부모의 외면 속에서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막상 출산 후에 느끼게 된 감정이란 바보가 된 듯한, 뭔가 실수한 것 같은 기분뿐이었고, 결국 부모님 집 앞에 아기를 두고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함께 도망치듯 떠난다. 4년을 남자와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살았지만, 자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녀가 발견한 것은 보디워크스라는 회사의 구인 광고로, 그곳은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방부 처리해서 해부하고, 포즈를 취하게 만들어 마치 예술품처럼 고분자 화합물 조각상으로 바꾸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레나는 그 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몇 년 후 그곳의 아트 디렉터로 승진한다. 그리고 회사 대표이자 해부 팀 책임자인 존과 함께 하게 되면서 그가 개발 중인 노화와 죽음을 정복하기 위한 재생 신약을 통해 영원한 젊음과 영생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레나의 남편인 존은 유전적 결손이 있어 재생 시술을 통해서도 노화를 늦추지 못했고, 암에 걸려 결국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레나는 첫 아이를 낳고 반세기가 더 지나고 나서야, 남편을 여의고 나서야 다시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죽기 전에 냉동 보관을 해 놓은 정자가 있었고, 레나는 일흔한 살의 나이에 임신을 하게 된다. 물론 재생 시술을 통해 외모는 서른 살로 보이는 상태였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조그만 바의 창가에 앉아 있던 그녀에게 쉰 중반쯤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말을 건넨다. 자신의 자유를 위해 자식을 버린 부모가, 여전히 젊음을 유지한 채로 늙어버린 자식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이란 어떤 걸까, 단지 수백 년을 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기간 동안 내내 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말이다. 만약 주어진 시간이 무한하다면, 중요한 결정을 훨씬 더 나중으로 미뤄도 되고, 해보고 싶은 것들, 그 동안 놓친 것들을 만회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길고 긴 나날을 흘려 버릴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지금 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할 수 있으니까,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무한한 시간과 기회가 있을 테니 말이다. 생명 연장이라는 개념을 믿지 않는 이들은 죽음이야말로 삶이 만들어 낸 가장 멋진 거라고 말한다. 누구나 언젠가는 늙어서 죽을 거라는 걸 알기에, 두려운 일에 도전하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일에 뛰어 들고, 지금 당장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게 되는 거라고 말이다.

 

 

세상에 나 같은 여자가 얼마나 많을까? 나는 무언가 품에 안을 것이 필요했다. 말하기와 걷기를 학습할 줄 아는 것, 내게 '안녕'이라고 인사해 줄 만큼만, 내 귓가의 울음소리를 잠재울 만큼만 성장하는 것. 하지만 진짜 아이는 아닌 것. 살아 있는 다른 아이를 데리고 살 자신은 없었다. 그건 배신처럼 느껴졌다. 인조 피부 조금, 합성 고분자 겔 조금, 알맞은 수량의 모터와 영리한 프로그래밍 능력을 잔뜩 동원하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기술로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일.    

-'사랑의 알고리즘' 중에서, p.153

 

‘일상과 환상이 만나는 지점을 황홀하게 드러내는 놀라운 이야기들’을 선보였던 <종이 동물원>에 이어 켄 리우의 두 번째 단편 선집이 출간되었다. 데뷔작을 포함하여 함께 엮인 적 없는 단편 중 12편을 선별하여 수록하고 있는 이 책은 오직 한국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단편집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이제껏 책으로 엮인 적이 없는 켄 리우의 중단편 소설 열두 편을 엮어 만든 책이라 '원서'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판 오리지널 단편집'이니 말이다. 게다가 너무도 근사한 표지 이미지, 띠지와 연결된 내지의 영롱한 컬러까지 시선을 사로잡는 너무도 '아름다운' 책이었다.

 

<종이 동물원>을 번역했던 장성주 번역가가 이번 단편집에 수록될 작품들을 직접 골라 엮고 옮겼다. 그는 이전 단편집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수록작들을 하나로 묶는 주제를 '초월'이라고 말한다. '수록작 가운데 굳이 나누자면 SF로 분류될 이야기들은 육체라는 존재 양식만이 아니라 시공마저도 초월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 초월을 이룬 후에도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의 본성이라고' 말이다. 바로 그 '초월'이라는 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띠지와 내지로 연결되는 이미지일 것이다. 단편들을 골라 엮은 솜씨도 대단하지만, 표지 디자인과 책의 안팎을 구성하고 있는 디자인 또한 최고의 수준이 아니었나 싶은 작품이었다. 그야말로 올해의 표지! 올해의 앤솔로지가 되겠다.

 

 

이 책에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고민들, 그리고 시간과 차원을 초월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세계는 거의 모든 이야기의 배경이고, 작품들 중에 '싱귤래리티 3부작'은 인간이 기계 속에 업로드 되는 세상이 도래한 이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현실 세계를 포기하고 시뮬레이션이 되기를 선택할 때마다, 생명을 잃은 육체 한 구가 남겨진다. 삶이 의미를 얻는 수단이 바로 죽음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업로드된 인간은 이제 인공지능일까, 아니면 여전히 인간인걸까, 단순한 알고리즘이 되어 버린 걸까.

 

자신이 쓴 이야기가 외국어로 번역되어 머나먼 나라에 사는 수많은 독자들의 손에 가 닿는 것에 대해, 켄 리우는 이렇게 말한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 언어, 문화를 넘어 쓰는 이와 읽는 이가 대화를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가장 인간다워진다고, 저는 느낍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짓는 종(種)이니까요." 책을 읽기도 전부터 저자의 머리말을 읽으면서 가슴이 설레어 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놀라운 상상력과 깊이 있는 사유, 뭉클하고 따뜻한 정서와 아름답고 우아한 문장까지, 켄 리우는 여전히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가 아직 만나 보지 못한 그의 작품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어 너무 행복하다. '민들레 왕조 연대기'의 2부인 <폭풍의 벽>, 단편 열한 편을 묶은 <신들은 죽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미국에서 발간된 최신 단편집 <은낭전>까지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만날 수 있다고 하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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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친놈 2024-03-26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호>읽을때가 인상깊었어요. [이제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권태였다.]이 문장이 저도 기억에 남아요. 책을 반납하고서 리뷰를쓰니 기억이 흐려졌는데 피오나님 글보고 정리되는 느낌이네요,잘보고갑니다 ㅎㅎㅎ
 
페르메이르 - 빛으로 가득 찬 델프트의 작은 방 클래식 클라우드 21
전원경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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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의 구시가는 동화 속처럼 아름다웠다. 좁은 운하가 구불거리며 구시가를 감싸고 있었다. 운하에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비쳐서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동그란 아치형의 다리를 건너고 또 건너다 보니 어느새 구시가의 한복판에 있는 마르크트 광장이 나왔다. 이 광장에 면한 골목길에 페르메이르 기념관이 있다. 여행지에서 길을 찾는 데는 영 젬병인 내가 한 번도 헤매지 않고 바로 닿을 정도로 델프트는 작은 도시, 아니, 마을에 가까웠다. 저 투명한 물빛과 하늘빛을 화가도 보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마음속에서 적요한 파문을 일으켰다.      p.90~91

 

클래식 클라우드 그 스물 한 번째 작품은 바로 '페르메이르'이다. <진주 귀고리 소녀>, <우유를 따르는 하녀> 등의 작품으로 너무도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생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화가이기도 하다. 200년이 넘도록 기억에서 잊힌 채 그저 델프트의 화가로만 남아 있었고, 사후에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그의 작품들이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히지만, 동시대의 화가인 렘브란트가 약 2,000점의 작품을 남긴데 비해 페르메이르의 작품은 단 30여 점 정도만 남아 있다. 그렇다면 1675년 사망한 후 200년 넘게 망각 속에 가라앉아 있던, 베일에 싸인 페르메이르의 삶과 내밀한 작품 세계가 어떨지 너무 기대가 되었다.

 

 

클래식 클라우드는 수백 년간 우리 곁에 존재하며 '클래식'으로 남은 세계적 명작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제대로 읽지 않는 작품들에 좀 더 쉽게 다가가 지금 여기, 우리의 눈으로 공감하며 체험할 수는 없을까. 에서 시작한 프로젝트이다. 문학, 예술, 철학, 과학까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국내 최대 인문기행 프로젝트는 12개국 154개 도시를 우리 시대 대표 작가 100인을 통해서 만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셰익스피어, 니체, 클림트로 시작되었던 여정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작된 지 이 년이 넘었고 어느 새 스물 한 번째 작품에 이르렀다. 이번 '페르메이르' 편은 초반에 '클림트' 편을 함께 했던 전원경 작가가 다시 여정을 함께 해 더 반가웠다.

 

 

우리가 희미한 과거를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면, 그 모습은 아마도 빛으로 가득 찬 델프트의 작은 방이 보여주는 세계와 엇비슷할 것이다. 한때 우리는 그토록 맑고 온화하며 신실한 세계에 속해 있었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에서 우리가 받는 인상, 〈진주 귀고리 소녀〉나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이 주는 깊은 아름다움과 아련한 슬픔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이제 다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지나간 날들에 대한 우리의 영원한 그리움이다.     p.276

 

이번 클래식 클라우드의 여정은 페르메이르가 태어나 자라고 평생 활동했던 델프트에서 시작해 그의 작품 <골목길>과 <우유를 따르는 하녀>가 있는 암스테르담, <진주 귀고리 소녀>, <델프트 풍경>이 있는 헤이그를 거쳐 <회화의 기술>이 있는 빈, 그리고 만년의 그림들이 있는 런던에 이르기까지 거장의 흔적을 따라나선다. 뿐만 아니라 페르메이르의 모든 작품을 수록했고, 전원경 작가가 세심하고, 깊이 있게 그림들을 읽어 내고 있어 그야말로 페르메이르의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는 책이었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에 대해 흔히들 '그림이 반짝거린다'는 식의 표현을 많이 하는데, 그 광채 뒤에 숨어 있는 화가의 치밀한 연구와 색 배합, 빛의 효과를 사용하는 방법 등을 전원경 작가가 심도있게 설명해주고 있어 너무 흥미롭게 읽었다. 그림의 기법을 알려주고, 그림 속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의미를 해석해주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읽어내는 방식이라 마치 전문 큐레이터가 작품을 설명해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평범한 여름날 아침의 풍경에서 천국을 끄집어낼 수 있는 화가가 페르메이르'라면, 우리가 무심코 지나가 버리는, 그래서 놓치고 마는 그림 속 비밀들을 전원경 작가가 짚어내 주고 있는 진짜 여행 가이드인 셈이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매번 거듭될수록 더 깊이 있어지고, 원숙해지고 있다. 덕분에 앞으로 계속 이어질 시리즈의 다음 작품들을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은 늘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통해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을 만나 보자. 왜 <진주 귀고리 소녀>가 보는 이를 대번에 매혹시키는지, 평범한 풍경에 어떻게 놀라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인지, 이름은 잊히고 작품은 흩어진 화가의 진가가 되살아난 이유가 무엇인지 등등 수수께끼로 가득한 페르메이르의 삶과 작품에 대한 모든 것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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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개정증보 2판) - 복잡한 세상 명쾌한 과학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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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되는 일보다 생각대로 안 되는 일이 훨씬 더 많다. 더 나은 상황이란 언제든지 있게 마련이니까. 일이 안 될 때마다 우리는 머피의 법칙을 떠올리며 '나는 굉장히 재수가 없구나'라고 생각하지만, 로버트 매슈스의 계산은 그것이 '재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머피의 법칙은 세상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혹한가를 말해주는 법칙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 것을 무리하게 요구하고 있는가를 지적하는 법칙이었던 것이다.     p.47

 

여섯 다리만 건너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이라는 케빈 베이컨 게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왜 하필 토스트는 버터 바른 쪽으로 떨어질까? 과연 머피의 법칙은 우리의 착각이었던 걸까?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뇌를 15퍼센트밖에 못 쓰고 죽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다? 바흐에서 비틀스까지, 히트한 음악에는 프랙털이라는 공통적인 패턴이 있다?  복잡한 도로에선 차선을 바꾸지 않는 것이 물리학적으로 정체 현상을 만들지 않는 방법이다? 등등..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들은 복잡한 사회현상 뒷면에 감춰진 과학적 진실들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웃음의 사회학부터 쇼핑의 과학까지, 크리스마스의 물리학에서 복잡계 경제학까지' 과학이 인문, 심리, 사회, 경제, 미학, 의학 등을 만나 유쾌한 한 편의 교향악을 만들어 낸다. 과학 책은 따분하고 어렵다는 통념에서 벗어나 일상과 과학의 만남을 주선한 대단히 흥미진진한 책이다. 저자는 물리학자는 뭘 하는 사람들인가요? 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신경세포 하나에서부터 도시 문명에 이르기까지, 작은 원자 하나에서 거대한 우주까지, 세상에 대한 애정으로 호기심의 촉수를 평생 뻗고 있는 못 말리는 탐험가들' 이라고. 그리고 이 책이 바로 그 증거이다.

 

 

빅토르 위고는 이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모래 알갱이들의 패턴이 혹시 우주 탄생에 대한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상상했다. 그는 이미 100여 년 전에 모래 알갱이들이 만들어내는 패턴 속에 수많은 물리 법칙들이 숨어 있음을 직감했던 것일까? 그의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은 10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물리학자들에 의해 사실로 증명됐으며, 최근 우주 성운을 연구하는 천체물리학자들에게 창의적인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다.    p.230~231

 

'콘서트'라는 제목답게, 구성 또한 전체 4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악장, '매우 빠르고 경쾌하게'에서는 조금 가볍게 일상생활 속에서 유행했던 게임, 법칙, 뉴스 등으로 시작된다. 2악장, '느리게'에서는 현대 미술, 대중 가요 등 문화 전반적인 곳에 숨겨져 있는 과학법칙들을 살펴보고, 3악장, '느리고 장중하나 너무 지나치지 않게'에서는 심리학, 경제학, 주식, 교통 등 사회의 이곳 저곳에서 과학을 읽어 낸다. 마지막으로 4악장, '점차 빠르게'에서는 소리, 리듬, 뇌파에 관한 공학과 함께 산타클로스의 진실을 밝혀주는 크리스마스 물리학이 등장해 대미를 멋지게 장식해준다. 그렇게 복잡한 세상에 관한 과학자들의 길고 긴 연주가 끝이 나면, 두 번의 커튼콜이 이어진다. 책이 출간되고 10년이 지난 시점에 쓴 커튼콜과 20년이 된 이번에 쓰여진 커튼콜이다. 이 책의 커튼콜은 단순히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한 작가의 말 정도가 아니라, 수십 페이지 분량으로 하나의 챕터를 구성해도 될 만큼의 내용을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있다. 지금부터 다시 10년 후 저자의 세 번째 커튼콜이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국내 과학책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인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가 출간된 지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이번에 출간 20년을 기념해 개정증보 2판으로 새롭게 옷을 갈아 입고 나오게 되어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왜 이 책이 '가장 사랑 받은 국내 과학책 1위’로 손꼽힐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 재미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학창 시절 이후에는 딱히 접할 수 없었던 과학의 즐거움을 새삼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에게 필독서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하는데, 일반 독자들이 과학 교양서로 읽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책이다. 특히 이번 개정증보 2판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수정이 필요한 부분을 바로잡고 새로 수록된 원고지 100매 분량의 ‘두 번째 커튼콜’을 통해 학문적으로 발전된 내용들을 대거 보완했다. 생생한 과학 도판과 풍부한 설명을 추가했고, 새로운 표지와 판형, 완전히 달라진 편집 체제로 출간이 되었으니 그 동안 궁금했던 분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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