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에서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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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똥 몇 번 쌌다고 동물 관리국 사람한테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매콤 씨. 이봐요, 난 단지 서로 좋은 이웃으로 지냈으면 해요. 당신한테 무시당하니까 기분이 나빴을 뿐이에요. 진심으로 대하지 않으니까요. 이웃끼리 그러는 거 아니잖아요. 최소한 동네에서는 그러는 거 아니죠."

", 좋은 이웃이라는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우리도 잘 알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여기 이 동네에서 말이에요."     p.43

195센티미터 장신의 스콧 캐리는 벨트 위로 불룩 나온 배와 운동기구로 다져진 허벅지 근육을 가진 평범한 중년 남자이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자신의 몸무게가 비정상적으로 매일 줄어들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몸무게가 13킬로그램이나 줄게 되자 그는 은퇴한 의사이자 친구인 닥터 밥에게 찾아간다. 이미 주치의한테 가서 정기검진도 받아봤지만 모두 정상 범위 안에 든다는 결과를 받은 상태였다. 닥터 밥이 보는 앞에서 체중계에 올라선 그의 몸무게는 96킬로그램이었고, 주머니 속의 동전 한 움큼과 부츠, 바지, 파카 등을 모두 벗고 다시 체중을 재도 역시 96이었다. 게다가 그의 상태는 겉보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고, 109킬로그램으로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옷을 벗었는데도 옷 입을 때랑 똑같은 체중이 나가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테니 말이다. 스콧의 몸무게는 매일 0.5킬로그램가량씩 규칙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체중이 줄어들면 그는 어떻게 되는 걸까.

칼로리가 높은 음식들로 과식을 해도 체중은 꾸준히 줄어들고 있었고, 더 이상한 건 9킬로그램짜리 아령을 손에 하나씩 들어도 옷을 벗고 체중계에 올랐을 때랑 몸무게가 같다는 거다. 허리 사이즈나 다리 길이나 물리적 차원에서는 변화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꼭 스콧 주변에 중량을 반하는 힘의 장이라도 생긴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였다. 옷을 입거나 물건을 들거나 하면 중량이 더해져야 하는데, 왜 스콧에게는 그렇지 않은 걸까. 게다가 몸무게가 일정하게 계속 감소한다면 언젠가는 몸무게가 바닥 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스콧은 그 불가해한 상황에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일상을 느긋하게 보내기로 한다.

감소하는 속도가 더 빨라지지 않는다면 지금 예상하기로 몸무게가 바닥 나는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속도가 빨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콧은 그 와중에도 인생을 만끽하기로 했다. 그게 자기 자신에 대한 도리라고 느꼈다. 어쨌든, 가망이 없는 상태에 처한 사람들 중 전적으로 기분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그리 흔할까? 스콧은 이따금 노라가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서 배워 온 어느 격언을 생각했다.

과거는 역사이고 미래는 불가사의다. 그의 현재 상황과 아주 잘 어울리는 말이었다.   p.97

이 작품은 무려 '스티븐 킹'의 신작이다. 아마도 작가명을 가린 채 블라인드북으로 이 작품을 읽었다면 대부분의 독자들이 스티븐 킹의 작품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티븐 킹의 작품에서 전에 없던 상냥함이 느껴진다'는 뉴욕타임스의 추천평처럼, 우리가 그 동안 스티브 킹의 호러 미스터리나 스릴러에서 느껴왔던 그 오싹함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첫 장에 '리처드 매드슨을 추모하며'라고 작가가 밝히고 있기도 하듯이, 이 작품은 <나는 전설이다>로 잘 알려진 SF 작가 리처드 매드슨의 또 다른 대표작 <줄어드는 남자>를 오마주한 소설이다. 리처드 매드슨의 작품에서 방사능이 섞인 안개에 닿은 후 점차 몸이 줄어들게 된 평범한 소시민 스콧의 이야기는 사실 좀 오싹했다. 키를 비롯해서 온몸이 일괄적으로 줄어들어 결국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져 벌레로부터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그의 생존 이야기는 고통과 외로움을 동반했으니 말이다. 그에 비해 스티븐 킹의 작품에 등장하는 (또 다른) 스콧의 이야기는 조금 더 경쾌하고, 따뜻하다.

점차 몸무게가 줄어드는 스콧의 이야기는 그의 옆집에 사는 레즈비언 커플에 대한 이웃들의 차별과 편견, 동성혼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스콧은 이들 부부와 애완견 문제로 사소한 분쟁을 벌이게 되는데, 그들이 사람들의 공격적인 시선과 차별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한다. 그가 사람들의 증오에 맞서 싸우는 방법은 바로 자신의 줄어든 몸무게를 활용한 것이었는데, 지역 마라톤 대회 에피소드는 뭉클하고 감동적이었다. 내가 스티븐 킹의 작품을 읽으면서 이런 단어를 사용하게 될 거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특히나 마지막 장면은 마치 아름다운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인상적이었다. 기존 스티븐 킹의 작품들에 비해 가벼운 분량이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그 여운의 잔상은 꽤 오랫동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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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투 더 문
로드 파일 지음, 박성래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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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레오노프가 보스호트 2호를 타고 궤도에 올라 12분간 우주 유영을 했는데 이때 지구로 귀환하지 못할뻔했었다. 레오노프는 공기를 불어 넣는 형태의 사람 키만한 천으로 만든 튜브를 통해 캡슐에서 나왔는데 그의 우주복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캡슐로 돌아올 시점이 되었을 때 우주복이 너무 커져서 튜브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었고 수 분간 정적이 흐른 뒤, 레오노프는 수동으로 우주복을 조작하여 캡슐로 다시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될 때까지 공기를 우주복에서 빼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우주 산책이었다.    p.25

달 착륙 50주년을 기념하여 달 착륙에 관한 모든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고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달 탐험의 역사를 비롯해서 일반인들은 거의 접할 수 없었던 내부 문건, 비행 요약과 우주로 나가는 방법 등 다양한 연구 계획 및 여러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겨있다.

 

 

1968년에서 1972년까지 미국은 9개의 작은 우주선을 달로 발사하였다. 이 중에서 6대는 성공적으로 착륙을 했고, 이는 각각 이전에 발사한 우주선의 성공에 힘입어 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놀라운 시간이었고 우주 탐사의 황금시대라고 불린다. 이 책은 주로 달 탐험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탐험자적인 여러 계획을 진행하면서 작성된 미국 NASA와 이보다는 조금 작지만 소련의 기록과 같이 다채롭고 흥미로운 자료도 포함하고 있다.

 

 

아폴로 1호의 화재 사고로 인해 사령선의 약점이 제작사뿐만 아니라 NASA의 고위직에게도 드러나게 되었고, 미국의 달 착륙 계획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폰 브라운과 그의 팀은 새턴 V 로켓 개발을 묵묵히 진행했다. 최초로 달 여행을 가능하게 한 로켓인 새턴 로켓의 설계는 복잡하고 오래 걸렸다. 이 책에는 새턴 로켓의 자세한 설계도와 복잡한 제어판, 그리고 구체적인 개발 과정과 함께 로켓의 실물을 직접 눈앞에 볼 수 있도록 해준다. 바로 'Missions to the Moon' 앱을 통해 증강현실을 이용해 독자들이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달 착륙, 이것이야말로 강력한 한방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실수에 의해 이 임무가 실패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아폴로 11호 승무원은 백업 승무원들의 도움만을 받으며 맹렬하게 시뮬레이터에서 훈련에 열중하였다. 모든 경우의 문제, 책에 나온 모든 오작동이 그들에게 주어졌고 여기에 대응하는 훈련이 계속되어 각각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확실히 커지게 되었다.    p.79

이 책이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Missions to the Moon' 앱을 다운받고 인터랙티브 아이콘이 있는 페이지를 스캔하면 비디오, 오디오, 문서 등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NASA 자료실에 있는 동영상을 실행해서 아폴로 11호 발사나 달에서 앨런 셰퍼드가 골프 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볼 수 있으며, 실제 해당 프로젝트와 관련된 사람들의 육성을 들어볼 수도 있다.

 

아폴로 13호의 승무원이 우주선 산소 탱크에 이상이 생겼음을 보고하는 음성 메시지를 직접 들을 수 있어 놀라웠다. 그리고 달 탐험과 관련된 내부의 중요 문서들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통해 볼 수도 있고, 우주선 이글이나 새턴 V 등 우주선의 360도 랜더링 이미지를 보여주어 실제 눈앞에서 생생하게 잡힐듯한 입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스마트 디바이스를 통해 앞쪽, 뒷쪽 등 돌려보며 여기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로운 경험을 안겨 준다.

 

그리고 아폴로의 향후 계획과 유럽 우주국(ESA)의 달 탐사, 화성 비행 등 흥미로운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현대 우주 프로그램과 일본의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의 달 탐사선 등 아시아 권의 활약도 흥미로웠다. NASA는 이제 2019년에 달에 복귀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임무는 일단 SLS를 사용하여 무인 오리온 승무원을 달에 보내고 돌아올 것이며, 무인 시험이 성공하면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이다."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모험의 절정에서 한 획을 그은 닐 암스트롱의 명언이다. 인류가 최초로 달에 도착한 1969 7 20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지만, 사실 그 최초의 발자국이 찍히기까지 얼마나 많은 과정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꿈과 노력과 실패가 있었는지 대부분은 알지 못한다. 이 책은 150장 이상의 생생한 사진과 앱을 통해 증강 체험할 수 있는 페이지들로 그러한 모든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달에 가려고 했던 우리와 달에 도착한 우리, 그리고 앞으로 달에 도착할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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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기대어 철학하기 -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지 마라
얀 드로스트 지음, 유동익 옮김 / 연금술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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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학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터무니없는 우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토아학파에게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 세계에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발생하는 모든 일은 원인과 함께 일어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성에 의해 일어납니다. 에피쿠로스학파가 어려움에 직면하면 자신을 위로하듯 이렇게 말할 겁니다. "달리 방법이 없어." 반면 스토아학파라면 이미 일어난 비극에 대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라고 반응했을 겁니다.    p.75

'철학'이라고 하면 어쩐지 난해하고 어려울 것 같고, 추상적이고 실제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학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철학이란 삶의 의미나 선과 악에 대한 중요한 질문으로 가득 차 애매모호한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얀 드로스트는 철학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삶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정말 뜬구름 잡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는알랭 드 보통에 의해 창립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인생학교School of Life>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철학이 학문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라고 하는 그는 이 책을 통해 일상 속에서 성찰하는 삶의 중요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카테고리는 에피쿠로스, 스토아학파,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사르트르, 푸코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각각 철학자들의 세계관, 인간관, 윤리관 등등을 세세하게 설명해주고, 그 과정에서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진다. 간소한 생활 속에서 정신적 쾌락을 추구했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근거해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반면, 스토아학파는 인간은 이성적 절제를 통해서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플라톤과 함께 그리스 최고의 사상가로 꼽히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삶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는 특히 중용의 덕목을 강조했으며, 그것이 곧 인간의 자기실현의 길이라고 여겼다.

우리가 하거나 하지 않는 모든 것은 무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거나 하지 않는 순간 무게를 지니게 됩니다. 좋은 사람이 되길 원합니까? 그럼 좋은 행동을 하십시오. 우리의 행동이 우리 자신이 됩니다. 사르트르가 의미 없이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 쌓인 것은 개인 소장품이 아니고 온 세상 사람들이 들여다봅니다. 우리는 자신을 창조하면서 세상을 창조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상입니다.    p.394

네덜란드의 계몽주의자 스피노자는 세상의 모든 것은 자연 안에서만 존재하고 자연의 본질적 법칙에 따라 생성된다고 보았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가 이성이며 정신이고 곧 신이라 생각했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대표적인 실존주의 사상가인 사르트르는 인간은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존재라고 말했다. 원래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에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책임짐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갈 뿐이라는 거다.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미셀 푸코는 지식은 권력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모든 지식은 정치적이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들 철학자들의 사상을 아주 쉽게 설명하면서, 책을 읽는 이들에게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상황들을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철학을 강의하고 있어서인지 철학 이론들을 일방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독자들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책을 읽으며 사고할 수 있도록 소통하는 방식으로 쓰여 있어서 매우 흥미로웠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보고, 경험하는 방식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책을 읽었다면, 아주 조금은 철학이라는 학문이 친근하게 느껴졌을 거라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읽었던 철학에 관련된 책 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했고, 이해하기 쉬웠고, 공감되었고, 재미있게 읽었다. 철학이 이렇게 '재미있는' 학문이라는 것을 나는 처음 깨달았고, 내 삶에 철학적인 사고를 적극적으로 개입시켜 보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우리는 매 순간 생각해야 한다. 진짜 ''를 만나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삶을 위한 철학, 행복을 위한 철학'을 체감하게 해 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철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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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 1~2 세트 - 전2권
치고지에 오비오마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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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남자들이 불타오르는 들판도 달려서 가로지를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보았습니까? 연인들의 몸에 성교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요? 그 힘의 대칭성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고려했을까요? 어떤 시가 그들의 영혼을 뒤흔들어놓는지, 여린 마음에 새겨지는 애정 어린 표현의 효과는 어떤지에 대해서는요? 우리는 과연 사랑의 생김새를 숙고했습니까? 어째서 어떤 관계는 사산되고, 어떤 관계는 지체되어 자라지 못하며, 어떤 관계는 깃털이 다 난 성체가 되어 연인들이 살아가는 내내 지속되는지 말입니다.     -1, p.86~87

치고지에 오비오마,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나이지리아 작가이다. 그는 단 두 권의 소설로 세계 3대 문학상인 부커상 파이널리스트에 두 번 올랐다. 이번에 국내에 소개되는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신화적이면서 현실적인 내적 고통으로의 쓰라린 여행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019 부커상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그 동안 아프리카 문학들을 그래도 꽤 읽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대부분 스릴러 혹은 SF 장르의 작품들이었던 터라 진입 장벽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프리카라는 낯선 대륙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그 이국적인 분위기가 작품에 색다른 매력을 부여해 더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이 작품은 많이 낯설고, 좀처럼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아 난감했다.

이 작품이 나를 비롯한 평범한 독자들에게 진입장벽이 높았다면, 아마도 이유는 독특한 배경 때문이 아닐까 싶다. 2권 후반에 실려 있는 작가의 주석에 따르면 이 작품은 이보 우주론에 단단히 뿌리를 두고 있다. 작가는 '이보 우주론이란 한때 나의 민족을 인도했고, 부분적으로는 지금도 인도하고 있는 신념과 전통의 복잡한 체계다. 내가 그런 현실 속에 허구의 작품을 위치시키고 있으므로, 호기심 많은 독자들은 그 우주론을 조사해보고 싶을지도 모른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나 역시 이야기 속을 헤매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보 우주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아야 읽는 데 무리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1권의 서두에 도표로 보는 이보 우주론이라고 해서 그림이 수록되어 있긴 하지만, 사실 이걸 봐도 이해하기란 어렵다. 

난 네가 좋았지만, 왜 그런지 몰랐어. 하지만 네가 매를 쫓은 그날, 나는 너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뭐든 할 거라는 걸 알았어. 이 남자에게 내 마음을 주면 이 남자는 절대 날 실망시키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어. 평범한 동물들에게도 그런 사랑을 보여주는 너니까 나한테는 더 큰 사랑, 더 큰 관심, 더 큰 도움을 주리라는 걸, 뭐든 더 크게 주리라는 걸 알았어. 그래서 내가 널 사랑하는 거야, 논소. 이제 알겠어? 사실이 아니니?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나이지리아 사람 중에, 아니 전 세계 남자들 중에 몇 명이나 한 여자를 위해 가진 걸 전부 팔 수 있겠어?      -2, p.87

이 작품의 화자는 모든 인간에게 깃들어 있다는 수호령라는 존재이다. ''는 지상의 인간을 보완하는 영적인 존재로, 절대자 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소설은 치가 신에게 자신이 수호하는 인간 치논소 솔로몬 올리사의 삶을 증언하고, 변호하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덕분에 문장부터 낯설다. 오바시디넬루시여 혹은 추쿠시여, 그리고 아구지에그베시여... 등등 신을 지칭하는 말로 시작되는 문장들은 -뵈옵니다, -깃들었나이다, -때문이옵니다, -믿나이다, -되었나이다 등으로 마무리가 된다. 이러한 말투 때문에 내용이 더 와 닿지 않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일단 낯선 문장들을 천천히, 잘 삼켜가면서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의 대화를 들려주거나 상황을 소개하는 장면들에서 정상적인 문장들도 만날 수 있다.

주인공의 비극이 개인적 성향이나 운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나이지리아의 역사적 현실에서 기인한 것이라서 인지...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구름 위에 떠 있는 거짓말 같은 판타지 세계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거친 땅 바닥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세계의 면모가 그려지는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다. 물론 그 단계에 이르는 과정은 어느 정도의 고난(이라고 표현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을 동반한다. 그러니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당신에게, 마술적 리얼리즘과 비극적 리얼리티로 인간 경험의 심오한 신비를 드러내는 신비로운 서사시를 만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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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쉬즈 곤
카밀라 그레베 지음, 김지선 옮김 / 크로스로드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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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쩜 그런 짓을 할 수 있죠? 네르미나한테 일어난 일만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전쟁 말이에요. 어떻게 이웃이 이웃한테 등을 돌리고, 강도질을 하고 살인을 하는지. 애어른 할 것 없이 8천 명의 남자들이 스레브레니차에서 대량 학살을 당했어요. 가족과 격리되어 구류당해 있다 가축처럼 도살당한 거죠. 그리고 세계는 손 놓고 구경만 했고요. 8천 명! 인류는 도대체 뭐가 문제죠? 그리고 그건 절대 끝나지 않아요. 악함은 악함을 먹고 살아요. 보스니아에 이런 속담이 있어요. 코 세예 베타르, 자네 올루유. 이런 뜻이죠. 바람 씨를 뿌린 자, 태풍을 거두리라.”   p.238

스웨덴의 작은 마을 오름베리의 눈 덮인 숲에서 한 여성이 구조된다. 옷이 흠뻑 젖고 찢어진 상태에다, 재킷도 없이 맨발에, 팔은 피와 흙으로 얼룩져 있는 상태였다. 바깥은 꽁꽁 얼어붙도록 추운 날씨였고, 어제의 폭풍에 이어 가벼운 진눈깨비가 날리는 날씨였다. 발견된 여성은 바로 프로파일러 한네 라겔린드로, 그녀는 연인이자 동료 수사관인 페테르와 함께 한 소녀의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사라진 페테르의 행방도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녀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 가는 중이었고, 그래서 자신의 갈색 노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모든 것을 꼼꼼하게 기록해왔다. 하지만 만신창이가 되어 나타나면서 노트를 잃어 버리고 말았고, 한네의 노트는 그녀를 발견한 소년 제이크가 가져가게 된다.

이야기는 세 가지 인물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수사관인 말린과 마을 소년 제이크, 그리고 제이크가 발견해 읽게 되는 한네의 일기장 속 과거 시점이다. 그래서 현재 말린이 속해 있는 수사 팀의 사건 전개와 일기장 속 한네와 페테르가 수사하던 사건에 대한 전개가 함께 진행되면서 숨겨진 진실에 조금씩 다가가게 된다. 특히나 사건 수사 자체보다 각각의 인물의 내면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각 캐릭터들의 목소리가 매우 뚜렷하게 시선을 잡아 끌고 있어 더욱 시선을 뗄 수 없는 작품이었다. 대부분의 북유럽 소설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 역시 장소와 날씨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스웨덴의 외딴 마을 오름베리, 한때는 번성한 산업도시였지만 이제는 버려진 공장들, 문을 닫은 상점들, 부스러져 가는 집들이 거의 전부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숲과 길고 긴 겨울과 가난 속에서 얼마 남지 않은 거주민들은 희망을 잃고 무력하게 살아간다. 이곳은 밤이면 마치 무덤처럼 완벽한 칠흑이 되어 버리는 곳이며, 가을 폭풍이 불면 정전이 되고, 폭설이 내리면 길이 막히고, 나무가 쓰러지고, 차는 숲 한복판에서 퍼져버리고 마는 곳, 뿐만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여러 가지 것들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넘쳐나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도망치려 했던 게 바로 이거라고, 난 생각했다.

오름베리, 시골, 빤히 보이는 암울한 미래, 드넓은 벌판과 조용한 숲들. 텔레비전 앞에서 과자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밤과, 저장고를 채우기 위한 가장 가까운 대형 슈퍼마켓으로의 여행. 겨울밤의 혹독한 어둠과 여름의 무자비한 선명함.

모든 것이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끝나 버린 듯한 그 느낌.     p.387

강력계 형사인 페데르와 프로 파일러 한네는 작가의 전작인 <약혼살인>에서 먼저 등장했었다. 전작에서 페테르는 아이가 있지만, 그는 부모로서의 책임도, 남편으로서의 의무도 회피한 채 여전히 혼자 지내고 있었다. 엄마와 살고 있는 아이와는 일년에 한 두 번 만나고, 스스로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한네는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남편에게 질려서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10년 전에 경찰들과 업무를 협조해서 범죄 수사를 함께 했었고, 한때 페데르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의 배신으로 상처를 받은 적이 있는 상태였다. 당시 이 작품이 흥미로웠던 것은 캐릭터와 구성이었는데, 등장 인물들이 '내면적'으로 복잡한 것으로 묘사되어 수사 자체보다 인물의 내면에 더 집중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간 속에서 어느 순간 교집합이 되며 마주하게 되는 극강의 충격과 반전의 힘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신작 <애프터 쉬즈 곤>에서도 이들 두 캐릭터가 등장하긴 하지만, 이야기의 화자는 이들이 아니다. 한나의 일기장을 주워 읽게 되는 소년 제이크와 한나와 함께 수사 팀에 있는 말린의 시선으로 서사가 진행되고 있다. 페테르는 한나의 일기장 속에서 등장하며, 한나는 사라져 가는 기억을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찾아내지 못하고 있어 사건의 주요 서사에서는 약간 벗어나 있다. 대신 제이크와 말린이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한 쪽은 성적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있는 소년이고, 또 한 쪽은 과거의 어두운 기억과 고향인 오름베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어 방황하는 여성으로 일종의 소수자에 해당되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주요 서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언제나 이슈인 난민 문제이다. 과거 희망과 번영의 상징이었던 공장이 난민 수용소가 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이 결국 소수자들에 대한 집단적 공격성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그 적의와 공격성이 시종일관 서늘하게 와 닿는 작품이었다. 특히나 북유럽 최고 추리소설에 수여하는 유리열쇠상을 작년에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니, 북유럽 스릴러를 좋아한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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