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원
존 마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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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대 시절에 엘리는 매치되지 않은 사람과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는 일도 가능하다고 믿었다. 어쨌거나 문제의 유전자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수천 년 동안 벌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30대의 문턱을 넘어서면서, 엘리는 유전적으로 매치되지 않은 누군가와 자신이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잃어버렸다. 데이트에서 불꽃이 튀는 느낌도 경험해보았지만, 그 불꽃은 상대의 진짜 의도를 알게 되면 늘 싹 식어버렸다.    p.127

 

여자 여섯 명을 살해하고 영국 최악의 살인마라고 불리는 크리스토퍼는 'DNA 매치'에서 온 이메일을 받는다. 이메일은 그에게 돈을 내고 상대에 대한 연락처 정보를 받아보겠느냐고 묻는다. 그럴까 고민하는 그의 곁에는 몇 분 전에 자신이 살해한 여자가 슬레이트 바닥에 누워 있다. 목에는 여전히 교살용 흉기가 파고든 채였다. 평생 누구에게도 별로 사랑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그였지만, 생물학적 특징에 따라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로 결정된 여자에게는 호기심이 생겼다. 자신의 매치가 누구일지 무척 궁금했던 그는, 상대에게 연락을 하고 만나기로 한다. 그녀는 아주 매력적인 외모에 직설적인 성격이었고, 크리스토퍼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낀다. 문제는 그녀가 경찰이었다는 점이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와 자신이 벌이고 있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경찰 여자친구가 유전자 정보에 기반한 필생의 인연이라는 것이다.

 

 

여기 결혼을 앞둔 한 커플이 있다. 그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남은 평생을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매일매일 부족한 것도, 걱정할 것도 없이 행복하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사실은 영혼의 동반자가 아니라면'이라는 의문이 들었고, 머리카락 한 올 혹은 입속에 넣었던 면봉 하나로 그 사실을 과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말이다. 누구라도 우리가 서로의 반쪽인지 검사해보고 싶지 않을까.

전 세계의 수억 명이 'DNA 매치'를 통해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시대였다. 사람들은 매치 결과에 따라 기존의 배우자 또는 연인을 떠나고, 대륙을 가로질러 이주하고, 유전자를 제공한 뒤 기다리고 있다. 덕분에 이혼율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덕분에 이혼 변호사나 관계 전문 상담가, 그리고 결혼 산업이 호황을 누리게 된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걸 알면 기꺼이 상대에게 평생을 바치려 하니 말이다. 게다가 이 사업으로 인해 결혼을 통해 무엇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시대, 매치에 대한 신뢰가 인종 차별과 각종 혐오를 무너뜨리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상대를 처음 만나자마자 그 사람이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알아요. 난 다양한 사람들이 어디에 매력을 느끼는지 살피는 연구를 시작했어요. 얼굴인지 체형인지 태도인지 등등. 그런 다음 즉각적인 매혹 이상의 뭔가가 있는지 살펴봤어요... 평상시의 이상형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사람과 결국 짝을 이룬 사람들은 어떨까 하고요. 난 몸이 머리와는 다르게 반응하게 만드는 어떤 요소나 유전자가 있을지 궁금해졌어요. 우리 모두가 다른 한 사람과 본질적으로 연결되는 게 과학적으로 가능할까?"    p.228

 

서른 일곱의 이혼녀 맨디는 두 차례 유산이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게 된 큰 원인이었음에도 여전히 아이를 원한다. 그녀는 자신의 매치를 찾아 가지만, 그는 사고로 죽었다는 걸 알게 되고, 만난 적도 없는 죽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게다가 가족들로부터 그가 남겨둔 냉동 정자가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닉은 여자친구의 권유로 마지못해 테스트를 받는데, 그의 매치는 놀랍게도 잘생긴 남자였다. 닉은 게이가 아니었고, 상대 역시 여자친구가 있는 이성애자였는데도 말이다. 호텔 접수대에서 일을 하며 유일한 낙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자신의 매치와 통화하는 거였던 제이드는 결국 서른 몇 시간의 비행을 거쳐 그를 만나러 간다. 그런데 제이드를 맞아준 것은 림프종 4기로 이제 살 날이 한두 달 밖에 남지 않은 시한부 환자였다.

 

이야기는 다섯 커플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이들은 각자 ‘DNA 매치’를 통해 운명의 연인을 만나지만, 결코 평범하게 행복할 수만은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너무 다양하고, 스펙터클하게 펼쳐지는 이야기라 한번 읽기 시작하면 결코 멈출 수 없는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예측할 수 없는' 스토리 전개가 아닐까 싶다. 거듭되는 반전과 전혀 상상도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에 독자들을 정신 못 차리게 만드는 엄청난 페이지 터너였다. 유전자 정보에 기반한 ‘DNA 매치’ 시스템이라는 설정 또한 매우 흥미로운데, 연애를 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그 수많은 실패와 눈물, 고민, 실연 등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결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으니 말이다. 누구도 더 이상 사랑에 실패할 필요가 없는, 성공룔 백퍼센트의 사랑만 남아 있는 세상에서 여전히 그 놈의 사랑 때문에 고민하는 다섯 커플의 이야기를 만나 보자. 단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 없는, 처음부터 예측할 수 없는 작품을 만나게 될 테니 말이다. 이 작품은 올해 하반기에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10부작으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하니 드라마도 놓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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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 - 바로 지금,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하여 클래식 클라우드 22
정여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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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가 세 아들을 낳아 키운 곳이며 <수레바퀴 아래서> 라는 출세작을 쓴 곳이기도 한 가이엔호펜은 더욱 그 여정이 험난했다. 일단 가이엔호펜에서는 마음에 드는 숙소를 찾을 수가 없어서 휴양 도시 라돌프첼의 기차역 근처에 숙소를 정했다. 그런데 라돌프첼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나는 탄성을 질렀다. 가이엔호펜에 있는 헤세의 집을 찾아가기 위해 잠시 숙소로 정한 곳이지만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p.25

 

클래식 클라우드 그 스물 두 번째 작품이다. 아마도 고전 작품 중에 한국인이 가장 많이 읽는 작품이 아닐까 싶은 <데미안>의 헤르만 헤세 편이다. 이번 여행의 가이드는 헤세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작가인 정여울이라서 더욱 기대가 되었다. 특히나 이번에 헤르만 헤세를 만나는 여정은 여행자, 방랑자, 안내자, 탐구자, 예술가, 아웃사이더, 구도자라는 7가지 키워드로 헤세의 삶을 재조명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헤세는 학창 시절 두 번이나 퇴학을 당했고 따돌림도 당했으며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버려지기도 했다. 기댈 수 있는 학벌도 이렇다 할 지연도 없었고, 힘들 때 의지할 만한 그 어떤 성공한 사람도 주변에 없었다. 대신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무릎 꿇지 않았고, 그 누구 앞에서도 자기답지 않은 모습을 꾸며내어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헤세의 삶에 대한 정여울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순간 뭉클해졌다. 바로 이 문장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헤세는 나이 들수록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갔다'라는 말만큼 대상에 대한 진짜 애정이 묻어나는 글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여울 작가가 헤세를 왜 좋아하고, 그의 작품을 통해서 어떤 영향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무엇을 배웠는지가 클래식 클라우드의 여정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부끄럽지만, 뭔가를 시작해야 할 때가 있다. 그때 시작하지 않으면 또 엄청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내 안의 진정한 열망이 타오를 때까지.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올 때까지. 데뷔작은 항상 마음속에서 꿈틀거리지만, 첫 작품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도 설레는 일인가. 헤세는 첫 장편소설인 <페터 카멘친트>를 통해서 단번에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사실 작가가 되기에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고 할 수 없지만, 자신을 둘러싼 불리한 환경을 작품 속의 '드라마틱한 배경'으로 삼을 줄 알았다.     p.92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수백 년간 우리 곁에 존재하며 '클래식'으로 남은 세계적 명작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제대로 읽지 않는 작품들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거장의 흔적을 따라서 그가 태어난 곳부터 마지막 눈감는 순간까지의 여정을 직접 여행을 통해서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이다. 정여울 작가 역시 헤세의 작품을 눈으로만 읽는 것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기에, 그가 작품을 쓰고, 아이들을 키우고, 사랑에 빠지고, 삶을 꾸려가던 장소에 직접 찾아가 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 여정은 작가의 저서인 <헤세로 가는 길>을 통해서 보여졌었고, 그걸 통해서 지금까지 헤세에 관한 글을 꾸준히 써오게 된다.

 

이번 클래식 클라우드는 그 작품에 이어 또 다른 헤세와의 만남을 꿈꾸는 두 번째 책이다. 관광지도 아닌 외딴 시골, 헤세의 고향인 독일 남부의 소도시로 가는 길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작가는 그 아름다움을 '풍경 자체라기보다는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까지의 설렘이 만들어낸 신기루'일지도 모른다고 표현한다. 목적지보다 그곳으로 가는 길이 더욱 아름답다면, 나 역시 언젠가는 한번쯤 헤세의 문장을 살아 있는 가이드 삼아 그 곳에 가보고 싶다.

 

 

작가는 헤세를 통해서 배운 것들을 이 여정 속에서 끊임없이 말해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헤세를 통해 내 그림자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대목이었다. 자신이 지닌 빛보다도 그림자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웠다니 말이다. 열정이나 재능이 '빛'이라면 상처나 두려움이 '그림자'에 속할 텐데, 그림자가 자신을 움츠리게 하고 기죽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스스로를 '성찰'하게 했다는 것이다. 과연 나에게는 이런 존재가 있을까 돌아보게 되었다.

 

나 역시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이 있고, 그들의 전작을 사서 모으고, 여러 번 읽어 왔지만 이렇게 사랑하는 작가와 완전히 혼연일체가 된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지는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뭉클했고, 설레었다. 헤르만 헤세의 삶과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알 수 있어서 좋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이토록 영향을 받아 성장하고, 변화해온 과정을 엿볼 수 있었던 점이었다. 살면서 이런 대상을 단 한 명이라도 만난다면, 그 삶은 정말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으니 말이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을 다시 꺼내어 읽어 보고 싶어졌다. 정여울 작가가 이렇게나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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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한한 위로 - 위로는 정말 그런 걸지도 모른다, 엉뚱하고 희한한 곳에서 찾아오는 것
강세형 지음 / 수오서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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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구내염이 심해지기 시작했을 때, 나를 외롭게 만드는 말이 하나 있었다. "나도 그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피곤하면 나도 그런다, 아니 누구나 다 그러는 거 아니냐.' 그럼 난 별것도 아닌 일로 징징거리는, 꾀병 부리는 애가 된 것 같아 민망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어쩐지 좀 억울하기도 했다. 그냥 한두 군데 헐어서 아프다고 하는 게 아닌데, 매번 입안을 보여주며 '당신도 정말 이만큼 셀수도 없이 많이, 심하게 허나요?' 이럴 수도 없고, 그래서 언젠가부턴 부러 안 아픈 척 애를 쓰기도 했다.    p.24

 

살다 보면 누구나,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고단한 일상, 공허한 인간 관계, 무심코 주고 받는 상처 등 힘들고, 아프고, 지치고, 피곤한 일들은 왜 그렇게도 많은지 말이다. 나는 그럴 때 어떻게 위로 받았을까. 나는 그런 순간들을 어떻게 견뎌내고, 여기까지 왔을까. 힘내, 괜찮아 질거야. 다 잘 될 거야. 나도 그런 적이 있어 등의 해맑고 건강한 말들이 공허하게 들렸던 적은 없을까.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 무심한 작은 배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이에게서 받게 되는 뜬금없는 위로까지.. 애당초 작정하고 덤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볍게 툭 내뱉을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위로인 것 같다. 강세형 작가는 '작정하고 내뱉어진 의도된 말에서보다는, 엉뚱하고 희한한 곳에서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가끔은 자신이 위로를 '발견'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고. 그러니 이 책은 그녀가 두리번거리다 발견한 희한한 위로들에 대한 일종의 모음집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녀는 가끔 영화와 드라마를 보다 멈칫하고, 책을 보다 밑줄을 긋고, 음악이나 팟캐스트를 듣다가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자신을 멈춰 세운 말과 이야기를 곱씹으며 위로를 챙긴다. 마치 위로 수집가라도 된 것처럼. '위로' 수집가라는 표현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로'라는 것이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누군가의 슬픔을 달래주는, 반드시 동작의 대상이 필요한 타동사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굳이 대상이 없어도 상관없는 자동사 같은 느낌일 수도 있는 거라니 말이다. 내가 나를 위해, 그것이 너무 필요해서, 그래야 다시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스스로 찾아내거나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것이 '위로'라는 말은 이상하게 든든한 기분을 안겨 준다.

 

 

하나씩 지워간다는 것이, 꿈이 더 작아지고 삶이 더 초라해지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언제쯤 알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도 알아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하나씩 지워간다는 것은, 초라해지는 게 아니라 그저 달라지는 것뿐이었다. 하나씩 지워간다는 것은, 불행해지는 게 아니라 그저 '나는 사실 이런 사람이었구나'를 깨달아 가는 과정일 뿐이었다. 물론 20년 전의 내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지금의 이 '다른 삶'이 마냥 행복하고 좋기만 한 건 아니다. 그런데 분명한 건, 그 시절의 나는 몰랐을 다른 기쁨과 행복도 있다는 거다.    p.135

 

체력이 약하고 예민하고 자주 아프곤 하는 작가는 주인공이 되어 대화를 이끌어가고 싶은 욕망보다 조용히 듣고 싶고, 누가 날 알아봐 주길 바라기보다는 내가 그들을 관찰하는 쪽이 더 즐겁고, 힘들때 도와달라는 말은 잘 못하고, 개인 SNS는 거의 하지 않고 인맥을 넓히고 사교 생활을 즐기는 건 귀찮은 그런 성격이었다. 게다가 최근 몇 년 제법 힘겨운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자신이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이 연달아 우르르 몰아치자 무기력해졌고, 산다는 것이 귀찮아지고 만다. 그때 그녀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견디고 있는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다시 힘을 찾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남들보다 예민해서 자주 아프고 자주 외로워지지만, 그래서 또 자신을 위해 그나마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는 그녀의 말이 누군가에게는 공감이 되어 주고, 위로를 안겨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지쳐버리고 세상 쓸모없어 보이는 존재도 분명 어딘가에 쓸모가 있어서 태어난 거라는 말이 뭉클하게 와닿았다면,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만의 위로를 발견하게 된 걸테니 말이다. 세상에 사연 하나 없는 사람, 상처 하나 없는 사람, 힘들지 않고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가 견디며 버티며 살아내고 있으니, 사실 그 모든 이들의 삶 하나하나가 기적처럼 느껴진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조금은 스스로를 대견하고 기특하게 여겨도 괜찮지 않을까. 겉으로는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우리의 삶은 각자의 자리에서 이미 기적이다. 내일 또다시 시작되는 그 수많은 하루하루를 부디 잘들 견딜 수 있기를, 당신의 모든 시간에 응원과 위로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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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N. K. 제미신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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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상은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개념이 뿌리를 내리고 우리 인류의 기초를 흔들고 균열을 일으킬 때까지 자랄 수 있는 곳임을 인지하기 시작하네. "어떻게 그럴 수가?" 정보 수집자들은 우리에 대해 이렇게 외치네.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어떻게 저 사람들이 굶어 죽게 내버려 둘 수 있지? 어째서 다른 사람들이 무시당했다고 하면 귀 기울이지 않는 거지? 이들이 공격 당하는데 아무도, 단 한 명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지? 누가 타인을 저렇게 대하지?" 하지만 충격 속에서도, 그들은 그 생각을 공유하네. 악은..... 퍼져 나가겠지.     

- '남아서 싸우는 사람들' 중에서, p.28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전의 우주가 사라지고 똑같은 현실이 반복되는 '확산 현실'의 현상인 프롤리프가 반복되는 일상. 현실의 뒤집기가 일어나면 온라인상에 게시한 기록을 제외한 모든 것이 매일 리셋이 된다. 헬렌은 자신이 쓴 시가 매번 뒤집기를 거칠 때마다 저절로 지워지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온라인 상에 기록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연약한 언어를 타인의 시선에 노출시키는 것이 마땅치 않았고, 그냥 사라지도록 두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최근에 쓴 시를 게시해서 친구들과 나누기로 한다. 개인 대 개인으로 메시지나 이메일을 통한 연락은 가능했지만, 직접적인 개별 연락은 불가능한 시대였기에,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타인과의 연결을 갈구했다.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없다면 누구나 사회적으로 완전히 고립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확산 현실 속에서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애초 세상과의 관계가 약했던 이들이라는 점이다. 이 책에 수록된 <너무 많은 어제들, 충분치 못한 내일들>이라는 작품 속 이야기이다.

 

'부서진 대지' 3부작으로 휴고 상 최우수 장편상을 3년 연속 수상하며 전례 없는 새로운 역사를 쓴 N. K. 제미신의 첫 단편집이다. <다섯 번째 계절>과 <오벨리스크의 문>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기에,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석조 하늘>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다. 이 단편집에는 '부서진 대지' 3부작의 기초가 된 작품도 있으며, 스팀펑크, 어반 판타지 등을 망라해 제미신의 폭넓은 작품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작품들이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제목은 저자가 흑인 여성으로서 SF와 판타지를 사랑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주제로 쓴 동명의 에세이에서 따왔고, 2004년부터 2017년까지 쓰인 22편의 작품이 담겨 있다.

 

 

이카는 소녀의 감정을 아는 것처럼 미소를 짓는다. "지금도 여러 곳에서 그들이 우리를 사냥하는 건 다 이유가 있지. 따지고 보면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우리뿐이니까." 이카는 대충 북쪽을 가리킨다. 거기서 대륙을 들쭉날쭉하게 가로지르며, 붉게 피 흘리는 거대한 균열이 일어나 세상을 파멸시켰다. "하지만 혹시 그들이 우리를 괴물로 취급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괴물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 나는 우리가 당분간 사람처럼 살면서 어떻게 되는지 보고 싶구나"    

- '스톤 헝거' 중에서, p.402

 

SF와 판타지를 쓰고 싶은 흑인 여성으로서, 제미신에게는 작품을 출간할 기회도, 비평가들의 눈에 띌 기회도 없었던 2002년이었다. 그녀는 막 서른 살이 된 직후였고, 살고 있던 도시는 추웠고, 친구 사귀기도 어려웠고, 음식도 입맛에 맞지 않았다. 미적지근한 연애를 끝낸 뒤였고,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평생 취미였던 글쓰기로 조금이나마 돈을 벌면 어떨까 하고, 일주일짜리 워크숍에 참석하게 된다. 그 짧은 기간에 얻은 조언 중에 단편 쓰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 있었고, 덕분에 그녀는 단편을 쓰면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다양한 형식들을 실험해 볼 수 있게 된다. 이 책에도 수록된 <용 구름이 뜬 하늘>이라는 단편이 그녀가 프로 작가로서 처음 판 소설이다. 제미신은 이러한 배경을 이 책의 서문에서 길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유는 이 단편들은 단순히 각각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녀가 작가로서, 그리고 운동가로서 성장한 과정을 기록한 일종의 연대기라 더욱 의미가 있다.

 

<위대한 도시의 탄생>, <스톤 헝거>, <수면 마법사> 들은 '부서진 대지' 시리즈와 '위대한 도시들' 시리즈 등 장편 작품들을 구상하는 데 바탕이 되었다. <비제로 확률>은 휴고 상?네뷸러 상 최우수 단편상 후보에 올랐었고, <남아서 싸우는 사람들>과 <깨어서 걷기>는 각각 어슐러 르 귄과 로버트 하인라인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어 재해석한 작품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시공간과 소재를 다루고 있는 너무도 매혹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부서진 대지' 시리즈를 재미있게 읽었던 독자들에게도, 아직 제미신의 작품을 만나보지 못한 독자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여성과 유색인, 그리고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대한 현실을 SF적인 상상력과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어 놀라운 판타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직접 읽어 보길. 바로 여기 SF 판타지의 미래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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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밤
할런 코벤 지음, 노진선 옮김 / 문학수첩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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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을 듣는 순간 망연자실해지고, 죽음은 절대 돌이킬 수 없으며, 그걸로 끝이라는 사실을 금세 깨닫는다. 내 세상은 산산이 부서졌고 우리는 절대 예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이 모든 사실을 길어야 몇 초 안에 다 깨닫는다. 그 깨달음은 온몸을 흘러넘치며 우리를 압도한다. 가슴이 갈가리 찢기고, 무릎이 후들거린다. 온몸 구석구석이 항복하고 무너지길 원한다... 그때 부정이 끼어든다. 부정은 우리를 구원한다. 부정은 보호막을 펼친다. 부정은 창문에서 뛰어내리려는 우리를 붙잡는다.      p.229

 

15년 전, 열여덟 살의 냅은 다른 마을에서 열리는 아이스하키 시합에 참가했다 경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다. 그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쌍둥이 동생 리오가 있었고, 소울 메이트라고 생각했던 여자 친구 모라가 있었다. 하지만 그날, 리오와 그의 여자친구 다이애나가 기차에 치여 즉사한다. 그들의 체내에서 다량의 알코올과 약물이 검출됐고, 술과 마약에 취한 두 고등학생이 선로 위에서 무모한 짓을 하다 사망한 사고였다. 그리고 사나흘 뒤, 냅의 여자 친구 모라가 사라져 버린다. 동생의 죽음과 여자 친구가 행방불명되어 버린 기억은 냅의 삶을 지배했고, 그는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냅은 경찰이 되었고, 모라의 지문과 DNA를 시스템에 등록하지만, 그녀의 행방은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두 형사가 그를 찾아 와 살인 사건 현장에서 모라의 지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게다가 살해된 것은 모라와 그의 고등학교 동창인 렉스였고, 렉스 역시 경찰로 일하던 중이었다. 가족도 없고, 여자 친구도 없고, 미래도 없고, 친구도 별로 없는 고독한 삶을 살고 있던 냅은 자신의 모든 것을 가져간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15년 만에 나타난 모라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마을 근처의 버려진 군사 기지와 동생의 죽음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당시 리오는 음모론 클럽의 멤버였고, 여섯 명의 멤버 중 세 명이 죽고, 한 명은 실종되었던 것이다. 냅은 나머지 두 명의 멤버들을 찾기 시작하면서, 도시 괴담과도 같았던 버려진 군사 기지의 비밀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우리는 각자의 서사에 부합하는 부분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무시한다고 했던 말 기억하는가? 지금 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실은 그러고 싶지 않다. 무시하고 싶다. 베스는 내게 경고했다. 내가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그 말이 어떻게 사실이 되었는지 베스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마음 한편으로는 레이놀즈와 베이츠가 처음 우리 집 문을 두드리던 때로 돌아가서 난 렉스를 모르느 그냥 가라고 얼른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젠 너무 늦었다. 외면할 수 없다.      p.406~407

 

할런 코벤의 작품 속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세상에 비밀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따지고 들자면 법을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말이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범죄에 연루될 수 있기도 하다. 물론 그런 비밀을 남보다 잘 감추고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고 싶은 진실이 과연 사실인가.에 있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게 마련이니까.

 

할런 코벤의 작품은 매끈하게 잘 만들어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같다.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모든 캐릭터와 사건이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가고, 마치 롤러 코스터를 탄 것처럼 서서히 상승하는 이야기가 클라이막스에 치달을 때까지 지루할 틈이란 단 한 순간도 없다. 세계 3대 미스터리 문학상(에드거상, 셰이머스상, 앤서니상) 최초 석권, 스릴러의 제왕, 반전의 대가 등 할런 코벤을 수식하는 단어들이 그 명성만큼의 재미를 고스란히 안겨준다. 평범한 우리의 주인공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는 숱한 역경을 어떻게 이겨내느냐의 문제, 배신과 질투와 거짓말과 진실 사이에서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 가족 간의 믿음과 비밀, 연인 간의 신뢰와 사랑에 대한 팽팽한 긴장과 싸늘한 관계의 반복에서 오는 장르적인 재미는 그야말로 할런 코벤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으니 말이다. 이 작품 역시 읽는 내내 다음 장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지게 만들며 끊임없이 호기심을 유발시켜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바쁘게 만들었다. 비밀과 배신, 반전과 폭로야 말로 스릴러의 재미를 보장하는 키워드가 아닌가. 후덥지근한 날씨를 잊어 버리게 만들어줄 시간순삭 소설이 만나고 싶다면 할런 코벤의 작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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