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부모들은 어떻게 키웠을까 - 명문대 학생들의 성장 과정을 추적 조사한 하버드 프로젝트가 밝힌 성공의 8가지 공식
로널드 F. 퍼거슨.타샤 로버트슨 지음, 정미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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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학력군의 부모들이나 최저 학력군의 부모들이나 가릴 것 없이 모두 자녀가 다섯 살이 되기 훨씬 전부터 간단한 수치 개념과 기초 단어 읽는 법을 가르쳤다. 대화를 나눌 때는 자녀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며 존중해주고, 자녀의 질문에는 신중히 생각한 후 대답해주었다. 경제적 여력이 어느 정도이든 간에 고도의 헌신과 통찰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바로 이 대목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특징이 있다. 부모들 자신이 한때 소망했으나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에게 대신 이루도록 강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p.31

 

'부모가 굶더라도 자식의 공부는 시켜야 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정부는 교육의 평준화를 외치고 있지만, 부모들의 명문 학군에 대한 희망은 여전하다. 하지만 지나친 교육열 때문에 자녀들이 힘들어한다면, 부모로서 결코 행복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아이의 성공이 오로지 성적이나 시험만으로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명문가 교육열을 풍자한 'SKY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인기 있었던 것도 비슷한 처지에 있는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 가정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며, 부모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은 하버드대 학생들의 성장 과정을 추적 조사한 하버드 양육 프로젝트에서 비롯되었다. ‘하버드대 학생들은 어떻게 자랐을까?’ 혹은 '무엇이 그들을 특별하게 만들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자들은 15년간 하버드생들을 비롯하여 큰 성공을 거둔 수백 명의 성장 과정을 인터뷰하고 이를 분석했다. 퍼거슨 교수와 로버트슨은 그 결과 부모로서 자녀의 성공을 돕는 공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 책을 통해 자녀를 성공적으로 키우는 부모의 8가지 결정적 역할을 알려주고 있다.

 

 

가정은 아이가 접하는 최초의 학습 환경일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학습 환경이다. 뇌 발달의 중요한 토대가 형성되는 시기는 생후부터 5세까지이다. 숫자와 글자에서부터 다른 사람과의 소통에 이르기까지 자녀가 유치원에 들어갈 무렵에 습득하고 있을 만한 모든 것은 이 몇년 간의 조기발달 시기에, 대체로 가정에서 학습된다. 이 기간은 다양한 가정 환경의 차이에 따라 아이들 간의 교육 불균형이 발생하는 시기이지만, 또 한편으론 그런 격차의 싹을 미리 없애버릴 수도 있는 시기이다.    p.173~174

 

성공한 사람들의 부모는 자녀의 성공에 어떤 식으로 기여했을까? 우리는 그들의 양육 방식에서 어떻게 실용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성공한 자녀 대부분이 영재나 유전적인 잠재력에서 대단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 특히 놀라웠다. 이들은 대부분 보통 사람의 범주에 들었고, 단 한가지 차이점이라면 '똑똑함도 힘처럼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부모 밑에서 성장했다는 점'이다. 이들 부모가 수행했던 바로 그 양육 공식은 여덟 가지 역할로 이루어져 있다. 뇌가 성인의 90퍼센트 수준까지 발달하는 생후 5세까지 가장 중요한 역할인 '조기학습 파트너', 모든 사람과 시스템이 아이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기능하도록 살피는 '항공기관사', 비상요원처럼 자녀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 아이에게 새로운 생각을 깨우쳐주는 '계시자',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녀가 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찾도록 도와주는 '철학자', 말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면서 가르치는 '롤 모델', 아이가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협상가', 마지막으로 자녀가 스스로 선택한 인생의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데 조언과 지혜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GPS'이다.

 

하버드대생들이 말하는 ‘나는 이런 가정교육을 받았습니다’ 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사례들이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고, 수많은 실제 사례와 검증된 학습이론, 뇌 과학과 아동발달 등 최근 과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밝혀낸 양육 공식이 잘 정리되어 있어 지금 부모이거나 부모가 될 계획이라면 매우 도움이 될 것 같다. 아이의 잠재력을 키워주기 위해 부모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고, 자녀가 성공하고 행복하게 성장하길 바라는 부모에게 반드시 필요한 지침들을 수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는 법이 아니라 유년기에 부모가 자녀가 교감을 나누고, 아이의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끌어 줄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들을 알려주고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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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할머니 - 사라지는 골목에서의 마지막 추억
전형준 지음 / 북폴리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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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고만 찍고, 으이? 요 올라와서 같이 커피 마시믄서 꽁알이들 밥 묵는 거 보소. 을매나 이쁘노. 쪼맨한 것들이 오도독 먹는데 증말로 이쁘제. 이게 내 요즘 사는 낙 아이가.”
정말로 그랬다. 은은히 풍겨 오는 따뜻한 밥 냄새, 선선한 아침 공기, 잠이 저만치 달아나는 진한 커피, 그리고 고양이들. 대단할 것 없는 소소한 일상의 조각들이었지만 이보다 더 확실한 행복은 없을 것 같았다.     p.16

 

SNS상에서 꽤나 유명한 할머니와 고양이 사진들, 바로 그 사진들을 찍은 고양이 작가 전형준의 첫 에세이집이다. 집에서 키우고 있는 고양이들을 찍으려고 산 카메라였는데, 어느 날 마당에 찾아온 길고양이 가족을 촬영하면서 그의 길고양이 사진들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길고양이에 대한 애정으로 시작됐고 지금도 그렇다고 한다. 검은 봉지만 봐도 고양이인 줄 알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고양이 중증 환자, 라고 스스로를 표현할 정도이니 그가 고양이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 짐작이 될 것이다.

 

 

저자는 지난 5년 동안 집 근처부터 재개발 지역까지 부산 구석구석을 다니며 수많은 길고양이들을 만났다. 이 책에 가득 수록된 사진 한 장 한 장은 저마다의 각별한 이야기를 품고 있고, 부산 할머니들의 투박하지만 정겨운 사투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글이 어우러져 뭉클하고, 따뜻한 한 편의 서사가 완성되었다.

 

사랑을 받으면 동물이든 사람이든 빛이 나는 것인지, 햇빛을 만끽하고 있는 고양이들의 얼굴에서 사랑받는 존재 특유의 반짝임이 가득하다. 아무런 조건 없이 애정을 베푸는 할머니와 고양이의 애틋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그 믿음과 사랑이 사진들 속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길고양이에게 가혹한 세상. 많은 길고양이들은 오늘만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고양이 사진을 찍게 된 건 내게 진흙 속에서 수많은 진주를 찾는 것 같은 행운이었다. 이 작은 털뭉치들에게 베풀어진 온정을 보며 위로를 얻기도, 또 희망을 느끼기도 했다.    p.307


고양이와 함께라면 언제나 좋고, 어디든 좋은 사람들, 때로는 이들이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무슨 일인지 귀찮게 물어보지 않고, 왜 그러느냐고 짜증나게 몰아치지 않고,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동물들이니 말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고양이와 사람이 어울려 사는 당연한 풍경은 너무도 평화롭고, 아름답다. 고양이의 무던한 일상과 사람들의 관대한 날들이 어우러져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콩알만 한 게 야옹야옹 말도 많아 꽁알이로 부르는 길고양이들의 밥 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꽁알이 할머니, 한겨울에도 다섯 정거장 떨어진 시장에서 명태를 사 와 손수 살을 발라주는 찐이 할머니, 동네 길고양이 형제 여덟 마리 중 혼자 살아남은 ‘하나’를 집으로 들이신 하나 할머니, 부식 가게를 하며 동네 길고양이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부식 가게 할머니 등 부산 할머니들이 작은 털뭉치들에게 베푼 온정과 끈끈한 유대감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책이었다.

 

우리 동네에서도 거의 매일 길고양이들을 만난다. 물론 대부분의 길고양이들은 사람들을 피해 훌쩍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곤 하지만 말이다. 길고양이들은 잘못된 속설 탓에 미움의 대상이 되어 왔고, 쓰레기봉투를 뜯고 시끄럽게 운다는 이유로 잡혀가 안락사를 당하거나 텃밭을 파헤쳤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길고양이가 수난을 당하는 만큼 그들을 지키려는 활동이 활발한 나라도 우리나라라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과 고양이의 공존을 모색하는 이들이 더 많아졌으면, 조금 더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이 더 많아졌으면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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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어느 날
조지 실버 지음, 이재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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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수 있었던 것들이, 해야 했던 것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하지만 당장 중요한 순간에는 그중 어느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으니까.
관객이 있었다면 아카데미상도 아깝지 않을 60초짜리 무성 영화였다. 만약 누군가 내게 첫눈에 사랑에 빠진 적이 있는지 물어보면, 이제부터 나는 그렇다고 해야 한다. 2008년 12월 21일의 어느 눈부신 1분 동안 내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p.15~16

 

12월 21일 밤, 로리는 죽도록 피곤한 상태로 초만원 2층 버스의 위층에 앉아 있었다. 드디어 크리스마스 휴가가 시작될 참이었고, 일에서 놓여나 너무 기뻤다. 내일부터 계획은 복작대는 런던을 잠시 떠나 고향 집에 내려가 내년이 올 때까지 푹 쉴 예정이었다. 아직도 집까지는 한참 가야 하는데, 버스는 승객들로 미어 터지고 있어 짜증을 참아 보려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는 눈앞에서 일어나는 밀고 밀리는 북새통 따위 안중에 없는 무심한 태도로 들고 있는 하드커버 책에 열중해 있었다. 그러다 로리와 남자의 시선이 똑바로 만난다. 몇 초간 두 사람은 눈을 돌릴 수가 없었고, 그녀는 갑자기 그리고 난데없이 버스에서 내려야 할 것만 같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만원 버스 속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가망은 전혀 없었고, 대신 남자에게 당장 버스에 올라타라는 눈빛을 보낸다. 서로 마주보는 상태에서 어느 순간 남자가 미소를 짓기 시작하고 버스에 타기 위해 움직이지만, 이미 버스 문은 닫히고 출발해버린다.

 

로리는 그 남자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버스보이'를 찾기 위해 가장 친한 친구이자 룸메이트인 세라와 함께 이곳 저곳을 헤매고 다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덧 다시 12월이 되었고, 세라는 새로 만나기 시작한 남자 친구를 크리스마스 파티에 데려온다. 현관문 옆에 어색하게 서 있는 세라의 남자 친구, 그가 바로 열두 달 전 만원 버스 2층에서 심장이 멎는 듯했던 눈 맞춤을 했던 그 '버스보이'였다. 그와 우연히 마주치기만을 빌면서 지난 1년을 보냈는데, 드디어 만나게 되었지만 하필 세라의 애인으로 등장하다니.. 로리는 지옥에 있는 듯한 기분이다. 게다가 세라는 그녀에게 피붙이만 아닐 뿐 모든 면에서 친자매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아무리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이 무슨 유치 찬란한 성탄 특집 영화 같은 설정이란 말인가. 로리는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막막하기만 하다.

 

 

밖에 동화처럼 눈보라가 치고 있지만 여기는 나니아 왕국이 아니다. 여기는 런던이라는 현실 세계다. 심장이 채이고, 멍들고, 부서지는 곳. 그런데도 여전히 심장이 뛰는 곳. 나는 꿀렁꿀렁 조심조심 움직이는 택시의 차창으로 점점 멀어지는 그를 바라본다. 그도 나를 바라본다. 손을 코트 주머니에 깊이 찔러 넣고 바람 때문에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로. 택시가 모퉁이를 돌자 나는 차가운 유리에 머리를 기댄다. 내 심장과 양심이 동시에 납처럼 무겁게 내려앉는다.    p.136~137

 

가끔 눈 깜빡 할 새 한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이 파악될 때가 있다. 모래알만 보고 우주를 이해할 수 있듯이. 제스처 하나 때문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고, 말이나 행동, 그날의 분위기 때문에 한 순간에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한 감정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12월이고, 그런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계절이다. 겨울은 옆구리가 허전한 계절이고, 크리스마스에는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는 생각에 솔로인 사람들은 분주히 주변을 살펴서 자신의 짝을 만나길 기대한다. 좀 더 능청스럽게, 좀 더 용기를 내서, 앞뒤 재지 말고 그냥 말할걸 왜 못 했나, 가슴 치며 후회할 순간들이 무수히 많이 생기곤 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이고 말이다. 물론 우연히 마주쳤지만, 어쩌다 놓쳐버린 인연이 실제로 다시 만나게 될 확률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소설 아닐까 싶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는 세상의 수많은 로맨틱한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설레이는 감정을 안겨주는 작품이니 말이다.

 

이 작품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작가 조지 실버는 독특하게도 스물두 살 생일에 자신이 발을 밟은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했다고 한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시작된 사랑이라는 실제 경험 때문인지, 이 작품 역시 수많은 영화에 비견되며 추운 겨울, 특히 크리스마스를 맞아 꼭 읽어야 할 로맨스소설로 꼽히고 있다고 한다. '러브 액츄얼리'나 '브리짓 존스의 일기' 같은 작품을 좋아한다면, 이 작품 역시 사랑스럽고, 따뜻하게 느껴질 것 같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 따위, 이제는 믿지 않는 너무도 현실적인 어른이 되어 버렸지만, 가끔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은 순간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바로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어쩐지 운명을 믿고 싶어 질테니 말이다. 작가의 말처럼,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벼락처럼 내리치는, 운명적 사랑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단지 그 순간이 아직 오지 않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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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락 댄스
앤 타일러 지음, 장선하 옮김 / 미래지향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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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여보." 윌라가 말했다. "내 입장도 좀 생각해주면 안 돼요? 난 쓸모없는 사람이 된 거 같아요......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 이 사람들은 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칼리와 셰릴과 에어플레인이 유리창에 코를 바짝 대고 내가 오기만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고요! 그건 당신도 이해할 수 있겠죠!"    p.132

 

1967년, 열한 살 윌라 드레이크는 초등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아빠와 동생 일레인만 있었고, 엄마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엄마는 아빠와 자주 다투었고, 감정적이고 예민한 성격이었다. 윌라는 아빠가 해준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엄마 대신 일레인에게 책을 읽어 주고는 침대로 올라간다. 그리고 생각한다. 엄마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1977년, 스물 한 살 윌라는 남자친구 데릭과 함께 부모님을 만나러 온다. 데릭은 윌라와 당장 결혼을 하고 싶어 하고, 윌라는 아직 졸업 전이고 내년에 들을 계획이었던 언어 인류학 과정을 듣고 싶다. 윌라의 엄마는 곧 직장 생활을 하게 된 남자 친구의 스케줄에 맞춰 갑작스레 결혼을 하겠다는 말에 데릭이 배려가 없다며 반대하지만, 윌라는 데릭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1997년, 데릭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고 있는 윌라는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들 문제로 가벼운 말다툼 중이었고, 데릭은 왼쪽 차선에 가고 있는 운전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국 데릭은 그 차 앞으로 바짝 붙여 끼어들었고, 그러나 고속도로 갓길을 들이받는 사고가 나고 만다. 장례식 계획을 세워놓기엔 턱없이 젊은 나이였던 마흔세 살의 데릭을 잃고, 윌라는 미망인이 된다. 2017년, 예순 한살이 된 윌라에게 낯선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 온다. 다짜고짜 자신은 드니즈의 이웃인데 윌라의 며느리가 총에 맞아서 자신이 어린 딸을 데리고 있는데, 자신은 출근해야 해서 더 이상 아이를 챙길 수 없다며 연락이 온 것이다. 하지만 윌라의 두 아들은 아직 결혼 전이라 그녀에게 며느리뿐만 아니라 손주도 없었다. 알고 보니 드니즈는 아들인 션이 예전에 함께 살았던 여자친구였고, 우연찮게 그녀의 집에 션의 어머니 연락처가 있었다는 거다. 윌라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젊은 여자와 그녀의 아홉 살 난 딸, 그리고 강아지 에어플레인을 돌보기 위해 볼티모어로 날아가기로 한다.

 

 

만약 윌라가 클락 댄스를 만든다면 세 소녀가 보여준 춤과는 다른 춤일 거라고 생각했다. 윌라의 춤에는 한 여자가 무대 왼쪽에서 등장해 무대 오른쪽 끝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회전하며 지나갈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 눈에는 오로지 빠르게 도는 흐릿한 색깔만 보이다가 어느 순간 '펑!' 무대 끝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한순간에. 사라진다.   p.334

 

윌라 드레이크의 인생에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중요한 순간들이 몇 번 있었다. 초등학생일 때 갑자기 엄마가 사라진 상황에 대처해야 했고, 여대생이었을 때 남자친구의 청혼을 받고 고민했고, 사고로 남편을 잃고 미망인이 되어 자기 인생을 찾아가야 했고, 그리고 손주를 품에 안은 할머니가 되고 싶었지만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손주처럼 어린 소녀를 돌보게 된다. 어쩌면 그때 이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그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을 지도 모를 그런 순간들이다. 노년의 윌라가 마지막에 얻게 된 특별한 기회는 그녀의 삶을 어떻게 바꾸게 될까. 지극히 평범한 한 여성의 삶을 시기 별로 일대기처럼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앤 타일러가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삶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 시종일관 보여지는 작품이라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다. 누구나의 삶처럼 평범해 보이는 풍경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윌라의 입장에서 보자면 엄마의 가출도, 남자친구의 프로포즈도, 남편의 교통사고도 모두 상대가 그녀를 배려하지 못해서 벌어진 상황들이기도 하다. 특히나 언어학자가 되고 싶었던 그녀의 꿈이 결혼으로 인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던 점은 너무도 현실적이라 더 와 닿았던 사연이었다. 결혼 대신 선택한 것은 언어학자가 아니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ESL선생님이었으니 말이다. 세상의 많은 여성들이 결혼이나 출산으로 인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살면서도 그때 놓친 것들에 대한 상실감을 보상받지 못한다. 그래서 노년의 윌라가 지금까지의 삶을 뒤돌아 보고, 인생의 두 번째 기회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는 순간이 너무도 뭉클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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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에게만 친절합니다 - 독일인에게 배운 까칠 퉁명 삶의 기술
구보타 유키 지음, 강수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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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회사 업무도, 집안일도, 육아도 결국은 다른 영역의 행위입니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는 무엇을 위해 하는지에 대한 본래 목적과, 다른 행위의 목적을 비교하여 어디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일지,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순위를 정해야 하죠. 꼭 내가 모든 것을 다 해야 할 필요는 없어요. 누군가에게 맡기거나, 돈을 내고 의뢰하거나, 아예 안 하는 선택지도 있으니까요.    p.48

 

저자는 일본의 출판사에 근무하는 편집자였다. 늘 성과가 요구되고 끝나지 않은 야근이 이어졌으며, 스트레스가 차곡 차곡 쌓여 가슴 속에 덩어리가 되고 있었다. 그러다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고 즐거운 일이 생겨도 웃지 못할 정도로 메마른 상태가 돼버렸다. 그녀는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1년 동안 독일에 살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당시 '다들 느긋하게 사는 구나'라고 느꼈던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1년 정도 일본을 벗어나 독일의 느긋한 템포로 살고 싶다고 베를린으로 건너갔고, 10년 째 베를린에서 살고 있다.

 

 

이 책은 세계에서 가장 친절한 나라로 손꼽히는 일본에서 마음의 여유를 잃은 상태로 불행하게 살았던 저자가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워 보이는 독일인과 까칠하지만 건전하고 건강한  독일식 라이프스타일을 겪으면서 깨달은 삶의 기술을 들려준다. 독일 생활의 이모저모를 통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새로운 시각이 생기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어디에 살더라도 스트레스를 덜 받으며 살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처음에 저자는 독일의 창구에서, 관공서에서, 전화 통화에서 그들의 불친절함을 겪고는 무척 놀랐다고 한다. 불퉁한 얼굴로 마치 레이저를 쏘아붙이는 것 같은 독일인들의 직설적인 말투가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점차, 그들이 남에게 억지로 친절하지 않기 때문에 나 역시 남에게 대접받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에게 쏟을 시간과 정성이 있다면 나 자신에게 쏟는 것이니, 한마디로 독일인은 남에게 불친절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친절한 것이라는 거다.

 

 

베를린에 와서 깨달았어요. 사람들의 걷는 속도가 느리다는 것을. 다리 길이의 차이도 있겠지만, 저처럼 서두르며 걷는 사람은 소수예요. 걷는 속도뿐 아니라 모든 동작이 느긋해요. 그러다보니 제 템포도 그들에 맞춰 점점 느려졌어요. 그러자 짜증을 내는 일이 줄어들었죠. 늘 갈 길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짜증을 냈어요. 하지만 그렇게 서두른다 한들 얼마만큼의 시간을 벌 수 있었을까요. 고작 몇 분밖에 차이가 안 나는 일에 그동안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해왔고, 그것이 바로 스트레스의 큰 원인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p.105~106

 

특히 독일의 노동 방식 중에 부러운 부분들이 많았다. 할 일이 끝나면 칼같이 퇴근하고, '근로시간 계좌' 제도로 근무시간 외에 추가로 일할 시간을 모아두었다가 업무를 짧게 마치거나 휴가로 쓸 수도 있다. 그리고 '단축 근무'라는 형태로 정사원이라는 고용 형태를 유지하면서 업무 시간을 줄여서 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취학 자녀를 키우는 여성이 출산 전까지 풀타임으로 근무하다가, 출산 후 주 20시간 근무로 계약을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력이 단절될 우려가 없고, 회사로서도 경험 있는 직원이 그대로 남는 다는 이점이 있다. 그리고 '플렉스 타임'이라는 제도도 있는데, 핵심 근무 시간인 '코어 시간'에만 사무실에 있으면 출퇴근 시간을 각자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제도이다.

 

 

겉으로 보기엔 독일이 굉장히 불친절한 나라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내가 1년에 한 달 휴가를 가니까 남도 내가 쉬는 만큼 동등하게 쉬어야 한다. 내가 남에게 억지로 서비스하지 않기 때문에 나도 남에게 서비스받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서로 희생하지 않으니 눈치 볼 필요 없고 서로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할 필요 없다. 너무도 단순하면서도 명쾌하지 않은가. 그리고 덴마크 휘게와 닮은 듯 다른 독일판 휘게 ‘게뮈트리히’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보잘것없을 만큼 사소한 일이 바로 게뮈트리히라서, 별다른 준비 없이 오늘부터 바로 따라 할 수 있는 행복의 기술이었으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서 독일인의 일하기, 쉬기, 살기, 먹기, 꾸미기에 대해 알게 되니, 조금은 까칠하고 퉁명스럽게 살아가도 잘 돌아가는 사회가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배우게 되었다. 건강한 개인주의야말로 남을 위한 일상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인생을 살기 위한 첫 번째 마음가짐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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