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피스트
헬레네 플루드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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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뭐?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내가 뭘 알지? 남자들이 거짓말을 한다면 그 첫 번째 대상은 그들의 아내가 아닌가? 사람들은 수천 가지 이유로 가장 가까운 이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나? 나도 거짓말을 했다 - 어쩌면 자주 하는지도 모른다. 시구르에게도. 특히 시구르에게는. 나는 그에게 내 상담실이 잘되고 있다고, 겨울이라 환자를 찾기가 좀 어렵지만 괜찮아질 거라고 말한다. 차고 위의 상담실에 있으면 외롭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      p.56

 

사라는 잠결에 남편이 나가며 인사하는 소리를 듣는다. 건축가인 남편 시구르는 주말 동안 친구 두 명과 함께 산장에 다녀오기로 했다. 심리치료자로 집에 상담실을 마련하고 일을 하는 사라가 금요일에 만나야 할 환자는 세 명이다. 그들 부부가 사는 집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 이곳 저곳 손 볼 곳이 많았고, 그들은 빨리 집을 개조하고 싶었지만 시간도, 예산도 부족해 아직 집안 여기저기가 리모델링 중인 상태였다. 사라가 환자 한 명과 상담하는 동안 시구르가 음성 메세지를 남겼다. 친구들과 산장에 잘 도착했다는, 그저 안부 전화였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남편과 함께 있어야 할 그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다. 시구르가 오겠다고 약속한 시간에 오지 않았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고. 그는 분명 오전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었고, 친구들에게 연락이 온 건 이미 저녁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자, 보통 이런 상황이 되면 남편의 거짓말 혹은 실종에 대해서 아내가 느끼는 분노나 배신감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남편의 실종 사건을 대하는 아내의 반응이 여타의 작품들과 확연히 다르다. 물론 그녀는 끊임없이 이상한 부분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고, 시어머니에게 연락을 하고, 언니를 찾아가 이야기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녀가 집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상을 보내고, 집에 누군가 들어왔다는 흔적을 통해 불안에 휩싸이게 만들어 남편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아내가 인정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무려 백 페이지 정도를 할애하면서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곧 실종 사건은 살인 사건이 되어 그녀에게 들이 닥친다.

 

 

누구나 사랑받고 존경받고 싶어 한다 - 인간이라면 당연한 거다. 하지만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투명인간이 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상대가 나를 봐주지 않는 것 - 그래, 그것도 나쁘다 - 하지만 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 숲속에서 비명을 질렀는데 아무도 대답이 없다면, 비명을 질렀다고 할 수나 있을까?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나는데도 남편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 일이 일어나기는 한 것인가? 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 나라는 그 작은 존재가 당신이 집과 침대를 공유하는 남자에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인가?     p.285

 

대단히 근사한 작품이다. 아마도 내가 읽었던 심리 스릴러 장르의 작품들 중에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당분간 이 정도 수준의 작품은 없지 않을까 싶었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었다. 사실 유사한 장르의 작품들을 너무 많이 읽어 왔기에,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초반 100~200페이지 정도만 읽어도 대충 답이 나온다. 이 작품을 끝까지 다 읽어야 할지 말지, 후반부의 내용이 짐작이 되기 때문이다. 유사한 플롯, 비슷한 구성, 평면적인 인물들과 깜짝 효과만을 노린 반전 등등.. 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래서 가끔 정말 바쁜 경우에는 초반부만 읽고 중반부터는 대충 훑어 보기만 하고 리뷰를 작성하곤 했다. 실제로 스릴러 장르에서 '서스펜스'를 독자들에게 안겨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고, '심리' 스릴러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는 작품들 대부분이 독자들에게 불안감과 긴박감을 주려고 노력하지만 그 호흡을 끝까지 지속하지 못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다르다. 초반 100여 페이지가 지나기도 전에, 나는 앞으로 내가 이 작가의 작품을 계속 챙겨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헬레네 플루드는 실제 심리학자로 일하고 있으며 그녀의 전문 분야는 폭력성, 재피해자화, 트라우마와 연관된 수치심과 죄의식이다. 바로 그 '심리학자가 쓴 심리스릴러'라는 점 때문에 이 작품이 여타의 심리스릴러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매력을 발산하게 된다. 사건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 초반에 극중 사라가 환자 세 명과 심리 상담을 하는 장면이 있다. 아직 남편의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오기 전이라 그저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녀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부모와 남자친구와 문제가 있는 열여덟의 베라, 부모의 이혼으로 과격한 옷차림에 뚝 떨어진 성적으로 엄마에게 반항 중인 크리스토페르, 게임에 중독되어 있어 부모님의 골칫거리인 트뤼그베. 작가는 이들 세 명을 대하며 사라가 생각하는 것들, 상담하는 과정들만으로도 독자들이 사라라는 인물에 대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그려내고 있다. 사실 줄거리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이 아무 의미없을 정도로, 이 작품은 직접 문장들을 읽고, 그 분위기를 체험해봐야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스펜스로 가득하고,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며, 대단히 우아하고 뛰어난 문장으로 쓰인 작품이니 말이다. 내년에 출간될 예정인 작가의 다음 작품을 빨리 만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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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왕국 프로이센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 박병화 옮김 / 마티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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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늘 곁에 두고 책으로부터 자극을 받고 싶은 프리드리히의 욕구는 너무도 본능적이어서 그는 원정 기간용으로 만든 이동식 '야전도서관'까지 갖추고 있었다. 글쓰기(언제나 프랑스어로)도 중요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전하는 소통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 피난처였다. 그의 글에는 철학자의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행동하는 남자의 대담성과 발랄함을 결합하려는 열망이 담겨 있다. 이 두 가지 인간 유형은 '철인왕'이라는 치기 어린 자기 묘사 속에서 결합되었다. 철인과 왕 두 가지 역할 중 어느 것 하나만으로는 자신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p.265

 

지금은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곳, 한때 독일 인구의 62퍼센트, 면적의 65퍼센트를 차지한 거대한 땅이자 권력이었지만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지워져 버린 프로이센.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언급되던 것을 빼고는 전혀 들어볼 일 없었던 그 프로이센에 관한 엄청난 책을 만났다.

 

 

모든 언어를 막론하고 프로이센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 받는 이 책은 프로이센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지워졌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무려 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때 많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위풍당당해 보였던 국가가 어쩌다 그렇게 급작스럽고 감쪽같이, 그 어떤 애도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량의 압박을 견뎌야만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을 만큼 흥미로운 책이었다.

 

책의 서두에 프로이센- 브란덴부르크의 역사를 보여주는 여섯 개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1415년 무렵의 지도부터 1918년 독일제국 시절의 프로이센을 보여주는 지도까지 시간대 별로 변두리 소국으로 출발해 독일을 통일시키고 제국으로 발돋움하기까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프로이센은 베를린 시를 중심에 둔 4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지역인 브란덴부르크에서 시작되었다. 그저 단조로운 자작나무와 전나무 숲이 대부분의 땅을 뒤덮고 있던 시골 지역이었다. 토양은 척박해 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윤지로 둘러싸여 방어를 위한 어떤 종류의 자연경계선도 없었다. 그렇다면 장래성 없던 이 영지가 어떻게 강력한 유럽 국가의 심장이 되었을까.

 

 

1860년 <타임스>의 머리기사를 보자... 프로이센은 언제나 누군가에 의지하는 사람 같았다. 언제나 자신을 도와줄 상대를 찾으면서 결코 자립할 의지가 없는 사람, (...) 회의에는 참석하지만 전투에는 빠지는 사람, 얼마가 되었든 이상이나 감성은 있지만 현실 앞에서는 수줍음을 타는 사람 같았다. 프로이센은 대군을 거느렸지만 그 군대는 전투의지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 어떤 나라도 프로이센을 우방으로 여기지 않으며, 어떤 나라도 프로이센을 적으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떻게 프로이센이 강대국이 되었는지는 역사가 말해주지만, 왜 프로이센이 아직도 강대국인지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p.687~688

 

대부분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프로이센의 연대기 역시 온갖 굵직굵직한 전쟁들을 통과한다. 30년 전쟁, 북방전쟁, 7년전쟁, 프랑스혁명, 나폴레옹 전쟁,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무슨 전쟁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 속에서 주요 통치자들과 사건들, 그들의 과거부터 이력에 이르는 것들을 낱낱이 다루면서도 이 책은 당시 살았던 평범한 백성들의 이야기도 놓치지 않는다. 전쟁이 민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실제 진격 중인 군대가 지나가는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대중 문화에 어떤 재앙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수백 년에 걸친 프로이센의 정치, 사회적인 변화들을 이렇게 구체적이고, 점진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47년 연합군 점령 당국은 프로이센이 전쟁을 일으킨 독일 내 주범으로 지목 당해 프로이센 주와 그 중앙정부, 그리고 그 정부기관은 프로이센이라는 이름과 함께 모두 폐지된다. 저자는 이러한 프로이센의 서사를 다루면서 선악을 나누거나 그 경중을 가리지 않으려고 했다고 밝히고 있다. 여전히 프로이센을 둘러싼 논쟁이 생기면 양극단으로 갈리고는 있지만, 이 책은 거기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프로이센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프로이센을 본격적으로 다룬 책은 국내에 그 동안 한 권도 없었기에, 출간 만으로도 굉장히 의미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주요한 정치적, 외교적 사건을 도식적으로 나열하는 것에 그치는 책이 아니라 정치적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사회문화적으로 유려하게 엮어내고 있어 만만치 않은 두께만큼의 읽는 재미도 선사하는 책이었다. 물론 읽을 때 재미있는 것과는 별개로 방대한 분량 때문에 막상 리뷰를 쓸려니 난감한 책이긴 했지만, 한 번쯤 시간과 비용을 들어 읽어 볼만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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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5 0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오나 2020-08-16 23:38   좋아요 1 | URL
ㅋㅋㅋ 책을 읽으면서 저도 정말 이동식 야전 도서관 같은 걸 가지고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하루 남은 연휴 기분 좋게 보내시길! ^^
 
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에세이
허지웅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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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만약에 인연이 끝났던 그 마지막이라도 다시 되풀이할 수 있다면. 만약에. 만약에. 그렇게 만약에, 가 쌓여 뭔가 단단히 움켜쥘 수 있는 닻과 같은 것이 되어준다면, 그래서 내가 지금 이 꼴사납고 남부끄러운 감정의 파고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러나 인생은 대개 꼴사납고 남부끄러운 일의 연속이다. 우리는 이별에 특정한 계기가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되돌리지 못해 있는 힘껏 자책을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경우 헤어지는 건 '그냥' 헤어지는 거다. 만약에,를 여러번 곱씹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p.59~60

 

살면서 누구나 그런 적이 있을 것이다. 망했는데, 싶은 기분이 드는 그런 순간 말이다. 다시 돌이킬 수 없고, 그 순간을 모면하거나 도망칠 수도 없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그런 기분이 들어 막막할 때 말이다. 이제 나는 끝났다 싶거나, 사는 게 다 지긋지긋해지거나, 그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그런 당신에게 이 책은 말한다.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살아야 한다고.

 

방송인, 영화평론가, 작가인 허지웅이 혈액암의 일종인 악성림프종으로 투병 중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 2년간의 암 투병을 마치고 다시 돌아왔을 때 방송을 봤다. 예민하고, 까칠했던 모습들 대신 둥글어지고, 다소 편해진 그의 태도와 말투를 보면서 조금 낯설었다. 사실 티비를 자주 보는 편도 아니고, 연예인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편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날 그 방송을 보면서 그가 겪었을 그 지옥 같은 시간의 무게가 느껴져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투병 이후 완전히 달라진 그의 삶에 대해서 응원해주고 싶어 졌다. 그래서 그가 4년 만에 작가로서 선보이는 신작 에세이가 궁금해졌다.

 

 

젊은 날의 나는 대개 불행했고, 앞으로도 불행을 떨쳐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행복하고 싶다는 마음에 잠식되고 싶지도 않았다. 행복한 사람은 거만했고, 거만해서 재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불행에 잡아먹히지 않고 대응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골몰했다. 나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불행에 시달린 이들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알고 있었다. 피해의식은 사람을 괴물로 만든다. 피해의식이 만든 괴물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든 이해받을 수 있다고, 아니 이해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불행했으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 나의 사연이 나의 책임을 대신 져주지는 않는다. 그런 괴물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불행과 함께 살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했다.    p.255~256

 

그는 첫 에세이 <버티는 삶에 관하여>에서 그 무엇보다도 '버티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명제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6년 뒤, 암 투병을 마치고 나서도 여전히 '함께 버티어 나가자'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삶이란 버티어 내는 것 외에는 도무지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라고. 어쩌면 바로 그것 때문에 그가 병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의 말대로 재발한다면 내년에 다시 병동에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의욕이 넘치니 그걸로도 충분한 거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서른 살 이후로는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걸 시도해 본 기억이 없는 그가, 요가를 시작했고 그만두지 않고 열심히 하는 중이다. 해보지 않았던 것이고, 잘 할 수도 없는 것을 지치지 않고 성실하게 말이다.

 

내가 브라운관을 통해서 보았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가 달라진 것 같다는 얘기를 많이 해줬나 보다. 아프기 전과 후의 그가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자신은 뭐가 달라졌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다만 글로 써서 말하고 싶은 주제가 달라진 것만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나는 언제 재발할지 모르고, 재발하면 치료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 항암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래서 아직 쓸 수 있을 때 옳은 이야기를 하기보다 청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남기고 싶다." 라는 그의 말이 너무도 진정성있게 느껴져서 잠시 먹먹해졌다. 크게 한 번 감기나 열병만 앓고 일어나도, 세상에 다르게 보이게 마련인데 생사를 오가는 시련을 겪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할까 싶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상투적인 위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바른 말만 늘어 놓는 게 아니라 더 인상적이었다. 죽음과의 사투 끝에 삶으로 돌아온 그가 힘겨운 현실에 시름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단단한 조언과 오늘도 버티는 삶을 살아내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따뜻한 위로가 뭉클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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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08-13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자체가 강렬하네요!!

피오나 2020-08-16 23:39   좋아요 1 | URL
그죠? 워낙 글 잘 쓰는 분이라 책 속의 문장들도 그렇답니다. ㅎㅎ
 
언더랜드 - 심원의 시간 여행
로버트 맥팔레인 지음, 조은영 옮김 / 소소의책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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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주의 심장에 들어앉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증거를 찾고 있다. 지금까지 그것을 조사하거나 드러내려는 거의 모든 시도가 허사로 끝났을 만큼 이 존재는 불가사의하다. 빛과의 상호작용 일체를 거부하고, 심지어 존재 여부조차 확실치 않은 이것에 붙은 이름은 '암흑물질'이다. 젊은 물리학자가 암흑물질을 연구할 수 있는 장소는 지하 900미터 아래에 암염, 석고, 백운석, 이암, 미사암, 사암, 점토와 표토층으로 차단된 이곳 언더랜드뿐이다. 별을 보기 위해 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땅속 깊이 내려와야만 하는 것이 이 연구의 모순이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만 보이는 것도 있는 법이다.    p.65~66

 

어릴 때부터 항상 심해가 궁금했었다. 심해란 바다의 깊이가 200미터 이상되는 아주 깊은 바닷속이다. 햇빛이 들지 않아 매우 깜깜하고, 물의 압력도 높아, 심해에 사는 생물은 일반적인 어류에 비해서 모양도 특이한 것들이 많다. 빛이 들지 않을 만큼 깊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다보면 지구의 어디까지 닿을 것인지 궁금했었다. 비행기를 타면서 구름 위의 풍경이 어떤지도 보았고, 국내에서 가장 높은 초고층 빌딩에도 가봤으니 높은 곳에 대한 호기심은 어느 정도 채웠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직접적으로 체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더 궁금했던 것 같다. 심해, 동굴, 지하 세계를 일반인이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전무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이 너무 궁금했었다.

 

집필하는데만 6년이 걸린 이 책은 물질, 신화, 문학, 기억, 그리고 대지에 존재하는 지구의 방대한 지하 세계를 탐험한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수상 경력도 화려한 자연작가 로버트 맥팔레인은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땅 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에 주목한다. 사실 '일상적인 비유에서 높이는 동경의 대상이지만, 깊이는 경멸의 대상이다. 상승하는 것이 가라앉거나 끌어내려지는 것보다 선호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아래로 내려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강은 일말의 상식과 정신의 물매를 거스르는 반직관적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얼음은 기억한다. 그것도 자세히, 그리고 100만 년 이상 기억을 간직한다. 얼음은 산불과 해수면 상승을 기억한다. 얼음은 11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시작될 무렵 공기의 화학적 조성을 기억한다. 또 5만 년 전 여름에 며칠이나 햇빛이 비추었는지를 기억한다. 홀로세 초기, 눈이 내린 순간의 구름 속 온도를 기억한다. 1815년 인도네시아의 탐보라 산, 1783년 아이슬란드의 라키 화산, 1482년 미국의 세인트헬렌스 산, 1453년 남태평양 바누아투의 쿠와에에서 일어난 폭발을 기억한다. 얼음은 로마의 제련 유행을 기억한다. 얼음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몇십 년 동안 휘발유에 들어 있던 치명적인 납의 양을 기억한다. 얼음은 기억하고 말한다. 우리가 빠른 변화와 신속한 역전이 가능한 변덕스러운 행성에 살고 있다고 말해준다.    p.364~365

 

로버트 맥팔레인은 15년 넘게 경관과 인간 마음의 관계에 대한 글을 써왔다고 한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의 얼음 덮인 정상에서 출발해 아래로 내려가는 궤도를 따라 지하공간까지 모두 탐험했다. 이 책은 지하 900미터 아래에 있는 암흑물질 실험실에서 시작해, 앞으로 10만 년 동안 핵폐기물을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설계된 깊은 저장고에서 마무리가 된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는 5,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영국의 서머싯 마을로 갔다가, 약 1만 2,000년 전의 이스라엘 북부 힐라존 강을 거치고, 약 2만 7,000년 전 오스트리아령 다뉴브강으로 이어진다. 지질학적인 탐험 과정과 고고학적인 과거의 역사를 두루 살피고, 현재의 다양한 관점이 포개지는 심원의 시간 여행은 그야말로 놀라웠다. 대단히 전문적인 정보들이 끊임없이 나오지만 전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고, 분명 실제 탐험을 통해서 경험한 여정을 그리고 있음에도 너무도 문학적이었기 때문이다.

 

줄기가 갈라진 오래된 물푸레나무 미로 아래를 따라가고, 물에 침식되어 벌어진 틈이 땅속 깊이 들어가며, 거기서 새로 갈라진 길이 마치 펼쳐진 옷감의 주름처럼 굴곡진다. 저자가 묘사하는 여정을 너무도 세밀하고, 아름답고, 그림처럼 눈앞에 묘사되어 있어서 책을 읽는 내내 나도 언더랜드를 탐험하는 듯한, 그 어둠 속을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분, 광산, 숲, 도시, 빙하, 동굴 등지 등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언더랜드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엿보는 재미도 대단했고 말이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떠나는 이 아름다운 여정에 당신을 초대한다. 그야말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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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살인 1
베르나르 미니에 지음, 성귀수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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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풀장 안의 인형들과 더불어 지금 보고 있는 시신 모두 나름의 중요한 발언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 두 경우 다 물이 중요한 요소인 것만은 분명했다. 욕조 바닥에서 뭔가 유기적인 물질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오줌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세르바즈는 여자가 이 차가운 물속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안에도 물, 밖에도 물... 비가 내리는 상황... 혹시 살인자는 이 폭풍의 밤을 기다려 범행에 나선 것일까?     p.58

 

폭우가 쏟아지던 밤이었다.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와 하늘 저편에서 울리는 천둥의 굉음 너머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마르삭 고교의 여교사 클레르가 자택 욕조에서 밧줄로 온몸이 꽁꽁 묶인 사체로 발견된다. 사체의 목구멍에 손전등이 불이 켜진 채 깊숙이 박혀 있었고, 정원의 풀장 안에는 19개의 인형이 떠있었다. 강렬한 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인형들의 희고 유령 같은 얼굴들이 오싹한 현장이었다. 그리고 약에 취한 듯 정신이 혼미한 청년 위고가 풀장 가장자리에 앉아 있다가 경찰에 체포된다. 그는 죽은 여교사가 가르치던 반 학생으로 세르바즈 경정이 오래전 사랑했던 여자의 아들이기도 하다.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마리안은 세르바즈 경정에게 연락을 하고, 그는 학창시절의 추억이 녹아 들어 있는 마르삭의 사건현장으로 출동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형사생활 중 가장 끔찍했던 살인사건을을 떠올리게 된다. 2년 전 겨울 치료감호소를 탈출해 사라진 연쇄살인마 쥘리앙 이르트만의 그림자를 발견한 것이다. 무려 40여 명의 여성을 납치 살해한 쥘리앙 이르트만이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는 치료감호소를 탈출한 이후 특별수사팀이 18개월 동안 추적했지만 결국 검거에 실패해 현재 그의 생사는 물론 행방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베르나르 미니에의 전작인 <눈의 살인>에서 쥘리앙 이르트만은 치료감호소에 수감되어 있는 상태로 등장해 마치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한니발 렉터 박사처럼 깊은 인상을 남겼던 인물이다. 세르바즈 경정은 전작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도 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연쇄살인마가 귀환한 것인지, 아니면 수사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범인의 트릭인 것인지 이야기는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간다.

 

 

야바위꾼이 한쪽으로 주의를 끌고는 정작 중요한 손동작은 다른 쪽에서 시도하는 것처럼 갑자기 뭔가 속임수에 걸려든 듯 불쾌감이 엄습해왔다. 한손은 구경꾼들이 보도록 밝은 데서 움직이고, 어둠 속에서는 다른 손으로 수작을 부리고 있다. 지금 어느 누군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된 각도에서 사건을 바라 보도록 만들고 싶어 한다. 누군가 무대를 설정하고, 소품과 배경을 꾸미고, 배우와 관객들까지 정해놓은 것이다. 사건의 이면, 아무도 모르게 움직이는 숨은 그림자의 존재에 생각이 미치자 또다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p.114

 

전작인 <눈의 살인>에서는 눈 덮인 산과 쉴 새 없이 내리는 눈, 거센 바람과 눈보라 등으로 페이지 곳곳에 눈의 풍경이 서려 있었다. 이번 작품 <물의 살인>에서는 천둥이 우르릉대는 소리, 후텁지근한 열기, 정체된 대기와 잿빛 하늘, 그리고 쏟아지는 폭우와 욕조에 잠긴 시신, 풀장에 떠도는 인형들이 등장해 물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고 있는 피레네산맥 인근 지역은 베르나르 미니에가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고, 아름다운 숲과 호수, 짙은 안개, 계곡을 흐르는 물, 호수와 숲 언저리에 위치한 전원주택으로 유명한 곳이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지역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탄생시키고 있어, 전작도 그렇고, 이번 작품도 그렇고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풍경들을 묘사하는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마치 실제로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탱 세르바즈 경감은 어머니가 살해당하고, 아버지가 자살한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다. 교수였던 아버지는 아내가 바로 눈앞에서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기억에 시달리며 살다 모든 걸 끝내기로 결신했고, 아들이 자신의 시신을 발견하도록 조처해두었다. 라틴어 과목에서 늘 1등이었고, 좋아하는 소설 작품들을 줄줄 외워 늘 입에 달고 살았던 아들은 시신을 발견하고 몇 주가 지난 뒤 공부를 때려치우고 경찰시험을 본다. 그렇게 우등생이자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세르바즈는 형사가 되었고 여전히 죽은 아버지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치명적인 트라우마를 안고 있지만 수사 실력은 뛰어나고, 게다가 말러의 음악과 문학을 사랑하는 형사라는 점 때문에 더욱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세르바즈 경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리즈는 <눈의 살인>과 <물의 살인>에 이어 <불 끄지 마>, <밤>, <자매> 등으로 이어진다고 하니 다음 작품도 빨리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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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8-12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의살인> 을 오늘 받을 예정인데... <물의살인>도 사야하는 건가요 철푸닥

피오나 2020-08-12 23:31   좋아요 0 | URL
ㅋㅋ 그러셔야 할 것 같아요. 이번 신작도 재미있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