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시간여행자를 위한 문명 건설 가이드 -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도구와 기계의 원리
라이언 노스 지음,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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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이해하셨습니까? 보시다시피 우리는 이 개념을 모두 하나의 표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이 표를 읽는 데는 기껏해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죠. 이제 당신은 인류가 0이 뭔지도 모른 채 삽질하며 낭비한 수천수만 년의 시간을 절약하고, 불과 한나절이면 당신의 문명에 이 개념을 도입할 수 있습니다. 감사 인사는 받았다고 치겠습니다. 앞으로 이 기본적인 수 체계로 무엇을 할지는 전부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인류가 아주 한참을 걸려 알아낸 꽤나 유용한 수학 공식들이 이 안내서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p.56~57

 

자, 당신은 최첨단 개인용 타임머신인 FC3000을 타고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나려던 참이다. 이 타임머신은 현시점에서 1.5초 이상 미래로 가는 것은 허용하지 않으며, 오직 과거로만 갈 수 있다. FC3000에는 당신이 방문할 지역의 환경과 안전을 보장해줄 다수의 바이오 필터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과거로부터 수십 가지 치명적인 전염병을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을 예방하고 있다.이 타임머신은 현재 가장 신뢰할 만한 기계이지만, 기기 내부에는 사용자가 수리할 수 있는 부품이 없다. 그러니 고장이 나게 된다면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당신의 불길한 예감대로 아주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으며, 아마도 영영 미래로, 그러니까 당신의 현재로 돌아가지 못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과거에 꼼짝없이 갇혀서, 다시는 미래로 돌아갈 수 없다면... 미래를 되가져오는 방법이 있다. 무슨 얘기냐고? 바로 '길 잃은 시간여행자를 위한 문명 건설 가이드'가 그 모든 것을 알려줄 거라는 얘기다.

 

이 책은 '전문적인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한 인간이 맨땅에서 맨손으로 하나의 문명을 다시 세우는 데 필요한 모든 과학, 공학, 수학, 기술, 예술, 철학 등의 각종 정보와 구체적인 수치들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인간들이 수백만 년에 걸쳐 인류 문명을 세워왔는데 반해, 그 모든 답을 이 책 한 권으로 담아냈다는 말이다. 저자는 이 책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문명 재건을 위한 한 편의 '커닝 페이퍼 모음집'이라고. 과거에 표류한 시간여행자라는 독특한 설정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전체 17개의 흥미로운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은 타임머신 고장으로 예상치 못한 시점에 불시착했을 가능성에 대비해 현 시간 좌표를 알려주는 순서도로 시작한다. 자신의 새로운 현재가 역사 속 어디쯤인지 먼저 파악해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이라도 잡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서양 의사들은 부정확하고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는 체액 불균형이라는 발상을 바탕으로 무려 2,000년이나 환자를 치료해왔다는 말입니다. 사체액설은 이 가설이 처음 시작된 그리스 문명을 비롯한 대부분 문명이 지속된 기간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습니다. 사체액설이 폐기된 후 몇백 년 동안 의학은 과거를 전부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발전했습니다. 자신이 세운 문명 속에서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면 - 왜냐하면 당신은 존엄한 인간이고, 또 병에 걸려 세상을 일찍 뜨는 것이 객관적으로 볼 때 한 생명이 맞이할 수 있는 최선의 결말은 아니므로 - 당신은 현대 의학의 기초를 하루빨리 소개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p.410

 

마치 내가 SF 소설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게 만들고 나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도구와 기계의 원리를 비롯한 과학 지식들이다. 방대한 양의 정보를 다루고 있지만,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것은 유쾌함과 빵빵 터지는 유머이다. 덕분에 전혀 어렵게 느껴지지 않고 술술 읽히며, 지루할 틈 없이 소설이라도 읽는 것처럼 페이지가 넘어간다. 수학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 현대 과학과 측정법의 기초가 되는 정보, 과일과 채소를 비롯한 식물들의 교배 방법과 품종 개량법, 문명은 건설하는데 유용한 동물과 쓸모없는 동물들의 리스트, 그 외에도 챙겨야 할 기초 영양소, 화학의 기초 지식, 인간 고유의 창조 활동, 의학 상식, 응급 처치법 등등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온갖 종류의 지식과 정보들이 담겨 있다. 정말 이 한 권의 책만 있다면, 과거 어느 시대에 있든지, 그곳이 어떤 환경이든지 완벽하게 생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사피엔스>와 <마션>이 만났다는 문구가 전혀 과장이 아닐 정도로, 세상 유쾌하고 가장 쓸모 있는 과학책이었다. 불 피우기, 식량 구하기, 집 짓기부터 농경과 산업에 필요한 재료와 도구의 제작까지.. 오늘날의 세계를 만든 발명과 혁신의 모든 것을 담고 있으나 전혀 딱딱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데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시작해 독자들이 직접 적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들이라고 체감하도록 만들어진 책이니 말이다. 당신이 만약 표류한 시간여행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항해 중 무인도에 표류했을 때, 화성에 홀로 낙오했을 때, 외계인이 침공했을 때, 좀비 바이러스가 퍼졌을 때에도 이 책은 매우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이게 다 무슨 영화같은 허무맹랑한 소리냐 싶겠지만, 사실 당장 내일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누가 알겠는가. 작가의 거침없는 상상력과 번뜩이는 재치로 무장한 이 책을 읽다 보니, 어떤 설정이든 가능할 것 같고, 어떤 상황이든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당신도 이 책을 읽었다면, 이제 새로운 시대에서 가장 유능하고 똑똑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 보다 나은 인류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먼저, 부디 최선을 다해 살아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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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트 콜렉터
캠론 라이트 지음, 이정민 옮김 / 카멜레온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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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리, 우리의 모든 것은 문학이 될 수 있어. 생활과 희망, 욕구, 절망, 열정, 우리의 장점과 단점 모든 것이. 이야기는 오늘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갈망과 내일의 가능성을 보고 싶은 열망을 담고 있어. 그래서 사람들은 문학을 '인간이 되는 기술 안내서'라고 부르기도 하지. 그러니까 당연히 문학의 역할이 크다고 봐야겠지."
"문학을 공부하면 아들의 병을 낫게 하는 법을 알 수 있을까요?     p.163~164

 

캄보디아 스퉁 민체이, 상 리와 기 림 부부에게 꿈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매일 같이 거대한 쓰레기 매립장에서 쓰레기를 주워 내다 팔며 하루 벌어 겨우 하루 먹고 사는 생활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에게는 16개월이 된 아들 니사이가 있었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고열과 설사에 자주 시달리곤 했다. 스퉁 민체이는 높이가 수십 미터나 되는, 악취가 코를 찌르는 쓰레기 산들이 복잡하게 엉킨 거미줄처럼 골짜기를 이루고 있어 주민들조차 길을 찾는 게 쉽지 않은 곳이었다. 프놈펜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곳 사람들은 남들이 내다 버린 것들에서 삶을 일구고자 매일같이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쓰레기를 줍는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달픈 일이었다.

 

게다가 이들 부부를 괴롭히는 것이 또 있었으니, 집집마다 집세를 걷으러 다니고, 집세가 밀리면 당장 쫓아내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는 인정머리 없는 집세수금원(Rent Collector) 소피프 신이라는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암소’라고 부르며 치를 떨지만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표독스럽게 집세를 받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 림이 강도를 만나는 바람에 돈을 다 빼앗겨 집세를 내지 못하게 되었고, 소피프 신은 당장 아침까지 집을 비우라고 협박을 하던 중이었다. 소피프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 아이를 힐끗 보다가 바닥에 펼쳐진 책을 발견하게 된다. 한 순간 맹렬하던 분노가 느닷없이 잠잠해지더니 정적이 감돌고 소피프는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아름다운 책이긴 했지만 사실 너무 낡고 오래된 물건이었다. 상 리는 도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진다.

 

 

"당신을 아주 자랑스러워했을 거예요." 내가 떠날 준비를 하자 치유자가 말했다.
"아마도 그는 미리 전해 들은 얘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린 매립장 근처에 살아요."
그는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디에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죠."     p.346

 

이 작품은 캄보디아 프놈펜 외곽의 쓰레기 매립장, 스퉁 민체이에서 살아가는 실제 인물들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작가인 캠론 라이트는 그의 아들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승리의 강>에서 영감을 받아,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선물이 주어진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라는 문학적 상상을 하게 된다. 쓰레기를 주워서 내다 팔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아픈 아이를 돌보며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문학이 들어온다면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게 될까. 언젠가는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살던 상 리는 소피스 신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에게 부탁한다. 자신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냐고. 이유는 단순했다. 아들에게 글을 가르칠 수 있다면, 니사이한테 지금보다 나아질 기회를 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여자의 문학 수업이 시작된다.

 

아무렇지 않게 욕설을 내뱉고, 늘 싸구려 술에 취해 모든 것에 냉소하던 소피프와 성실하고 순진한 시골 여자 상 리, 극단적으로 다른 두 여자가 가르치고, 배워나가는 문학 수업의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매혹적이다. '문학을 이해하려면 머리로 읽고 가슴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해' '우리의 모든 것은 문학이 될 수 있어... 그래서 사람들은 문학을 '인간이 되는 기술 안내서'라고 부르기도 하지' '교육은 언제나 옳아. 특히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게 해줄 때는 더욱 그렇지'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충분히 공감을 얻을 만하다고 여길 때 영웅은 가장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나올 수도 있어' 등등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공감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진다. 내일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인생, 절망뿐인 삶 속에서 문학이 어떻게 누군가의 삶을 구원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서사 자체도 뭉클하지만, 가난한 이들이 그저 하루를 버티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그린 드라마만으로도 너무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작품이었다. 캄보디아 최대 쓰레기 매립장에서 벌어진 실화 위해 세워진 허구의 이야기는 문학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력을 매우 견고하고,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감동적이기도 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아무리 절망적이고 내일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인생이라도 누구에게나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간절히 믿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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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 스토리콜렉터 79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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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항상 묘하게 으스스했다. 휑뎅그렁해서 어쩐지 오싹했다. 사실 방 두 칸짜리 낡은 연립주택에 살던 아이가 갑자기 호화 저택에 살게 되었으니 이질감을 느낄 만도 하다. 우리 가족 외에 또 누가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 오싹하고 불쾌한 감각이라니...... 아침부터 밤까지 새아빠는 회사에 나가 있었다. 집에 있는 사람은 엄마와 출퇴근하는 가사도우미뿐이었다. 그럼에도 다른 누가 있다는 기분을 도저히 떨칠 수 없었다.    p.26

 

열한 살 유마는 새아빠가 생기면서 난생처음 이사를 했고 학교를 옮기게 된다. 유마는 초등학교 6학년으로 올라가기 직전의 봄방학을 즐기던 참이었는데, 엄마의 재혼으로 인해 태어나고 자랐던 간사이 지방을 벗어나 생전 가본 적 없는 도쿄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유마의 친아버지는 순문학 작가였는데, 필명으로 관능소설을 써서 겨우 생계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다 취재 여행을 다녀와서는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맥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꾀죄죄한 방 두 칸짜리 연립주택에서 고급 주택가로 이사와 대저택에서 살게 되었지만, 유마는 이런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다. 그나마 새아빠의 유일한 혈육인 도모노리 삼촌과 유마가 말이 잘 통해 유마에게 든든한 수호천사가 되어 준다.

 

그러던 어느 날, 새아빠가 해외 주재원으로 나가게 되고, 엄마가 임신을 하게 되어 두 사람만 함께 외국으로 가고, 중학교 입시를 생각해 유마만 일본에 남게 된다. 유마는 삼촌과 그의 동거녀와 함께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한적한 고급 별장지에 있는 별장에서 지내게 된다. 하지만 숲 속 별장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왠지 모를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위층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소리에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뭔지 모를 존재가 집 안을 배회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사실 별장 뒤편에 있는 '사사 숲'이라고 불리는 곳은 어린아이가 갑자기 행방불명되는 일이 잦았던 금단의 숲이었다. 그렇게 사라진 아이는 발견되지 않거나, 발견되더라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마주친 60대 노인은 유마에게 최대한 빨리 이 집을 떠나는 게 좋다고,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을 남기는데.. 과연 유마는 이곳에서 무사히 방학을 보낼 수 있을까. 별장 뒤로 펼쳐진 사사 숲에 숨겨져 있는 비밀과 진실은 무엇일까.

 

 

조금 전까지 닫혀 있던 눈앞의 문을 살며시 열었다. 동익동의 복도가 나타났지만, 물론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공포가 되살아났다. 복도의 조명 스위치가 이 부근에 있었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식당의 불을 켤 수밖에 없지만, 이 역시 망설여졌다. 유마는 용기를 짜내서 두 눈을 질끈 감고 과감하게 복도를 비스듬히 가로질렀다. 그리고 조리실 문손잡이를 더듬어서 필사적으로 찾았다. 없어? 공황상태에 빠져서 비명을 지르기 일보 직전에야 왼손이 문손잡이에 닿았다.     p.154

 

미쓰다 신조의 신작 <마가>는 <흉가>, <화가>에 이은 '집 시리즈'의 완결판이다. 이 시리즈는 나이 어린 주인공이 낯선 곳으로 이사하면서 벌어지는 괴이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각 권 사이에 내용상의 연관성은 없지만, 편안한 보금자리여야 할 집이 끔찍한 괴이 현상의 무대가 된다는 점에서 하나의 시리즈가 되고 있다. 특히나 어린 주인공의 시점으로 체험하는 괴이한 현상들과 끔찍한 경험들을 통해 전달되는 공포라 그런지, 감정이입하기가 매우 쉬운 편이다. 스멀스멀 나타나는 '그것'이 뒤를 돌아보면 우리 집 어딘가에서도 나타날 것처럼 말이다.

 

 

미쓰다 신조가 그려내는 공포란 헐리우드 영화의 그것처럼 아무 의미 없이 사람들을 깜짝 놀래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구제할 수 없는 절망, 불합리할 정도의 우월감, 끝을 모를 악의, 압도적인 광기, 소름 돋는 증오, 너무나도 제멋대로인 살의'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동기가 있어 출발한 공포라 더욱 섬뜩하다. 오싹하고 기분 나쁜 기운 자체는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사실 그 악의 기원을 따지고 보면 극도로 현실적인 배경에서 시작한 거라 그만큼 끔찍하고, 놀라운 것이다.

 

시리즈의 세 번째 <마가>는 기존 '재앙이 내린 집'이란 기본 컨셉에, 기존 두 작품과는 다른 파격적인 설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더욱 궁금했던 작품이다. 미쓰다 신조 특유의 상황 묘사들이 극한의 공포와 오싹함을 불러오는데, 특히나 의성어들이 더욱 실감나는 현실감을 전해 준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뒤쪽의 새까만 형체의 기척이 단숨에 다가오며 내는 소리, 슉, 슈우욱. 넓고 넓은 공간에 덜렁 혼자 남겨진 상황에서 갑자기 들리는 소리, 드르륵, 드르륵. 또각, 또각, 또각. 그러다 갑자기 빨라지는 발소리, 딱, 딱, 딱. 층을 단숨에 내려오며 뚜벅, 뚜벅, 뚜벅. 한밤중에 갑자기 조리실 안에서 들리는 흐릿한 소리, 푸훅. 어둠 속 인간의 형체가 걷기 시작하며 척, 척, 척. 갑자기 문이 삐걱거리며. 끼이. 누구라도 이런 장면묘사들을 읽으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 식은 땀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증폭되는 공포감이 인물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하고, 서사 속으로 단숨에 들어가도록 해서, 더욱 긴장감을 유발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거기다 마지막 결말에 이어지는 예상치 못한 반전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역시나 호러 미스터리의 거장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 다른 세계를 만나고 싶다면, 매혹적인 마성의 세계 '미쓰다 월드'에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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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칭 포 허니맨 - 양봉남을 찾아서
박현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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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다시 저한테 연락하지 않았을까요? 저도 나름대로 신호가 가도록 '다정한 분'이라고 썼는데."
청신호를 준 사람이 있다. 분명히 나 또한 다가오라는 신호를 주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 직후에 사라진다. 더는 접근하지 않는다. 왜일까? 많은 연애에서 흔히 일어나는 진부한 미스터리. 우리 모두 답을 안다고 생각하는 수수께끼이다. 지난 세기를 휩쓸었던 유명한 말, 그 사람은 나에게 그만큼은 반하지 않았다.    p.27

 

'서칭 포 허니맨' 프로젝트는 도로미의 한마디로 시작되었다. 3년 전 일러스트레이터인 로미는 제주에서 열린 전시회에 초대받아서 내려가며,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렸다. SNS 팔로워들에게 제주 맛집도 소개받고, 오가는 길도 물어보고 할 겸해서였다. 그리고 그 글을 보고는 한 남자가 행사장으로 로미를 찾아온다. 오래전부터 로미가 그리는 일러스트의 팬이라며, 인스타도 팔로하고 있었는데 글을 보고 만나보고 싶어서 왔다고. 양봉을 한다는 그 남자는 그렇게 이틀 연속 찾아와서 로미와 근처 카페로 가서 한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상도 좋았고, 말도 잘 통했고, 서로에 대해서 호감을 가졌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그렇게 헤어진 후 그는 로미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다. 로미는 자신의 마음이 착각일지 모른다 해도 그를 기다렸다. 물론 호감을 표시했던 사람이 다시 연락하지 않을 만한 이유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하여 친구인 박하담과 윤차경, 그리고 도로미 세 사람은 제주로 가서 양봉한다는 그 사람, 양봉남을 찾아 보기로 한다.

 

그렇게 그들 세 사람은 각자 다른 이유를 만들어가며 양본하는 그 남자를 찾아 비행기에 오른다. 도로미는 ‘허니맨’을 찾아 그날의 진심을 묻고 싶었고, 박하담은 ‘허니맨’을 찾는 과정을 제주 이민, 양봉과 연결하여 다큐멘터리로 찍을 계획이었으며, 윤차경은 자신이 다니는 화장품 회사의 신규 사업 중 하나로 다큐멘터리 제작하는 일을 만들었다. 그녀들은 제주에서 양봉을 하는 이들을 만나면서 양봉남을 찾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의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수상한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게 되고, 급기야 거대한 산업적 음모와 마주하게 된다.

 

 

자기는 그 사람을 기억한다고 믿었지만, 실제로 로미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건 어떤 인상일 뿐이었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그런 게 아닐까. 그날의 옷, 그날의 차, 어떤 특정한 순간. 선명하다고 믿어지는 흐릿한 기억. 결국 잘못은 인간의 기억과 연애 감정이라는 착각에 있다. 망할 로맨스, 친구들과 어제 나누었던 얘기대로, 로맨스의 서사에 젖어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 친밀한 관계로 이어지는 그런 결말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는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고, 기미도 보이지 않았는데도.    p.376

 

쟁쟁한 미스터리 작품들의 번역가로 유명한 박현주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전문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 서평가로도 활발히 활동 중인 그녀는 뛰어난 창작자이자 성실한 연구가이기도 한데, 이 작품에서는 '꿀벌'에 대한 다양한 변주를 통해 소소한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전체 15장의 이야기는 제목부터 '살아 있는 존재는 모두 일한다', '가깝고 달콤한 것을 원하기 마련',' 벌들은 비에 갇히지 않지만', '진로는 예측을 벗어나기도 한다' 등등 꿀벌의 특징에 빗대어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각 장의 도입부에 도대체 작가의 6컷 꿀벌 만화를 수록해 꿀벌의 다양한 습성과 꿀벌과 관련된 정보들을 들려주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러한 꿀벌들의 이야기는 전체 소설의 서사와 뚜렷하게 연관되어 있어 더욱 흥미롭게 읽히는 작품이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혹은 여자가 남자에게 '나는 너에게 관심이 있다'고 표현하는 여러 가지 신호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분명히 호감을 표시한 사람이 다시 연락하지 않았던 이유도 다양하게 추리해볼 수 있다. 우리 모두 세계를 인식하고 기억하는 방식이 다르니 말이다. 다 다르기 때문에 실수도 하고 착각도 하는 거지만, 바로 그 착각 때문에 누군가는 사랑에 빠지고, 누군가는 상대와 멀어지고, 큐피트의 화살이 행방을 바꾸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인간의 기억과 연애 감정이라는 소재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에 미스터리라는 양념을 쳐서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라 매우 술술 읽힌다. 거기다 '전격 양봉 로맨스 미스터리'라는 장르 또한 독특한 개성을 발하며 재미를 더해주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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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볼루션 맨 - 시대를 초월한 원시인들의 진화 투쟁기
로이 루이스 지음, 호조 그림, 이승준 옮김 / 코쿤아우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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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진화하는 게 뭐가 그렇게 문제인데? 형 얘기나 좀 들어보자."
"진화는 무슨 진화."
바냐 삼촌이 도저히 씹히지 않는 힘줄을 불에 던지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일 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냐? 지구상 그 어떤 동물도 산꼭대기에서 불을 훔치려고 한 적은 없었어. 너는 자연법칙을 위반한 거야. 오스왈드야, 그 사슴고기 좀 이리 줄래?'"
"위반이 아니라 진화라니까."     p.71

 

원시인들이 등장해서 인류의 진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하면, 대부분 역사나 과학 혹은 인문학 장르일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장르는 무려 '소설'이다. 수백만 년 동안 천천히 진행된 초기 인류의 진화과정을 한 원시인 가족의 삶으로 압축시켜 보여준다고 하는데, 대체 어떻게 이야기가 펼쳐질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진화를 다루고 있는 과학서들을 그래도 꽤 읽어본 편인데, 소설 형식으로 쓰여진 건 읽어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카오프렌즈의 아빠 호조의 일러스트가 더해져 더욱 '힙'해진 원시인들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표지 일러스트와 '지난 50만 년 동안 나온 책 중 가장 재미있는 책'이라는 띠지의 문구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읽기도 전부터 기대가 되는 책이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과학자이자 언제나 진화하고 싶어 여러 연구를 하고 있는 아버지 에드워드가 있다. 그는 화산에 올라가서 가져오던 불을 직접 피우는 방법을 알아내기도 하고, 가족들끼리 짝을 맺는 문화에서 벗어나 다른 부족과 혼인을 할 수 있도록 새로운 제안을 하고, 인류 최초의 활을 개발하고, 음식을 씹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문제를 고민하고, 현재 그들이 쓰고 있는 언어는 반쪽짜리 의사소통 방식에 불과하다며 사고력을 높일 수 있도록 언어가 풍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당시 원시인들로서는 파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개척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형인 바냐 삼촌과 항상 대립하고, 자식들 또한 그의 행동을 매번 불만스러워한다. 바냐 삼촌은 에드워드에게 왜 자연의 순리대로 따르지 않고 인위적으로 빨리 진화하려고 하느냐며 소리치지만, 그럼에도 그의 진화에 대한 열망은 끊임없이 타오른다.

 

 

"우리 중 누가 인류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 인류를 진정한 인간의 길로 인도하는 뛰어난 선구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점을 꼭 명심하거라. 나는 너희 둘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단다. 내가 살아서 그 성과를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너희는 아마 가능할 거야. 바로 진정한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보는 거지! 나야 보다시피 늙어가는 몸이지만, 나의 자그마한 노력이 너희들을 그런 길로 인도했다는 것만 알아준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구나."     p.240

 

이 작품은 1960년에 출간된 이후, 지금까지 제목이 여러 번 바뀌며 6번 개정 출판될 정도로 꾸준히 주목받고 있다. 벌써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며 찬사를 보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한데, 나 역시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국내에는 2005년에 <나는 왜? 아버지를 잡아먹었나>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이번에 개정판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원작의 코믹함과 풍자, 그 안에 담긴 깊은 의미는 그대로 살리되, 완전히 현대적인 번역과 시선으로 돌아온 개정판은 당시에는 자연스러웠으나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조금 날카로울 수 있는 부분들을 다듬고, 현재 트렌드에 맞는 단어들을 세심하게 배치해 시대적 거리감을 확 좁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익히 예상할 법한 어느 정도 뻔한 스토리라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부분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유쾌하고, 놀라운 이야기로 만날 수 있었다. 1만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현대의 이야기처럼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소설의 화자가 에드워드가 아니라, 그의 둘째 아들 어니스트라는 점도 흥미로웠다. 작은 일도 남들보다 훨씬 깊이 있게 생각하는 등 철학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어니스트 역시 다른 형제들과 삼촌처럼 아버지의 진화를 향한 행동에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불 사용법을 다른 부족에게 알려주려고 하고, 어니스트는 불 피우는 방법을 자신과 가족들이 독점해야 한다며 반기를 드는데... 가족들과 에드워드 사이의 불화는 심각해져 가고 그렇게 쌓인 갈등이 폭발하게 되는 결말은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인간은 과거로 퇴행할 수도 있고, 미래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제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극중 에드워드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인류 진화의 과정을 만나보고 싶다면, 시대를 초월한 인류 진화의 연대기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이야기 자체로도 너무 재미있고, 신선하고, 색다르고, 현명한 소설이라 진화를 다루고 있는 그 어떤 이론, 과학서보다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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