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경찰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하빌리스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척 상황이라.....'
내가 하는 일이 대체 뭔가, 라고 세라는 생각했다. 사람 하나가 죽었는데 그 원인조차 알아내지 못하면서 무슨 교통과 사고 담당자인가.
하지만 그런 불만을 후쿠자와에게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 사고 이후로도 몇 건의 인신사고가 일어났고, 마치 교사가 시험 채점을 하듯이 서류를 마무리해야 하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p.86

 

늦은 밤, 한산한 도로에서 트럭이 중앙분리대를 치고 옆으로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맞은편 차선에서 달려오다 충돌한 승용차 운전자는 손목에 붕대를 감는 정도의 가벼운 부상만 입었지만, 트럭 운전자는 사망하고 만다. 이상한 건 트럭 운전자가 교통 법규를 위반한 적도 없는 무사고 운전자였으며, 동료들이 그의 운전이 너무 점잖다고 놀릴 정도였다는 거였다. 사고 현장을 조사하던 경찰은 트럭이 뭔가를 피하려고 급브레이크를 밟고 핸들을 꺾다가 타이어가 미끄러지면서 중앙분리대를 치고 넘어간 것 같다는 판단에 목격자를 만난다. 사망한 운전자의 아내인 아야코가 담당 경찰인 세라와 동창이라 그들은 함께 의심되는 노상 주차 운전자를 찾아 내지만, 안타깝게도 법적으로는 운전자의 과실을 증명할 수가 없다. '법규는 아주 살짝 어긋나는 것만으로도 적이 되기도 하고 한편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을 지켜 줘야 할 그것이 반대로 사람들을, 그것도 피해자를 공격하게 되는 상황도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아야코는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그 선을 넘어가 보기로 한다.

 

이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으로 '교통경찰'이라는 소재를 중심에 두고 벌어지는 단편 여섯 편이 수록되어 있다. 앞서 이야기한 양날의 검 같은 교통 법규에 저항하려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중앙분리대'를 비롯해서, 시각장애인 소녀의 기적 같은 청각이 밝혀낸 교통사고의 전말을 담고 있는 '천사의 귀', 앞서가는 초보운전 차를 재미로 위협한 뒤차 운전자에게 닥친 후폭풍을 보여주는 '위험한 초보운전' 등 누구나 일상에서 겪을 법한 교통 법규 위반이라는 범죄를 매력적인 미스터리로 재탄생시킨 작품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의 계산대로 진행되었다. 유일한 오산은 유지의 차가 아직 굴러떨어지지 않고 가까스로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죽이고 싶다고 했어.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한다고......."
"시끄러, 조용히 좀 하라고."
핸들을 쥔 손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침을 삼키려고 했지만 입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p.185

 

프리 카메라맨인 후카자와는 마치코의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핸들을 잡은 후카자와 옆에서 둔탁한 소리가 나는 동시에 마치코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앞차에서 뭔가 날아온 것 같다고 생각한 직후의 일이었다. 갑자기 눈이 아프다는 마치코를 데리고 병원으로 급하게 가지만, 상처가 너무 깊어 결국 한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된다. 원인은 조수석 쪽의 바닥에 떨어져 있는 빈 커피 캔이었다. 그들이 마신 것이 아니었으니, 달리던 앞차에서 타고 있던 누군가 던진 게 분명했다. 후카자와는 경찰에 신고하지만, 경찰의 반응은 심드렁하다. 요즘 빈 캔을 창 밖으로 던지는 무개념한 사람들이 많은데, 상대 차량을 특정하기도 어려운 데다, 설령 찾아내더라도 자기는 빈 캔 같은 건 버린 적이 없다고 잡아떼면 어쩔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확실한 사건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경찰의 입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렇게 느닷없는 부상을 당한 입장에서는 그저 운이 나빴다 치고 넘어가긴 어려운 일 아닌가.

 

사랑의 힘이 불러온 의도치 않은 응징을 보여주는 '버리지 말아줘'는 두 커플의 이야기가 별개로 진행되다가 복수 아닌 복수, 그야말로 제대로 된 인과응보를 보여주며 통쾌함을 느끼게 해 준 이야기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치밀한 트릭과 반전이 매 작품마다 포진하고 있어, 발표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잘 읽히는 이야기들이었다. 이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1989년부터 1991년까지 3년여에 걸쳐 문예지에 실었던 것을 1992년에 한 권으로 묶어 출간한 것이다. 국내에는 2010년에 출간되었었고, 무려 9년 만에 개정판으로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롭게 번역해 다시 나오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들이 모두 누구나 쉽게 겪을 수 있는 내용들이라 더욱 공감하며 읽게 되는 것 같다.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교통사고에서는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도, 반대로 피해자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운전에 익숙해지면 교통법규를 무시하거나, 도로에서 다른 차와 경쟁하거나, 배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사소한 일탈과 부주의함이 누군가에게는 일생을 뒤흔드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지스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선물 - 해피 모지스마스!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지음, 류승경 옮김 / 수오서재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면 사람들이 집마다 찾아가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여러 명이 함께 이 노래, 저 노래를 부르면 무척이나 듣기 좋았지요.
그럴 땐 밖에 나가서 뭐라도 챙겨주었습니다.
사탕이나 케이크처럼 아주 달콤한 것들을요. 크리스마스잖아요!"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76세가 되어서야 시작해 10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긴 모지스 할머니. 88세에 '올해의 젊은 여성'으로 선정되었고, 93세에는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으며, 그녀의 100번째 생일은 '모지스 할머니의 날'로 지정되었다. 이번에 만난 책은 삶을 사랑한 화가, 모지스 할머니가 전하는 소박하고 따뜻한 크리스마스 풍경들을 담고 있다.

 

 

모지스 할머니의 기억 속 크리스마스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 책에는 할머니 기억 속에 처음으로 자리하고 있던 크리스마스이브부터 당일까지의 따뜻한 집 안 풍경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춥고 삭막한 계절이지만 이런 설레임과 달콤함이 있어 모두들 크리스마스를 따뜻한 풍경으로 기억하는 게 아닐까 싶다.

 

유리처럼 투명한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재미를 놓칠 수 없는 계절, 수북이 쌓인 눈 위로 커다란 썰매를 타고 길을 낼 수 있는 계절, 겨울이다. 매서운 날씨가 찾아오는 계절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집이 더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내가 기억하는 첫 크리스마스는 네 살 때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와 남자 형제 셋을 리브 이모와 함께 집에 남겨두고 그리니치로 쇼핑하러 나갔습니다. 물건을 사고 돌아온 어머니는 리브 이모를 보며, 산타클로스가 카펜터 씨 가게에 들렀으니 꼭 보러 오라고 귀뜸해줬어요. 그 이야길 들은 레스터 오빠는 잔뜩 신이 나서는 스토브 아래쪽을 깨끗이 치우겠다고 나섰지요. 그래야 장난감을 한 아름 든 산타가 스토브 파이프를 타고 내려올 수 있을 테니까요. "

 

크리스마스가 지나가고 며칠만 있으면 한 해가 끝이 나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 쌓인 눈도, 꽁꽁 언 연못도 사르르 녹을 테고, 다시 봄이 오면 말들은 들판을 달릴 것이다. 한 해의 끝과 시작을 이어 준다는 점이 크리스마스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풍경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만으로도 설레고 행복했던 것은 어린 시절을 지나도 여전하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이 책에는 모지스 할머니 기억 속에 처음으로 자리하고 있던 크리스마스이브부터 당일까지의 따뜻한 집 안 풍경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어 뭉클하다. 소박해서 더 예쁘게 느껴지는 겨울의 풍경들이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모지스 할머니의 짧은 크리스마스 에세이도 실려있어 네 살이었던 모지스 할머니의 귀여운 고백도 만나볼 수 있다.

 

<모지스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읽으면서 나의 첫 크리스마스를 떠올려 본다. 아직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와 루돌프 사슴을 믿던 그 시절, 정말 밤새 산타클로스가 다녀가 양말 속에 선물을 넣어준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얼마 안 남은 크리스마스, 다들 해피 모지스마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피크 에프 그래픽 컬렉션
로리 할스 앤더슨 지음, 에밀리 캐럴 그림, 심연희 옮김 / F(에프)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눈물에는 짠맛이 난다. 그게 입술에 닿는 느낌이 좋다.
나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얼굴을 닦았다.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어질 때까지.     p.70

 

멜린다는 고등학생이 된 첫날부터 왕따가 되었다. 옷도 촌스럽게 입었고, 낯을 많이 가리기도 했지만, 사실 그녀에게도 한때 절친이었던 친구들이 있었다. 멀리서 전학 온 헤더만 유일하게 멜린다에게 말을 건네지만, 전교생들의 놀림거리이자 괴롭힘의 대상이라 그녀에겐 별 의미가 없다. 아이들은 복도에서 일부러 멜린다를 치고 지나가거나, 발을 걸거나, 고의로 밀거나,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찢어 놓고 가기도 했다. 하지만 멜린다는 애써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고, 참고 반응하지 않으며, 말을 하지 않다 보니 점차 말수가 줄어들어 결국 실어증에 걸리게 되고 만다.

 

멜린다에게 유일한 안식이 되어주는건 독특한 방식으로 미술을 가르치는 미술 선생님의 수업시간과 2학년 구역에 있는 버려진 휴게실이 전부였다.

 

 

사실 멜린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 있었는데, 바로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참석한 어느 파티에서 선배 남학생에게 성폭행을 당한 거였다. 당시 그녀는 경찰에 신고 전화를 걸었고, 그로 인해 파티를 완전히 망쳐 버리게 되었고, 진실을 알지 못하는 친구들은 파티를 망쳤다는 이유로 그녀를 공공의 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운 그날의 진실을 멜린다는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었고, 당연히 피해자로서 보호를 받지도, 위로나 배려를 받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방치된 상처는 점점 더 멜린다를 절벽 끝으로 몰아 넣었고, 평범한 여학생이던 멜린다의 삶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무너져 내리고 만다.

 

친한 친구들은 모두 그녀를 외면했고, 부모님은 각자의 일로 바빠서 딸에게 별로 관심도 없었다. 멜린다도 속으로는 죄책감과 실수, 분노를 다른 누군가에게 털어 넣고, 모든 걸 떠넘기고 싶지만.. 생각과는 달리 말하기는 점점 어려워졌고, 침묵에 익숙해졌다. 과연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치러야 하는 수많은 싸움에서 버텨내고, 승리할 수 있을까.

 

 

나는 친구 없어.
나한텐 아무도 없어.
난 아무 말도 안 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p.202

 

이야기는 시종일관 어둡고, 성폭행, 왕따, 실어증 등 우울한 스토리가 차가운 흑백의 이미지로 보여지고 있다. 하지만 학교라는 사회에 대한 놀라울 정도로 예리한 비판과 진실을 외면하고 침묵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날카로운 은유들이 스토리 자체를 풍부하게 만들어 있어 그 배경과는 상관없이 매우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다. 고등학교에서 듣는 첫 번째 거짓말에 대한 열 가지 항목에는 교직원들은 항상 여러분을 도울 것이다, 여러분은 이곳에서 보낸 학창 시절을 기분 좋게 추억할 것이다 등등이 있고, 고등학교에서 추가로 하는 열 가지 거짓말 항목에서는 지금 수학을 배우면 나중에 커서 쓸모가 있다 라던가, 학교에는 단정한 옷차림으로 와야 한다, 학교는 학생이 하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등등의 문구가 있다. 아마도 학생 시절을 겪었던 그 누구라도 공감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부분들일 것이다.

 

 

<스피크>의 원작 소설은 1990년대 후반에 쓰여졌다. 저자인 로리 할스 앤더슨이 열세 살 때 강간당한 이후로 항상 자신을 덮치던 우울과 걱정의 그늘을 견디며 슨 자전 소설이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매년 가장 뛰어난 '영 어덜트 소설'에 주는 최고 권위의 문학상 '프린츠상' 첫 회 수상작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난 20여 년간 평론가들의 찬사와 독자들의 꾸준한 호응을 얻으며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했고, 이번에 '아이스너상' 수상 작가인 에밀리 캐럴의 강렬한 그림체로 그래픽노블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원작 소설의 명성이야 들어왔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었기에, 이번에 그래픽노블 버전으로 먼저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왜 이 작품이 ‘영 어덜트 소설’의 고전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최근에야 전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일어나면서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지만, 이 작품은 ‘미투 운동’보다 훨씬 전에 성폭력 문제가 심각한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렸으니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역할을 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가해자가 제일 나쁘지만, 그걸 지켜보면서도 외면하고 침묵하는 방관자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나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이 작품은 그렇게 진실을 외면하고, 침묵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피해자에게 말하라고 외치면서, 과연 우리는 제대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극점에서 본 우주 - 실험 천문학자들이 쓰는 새로운 우주 기록
김준한.강재환 지음 / 시공사 / 2019년 11월
평점 :
품절


 

블랙홀 그림자를 관측해낸다면 일반상대성이론의 예측대로 블랙홀이 존재한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된다. 또한 그림자 주위의 고리가 얼마나 밝은지, 어떤 모습인지는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면 블랙홀을 둘러싼 고온의 플라스마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블랙홀 근처에서 자기장이 어떤 배열을 이루는지, 블랙홀을 어떤 방향에서 관측하는지 등이 영향을 준다. 그렇기에 블랙홀의 직접 관측은 단순한 이론의 검증을 넘어서, 블랙홀의 특성과 주변 시공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제는 영화가 아니라 밤하늘에서 블랙홀을 찾아 나설 때다.   p.108

 

남극은 북미 대륙의 절반보다도 넓은 땅덩이인 남극 대륙 전체를 말한다. 그리고 남극점은 그 대륙의 한가운데, 지구 자전축이 지나는 남위 90도를 발한다. 남극점은 연 평균온도가 영하 50도에 이르며, 기온이 영하 40도 위로 올라가는 약 3개월 반의 하절기 동안에 운행 가능한 비행기로 대원들이 왕래하는 곳이다. 약 3킬로미터 두께의 얼음 평원 위에 자리해 기압이 낮으며, 수분을 거의 품지 못하는 극저온의 공기는 매우 건조한 사막 환경을 만든다. 그러니까 지구에서 가장 넓은 사막인 셈이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자연에서 생명체가 살 수 없다. 그러한 극한의 환경에서 우주의 극한을 탐구하는 과학자들의 최첨단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이 책은 보이지 않는 블랙홀의 사진을 찍고, 우주가 태어나는 장면을 들여다보는 등 지금 남극점에서 진행 중인 최신 천문학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인 두 천문학자는 서로 다른 주제로 우주를 연구하기 위해 2014년부터 2019년 까지 총 일곱 차례 남극점에 발을 디뎠다고 한다. 우주를 연구하는데 어떤 도구와 방법을 쓰느 지에 따라 천문학자들도 다양하게 구분할 수 있다. 관측소에서 망원경을 하늘로 기울여 자료를 얻고 분석하는 관측 천문학자, 눈에 보이는 빛인 가시광선을 연구하는 광학 천문학자, 산꼭대기 또는 사막 한가운데의 관측소에서 자료를 얻고 분석하는 전파 천문학자, 복잡한 수식을 통해 물리법칙에 따라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를 연구하는 이론 천문학자, 그리고 실험 천문학자가 있다. 이들은 보통 멀끔한 모습으로 사무실에 앉아있기보다는 많은 시간을 실험실과 관측소에서 때 묻은 초췌한 모습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는 관측소 출장이 일상인데, 애리조나 사막의 산봉우리, 하와이의 해발 사천미터가 넘는 산꼭대기, 칠레의 고원, 그린란드로 향하기도 한다. 남극점도 매우 훌륭한 관측지인데, 천문 관측을 하기 좋은 곳이라는 건, 사람이 생활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뜻도 된다. 그러니 그 견디기 어려운 곳을 몇 년 동안이나 왕복하며 생생한 우주 관측을 했던 전파 천문학자이자 실험 천문학자인 이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우주에 비교하면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물과 현상의 규모는 상당히 작다.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주적 스케일에 익숙해지는 것이 도움이 된다. 천문학의 역사와 함께 우리가 인식하는 우주의 범위는 계속 커졌다. 우리도 살면서 비슷한 일을 겪는다. 어린 시절에 알던 동네와, 어른이 되어 활동하는 범위는 규모가 다르다. 우주론도 지난 100년 남짓한 사이에 폭풍 성장을 했다. BICEP팀이 풀고자 하는 문제는 우주를 이해하는 지평의 끝을 확장시키는 과정의 연장선이다.    P.195~196

 

일반인들에게는 천문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낯설 수 있지만, 남극 혹은 남극점이라는 장소 또한 평생 살면서 한번도 접하지 못하는 곳이라 머나먼 딴 세상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이 책에서는 남극에 가기 위한 서류 작성부터, 신체검사와 필요한 장비들의 화물 배송, 그리고 거리상으로 너무도 멀어 여기저기를 거쳐 가야 하는 고된 방법, 남극 대륙에서 입어야 하는 의복들과 음식들, 하루 한 번 인터넷 위성이 뜨고 지는 기지 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수록되어 있다. 책을 통해서 간접 체험하는 남극대륙 여행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생경한 정보들이 많았고, 낯설지만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남극점의 풍경 사진들도 있어 시선을 사로잡았다. 1부에서 이렇게 연구자들이 남극에 가기까지의 과정과 남극점 생활에 대해 알려주고 나면, 2부에서는 EHT 프로젝트, 즉 지구 크기의 망원경으로 블랙홀을 사진에 담는 인류 최초의 도전이 그려지고, 3부의 바이셉팀은 빅뱅 직후 우주가 식으며 남겨놓은 열기, 우주배경복사를 연구해 우주 탄생의 비밀을 밝히고 있다. 

 

2019년 4월, 인류 최초로 찍은 블랙홀 그림자 사진이 공개되어 <뉴욕타임스> <가디언> 등을 비롯한 전 세계 언론의 집중을 받았다. 지구 곳곳에 흩어진 망원경을 이어 ‘지구만 한 망원경’을 만든 신개념 EHT 프로젝트는 블랙홀의 진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이 책은 바로 그 역사적인 사진 한 장 뒤에 숨어 있는 모든 궁금한 이야기들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우주 진화의 이론적 발견에 큰 공을 세운 제임스 피블스가 201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는데, 3부에서 이번 노벨상에 대한 촘촘한 해설이자, 우주 진화를 설명하는 과학 이론에 현장의 연구까지 더해 풍성한 지식을 얻을 수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무한히 성실한 연구와 관측, 무수한 실패를 딛고 밝혀지는 우주 이야기는 해당 분야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도 감격의 순간을 느끼도록 해주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간 경비원의 일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0
정지돈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1월
평점 :
품절


 

이것은 밤의 도시에 대한 이야기다. 매일 밤 도로 위를 떠도는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며 여성 혐오와 가난에 대한 이야기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두 문장으로 줄일 수 있다. 다 끝났어. 돈 때문에 하는 거야. 이 이야기는 한 문장으로 줄일 수도 있다. 그것을 실현하지 않고 그것을 하는 것. 이 이야기는 천삼백팔십세 개의 문장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천삼백팔십세 개의 문장에 매달려 있는 천삼백팔십세 개의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p.9

 

프랑스 코딩 학교인 에콜42에 입학할 꿈을 가진 대학원생 주인공 ‘나’는 서울스퀘어의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역 앞에 있는 거대한 적벽색 빌딩은 원래 대우그룹의 본사였지만 매각과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의 서울스퀘어가 되었다.  ‘나’는 ‘국제야간경비원연맹’의 아시아 지부장 조지훈을 만나게 된다. 조지훈은 '나'에게 야간 경비원의 세계를 처음 알려준 사람이다. '나'에겐 대학에서 알게 된 친구인 시를 쓰는 기한오가 있다. 어느 날 그들은 시인이 있는 독서 모임에 가게 된다. 시인 한 명에 대여섯명의 20대 남녀가 있는 모임으로 잊혀지고 숨겨진 한국 문학의 걸작을 읽고 궁극적으로는 그런 작품을 쓰기 위한 모임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실현이 불가능한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는 수학과 대학원생 에이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조지훈과 '나'는 가끔 새벽 시간 서울로7017로 올라 서울스퀘어의 파사드 위로 흐르는 LED의 불빛을 바라본다. 서울로7017은 2013년, 서울로가 아직 고가도로일 때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자가 분신자살했던 장소이며, 2017년 고가도로가 서울로7017로 조성된 지 10일이 지난 어느 오후, 카자흐스탄에서 온 노동자가 투신자살한 곳이기도 하다. 조지훈에게는 '서울스퀘어의 메인컨트롤러를 장악해 서울스퀘어의 미디어 파사드에 경비원들이 모든 빌딩을 점거했으며, 다국적 기업과 건물주의 소유에서 건축을 해방시킬 것이며, 도시를 정책의 수단에서 분리시켜 거리를 사람들에게 돌려줄 것이며, 서울은 시민의 것이다 등등의 메시지를 송출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에서 보낸 프로그래머(해커)가 ‘나’와 조지훈의 도움을 받아 서울스퀘어로 잠입, 메시지를 코딩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경비원은 투명인간이다. 유니폼을 입는 순간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또는 사람들 눈에는 유니폼만 보일 뿐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서울스퀘어에서 일하는 직장인 대부분이 경비원과 비슷한 연배다. 그들은 출퇴근을 하면서, 미팅이나 식사를 하기 위해 출입구를 드나들며 마주친다. 직장인들은 경비원에게 미소를 짓거나 경비원을 경멸하거나 미소를 지으면서 경멸하고 경비원과 스몰 토크를 하고 스몰 토크를 하면서 경멸하지만 가장 흔한 일은 보지 않는 것이다. 유니폼 위로 텅 빈 허공만 존재한다는 듯, 그곳에는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p.77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이 벌써 스무 번째 작품이다. 한 실패한 혁명가와 그 혁명을 계속해서 좌절시켜온 역사에 대한 이야기인 이 소설은 주인공이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는 2018년 1월 3일부터 2018년 3월 24일까지의 이야기를 블로그 형식으로 구성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도시의 빌딩을 지키는 야간 경비원을 세계의 전복을 꿈꾸는 동시에 도시를 시민의 품으로 돌려보내기를 원하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언론은 조지훈과 프로그래머들을 도시해커로 포장하고, 이 사건이 서울의 무분별한 개발, 다국적 기업의 침투와 신자유주의의 종말에 대해 경고하는 메시지라고 보도한다. 그 일로 조지훈은 구속되고 프로그래머들은 추방된다. 그들은 어느 정도 원하는 바를 이루었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사회의 주변인일뿐이고,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리얼리티와 픽션을 넘나드는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로 독자성을 구현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사실 독자 입장에서는 다소 난해한 작품이었다. 분량이 짧고 술술 페이지가 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야간 경비원의 일기>와 이어지는 또 하나의 짧은 소설이 에필로그처럼 덧붙여져 있고, 그 이야기는 박솔뫼 작가가 썼다. 가장 오랜 시간 빌딩에 존재하지만 정작 그 안에서 이뤄지는 업무들에서는 철저히 배제된 존재인 야간 경비원, 그들이 “나는 여기에 없다”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도시 해킹에 나서는 이야기를 박솔뫼 작가가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작품 해설이나 추천평 보다는 이렇게 소설과 이어지는 또 다른 이야기를 다른 작가가 써주는 것은 매우 괜찮은 시도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