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제린
크리스틴 맹건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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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에 대한 나의 감정은 이를테면 이런 느낌이라고, 나는 종종 생각했다―평범한 우정보다는 조금 더 날카로운 어떤 것, 나를 압도할까봐, 어쩌면 나를 파괴할까봐 두려운 어떤 것. 때로는 그녀를 원한다기보다는 그녀처럼 되고 싶은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두 감정은 너무도 강렬하고 너무도 상반되는 것이었지만 끊임없이 합쳐지고 뒤섞여서 어느 순간 그 둘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그녀가 지닌 느긋한 삶의 방식을 탐했고, 그것을 갈망했다. 그것이 그녀의 존재 방식이었다. 나는 그것이 내 것이기를 바랐다.     p.118

 

앨리스는 자신의 후견인이자 유일한 가족인 고모가 소개해준 남자 존과 충동적으로 결혼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아프리카, 모로코의 탕헤르로 이주해 새 출발을 해보기로 한다. 사실 존은 그녀가 꿈꿔왔던 이상형은 분명 아니었다. 그는 시끄럽고 사교적이고 자신만만했으며 종종 무모한 성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약속들과 꿈들을 선택하기로 한 것은, 그가 제시한 것이 바로 기회였기 때문이다. 다 잊을 기회, 지난 일은 묻어두고 돌아설 기회. 하루 종일 매 순간, 그날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지 않을 기회. 일 년 전에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그녀는 그 일을 과거 속에 묻어두고 눈을 감기로 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모로코의 이글거리는 태양이, 탕헤르의 뜨거운 열기가 벅차기만 하다. 그렇게 일종의 광장공포증을 겪으며 집안에만 틀어박힌 나날이 이어지고, 남편은 아내를 내버려두고 신비한 도시 탕헤르와 사랑에 빠져 밖으로만 나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시가 앨리스를 찾아 온다. 그들 사이에 일어났던 일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루시는 앨리스와 미국의 베닝턴대학에서 룸메이트로 처음 만났다. 어린 시절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아온 앨리스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장학금으로 대학에 입학한 루시는 서로에게 매혹되었고,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하지만 믿고 싶지 않았던 참혹한 그날의 사건 이후로 모든 게 틀어져버렸다. 앨리스는 버몬트를 떠나 모로코의 먼지 날리는 골목길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순간들 속에서 단 한 번도 루시를 다시 볼 거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너무도 친밀하고, 익숙해서 때로는 두 사람이 한 사람인 것 같다는 기분까지 느꼈던 존재였지만, 이제는 과거가 되어 버린 존재가 다시 현실에 나타난 것이다. 앨리스는 당혹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대체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루시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끔찍한 과거를, 따분한 현재를, 제값을 하는 점술가라면 누구라도 지치고 서글픈 나의 손바닥을 통해 읽어낼 수 있었을 암울한 미래를 잊었다. 낡은 택시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고서, 모로코의 울퉁불퉁하고 구불거리는 길을 달리는 택시에 몸을 맡긴 채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바람과 모래가 내 얼굴을 때리도록 내버려두면서, 그런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그리고 거의 성공했다. 가슴이 아리도록 근사했던 그 몇 시간 동안―너무도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이따금 행복감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나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p.203

 

앨리스와 루시는 같은 시간, 같은 곳에 있었지만, 두 가지 다른 버전의 탕헤르에 있었다. 앨리스는 루시의 탕헤르를 상상할 수 없었고, 루시가 알고 있는 앨리스의 탕헤르 또한 현실과 달랐다. 탕헤르,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닌 이상한 무법의 도시. 아프리카대륙 북쪽 끝,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항구도시 탕헤르는 오랜 세월 여러 서구 열강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고 그로 인해 다양한 문화가 뒤섞여 있는 곳이다. 이 작품은 모로코가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독립을 되찾은 해인 1956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독립을 향한 모로코인들의 뜨거운 열망이 끓어오르던 바로 그 시기를 배경으로 좁다란 골목길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시가지 곳곳에 긴 세월 쌓여온 역사와 비밀을 감추고 있는 탕헤르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이국적인 풍경들은 서사를 완성시키고, 인물들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고, 독자들이 넋을 빼놓고 빠져들도록 최면을 건다.

 

크리스틴 맹건이라는 처음 만나는 낯선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단 몇 페이지 만에 이 소설에 반해버렸다. 도무지 손에서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심리적인 통찰력, 예민하고 근사한 문장, 숨을 들이켜면 탕헤르의 냄새가 날 것 같은 생생함이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이 작품에 대해 "도나 타트와 길리언 플린과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히치콕이 연출한 작품 같다."고 말했다. 특히 이 작품은 히치콕스럽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는데, 실제로 조지 클루니 제작, 스칼릿 조핸슨 주연으로 영화화가 확정되어 있다고 하니 스크린에서 펼쳐질 이야기도 기대가 된다. 탕헤르는 미로처럼 좁고 복잡한 길로 이루어진 메디나와 고지대에 있는 성채 카스바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언젠가는 꼭 한번 탕헤르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두 여성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욕망과 집착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갈지, 탕헤르에서 그들이 함께하는 여정이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해도 좋다. 놀라운 서스펜스와 숨막히게 매혹적인 악몽을 경험하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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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척 무례했던 너에게 안녕 - 칠 건 치고 둘 건 두는 본격 관계 손절 에세이
솜숨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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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좋은 사람'인 걸 '알아내기' 위해 애를 쓰는 데 쏟아부을 체력도, 시간도 이젠 없다. 무엇보다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일 리도 없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일 따위 더는 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모두에게 사랑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과거의 나를 떠올리면 낮부끄러움에 몸소리가 쳐진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관계에 집중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더 실컷 좋아할 수 있도록 그 밖의 관계는 정리하는 게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더는 지름길이리라.      p.20

 

본업은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 온라인에서는 '솜숨씀'이라는 부캐로 활동하며 매일 조금씩 근력과 글력을 기르며 심신을 단련 중이라는, 저자의 첫 에세이이다. '솜숨씀'이라는 독특한 필명도 흥미롭지만, '칠 건 치고 둘 건 두는 본격 관계 손절 에세이'라는 부제목도 눈길을 끌었다. 저자는 말한다. '알고 보면 착한 사람, 알고 보면 따뜻한 사람, 알고 보면 여린 사람 등 그 동안 관계를 이어온 '알고 보면 좋은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그들은 대체로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무례하고 조심성이 없었다고. 싫은 사람은 그냥 싫어하면 되고,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면 될 텐데, 우리의 사회 생활이라는 게 그렇게 딱딱 맞아 떨어지면서 정리되는 게 아니라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은 이제 됐다는 이 책의 첫 번째 글부터 공감이 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사회 초년생 시절의 그녀는 너무도 만만해서, 좋은 게 좋은 거란 후려치기에 어물어물 넘어갔지만, 이제는 못들은 척 못 본 척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말하지만, 그거야 너한테나 좋은 거지' 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뭔가 시원하고 통쾌한 기분 마저 들었다. 사실 좋게 좋게 넘어가면 언젠간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탈이 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사회 생활에서 사용하는 저런 식의 표현이란 잘못되었다는 걸 알지만 대충 얼버무리거나, 바꾸자니 번거로우니 그 동안 해온 대로 하자는 식의 무사안일 주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도 아닌 건 절대 안 되는 것이고, 싫은 건 그냥 싫은 거라는 걸 받아 들이고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자. 좋은 게 좋은 거지,는 한 개인의 노력과 정당한 주장을 무마하는 말이다. 나만 참고 지나가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면 모든 것이 순조로우리라는 상대의 이기적인 말에 쉽게 넘어 가지 말자.

 

 

좋아하는 일을 하던 사람에게는 일을 더 좋아하게 되는 계기가 찾아오기도 하고(좋아하던 일이 싫어지는 경우가 제일 많지만....) 잘하는 일을 하던 사람에게는 잘하던 일이 좋아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일이든 잘하는 일이든 우직하게 가다 보면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오랜 시간 맑고 깊은 맛을 내는 순간이 찾아오리라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꼼수 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힘을 줘야 할 땐 힘을 주고, 힘을 풀어야 할 땐 힘을 풀면서. 그렇게 내가 원하는 인생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는다.    p.115~116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이 많고, 아는 지인들이 많아야 인간관계를 잘하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런데 나이를 점점 먹을 수록 쓸데없는 인간관계들은 자연스레 정리가 된다. '인맥이라든지 네트워크라든지 하는 것'들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인간관계에도 미니멀리즘이라는 게 필요하다'는 저자의 깨달음은 아마 비슷한 나이대의 직장인들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겉으로만 친해 보이는 여러 사람보다는 진짜 내 편이 되어줄, 나를 이해해주는 한 두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애기다. 그렇다면 관계를 어떻게 덜어내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저자는 관계를 아주 단순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원인과 결과, 문제와 해결책을 크게 고민하지 않고 도움이라곤 하나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을 내 인생에서 밀어내는 절차를 간략하게 만드는 것'인데, 이 책에서 알려주는 인간관계 단순화 방식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타의에 의한 관계에서 벗어나 온전한 내가 되어보는' 길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보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는 게 인생에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관계에 있어 선택과 집중하기를 알게 된다면, ‘사회적 거리두기’가 새삼 스트레스로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내가 확실히 좋아하는 것에 집중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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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소녀의 거짓말 - 구드 학교 살인 사건
J.T. 엘리슨 지음, 민지현 옮김 / 위북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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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나름대로 사회학적 연구라도 하듯 많은 자료를 찾아 읽었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자신에게, 서로에게. 어딘가에 속하기 위해, 받아 들여지기 위해, 그리고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과거에는 거짓말로 돈을 벌거나 손해를 피하기가 훨씬 쉬웠다... 지금은 모두가 약장수인 시대다. 소셜미디어가 등장하면서 대중이 당신의 창문과 대문, 나아가 마음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거짓말을 하려면 신중하고 치밀해야 한다. 연출하고, 걸러내고, 계획해야 한다.      p.18

 

완벽하게 줄지은 창문들, 그 안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며 안뜰을 굽어보는 듯한 지붕 창들, 엄청난 예산을 들여 가꾸는 교정과 숙소들, 수목원.. 아름다운 학교다. 그러나 뭔지 모를 불안한 기운이 서려 있다. 이곳은 100년이 넘은 오랜 역사를 가진 명문 기숙학교인 구드 학교이다. 워싱턴 D. C.의 엘리트 계층인 상원의원과 하원의원, 외교관, 정부 고위직과 그 밖에 억만장자의 딸들이 모인 영재학교로 대부분의 학생들이 하버드를 비롯한 아이비리그에 진학한다. 학 학년의 정원은 단 50명, 모두 포드 학장이 직접 선출한다. 구드는 최고의 학생만을 받아들이고, 그들이 노력한 만큼 미래를 보장시켜 주는 곳이었다.

 

전학생이 거의 없는 이곳에 어느 날 영국에서 온 아름다운 소녀가 전학을 온다. 180센티미터에 윤기 흐르는 피부, 연회색이 감도는 파란 눈동자, 천연의 금발 머리, 그리고 순진무구한 소녀의 미소를 가진 애쉬 칼라일. 그녀는 얼마 전에 끔찍한 비극을 겪었다. 한날 한시에 부모가 자살한 것이다. 런던에서 인정받는 자산관리 전문가였던 아버지가 재무부 차관에 내정되기 직전 불륜 스캔들이 터지자 자살했고, 어머니 마저 심한 충격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게다가 오래 전 남동생도 그녀와 함께 호숫가에 있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열여섯 소녀 주변에 너무 많은 죽음이 있었고, 이러한 애쉬의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포드 학장은 그녀의 개인사를 밝히지 않고, 이름을 바꾼 상태로 입학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런데 애쉬가 전학을 오고 나서 구드 학교에 의문의 죽음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모든 과거를 잊고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 멀리 전학 온 애쉬를 또다시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 과연 그녀는 그 모든 죽음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나갈 수 있을까?

 

 

우리는 최악의 순간들을 돌아보며 살아간다. 아픈 치아를 찔러보고, 멍든 자국을 눌러보면서 아직도 아픈지 확인한다. 그러는 동안 현재의 행복을 흘려보낸다. 그것을 누릴 자격이 없으므로. 평안하다는 것, 행복하다는 것은 뭔가 잘못했다는 뜻이니까. 누군가의 어깨에 올라타거나, 누구를 아프게 했거나, 속이거나,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니까. 상처에 덮인 딱지를 떼어내서 피 맛을 보고, 싸우고, 미워하고, 섹스를 하고, 사랑을 한다. 무엇을 위해? 인생이란 도대체 뭘까?      p.403

 

구드 학교는 오래된 전통만큼이나 여러 떠도는 괴담들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10년 전, 숲을 가로지르는 길에서 학생 하나가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당시 살인자의 아들이 지금 학교에서 사환으로 일하고 있었다. 비밀 클럽이 다락방에서 신생아 뼈를 여러 구 찾았다는 얘기도 있었고, 학교 밑으로 지나가는 지하철도와 터널도 위험했으며, 수목원 길은 절대 혼자 다니면 안 되고, 계단이 붉은색인 이유도 어떤 여학생이 목을 매달면서 흐른 피가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와중에 애쉬는 항상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다고 느낀다. 게다가 저마다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특권층 소녀들의 견제와 질투, 선생님들의 암묵적인 묵인 하에 운영되는 비밀클럽과 학교의 수많은 규칙들로 신입생의 나날은 정신 없이 흘러 간다.

 

이야기는 주로 신입생 애쉬의 시점과 포드 학장의 시점으로 진행되는데, 두 인물 모두 명백하게 거짓말을 하거나 뭔가 숨기는 게 있다. 그리고 현재의 버지니아 마치버그에서 벌어지는 일 사이로 몇 개월 전 영국 옥스퍼드에서 있었던 일이 교차로 보여지면서 더욱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다. 소녀들만 모여 있는 명문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라 학원 스릴러 내지는 영어덜트 소설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가볍지 않은 작품이었다. 심리 묘사도 촘촘하고, 플롯도 잘 짜여 있고, 반전도 인상적이고, 페이지를 넘길 수록 더해가는 서스펜스 또한 훌륭하다. J.T.엘리슨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라 낯설지만, 영미권에서는 FBI 시리즈와 형사 테일러 잭슨 시리즈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리고 대통령 임명직으로 백악관에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워싱턴 정가 엘리트의 실체를 누구보다 훤히 꿰고 있어 대단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매혹적인 배경과 생생한 인물들, 그리고 놀라운 반전까지 영화화하기에 딱 좋은 작품이 아닌가 싶다. J.T.엘리슨의 다른 작품들도 국내에 소개되어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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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나의 책 - 독립출판의 왕도
김봉철 지음 / 수오서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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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사람이 만든 걸 과연 정말로 책이라고 불러도 될까? 책은 대학을, 그것도 국문과나 문창과를 전공하고 신춘문예에 당선되거나 문예지 공모전에 등단한 사람들이나 사회의 저명인사들같이 삶에서 어떤 원대한 이상과 목표를 달성해낸 이들이 그들의 고매한 정신을 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리기 위하여 적어내는 것이 아닐까? 일도 안 하고 집에서 놀기만 하면서 남들보다 부족한 나의 일상을 기록하는 것은 어쩌면 책에 대한 일종의 모독은 아닐까? 나는 불안했다.     p.35

 

이 책은 30대 무직이었던 한 사람이 독립출판을 하고 출판사를 통해 책을 내게 된 과정을 담고 있다. 저자는 군대를 전역하고 30대 무직 남성의 소소한 하루들과 사소한 일상들을 써서 블로그에 올렸다. 그렇게 블로그를 운영하며 순간순간 스치는 단상들, 매일의 단출한 기록들을 10년 정도 모아서 책으로 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형식이나 내용에 구애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런 독립출판의 장점이다. 독립서점에는 여행기, 사진집, 시집, 소설집, 에세이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이 다양한 판형으로 나와 있다.

 

살면서 책 한 권쯤 내보고 싶다는 생각은 많은 사람이 할 것이다. 요즘은 일반인이 글을 쓸 수 있는 매체도 많은 편이고,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글쓰기 강좌나 독립출판을 한두 달 과정으로 도와주는 워크숍들도 많은 편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이 책은 독립출판의 모든 것을 알려줄 것이다. 책의 판형과 폰트, 자비출판과 독립출판의 구체적인 제작비, 본문을 편집하는 프로그램과 매뉴얼, 표지를 만드는 과정, 그리고 표지 안쪽의 프로필, 제본 방식, 교정과 교열, 책의 가격을 측정하는 방법과 출판사 등록하는 과정, 판매 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수록되어 있다.

 

 

사람이 하는 일들에 모두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는 지쳤습니다. 행동에는 목적이 없을 수 있고 그 목적엔 당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으로 책을 만드는 일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들도 간혹 마주해야 했습니다. 학벌, 경력, 자격증, 살아 있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 목적에 대한 당위는 이러한 것들로 채워져야 하는지 모릅니다. 30대 백수 쓰레기와 디자이너와 경제학도가 낸 책들에 이런 당위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에는, 책을 낸 이유에는,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할까요.     p.115~116

 

요즘은 굳이 작가가 아니라도 너도 나도 글을 쓰는 시대이다. SNS의 발달로 더욱 가속화된 것도 있고, 워낙 사는 게 마음을 헛헛하게 하는 것이다 보니 글을 통해 위로 받고, 공감하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SNS에서 조금만 인기가 있다 싶으면 에세이라는 형식으로 책이 되어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 몇몇은 책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사실 대부분은 기대에 많이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SNS에서는 핫하다는 작가들이 왜 책 속에서는 이렇게 '평범하거나 수준 이하의 글들'을 쓰는 건지 생각해 보면, 아마도 출판에 대한 이해도 자체가 낮아서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러니 이 책을 쓴 저자처럼 실제 현실에서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치며 알아낸 과정들을 통해서 독립출판계 문을 두드린 이의 글은 조금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처음 출간한 <30대 백수 쓰레기의 일기>가 조금 궁금해졌다. 21세기 보부상, 보따리장수, 독립출판의 전설이라 불리며 강렬하게 독립출판계에 입문했다고 하는데, 사실 나처럼 독립출판물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독자들에게는 낯설기만 할 테니 말이다. 게다가 이 책에는 '내가 쓴 책을 내가 만드는 일에 대한 묵묵한 기록'과 함께 저자의 평범한 일상과 고민들이 에세이처럼 수록되어 있어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독립출판에 대해 배우면서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언젠간 책 한 권 써보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이들에게, 글로 써야만 하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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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08-27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오나님이 풀간 하신 줄 알았어요 :-)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업을 하면 안 망한다는데 ㅎㅎㅎ 발상이 좋은 책이네요 ~
 
오후의 이자벨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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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폴의 방으로 들어갔다. 1백 권이 넘는 책들, 다양한 종류의 펜들, 노란색 노트 더미들, 검정 수첩 예닐곱 권, 모눈종이, 아직 따지 않은 레드와인 네 병, 자두 술, 브랜드 두 병이 있었다. 폴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 남긴 잔여물들을 보고 있자니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우리가 축적해온 모든 것, 우리가 맺어온 모든 관계들, 결국 우리는 이 모든 걸 두고 떠나야 한다.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운명이다.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남은 건 '지금 여기'뿐이다.    p.50

 

미국 중서부 지방에 있는 주립대학교를 조기 졸업한 스물한 살 샘은 하버드 로스쿨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가게 되었다. 그는 로펌에서 인턴 일을 하고 대학 도서관에서 서가 정리를 하며 외국에서 몇 달 동안 지내기에 충분한 돈을 모아두었다. 로스쿨에 들어가기 전 5개월 동안 파리로 여행을 떠난다. 6월부터 연방 법원에서 인턴으로 일할 예정이었고, 9월부터 로스쿨 생활이 시작되니 그 전에 파리 여행을 맘껏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샘의 어머니는 그가 열두 살일 때 암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무뚝뚝한 성격에 그다지 살갑지 않은 사람이었다. 새 엄마인 도로시 역시 아버지처럼 과묵한 성격이었고, 언제나 그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었기에 그는 늘 외로웠다.

 

 

어느 날 그는 호텔 옆방에 묵고 있는 폴의 소개로 파리 시내의 서점에서 열리는 출판기념회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아름다운 프랑스 여인에게 한 눈에 반하게 된다. 번역 일을 한다는 그녀의 이름은 서른 여섯 살의 이자벨로 왼손 약지에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다. 하지만 샘은 밤새 홀린 듯 그녀 생각에 빠져 있다 다음날 이자벨에게 연락을 하고, 그녀의 작업실에서 오후 5시에 만나기로 한다. 그리고 그들은 격정적인 사랑의 감정에 휩싸이게 되지만, 애초에 두 사람은 생활도, 성격도 너무 달랐다. 이자벨은 부유한 남편과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샘과 자유롭게 사랑하면서 결혼 생활은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샘은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고, 그녀와 계속 함께하고 싶지만 자신은 몇 개월 뒤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결혼 이후에도 서로 간섭하지 않고 자유롭게 연애하길 원하는 프랑스 여자와 열정과 사랑을 혼동하는 철없는 애송이이자,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란 평범한 미국 남자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소유하기 힘든 것일수록 소유하길 원한다. 원하던 걸 손에 넣게 되면 현재 주어진 것들이 원래부터 쉽게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뒤틀린 논리의 궤적과 진실을 왜곡시키는 거울들의 통로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모든 걸 잃게 된다. 진지하고 안정된 사랑이 아니라 손에 넣을 수 없는 몽상 같은 사랑을 뒤쫓게 된다.    p.214~215

 

우리가 연애를 할 때 가장 많이들 갖게 되는 착각이 바로 이것 아닐까. 바로 내가 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 사람은 웬만해서는 변하지 않는다. 그것도 수십 년 넘게 구축된 성격이나 취향, 사고방식, 자아 등은 절대로 바뀔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마다 착각을 하곤 한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나로 인해 이 사람의 모습이 조금은 달라질 거라고. 그리고 바로 그런 믿음이 결국에는 관계가 파탄이 되는 시발점이 되고는 한다. 하지만 반대로 상대가 자신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랑에 대해 말하더라도 그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그 동안 쌓아온 가치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행동을 하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상대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관계는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다. 바로 이 작품 속 샘과 이자벨처럼.

 

 

기존에 만나왔던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들이 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도 못할 만큼 엄청난 어드벤처를 느끼게 만들어준 화려한 스토리라인을 자랑했었더라면, 이번 작품의 플롯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프랑스의 기혼 여성과 파리에 여행 온 미국의 대학생이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 주요 스토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말이다. 게다가 이 이야기에는 극적인 사건이나 놀라운 반전도 중요하지 않다. <모멘트>나 <리빙 더 월드>, <파리5구의 여인>이나 <비트레이얼> 등의 작품에서 보여 주었던 스펙타클한 모험과 화려한 플롯은 없지만, 대신 사랑에 대해 매우 솔직하고 파격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이상적인 상대를 만나 서로 절절하게 사랑하다 결혼하더라도 시간이 흘러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서로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더는 배우자에게 열정을 느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만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더라도 끝까지 절실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이다. 결혼과 가정에 대한 미국과 프랑스의 문화 차이에 대한 시각도 흥미로웠고, 흔히 ‘외도’ 혹은 ‘불륜’으로 치부되는 관계로 시작된 샘과 이자벨의 사랑이 대부분의 예상과 달리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도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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