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말들
천경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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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주로 ‘과거’ ‘기억’으로 이야기되지만 사실은 과거를 담은 ‘현재’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기억은 미래를 향해 지속적으로 변화될 준비를 하고 있다. 학교에서 배워온 사진의 전통적 방식, 순간을 최대 속도로 잡아내고 대상과의 일방적인 관계 맺기에 대한 나의 회의가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였다. 스튜디오 안에서 대상이 되는 인물들간의 교감으로 일어나는 미세한 기운들, 우리가 모르던 감각들을 깨우는 사진을 통한 이 경험들이 과정만을 드러내는 퍼포먼스의 발단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사진이 없는 확장된 사진, 비로소 시간의 양quantity이 아닌 시간의 질quality에 대한 필연적 구상들을 시작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p.189~192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버리고 싶거나 타인에게 주고 싶은 물건 하나를 가져오십시오." 인도 뭄바이의 기차역에서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요청한 질문이다. 익명의 여행자들을 참여자이자 조력자로 초대해 완성하게 된 공동작품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물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주인을 떠난 수백 개의 때 묻은 사물들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타인에게 하고 싶었던 질문들, 하지만 할 수 없었던 질문들'을 여러 나라 100명의 참가자들로부터 모아 전시하기도 한다. 당신이 오늘을 잃는다면 미래를 잊게 될까요? 당신은 오늘 하루 한 번 이상의 거짓말을 하였습니까? 질문은 반드시 답을 필요로 할까요? 당신은 벙어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습니까? 지금 울고 싶나요? 누군가의 물건을 훔쳐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의 삶이 오늘 끝난다면 그것에 동의하겠습니까? 등등 생각에 잠기게 하는 질문도 있었고, 바로 대답이 나오는 질문도 있었고 다양했다. 저자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문의 내용도, 그에 대한 대답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누군가와의 만남이자 대답할 때의 나를 지각하는 시간 그 자체라고 말이다.

 

이 책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해온 사진작가이자 공공미술가 천경우, 그의 지난 20여 년간 퍼포먼스 프로젝트를 기록한 첫 에세이집이다. 인도 뭄바이의 기차역, 스페인의 작은 섬마을, 프랑스 교외 지역, 런던올림픽 현장, 뉴욕 타임스 스퀘어, 중국 허난성의 시골 마을, 서울 한복판 을지로, 경남과 전북의 사찰 등 전 세계 곳곳의 전혀 다른 별개의 공간을 무대로 그곳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질문(요청)을 던진 후, 그들이 질문에 반응하여 어떤 경험과 조우하는지를 '예술적 중계자'로서 제안하고 지켜본다. 이 책은 그러한 작품들의 준비, 진행 과정에서의 다양한 에피소드, 참여자들과의 시간 그리고 그 후의 기억에 이르기까지, 그간 꺼내놓을 기회가 없었던 퍼포먼스의 여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작가 노트'이기도 해서 더욱 흥미로웠다.

 

 

사진을 촬영하는 일은 돌이켜보면 온통 모순투성이이다. 카메라 뒤에서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은 작가가 정작 보지도 못한 순간이며 필름 카메라 안에 맺힌 상은 늘 거꾸로이다. 대상의 방향도 반대이지만 음과 양도 반대여서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형상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다. 별반 다르지 않은 우리의 눈 역시 실제로는 대상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그저 조그만 뇌에서 균형을 잡는 훈련에 익숙해 있을 뿐임을 되새겨보면 가끔 눈이 잘 안 보이는 무력감에 대해 위안을 받기도 한다. 어쩌면 이 시대에는 모든 것을 선명히 볼 수 없음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p.253

 

이 책에 수록된 익명의 수많은 참여자들과 함께한 소셜 퍼포먼스들은 굉장히 낯설었지만, 그만큼 호기심을 자극했다. 파리의 환경미화원들에게 일과를 마친 후 자신이 새벽 거리에서 청소를 하면서 떠올리는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연필로 도화지에 그려달라고 하거나, 스페인에서는 스카프 크기의 보자기를 만들어 "당신이 생각하는 고통의 무게만큼의 돌알 모아 보자기에 담아주십시오"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과연 고통의 무게를 측정할 수 있을까. 암스테르담에서는 참가자들에게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이름을 1분 동안 떠오르는 대로 벽면에 적어주십시오"라는 요청을 했고, 이 퍼포먼스는 6일간 이루어졌다. 인도의 고아에서는 긴 테이블에 서로 알지 못하는 참가자들을 앉혀 놓고 '테이블에 놓인 음식들을 자신이 좋아하는 순서와 선택으로 앞에 앉은 상대에게 먹여줄 것'이라는 지침을 알려 준다. 한 사람이 먹는 음식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하니, 이 퍼포먼스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궁금해지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퍼포먼스들에 대한 과정과 완성된 작품들이 모두 글과 사진으로 수록되어 있어, 공공미술이라는 장르가 낯선 독자라고 해도 무리 없이 빠져들어 이 과정에 참여하게 될 것 같다.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 교감을 중시한 독특한 작품세계를 일구어온 예술가답게 대단히 인상적인 퍼포먼스들이 많았다. 시간과 경험, 기억과 반응, 관계와 소통, 실재와 부재에 대한 질문들 앞에서 그저 이 책을 읽는 독자인 나 조차 직접 참여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당신은 지금 카메라 앞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 앞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라는 저자의 말을 변주해, 나는 독자로서 이 책 앞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미처 몰랐던 나 자신 앞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만큼 저자가 보여주는 '소통과 교감의 소셜 퍼포먼스'는 놀라웠고, 참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고, 답을 찾으면서 나의 기억과 경험들과 조우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작은 공감이 불러일으키는 일상의 기적'을 만나보고 싶다면, 진짜 소통과 교감의 순간을 체험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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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관 살인사건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8
오구리 무시타로 지음, 강원주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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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구가 시즈코는 박식하기 짝이 없어. 하지만 그녀는 색인 같은 여자야. 모든 기억이 장기판 조각처럼 정확하게 배열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아. 그렇지, 그야말로 정확성은 비길 데가 없지 그래서 독창성이나 발전성과는 인연이 없는 거야. 첫째, 그렇게 문학에 감각이 없는 여자에게서 어떻게 비범한 범죄를 계획할 만한 공상력이 나오겠나?"
"도대체 문학이 이 살인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야?" 검사가 따졌다.    p.104

 

통칭 ‘흑사관’이라고 불리는 후리야기 성관에는 오래 전부터 언젠가 괴이한 공포가 생겨날 것이라는 풍문이 있었다. 후리야기 성관은 호화스럽고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켈트 르네상스 양식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볼거리였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퇴색되어 거칠고 황폐해지더니 언제부터인가 저택 주위를 안개 같은 것이 둘러싸기 시작해 비밀스럽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성관에서 기괴한 죽음을 연상시키는 변사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동기 불명의 사건이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고, 연이어 성관의 주인인 산테쓰 박사마저 기괴한 방법으로 자살한다. 그리고 1년 뒤,  4중주단원 중 한 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 현악 4중주단을 이루었던 네 명의 외국인들은 어릴 때부터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성관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으며 감금된 채 길러졌다는 소문이 무성했었다. 이렇게 갖가지 억측이 낳은 환상으로 둘러싸인 그곳,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넣어둔 성관과 닮았다고 하여 ‘흑사관’이라 불리는 그곳으로 노리미즈 탐정과 하제쿠라 검사, 구마시로 수사 국장이 투입된다.

 

자. 살인사건이 벌어졌고, 명탐정이 등장해 수사를 하기 시작한다. 여느 추리소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구성이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초반부터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는 작품이다. 수사 진행은 매우 느리고, 탐정은 사건 해결보다 자신의 편집광적 지식 나열에 더 열을 올릴 뿐이니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분명 단어 자체게 크게 어려움은 없는데도, 대체 내가 무슨 내용을 읽고 있는 건지 이해가 잘 안 된다는 점이다. 작품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노리미즈의 어마어마하게 광범위한 현학적 지식 나열이다. 그는 시종일관 신비주의, 점성술, 이단 신학, 종교학, 물리학, 의학, 약학, 문장학, 심리학, 범죄학, 암호학 등에 대한 지식을 읊어대는데,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 극중 함께 등장하는 이들도 대놓고 불평을 해댈 정도이다. '아아, 미칠 것 같은 이야기군' 이라던가, '도대체 문학이 이 살인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야?' 라던가, '이제 저는 당신의 그 현학주의에 구역질이 납니다'라고 직접적으로 쏘아붙이기도 한다. 독자 입장에서도 노리즈미에게 한 소리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등장 인물이 대신 해주니 속이 시원할 법도 하지만 사실 그런 걸 느낄 겨를도 없이 탐정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에 질리는 게 더 먼저라는 사실이 아이러니긴 하다. 일단 상황이 이러하니, 추리소설 자체의 재미를 느끼기 보다 역대 가장 현학적인 탐정 캐릭터를 만난다는 데 의의를 두고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일시에 정지한 것 같았다. 마침내 가면이 벗겨지고 이 광기 어린 연극은 끝났다. 항상 심미성을 잊지 않는 노리미즈의 수사법이 여기에서도 또 초기 화약 기술과 연관된 종교전쟁으로 장식되어 화려하기 짝이 없는 결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검사는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담배를 입에서 뗀 채 멍하니 노리미즈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노리미즈는 빈정거리는 듯 웃으며 하트의 역사책을 뒤져 그 페이지를 검사에게 내밀었다.    p.314

 

이 작품은 벌써 국내에서 세 번째 출간되는 버전이다. 2005년에 동서 미스터리 북스로 출간되었었고, 2011년에 북로드의 스토리콜렉터로도 나왔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상미디어의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여덟 번째 작품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이 시리즈는 가능한 한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을 선정하여 번역하고자 했다는 취지로 기획되어 그 동안은 다소 낯선 작가들의 작품이 출간되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국내에 소개되었던 오구리 무시타로의 작품을 새롭게 번역하여 다시 선보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개되었던 것이 9년 전이니, 지금의 독자들에 맞춰 현대의 어법과 표현으로 바꾸어 가독성을 높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추리소설 마니아들에게는 '악명 높은 책'으로 알려져 있다. 유메노 규사쿠의 <도구라 마구라>와 나카이 히데오의 <허무에의 공물>과 함께 일본 추리소설 사상 3대 기서 중 하나로 유명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품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현학적 문장의 나열이 가장 큰 장애물로, 그 난해함으로 인해서 읽고 있는데도 이해가 어렵다거나,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는 등의 평가를 받고 있는데, 나 역시 읽으면서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평범한 독자들에게 '완독하기 어려운'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명탐정의 지루한 장광설로 완독 포기자 속출'한다는 그 명성 때문에 오히려 추리 소설 독자들에게 도전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기도 하다. 추리소설 마니아라고 자부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만나 보아야 할, 끝까지 완독하는 걸 도전해봐야 할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이 작품이 1935년에 일본에서 처음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을 때, 서문을 썼던 가가 사부로는 “탐정소설계의 괴물 에도가와 란포가 등장한 지 만 10년째 되는 해에 똑같은 괴물 오구리 무시타로가 출현했다”고 말했다. 함께 서문을 썼던 에도가와 란포는 서문에서 “이 작품은 이미 쓰인, 또 이제부터 쓰일 모든 탐정소설의 소재가 집대성된 작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했고 말이다. 자, 이제 도전 욕구가 샘 솟는다거나, 정복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거나, 대체 어떤 작품인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당신은 아마도 추리소설 마니아일 것이다. 그러니 당신에게 이 특별한 추리소설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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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갈 곳이 없을까요? 웅진 세계그림책 197
리처드 존스 그림, 공경희 옮김 / 웅진주니어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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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도 없이 혼자 떠도는 개, 페르. 새까만 털은 비에 흠뻑 젖었고, 발밑은 축축한 풀 때문에 차갑다. 페르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모두들 어딘가 갈 곳이 있어 보였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달려가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페르는 온종일 돌아다닌다. 들어가 보고, 나오고, 올라가 보고, 내려오고.. 하지만 그 어디서도 페르를 반기는 곳은 없었다. 페르는 어디로 가야 할까.

 

<눈구름 사자>의 그림 작가 리처드 존스가 보여주는 따뜻한 색채의 감성들이 쓸쓸함를 그리면서도 다정함과 위로를 품고 있어 더욱 인상적인 작품이다. <눈구름 사자>에서 아무도 모르는 세계이지만 나에게 힘을 주는 세계인 환상의 존재를 탄생시켰던 그이기에, 이번 작품에서도 갈 곳 없는 페르에게 누군가 따뜻한 힘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갈 곳 없이 혼자 떠도는 유기견이야말로, 함께하는 친구가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닐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지만, 한때는 누군가에게 사랑 받는 존재였을 페르의 모습이 마음이 아팠다. 유기견 문제는 현실에서도 숱하게 벌어지곤 하니 말이다. 이 추운 계절에 갈 곳 없이 떠도는 현실 속 페르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따뜻하고도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하는 리처드 존스는 작품 속에서 동물들을 자주 등장시켰다. 사자, 고래, 그리고 개 등등.. 그들은 어떤 작품에서는 현실에 디딘 발이 힘을 잃을 때 우리의 안부를 물으러 찾아오는 환상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에서는 도시 한가운데 유리 어항에 갇혀 사는 외로운 존재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다른 책에서는 집을 잃고 버려진 존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따뜻한 색채와 위로가 되는 감성이 아닐까 싶다. 색채가 너무 푸근하게 느껴지고, 뾰족하지 않고 둥근 느낌을 주는 그림체도 말랑말랑한 기분을 안겨준다.

웅진 세계그림책 197번째 작품은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도 한 유기견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어릴 때는 예쁘니까 쉽게 키우려고 하지만, 키우다가 병이 들거나, 귀찮아지면 너무도 쉽게 버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명이 가지는 무게감을, 소중함을 종종 잊어 버리고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이다.

지금도 거리를 떠도는 수많은 생명들을 기억하며, 사람과 동물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고대하며, 길 위의 작은 생명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래본다. 이리 저리 헤매고 다니다 어느덧 완전히 길을 잃어버린 페르 앞에 손을 내밀어 주는 작은 존재가 바로 우리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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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버드 수학 시간 - 삼수생 입시 루저의 인생 역전 수학 공부법
정광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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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수학은 우리 일상과 더 밀접해질 것이다. 더 와닿게 얘기하자면 앞으로 이런 것들이 산업이 될 것이고 직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의 수학 교육은 1980넌대 후반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과 큰 차이가 없다. 당시 유명했던 <수학의 정석>이 지금도 여전히 학생들에게 제1의 수학 교재인 상황이니 말이다. 물론 시험 자체가 새로운 변화에 뒤처져 있는 것이 문제이지, 이 책이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p.44

 

학창시절이 끝나자 마자 가장 먼저 잊어 버린 학문이 아마 '수학'이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대학생이 되고 나서, 이제 다시는 들여다 볼 필요없겠구나 싶어서 제일 좋았던 과목이 '수학'이었고 말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하지 않을까. 대체 이런 교과목은 왜 필요한가, 살면서 아무 짝에도 쓸 일 없는 이런 학문을 위해서 왜 우리는 이렇게 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가 말이다. 쓸모 없고, 재미없고, 어렵고, 지루하고... 다시 학창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두 번 다시 눈길조차 주고 싶지 않은 그런 공부가 수학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늘 수학을 사용하고 있다며, 수학은 그냥 학교 교과목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이 책은 한국의 삼수생이 미국에서 새롭게 수학을 배워 하버드에 들어가고 보스턴 최고의 수학 강사가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좌충우돌 미국 수학 적응기와 교습 노하우를 바탕으로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수학 공부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나이 마흔에 하버드대 익스텐션 스쿨에 입학, 수학 교육 전공으로 2년 만에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지 보스턴의 스타 강사로 수많은 제자들을 하버드대, MIT, 존스홉킨스대 등 명문대에 진학시켰다. 평범한 수학 투덜이가, 삼수를 하고도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던 그가, 영어라곤 "예스, 노"만 하는 수준이었던 그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수학을 잘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앞선 세 유형 중 등반가가 돼라. 산을 오르는 것은 결국 본인이다. 다만 나는 먼저 그 길을 올라본 선배로서 좀 더 효율적으로 올라가는 팁을 알려줄 수 있을 뿐이다. 현명한 체력 안배, 알맞은 등산화, 적절한 수분과 당분 보충, 안전한 등산 스틱 사용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빠르고 쉽게 정상에 도달할 테니까. 마찬가지로 수학에 왕도(王道)는 없어도 정도(正道)는 있다.    p.172

 

왜 수학은 이토록 어려울까? 문제 풀이와 공식 암기가 전부인 양 공부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의 수학 교육의 현주소를 짚어주고, 뭐가 문제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미국의 수학 교육과 비교해가면서, 맥락과 의미를 따라가면 수학 공부는 생각보다 쉽고 즐겁다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수학 교육은 '컴퓨터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그들의 수학 교육은 '컴퓨터 쓰는 법'을 배우는 거라는 얘기다. 이 차이는 엄청날 수밖에 없다. 수학과 결코 친하게 지낸 적이 없던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가 들려주는 자신이 겪은 무수한 시행착오, 직접 지도한 학생들의 사례, 하버드에서 경험한 새로운 수업 스타일 등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다. 그가 제시하는 '수학을 이기는 5가지 방법' 또한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나, 수학 계통도를 보며 개념 간 연결 고리를 파악하라.
둘, 기초 쌓기엔 개념서 다독보다 문제 풀이가 더 좋다.
셋, 쉬운 문제 여럿보다 어려운 문제 하나를 붙들어라.
넷, 매일 10분보다 하루를 제대로 투자하라.
다섯, 무조건 암기하기보다 묻고 이해하며 공부하라.

 

저자는 개념 간 연결 고리를 표현한 수학 계통도를 항시 살피며 공부할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의미와 맥락을 좇아 공부할 때 수학은 생각보다 쉽고 재미있어진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초등 수학부터 고등 수학까지 6개 핵심 줄기로 한 번에 꿰는 수학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차함수의 최댓값과 최솟값이 NASA 우주 탐사 프로젝트로, 소인수분해가 미래 암호 기술로, 행렬과 통계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알고리즘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하며 '진짜' 수학의 세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수포자'였던 과거가 있는 사람들부터 현재 수학 공부가 너무 힘든 학생과 자녀의 수학 교육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들에게도 매우 도움이 될만한 책이다. 수학? 누구나 잘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방법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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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 - 나태주 시집
나태주 지음 / 열림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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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힘들게 힘들게 하루가 갔다/
지구를 두 팔로 안아 들어 올리듯/힘들게 힘들게 하루를 보냈다/
그건 아마 너도 그랬을 터/뱃멀미 거센 파도와 바람 무릅쓰고/
먼바다 흔들리는 먼바다 나가/얼마나 많은 고기를 잡아 왔을까/
그렇지만 아이야/잡은 고기가 비록 많지 않고/이룬 일 비록 많지 않아도/
하루를 마음 졸여 무사히/잘 보낸 것만 우선 고마워하자/


-p.90, '가난한 소망' 중에서

 

사실 표지 때문에 읽고 싶어진 책이다. 표지 이미지는 중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오아물 루의 작품인데, 최근에 국내에서도 전시를 가지기도 해서 좋아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는 주로 여행지에서 경험한 것들을 일러스트로 표현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래서 그의 작품 속 풍경들이 선사하는 그 느낌을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관심있게 보고 있다. 유명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도 많이 했고, 국내 책의 표지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는데, 특히나 이번 책의 감성은 계절과 너무 잘 어울려 더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겉표지를 벗겨내어서 접힌 부분을 펼치면, 예쁜 포스터로도 활용할 수 있다.

 

이 책은 '풀꽃 시인' 나태주의 등단 50주년 기념 신작 시집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라는 시, '풀꽃'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시를 잘 읽지 않는 이들도 웬만하면 한번쯤 들어봤을 만큼 유명한 그 시를 쓴 시인 나태주. 이번 신작은 시인의 50년 시력을 기념하는 시집이라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다. 1971년에 작품 활동을 시작해, 등단한 지 햇수로 꼬박 오십 년째라니...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시를 써온 그 길고도 깊은 시간을 차마 헤아리지도 못할 것 같다. 그러니 이 시집은 시인이 쌓아온  반세기의 내공을 함축해서 한 권에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저녁 때/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p.170, '행복' 중에서

 

이번 시집은 1부 신작 시 100편, 2부 독자들이 사랑하는 애송 시(대표 시) 49편, 3부 나태주 시인이 사랑하는 시 6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나 신작 시들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난해하고 복잡하거나, 은유로 점철되어 이해하기 어렵거나 하지 않아서 더 좋았던 것 같다. 그 동안에도 워낙 간결하고 단순한 언어와 짧은 분량으로 시를 써왔기에, 누구나 쉽고 친근하게 읽을 수 있는 시였지만 말이다. 인생이 무엇인가/한마디로 말하는 사람 없고/인생이 무엇인가/정말로 알고 인생을 사는 사람 없다, 사람들이 물이 없는 땅에서도/울창하게 자라는/나무처럼 산다/꿋꿋이 견디며 산다, 지금은 또다시 저녁/어둠이 우리의 피곤한 몸과 마음/감싸 안아 쉬게 한다/쉬어라 쉬어라 다 잊어준다, 그래, 그래, 애썼구나/잘 참아줘서 고마웠단다/이제 좀 쉬어라/쉬어야 다시 또 떠날 수 있지 등등... 담백하지만 위로가 되는 문구들이 가슴에 와 닿았다.

 

사랑하는 마음을 아끼며/삽니다/모진 마음을 달래며/삽니다/될수록 외롭고 슬픈 마음을/숨기며 삽니다, 무엇보다 오늘 하루 살아 있음이 기적이고/내가 또 너를 다시 만나고/너를 사랑함이 더욱 기적 같은 일임을/알기 때문이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등 설레이는 마음을 가득 담고 있는 사랑에 관한 시들도 다정하게 읽혔다. '쓸쓸해져서야 보이는 풍경이 있고, 버림받은 마음일 때에만 들리는 소리'가 있는 법이다. 우리는 그럴 때 평소에 안 듣던 음악을 찾아 듣고, 시를 읽고, 영화를 본다. 사는 건 매번 만만치 않은 일이고, 사랑 역시 결코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며,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해서 쉬운 일은 절대 없다. 그러니 '힘들고 지치고 고달픈 날들'을 함께 겪어 나가는 우리 모두에게 시인은 말한다. '인생은 고행이 아니라 여행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말이다. 시인의 따뜻하고 사려 깊은 위로가 필요한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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