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산문선 열린책들 세계문학 256
조지 오웰 지음, 허진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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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강하고, 이기적이며, 게으르고, 가장 밑바닥에 깔린 동기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책을 쓰는 것은 고통스럽고 기나긴 병치레와 같아서 끔찍하고 기진맥진한 싸움이다. 저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악마에게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 그런 일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이 악마는 아기가 관심을 끌려고 울부짖는 것과 똑같은 본능이다. 그러나 작가가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고 끊임없이 싸우지 않는 한 읽을 만한 글을 쓸 수 없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창유리와 같다.   p.18

 

조지 오웰은 뛰어난 소설가인 동시에 민주적 사회주의자이자 반파시스트인 진보적 지식인이기도 하고, 영국 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가이자, 문학의 역할을 고민하는 사색가이기도 했다. 그는 <1984>와 <동물 농장>등 소설 만으로도 20세기 영문학의 독보적인 작가이지만, 사실 여러 매체에 수많은 빼어난 에세이들과 칼럼들을 기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책은 오웰의 가장 유명하고 높이 평가 받는 20여 편의 산문들을 종류별로 골고루 엄선한 선집이다.

 

 

흥미로운 에세이들이 많았는데, 책과 문학, 서평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글들이 유독 흥미로웠다. 우선 <책과 담배>라는 글에서 '책을 사는 것, 책을 읽는 것이 너무 값비싼 취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간당 비용의 관점에서 독서에 정확히 얼마나 드는지' 분석하고 있다. 우선 자신이 가진 책들의 가격을 전부 더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헌책으로 구매한 책들, 받았거나 도서 상품권으로 구매한 것들, 서평용 책이나 증정본 등등으로 구분해 권수를 파악하고 각각에 맞는 가격을 책정했다. 그렇게 해서 그가 가진 책은 총 9백권에 가깝고, 비용은 165파운드 15실링, 이것은 대략 15년 동안 축적된 결과이다. 거기서 1년 독서에 드는 비용과 15년간 총 독서 비용을 계산하고, 이것을 다른 비용과 비교해본다. 결론은 독서 비용이 담뱃값과 술값을 합친 금액을 넘지 않는다는 것. 물론 책값과 우리가 책에서 얻는 가치의 관계를 정립하기는 어렵겠지만, 대단히 흥미로운 글이었다.

 

 

모든 책에 서평을 쓸 가치가 있다고 당연히 생각하는 한 그 무엇도 고칠 수 없다. 수많은 책에 대해 언급하면서 절대 다수의 책을 과찬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책과 전문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한 절대다수의 책이 얼마나 나쁜지 알지 못한다. <이 책은 쓸모없다>가 객관적으로 진실한 비평인 책이 열 권 중 아홉 권을 넘을 것이고, 서평가의 진실한 반응은 <이 책은 나에게 그 어떤 흥미도 주지 못했고, 나는 돈을 받지 않았다면 이 책의 평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돈을 내고 그런 평을 읽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겠는가? 독자는 추천하는 책에 대한 안내를 원하고, 일종의 평가를 기대한다.      p.107

 

이 책에는 파리 15구의 어느 병원에서 몇 주를 보내면서 가난한 이들은 어떻게 죽는지에 대해 쓴 글도 있고, 부랑자 임시 수용소에서 지냈던 리얼한 경험을 쓴 글도 있으며, 헌책방에서 책 장사라는 일을 하면서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었다는 글도 있고, 뉴스에 수록되는 영국의 살인 사건들의 대한 통계와 논평도 있다. 무엇보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들이 뛰어난 점은 거의 대부분의 글들이 '경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그의 에세이들에는 그의 사상과 문학을 이루는 기초가 된 단상들과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실제로 오웰은 자신의 에세이들을 발전시켜 여러 장편소설을 완성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밖에 그의 에세이들에는 어린 시절 괴로웠던 학교생활에 대한 기억, 대학에 갈 학비를 마련할 수 없어 경찰 공무원에 지원하여 버마로 향하고, 그곳에서 영국 제국주의의 실상을 목도하며, 환멸과 자괴감으로 이내 사표를 던지게 되었던 그의 삶들이 고스란히 녹아 들어 있다. 특히나 국내 최초로 완역 수록된 꽤 분량 있는 에세이 '사자와 유니콘: 사회주의와 영국의 특질' 이라는 글도 포함되어 있으니, 오웰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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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펄 천 개의 세계 1
이윤하 지음, 송경아 옮김 / 사계절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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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펄은 전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강력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손에 들어가는 위험을 가만 보고 있을 수는 없어. 생각해 보게, 후보생. 드래곤 펄이 척박한 세계 전체를 탈바굼시킬 수 있다면, 그 세계에 숲과 바다를 생성해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 말은 즉 그 세계를 파괴해 생명 없는 사막으로 만드는 일도 그만큼이나 쉽다는 의미야. 그런 요술은 최고 입찰자에게 팔리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당국의 통제를 받아야 해."     p.167

 

열세 살 민은 열다섯 살이 되자마자 '천 개의 세계' 우주군 입대 시험을 봐서 준 오빠를 따라 군에 들어가려고 남은 날짜만 세고 있다. 네 명의 이모와 엄마, 그리고 사촌 세 명과 함께 살고 있는 민은 언제나 일찍 일어나서 집안일을 잔뜩 해야 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사실 이들은 인간인 척하며 살고 있는 구미호로 사람들은 대부분 여우들이 멸종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민은 여우 요술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말라는 경고를 평생 들으며 살았기에, 변신 능력이나 '홀리기'를 사람들에게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잠에서 깬 민은 오빠 준이 수수께끼 같은 상황에서 사라져서 탈영 혐의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정보 조사원은 준이 드래곤 펄을 찾아 떠났다고 말한다. 드래곤 펄이란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신령한 구슬로 전설적인 유물이었다.

 

하지만 민이 알고 있는 오빠는 절대 우주군을 탈영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준 오빠에게 우주군은 모든 것을 의미할 정도로 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엄청 열심히 노력했었던 것이다. 조사원은 준이 떠나기 전 마지막 보고를 남겼는데, 거기에 민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며 그걸로 준의 위치나 드래곤 펄의 위치를 찾을 단서를 파악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메시지 내용 자체는 평범했지만, 민은 거기에 뭔가 숨겨진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오빠는 민에게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민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까지 조사원을 공격하고 집에서 뛰쳐 나간다. 오빠를 찾고 드래곤 펄에 얽힌 수수께끼를 직접 풀기로 한 것이다. 민은 오빠가 배정된 전함인 창백한 번개호에 탑승해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조사하기 시작한다.

 

 

상황이 더 나쁠 수도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전염병에 감염된 행성 위에 고립되어 있고, 귀신들에게 살해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숨 쉴 공기는 있었다. 어떤 행성은 대기권이 유독하거나 아예 공기가 없었다. 아니면 너무 춥거나 더웠다. 초자연적인 생물들마저도 여러 가지 장비가 없으면 살아남기 힘들 정도로.
"하는 데까지 해 보자."      p.334

 

SF 장르가 현대 과학으로 설명이 가능한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바탕으로 둔 작품을 말한다면,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는 과학적 사실보다는 상상력에 의존하여 실현이 불가능하거나 아주 먼 미래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현대 과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작품들을 말한다. 우주를 무대로 무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스토리라고 보면 되는데, 보통 작가가 구축한 세계의 설정들을 이해했을 때 가능한 지점들이 많은 장르라 독자 입장에서 보자면 다소 진입장벽이 높은 편이다. 시작부터 처음 듣는 낯선 용어들이 잔뜩 등장해 겁에 질리게 만들고, 인물들 간의 관계를 파악하기도 전에 완전히 새롭게 구축되어 있는 특정 세계관을 이해하도록 거의 강요하게 마련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윤하의 신작은 SF나 스페이스 오페라를 처음 접한 독자들에게도 추천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읽을 수 있고, 누구라도 재미있게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SF장르에서 구미호, 호랑이, 귀신과 용 등 한국적인 캐릭터들을 조합해 매우 색다르고도 매력적인 스페이스 오페라를 만들어 내고 있다. 작가가 한국계 미국인이긴 하지만,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글을 쓰는 작가가 한국의 전설을 SF라는 장르 속에서 녹여내었다는 점도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내에 먼저 번역되었던 <나인폭스 갬빗>을 비롯해 해당 시리즈 3부작이 모두 휴고상과 제뷸러상에 노미네이트 되어 국내 독자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전작의 SF 세계관이 다소 어려웠다면, 이번 신작 <드래곤 펄>은 누구라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이니 아직까지 이윤하의 작품을 만나 보지 않았다면 바로 이 작품부터 시작하면 더 좋을 것 같다. 한국적인 감수성을 토대로 구축된 색다른 SF 세계를 만나보고 싶다면, 기존에 전혀 만나볼 수 없었던 독특한 SF 작품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한국적인 소재가 SF 장르와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다니 감탄하면서 읽게 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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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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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우리는 모두, 각자 세대의 공기를 숨쉬며 그 고유한 중력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의 경향 안에서 성장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마치 요즘 젊은 세대 사람들이 부모 세대의 신경을 일일이 곤두서게 하는 것처럼.    p.62~64

 

1950년대 후반, 하루키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쯤이었다. 당시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 살았던 하루키의 가족은 항상 고양이와 함께 살았다. 형제가 없는 하루키에게 고양이와 책은 가장 소중한 친구였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하루키는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 한 마리를 버리러 해변에 간 적이 있다. 왜 고양이를 버리러 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를 담은 상자를 해변에 내려놓은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은 아직 남아 있다. 그들은 집에 도착해서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하는 기분으로 문을 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조금 전에 버리고 온 고양이가 살갑게 그들 부자를 맞았다.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어리둥절했지만, 웬지 안도하는 기분이 들어 그 고양이를 계속 키우게 되었다고 한다.

 

소년 하루키의 고양이에 얽힌 수수께끼 같은 회상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그의 아버지 '무라카미 지아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가장 '사적인 이야기'이자, 언젠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서 문장으로 정리해봐야겠다고 오래 전부터 마음 먹고 있었던 글이다. 이 작품은 가제본 원고로 먼저 만나봤었는데, 문장들이 딱딱하고, 접속사도 쉼표도 더 많고, 평소의 하루키 작품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낯설게 느껴졌었다. 분량이 짧은데 비해 난해한 어휘들도 자주 등장해 읽기에 수월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천천히 읽게 되는 인상적인 작품이기도 했다.

 

 

만약 아버지가 병역에서 해제되지 않아 필리핀이나 버마 전선으로 보내졌다면.... 만약 음악 교사였다는 어머니의 약혼자가 전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생각해가다 보면 정말 기분이 묘해진다. 만약 그랬다면, 나라는 인간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결과, 당연히 나라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내가 쓴 책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소설가로서 이렇게 살아있는 나의 삶 자체가, 실체가 없는 덧없는 환상처럼 여겨진다.     p.88~89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세 번이나 전쟁에 소집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거대한 혼란과 빈곤 속에서 있는 힘을 다해 기를 쓰고 살아남아야만 했던 불운했던 세대였던 것이다. 하루키는 '무라카미 지아키'라는 개인의 역사를 담담하게 되짚어 나간다. 유년기의 입양과 파양, 청년기의 중일전쟁 참전, 중장년기의 교직 생활, 노년기의 투병 등을 비롯해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가감 없이 말이다. 다들 알다시피 하루키는 아버지와 이십 년 이상 전혀 얼굴을 보지 않는 '절연' 관계였던 걸로 알려졌다. 하루키는 아버지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할 수 없었고, 그가 서른 살에 소설가로 데뷔 했을 때 이미 부자 관계는 상당히 멀어져 있던 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를 줄곧 실망시켰고, 거기에는 언제나 막연한 가책 같은 것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아마도 그러한 이유로 하루키가 이 책을 쓰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루키는 그가 전업작가가 된 후로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대화도 연락도 하지 않는 상태로 지내왔던 아버지와의 수십 년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마치 객관적인 사실 정보라도 들려주듯 이야기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겨우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를 나눈 것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때 하루키는 예순 가까운 나이였고, 아버지는 아흔 살로 심한 당뇨를 앓고 있는 데다 온 몸에 암이 전이되어 있던 상태였다고 한다. 다행히도 그때 아주 어색한 대화를 나누고 화해 비슷한 것을 했다고 하지만, 하루키는 그 순간 뭔가 깨달은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관계된 사람들을 만나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조금씩 듣게 된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란 성장한 시대도 환경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세계를 보는 시각도 다르게 마련이라 '세대 차이'라는 이름으로 종종 부딪치게 마련이다. 그러니 하루키가 풀어내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다소 낯설게 느껴지더라도, 결국에는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는 얘기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자 부모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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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의 힘 곤도 마리에 정리 시리즈 1
곤도 마리에 지음, 홍성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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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금 더 현명했더라면 이런 식으로 '정리 노이로제'에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조건 버리기만 생각하고 정리를 하면 그때의 나처럼 불행해진다. 정리를 통해 가려내야 할 것은 버릴 물건이 아니라 '남길 물건'이다. 나는 그때 머릿속에 스치듯 떠올랐던 '물건을 잘 봐'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 전까지 나는 버릴 물건에만 주목해서 진짜 소중히 해야 할, 남길 물건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p.57

 

요즘 <신박한 정리>라는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공간 크리에이터'라는 다소 낯선 직업을 가진 전문가가 등장해 출연자들의 집을 비우고, 정리해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만들어주는 방송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공간 구성, 인테리어, 수납 등이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공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물건은 계속 늘어나고, 치우고 버려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언제나 제자리 걸음인 게 현실이니 말이다. 정말 신기한 건 한번 마음먹고 시간을 내어서 정리를 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원상태로 되돌아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세계 최고의 정리 컨설턴트라 불리는 곤도 마리에의 이 책을 만나 보기로 했다.

 

‘곤마리하다(to konmari)’가 ‘정리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로 사전에 등재되었을 정도로 곤도 마리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리의 여왕’이다. 곤마리 열풍을 몰고 온 <정리의 힘>은 전 세계 1,200만 독자의 삶을 바꾸어 주었고, 미니멀라이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그녀의 모토는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였고, 물건만 남기고 버리는 작업을 하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까지 파악하게 된다는 거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곤마리 정리법의 핵심이다. 이 책을 만나기 전에 곤도 마리에가 업무 공간 정리법을 다루었던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정리를 하면서 물건을 마주 보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는 것과 같다는 점, 버릴 것은 버리고 비우는 정리를 통해 자신이 과거에 했던 선택을 인정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는 점이 너무도 공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의류, 책, 서류, 소품 정리를 끝냈다면, 드디어 '추억의 물건'을 정리할 차례다. 추억의 물건을 마지막에 정리해야 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버리기 어려운 물건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가슴 설렜던 물건을 버리면 추억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정말 소중한 추억은 그런 물건을 버린다고 해도 절대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잊고 싶은 과거의 추억이라면 잊는 것이 좋다. 우리는 '지금'을 살고 있다. 과거가 아무리 화려했어도 사람은 과거를 살지는 못한다. 지금 가슴 설레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p.145

 

과연 '한 번 정리하면 절대 다시 어지럽혀지지 않는 정리법'이라는 게 존재할까. 곤도 마리에는 이 책의 서문에서부터 그렇다고 장담한다. 자신의 정리법은 기존의 정리, 정돈, 수납법 관점에서 보면 매우 비상식적이지만, 그렇게 정리한 사람들의 삶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말이다. 그러니 깨끗이 정리해도 사흘만 지나면 대개 다시 어지럽혀지는 경험을 해봤다면, 모든 물건들에 의미와 추억을 부여해 죽어도 못 버리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이 꼭 필요하다. 곤도 마리에는 우선 우리가 평소에 잘못 알고 있었던 정리 상식부터 바꿔 준다. 정리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습관처럼 익숙해지는 것이라는 의식부터 버려야 한다. 조금씩 정리하라는 팁에 넘어가면 안 된다고, 수납의 편리함에 의존할 수록 물건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고 나면 정리의 1단계는 바로 버리기에서 시작된다. 이 책에 따르면 '한 번에, 짧은 기간에, 완벽히' 정리하는 것이 올바른 정리 방법이라고 한다. 의식이 바뀔 정도의 충격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짧은 기간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실용적인 점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정리를 해나가는 방법들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물건을 버리는 순서와 기준, 버릴 수 없는 물건을 다루는 요령, 의류, 책, 서류, 소품, 추억의 물건 순으로 정리하는 방법, 옷 개기와 옷장에 옷 거는 요령, 책 정리 방법과 소품류, 동전, 사진, 방치된 물건 처리 법 등등을 비롯해 효과적인 수납 컨설팅으로 마무리가 된다. 정리를 통해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되고, 자신의 역사를 돌아보게 되고, 결국 인생을 극적으로 바꾸게 된다는 대목에 이르면, 이건 정말 '정리의 마법'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지금, 인생을 새로 시작하고 싶거나, 지금의 생활을 더 좋은 상태로 만들고 싶거나, 바꾸고 싶다면 이 책과 함께 '정리'를 시작해 보면 어떨까. 매일매일 설레는 하루를 위해서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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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7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오나 2020-10-27 14:40   좋아요 0 | URL
그죠? 추억의 물건이 가장 정리하기 어렵죠.ㅎㅎ ‘신애라하다‘라는 표현도 너무 괜찮네요. ㅋㅋ
 
줄레이하 눈을 뜨다 <5+5> 공동번역 출간 프로젝트 3
구젤 샤밀례브나 야히나 지음, 강동희 옮김 / 걷는사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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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는 고통스러웠고, 오랜 기다림은 괴로웠다. 가끔 줄레이하는 이미 죽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위의 사람들은 무기력하고 창백하며, 종일 속삭이고 조용히 흐느끼는데, 이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죽지 않는 것일까? 춥고 비좁으며, 돌벽은 습하고 축축하며, 볕이 들어오지 않는 땅속 깊은 이곳은 무덤이 아닐까? 줄레이하가 방 구석에 있는 크고 깊숙한 양철 양동이로 만들어 놓은 화장실에 갔을 때, 그녀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고, 그제야 아직 죽은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죽은 이는 부끄러움을 알지 못한다.    p.195

 

열다섯 줄레이하는 마흔다섯의 부통 무르타자에게 시집을 와 척박한 시골마을에서 살고 있다. 결혼 후 십오 년 동안 네 명의 딸을 낳았지만 모두 죽어 버렸다. 그녀는 지독한 시어머니인 노파 우프리하의 온갖 구박을 받으면서, 마치 집안의 식모처럼 일만 하면서 살아 왔다. 어떤 부당한 일을 당해도,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어떤 취급을 받아도, 그저 묵묵히 참고 견디면서. 십오 년 전 줄레이하가 이 집에 왔을 무렵부터 시어머니는 눈도 멀고 귀도 먹어 버렸고, 그만큼 괴팍한 성질은 더해갔으며 지금도 쉬지 않고 잔소리를 해댄다.  줄레이하는 혹한의 날씨 속에서 아침부터 시어머니의 요강을 비우고 닦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남편과 땔감을 구해 오고, 간밤에 잔뜩 쌓인 눈을 치우느라 온 집안을 쓸고, 온 몸이 쑤시고 지쳐 쓰러져 겨우 잠이 들 무렵 다시 깨서 목욕물을 받으러 간다. 목욕실로 가는 눈길을 치우고, 이십 통의 물을 우물에서 길어 나르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온갖 욕을 들어 가며 목욕 수발을 하지만, 시어머니 몸에 상처가 났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빗자루로 맞는다. 그 와중에도 남편이 오랫동안 때리지 않고 빨리 진정했으니, 그 정도면 좋은 남편을 만난 거라고 생각한다.

 

대체 이 여인은 그 동안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너무 어릴 때 이 집안에 시집와서 거의 세뇌당하다시피 살아온 것은 아닐까. 거기다 시어머니가 꿈에서 줄레이하가 죽는 걸 보았다며, 너는 곧 죽을 거라고 말하자 그녀는 두려워진다. 살면서 그녀는 단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다. 누군가 시키는 대로 하는 매우 수동적인 삶을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그나토프가 이끄는 붉은군대에 의해 남편이 죽게 된다. 백 년은 거뜬히 살 것 같았던 강한 무르타자가 사라지고, 전 재산을 몰수당한 후, 그녀는 머나먼 시베리아로 이주를 떠나게 된다. 이번에도 그녀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삶이 흘러 가고 있었다. 그렇게 태어나서 한 번도 떠나 본 적 없는 율바시를 떠나 강제이주의 머나먼 여정이 시작된다.

 

 

부끄럽지 않았다. 어렸을 적 세뇌된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지워졌다. 대신 새로운 것이 생겨났고, 그것은 마치 홍수가 지난해 저장해둔 불쏘시개와 썩은 나뭇잎을 쓸어간 것처럼 두려움을 씻겨냈다. 
"아내는 남편의 대를 잇기 위한 경작지야." 엄마는 그녀를 무르타자의 집에 보내기 전에 그렇게 가르쳤다. "농부는 힘이 남아 있는 한, 그가 원하면 밭을 일구기 위해 경작지에 올 것이야. 경작지는 자신의 농부를 거부할 수 없어." 그래서 그녀는 반항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숨을 죽인 채, 참았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한 채 몇 년을 살았다. 그리고 이제는 알았다.     p.599~600

 

이 작품은 1930년에서 1946년 사이에 있었던 러시아 부농의 '시베리아 강제이주'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구젤 샤밀례브나 야히나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톨스토이 문학상을 비롯해 각종 상을 받으며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이 작품은 소련 붕괴 후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여겨졌던 유배 문학의 한 장르에 속한다. 우리 나라에도 유배되어온 사람들이 겪는 일들을 그린 유배문학이 있었으니, 비슷한 장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제2회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했던 류드밀라 울리츠카야가 서문에서 구젤 샤밀례브나 야히나를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잇는 위대한 작가' 대열에 들어온 젊은 작가라며 극찬했다.

 

사실 러시아 문학하면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등 고전 작가들의 작품부터 떠올릴 정도로, 현대의 러시아 문학에 대해선 거의 아는 게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 기회에 동시대 러시아 문학을 알게 되었고, 거의 700페이지에 가까운 엄청난 분량에도 가독성이 뛰어나 대단히 재미있게 술술 읽을 수 있었다. 유배지에 도착하자 마자 아들을 낳고,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 속에서 강제 노동으로 삶을 이어가는 줄레이하에게 찾아온 사랑의 대상이 남편을 죽인 붉은군대의 간부라는 점이 이 장대한 이야기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시베리아의 불모지인 지옥 같은 노동수용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모성과 사랑, 연민의 드라마는 열여섯이 된 줄레이하의 아들에 의해 희망적인 여운을 남기며 끝에 이른다. 그래서 이 작품은 시베리아라는 유배지의 역사적인 기록이자, 유배문학의 모습을 한 정통 소설로서도 너무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한,러 수교 30주년을 기념하는 <5+5> 공동번역 출간 프로젝트의 세 번째 작품으로 출간이 되었는데, 계속 이어질 네 번째 <세기말의 러시아 문제>와 다섯 번째로 나올 <도스토옙스키 단편선> 역시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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