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동영상 스토리콜렉터 90
마이크 오머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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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에겐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살인범의 머릿속으로 침투해 살인범의 시각을 통해 사고하고, 때론 범인이 앞으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예측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재주는 공짜가 아니었다. 때로는 살인범이 아니라 피해자의 머릿속에 갇히기도 했다. 피해자들의 마지막 순간을 보고, 마치 자신이 피해자가 된 양 그들의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니콜의 경우에는 굳이 상상력을 발휘하려고 애쓸 필요조차 없었다. 이번에는 피해자의 고통을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까. 그 악몽의 순간 니콜 메디나의 머릿속으로 침투하는 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p.93

 

흑백 화면 속에 젊은 여자는 공포로 얼굴이 일그러진 채 비좁고 어두운 장소에 누워 있다. 이윽고 화면이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아래쪽 화면은 어두운 공간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위쪽 화면은 무덤처럼 보이는 직사각형 구덩이 안에 모래를 퍼붓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화면 속 남자의 냉정하고 침착한 움직임과 여자의 히스테리 사이의 불협화음은 보는 이들을 몸서리 쳐지게 만든다. 누군가 살아 있는 여자를 생매장하고 있는 것이다. 영상 아래쪽에는 '실험 1호'라는 자막이 떠 있었고, 게시자는 '슈뢰딩거'였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밀폐된 상자 속에 독극물과 함께 있는 고양이의 생존 여부를 이용해 양자역학의 원리를 설명한 사고실험이다. 실험 속에서 고양이는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모른다. 이 영상 속에서 상자에 갇혀 있는 여자 역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다. 여자는 정말 생매장을 당한 걸까? 이 영상은 라이브로 촬영되었을까? '실험 1호'라면 앞으로 비슷한 일이 더 벌어진다는 걸까? 이는 연쇄 살인의 시작인 걸까?

 

FBI 요원 테이텀 그레이와 범죄심리학자 조이 벤틀리가 콤비 플레이를 보여주는 '조이 벤틀리' 시리즈 그 두 번째 작품이다. 대책 안 서는 고집불통 할아버지와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소시오 패스 고양이와 함께 사는 역시나 제멋대로인 성격으로 상사들과 부딪쳐 온 FBI 요원과 살인범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는 알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감정은 전혀 헤아리지 못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돌직구만 날려대는 범죄심리학자라는 조합이야말로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이다. 사사건건 서로를 공격하고 무시하고 부딪히는 두 남녀 주인공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특별한 시너지를 발휘하기도 하고, 상반된 성격으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티격태격하는 과정에서의 재미도 선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조이가 코웃음 쳤다. "난 놈의 소명의식 따위엔 털끝만치도 관심없어요. 놈은 그냥 그런 말로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이에요. 하지만 그렇게 떠들다 보면 실수로 우리한테 진짜 실마리를 주게 될지도 모르죠. 우리가 써먹을 수 있을 만한 걸요."
"무슨 뜻이에요? 놈이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이라니."
"사람들은 항상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요, 해리.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당신은 아주 잘 알 텐데요. 그리고 이 남자는 아주 단순한 진실을 보지 않으려고 자신에게 크고 정교한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p.317

 

전작인 <살인자의 사랑법>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언론에서 '목 조르는 장의사'라고 불리는 연쇄살인범 사건을 함께 해결했다. 이번에는 '실험 1호', '실험 2호'라는 제목으로 여자가 생매장당하는 영상을 온라인으로 중계하는 연쇄살인범을 뒤쫓는다. 게다가 조이는 전작에 이어 유년 시절부터 트라우마로 남은 또 다른 연쇄살인마 로드 글로버로부터 동생인 안드레아를 지켜야 한다. 그녀는 10대 시절 이웃에 살던 연쇄살인마 로드 글로버에 의해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FBI의 수사를 돕는 범죄심리학자가 되었다. 여전히 잊지 않고 연락을 해오던 로드 글로버는 전작에서 조이를 기습 살해하려다 실패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이의 여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왔었다.  그 이후로 완전히 종적을 감춘 상태이지만, 조이는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혀 안드레아를 설득해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게 했다. 하지만 조이가 매순간 안드레아를 지켜보며 곁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그녀는 사건 수사를 하는 틈틈이 언제 위협을 실행에 옮길지 알 수 없는 로드 글로버로부터 동생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동시에 또 다른 살인마를 잡는 일을 동시에 해내야 하는 조이에게 최악의 위기가 닥쳐 온다.

 

마이크 오머는 기자와 게임 개발자였던 이력 덕분인지 매우 현실적인 공포를 그리면서도, 오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지루할 틈없이 탄탄한 서사로 꽉 채우고 있다. 독특한 성격의 두 남녀 주인공 캐릭터가 전작에 이어 더 생생하게 매력을 발산하고 있어 군더더기 없이 잘 만들어진 미드 한 편 본 것 같은 기분도 드는 작품이었다. '조이 벤틀리' 시리즈 다음 작품도 빨리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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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도와달라는 말을 못할까 - 부담은 줄이고 성과는 높이는 부탁의 기술
웨인 베이커 지음, 박설영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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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지레 짐작한다. 또한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한다. 아니면 기꺼이 돕겠다는 사람이 있어도 그에게 시간이 없거나 도울 능력이 부족할 거라고 속단한다. 나는 수년에 걸쳐 직접 행사를 진행하며 선입견 때문에 자신을 제약하는 사람들을 거듭 목격했다... "사람들이 무얼 알고 누굴 아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물어보기 전까지는요. 여기 모인 사람들을 미리 재단하지 마세요. 진짜 필요하면 그냥 도와달라고 부탁하세요." 선입견을 버리고 도움을 요청하면 실망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p.29

 

직장에서, 학교에서 혹은 공공장소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한다. 일에 치여 쩔쩔매거나,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왜 우리는 도움을 청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 걸까. 무능력해 보일까봐, 이기적으로 보일까봐, 혹은 타인에게 피해를 줄까봐 두려운 탓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부탁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부담스러워하고, 힘들어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웨인 베이커 교수는 '때로는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단순한 행동이 우리를 성공으로 인도하는 열쇠가 된다'고 말한다. 직장에서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고, 새로운 구직 기회가 생기기도 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부탁하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내가 뭘 원하는지,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지레 짐작하거나,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실제로 수많은 연구 결과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조차 부탁을 받으면 우리의 짐작보다 훨씬 많은 도움을 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선입견을 버리고 도움을 요청했을 때 실망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일마다 도움을 구할 수는 없고, 그것에 의존해서도 안 되겠지만 지나치게 자신에게만 의존하는 것도 좌절과 실패로 가는 지름길이라면 '부탁의 힘'이 가진 효과를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무엇이 필요한지 알았고 부탁할 내용도 다듬었다면, 다음 단계는 부탁할 사람을 찾는 것이다. 적임자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바로 부탁할 수도 있지만, 어떨 때는 약간의 발품을 팔아야 한다. 핵심은 '누가 무엇을 아는지'(지식 네트워크)와 '누가 누구를 아는지'(사회적 네트워크)를 파악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전문지식이나 자원을 가진 사람, 또는 그런 사람을 알고 있거나 연결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다.     p.99

 

이 책에서 알려주는 것은 '부담은 줄이고 성과는 높이는 부탁의 기술'이다. 부탁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성에서 시작해, 성공 확률을 높이는 부탁의 전략, 도움을 주고받는 팀워크의 비결 등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들려준다. 저자는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 Inc)를 설립하고 조직심리학과 네트워크 연구를 바탕으로 기브앤테이크 실천 프로그램의 학문적 기초를 만들었다. 그는 이 책에서 관대하게 도움을 베푸는 ‘기버(giver)’ 모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베풀 줄 알며 도움을 받을 줄도 아는 사람, ‘기버-리퀘스터(giver-requesters)’가 되는 것이야말로 성공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개인적, 직업적, 사업적 인맥을 통해 자원을 순환하게 만드는 것은 도움을 베푸는 것만큼이나 ‘도움을 청하는 데’ 달려 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대부분 도움을 베푸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만, 도움을 부탁하는 것 또한 그것만큼 중요한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도움을 주는 것과 받는 것, 그 주고받음의 순환이 가져오는 사회적인 효과 또한 매우 중요하다.

 

'부탁'이라는 것은 소심하거나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뿐만 아니라, 자립심이 높은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과제이다. 특히나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직장에서, 업무적으로 부탁을 할 수 있는 스킬과 그 효과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으니 직장인들에게 아주 좋은 가이드가 되어줄 것 같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내려는 태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고, 팀원이나 리더로서 두려움 없는 조직을 일구는 방법들을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훌륭한 부탁이 조건은 구체적이고, 유의미하고, 행동 지향적이고, 현실적이고, 시간 제한적이어야 한다. 저자가 알려주는 스마트한 부탁의 법칙 다섯 가지는 센스 있게 부탁하고, 누구에게라도 긍정적인 대답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만든다. 누구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지, 거절로부터 다음 기회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부탁의 실전 기술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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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아이드 수잔
줄리아 히벌린 지음, 유소영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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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무덤도 화재 때문에 움푹 팬, 바닥이 고르지 않은 경사진 구덩이였다. 우리가 거기 버려지기 오래전부터 블랙 아이드 수잔이 피어나서 화려하게 들판을 단장하고 있었다. 블랙 아이드 수잔은 버려져서 누렇게 뜬 땅에서 종종 제일 먼저 번성하는 탐욕스러운 식물이다. 치어리더처럼 아름답지만 경쟁심이 강하다. 빠르게 번식해서 다른 종을 몰아낸다. 끄지 않고 아무렇게나 던진 한 개비 성냥, 그 때문에 연쇄살인범 이야기에 영원히 새겨질 우리의 별명이 탄생했다.     p.31

 

테사는 타브로이드 신문 일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던 스타이자 캠프 파이어 때 등장하는 공포 괴담의 주인공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블랙 아이드 수잔 네 명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운이 좋았던 단 한 명, 유골이 흩어져 있던 곳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채로 발견된 유일한 피해자였다. 열여섯의 테사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자들의 유골과 함께 살아 있는 채로 묻힌 채 발견되었다. 그녀가 발견된 공동묘지에 곳곳에 피어 있던 블랙 아이드 수잔 꽃 때문에 사람들은 희생자들을 '블랙 아이드 수잔'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18년 뒤,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살고 있는 테사에게 그 사건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자신이 18년 전에 했던 증언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범인에 대한 집행이 한 달 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형 집행일이 다가오고, 테사는 혹시 무고한 사람이 사형수 감옥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야기는 십대 딸을 둔 엄마 테사의 현재 시점과 18년 전 블랙 아이드 수잔 사건의 생존자로 무사히 구출되고 난 뒤의 열여섯 소녀 테사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과거 시점의 대부분은 테사와 정신과 의사의 상담으로 진행된다.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었다가 회복하고,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어 버린 테사가 뭐든 범인에 대한 단서를 찾아 주기를 바라는 어른들과 이상하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소녀의 구도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긴장감 보다는 다소 모호하게 흘러간다. 이백여 페이지가 지날 때까지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제대로 드러나는 게 없으니 말이다. 현재 시점의 이야기에서는 유명한 법과학자와 사형수 전문 변호사와 함께 혹시 다른 범인이 있지는 않을까, 무고한 사람이 갇혀 있는 건 아닐까 하며 사건의 진실에 다가간다.

 

 

 

 

"좋아요. 당신의 괴물이 바로 지금 저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그가 자리에 앉았어요. 모든 것을 자백했어요. 당신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어요. 이름도 알고, 어디서 자랐는지, 어머니가 그를 사랑했는지, 아버지에게서 얻어맞았는지, 고등학교 때 인기가 많았는지, 개를 사랑했는지, 개를 죽였는지... 다 알고 있어요. 그가 바로 저기, 1미터 떨어진 의자에 앉아서 당신의 모든 질문에 대답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달라질까요? 당신을 만족시킬 대답이 있을까요? 기분이 더 좋아질 수 있는?"
나는 의자를 응시했다.... 나는 내 괴물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가 죽기를 원했다.      p.268~269

 

수십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러서, 자신이 진범을 잡은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범인의 변호사와 협력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피해자의 심리는 복잡 미묘하다. 누군가 그녀의 집 창밖에 블랙 아이드 수잔을 심어 놓았고, 사실 그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사건 당시 테사의 단짝이었던 친구 리디아는 테사가 재판에서 증언한 이후 사라져버렸다. 테사가 입을 열면 리디아도 수잔으로 만들겠다는 협박의 편지가 있었다. 리디아도 블랙 아이드 수잔 중 한 명이 되어 희생당한 걸까. 아니면 스스로 자취를 감춰버린 걸까. 수잔들 중 두 명은 아직도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고, 그들은 테사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 준다. 마치 유령처럼 나타나서, 그녀에게 말을 건다. 과연 감옥 안에 있는 범인은 무고한 걸까, 그렇다면 진짜 연쇄살인범은 누구일까.

 

피해자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사람이 주인공이고, 그녀의 기억을 쫓아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 내는 구도라면 그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가 진행될텐데, 사실 이 작품은 거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독자들이 어느 정도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게 되는 것은 전체 사백 삼십여 페이지 중에서 사백 여 페이지가 가까워졌을 때 즈음이다. 그 뒤로 반전과 의외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그 전까지 이어지는 전개는 다소의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우선 테사라는 인물 자체가 뚜렷하지가 않아 다소 흐릿한 색이라고 해야 할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것 같기도 하다가 정말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덕분에 서사는 굉장히 느릿하게 흘러 간다. 물론 후반부의 속도감과 예상치 못한 결말을 위해 이 모든 과정을 즐길 수 있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 될 것이다. 영화 <컨텐더> 감독으로 영화화 제작 예정이라고 하는데, 스크린에서 펼쳐질 이야기는 또 어떤 분위기일지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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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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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어떤 힘일까? 나는 삶이 고통스럽거나 누군가의 불행 앞에서 무기력한 마음이 들 때 이 소설 속 빵집 주인이 건넨 한 덩이의 빵을 떠올리곤 한다. 어떤 의미에서 내게 소설 쓰는 일은 누군가에게 건넬 투박하지만 향기로운 빵의 반죽을 빚은 후 그것이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리는 일과 닮은 것도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오늘 아들을 잃은 부부에게 빵을 건네는 이의 마음으로 허공에 작은 빵집을 짓는다. 젊은 부부에게 온기를 전하는 빵집 주인의 마음으로. 어딘가 있을 당신에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책들을 건네기 위해서.   p.22~23

 

어릴 때부터 워낙 빵을 좋아해서 평생 다양한 종류의 빵을 먹으면서 살아 왔지만, 그 중에서도 겨울만 되면 생각나는 특별한 빵이 있다. 말린 과일과 설탕에 절인 과일껍질, 아몬드, 향신료를 넣고 구운 빵에 버터를 바른 후 슈거파우더를 뿌려 만든 독일식 과일 케이크로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만드는 음식 중 하나인 슈톨렌이다. 이 빵은 갓 구운 것보다는 건조하고 서늘한 곳에서 2~4주가량 숙성시킨 후 먹는 것이 좋은데, 그래서 독일에서는 크리스마스를 몇 주 앞두고 슈톨렌을 만드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처음에 이 빵을 처음 먹었을 때는 럼향 가득 품은 달콤하고 쫄깃한 건과일의 맛과 꾸덕하고 깊은 풍미에 반했었다.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달콤한 꿀과 럼주에 건과일들을 숙성하는 기간이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1년이라는 점이었다. 오랜 시간 정상을 들여서 만드는 빵이라는 점과, 그만큼 여타의 빵과는 달리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슈톨렌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올해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슈톨렌을 미리 주문했고, 12월을 앞두고 도착한 슈톨렌을 얇게 조각 내어 먹으면서 백수린의 신작 산문을 읽었다. 달콤함과 담백함 사이의 깊은 풍미와 묵직하고 건강한 맛이 커피와도 홍차와도 참 잘 어울리는 빵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리고 맛있는 빵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이 근사한 책이 나의 오늘 하루를 또 버텨내게 해주었다. 다정하고, 온순한 마음으로, 위로 받고 또 용기를 얻으면서, 나는 그렇게 소중한 책을 또 한 권 만났다. 

 

이 책은 어느덧 등단한 지 10년 가까이 된 소설가의 첫 산문집이다. '경향신문'에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책 굽는 오븐'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소개하기 위해 연재했던 짧은 원고들을 수정, 보완하고, 거기에 새롭게 쓴 글들을 더했는데 '책'과 '빵'에 대해서 가볍고 경쾌한 마음으로 썼던 글들이라고 한다. 가볍지만 너무 따뜻하고, 경쾌하지만 뭉클하고, 다정다감하고 사려 깊고, 맛있는 그런 글이라 읽는 내내 설레이는 마음이었다.

 

 

사는 것이 힘들고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는 어느 날, 온기가 남은 오븐 곁에 둘러앉아 누군가와 단팥빵을 나누어 먹는 상상을 해본다. 긴 시간 정성껏 졸여 만든 달콤하고 따뜻한 앙금이 들어 있는 단팥빵을. 그것은 틀림없이 행복한 장면이겠지만 그런 순간에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고독할 것이라는 걸 나는 이제는 안다.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에게 쉽게 발설할 수 없는 상처와 자기모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욕망과 충동을 감당하며 사는 존재들이니까.       p.227

 

백수린 작가는 '빵집 주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과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가 결국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여전히 책을 읽다가 빵이 나오는 구절을 만나면 내용과 상관없이 그 책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느끼곤 한다고. 아마도 대부분 빵을 좋아하는 이들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방까지 빵집 투어를 다니고, 해외에 가서도 베이커리 맛집은 빼놓지 않고, 사다 먹는 걸로도 부족해 베이킹을 배우러 학원에 다니고, 급기야 오븐을 사서 집에서 빵을 만들어 먹고, 주변에 선물도 했던 터라 나 역시 그랬다. 빵이 등장하는 장면이 나오는 책은 일부러 찾아 읽고, 누군가 빵을 나처럼 사랑하는 이를 만나면 일단 호감부터 생겼으니 말이다. 그래서 페이지 곳곳에 빵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이 책이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것도 단순히 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그에 어울리는 빵을 곁들이는 식이라 더 근사했다.

 

 

오랜 시간 반죽을 숙성시켰다가 구워야 하는 캉파뉴와 소박하지만 풍미 깊은 마틴 슐레스케의 <가문비나무의 노래>, 뉴욕의 대표적인 유대인 먹거리인 파스트라미 샌드위치는 필립 로스의 <울분>과 재료 비율에 조금의 오차만 있어도 제대로 부풀어 오르지 않는 마카롱은 앤 카슨의 <남편의 아름다움>에서 만날 수 있는 정교하게 세공한 문장들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 기시 마사히코의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일본인들이 유년 시절 즐겨 먹는 가장 흔한 빵인 멜론빵과 제임스 설터의 소설들은 예술품처럼 완벽한 형태를 지닌 티라미수, 그리고 침니 케이크와 아고타 크리스토프, 슈톨렌과 로맹 가리, 바나나 케이크와 윌리엄 트레버, 롤케이크와 켄 리우, 옥수수빵과 존 윌리엄스, 단팥빵과 앨리스 먼로 등등.. 갓 구운 빵의 온기만큼 따뜻한 글들이 가득한 책이었다.

 

무엇보다 소설을 쓰는 일을 빵의 반죽을 빚고 굽는 일과 함께 대하는 작가의 마음이 공감되고, 이해되고,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참 좋았다. 그날의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그날의 기분과 분위기에 알맞은 차를 끓이고, 티푸드나 초콜릿을 준비한다는 것도, 책상을 치우고 차를 우리는 시간 동안 소설을 시작했던 그 초심의 마음을 불러온다는 것도 그녀의 작품만큼이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았고 말이다. 작가의 말에서 '읽고 쓰는 나날을 기록한 소박한 글들이 온기, 라는 단어와 어울렸으면' 한다고 했는데, 그 다정한 온기가 이 책을 읽는 모두에게 전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하루하루 뉴스를 보기가 겁이 날 만큼, 나쁜 소식투성이이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서 우리의 매일매일이 조금은 다정해지기를.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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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1-30 0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일러스트가 따뜻한 느낌이 드네요 피오나님께서 찍으신 사진도 그림처럼 예뻐요~! 정말 12월이 성큼 다가왔네요~

피오나 2020-11-30 21:34   좋아요 1 | URL
실제 책도 너무 따뜻하고 다정하고 예쁘답니다. 12월과 정말 잘 어울리는 책이에요^^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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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과 재능 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는다. 기회 균등에 대한 담론이 과거와 같은 반응을 얻지 못하는 이유라 볼 수 있다. 사회적 이동성은 더 이상 불평등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다. 빈부격차에 대한 진지한 대응은 무엇이든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직접 다뤄야만 하며,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으로는 무마될 수 없다. 사다리 자체가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p.51

 

<정의란 무엇인가>로 한국에 200만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리고,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마이클 샌델의 신작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이후 8년 만에 쓴 신간으로,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이며 직역하면 ‘능력주의의 폭정: 과연 무엇이 공동선을 만드나?’로 국내 버전은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미국 현지에서 2020년 9월에 나왔으니, 정말 따끈따끈한 신작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 샌델이 말하는 것은 능력주의가 정말 공정한가에 대한 것이다.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며,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한다는 명제는 자유시장경제의 핵심이지만, 사실 공평한 기회제공과 능력발휘의 보장 장치는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우리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주어지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샌델은 특권층 부모들이 불법적 수단으로 자기 자녀들을 명문대에 입학시켰던 사건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을 떠오르게 하는데, 이 사건의 중심에 악덕 입시상담가가 있었고 자식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부유한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교묘히 설계된 입시 부정을 저질렀다는 거다. 샌델은 실력이 경제적 우위와 구별해서 보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공정성 관점에서 뒷문과 옆문을 구분하기 쉽지 않은 입시의 윤리에 대해서 말한다. 능력주의의 문제는 원칙 자체보다 어떻게 그 원칙을 실현하느냐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샌델은 그렇게 능력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견 불일치를 시작으로 능력주의의 장단점을 구체적으로 따져 보기 시작한다.

 

 

그것이 사회적 상승 담론의 포인트였다. 성공의 길에 놓인 장애물을 모두 제거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성공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인종이나 출신 계층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 재능과 노력이 허락하는 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회가 정말로 평등하다면 꼭대기에 선 사람은 그 성공과 관련된 보상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 이것이 능력주의의 약속이었다. 더 많은 평등의 약속이 아니라, 더 많고 더 공정한 사회적 이동 가능성의 약속 말이다.     p.145

 

재산과 소득에서 똑같은 수준으로 불평등한 두 나라가 있다고 해보자. 한 사회는 귀족정이며 소득과 재산은 어떤 집에서 태어나느냐에 달려 있고 고스란히 대물림된다. 다른 한 사회는 능력주의로 각자가 노력과 재능에 따라 얻은 결과로 재산과 소득의 불평등이 생긴다. 대부분 능력주의 사회가 귀족정 사회보다 낫다고 여길 것이다. 출생에 따라 계급을 매기는 귀족정은 부정의하다고 여길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부잣집에서 자라날지 가난한 집에서 자라날 모른다는 전제 하에 당신은 어떤 사회를 선택하고 싶은가? 혹은 처음부터 자신이 최상위층이 될지 최하위층이 될지 알고 있다고 하면, 둘 중 어느 사회에서 살고 싶을까. 중요한 것은 두 나라의 불평등 정도가 똑같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결론은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두 사회 모두에서 극심하므로, 어느 계층에 속하든 한쪽 사회를 고르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샌델은 이런 식으로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능력주의의 이면을 다시 생각해보도록 한다.

 

성공에 대한 모든 불공정한 장애물을 제거했을 경우, 완벽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 능력주의적 경쟁에서 비롯된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개인의 능력은 정말 공정하게 측정되고 있는가?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마이클 샌델은 이번에 능력주의가 정말 공정한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무엇보다 '성적 기반 능력주의'인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은 책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과연 이번에도 샌델이 '공정' 열풍을 불러일으킬지 궁금해진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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