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끝내는 초등 공부 대백과
송재환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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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학을 1년 남짓 앞둔 고등학교 3학년생들 중 우등생들을 살펴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공부를 잘하던 아이들은 20% 남짓에 불과하다고 한다. 나머지 80%는 한때 공부에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어떤 계기를 만나서 우등생 반열에 든 학생들이었다. 그러하니 우리 아이가 지금 공부를 좀 하는 편이라고 자만할 필요도 없고, 그 반대의 경우라고 해서 염려하지 않아도 괜찮다.    p.85

 

부모가 된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아이가 자라서 초등학교 입학을 1년 앞두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올해 1년이나 남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 입장에서는 이런 저런 걱정되는 부분이 많은 게 사실이다. 교육과정이며 환경이 우리 세대와는 너무도 확연하게 달라졌기 때문에, 마치 평생 단 한번도 초등학교 경험을 안해 본 것처럼 모든 것이 낯설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저런 책들을 찾아보고, 지인들에게 경험담을 듣고, 정보들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이번에 만난 책은 22년 동안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온 선생님이 알려주는 '초등학교 공부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해서 매우 기대가 되었다. 초등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아이의 '공부'에 대해 궁금해하는 모든 부모들에게 제시하는 유일한 대답이자 명쾌한 실천법이라고 하니 예비 초등 학부모로서 든든한 마음마저 들었다. 게다가 이 책의 기획 취지가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모든 부모들이 교과서처럼 읽을 수 있는 책이 한 권쯤 있었으면 좋겠다'였다고 하니, 나처럼 아무런 경험이 없는 부모들에게 좋은 가이드가 되어줄 것 같았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책 읽기’가 필요하다.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느냐’보다는 ‘무슨 책을 어떻게 읽었느냐’를 따져야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아이가 읽고 있는 책은 아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할 방향타이자, 그 아이의 가치관을 형성할 지적 자산이다. 아이는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의 깊이와 넒이만큼 사고한다. 내 아이의 미래가 궁금하다면, 아이의 손에 들린 책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자. 아이의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아이의 손에 들린 책을 바꿔주자.    p.200

 

학년과 상황에 따라 적용할 수 있는 22가지 공부 법칙이 각각의 카테고리로 정리되어 있어, 한 눈에 알아보기 쉽고 아이의 나이에 맞춰 그때그때 필요한 부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독서'부터 시작해서, 어휘력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부 정체감이 생겼을 때 극복하는 방법, 개념 원리와 암기의 법칙 등등 실제로 아이의 학습에 도움이 되는 현실 정보들이 가득하다.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공부에도 가성비가 중요하다는 '공부 가성비의 법칙'과 낭독이 묵독을 이긴다는 '낭독의 법칙', 지적 희열을 경험하게 하라는 '유레카의 법칙'등이었다. 집중 학습보다는 분산 학습이 효율성이 높고, 자투리 시간을 잘 활용하게 하는 것이 결국 성인이 되어서도 도움이 된다는 것, 그리고 책을 눈으로 읽는 것보다 소리 내어 읽는 것이 학습 효과가 높다며 소리 내어 읽기 방법이 설명되어 있어 인상적이었다.

 

 

그 외에도 스토리텔링 수학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초등학교 학년별 수학 교과서가 비교 이미지로 수록되어 있어 도움이 되었고, 자기 주도 학습 능력 향상을 위한 계획표 예시,  학년별 추천 고전 목록은 각 학년마다 월별로 책이 수록되어 있어 활용하기 좋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부모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아이의 공부 습관과 성적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부모로서 더 힘을 내야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 물론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22가지 공부 법칙 중에 어떤 점은 잘 맞기도 하고, 어떤 점은 전혀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타고난 기질과 환경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너무 막막한 마음으로 새로운 세상에 첫 발을 내딛게 될 때, 부모에게나 아이에게나 뭔가 가이드를 해주는 책이 있다면 조금은 든든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부모 세대의 공부하는 방법과 시대가 완전히 바뀐 요즘의 공부법은 완전히 다르다. 그러니 초등 6년 내내 곁에 두고 아이의 공부와 생활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때마다 그에 꼭 맞는 해결 방법을 찾아볼 수 있도록 이러한 교과서가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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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가지 물건으로 다시 쓰는 여성 세계사
매기 앤드루스.재니스 로마스 지음, 홍승원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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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이혼 절차 때문에 기혼 여성에게 재산을 소유하고 계약을 체결할 법적 지위가 없었던 시절인 18세기와 19세기 영국에서는 대중적으로 아내를 파는 관행이 생겨났다. 아내 판매는 공공장소에서 이뤄지기도 했고 때로는 신문이나 포스터로 광고되거나 마을 안내원이 소식을 전했다. 18세기의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은 공고를 냈다.
“제 아내 제인 허버드를 5실링에 팝니다. 체격이 건장하고 사지가 튼튼합니다. 씨를 뿌리고 수확하며 쟁기를 들고 팀을 꾸려 일합니다. 입이 걸걸하고 고집이 아주 세기 때문에 고삐를 바짝 죈 그 어느 건장한 남자에게도 말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p.93

 

영국 여성의 참정권 획득 100주년을 기념하여 쓰인 이 책은 여성들의 삶에 영향을 끼쳤거나, 여성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오늘날까지도 여성을 억압하고 있는 물건들을 중심으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발달해온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여성의 역사를 오래도록 연구해 온 두 명의 영국 여성학자가 남다른 시선으로 세심하게 골라낸 여성 생존의 도구와 증거 100가지가 고스란히 '여성의 관점에서 다시 쓰는 세계사'가 된다는 점에 있어서 대단히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너무도 다양한 100가지 물건들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삶을 바꿔온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는 점이 놀랍고도 흥미롭게 읽힌다.

 

사회와 가족은 아내이자 가정주부인 여성에게 수많은 기대를 걸고, 엄청난 양의 충고와 질책, 비난을 해왔다. 목소리를 내면 굴레를 씌웠고, 술을 마신다고 규탄했다. 정말 경악할 만한 것 중의 하나로 '잔소리꾼 굴레'라는 물건이 있었다. 16세기 스코틀랜드, 메리언 레이는 이웃을 간통죄로 고발했다가 다수의 비방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녀는 '문제적인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고소인들의 용서를 구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24시간 동안 '일체의 휴식 없이' 입을 막는 굴레를 채우는 고문을 받아야 했다. 묵직한 쇠틀로 만들어진 이 장치는 피해자의 머리 위로 뒤집어 써 칼라처럼 목둘레에 걸치는 방식이었는데, 책에 수록된 사진만 보더라도 매우 충격적이다. 당시 가부장적인 기대치를 벗어나 불손하거나, 제멋대로 말하는 여성이나, 통상적인 여성의 관념에 도전하는 여성에게 잔소리꾼이라는 터무니없는 꼬리표가 붙었고, 이 장치는 바로 그 '잔소리'에 대한 처벌이었던 것이다. 이 굴레는 18세기까지도 계속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남아 있으므로, 여성들은 거의 200년 동안이나 잔소리꾼 굴레로 침묵을 강요당해 온 것이다. 이는 현대의 여성 혐오 표현들과도 이어지는 충격적인 역사의 잔존물이다.

 

 

이날 백인들의 좌석은 모두 차 있었다. 로자는 '유색인' 구역 맨 앞줄에 앉아있었는데 한 백인 남성이 버스에 올랐다. 버스기사는 백인 남성이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로자가 앉아있는 열에 있는 모든 흑인 승객들에게 뒤로 자리를 옮기라고 했다. 세 명의 흑인 승객이 버스기사의 지시에 따랐지만 로자는 거절했다. 그는 나중에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항상 내가 피곤해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신체적으로 지쳐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단지 굴복하는 것에 지쳐있을 뿐이었다."    p.430

 

18세기와 19세기, 기혼 여성에게 계약을 체결할 지위가 없던 시절 이혼의 수단이었던 아내 판매 광고에 대한 내용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물론 아내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가난한 계층에게는 아내 판매가 일종의 이혼으로 여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 이후부터는 여러 나라에서 이혼 절차가 한결 간편해졌고, 20세기 후반에는 좀 더 자유로운 이혼법이 도입되었으나 여전히 이혼에 따른 재산과 소득의 분할은 여성들에게 재정적인 불이익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도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100가지 물건들은 여성의 몸, 사회적 역할의 변화, 기술의 진보, 미의식과 소통, 노동과 문화, 정치 등 총 여덟 가지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여성사의 전말을 담아내고 있다. 여성이 자유롭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대의를 주장했음을 알려주는 작품들, 불의와 억압에 대한 투지를 보여주는 상징들은 안타까우면서도 뭉클했고, 여성이 도움을 받거나 직접 그 발달에 기여한 기술들, 즐거움이었지만 억압의 대상이기도 했던 의생활의 아이템들은 그 속에 담겨 있는 서사 자체가 역사와 세계사를 관통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여성들은 너무나 자주 잊히는 현실 속에서도 통치자로서, 과학자로서, 창조적인 재주꾼들로서 자기 자신의 역사뿐 아니라 모두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이 책을 통해서 항상 '역사에서 가려져' 있었던 여성의 역사가 얼마나 매혹적일 수 있는지, 그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발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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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장례식 제제의 그림책
마리에 오스카손.지바 라구나트 지음, 로스 키네어드 그림, 김경희 옮김 / 제제의숲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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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길에서 지렁이를 발견한다. 움직이지 않는 지렁이를 보고 아이들은 죽었다고 생각해 장례식을 치러 주기로 한다.

 

노래는 내가 부를게! 나도 할래. 아냐, 내가 할 거야. 내 목소리가 더 커!
좋아, 그럼 다 같이 부르자.

 

겨우 노래 부르는 것부터 서로 자기가 부르겠다고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은 과연 지렁이의 장례식을 제대로 치러줄 수 있을까.

 

 

각자 지렁이를 위해 불러주는 노래도 제각각, 지렁이를 나뭇잎 위에 올려두다가 떨어뜨리기도 하고, 땅을 파는 것도 익숙지가 않다. 엄숙하고 슬픈 장례식이 아니라, 그저 재미있고 색다른 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장례식이라는 절차가 이제 다시는 상대를 볼 수 없게 되는 거라는 걸 아이들이 인지하고 있어, 지렁이를 위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각자 지렁이를 위해 한마디씩 남기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이 책은 '죽음'이라는 것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경쾌하고 발랄하게 다루고 있다. 아이들 버전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인 셈이다. 아이들은 땅 속에 묻힌 지렁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해한다.

 

그럼 이제 뼈만 남는 거야?
내일 가서 파 보면 알겠지, 뭐!

 

아이다운 순수함이 잘 드러나 있는 장면이라 피식 웃음이 나오지만, 사실 죽음 이후의 일에 대해 궁금한 건 어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올해 일곱 살이 된 아이가 어느 날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극중 캐릭터가 죽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아이도 벌써 '죽음'이라는 것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기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이 작품은 죽음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으면서도, 아이들이 읽기에 전혀 슬프거나 어두운 내용 없이 밝게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어서 참 좋았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고 말이다. 게다가 마지막에 깜찍한 반전도 숨겨져 있어 아이들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강렬하고 선명한 색감과 단순한 그림체 속에서 개성 있고 장난기 넘치는 캐릭터들의 모습이 친근하면서도 흥미롭게 다가오는 작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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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미의 시방상담소 - 뭣 같은 세상, 대신 욕해드립니다
김수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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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사람 별로 없어. 직장 생활 하는 사람 80퍼센트가 지금 다니는 회사 적성에 맞느냐고 물어보면 다 안맞는다고 그래. 죽지 못해 다닌다 그래. 이 사람들도 다 꿈이 있었어. 누구는 선생님 되고 싶었고, 누구는 가수가 되고 싶었어. 그 사람들은 아마 한번 포기한 꿈 이루려면 정말 힘들 거야. 나이 먹을수록 꿈에서 멀어질 거야. 그래서 마흔을 어느 소설에서는 '다시는 열 수 없는 문을 닫고 돌아서는 나이'라고 했어. 포기 못하고 내내 붙잡고 있던 걸 놓는 나이거든.     p.88

 

<시방 상담소>는 네이버 오디오클립에서 연재된 오디오 방송으로 욕쟁이 상담가 김수미가 10대부터 50대까지 일반 청취자를 대상으로 진로, 가족, 인간관계, 금전, 사랑 등 다양한 주제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방송이다. 이 책은 고민 키워드를 나, 일(직장), 가족, 인간관계, 돈, 사랑으로 정리하고, 방송에서 다 전하지 못한 저자의 쌍욕, 조언, 위로를 담고 있다.

 

 

한때 '욕쟁이 할머니'라는 컨셉으로 유명해진 식당들이 있기도 했는데, 겉모습은 불친절하지만 그 속에 할머니 특유의 친근함이나 유머가 있어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김수미 배우님도 '국민 욕쟁이'라는 호칭을 얻고 있을 정도로, 속 시원하게 가식 없이 이야기하는 걸로 유명하다. '뭔 같은 세상, 대신 욕해드립니다."라는 표지 문구처럼, 살다 보면 정말 나도 모르게 '식빵'이 튀어나오는 경우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세상의 모든 못된 것들을 향해, 사회의 온갖 부당한 처사들을 향해 정신이 번쩍 드는 욕 한 사발의 일침을 가해준다면 누구라도 속이 시원해질 것 같다. 게다가 인생 경력 71년, 결혼 생활 47년 차에 20년간 안방극장을 지켜온 배우이자 그만큼의 세월을 살아온 어른의 조언 아닌가. 그저 손맛이 좋아 요리 잘하는 배우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이를 허투루 먹지 않은 '진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마음이 그래. 다치는 일이 많다 보니 힘들고 어려울 땐 반사적으로 가시를 세운다고. 근데 그러다 가까운 사람을 무시로 찌를 수도 있어. 베프라며. 너희들 말로 베스트 프렌드. 상황이 베드할 때 함께 하는 게 베스트 아니야? 욱하는 마음에 제일 좋은 걸 잃지 마. 살다 보면 누구나 인생에 힘든 시기가 와. 경제적으로든 심적으로든. 힘든 시기가 제일 지랄맞은 건 그때 좋은 걸 많이 잃게 되는데, 뭘 잃어버리는지 당시엔 모른다는 거야.    p.234~235

 

'욕 반, 위로 반'이라는 김수미표 고민 상담은 다양한 고민의 종류만큼이나 버라이어티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나를 가난하게 만드는 건 세상에 무궁무진하지만, 나를 부자로 만들 수 있는 건 나 하나뿐이다.' '실수는 나쁜 게 아니다. 하지만 실수를 숨기면 나빠진다.' 라는 인생을 오래 살아본 선배로서의 깊이 있는 조언부터, 직장 상사가 성추행을 문자로 한다는 고민에 '내가 찾아갈게, 이 새끼 진짜 가만 안 둬.' 로 시작되는 함께 분노하기, 마흔 두 살 가장이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할 때 '다들 꿈꾸라고 말하는 시절에 정말 미안하지만, 그 꿈 접으라고, 일단 생계가 먼저'라고 냉정할 정도로 현실적인 문제를 똑 부러지게 짚어주기도 한다.

 

 

거침없이 욕하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혼내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말들이 가볍지 않고 진심으로 들린다는 점이 가장 놀라웠다. 고운 말, 예쁜 말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직설적으로 툭툭 내뱉지만 그 안에 감동이 있고, 너무도 진지한 상황에서도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는다. 누군가 날 엿 먹일 때는 이렇게 생각해보자. 내가 더 크라고, 단단해지라고, 강해지라고 세상이 주는 선물이라고, 다 경험이라고. 그런데 이미 충분히 크고 단단하고 강하다면, 니미 염병할 선물이고 뭐고 누가 달랬냐, 보란 듯이 걷어차고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이게 바로 김수미표 고민 해결 방법이다. 

 

들어줄 사람이 없어 더 앓는 지금 세대를 보고 내 평생 꼭 한 번은 고민 상담소를 열고 싶었노라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묻는다. “뭐든 혼자 하는 시대에도 그래, 그래, 하고 다 들어주는 사람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 그러니까. 말해봐, 뭔데?” 그래서 고민 상담을 하자니 “못하겠어요” 하면 “하지 마, 관 둬!” 하고 “힘들어요” 하면 “그럼 망하세요”라고 하지만, 그 속에 '어른의 지혜'가 담겨 있다. 뻔한 위로나 명언 말고, 진짜 고민 해결법과 위로가 필요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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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아내
A.S.A. 해리슨 지음, 박현주 옮김 / 엘릭시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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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착실한 남자란 신화 속 인물이나 다름없어. 생물학적으로 남자들은 포식 동물이야."
"그 얘기 좀 더 해봐." 앨리슨이 재촉한다.
˝여자들은 자기 남자가 실제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 하거든.˝ 조디가 덧붙인다. ˝남자들을 위해 대신 변명해주지. 큰 그림을 못 봐. 한 번에 조금씩만 볼 뿐. 그래서 남자들이 실제만큼 나빠 보이질 않는 거야.˝    p.122~123

 

심리상담사로 일하는 조디 브렛과 건축 사업을 하는 토드 길버트는 이십 년간 부부 생활을 이어 왔다. 하지만 토드는 습관적으로 외도를 해왔고, 그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그녀도 알며, 그녀가 안다는 사실을 그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부부의 관계는 평온하고, 안정적인 상태였다. '사실이 공공연히 선언되지 않는 한, 토드가 완곡어법과 우회적 표현으로 말하는 한, 그들은 지금까지의 삶을 계속할 수 있었다. 토드는 결국 자기 자리로 돌아왔고, 조디는 언제나 용서했다. 참 이상하기 그지없는 부부 관계가 아닐 수 없다. 남편이 습관적으로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고 있지만 대놓고 비난하지 않는 아내와 끊임없이 다른 여자를 만나면서도 아내에게 그다지 불만도 없고, 그녀를 떠나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남편, 대체 어떻게 이십 년 동안이나 부부로 살아온 건지 이해가 안 되지만 어쩌면 바로 그게 현실 부부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삶이 불완전하기는 해도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무한히 계속되리라 여기면서, 그저 평범한 일상사에 집중하며 순간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야기는 '그 여자', '그 남자'라는 챕터로 조디와 토드의 시각으로 교차 진행된다. 가정이 주는 안정감과 불륜이 주는 짜릿함이 모두 필요한 남자와 남편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든 현재의 평온한 삶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여자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조디는 아들러 연구자로서 다양한 성향을 가진 내담자들과 오랜 시간 심리상담을 해왔다. 덕분에 그녀는 남편의 거짓말을 눈치챘고, 그의 사고방식까지도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가정의 평안을 위해 침묵을 선택했던 그녀, 아름답고 헌신적인 아내는 어떻게 살인자로 돌변하게 되는 것일까. 대체 이들 부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십 년 동안이나 자신의 생활 방식이 안전하다 믿고 살았는데, 지금 알고 보니 그동안 줄곧 실 한 오라기에 매달려 있는 꼴이었다. 토드와 함께 살기 시작한 이래로 그녀는 망상에 빠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 밖에 다르게 생각할 길은 없다. 그녀는 거짓된 전제, 소망이 만들어낸 생각 위헤 자신의 삶을 쌓아왔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p.272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가끔 우리를 완벽하게 배신하곤 한다. 무려 이십 년 동안 함께 살았던 남편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하리라고 조디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름으로 인해 아내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걸 토드 역시 짐작도 못했을 테고 말이다. 분명 두 사람도 처음에는 설레이는 감정을 느꼈고, 서로 사랑했고, 함께 있으면서 안정감과 평온을 안겨주는 상대라고 생각했을 텐데 말이다. 토드는 조디가 자신에게 갖는 기대에 맞추어 살고 싶은 마음이었고,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고 싶어 했다. 조디는 그의 성공과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약속을 실천하고 꿈의 영역을 걸어가는 모습에 감탄했었다. 그녀에게 그는 사랑과 헌신이 아깝지 않은 너무도 소중한 존재였고, 그는 그녀를 한 남자가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이자 그 이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랬던 마음이, 사랑이, 감정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왜 토드는 딸 같은 어린 여자를 임신시키고 조디를 떠나려고 했을까. 왜 조디는 그의 수많은 잘못을 용서해왔음에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걸까.

 

이 작품은 배신과 복수에 대한 서사보다 이들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 그 배경에 더 집중하고 있다. 아내와 남편 각자의 일상과 어린 시절, 대학시절 등 전반적인 삶에 대해 그리며 내면 속으로 점차 깊이 있게 파고든다. 이 작품은 캐나다 작가 A.S.A. 해리슨의 데뷔작이자 유고작으로 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했던 작가가 '등장인물이 자기 감정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 주변 환경에 대한 서술을 통해 인물의 감정적 변화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쓴 가정 스릴러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동안 만나왔던 가정 스릴러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서사를 이끌어 가고 있는데, '조용한 아내'라는 제목처럼 전반적으로 흐름이 잔잔하게 고여 있는 호수처럼 가만 가만하게 진행된다. 그럼에도 전혀 지루하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급격한 변화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단계적으로 몇 날 몇 주에 거쳐 점진적으로 일어나게 마련이니 말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 수면 밑에서 조용하게, 차곡차곡 쌓여온 감정들이 파도가 되어 페이지 바깥으로 밀려 오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고, 이 작품의 진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제대로 발휘된다. 니콜 키드먼 주연으로 영화화가 확정되었다고 하니, 스크린에서 펼쳐질 이야기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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