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휴식과 이완의 해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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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연약하고 찰나이며 사람은 물론 조심하며 살아야 하지만, 나는 온종일 자는 생활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죽음을 감수할 참이었다. 그리고 나는 영리하니까, 약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미리 감지할 거라고 판단했다. 심장이 멈추거나, 혹은 뇌가 터지든 출혈을 일으키든 7층 창문 밖으로 떨어지라고 날 조종하든,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예고성 악몽을 꾸기 시작할 거라고. 온종일 잘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잘 돌아갈 거라고 믿었다.    p.41~42

 

사람들이 소설이라는 허구의 이야기를 읽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그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어떤 때일까. 아마도 극중 인물에게 '감정 이입'해서 '공감'하거나 '위로'받거나 혹은 '이해'하고 싶어졌을 때일 것이다. 그래서 비호감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의 경우, 독자 입장에서 그 작품을 좋아하기란 매우 쉬운 일이 아니다. 오테사 모시페그의 두 작품, <아일린>과 <내 휴식과 이완의 해> 모두 '비호감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스물 넷의 아일린은 옷차림도 보수적이었고 겉으론 조용하며 누구에게도 싫다고 말하지 못했지만, 항상 격분했고 부글부글 끓었으며 자기혐오로 똘똘 뭉친 소심한 성격에 야한 상상과 독특한 망상을 즐기는 여성이었다. 자기혐오와 망상으로 점철된 젊은 날을 통과해온 아일린의 삶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전개되었던 <아일린>은 나이든 아일린의 여유와 유머 깃든 통찰이 젊은 아일린의 불균형과 미성숙을 어느 정도 견딜 만 하게 만들어주었던 작품이었다. 그에 비해 <내 휴식과 이완의 해>에는 더 좋아하기 힘든 주인공이 등장한다.

 

스물 여섯의 주인공 ‘나’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고, 명문대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직장에서 해고 당했고, 현재는 직업이 없다. 하지만 부모의 유산 덕분에 고급 아파트에서 지냈고, 예금 계좌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이삼 년은 충분히 살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날씬하고 아름다웠다. 매일같이 지저분하고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돌아다녀도, 일주일에 겨우 한 번 씻고, 머리 빗기도 그만두었고 아파트에서 나가는 일도 드물었다. 모든 공과금은 자동납부로 처리했고, 재산세도 일 년 치를 미리 냈고, 약이 더 필요할 때만 잠깐 외출할 뿐이었다. 온갖 종류의 약을 하루에 열두 알도 넘게 먹었고, 술에 절어 지냈고, 무기력한 게으름뱅이가 되어 가고 있었던 그녀는 1년간 ‘동면’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동물이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사람이 일 년 동안 잠을 자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창밖으로 어두워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리에 낀 먼지를 문질러 닦아내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먼지가 창 반대쪽에 들러 붙어 있었다. 완전히 헐벗은 나무들이 흐릿한 눈송이들을 배경으로 까맣게 보였다. 이스트강은 잠잠하고 컴컴했다. 퀸스 지역 위로 하늘이 컴컴하고 무거워 보였고, 깜빡이는 노란 불빛의 장막이 끝없이 펼쳐졌다. 하늘에 별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볼 수는 없었다... 저멀리서 사람들은 삶을 살고 즐기고 배우고 돈을 벌고 싸우고 걸어다니고 사랑에 빠졌다가 이별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쓰러져 죽고 있었다.    p.131~132

 

자, 그렇다면 우리의 주인공이 '동면'이라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현실적으로 구현할 방법은 이렇다. 한 알로 무의식 상태를 사흘간 지속할 수 있는 인페르미테롤이라는 약을 충분히 모은다. 이 약만 있다면 밖에 나가 어떤 일에든 연루될 두려움 없이 중단 없는 잠 속에서 살 수 있었다. 지독한 불면의 고통과 빌어먹을 실패한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되는 셈이다. 그녀는 약을 먹고 사흘에 한 번씩 깨어나 달력을 보고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 목욕 등등을 하며, 매번 한 시간 동안만 깨어 있을 계획이었다. 그렇게 약에 의지해 몇 달을 통째로 망각 속에 흘려 보내고 나면,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혔던 온갖 기억과 상처, 사람에 대한 혐오와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시작부터 비호감 여주인공의 심리와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리고 있어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여주인공뿐만 아니라 그녀 주변 인물들이 모두 어딘가 뒤틀리고 병적인 면모가 가득해 이상하기 그지 없었다. 각자의 문제에 사로잡혀 자식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던 부모부터, 유일한 친구인 리바는 욕망과 질투의 화신이고, 전 남자친구인 월가 금융인 트레버는 비뚤어진 성의식을 가졌고, 약을 처방해주는 정신과 의사 닥터 터틀은 윤리 의식이라곤 찾기 힘들만큼 황당한 인물이었다. 그 와중에 주인공은 전 남자친구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 이상한 소리를 늘어 놓으며 집착을 해대고, 예쁜 외모임에도 늘 다이어트에 매달리는 유일한 친구 역시 숭배와 질투를 오가며 평범하지 않은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읽는 동안 페이지는 더디게 넘어 가고, 감정 이입이나 공감할만한 대목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어느 순간부터 사회 부적응자처럼 느껴지는 주인공의 어둡고 뒤틀린 면들이 안타깝고 애처롭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녀가 세상과 사람들을 싫어하게 된 것이, 내면이 죽어버린 것처럼 염세와 절망 어린 나날을 보내게 된 것이 어떤 면에서는 당연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멸 나는 현실에서 벗어나 잠을 자기로 결심한 것이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한 일종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즈음이면, 부디 그녀가 일 년간 원하는 만큼 자고 나서 새 삶을 살 수 있기를, 과거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그리고 이 휴식과 이완의 해를 통해서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 너무도 끔찍할 때, 당신은 눈을 뜰 것인가, 감을 것인가. 이 작품은 바로 그것에 대한 매력적인 블랙코미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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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알렉스에게 - 내 모든 연민을 담아 알마 인코그니타
올리비아 드 랑베르트리 지음, 양영란 옮김 / 알마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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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을 보세주르 대로의 널찍한 대형 아파트에 감춰진 블랙박스, 혹은 물건들이 신기하게 사라져버릴 때마다 우리끼리 쓰던 표현대로 “구멍”에서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부모님이 원해서 태어난 자식들이고, 귀염받고 자랐으며, 사랑받았다. 오해와 서투름은 모든 부모 자식 관계에 내재하며, 그것이 모든 걸 설명해줄 순 없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p.67

 

인생은 한 순간에 변한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전조도 없이, 우리가 알고 있던 인생이 멈춰버리기도 한다. 2015년 10월 14일, 내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알렉스는 신원 확인이 쉽도록 배낭 속에 신분증을 넣고, 몬트리올의 자크-카르티에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경찰이 늦은 오후에 집으로 찾아와 가족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고, 밤새 연락이 안 되었던 나는 다음날 아침에야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견디기 힘든 묵직한 무게가 결국 이겼다. 살아간다는 것이 내 동생을 죽였다. 내 동생, 그애는 마침내 행복해졌을까? 나는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감정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알렉스가 없는 삶, 내가 그토록 좋아하고, 좋아하는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마저도 좋아하게 만들어준 동생이 빠진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고, 회사에 나가 일을 해야 하고, 내 감정과 상관없이 세상은 돌아가고, 일상은 이어진다. 하지만 과연,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루를 살아낼 수 있을까.

 

알렉스는 부족함없이 사랑을 받으며 자랐지만, 늘 진짜 삶을 갈구하며 절망의 나락에서 허우적거렸다. 동생의 병명은 '기분부전증'으로 우울증의 하나로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경미하긴 하지만, 오랜 기간 지속되고 특별한 치료법이 없다는 점 때문에 평생 시달리는 고질병이 될 수도 있는 골치 아픈 병이다. 동생은 그로 인해 자신의 감정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술로 위로 받다가 요양병원에 입원하고, 행동으로 넘어가 정신병원에 들어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애는 그곳에서 잘 지낸다고 말했었고, 괜찮아지려고 했었다.

 

 

찬란했던 어제는 이제 흔들어주기만 하면 플라스틱 눈이 펑펑 내리는 공 모양의 기념품 속에서 잠잔다. 나는 언젠가 다시금 그 추억과 낭랑한 웃음소리를 흔들어서 불러내고 싶다. 그것들이 자크-카르티에 다리의 그림자로 뒤덮여 암전되기 전이라야 좋겠지.    p.249

 

사람들은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하면서 죽음이라는 사건이 지니는 거대한 비극을 지워버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저자는 사람들이 약간의 공감을 보태 입 밖으로 토해내는 상투어의 향연과 의미 없는 말의 나열이 싫었다. "다 지나갈 거야."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런데 다 지나가지 않는다면? 그녀는 동생의 죽음을 이해하고 싶었고, 죽은 자들을 배반하지 않으면서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동생을 기리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 애가 희생자인 동시에 죄인인 끔찍한 범죄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백지에 그 애의 빛나는 미소와 마지막 절규를 박아 넣기 위해서.

 

가족의 예기치 못한 죽음, 그리고 그것이 촉발시킨 부채감과 죄책감은 남겨진 이들의 몫이다. 남겨진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죽음이 휩쓸고 지나간 뒤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 혹은 지독하고, 집요한 상실의 슬픔과 애도를 그리고 있는 책들은 생각보다 많다. 사람들은 말로는 할 수 없었던 것을 표현하기 위해, 마음속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것들을 풀어주기 위해 글을 쓰곤 하니 말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동생의 삶을 연장하고, 자신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한다. 저자는 숨 쉬듯이 책을 읽으며 살아온 문학비평가이자 <엘르>의 부편집인이다. 수많은 서평과 칼럼을 쓰고, 더 많은 책과 온갖 글을 읽어왔지만, 자신의 책을 쓴 것인 이 책이 처음이다. '이제 너의 책을 써봐'라고 조언했던 남동생의 말에 기대어, 그 애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다시 살아나갈 용기를 얻기 위해서. 비탄을 음울하지 않게, 슬픔을 과장하지 않고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는 아름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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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0-04-02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오나님 책사진도 늘 참 이뻐요 ^^

피오나 2020-04-03 00:44   좋아요 0 | URL
ㅎㅎ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식당 오가와 - 오가와 이토 에세이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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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향하는 것은 틈.
시간에도, 공간에도, 인간관계에도 틈을 만들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생각 없이 살다 보면 물건은 계속 늘어나니 의식해서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필요 없는 물건은 손에 넣지 않는다, 집에 들이지 않는다, 인생에 덧붙이지 않는다, 이런 의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p.25

 

이 책은 오가와 이토가 <츠바키 문구점>을 집필하던 당시 자신의 블로그에 기록한 1년간의 일기를 담고 있는 에세이이다. 주인공 포포가 이웃들과 일상을 보내며 대필가로서의 가업을 이어가는 모습을 소소하게 그렸던 <츠바키 문구점>과 <반짝반짝 공화국>을 참 따뜻하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름다운 손편지로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을 대신 전해주는 가슴 뭉클한 기적을 보여줬었는데, 포포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그들과 사계절을 지내면서 다양한 음식들이 등장해서 더 재미있게 읽었었다.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우동, 봄을 농축한 것 같은 상큼한 향의 쑥 삶는 냄새, 식후 산책 길에 먹는 시원하고 달콤한 수제 젤라토의 맛 등등... 음식과 맛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서 실제 작가도 그런 일상을 보내지 않을까 했었다.

 

이번 에세이에서 그녀의 일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음식들이 소소하지만, 풍요로운 힐링을 전해준다. 추운 날엔 마음까지 뜨끈해지는 그라탕을, 봄이 되면 미나리를 듬뿍 넣은 샤부샤부를, 혼자 있는 밤엔 안주를 곁들여 레드와인을 즐기는 평범한 일상들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내는 보통날의 기적이 펼쳐진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츠바키 문구점>의 포포도, <달팽이 식당>의 링고에게도 작가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실 지금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결단을 내려야 할 일과 마주하고 있다. 평소에는 피해서 지나온 ‘뜻대로 되지 않는 일’. 판단을 잘못하면 앞으로 인생이 장기간에 걸쳐 괴로워질 것 같다. 솔직히 지금도 사라지고 싶을 정도로 괴롭지만. 그러나 이럴 때 가야 할 길의 지표가 되어준 것이 라트비아 십계명과 무히카 씨의 말이다. 어쨌든 나는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아가고 싶다. 아무리 진흙탕에 발을 담그고 있어도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을 살고 싶다. 그걸 깨달아서 너무 좋다.   p.57

 

삶은 유리네를 바싹 구워서 올리브오일을 넉넉히 뿌리고 트뤼프 소금을 살짝 뿌려 만드는 뇨키, 겨울철의 별미인 말린 도미로 만드는 감자 도미 그라탱, 산에서 따온 미나리와 크레송, 땅두릅이 들어간 봄의 샤부샤부, 춘권피에 새우와 연근을 넣고 가늘게 말아서 기름에 튀긴 시가렛, 밤을 통째로 넣고, 청주와 소금으로 간을 한 뒤, 마지막에 참기름을 둘러서 먹는 밤밥, 감자를 오븐에 굽고, 돼지고기를 직접 두드려 다져서 만드는 크로켓 등등.. 가족과 자신을 위해 부지런히 만들고, 먹는 소소한 일상의 풍경들이 그려져 있다. 그런 날들 속에서 오가와 이토는 곧 출간될 책의 교정을 보고, 사인을 잘하기 위해 손글씨 연습도 하고, 대만으로 여행도 다녀오고, 강아지 유리네에게 간식도 주고, 이메일 대신 전용 만년필로 정성 들여 손편지도 쓴다. 그녀는 매해 반년쯤 독일에 체류하는데, 그곳의 생활양식과 문화에 대해서, 그리고 베를린에 대한 애정 가득한 이야기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섬세하고 따뜻한 오가와 이토의 소설들처럼, 자신의 일상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는 이 에세이를 통해 느껴지는 감정 또한 작품을 닮은 온기가 가득하다. 사십 대 후반의 작가가 가지고 있는 소녀 감성도 참 예쁘게 느껴져서 읽는 내내 미소 짓게 되고, 삶을 대하는 태도와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무언가를 요리하는 것이 그녀가 삶을 사랑하는 방식 중 하나인데, 햇살 가득한 풍경 속에 서 있는 듯한 건강한 느낌이 페이지마다 묻어 있어서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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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세상의 봄 상.하 세트 - 전2권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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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절실한 목적이나 필요가 있으면 어떤 식으로나 바뀔 수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로. 어른이 아이로.
"사령의 빙의 따위는 그와 관계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원래 한 사람에게 하나 있는 마음이 여러 개 있는 것처럼, 한 사람 안에 다른 사람이 몇 명 있는 것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불과합니다."      -상권, p.252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을 처음 만났던 것이 2005년에 국내 출간되었던 <이유>였으니, 벌써 15년이나 지났다. 오랜 시간에 걸쳐 전작을 찾아 읽었던 작가라 그런지, 이번 작품은 더욱 의미가 있다. 이번 신작은 미야베 미유키가 등단 30주년을 맞는 해에 발표한 81번째 작품으로 900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대작이다. 시대소설에서는 드문 정신 착란, 연쇄살인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작품으로, 어떻게든 살아내면 봄은 꼭 찾아온다는 의미를 담아 제목을 ‘세상의 봄’이라 붙였다고 한다. 에도시대 가상의 작은 번을 무대로, 정신착란을 이유로 연금된 청년 번주와 그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애틋한 충정과 사랑을 담고 있는 이 이야기는 발표 즉시 ‘소설사에 유례없는 작품’ ‘21세기 최강의 사이코&미스터리’라는 극찬을 받았다고 하니 더 기대가 되었다.

 

 

다키는 열일곱 살의 나이로 혼례를 올렸지만, 시어머니의 폭력과 괴롭힘으로 삼 년이 못 돼서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토목청 감독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은거소로 거처를 옮기고, 오빠가 아버지의 뒤를 잇고 아내를 맞이해 자식을 두었다. 누구에게나 환경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게 마련이었다. 원하는 방향으로나, 원치 않는 방향으로나,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간에 말이다. 그렇게 변덕스럽고 잔인한 운명은 다키 처럼 하찮은 한 여자에게도, 촉망 받던 청년 군주에게도 평등하게 찾아 들었다. 기타미 번 6대 번주 시게오키가 중병으로 인해 은거하게 되고, 7대 번주로 그의 사촌이 오르게 된 것이다. 게다가 시게오키의 병환이라는 것이 너무도 기이해서, 모두가 쉬쉬하는 가운데 그가 실성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간다.

 

 

다들 사람이 좋아서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준다. 기타미 번은 윤택하지는 않지만 영민의 마음은 윤택하고 따뜻하다. 그런 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며 번을 위해서는 불가피하다고 말한다면. 비애와 노여움에 먹먹해진 가슴에 먹물을 떨어뜨린 것처럼 검은 불안이 번졌다. 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나는 정말로 올바른 일을 할 수 있을까. 사람은 보이지 않는 널따란 가을철 목장을 둘러보며 한주로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권, p.162

 

호숫가에 절이나 신사처럼 엄숙하게 기와지붕을 이고 고요히 선 저택 고코인, 시게오키는 그곳 저택의 호화로운 병풍과 장식으로 치장된 방에 이중으로 잠겨있는 창살로 둘러싸여 요양 중이다. 꽃처럼 아름다운 외모의 청년 시게오키는 천진한 소년이었다가, 교태 부리는 여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흉포한 사내로 혼란과 착란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다키는 아버지가 돌아 가신 후, 고코인에서 시게오키의 시중을 들게 된다. 다키가 그곳에 가게 된 이유는 그녀의 어머니가 미타마쿠리라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일족이었기 때문이다. 미타마쿠리는 인간의 영혼을 조종해 그것과 의사소통하는 기술로 현재는 거의 사용하는 이들이 없었다. 과연 다키는 자아를 잃어버리고 종종 다른 사람이 되고는 정신이 들면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시게오키의 증상을 개선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코인의 저택 관리인과 주치의, 하인 등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과 함께 다키는 시게오키를 가두고 있는 어둠의 심연에 조금씩 다가간다.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악의는  소년 연쇄 실종사건, 쿠리야 일족 몰살사건 등으로 이어지며 두툼한 페이지만큼이나 밀도 있는 서사를 만들어 낸다.

 

 

미야베 미유키의 기존 작품들에 비해서는 가독성이 높은 이야기는 아니라서, 초반에 진도가 잘 안 나가는 편이긴 했다. 시대물임에도 불구하고 연쇄 살인과 정신 착란 등의 현대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있어서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워낙 서사 자체가 느리게 진행되는 편이고, 과거와 배경 설명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고 있어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하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상권의 중반 정도까지만 잘 따라가면 어느새 캐릭터 각자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미스터리는 물론, 드라마로서도 흡입력 있는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었고, 제목과 표지 이미지에서 묻어나듯 해피 엔딩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라서 미야베 미유키 특유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상큼한 빛깔의 겉표지를 벗겨내면 만날 수 있는 속표지의 이미지가 고스란히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해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결코 적지 않은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배경과 성격이 세심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는 그녀가 어떤 주제를 다루더라도 인간 본질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 작가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극중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알기 쉽고 이해하기 쉽고 납득하기 쉽다는 이유만으로 결론을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런 식으로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게 아닙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가 이 작품을 긴 호흡으로,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뷔 30주년을 넘어 더 오랜 시간 동안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오랜 독자로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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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리딩을 위한 워드 파워 30일
노먼 루이스.윌프레드 펑크 지음, 강주헌 옮김 / 윌북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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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어휘학계의 두 거장이 만들어낸 '어원 중심 영단어 학습서의 고전'이다.  1942년 출간 이래 80년이 지난 지금도 GRE, GMAT, TOEFL 각종 수험생들의 필독서로 꼽히며, '고급 영단어 학습서의 바이블'로 통하며 널리 읽히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어원 연구의 데일 카네기’라는 평가를 받는 노먼 루이스와 ‘당대 가장 지적인 사전편찬자’로 명성 높은 윌프레드 펑크이다. 이들은 평생 영단어의 역사와 어원을 연구해 '가장 효과적인 어휘력 확장 학습법'을 고안해냈다.

 

사실 어원 학습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이유가, 여러 파생단어의 원리를 이해하면서 나중에 낯선 단어를 만나더라도 뜻을 유추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데 있다. 하나의 단어에 대한 배경과 스토리를 읽는 것만으로도, 단어 암기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도 이 책만의 장점일 것이다. 무엇보다 아무 맥락 없이 단어와 뜻만 달달 외우는 것은 성인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 학창시절 이후 이런 식의 암기는 거의 해본 적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머리가 굳었다는 핑계로 더욱 영어 공부에서 멀어지곤 하는데, 이런 방식의 영단어 공부라면 무엇보다 성인들이 재미있고, 효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이 책은 레벨테스트, 24개의 강의, 5개의 테스트로 이루어진 30일 간의 프로그램을 담고 있다. 평균 한달 반에서 세 달이면 독파할 수 있는 코스로 구성되어 있어, 체계적으로 영단어 공부를 하고 싶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어원과 토픽이라는 두 가지 범주로 단어를 덩어리로 묶어 주제어들을 개념 중심으로 설명한 후 다양한 연습문제를 풀면서 영단어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원문을 100% 수록하여 원서를 읽는 효과도 누릴 수 있는데, 각각의 단어마다 원문을 먼저 읽고, 한글로 두 번째 읽으면서 자연스레 반복 학습을 할 수 있다. 먼저 나왔던 <워드 파워 메이드 이지>가 교양 영단어의 개념과 원리를 강의식으로 풀어 쓴 입문편이라면 이 책은 그의 요약 실전편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하루 한두 시간만, 딱 30일 동안 집중하는 걸로 최고 난이도의 고급 영단어 300여개를 습득할 수 있는 책이니 말이다.

 

 

누구나 가장 많이 결심하고 실패하는 것이 다이어트와 영어 공부가 아닐까 싶다. 다이어트도 그렇지만, 영어 공부도 너무 다양한 책과 방법들이 있어서 자신에게 딱 맞는 걸 찾기가 어렵다는 데에 실패의 원인이 있을 것이다. 물론 작심한 것을 꾸준히 지켜내지 못하는 끈기와 노력도 문제겠지만 말이다. 특히나 영어 공부는 강의도, 책도 시중에 너무 많아서 대체 뭘 골라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가장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에게 검증 받아온 이런 책이 아닐까 싶다. 물론 고급 영단어들이라 시작할 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학창 시절에 꽤 오랫동안 영어 공부를 해왔다. 학창 시절 이후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20대 중반부터는 어휘력 향상이 멈추게 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게다가 이제 단어를 무작정 암기하는 방법은 우리에게 별다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책이 필요한 것이다.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만 달랑 제시하여 무조건 달달 외우는 방식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특정 시험에만 통용되는 영단어가 아닌 실제 현지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을 공부하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언어 천재들이 만든 최고의 영단어 학습서답게 그 명성에 걸 맞는 효과를 보여줄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커리큘럼에 따라 성실하게 학습해나가면서 노력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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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03-29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너무 좋은 책 소개 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어책 찾고 있었어요 ~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