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걷는 밤 - 나에게 안부를 묻는 시간
유희열.카카오엔터테인먼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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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각에 밤길로 나선 이들이 제법 많다. 혼자 걷는 사람, 같이 걷는 사람, 가볍게 조깅하는 사람, 아빠가 끌어주는 킥보드에 앉아서 한껏 신난 아이, 주인이 잠깐 자리를 비운 벤치에서 의젓하게 기다리는 강아지... 여행을 갈 수도 없고 누군가를 만나기도 어려운 시대에 이런 산책은 조금이나마 우리 숨을 틔워주는 행복이 되었다. 모두가 따로 또 같이 걷고 있는 이 길, 이 순간이 그동안은 당연하게 여기기만 했던 일상이 마냥 소중하게 느껴지는 밤이다.     p.102

 

카카오TV 오리지널 예능 <밤을 걷는 밤>을 재구성한 책이다. 유희열은 '그냥 밤에 산책하면 된다'는 제작진의 간단명료한 설득에 넘어가 약 4개월간 서울의 동네 구석구석을 걸었다. 조명도, 대본도 없이 촬영한 이 프로그램은 도심 속 매력적인 산책 코스와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서울의 아름다움을 재조명했다고 하는데, 방송은 보지 못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컨셉과 분위기였다면 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가볍게 산책하는 마음으로, 술술 읽다 보면 고즈넉한 밤의 풍경들이 눈 앞에 그려지면서 마음도 차분해지는 그런 책이었다.

 

시작하는 연인이라면 '청운효자동', 길 잃은 기분이 드는 밤엔 '후암동', 일상이 초라하게 느껴질 땐 '장충동', 추억에 잠긴 밤엔 '명동', 최고의 야경을 보고 싶다면 '응봉동', 설렘이 필요할 땐 '방이동', 여행이 고픈 날엔 '종로', 문득 권태로운 밤엔 '창신동' 등등.. 서울의 동네 구석구석을 혼자 걸으면서 하게 되는 생각들과 추억 속에 잠기는 순간들이 심야 라디오 방송을 듣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서울에 살고 있으면서도 내가 몰랐던 동네들은 얼마나 많은지, 내가 지나다니면서도 놓쳐 버린 풍경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꼭꼭 숨겨 놓은 보물찾기를 하는 마음으로 책 속 여정을 함께 했다.

 

 

넓디넓은 호면에는 도시의 반짝이는 빛들이 온통 내려앉았고, 호반의 활엽수들이 어둠 속에서도 울긋불긋하게 가을밤의 정취를 더하고 있다. 사람들 틈에 섞여 고요한 호숫가를 천천히 거닐었다. 호수를 산책하는 사람도 예상보다 많았다. 이렇게 인기가 많은 것들에는 다 이유가 있다. 흔한 것들이라고 '안 봐도 뻔하다'고 섣불리 단정 짓지 말기를. 어쩌면 진부하다고 무시해버린 그 이면에 우리가 놓친 클래식의 정수가 빛나고 있을지 모른다.      p.182

 

사실 밤에 걷는 일, 그냥 걷는 게 아니라 산책을 하는 일은 평소에 쉽게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밤은 다음날 아침을 위해 쉬거나 잠을 자야할 시간대이고, 집에 있지 않다고 해도 보통 늦게까지 야근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거나 하는 경우지 그 시간에 산책을 할 여유를 부리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내게 '밤 산책'이란 '여행'과 거의 동의어의 느낌이다. 여행지에서는 밤늦게 여유부리면서 걸어도 전혀 부담이 없고, 오히려 밤의 풍경들을 고스란히 느끼고 싶어서 일부러 일정을 늦게 잡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니 여행지가 아닌 거주 하는 도시인 서울의 밤 거리를 일부러 산책할 일은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분간은 여행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니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밤 풍경들을 걸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청운효자동을 걸으면서 '그렇게 오래도록 익숙하게 살았던 동네인데도 이런 감동을 받을 수 있다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밤이라는 시간이 주는 힘인지,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장소라는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이런 부분이 '밤 산책'을 꼭 하고 싶게 만드는 점이 아닐까. 저자는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감탄한다. '서울 도심에, 게다가 이렇게 높고 외진 곳에 이토록 싱그러운 공간이 구석구석 숨어 있다니. 뜻밖의 다정하고 따뜻한 정취에 사뭇 마음이 들떴다'라고 하며 '도시를 여행하는 가장 완벽한 코스'를 깨달아 간다. 느리게 걸어야 겨우 눈에 보이는 것들, 어두워져야만 듣고 볼 수 있는 풍경들, 걸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본다. '익숙한 동네도 밤에 걸으면 전엔 전혀 몰랐던 게 보인다'는 말을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면, 오늘 밤 집밖을 나서 천천히 산책을 시작해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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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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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돌릴 사이도 없이 재우치는 윤의현의 말에 규민은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유서를 운운하는 것은 그녀가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대개 비슷하다. 울부짖고 오열하다가 죽음의 정황을 캔 후에는 반추하고 추론한다. 감성에서 이성으로 넘어오는 단계다. 규민은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의 다른 표현이라고 여겼다. 다만 윤의현이 슬픔을 극복하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 다소 놀랍긴 했다.     p.31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가평에 있는 해발 619미터의 청우산에서 변사자가 발견된다.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산기슭에 위치한 삼각바위 아래의 사체는 여자였다. 사망한 지 열흘은 넘은 듯한 시신은 산행 중 발을 헛디딘 것처럼 보였으나, 바위 위에서 신발과 그 속에 있던 유서가 발견되면서 사인은 '실족사'에서 '투신자살'로 바뀐다. 유서의 내용은 딱 한 줄이었다. '증오하면서 사랑한다.' 한글 문서로 작성된 것이었고, 유서라고 하기엔 애매모호한 문구였지만 그렇다고 유서가 아니라고 할 이유도 없었다.

 

동생과 연락이 되지 않아 실종신고를 했던 의현은 동생으로 추측되는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사망자 오기현의 언니 윤의현, 성이 다른 두 자매. 의현은 동생이 자란 청평의 '꽃새미 화원'을 조사해 보라고, 그곳의 지역 유지인 기현의 의붓아버지가 의심이 된다고 암시하듯 말한다. 한편 의현에게는 문예창작과 시간 강사로 3년째 출강하고 있는 대학교에서 일어난 문제도 있었다. 학생들을 성추행한 교수가 제대된 처벌을 받지 않고 다시 학교에 복귀한다는 소식에 그를 방송국에 폭로하겠다며 나선 학생을 의현이 도와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기현의 사건을 수사하는 규민의 시점과 동생의 죽음과 성추행 폭로 사건 사이를 오가는 의현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원래 사건이나 사고라는 게 퍼즐조각처럼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흡사 각본이라도 있는 양 선명하게 드러나면 그게 더 의심스러운 법이죠."
그는 오기현의 죽음이 너무 선명했다고 했다. 과정 따위는 생략된, 일목요연한 '스케줄' 같은 죽음이라면서. 백규민 형사는 유서도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증오하면서 사랑한다'고요? 왠지 유서라기보다 급조된 문장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용이 추상적인 것은 둘째치고 친필이 아닌 점도 이상했습니다. 필체를 확인해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윤의현 씨 생각은 어떠십니까?"      p.116~117

 

어릴 적부터 아들처럼 키운 지적장애인의 노동 착취와 학대, 딸이 다투고 집을 나갔는데도 실종 신고를 망설이는 아버지, '증오하면서 사랑한다'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유서, 자매라면서 사진 한 장 가지고 있지 않은 언니의 침착함, 과연 동생의 죽음은 자살일까, 타살일까. 이들 자매처럼 역시나 어린 시절 가정과 부모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었던 아이는 자라서 형사가 되었고, 각각 별개처럼 보이는 사건들을 따라가며 진실에 다가간다. 그리고 그 끝에 마주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역사추리소설로 1억원 고료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작가 이선영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이다. 그 동안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은 작품들을 선보여왔던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불합리한 운명과 폭력에 순응하지 않는' 인물들의 분투기를 그려낸다. 가정폭력, 아동학대, 대학 내 성폭력 등 가정과 사회에 만연한 폭력들은 바로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숱하게 보도되고 있는 뉴스들을 통해서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비극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할 때마다 분노하게 되고, 슬픔을 금할 수가 없다. 대체 왜 우리는 이렇게 폭력의 한가운데서 살아가야 하는가 말이다. 작가는 '지금도 음지에서 오기현과 김예나, 혹은 신명호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폭력에 시달리며 숨죽이고 있을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이 작은 용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봄이 성큼 다가왔나 싶었는데, 어느 새 여름이 가까워진 듯 무더운 날씨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누군가는 폭력 속에서 방치되어 계절이 흘러가는 것도, 봄의 화사함도, 여름의 청량함도 느끼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작가의 섬세한 마음이 위로가 되어, 주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내어 보기를 바래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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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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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 아동학대, 대학 내 성폭력 등 가정과 사회에 만연한 폭력들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담담하고, 섬세한 문장으로 그려낸 소설이 작은 위로를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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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를 잡아라 네버랜드 그래픽노블
페넬로프 바지외 지음, 정혜경 옮김, 로알드 달 원작 / 시공주니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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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한 순간에 부모님을 잃게 된 여덟 살 소년은 커다란 집에 할머니와 단둘이 남게 된다. 할머니에게 가족은 이제 소년뿐이고, 소년에게 가족은 할머니뿐이다. 할머니가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자신을 두고 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는 걸 다짐받고 싶어하는 소년에게 할머니는 이제 자신의 집은 바로 여기라고 안심시켜 준다. 할머니에게 엄마처럼 이야기를 해달라 조르는 소년에게, 할머니는 '마녀 이야기'를 들려 준다. 할머니는 자신이 어렸을 때 벌어진 이야기를 시작으로 마녀가 지금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일반 사람과 마녀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준다. 그렇게 해서 소년은 대왕 마녀의 존재와 마녀 구별법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

 

 

방학이 아직 한참 남은 어느 날, 소년이 지루해 할 때쯤 할머니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의사는 담배를 끊고 공기 좋은 곳에서 푹 쉬어야 한다는 처방을 내려 준다. 두 사람은 휴양지로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곳 호텔에서 소년은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속의 그 마녀들을 만나게 된다. 어린이를 지독하게 싫어해서 없애 버릴 궁리만 하는 마녀들의 모임에서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대왕마녀까지 목격하게 되는데... 그들의 무시무시한 계획을 몰래 엿듣다 들키고 만다. 소년은 마녀들에게 붙들려 그 자리에서 생쥐로 변하게 되는데, 그렇게 생쥐가 된 한 소녀와 소년이 마녀 전문가인 할머니와 함께 그들의 계략에 맞서 세상 모든 어린이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과연 생쥐가 된 소년은 다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할머니와 소년은 마녀에게 맞서 이길 수 있을까?

 

 

<마틸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 <제임스와 슈퍼 복숭아> 등 로알드 달의 작품들은 아이는 물론 어른들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들도 많은데, 동화만큼이나 매혹적인 로알드 달의 세계를 구축해내고 있어 영화 버전으로도 대부분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마녀를 잡아라> 역시 최근에 앤 헤서웨이 주연으로 영화 버전으로 만들어진 걸로 알고 있다. 이번에 만나게 된 것은 바로 그 <마녀를 잡아라>의 그래픽 노블 버전이다.

 

아이들을 잡아먹는 마녀들이 정말 존재한다면? 이라는 상상력에서 출발한 이 이야기는 굉장히 기괴하고도 독특하다. 마녀를 자극하는 건 깨끗한 어린이한테서 나는 냄새기 때문에, 마녀에게 걸려들고 싶지 않으면 몸을 씻지 않아 더럽게 하면 된다는 것부터 마녀들은 갈고리 모양의 손톱을 감추기 위해 사시사철 장갑을 끼고, 대머리인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가발을 쓰며, 발가락이 없는 걸 숨기려고 사계절 내내 끝이 뾰족한 구두를 신는다는 설정부터 재미있으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라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은 아이스너 상.하비 상 수상 작가인 페넬로프 바지외가 로알드 달의 원작을 그래픽노블로 새롭게 재탄생시켰다. 로알드 달의 작품이 1983년에 출간되었는데, 2020년에 만들어진 그래픽노블이 어떻게 그려졌을지 매우 기대가 되었다. 작가는 원작의 기본 이야기와 구성은 그대로 지키면서, 몇 가지 요소를 바꾸어 조금 더 긍정적인 버전으로 만들어냈다.

 

고아가 된 소년과 나이가 너무 많은 할머니가 마녀들에게 대항한다는 이야기도 흥미롭게 펼쳐졌지만, 특히나 로알드 달 특유의 재치와 유쾌한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었다. 주인공이 생쥐로 변해버린 시점이 이야기의 중반부터였는데... 후반부 내내 사람이 아닌 생쥐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도 신선한 전개였고 말이다. 어린아이들은 학교를 다녀야 하지만 생쥐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 좋다는 발상의 전환,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생겼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뭉클함까지 전해주는 멋진 작품이었다. 로알드 달의 원작을 읽었던 아이와 함께 읽어도 좋을 것 같고, 로알드 달의 영화들을 좋아했던 어른들에게도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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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사랑하는 너에게 : 뻔하지만 이 말밖엔
그림에다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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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는 커서 뭐가 될까?" 아이가 커 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주고받는다. 나는 지켜보고 싶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뭔가 개입하려는 마음을 꾹꾹 누를 생각이다. 커 가는 과정을 깊게 들여다보면서 아이가 조언을 구할 때면 짧게 몇 마디 해 주는 정도에서 부모의 역할을 하고 싶다... 아이의 미래에 대해 뭔가 예상할 수는 있겠지만 무엇을 할지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오로지 아이의 몫이어야 한다.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이 도착이 아니라 과정이듯이 말이다.    p.77

 

저자는 어느 날, 집 안 청소를 하다가 아내가 쓰다 만 노트를 발견한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노트는 몇 장을 넘기고 나니 바로 빈 페이지였다. 바쁜 육아로 인해 멈춰 있는 그 기록을 계속 이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그림에다' 의 시작이었다. 아내는 육아로 인해 변함없이 바빴고, 점점 지쳐 갔고, 더 예민해졌지만.. 남편이 아내가 하는 일 속으로 조금씩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육아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책이 여타의 육아 관련 에세이와는 다른 지점은 '엄마가 된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으로 육아에 지친 '엄마'를 위로해준다는 것이다. 게다가 남편은 육아 휴직을 한 뒤 직접 육아에 참여해 그 과정을 경험했고, 다시 회사에 복직해 일하면서 '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아내와 함께 해왔다. 여자의 관심사에서 엄마의 관심사로 바뀌고, 일어나자마자 시작되어 해가 저물어도 육아가 끝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하는 남편의 시선으로 그려진 섬세한 그림과 이야기들이라서 너무도 공감이 되었고, 따뜻했다.

 

 

가끔은 아이를 보며 너무도 생생하게 내 어릴 적 기억이 살아날 때가 있다. 아이는 음식을 먹을 때 한꺼번에 입에 넣지 않고 한 가지를 삼키고 나서야 또 다른 음식을 입에 넣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어릴 적 한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렸다... 저 아래 가라앉아 평소에는 고개를 내밀 것 같지 않던 어린 시절의 나와 여섯 살 나의 아이가 겹쳐지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어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하던 행동들이 내게 옮겨졌을 테고, 나의 행동들이 다시 아이에게로 옮겨졌을 테니 말이다.      p.183

 

아이가 처음으로 혼자 몸을 가눌 수 있게 되고, 뒤뚱뒤뚱 걸음마를 시작하고, 혼자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고, 누구와도 말이 통화는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고.. 부모의 눈에는 그 모든 게 신기하고 기특하기만 하다. 아직도 목을 가누지 못하고, 뒤집기를 하느라 진땀 빼고, 울타리를 붙잡고 겨우 걸어 보려고 했던 시간들이 생생한데 말이다. 그 소중하고 예뻤던 모습들이 눈 앞에서 보여지는 것 같은데, 아이는 그 순간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부모의 마음과는 달리 점점 자립을 하게 되고, 앞으로 달려만 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른이 되어 가겠지.. 싶은 마음이 들면 시간이 흘러 가는 게 너무 아까워서 매 순간이 특별해진다.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나는 좋은 엄마, 아빠일까? 아이에게도 세상이 처음이지만, 부모에게도 엄마, 아빠가 되는 경험은 처음이라 낯설고 서툴기만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와 함께 정신 없는 일상이 시작되면 그렇게 고민하고, 자책하던 시간 조차 사라져 버린다. 그저 매일을, 매 순간을 살아 내느라 너무 바쁜 세상의 모든 부모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었다.

 

'되돌아볼 수는 있지만 되돌아갈 수는 없는 시간. 지금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분명히 있다'는 페이지가 유독 마음에 와 닿았다. 지치고, 힘들고, 짜증나는 순간들이라도, 지금이니까 할 수 있는 일들이라고 생각하면 소중하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자식의 성장 과정에서 부부의 관계도 함께 성장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라 너무 좋았다. 지금, 다정한 위로가 필요한 당신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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