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웃게 하는 것들만 곁에 두고 싶다 - 오늘의 행복을 붙잡는 나만의 기억법
마담롤리나 지음 / 허밍버드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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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드는지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나를 다년간 지켜본 결과, 샤워하기 싫은 날 욕실에 크게 음악을 틀어 두면 흥이 솟아 저절로 씻게 된다거나, 제철에 따라 메뉴가 바뀌는 디저트 카페의 문을 여는 즉시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스스로를 잘 파악할수록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우울할 때, 실망했을 때, 외로울 때의 나를 위해 각각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기분 전환의 매뉴얼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p.21

 

다음 날 아침에 마실 커피를 자기 전에 미리 내려 텀블러에 담아 두기, 죄책감 없는 탕진을 위해 매일 천 원씩 자동이체 되는 적금을 개설하기, 의욕이 사라질 어떤 날들에 대비해 초콜릿을 하나둘 모아 놓기...등등 누군가에게는 사소하고 별 것 아닌 일들이 힘이 되고, 기쁨이 되어 주는 순간이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것이 나를 기운 나게 해주는지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산미가 없는 다크한 로스팅의 원두로 갓 내린 커피 한 잔과 깊은 풍미의 그윽한 단맛을 내는 디저트 한 조각이면 세상 만사가 다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당장 내일 머리 아픈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걱정거리와 고민거리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책은 일러스트레이터 마담롤리나의 첫 번째 에세이이다. 워낙 여기저기서 마담롤리나의 그림들을 자주 보아와서 인지, 이번이 첫 번째 에세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사실 언젠가부터 그림 에세이가 유행처럼 출간되었고, 그림이 있다는 이유로 함께 수록된 짧은 글들에는 깊이도, 여운도, 사유도 없음에도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책들이 많았다. 주로 일러스트레이터들이 그런 책들의 주인공이었는데,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서 꼭 글도 잘 쓴다는 보장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책은 계속 나왔다. 그래서 마담롤리나의 그림을 좋아하지만 별다른 기대 없이 이 책을 펼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은 겉멋 없이 솔직하고, 진실하며 담백하고, 소소하지만 따스한 글들을 담고 있었다. 물론 글만큼이나 많이 수록된 그림들은 보너스이고 말이다.

 

 

"너는 그림에 재능이 없어"라는 친구의 말 한마디에 나는 너무나 간단히 무너졌다. 당시 내가 생각했던 재능의 이미지란 갈고닦기보다 타고나야만 하는 무언가였고, 작은 노력만으로도 특출난 결과를 내는 치트키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계속 글을 써 왔던 사람이 뒤늦게라도 작가가 되는 걸 볼 수 있었다. 10년 전, 흑역사라 일컫는 첫 앨범을 냈던 친구는 10년이 지난 지금 나름의 히트곡이 생겼다. 꾸준히 하는 사람이 결국에는 잘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를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재능'이란 단어에 겁먹지 않게 되었다. 이제 나에게 재능이란 꾸준함이다.      p.230

 

마담롤리나는 좋지 않은 일을 더 잘 기억하는 편인데다, 그런 상황을 반복해서 곱씹어 보는 버릇도 있었고, 울적할 때마다 쇼핑으로 감정을 해소하다 보니 불필요한 카드 빚도 생겨버렸고, 회사도, 아르바이트도 오래 못 다니고 그만두었으며, 그림에 재능이 없다는 폭언과 별로 유명하지 않으니 이런 대접도 참으라는 무례를 견뎌야 했다. 하지만 그 숱한 과정들을 거쳐 가면서 그녀가 깨달았던 것은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웃는 순간을 모아 하루를 좋은 날로 바꿔 보자'는 것이었다.

 

 

거창한 목표보다는 만족스럽게 잘 보낸 하루들이 모여 만들어 지는 것이 인생이니 말이다. 그렇게 이 책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고, 스스로를 미소 짓게 만드는 확실한 일상의 행복들을 그려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림만큼이나 섬세한 글들이 담담하게 공감과 위로를 불러오는 책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그리다가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그냥 시간 낭비면 어쩌나, 이 시간에 돈이 될 만한 무언가를 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일이 생계와는 거리가 먼 사치처럼 여겨질 때가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깨닫는다. 이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꼭 붙드는 일이고, 이런 순간들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거라고. 비록 아무런 수확 없이 끝나더라도 그 시도의 과정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경험과 기대가 나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현실을 바꾸진 못해도 나의 하루는 바꿀 수 있는 일상의 소소한 다짐들이 이제부터의 나를 웃게 만들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채색 일상에 색을 입히는 마담롤리나의 일상 속 숨은 행복 찾기를 함께 해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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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날의 거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71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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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고 싶었다. 알아야만 했다. 그리고 내 눈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엔지니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그가 이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의 미로에서 나가는 길을 알기라도 하는 양. 이 순간 내 적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이 우세했는지 나는 모른다. 분노였는지 초조함이었는지 흥분이었는지 짜증이었는지, 아니면 실망이었는지 말이다. 마음속에서 무엇이 일어났든 간에 그는 그것을 숨기는 데 성공했다. 그의 얼굴은 다시 정중하고 친절한 표정을 띠었다.    p.87

 

1909년 9월 26일, 요슈 남작은 유명 궁정 배우인 오이겐 비쇼프 집에 친구들과 함께 방문을 한다. 바이올린을 챙겨 간 그는 친구들과 실내악 연주를 하고, 오이겐 비쇼프는 자신이 초대한 손님들에게 기이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오싹할 수 있습니다. 아마 오늘 밤 늦도록 잠을 못 이룰 겁니다....'로 시작된 그 이야기는 수수께끼 같은 한 자살 사건이었다. 얼마 전에 알게 된 젊은 장교에게 화가인 동생이 있었는데, 어느 날 자살을 했다고 한다. 유서조차 없었기에 유족들은 납득이 가지 않았고, 형이 진상 조사에 나선다. 형은 동생이 살던 집으로 이사해, 동생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자살의 원인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고, 그는 결국 동생처럼 자살을 하고 만다. 그가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오이겐 비쇼프는 잠깐 자리를 비운 후 원인을 알 수 없는 권총 자살을 한다. 갑작스러운 죽음 뒤 남겨진 가족들과 손님들은 요슈 남작을 비쇼프를 죽음으로 몰아간 인물로 지목한다. 그는 비쇼프의 아내와 과거 연인 사이로 그녀에게 아직 연정을 품고 있고, 비쇼프의 자살을 유도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명을 벗기 위해 요슈 남작을 비롯한 일행들은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가면서, 이러한 자살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과연 요슈 남작은 누명을 벗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이유로 벌어지는 연쇄 자살 사건들의 진실은 무엇일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내일 만 쉰 살이 되고, 이 도시에 사는 사람은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쉽게 이른 나이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오랜 세월 동안 글쓰기를 피한 끝에 오늘 진실을 고백하고, 그날 밤 조반시모네 키기, 일명 카테반차에게 닥친 일을 회고록으로 남기려 한다. 대단히 유명한 건축가이자 화가인 그를 오늘날 사람들은 <심판의 날의 거장>이라고 부른다. 내가 나 자신과 모든 피조물이 용서받기를 바라듯 하느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길.      p.204

 

레오 페루츠의 작품은 전부터 궁금했던 터라 <9시에서 9시 사이>가 나왔을 때부터 구매해서 읽어 보려고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스웨덴 기사>, <심판의 날의 거장>이 나오기까지 시작하지 못했었다. 아직도 책장 한 구석에서 읽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 상태로 먼지가 쌓여 가고 있는데, 어쨌든 그래서 이번에 출간된 <심판의 날의 거장>을 처음으로 레오 페루츠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레오 페루츠는 '환상 문학의 거장'이라는 문구로 설명되는 작가인데, 여기서 환상문학이란 초자연적 가공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사건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을 말한다. 물론 기이한 일을 표현한다고 해서 모두 환상문학이라고 하지는 않고, 보통 ‘단절과 공포감’, ‘애매성과 의혹’이라는 요소가 필요하다. 그러니 이런 장르의 작품들은 자연스레 미스터리와 공포를 유발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게 마련이고, 그래서 가독성도 좋은 편이다.

 

대표적인 환상 문학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레오 페루츠와 프란츠 카프카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작가라는 점도 흥미롭다. 생전보다는 사후에 명성을 얻은 카프카에 비해 페루츠는 당대에 베스트셀러 작가였다고 한다. <심판의 날의 거장>은 페루츠의 전성기 대표작으로, 당시 대중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출간된 지 거의 100년이 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여타의 고전들에 비해서 굉장히 잘 읽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이탈로 칼비노, 앨프리드 히치콕, 그레이엄 그린, 이언 플레밍 등 세계의 많은 거장들이 페루츠의 작품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현대의 장르 문학들에 견주어도 될 만큼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환상 문학으로서의 작품성도 갖추고 있으니 말이다. 서스펜스, 추리, 공포와 환상이 절묘하게 조합된 이 작품을 만나 보자. 능숙한 이야기꾼 페루츠의 솜씨에 푹 빠져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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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국의 어른답게 말합니다 - 품격 있는 삶을 위한 최소한의 말공부
강원국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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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잘하려면 할 말이 있어야 한다. 할 말을 준비하는 것, 말을 잘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하지만 할 말이 있다고 말을 잘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할 말이 있다고 말을 잘하는 건 아니다. 할 말이 많은 데도 그것을 표현하지 못해 버벅거리는 경우를 흔히 본다. 가장 큰 요인은 어휘력 부족이다. 어휘력이 빈약하면 말이 빈곤해진다. 가진 것과 가진 것을 보여주는 것은 별개다. 어휘력이 부족하면 가진 게 많아도 없어 보인다. 어떻게 하면 어휘력을 키울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독서를 권한다. 책을 많이 읽으면 어휘력이 늘어난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p.62

 

저자 강원국은 김우중 회장을 모시면서 말을 배우기 시작했고, 말이 절실했던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아래서 '말'을 듣고 쓰고 고치는 일을 해왔다. 2014년부터는 메모하고 기고하고 책을 쓰며 말로 먹고 살고 있다. 이 책은 KBS1 라디오 <강원국의 말 같은 말> 진행을 위해 집필했던 내용에 새로운 원고를 추가해 만들어 졌다. 전직 청와대 연설비서관 강원국의 말하기 특강은 '말이 되는 삶, 삶이 되는 말'에 관해 들려주는 73가지 말공부 수업을 담고 있다.

 

누구나 말을 하지만, 그렇게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 말을 배우려 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어른이 된다고 해서 누구나 어른답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다.  말이란 나다움을 드러내는 도구이자 존중 받기 위한 가장 어른다운 무기인데, 그에 걸 맞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배워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말하기에 자신이 없었던 자신이 어떻게 청와대 연설비서관이 되었는지, 그리고 대기업에서 17년, 청와대에서 8년을 일하는 동안 자신만의 말과 생각을 만들었던 과정을 들려준다. 언제나 말이 어렵고 두렵기만 했던 젊은 날의 그가 수천 번의 강연을 진행해온 강사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은 말하기에 자신이 없는 수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말은 현실을 만들어낸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렇다. 말을 늘려서 발음하면 '마알'이 되는데, 마알은 마음의 알갱이란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말이 마음의 알갱이란 말이다. 말은 곧 자기 생각과 마음이다. 말이 바뀌면 생각과 마음이 바뀌고, 생각과 마음이 바뀌어야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현실이 바뀐다. 모든 것은 말한 대로 된다.     p.178

 

링컨은 '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살아온 시간만큼의 경험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자는 얼굴보다 말이 더 그 사람의 인격에 가깝다고 믿는다며, 자신은 쉰 살이 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이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자신만의 법칙으로 자신이 하는 말을 되돌아보고, 남의 말을 유심히 듣고, 얼버무리지 않으며, 같은 말이면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목적에 맞게 말하며, 후회할 말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들려준다. 이러한 노력들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점점 연륜을 드러내게 될 것임을 그는 믿고 있다.

 

한 방에 통하는 보고의 정석, 쓴소리가 약이 될 수 있는 방법,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 눈높이 말하기의 7법칙, 협업에 필요한 소통의 법칙, 코로나 시대의 소통법 등 저자의 경험담에서 비롯된 진심 어린 이야기들이 진짜 어른다움의 완성은 말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흔히 말은 재능이 아니라 기술이라고 한다. 타고난 말재주라는 게 없다는 것은, 누구나 공부하고 연습하면 표현력과 수사법을 키울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법이 궁금하다면, 대화를 리드하고 말실수를 줄이고 싶다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말하기를 배우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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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사람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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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에 당신은 담요를 다시 갖다 놓지만 장난감 권총은 챙긴다. 그날 밤에 어디서 자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그게 쓸모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가 일주일 동안 계속된다. 당신은 그 심정이 어떨지 정확히 알 수 없겠지만 당신도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인생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은 몰랐는데.' 그러면 덜컥 겁이 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느 날 아침에 당신은 극단적인 짓을 저지른다. 아, 물론 당신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라면 분명 다른 대안을 강구했을 것이다.       p.97

 

어느 날 아침, 그다지 넓지도 않고 주목할 만하지도 않은 도시에 사는 39세의 주민이 권총을 손에 쥐고 집을 나선다. 강도는 은행에 침입해 6천5백 크로나를 요구하지만, 그곳은 하필 현금 없는 은행이었다. 당황한 강도는 경찰이 출동하자 겁에 질려서 길을 건넜고 맨 처음 눈에 들어온 문을 열고 도망친다. 구체적인 도주 계획도 없었던 강도는 우연히 아파트 매매 현장인 오픈하우스로 달아나게 됐고, 아파트를 구경하러 온 잠재 고객들은 인질이 되고 온다. 은행 강도라 할 수 없는 사건이 갑작스레 인질극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잠재 고객 일곱 명과 부동산 중개업자 한 명으로 여덟 명이 인질이 된다.

 

인질극은 정석대로 흘러간다. 경찰이 건물을 에워쌌고 기자들이 출동했고 사건이 TV에 보도된다. 이런 상황이 몇 시간 계속되자 은행 강도는 항복했고, 인질들이 모두 풀려나고 나서 곧 경찰이 아파트를 습격한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은행 강도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은행 강도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리고 그 안에서 은행 강도와 인질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흔히 인간의 성격은 경험의 총합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전적으로 맞는 말은 아니다. 과거가 모든 것을 규정한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절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어제 저지른 실수들이 우리의 전부는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선택, 다가올 미래도 우리의 전부라고 말이다.... 예전에 엄마가 그녀의 귀에 대고 혀 꼬부라진 소리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성격은 경험의 총합일 뿐이야. 남들이 뭐라하건 귀담아 듣지 마. 그러니까 걱정 마, 우리 공주님. 너는 망가진 가정 출신이라 심장이 망가질 일은 없을 거야. 너는 낭만주의자로 자랄 일도 없을 거야, 망가진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으니까."      p.462~463

 

<오베라는 남자>로 엄청난 사랑을 받았던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이다. <오베라는 남자>가 나왔던 것이 2015년 이었는데 그 이후로 꽤 많은 프레드릭 배크만의 작품들을 읽어 왔다. <브릿마리 여기있다>,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베어타운>, <우리와 당신들> 등 다양한 작품들이 모두 기본 이상의 재미를 안겨 주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캐릭터, 입에 척척 달라붙는 음식처럼 눈에 쏙쏙 들어오는 묘사들,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노련한 구성과 스토리, 그리고 삶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까지.. 언제나 유쾌하고도 다뜻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번 작품 역시 겁 많고 마음 약한 강도와 위급한 상황에서 한마디도 지지 않는 인질들의 한바탕 소동극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상처와 어리석음, 실수, 오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은행 강도, 아파트 오픈하우스, 인질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작가의 말대로) 그보다는 바보들에 대한 이야기에 더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우리는 모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어른들이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하기 싫어도 참으며 일을 하며 돈을 벌고, 필요한 경우에는 거짓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매일같이 전쟁 같은 일상을 견디어 낸다. 가끔은 정말 형편없는 생각을 한 적이 있더라도, 어른들의 실수가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참는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것, 그게 누군가에게는 미련하고 바보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하루를 살고, 내일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한다. 물론 어떻게든 더 잘해보려고 애쓴 몸부림이 오해와 거짓말을 불러오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마음이 바보 같은 실수가 되어 버리고, 때로는 모르는 걸 아는 척해야 하고, 무섭지만 겁나지 않은 척도 하고, 불평불만이 턱 끝까지 차 올라도 아무렇지 않게 만족하는 척 할 필요가 있기도 하다. 그래서 다들 잘 살고 있는데 나 혼자만 그 모양인 게 아닌가 싶어 불안해지기도 한다. 이 작품은 바로 이렇게 불안에 시달리는, 그럼에도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엉뚱하고, 끝없이 웃게 만들지만 결국엔 뭉클하게 만드는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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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자클린 퍼비.스튜어트 조이 지음, 이현수 외 옮김 / 본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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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의 모든 영화들 중 <인셉션>은 영화 만들기에 대한 가장 명백한 비유를 담고 있다. <인셉션>은 사기꾼 영화의 일반적인 극적 비유들을 담고 있으며, 그것들을 영화 제작 스탭들의 알레고리로 만들어낸다. 또한 공유된 꿈의 전제를 꿈의 주관적 경험과 극영화의 주관적 경험 사이의 유사성을 드러내는데 사용한다.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꿈의 효과는, 특히 <프레스티지>에서 사용되었던 놀란의 특징적인 내러티브 장치의 영화적 복제를 가능케 한다.      p.114

 

<메멘토>, <인썸니아>, <인셉션>, <다크 나이트> 3부작, <인터스텔라>, <덩케르트>, <테넷> 등을 만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들을 좋아한다. 그의 작품들은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확보했다고 평가받는다. 개인적으로는 배트맨 시리즈를 범죄 느와르로 재탄생시킨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 시리즈를 보고 완전 팬이 되었다. 이후에 만들어진 꿈과 현실에 대한 영화 <인셉션>으로 압도적인 스토리텔링과 영상미를 보여주어 그야말로 믿고 보는 감독이 되었다. 국내에서는 <인터스텔라>라는 작품이 많은 사랑을 받으며 천만 관객을 돌파한 세 번째 외국 영화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가장 최근작으로 작년에 개봉한 <테넷>은 물리학 지식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관객 수가 200만에 육박했다. 전세계적으로는 놀란의 작품들 중에 최초로 흥행에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인버전이라는 신선한 이야기만으로도 여전히 놀란다운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만난 책은 월플라워 출판사(Wallflower press)에서 출간한 ‘디렉터스 컷’(Director's cut) 시리즈로 현존하는 영화감독 중 가장 실험적이고 독특한 장르를 개척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분석한 글들을 모았다. 크리스토퍼 놀란을 둘러싼 비평, 각각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 음악, 시간, 퍼즐, 트라우마로서 읽어내는 미학적인 분석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책이었다.

 

 

 

주인공의 거짓성은 모든 이해에서 잘못된 이해가 수행하는 역할을 묘사하고자 하는 놀란의 노력의 기초가 된다. 영화감독은 단순히 영화의 다이제틱 현실에서 나타나는 거짓말 묘사할 수는 없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관객들이 이 거짓과 거리를 두고 그 필요성의 인식을 피하려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거짓에 대한 영화는 거짓에 대한 진실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통해 진실을 최고 가치로 두고 탐구되는 형태로 남아야 한다. 관객들을 속이고 그 후 이 속임수의 이유를 드러내는 방식으로만, 영화감독은 거짓이 우선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p.381

 

크리스토퍼 놀란의 전 작품이 만들어내는 프리즘에 다양한 각도로 접근하고 있는 이 책의 글들은 모두 열 일곱 편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다크나이트>와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의 아이맥스, <인셉션>과 <프레스티지>에 나타난 영화 제작 알레고리, <메멘토>의 포스트모던 누아르 판타지, <인썸니아>와 억압된 것의 귀환, <미행>의 실존주의적 시간성, <인터스텔라>에서 다루는 시간 여행에 대한 집착, <인셉션>에서 음악의 기호적 역할과 비디오 게임 로직 등등... 마치 퍼즐처럼 느껴지는 놀란의 작품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글들이었다.

 

영화는 단지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 이상의 체험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시각적인 볼거리와 지적인 퍼즐이 동시에 존재하는 놀란의 영화들이야말로 그에 걸맞는 작품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의 작품들은 여러 번 관람하게 만드는 지적인 유희가 존재하고, 카메라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의 스펙터클함도 빠지지 않는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들 중에 가장 좋아하는 <인셉션>이 2010년, <다크 나이트>가 2008년 작이었다. 당시에 굉장히 여러 번 보았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오래 지나 디테일한 부분들은 많이 잊고 있었다. 이 책에 수록된 관련 글들을 읽으면서 새록새록 당시의 기억들과 장면들이 떠올라서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은 대부분 영화에 대한 글도 즐겨 읽는다. 영화 비평 혹은 리뷰라는 형태로 전문가가 아닌 이들도 영화에 대한 글들을 쓰게 되는 이유도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기사나 네티즌들의 글로만 접했던 영화에 대한 글들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 이 책에 수록된 분석, 비평 글들이다. 그러니 놀란의 영화들을 좋아한다면, 이 책은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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