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매탐정 조즈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5
아이자와 사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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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마디로 자신의 인생이 뒤집혀버리는 순간이란, 누구에게나 똑같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고게쓰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작 한 마디로 나라는 인간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순간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은 단지 그런 불운을 맞닥뜨리지 않았을 뿐, 거기에 특별한 차이는 없을지도 몰라요." 고게쓰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누구나 대수롭지 않은 일로 사람을 죽입니다. 그걸 경험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는 건, 그저 행운일 뿐이겠죠. 우리는 그런 차이만으로 살아 있는 건지도 몰라요."     p.199~200

 

영능력이니, 심령현상이니, 오컬트 같은 것에 관심이 있거나 믿지는 않는다고 해도 누구나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바라고 있지 않을까. 설명되지 않은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이 세상에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사후 세계가 있기를 바란다거나, 억울하게 죽은 이의 영혼이 가해자를 찾아내도록 도와 준거나 하는 일 같은 거 말이다.

 

스스로를 '경찰도 탐정도 아닌, 그저 보잘것없는 글쟁이'라고 소개하는 고게쓰 시로는 조즈카 히스이라는 젊은 영매와 함께 온갖 사건을 해결해왔다. 영매의 힘으로 사건을 해결하다니,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고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오거나, 영시로 범인을 특정한 다음 그 정보를 토대로 분석해 과학 수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논리를 이끌어내거나 법적 증거를 찾아낼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 진다. 사실 범인을 특정할 수 있다고 한들 명확한 증거가 없다면 체포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영매탐정 조즈카가 사건 현장을 둘러본 뒤 영시를 통해 누가 범인인지 알아 내면, 추리소설가 고게쓰가 논리적인 사고로 물적 증거를 찾아내고, 범행 과정을 추론해낸다. 영능력으로 범인을 밝혀내고, 그것을 단서 삼아 물적 증거를 찾아낸다면 그야말로 범죄자가 당해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어떤 트릭과 꼼수도 현실을 넘어서는 영능력 앞에서는 헛수고가 될테니 말이다.

 

 

 

"우리 일상에 탐정은 없어요. 저건 이상하다, 이걸 생각해야 한다, 그게 수상하다, 앞장서서 친절하게 알려주는 사람은 눈 씻고 봐도 없죠. 우리는 일상 속에서 뭘 생각해야 하는지, 뭘 눈여겨봐야 하는지, 우리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해야 해요. 뭐가 이상한지 모른다? 너무 사소한 문제라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럴 가치가 없다? 정말로?"
빙글빙글 머리카락을 감던 손가락이 멈췄다.... "탐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더라도, 우리는 명탐정의 시선을 가져야 해요."      p.388~389

 

하얀 프릴로 장식한 블라우스, 가느다란 허릿매를 강조하는 하이웨이스트 스커트, 완만한 웨이브를 그리는 긴 흑발 머리, 앳된 얼굴의 정교한 서양 인형처럼 아름다운 여성이 바로 조즈카 히스이라는 인물이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데다 해외에서 오래 살다 와서 친구도 거의 없고, 나이대에 맞는 일반적인 경험도 부족해 그야말로 순진무구한 소녀의 전형처럼 보인다. 이러한 캐릭터 설정부터 전형적인 라이트 노벨 작품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야기는 정말 제대로 된 본격 미스터리 장르에 맞게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어 캐릭터와 서사의 부조화에서 오는 독특함이 오히려 신선한 재미를 만들어내는 작품이었다.

 

2020 본격미스터리 베스트10 1위! 2020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1위!에 빛나며 전례 없는 미스터리 차트 5관왕의 신화를 기록한 작품이다. 아이자와 사코는 주로 라이트 노벨 작품들을 써온 걸로 아는데, 이번에 만난 이 작품은 본격 미스터리 장르이다. 표지에서 보여지듯이 미소녀 영매가 주인공이지만, 결코 표지만 보고 섣불리 이 작품에 대해서 판단하면 안 된다. 죽은 사람을 불러내서 범인을 지목하는 영매탐정과 추리소설가이자 경찰의 자문탐정이 그에 대한 근거를 찾아내서 사건을 해결하는 형식의 연작 단편집은 촘촘하게 짜여진 미스터리를 따라가는 재미도 있지만, 특히나 후반부를 강타하는 반전이 역대급이다. 단순히 독자들을 놀라게 하려는 의도의 깜짝쇼가 아니라, 반전에 이르기까지의 서사가 굉장히 흥미롭고 잘 짜여 있어서 그 충격은 더 엄청난 효과를 발휘한다. 게다가 시종일관 본격 미스터리와 라이트 노벨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듯한 분위기로 독자들과 밀당을 하고 있는 작품이라, 지루할 틈 없이 두툼한 페이지가 금방 넘어간다. 현지에서는 7월에 속편인 <조즈카 도서집>이 공개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지 너무 궁금하다. 국내에서도 영매탐정 조즈카의 다음 이야기를 빨리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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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8
조지 손더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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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편지의 독짜는 이런 구절을 들어봣겟죠? 채고의 시간이엇고, 채악의 시간이엇다. (어떤 책에 나온 구절이애요. 언젠가 그 집 엄마가 세끼들에게 이 책을 일거주려고 햇서요. 그런데 이 책은 낫말이 너무 만아 지루햇서요. 그래서 세끼들은 어린 잉간들이 지루할 때 하는 짓을 하기 시작햇죠. 그건, 손가락으로 코를 파며 딩굴딩굴하다 아기 동셍을 꼬집기.)      p.40

 

여우 8은 인간의 말을 할 줄 안다. 물론 쓰기도 글자도 완벽하진 않지만 말이다. 인간에게 관심이 많은 여우 8이 어느 날 낱말을 만드는 인간의 목소리를 엿듣게 된다. 아이에게 사랑을 담아 해주는 이야기가 음악 같다고 느끼면서, 여우 8은 그걸 완전히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게 매일 밤마다 인간이 말하는 방식을 배우려고 몰래 훔쳐 보았던 것이다. 여우 8의 친구인 여우 7은 인간의 말을 알고 있는 여우 8에게 깜짝 놀랐고, 그들은 우두머리인 여우 28에게 가서 인간의 말을 들려 준다. 우두머리는 여우 8의 새로운 기술을 무리에 도움이 되도록 사용해달라고 부탁한다.

 

 

여우 8은 한 간판에 써진 글을 읽고, 곧 '폭스뷰커먼스'라는 쇼핑몰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곧 트럭들이 몰려와 원시림을 파헤치고, 나무를 뽑고, 옹달샘을 파괴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곳들을 평평하게 만들어 버린다. 집과 먹을 것을 잃어버린 여우 무리들은 점점 쇠약해지고, 늙은 여우들은 목숨을 잃는다. 여우 8은 여우 7과 함께 먹을 것을 구하러 쇼핑몰에 가서, 몇몇 친절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얻는다. 인간과 여우가 함께 살아가는 미래를 꿈꾸는 것도 잠시, 밖으로 나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끔찍한 세상이었다. 그래서 여우 8이 인간들에게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인생이 멋찔 수 잇다는 걸 알아요. 대게는 멋찌죠. 난 무더운 날에 차고 깨끗탄 물을 마셧고, 사랑하는 이가 부드럽게 짓는 소리를 들었고, 눈이 천천이 네리며 숲피 고요해지는 걸 봣서요. 하지만 이제 그 모든 행복칸 광경과 소리가 사기처럼 느껴저요. 조은 시간은 그저 연기에 불과하고 그개 걷치고 나면 현실이 나타나는 거죠. 그 현실이란 바로, 바위 갓튼 모자, 거더차고 짓밥는 발. 거더차고 짓밥는 발이 업는 순간은 모두 진짜가 아닌 것만 갓타요. 무슨 말인지 알겟서요?     p.50~51

 

이 책은 <12월 10일>, <바르도의 링컨>이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조지 손더스의 신작이다. 오랜 시간 단편소설만을 써오다 쓴 첫 장편소설로 맨부커상을 수상했었는데, 그 작품이 일반적인 소설의 형식과 틀을 과감하게 벗어나 소설의 경계를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간의 말을 배운 여우가 인간들에게 쓴 편지의 형식을 띠고 있는 우화로 우리를 찾아 왔다. 인간에게 숲을 빼앗기고 같은 무리의 여우들을 모두 잃어버린 여우의 목소리를 빌려 인간의 환경 파괴와 지나친 소비주의에 대한 경고를 전하고 있는 이 작품은 짧지만 긴 여운을 남겨 준다.

 

 

인간의 언어를 독학한 여우가 쓴 글이라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자가 엉망이라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읽기가 수월하진 않다. 하지만 시작부터 '내가 글짜를 틀리개 쓰더라도 이해하새요. 난 여우라서 그래요!'라고 말하는 이 여우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맞춤법이 틀린 문장을 읽는 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구나 새삼 깨달으면서, 한 문장 한 문장 천천히 읽어 나갔다. 중간 중간 심플한 드로잉으로 등장하는 여우의 모습 또한 재미를 더해 준다.

 

아이들과 함께 읽어도 좋은 작품이지만, 어른들이 읽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는 짧은 소설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된 철자로 쓰니 이 글은 아이들이 읽기에 더 수월할 지도 모르겠지만, 담고 있는 메시지 자체는 환경을 파괴하면서 살고 있는 어른들을 향해 있다. “당신들의 얘기가 행복카게 끈나기를 원한다면, 좀 차캐지려고 노력카새요.” 라고 말하는 여우의 문장이 뭉클했다. 숲을 파괴하고, 동물들을 보호할 줄 모르는 인간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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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1만 년 나이테에 켜켜이 새겨진 나무의 기쁨과 슬픔
발레리 트루에 지음, 조은영 옮김 / 부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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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나무에게는 각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키가 큰 나무의 어두운 그늘에서 평생 살아온 하층부 나무들이라면 날씨보다는 빛을 가리는 제 이웃을 두고 투덜댈 것이다. 들판에 자라는 나무들에게는 잎을 피워 내는 족족 먹어 치우는 염소나 사슴이 불만의 대상이다. 지중해 숲의 나무는 이 지역의 유난히 우울한 봄보다는 몇 년마다 한 번씩 삶을 괴롭게 만드는 산불 때문에 불평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나무들은 사람들 못지않게 날씨 이야기를 좋아한다. 미국 남서부 지방의 나무들은 가뭄이 오면 툴툴대면서 폭이 좁은 나이테로 불만을 표시한다.     p.53

 

이 책은 연륜연대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국내 최초의 과학 교양서이자 한 여성 나이테 과학자의 경이로운 탐구 일지이기도 하다. '연륜연대학'이라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는데, 나무의 나이테를 통해 과거에 있던 기후변화와 자연환경을 밝혀내는 학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단어인 '연륜'이 여러 해 동안 쌓은 경험이 축적되어 보여지는 모습을 지칭한다고만 아고 있었다면, '연륜'이라는 단어의 또 다른 뜻은 바로 '나무의 줄기나 가지 따위를 가로로 자른 면에 나타나는 둥근 테'를 말하는 것으로 '나이테'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였던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나무 그루터기에서 나이테를 세보았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연륜연대학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과학'이라는 점에서 친근하다. 손으로 나무를 쓰다듬고 맨눈으로 나이테를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정체 모를 나노 입자도,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있는 은하도 없는 과학이라는 점과 생태학, 기후학, 인류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인간과 환경의 역사 사이의 상호 작용을 밝힐 수 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과학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인 발레리 트루에는 연륜기후학자로 나이테를 이용해 과거의 기후를 연구하고 기후가 생태계와 인간계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 20년 동안의 과정을 바탕으로 '초라하게 시작된 연륜연대학이 숲과 인간과 기후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연구하는 핵심 도구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우리가 나무를 조사해 목재가 얼마나 자랐고, 또 얼마나 탄소를 저장하며, 목재 생장이 물의 가용성, 기후 변이, 숲의 교란 등에 얼마나 민감한지 알 수 있다면 어떨까? 연륜연대학자들은 이 탄소 퍼즐을 푸는 데 도움이 될 강력한 도구를 손에 쥐고 있다. 우리는 나이테 측정기를 가지고 서로 다른 수종, 수령, 토양, 기후의 나무에서 얼마나 많은 목질부가 자라고 얼마나 많은 탄소가 저장되었는지 조사할 수 있다. 우리는 길어진 생장기가 어떻게 목질부 생장에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나이테는 우리에게 기후 변화가 어떻게 과거 사회에 영향을 끼쳤는지 가르쳐 주었다.     p.300

 

어릴 때 읽었던 <아낌 없이 주는 나무>라는 작품을 얼마 전에 아이에게 읽어 주느라 다시 읽었다. 나무는 사랑하는 소년에게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며 행복해하다, 더 이상 줄 게 없을 만큼 세월이 지난 뒤 자신의 나무 밑동울 내어 주며 쉴 수 있게 해준다는 내용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읽어도 여전히 감동적인, 뭉클해지는 이야기였다. 실제 역사를 돌이켜보더라도 나무는 인간과 늘 공존해왔고,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제공해왔다. 인류 문화사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무와 숲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낌없이 베풀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이러한 나무에 얽힌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넘어서 과학적인 방식으로 나무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나이테를 세면서 과학, 역사, 지리, 기후, 건축, 문학, 미술 등 다양한 분야와 장르를 넘나드는 저자의 이야기는 너무도 매혹적이었다. 나이테와 태양의 흑점과 해적선처럼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존재들의 상관관계도 알 수 있고, 로마 제국과 몽골 제국의 흥망성쇠에 기후가 미친 영향도 살펴볼 수 있었다. 나무는 1년에 하나씩 나이테를 만든다. 세상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는 무려 5026살이라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는 과거의 날씨와 역사를 기록하는 나이테 덕분에 언제 날이 따뜻했고, 비가 많이 내렸는지, 언제 가뭄이 들고 산불이 났는지 알 수 있다. 나무를 통해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나무에게는 각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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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흡혈귀전 : 흡혈귀 감별사의 탄생 조선 흡혈귀전 1
설흔 지음, 고상미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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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둑한 날에는 오싹한 이야기가 제격이다. 내가 이런 류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읽었던 시기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는데, 용돈만 생기면 동네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한 권씩 사곤 했다. 당시에 귀신이 등장하는 호러 물이나 미스터리로 가득한 추리 소설들을 주로 구매했었는데, 공포 소설은 집에 가져와서는 꼭 표지가 보이지 않게 뒤집어 놓곤 했다. 어린 마음에 그걸 보고 있으면 어쩐지 밤에 뭐라도 나타날 것 같아서 일부러 표지는 안 보려고 했던 건데, 그러면서도 무서운 이야기들은 주구장창 읽어 댔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무서워서 눈을 가리면서도 기어코 무서운 장면을 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심리는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이런 책도 나오는 것일 테고 말이다.

 

 

세종 임금님은 고기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고기를 즐겨 먹었다. 보통 가마솥에 푹 삶은 수육, 소금으로 간을 한 구이, 매콤한 양념을 뿌려 구운 산적, 달짝지근한 맛이 나는 불고기로 마무리를 했는데, 고기반찬을 책임지는 수석 요리사는 이 순서를 '수구산불'로 줄여서 외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임금님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문서와 책에 파묻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목이 벌레에 물린 것처럼 따끔하더니, 참을 수 없는 배고픔이 느껴진 것이다. 배가 고파서 등이 아프고,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말이다. 새벽이라 고민을 하다 수석 요리사를 부르기 위해 문을 열었는데, 때마침 방문 앞에 붉은 기가 도는 고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그걸 먹고 난 뒤로 이상한 증상이 시작된다.

 

 

임금의 입맛이 완전히 바뀌어 평소 먹던 '수구산불' 들이 전혀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를 탐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생고기를 먹지 않을 때는 무시무시한 배고픔의 증상이 찾아 왔다. 너무 배가 고파서 똑바로 앉기도 힘들 지경에, 이마에서 죽은 피처럼 검붉은 땀이 줄줄 흘렀을 정도로 말이다. 도대체 임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이 이야기는 세종이라는 역사 속 인물과 흡혈귀 감별사라는 허구적 인물을 등장시켜 색다른 재미를 선하고 있다. 낯설고 기이한 흡혈귀의 정체만큼이나 독특한 '흡혈귀 감별사'라는 캐릭터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열두 살 소녀는 아버지가 대식국 출신이라 얼굴이 검고, 눈은 파랗다. 하지만 어머니가 조선 사람이고, 조선에서 나고 자라 우리말을 무척 잘한다. 게다가 외할아버지로부터 백정 일을 배워 고기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다. 자, 과연 이 소녀가 숨어 있는 흡혈귀를 찾아 내고, 임금을 구할 수 있을까? 

 

 

넷플릭스 <킹덤>에 K-좀비가 있다면, <조선 흡혈귀전>에는 K-흡혈귀가 있다! 이 책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흡혈귀를 물리치는 열두 살 흡혈귀 감별사 소녀가 등장하는 이야기로, 그 동안 역사 속 인물과 고전을 화소로 삼아 정갈하고도 성찰적인 소설을 써 온 설흔 작가의 역사 판타지 동화이다.

 

생각보다 꽤 오싹하게 만드는 삽화들이 수록되어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물론 매체의 발달로 좀비니, 흡혈귀니 하는 것들을 많이 접해본 탓에 요즘엔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읽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스무 고개 탐정 시리즈>의 고상미 작가가 그림을 맡아, 짙고 강렬한 연필 선 위에 피와 욕망을 상징하는 붉은색, 빛을 상징하는 노란색, 강조를 나타내는 파란색 등 절제된 몇 가지 색깔로 흡혈귀가 사는 조선 시대를 그려 내고 있다. 주체적이고 당당한 어린이 주인공, 흡혈귀 감별사의 탄생이 앞으로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지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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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비디오, 사이코 게임 킴스톤 2
안젤라 마슨즈 지음, 강동혁 옮김 / 품스토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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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대장, 잠 못 잔다고 투덜거린 거 죄송합니다."
"네가 진심으로 한 말이라고 생각했으면, 넌 이미 짐 싸서 집으로 가고 있었을 거다."
케빈은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갔다. 그는 괜찮은 형사였지만, 킴은 괜찮은 것 이상을 요구했다. 그녀는 팀원들을 더 나은 경찰관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으며 그들을 강하게 압박했다. 경찰 업무는 출근 도장을 찍으면서 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일자리만을 원하는 팀원이 있다면 맥도날드로 가서 하루 종일 햄버거를 만들면 될 일이었다.      p.76

 

경찰서 내에서 차갑고, 사회성이 떨어지며, 감정이 없는 인간으로 유명한 킴스톤 경위. 하지만 그를 대장이라 부르는 팀원들은 그녀의 겉모습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면모와 업무적으로 매우 유능한 경찰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사내 인사고과에서 킴에서 개선이 요구된 부분은 언제나 딱 하나였다.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기. 하지만 킴은 사교술이니 외교력 같은 건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발명한 거라고 생각했고, 타인들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타고나지 못한 사람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쉽게 배울 수 있는 예절, 혹은 사교성을 전혀 갖추지 못했지만, 그녀는 지능이 높았고, 목적의식이 강했다. 킴스톤은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굳게 믿었으며, 정상 참작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저지른 짓이 있으면 대가도 치러야 하는 것이며, 오로지 그것을 위해 직진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대시를 받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성이 이렇게 냉소적이고 뾰족한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은 당연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신 병원에 있는 엄마, 어린 시절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갖고 있는 죽은 동생, 그리고 수차례 위탁가정을 전전해야 했던 기억 등 어두운 과거가 현재의 그녀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전편에 이어 두 번째 작품에서도 사건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수시로 킴스톤의 과거가 드러난다.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과거가 어떻게 현재를 만들었는지, 그녀가 운명에 맞서 싸워온 과정이 모자이크 퍼즐처럼 한 조각씩 맞춰진다. 그래서 이 시리즈는 중심이 되는 사건 플롯 자체도 흥미진진하지만, 킴스톤이라는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는 과정에서 압도적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19개국 번역 출간, 누적 판매 200만권 돌파라는 기록은 바로 제대로 된 걸크러쉬를 보여주는 킴스톤이라는 캐릭터에서 탄생한 것이니 말이다.

 

 

 

처음에 배리가 사랑하는 아내와 형을 살해하려 했다는 소식은 알렉스의 기대를 넘어선 것이었다. 살을 에는 바람을 맞으며 주차장 꼭대기에 서 있던 잠깐 동안, 알렉스는 배리야말로 그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느꼈다. 진정한 소시오패스는 도덕적 책임감을 결코 느끼지 못한다. 절대로 타고난 본성을 거부하고 죄책감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실험에는 딱 한 번의 성공만이 필요했다. 죄책감이라는 본능을 거부할 단 한 사람. 잠깐이지만, 배리는 그녀가 거둔 성공이었다.     p.230

 

<너를 죽일 수밖에 없었어>에서는 옛 보육원 부지의 유물 발굴사업을 배경으로 10년이 넘는 세월을 넘나드는 연쇄살인을 다루었었다. 이번 작품 <상처, 비디오, 사이코 게임>에서는 성범죄자의 살인사건을 배경으로 타인의 심리를 조정하는 소시오패스가 등장한다. 유능하고, 매력적인 정신과 의사인 알렉스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절대로 멈추지 않는, 무자비하면서 전혀 양심이 없는 인물이다. 킴은 명확한 증거가 없음에도 직감적으로 알렉스에게 뭔가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고, 알렉스 역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킴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킴은 홀로 알렉스에 대해서 조사를 시작하고, 알렉스는 킴의 과거를 찾아 점점 그녀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킴은 알렉스에게 최고의 도전 대상이었고, 알렉스는 킴에게 막강한 적이었다. 최고의 걸크러쉬 형사 반장과 소시오패스 정신과 의사의 정면 대결이 숨가쁘게 펼쳐지며, 한시도 페이지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작품이다.

 

전작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반년 만에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 출간되어 매우 반가운 마음으로 만나보게 되었다. 안젤라 마슨즈의 킴스톤 시리즈는 현재까지 총 13편이 출간되어 있다. 2015년 시리즈 첫 작품을 출간한 이래, 한 해에 두 편에서 세 편을 꾸준히 내고 있으니 작가가 얼마나 성실하게 작품을 써내고 있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만큼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기에 가능한 것일 테고 말이다. 국내에 소개된 것은 'Silent Scream' (너를 죽일 수밖에 없었어), 'Evil Games' (상처, 비디오, 사이코 게임) 이렇게 두 작품이다. 재미있는 것은 번역본 두 작품 모두 원제와는 상관없는 제목을 붙였다는 건데, 앞으로 나올 작품들은 제목이 또 어떻게 붙여질 지 기대가 된다.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Lost Girls' 에서는 우리의 킴스톤이 또 어떤 일들과 마주하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국내에서도 부지런히 출간해주시길, 앞으로 읽을 수 있는 킴스톤 시리즈가 많이 남아 있다는 생각에 든든한 기분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 등을 번역한 역자가 오직 이 시리즈를 출간하기 위해 출판사를 차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는데, 두 작품을 읽고 보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리즈가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아서 계속 출간될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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