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독서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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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만 다르게 들리는 소리가 있다.
내 목소리다.
나는 나 자신에게 늘 착각이다.    p.311

 

박노해 시인은 2014년에 시작해 7년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박노해의 걷는 독서>를 연재 중이다. 이 책은 그렇게 연재한 2,400편의 글 가운데 423편의 글을 엄선해 묶었다. 그리고 각각의 페이지에는 글에 맞는 컬러사진을 수록해 글과 함께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전체 페이지가 880페이지나 되어 마치 사전처럼 느껴지는 두께감의 책이지만,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듯한 판형이라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도 무리가 없다. 각각의 페이지에 하나의 글과 사진만 수록했기 때문에, 매일 아무 페이지나 들춰서 읽어도 좋을 것이다.

 

다만 책에 수록된 사진 크기가 너무 작아서 제대로 그 정취를 느낄 수 없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책을 읽으면서 수록된 사진들이 궁금했다면, 서촌 '라 카페 갤러리'에서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展이 진행되고 있으니 가보면 좋을 것 같다. '박노해의 걷는 독서' 2,400편 중 엄선한 57점의 작품이 특별 전시되고 있으며, 전시관람은 무료이다.

 

 

 

오늘은 오늘로 충분한 것.
오늘의 실망도 미움도 괴로움도 그만 접자.
새도 지친 날개를 접는다.
접어야 다시 내일의 창공을 날 수 있으니.     p.759

 

이 책에는 내가 가장 상처받는 지점이 내가 가장 욕망하는 지점이다, 일을 사랑하지 말고 사랑이 일하게 하라, 살아있는 모든 이는 죽은 자를 딛고 서 있다, 기를 쓰지 말고 마음을 써라, 나 어떻게 살 것인가 막막할 때는 어떻게 살지 말 것인가를 생각하라.. 등등 단 한 줄로도 충분한 글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이 책은 에세이이자 편지이자, 고백록이자 명언집처럼 읽히기도 한다. 짧은 한 줄의 문장들은 영어로도 함께 읽을 수 있도록 페이지가 구성되어 있다. 한국문학 번역의 독보적인 대가 안선재 서강대 명예교수가 박노해 시인의 작품세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번역하여 우리말의 깊은 뜻과 운율까지 살린 영문을 나란히 수록하였다.

 

시인은 서문에서 '우린 지금 너무 많이 읽고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이 경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잠시도 내면의 느낌에 머물지 못하고 깊은 침묵과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고 말이다. 사진의 크기를 줄이고, 짧은 문장들만 수록해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매 페이지마다 여백의 미가 충분히 느껴지는 책이다 보니, 책을 읽으면서 나의 책읽기에 대해서 돌아보게 되었다. 시인의 말처럼 너무 많은 책들을, 한꺼번에 많이 내 속에 담으려고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바쁘게 앞만 보면서 달려가다 보면 놓치는 것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정보들을 쏟아 붓다 보니, 읽었던 책들도 기억이 잘 나지 않거나,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 지식들이 결국 희미해져 버리기도 한다. 천천히 풍경을 즐기면서 걸을 때처럼, 그렇게 속도를 조금 늦추고 주변을 돌아보면서 책을 읽는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지금,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이런 저런 일로 스트레스가 가득하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만한 책을 찾는다면,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를 만나 보자.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필사하기에도 좋고, 짧은 시간에 잠깐 읽기에도 좋다. 위로와 희망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선물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예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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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의 마인드 : 결정적 순간에 차이를 만드는 힘 - 자신과의 싸움에서 무조건 이기는 멘탈 트레이닝
짐 아프레모 지음, 홍유숙 옮김 / 갤리온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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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를 시작할 때 심판은 "플레이 볼!" 이라고 외친다. 공으로 일이 아니라 놀이를 하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매우 직관적이고 단순한 사실이 숨어 있다. 스포츠는 놀고, 즐기며,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함께 웃으면서 즐기면 팀원들끼리 강력한 연대가 생긴다. 물론 이때 이야기와 농담에는 비열한 의도가 숨어 있지 않아야 한다. 경험을 즐길수록 성적은 점점 더 좋아진다. 게임에서 어떤 점이 재미있고, 즐겨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면 성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p.90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는 이런 말을 했다. "스포츠란 90퍼센트의 정신력과 10퍼센트의 신체로 이루어진다." 라고. 위대한 테니스 선수 노바크 조코비치는 "우수한 선수 100명은 체력에서 큰 차이가 없다. 중압감을 견디고, 결정적인 순간에 놀라운 결과를 만드는 힘은 정신력에서 나온다." 라고 말했다. 그러니 선천적으로 재능을 타고난 선수라 하더라도, 혹은 뛰어난 체력만으로는 높은 성적을 거둘 수 없다는 얘기다. 정신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정신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운동에 대한 감각이나 기술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꽤나 놀라운 얘기다.

 

스포츠 심리학자인 저자 짐 아프레모는 수십 년간의 실전 경험과 경기력 향상에 관한 심리 연구를 바탕으로, 이 책에서 멘탈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안한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나 최고 기록을 갈아 치우는 운동 선수들처럼 최강의 정신력으로 무장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팀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운동선수든, 직장인이든, 학생이든 상관없이 누구라도 이 책을 통해서 동기부여를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도록 말이다.

 

 

 

루틴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다. 불필요하게 신경 써야 하는 일을 막아주기도 한다. 남이 던지는 생각 없는 충고나 당신의 멘탈을 흔들기 위해 경쟁자가 툭 던지는 날이 선 말들로부터 나를 보호해준다. 경기 전에는 자신과 관계없는 것을 깨끗이 무시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선수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눈을 감고 계획대로 경기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한다.     p.250

 

올림픽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시청하는 최대 규모의 스포츠 이벤트이다. 곧 있으면 개최될 도쿄 올림픽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 지금도 많은 종목의 선수들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이 책 속에서 등장하는 위대한 운동선수들이 말해주는 조언을 통해서 진짜 챔피언의 마인드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외부로 드러난 점수보다 '마음속' 금메달을 따내는 것이 궁극적인 승리라는 점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모든 난관을 무릅쓰고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치로 보여준 사람'이 진정한 챔피언이라는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인 던컨 암스트롱, 2010년 벤쿠버 동계 올림픽 스켈레톤 금메달리스트 존 몽고메리,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조정 금메달리스트 애덤 크릭,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장대높이뛰기 금메달리스트 닉 하이송 등등.. 이 책에는 수많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의 사례가 수록되어 있다.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훈련했는지, 챔피엄의 마인드를 갖추기 위해 어떤 여정을 지나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 각각의 스토리들이 모두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흥미로워 스포츠 분야에서만 만들어낼 수 있는 희노애락을 좋아한다면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그리고 꼭 운동선수가 아니더라도, 운동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더라도 '누구나 인생에서 강한 멘탈이 필요한 순간'을 한 번쯤은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가 챔피언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법을 배워서 알고 있다면, 각자의 인생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 속에서 소개하고 있는 여러 사례들을 통해, 극한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면서 얻은 교훈과 직설적인 충고들을 배워 보자. 그들의 놀라운 이야기가, 어느 순간 내 삶의 결정적 순간에 도움이 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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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시간 스토리콜렉터 94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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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나는 우리 둘이 왜 절대로 함께할 수 없는지 명확하게 깨닫고 힘이 빠졌다. 폴 서튼의 현실은 록브리지의 작은 세계였다. 부유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살면서 늘 행운이 따랐다. 실패한 첫 번째 결혼 말고는 이렇다 할 풍속 위반이 없었다. 죽음의 공포를 느낀 적도, 사이코패스의 잔혹한 눈을 마주한 적도 결코 없었다. 굶은 적도, 도망쳐야 했던 적도, 누군가 그의 뜻해 반해 폭력을 가한 적도, 그에 대해 나쁜 말을 한 사람도 없었다. 폴은 36년 내내 인생의 양지에서 살았고, 그래서 내가 싸워야 하는 그늘을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p.50

 

넬레 노이하우스의 ‘셰리든 그랜트 시리즈’ 3부작이 드디어 완결되었다. 2015년 1월에 만났던 <여름을 삼킨 소녀>, 2016년 5월에 만났던 <끝나지 않는 여름>에 이어 6년 만에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폭풍의 시간>이 출간되었다. <여름을 삼킨 소녀>에서 열다섯 주인공 셰리든은 강간, 낙태에다 우발적인 살인까지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순간들은 모두 맞닥뜨렸다. 이어 <끝나지 않는 여름>에서 열일곱이 된 셰리든은 시작부터 충격적인 살인 사건을 마주하게 되고, 이 모든 비극의 원흉이 되어 의붓오빠들을 유혹한 배은망덕한 입양아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저 사랑받고 싶었을 뿐인 10대 소녀에게 너무도 많은 시련과 고난이 있었고, 덕분에 너무도 파격적인 행동과 거침없는 사랑을 벌이는 모습으로 그다지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 작품 <폭풍의 시간>에서는 스물한 살의 결혼을 앞둔 셰리든이 등장한다. 그녀는 네브래스카의 천박한 여자아이나 대량학살자의 여동생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캐럴린 쿠퍼라고 이름까지 바꾸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하는 참이다. 그런데 웨딩드레스 피팅을 보러 간 날 결코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남자 이던에게 납치를 당한다. 이던은 잔인한 포주로 과거 그녀의 보스이자 애인이었고, 그의 말에 따르면 셰리든은 25만 달러의 빚을 지고 있었다. 그녀는 현재 약혹자인 폴에게 과거의 이야기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셰리든은 이던과 그의 수하들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다 교통사고를 냈고, 덕분에 그들로부터는 벗어났지만 약혼자에게 과거의 일을 전부 밝혀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그리고 결국 폴과 헤어지고, 네브래스카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과거가 놓아주질 않네요. 그렇죠?” 나는 우울한 기분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식어서 쓴맛이 났다.
“셰리든, 누구도 과거에서 도망칠 수 없어.” 아버지가 대답했다. “자기 삶의 구성요소로 만들고 그것과 화해할 수 있을 뿐이지. 지금 여기를 사는 것, 그리고 지나간 것과 앞으로 올 것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아. 우리는 그 두 가지 모두에 아무 영향도 끼칠 수 없으니까.”     p.254

 

셰리든은 그렇게 5년 만에 네브래스카로 돌아온다. 자신이 평생을 알던 호의적인 사람들에게로, 그녀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어떤 조건도 내걸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냥 인정해주는 사람들에게로 말이다. 셰리든은 자신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며,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서 버림받았다는 느낌과 외로웠던 감정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그 동안 필사적으로 사랑과 인정을 찾으려고 여러 남자를 만나왔고, 상처를 받을수록 절망감은 커졌으니, 같은 실수를 반복해 왔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새로운 시작을 해볼 수 있을까.

 

극중 셰리든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했던 말처럼 '인생이란 결정의 연속'이다. 우리는 대부분 감정에 따라 대부분의 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는 우연이나 운명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 자신이 내린 결정의 총체일 뿐이다. 세 작품을 거쳐 오면서 셰리든에게는 굉장히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마지막 이야기에서도 그녀는 수 많은 결정과 기회 속에서 누구를 믿고 누구를 믿지 말아야 할 지, 스스로는 얼마만큼 믿어도 되는 건지, 갈등하고, 고민하고,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그녀에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낮에는 잠잠했던 과거의 유령들이 밤에는 악몽이 되어 그녀를 괴롭혔고, 속수무책의 분노와 눈물, 그리고 얼굴로 피가 솟구치는 것 같은 수모를 겪기도 한다. 그저 한 소녀의 성장통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일들을, 그야말로 폭풍같은 시간을 거쳐온 셰리든이기에 그래도 결국에는 희망으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가 되기를 바라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읽었다.

 

셰리든 그랜트의 동화 같은 이야기가 결국 어떻게 완결이 될지는 직접 책을 통해 만나보아야 한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로 대표되는 '타우누스 시리즈'로 독일 미스터리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넬레 노이하우스지만, '셰리든 그랜트'시리즈 또한 그에 못지 않는 수작이기 때문이다. 넬레 노이하우스는 자신의 모든 여자 주인공 가운데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인물이 셰리든이라고 말했다. 작가의 '타우누스 시리즈'를 좋아했다면, 그녀가 특별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인물인 셰리든의 이야기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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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메론 프로젝트 - 팬데믹 시대를 건너는 29개의 이야기
빅터 라발 외 지음, 정해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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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코를 훌쩍였다. "우리 같은 여자들조차 우리 같은 여자들을 무서워하지."
나는 마스크를 내렸다. 마치 그것이 정말로 해야 할 말을 방해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여전히 마땅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전생을 믿어?"
"당신이 내게 처음 물어본 말이네요."
"엘리베이터에서 널 처음 봤을 때, 난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걸 알았어. 알아본 거지. 가족을 만난 것 같았어."     - 빅터 라발, '알아보다' 중에서, p.29

 

뉴욕에서 좋은 아파트를 구하기란 쉽지 않지만, 나는 6층짜리 공동주택에 있는 괜찮은 원룸을 찾아냈다. 그리고 2019년 12월에 이사를 했는데, 이후 바이러스가 세계를 덮쳤고 4개월 반 만에 북적이던 건물은 텅 비어 버렸다. 그곳은 감염 취약 지구였기에, 일부는 별장으로 떠났고, 일부는 도심 외곽에 있는 부모님과 지내러 갔고, 늙고 가난한 이들은 병원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 즈음 4층에 사는 한 여자, 필라를 만났다. 이사 온 달에 마흔이 된 나보다 스무 살쯤은 더 많아 보이는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전생을 믿나요?" 낯을 가리는 성격의 나는 그 질문에 대해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고, 그렇게 그녀와 헤어진 채 6층으로 올라온다.

 

도시의 봉쇄조치에도 부모님은 집으로 오라고 하지 않았고, 딱히 갈 데가 없었던 나는 그렇게 홀로 지내는 일상에 익숙해진다. 재택 근무에 익숙해지고,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마스크를 한 채로 생사 여부를 확인하러 들르는 건물 관리인과 가끔 슈퍼마켓에 같이 가는 필라 밖에 없었다. 봉쇄는 3개월째에 접어들었고,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남겨진 그들의 삶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여전히 팬데믹 시대의 한복판에 살고 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전염병의 시대를 견뎌야 하는 우리에게 소설가 29명이 써 내려간 이야기는 어쩐지 뭉클하다. 고립된 시간과 제한된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에게 지구 반대편에서도 누군가 우리처럼 두려워하고 있으며,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때 새벽의 첫 햇살과 정오의 현기증 나는 햇빛 사이의 특정할 수 없는 어떤 순간, 시간이 더 이상 의미를 지니기를 멈추었다. 팡파르도, 어떤 소리도, 이례적인 무언가를 알리기 위한 시끄러운 소음도 없었다. 당신은 어쩌면 시계가 마비되고 달력이 뒤죽박죽이 되고 밤낮이 뒤섞이고 하늘이 회색으로 물드는 것 따위를 상상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의미가 제거된 시간은 집단적인 사건이었지만, 그럼에도 절대적으로 사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무기력과 무관심, 이상하고 심각한 일종의 허탈감 말고는 아무것도 촉발하지 않았다.      - 줄리언 푸크스, '죽음의 시간, 시간의 죽음' 중에서, p.301

 

유럽에서 흑사병이 번지며 수많은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잃었던 14세기, 이탈리아의 문호 조반니 보카치오는 특별한 소설로 동시대 사람들에게 눈물과 웃음을 선사했다. 바로, 피렌체 근교의 저택에 피난해 있던 사람들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 소설 형식의 《데카메론》이다. 《뉴욕타임스》의 편집자들은 700여 년 전 《데카메론》이 공포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처럼,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 집필한 단편소설들을 한데 모으는 '데카메론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이 앤솔로지는 2020년 7월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29편의 단편들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으로, 세계 각지의 작가들이 팬데믹으로 고립된 시간과 제한된 장소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한 불안과 공포, 고통과 슬픔, 그리고 희망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 빅터 라발, 리즈 무어, 레일라 슬리마니, 데이비드 미첼 등 작가 29명이 풀어내는 짧은 이야기들이 두려움과 고통을 이겨내는 문학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격리 중에 쓰인 신작 단편소설들을 모아 '우리 시대의 <데카메론>'을 만들어보자는 근사한 취지에서 출발한 이 책은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를 안겨준다. '최고의 소설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멀리 데려갈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니 말이다. 지구촌 곳곳의 상황에 비해서 국내의 방역 수준은 안전한 편이었지만, 연일 신규 확진자 수가 최다 기록경신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요즘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러한 상황도 모두 끝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우리는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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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10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맥락으로 불안한 사람들 좋은 것 같아요 :-)
글 너무 잘 읽고 갑니다~
 
십 년 가게 5 - 한가할 때도 있습니다 십 년 가게 5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사다케 미호 그림,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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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시, 왜 그러니? 너답지 않구나."
"그, 그게... 아니에요."
"안 되지. 손님의 물건을 탐내면 규칙 위반이야."
"알고 있습니다."
카라시는 힘없이 대답하면서도 피냐를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피노는 카라시의 마음을 이해했다. 뭔가 갖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 안다.     p.86

 

<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 시리즈의 히로시마 레이코가 시간의 마법을 소재로 그려낸 판타지 동화 <십 년 가게>가 어느 새 다섯 번째 이야기로 찾아왔다. 이번 작품의 부제는 '한가할 때도 있습니다'인데, 손님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계약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 십 년 가게가 한가해졌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마스터가 '손님이 와도 도통 물건을 맡기지 않고, 마법을 쓸 기회가 없어 실력이 녹슬 것 같다고 걱정을 하겠는가. 하지만, 십 년 가게가 지루하고 따분하기만 할 리가 없다. 마법사와 고양이 카라시는 십 년 가게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낼까?

 

 

'십 년 가게'는 아끼는 물건이라 버릴 수 없는, 추억이 담긴 거라 소중하게 보관하고 싶은 그런 물건들을 손님의 마음과 함께 보관해준다. 마법으로 십 년간 보관되는 동안 그 물건은 처음 맡겼던 그 상태 그대로 보존된다. 단 마법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고, 이 가게는 대가로 손님의 시간을 받는다. 내가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이 보관되는 동안 절대 낡거나 상하지 않는다면, 그 대가로 나의 수명을 일 년 줘도 괜찮은 걸까? 가게를 찾아온 손님들은 이런 계약 조건을 듣고는 망설이지만, 대부분 자신의 수명을 지불하고 물건을 맡긴다.

 

 

"카라시, 포 님을 존경합니다."
"나도 그래. 그나저나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포 님이 일부러 감기에 걸렸단 말, 트루 님에게는 절대 하면 안 된다?"
"알고 있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비밀이랍니다."
쉿! 카라시가 입 바로 앞에 발가락을 번쩍 세웠다.     p.134

 

이 시리즈에는 매 작품마다 새로운 마법사가 등장해왔다. 1권에서는 마법사 트루, 2권에서는 색깔을 만드는 마법사인 텐과 카멜레온 팔레트, 3권에서는 날씨를 바꾸는 마법사 비비, 그리고 4권에서는 봉인 가게의 포가 등장했다. 이번 작품에서는 은행 가게의 기라트 씨이다. 밤하늘처럼 까무잡잡한 피부에 은화처럼 번쩍이는 은발을 지닌, 위엄이 넘치고 빈틈없는 성격으로 사실 마법 골목에서 가장 무섭게 생긴 마법사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번 작품 표지에는 새로운 마법사가 아니라 '장화 신은 고양이' 캐릭터가 있는데, 이 고양이가 누구인지는 이야기를 직접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이번 작품에는 7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꽃병에 살고 있는 유령 이야기, 말하는 해골을 만난 겁쟁이 소년, 할머니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 싶은 아이, 카라시가 반해버린 인형에 얽힌 사연, 그리고 나쁜 마음으로 물건을 맡기려 한 심술궂은 소녀의 이야기와 어떤 청년의 감기가 든 병을 사간 마법사의 이야기까지 흥미로운 사연들이 가득하다.

 

이 시리즈는 어른이 읽기에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랑스러운 책이고, 전천당 시리즈를 좋아했던 아이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누구나 각자의 이유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물건들이 있을 테니, 시간의 마법 대상이 되는 스토리들이 공감하기 쉬운 사연들이기도 하고 말이다. 히로시마 레이코가 들려주는 시간의 마법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꼭 시리즈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읽는 데 무리가 없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책부터 골라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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