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그림책 매일 듣기의 기적 - 엄마표 영어의 성공과 실패는 ‘듣기 환경’이 결정한다!
고은영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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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도 우리말처럼 충분히 들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우리말은 스스로 노력하지 않아도 어디를 가나 들리지만 안타깝게도 영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가 영어 듣기에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은 오로지 엄마가 만들어주는 환경이 전부입니다. 따라서 영어도 우리말처럼 아이들이 충분히 들을 수 있도록, 그리고 제대로 지속될 수 있도록 듣기 환경을 꾸준히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p.30

 

수학과 마찬가지로 영어도 초등학생 때부터 속칭 '영포자(영어 포기자)'가 속출하고 있으며, 이런 아이들에게는 공교육 자체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되어 버린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소위 '엄마표 영어'에 부모들의 관심이 많아졌다. 보통 공교육에서 영어를 배우는 시점은 초등학교 3학년이다. 이 시기 '이전'부터 집에서 오디오 자료와 원서를 활용해서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을 소위 '엄마표 영어'라고 한다. 엄마표 영어는 사실 초등학교까지가 최적기라고 해서 관심을 가지고 찾아 보던 중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13년간 세 아이를 엄마표 영어로 키웠고, 영어 그림책과 영어 놀이를 하며 얻은 노하우를 네이버 카페 '키즈북토리'를 통해 공유하고 있다. 저자가 처음 엄마표 영어를 시작할 때만 해도 영어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그저 평범한 엄마였다고 한다. 우연히 큰애가 6살, 둘째가 4살 때 신문에서 본 기사를 통해 '엄마가 영어를 못해도 아이에게 영어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어느 새 첫째와 둘째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지금은 9살 막내와 엄마표 영어를 진행하고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엄마표 영어 전문가'가 된 것이다.

 

 

대부분의 엄마 아빠는 영어의 비교급을 문법책에서 배웠을 거예요. '형용사나 부사의 원급에 -er을 붙이거나 몇 음절 이상이면 more를 앞에 붙인다. good의 비교급은 better로 규칙을 따르지 않아 시험에 잘 나온다.' 이런 식으로 말이에요. 하지만 비교급을 열심히 배우면 뭐하나요? 제대로 활용을 못하는데요. 반면 영어동화책으로 자연스럽게 영어를 접한 우리 아이들은 비교급, 최상급 같은 문법 용어는 모르지만 이런 표현들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됩니다.    p.207

 

파닉스나 리딩보다 듣기가 먼저 라는 것, 하루 2시간씩 즐거운 듣기 노출을 해주는 것만으로 아이가 스스로 리딩을 시작하고 영어책을 즐기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2시간을 한꺼번에 쭈욱 하는 게 아니라, 틈틈이 시간을 확보해서 활용하면 된다고 하니 아이에게도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단계별 듣기 노출 방법, 투투텐 영어 그림책 듣기 프로젝트 등 지금 당장이라도 실천해볼 수 있도록 구체적인 단계별 예시가 수록되어 있어서 굉장히 도움이 되었다.

 

물론 막상 시작해보려고 해도 우리 아이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어떤 영어 책으로 시작해야 흥미를 느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 책에는 영어 그림책 추천도서가 무려 100권 수록되어 있다. 게다가 책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함께 유튜브 QR코드가 함께 있어 해당 영어 그림책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내용을 확인해볼 수 있다.

 

 

100권의 영어 그림책은 10가지 테마에 맞춰 구분되어 있다. 익숙한 멜로디나 반복적인 리듬이 있어 음원이 재미있는 그림책, 아이가 따라 말하고 싶은 재미있는 표현이나 소리가 있는 패턴 그림책, 좋은 생활 습관이 담긴 그림책, 펼치고 뒤집으며 보는 조작 그림책, 아이디어가 넘치는 기발한 내용의 창의력 그림책 등등 테마 별로 되어 있어 책을 고르기에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엄마표 영어 6단계 로드맵>이 수록되어 있는데, 영어 소리와 친해지는 것을 시작으로, 단계별 영어책을 읽고, 다독과 정독을 하고, 스스로 읽고 쓰는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쉽게 설명되어 있다. 엄마표 영어의 성공과 실패는 ‘리딩 레벨’이 아닌 ‘듣기 환경’에 달려 있다고 하니, 아이가 어렸을 때 딱 2년만, 행복하게 듣기 환경을 만들어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책을 한글책처럼 즐기는 아이로 자라게 하고 싶다면, 지금 막 엄마표 영어의 시작점에 있다면 이 책이 굉장히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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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놀이 스콜라 어린이문고 37
이나영 지음, 애슝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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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기가 막혀서... 상처 놀인지 그거 아직도 하는 거야?"
선생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평소 아이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선생님이 이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가영이가 조심스럽게 상처 그림이 그려진 손을 책상 아래로 숨겼다.
"그런 건 놀이가 아니야. 너네한텐 장난일지 모르지만 진짜 상처가 있는 사람한테는 끔찍한 고통이라는 걸 생각해. 그리고 그딴 거 만들어서 뭐 하려고 그러니?"    p.33

 

'상처 놀이'라니. 상처가 어떻게 놀이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제목이다. 제목을 보고 자연스레 몇 해전부터 청소년들 사이에 SNS를 통해 자해 인증을 하는 게 유행이라는 기사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상처 놀이는 자해까지는 아니지만, 스스로 자기 몸에 상처를 그리는 놀이라고 한다. 자연스레 아이들은 왜 상처로 놀이를 하게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시원이와 엄마는 아빠의 폭력을 피해 현관문을 열고 도망을 가는 일이 잦았다. 두 사람은 아빠를 피해 나갈 때를 대비해 외출복과 지갑을 미리 챙겨두곤 했다. 시원이는 아빠가 원망스러웠고, 자신과 엄마에게도 다시 행복한 날이 올지 의문이었다. 다음날 찜질방에서 곧바로 학교에 간 시원이는 짝꿍인 가영이 주변에 아이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본다. 가영이는 자기 손에 가짜 상처를 그려놓고 으스대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시원이는 엄마와 자기 몸에 있는 진짜 상처들이 생각나 짜증이 났다.

 

상처는 징그러운 게 아니라 아픈 거고, 상처는 놀이가 될 수 없다고 시원이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상처 놀이에 열광했고, 시원이는 가영이와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원이는 이제껏 식물이 말을 한다는 얘기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목이 마르면 시들어서 물을 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햇볕이 부족하면 노랗게 색이 변하거든. 그럼 그때 물을 주고 햇볕을 쬐게 하면 돼. 물론 그렇게 되기 전에 보살피는 사람이 잘해야 하지. 얘네들이 무조건 참고 기다리기만 할 순 없잖아."    p.101

 

며칠 뒤, 선생님의 부탁으로 시원이는 가영이와 함께 시든 화분을 옮기는 일을 돕게 된다. 커다란 비닐하우스로 된 화원은 '비밀의 화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시원이는 그곳에서 화초 돌보는 일을 하게 되는데, 가영이와는 여전히 티격태격했지만 식물을 키우면서 점점 그곳이 더 편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화원에 불이 나고 그들의 아지트는 철골 구조물만 남은 채 타버리고 만다.

 

과연 불이 난 이유는 무엇이며, 가영이의 알 수 없는 행동들은 어떻게 된 걸까. 시원이는 가영이와 가까워질 수 있을까? 시원이네 가족은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약을 바르거나 시간이 지나면 회복이 되는 몸의 상처도 있지만, 마음까지 병들게 하는 보이지 않는 상처도 있다. 가영이도, 시원이도 각각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타인이 헤아려주기도 어렵고, 스스로 이겨 내거나 떨쳐 내기도 쉽지가 않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헤아려 주면 좋겠지만, 현실에서 그러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렇게 받은 상처로 인해 아예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아이들이 실제로 얼마나 많을까 싶은 생각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작품은 부모님의 폭력과 무관심에 상처받은 두 아이가 자신만의 방법으로 상처를 극복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자신의 진짜 상처를 들킬까 봐 마음을 감추고 문을 닫아 버린 아이와 가짜 상처를 그려 상처 놀이로라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은 아이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외롭고, 힘겹다. 극중 가영이와 시원이가 각각의 상처를 어떻게 느끼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보면서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영이와 시원이도 용기를 내고, 상처를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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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원하는 것을 모른 채 부모는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오연경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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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행동에 화가 나고 미워 보이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아이가 미운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싫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이가 정리를 안 할 때 특히 화난다면 어릴 때 정리하지 않아서 크게 혼난 적이 있는지, 아이가 쭈뼛거릴 때마다 또래 관계가 힘들었던 나의 모습이 떠올라 다그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이유를 찾았다면 어린 시절의 나한테 얘기해주세요... 내가 인정하기 싫은 나의 모습을 내가 다독이고 사랑해줘야... 내 아이에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p.48

 

처음부터 부모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기에, 누구나 다 육아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좌절하는 경험을 한 번쯤은 하게 되는 것 같다. 아이는 언제나 내 맘 같지 않고, 어디선가 배운 대로 아이에게 잘해보려고 해도 막상 상황이 닥치면 마음의 여유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온갖 매체에서, 각종 책에서 육아에 관련된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이지만, 사실 이론으로 배우는 육아 정보란 사실 현실과는 어느 정도 괴리가 있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성격도, 행동도, 사고방식도 아이마다 모두 다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나 역시 육아와 관련된 서적을 꽤나 많이 섭렵한 편이지만, 실제로 그 정보들이 도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던 차에 티비 프로그램 '금쪽 같은 내 새끼'에서 오은영 박사가 아이의 문제를 부모의 어린 시절로 연결시켜 원인을 파악하고, 부모에게 위로를 해주는 것을 보고 눈물이 핑 돈 적이 있다. 왜 내가 그 동안 숱하게 읽었던 육아서에서는 이런 얘기를 들려준 적이 없었을까 아쉽기도 했고 말이다. 이번에 만난 아동 발달 및 부모 교육 전문가, 오연경 박사의 첫 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아쉬움들이 해소되는 듯한 기분, 부모로서 위로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육아서는 처음이었기에, 왜 이제야 이런 책을 만났나 싶은 마음도 들어서 아이때문에 고민 중인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적극 추천해주고 싶었다.

 

 

 

많은 부모가 사랑을 표현할 타이밍을 놓칩니다. 아이가 다가올 때 반갑게 반응해줘야 하는데 설거지를 한다고 "잠깐만!" 같은 거부적 표현으로 첫 번째 타이밍을 놓칩니다. 하원 후에는 일방적으로 아이에게 궁금한 일을 물어보느라, 밥 먹이고 씻기느라 두 번째 타이밍도 놓칩니다. 심심하다고 투덜대는 아이에게 다가가면 놀아달라고 할 것 같아 피하면서 세 번째 타이밍까지 놓쳐버리죠... 애정 표현을 해야 할 타이밍은 부모의 상황에 따라 여유로울 때나 아이가 귀여워 보일 때가 아닙니다. 힘들더라도 아이가 원할 때, 아이의 입장에서 부모를 필요로 할 때라는 점을 기억해주세요.     p.229~230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란 없을 것이다. 세상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 사랑을 얼마나 자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느냐가 마음의 크기보다 더 중요하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전혀 모른 채 부모가 하고 싶은 대로만, 자기 방식대로만 사랑을 표현한다면 부모 자식 사이에도 오해가 쌓이고 갈등이 깊어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책을 읽다가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운데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다면 '어린 시절에 부모와 눈을 맞추고 따뜻한 말을 많이 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내가 많이 힘들었구나' 하고 나 자신을 먼저 위로해주라는 대목에서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부모도 사랑을 표현하는 데 서툴 수 있다. 서툰 부모의 잘못을 말하기 전에 먼저 보듬어 주는 방식의 육아서를 만난 적이 없기에 놀랍기도 했고, 뭉클한 기분도 들었다.

 

특히나 이 책은 사랑과 훈육 사이에서 갈팡질팡 고민하는 부모들에게 아이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오해 없는 훈육으로, 부모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아이가 알아듣기 쉽도록, 아이가 바라는 말과 행동으로 부모의 마음을 표현해주지 않으면 아이는 모든 다는 것.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무리 깊어도 그것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부모도 아이를 위해 여전히 공부하고, 연습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말이다. 아이는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자신이 있는 그대로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믿음을 견고하게 다져줄 수 있는 실용적 육아 노하우들을 가슴에 새겨 두었다. 아이에게도 세상 모든 것이 처음이지만, 엄마도 마찬가지로 매 순간이 처음 겪는 일들 투성이라 너무도 어렵기만 한 것이 당연하다. 그럴 때 이 책이 곁에 있다면, 든든한 가이드가 되어 이끌어 줄 것 같다. 아무리 애써도 아이의 마음을 읽기 어려운 세상의 많은 부모들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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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 수상한 서재 4
하승민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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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인간을 약하게 만든다. 약점이기 때문에 비밀이다. 그러니 비밀을 털어놓는 건 신뢰 속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내 등에 칼을 꽂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괜찮은 거였다. 어떤 비밀은 털어놓지 않아야 하고, 어떤 비밀은 듣지 말아야 한다. 어떤 비밀을 지키고 털어놓을지는 경험이 알려줬다. 지아는 그런 경험을 쌓을 만큼 많은 인간관계를 맺지 못했다. 스물다섯의 청춘은 그래서 위태롭고 불안했다.   p.31

 

뉴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의 겨울, 스물 다섯의 지아는 치매병동의 간병인으로 일했다. 어린 시절 군인에게 쫓기던 청년을 도와주다가 어머니가 죽임 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한다. 게다가 어머니의 죽음은 어린 지아의 실수에서 비롯되었고,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녀에겐 제2의 인격이 생겨난다. 정신을 잃고 깨어 나면 기억하지 못하는 사달이 벌어져 있었고, 혜수라고 이름 붙인 그 인격은 지아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간병인으로 일하던 중 직장 동료에게 상해를 입힌 혜수로 인해, 지아는 피해자의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폭력을 당하게 되고,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려 보니 눈이 닿는 곳마다 검은 산이었다. 낯선 하늘, 처음 보는 나무, 젖은 흙냄새로 가득한 산속에서 메스꺼운 두통과 함께 눈을 뜬 지아는 자신이 삽을 쥐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발 아래, 구덩이 속에 반쯤 파묻혀 있는 젊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흙으로 덮지 못한 반쪽짜리 얼굴은 원망과 공포로 허우적거렸다. 그런데, 지아는 모르는 여자였다. 언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곧 해가 뜰 시간이었고, 지아는 사람들을 피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국도를 따라 서울을 향해 걸으며, 그곳이 묵진이라는 것과 혜수가 가져간 시간이 무려 19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묵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잃어버린 19년 동안 자신은 어떻게 살았던 걸까.

 

 

지아는 항우울제와 감기약을 한 번에 때려 넣었다. 비눗방울이 터지듯 푱푱 소리가 났다. 조용한 것들이 좋았다. 얼어 있고 정지해있는 것들을 사랑했다. 정지해있는 것들은 썩지 않았다. 변화하는 것들만 추한 모습으로 늙어갔다. 지아는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정적 속에 몸을 담갔다. 얼마 후 소용돌이치는 듯한 전동 드라이버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p.356

 

<콘크리트>라는 인상적인 데뷔작으로 호평받았던 하승민 작가의 신작이다. 이번 작품은 묵진이라는 가상의 항구 도시를 배경으로 다중 인격이라는 소재를 색다른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지아는 자신의 다른 인격인 혜수가 누구를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그리고 묵진에서 왜 그 오랜 시간을 머물렀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묵진으로 향한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을 찾기 위해서,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를 알아내기 위해서, 스스로가 남긴 자취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19년이 바꿔놓은 세상과 19년도 바꾸지 못한 세상이 교차편집 영상처럼 흐르는 가운데, 지아가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충격적이다.

 

 

다중인격, 혹은 해리성 장애라고 불리는 정신 질환은 스릴러 장르나 영화에서 꽤 다루어진 편이다. 다중인격이란 한 사람이 둘 이상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을 뜻하며, 보통 어떤 정신적 충격이 계기가 되어 마치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증상을 보인다. 원래 사람의 내면은 여러 가지 인격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특정 상황에 적응한 성격이기도 하고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캐릭터이기도 하다. 또한 누군가를 따라 하거나 상상해낸 성격일 수도 있다. 집에서는 얌전했던 내 딸이 친구들 사이에선 나서기 좋아하는 리더로 변신하고, 회사에서는 자주 소리 지르는 무서운 상사였지만, 집에 와서는 세상 누구보다 다정한 아빠가 되기도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내 속에 너무도 많은 나'중에서 가장 어둡고, 이질적이고, 거침없는 존재가 형상화된다면 어떨까. 게다가 그 존재는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었고, 어떤 것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면 말이다. 뒷수습은 가장 평범하고, 소심하고, 힘없는 '나'가 해야 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19년이라는 공백을 쫓는 여정이 고단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서사에 긴장감이 부여되고, 미스터리에 감정이입이 되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숨가쁘게 달려가게 되는 것이다.

 

육백 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분량을 압도적인 서사로 꽉 채우고 있어 지루할 틈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독특한 캐릭터의 힘과 날 것 그대로의 거친 묘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쉴 틈 없이 밀어붙이는 놀라운 작품이다. 문장이 거칠고 투박해서 세련된 맛은 없지만, 서사의 힘이 그 모든 것들을 상쇄하고 있어 앞으로 나올 다음 작품을 더 기대하게 만든다. 물론 그 전에 데뷔작인 <콘크리트>부터 챙겨서 읽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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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킬
아밀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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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진화한 여자들의 삶을 상상했다. 고통스러운 월경과 임신과 출산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어디로든 마음대로 다닐 수 있고, 누구에게 보호받지 않아도 되고 누구에게 제압당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자기 몸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나도 다음 생에는 진화된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소망했다.      - '로드킬' 중에서, p.24

 

'인간 여자'들이 1급 보호대상 소수인종으로 분류되어 보호소에서 양육되고 있는 미래 사회. 한 때는 전 세계 인구 절반을 차지했었던 여자들은 아무 데서나 아무렇게나 살게 놔두면 하루도 못 가서 살해당하거나 잡아 먹힐 연약한 인종이 되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그들을 특별하게 보호하고 관리하고 교육해야 할 인종으로 여겼다. 보호소의 소녀들은 성년이 되면 그곳을 떠나 사회로 나갈 수 있었는데, 정부의 엄격하고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서 자격을 검증 받은 남자들과 결혼을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소녀들은 모두 하루라도 빨리 보호소를 나가고 싶어했다. 평생을 갇혀 살았으니 지겹고 갑갑한 게 당연했고, 정해진 규율대로 보호소를 졸업하고 바깥세상의 남자와 결혼하는 미래가 자신들을 구원해 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현재뿐만이 아니라 바로 그 미래에서도 탈출하고 싶었던 소녀들이 있었다. 친구인 두 명의 소녀는 목숨을 건 탈출을 결심한다. 바깥세상에 무슨 위험이 어떻게 도사리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지만, 자칫 개죽음만 되면 어쩌나 두려웠지만 말이다. 그들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당당히 벗어나, 자신들이 모르는 세상 속으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을까. 표제작인 이 작품은 2018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우수작이다.

 

 

 

남편은 나의 안전을 위해준다.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타인들로부터 상처받지 않기를 원한다. 내가 불행하거나 슬프면 자신의 책임이라고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내 삶에서 나의 안위를 가장 위협하는 존재는 다른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다. 나와 나 사이에는 방법 카메라도, 두껍고 튼튼한 현관문도, 잠금 장치도 없다. 나로부터 나를 쫓아낼 수는 없다. 나는 시도때도 없이 나를 침범한다. 그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      - '외시경' 중에서, p.176

 

이 책은 소설가 아밀의 첫 SF 소설집이다. '아밀'은 작가의 필명이고, '김지현'이라는 본명으로 영미문학 번역가로 더 많이 알려졌다. 알베르토 망겔의 <끝내주는 괴물들>, 마리사 마이어의 <루나 크로니클 시리즈>, 마이클 로보텀의 <산산이 부서진 남자>, 제임스 볼드윈의 <조반니의 방> 등 많은 작품들을 우리말로 옮겼다. 작가의 첫 산문집이었던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라는 작품은 다정하고 따뜻했던 기억이 나는데, 소설로 만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소설을 쓸 때 굳이 필명을 쓰는 이유를 알 것도 같은 것이, 번역가일 때와 소설가일 때 두 자아가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아밀은 〈로드킬〉로 2018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우수작, <라비>로 2020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했고 ‘환상문학웹진 거울’, ‘공동창작프로젝트 ILN’, ‘브릿G’ 등 기성문단 바깥 플랫폼에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이 소설집에는 <로드킬>, <라비>를 비롯해 총 여섯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보호소에 갇혀 결혼 상대가 나타가길 기다리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인 <로드킬>, 현대문명에 둘러싸인 소수민족의 마지막 주술사 이야기 <라비>, 미세먼지 청정지역과 그 밖으로 거주 계급이 나뉜 근미래 한국을 그린 <오세요, 알프스 대공원으로>, 가스라이팅과 가정폭력을 소재로 그린 스릴러 <외시경>, 문단 내 성폭력을 소재로 그려진 <몽타주>, 그리고 까마득한 과거, 처녀를 공영하는 어느 섬, 처녀를 구출하는 무사의 이야기인 <공희>이다. 가정 스릴러, SF, 페이크 다큐, 설화 같은 환상 소설 등등 다채로운 세계를 그리고 있는 이야기들이 각각 분위기가 전혀 다르면서도 억압에 처해 있는 인물들이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한 걸음 내 딛는다는 점에서는 교집합을 가지고 환상적인 모자이크를 만들어내는 소설집이다. 아밀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세계 속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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