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자 Run with me 노래를 그리다 1
선우정아 노래, 곽수진 그림 / 언제나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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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살다 보면 누구나 감당하기 어렵고, 버거운 일을 마주하게 된다. 막다른 골목 앞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거나, 바닥까지 추락한 것 같은 심정일 때 그 막막함 속에서 망연자실했을 때, 곁에 있던 누군가가 말없이 손을 내밀어 주면 우리는 그 힘으로 다시 용기를 낼 수 있게 된다.

 

그림책이 주는 특별한 위로가 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겨 가면서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휴식이 되고, 위안을 받고,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이 있다. 특별한 이야기, 긴 설명 없이 그림 자체로 나에게 말을 건네주는 것만 같은 순간, 받게 되는 감동은 여운이 길게 남는다. 이번에 만난 책도 그런 기분이었다.

 

 

가수 선우정아의 정규 3집 앨범 수록곡인 <도망가자>의 노랫말에 그림을 얹은 책이다. 선우정아의 노래와 일러스트레이터 곽수진의 그림이 만나서 너무도 근사한 그림책이 만들어졌다.

 

'도망가자. 멀리 안 가도 괜찮을 거야. 너와 함께라면 난 다 좋아.' 가끔은 억지로 버티고 서는 것보다, 훌쩍 도망가는 시간도 필요하다.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고민은 잠시 버려두고, 답답한 일상 속에서 벗어나 여유를 가져보는 거다. 그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그 덕분에 다시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길 테니까 말이다.

 

 

이 곡은 선우정아가 '누구보다 소중히 여겨주는 마음에 대한 고마움'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언제나 곁에서 자기 자신보다 나의 안위를 살펴주는 이를 위한 마음을 노래에 담아서인지, 노랫말이, 음악이 더 진심으로 느껴진다. 음악을 틀어 놓고 이 그림책을 읽으면 더 좋다. 노랫말에서 전해지는 위로가 곽수진 작가의 따스한 그림과 만나서 배가 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곽수진 작가는 지금은 자신의 곁을 떠난 반려동물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그림으로 담담하게 표현했다고 한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개와의 일상들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적의 노랫말을 그림책으로 만들어낸 <당연한 것들>이라는 책도 흥미로웠는데, 이번에 만난 작품도 역시나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노랫말에 그림을 입혀 또 다른 서사를 만들어낸다는 점도 재미있었고, 이적과 선우정아라는 싱어송라이터의 노랫말이 워낙 시처럼 아름다워서 그림들과 정말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특히나 시원한 바다 풍경과 함께 개와 해변을 산책하는 모습의 표지 이미지가 너무 마음에 들었는데, 제대로 휴가를 가지 못하는 요즘이기에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지치고 힘든 현실로부터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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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재능이 무기가 되는 순간 - 어설픔조차 능력이 되는 시대가 왔다
윤상훈 지음 / 와이즈베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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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애매하다고 생각되는 그 재능, 그 분야가 당사자에게는 가장 편하고, 잘하고, 또 부담 없이 즐기며 오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애매함을 고민하는 이유는 재능의 수준이 결과의 수준을 결정짓는 절대적인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정말 그럴까? 아니다. 그건 착각이다. 지금은 재능의 수준, 재능의 탁월함이 결과를 독점하는 시대가 아니다. 애매함이 나의 무기가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우리가 가진 애매함을 괴로워하지 말자. 애매함으로도 충분하다. 탁월하지 않아도 된다.    p.13

 

평범한 50대 가정 주부가 간단하고 따라 하기 쉬운 요리 레시피로 한 달에 700만 원의 수익을 올리며 남편보다 월급이 많아졌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유튜브는 대한민국 직장인 4명 중 1명이 부업으로 할 정도로 대유행 중인데, 그저 자신이 좋아하고 관심 있는 분야를 가지고 만들어낸 콘텐츠가 인기를 끄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유튜브에 올라오는 대다수의 콘텐츠들은 한 분야의 탁월한 재능을 바탕으로 콘텐츠를 만드는 것보다 애매하고 어설픈 재주에서 출발해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 경우가 훨씬 많다. 우리 또한 그러한 콘텐츠를 매일 소비하고 있고 말이다.

 

이 책의 저자는 단 한 번도 미술을 배운 적 없는 평범한 사무직 회사원에서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국내 유명 갤러리에서 설치 미술 개인전을 열고 해외에서까지 전시회를 펼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직장을 다니면서 글을 쓰는 사람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이유가 뭘까. 오늘날 재능은 결과값을 결정짓는 '절대적인' 존재에서 '부분적인' 요소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일류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재능을 가진 사람보다 자신이 원하는 삶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시대라는 말이다. 이 책은 바로 그 평범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재능, 분야, 관심을 사람들이 반응하고 궁금해하는 상품 또는 콘텐츠로 변화시키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어 대단히 흥미로웠다.  

 

 

 

앞선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무언가를 '대충' 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 알게 됐다. 대충 하기 위해서는 힘을 빼고 작게 시작해야 한다. 눈앞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애매한 재능을 부담 없이 꾸준히 유지해나가는 것이 목적이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쉽게 오해를 한다. 대충 한다는 의미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볍게 시작하는 대신 끝까지 완수하는 것, 꾸준히 하는 것이라는 설명에서 '꾸준히' 한다는 의미를 '끊임없이'로 이해한다. 그런데 꾸준히 하는 것은 끊임없이 하는 게 아니다. 그럼 뭘까?     p.150

 

그렇다면 애매한 재능이란 게 정확히 뭔가. 애매한 재능이란 자랑하거나 내세우기는 애매하지만 누군가가 물어봤을 때 조금 더 잘 알려줄 수 있는 것, 꾸준하진 않아도 흥미를 느끼며 즐긴 경험,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떠나 누구보다 먼저 경험한 사건과 상황이다. 만약 자신의 경험이 이 세 가지 중에서 두 개 이상 겹친다면 바로 그게 애매한 재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들보다 더 잘하는지 못하는지가 기준이 아니다. 재능이 얼마나 탁월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궁금하게 만들 수 있는가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애매함이야말로 호기심을 탄생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재료이니 말이다. 그래도 자신의 애매한 재능을 모르겠다면, 평소에 시청하는 유튜브 영상 채널들을 통해 찾아볼 수도 있다. 이 책에는 유튜브에 있는 시청 기록, 구독, 좋아요 기능을 통해 데이터를 만들고 정제 과정을 거치는 것을 알아보기 쉽게 도표로 싹 정리가 되어 있으니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애매함을 1%의 특별함으로 바꾸는 법'에 대해 다양한 사례를 들어가며 알려준다.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어떤 것도 나의 애매한 재능이 될 수 있겠구나 싶은 지점이 온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재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단념하고 살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도 역시나 공감을 불러올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심심풀이로 여기던 취미, 관심, 재능이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꿈을 이뤄주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니, 얼마나 설레는 상상인가. 이 책은 바로 그러한 꿈같은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어차피 해도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며 마음속에 묻어두고 모른 체했던 그것들을 이제 끄집어 낼 때가 된 것이다. 자, 이제 이 책을 다 읽었다면, 책장을 덮고 나서 움직일 순간이다. 지금이 바로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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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 - 백인 행세하기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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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그녀의 호기심과 망설임을 알고 있다는 듯, 클레어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있잖아, 르네. 난 늘 궁금했어. 더 많은 흑인 여자애들, 너나 마거릿 해머, 에스터 도슨과 같은 애들이 왜 절대로 백인 행세를 안 하는지 말이야. 그건 정말 엄청나게 쉬운 일이거든. 그럴 수 있는 유형에 속할 경우 약간의 용기만 있으면 되거든.”
"배경은 어떻게 하고? 내 말은, 가족 말이야. 네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셈 치고 다른 사람들이 두 팔을 벌려 널 받아들이기만 바랄 수는 없잖아, 안 그래?"
  p.47

 

백인 피부를 지닌 흑인 여성 아이린과 클레어는 어린 시절 친구로 우연히 십이 년 만에 뉴욕의 백인 전용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서 만나게 된다. 아이린은 흑인 남성과 결혼해 흑인복지연맹에서 일하며 평범하게 살고 있었던 것이 비해, 클레어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백인 남성과 결혼해 살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클레어는 타인의 욕망과 편의를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려던 아이였다. 그 단호하고 집요한 면이 결국에는 가난한 고아 신분에서 상류층에 편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의 백인 남편이 극심한 인종주의자라는 것이다.

 

아이린은 클레어가 백인 행세를 하면서 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녀가 자신의 완벽하게 평화로운 삶에 침입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클레어의 적극적인 연락으로 두 사람은 만남을 이어갔고, 어느 날 아이린은 클레어의 남편 잭을 만나게 된다. 그는 아내의 친구들 앞에서 검둥이들을 싫어하고, 혐오한다는 것을 거침없이 드러냈고, 아이린은 끓어오르는 노여움과 분노를 감당하려고 애써야 했다. 아이린은 자신의 균형잡힌 일상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해왔지만, 클레어는 자신의 원래 소속인 흑인 지역 할렘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에 점점 더 그곳으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클레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위태로운 줄타기처럼 불안하다. 흑인에 대한 혐오와 무지로 가득 찬 남편과 살면서 혹시라도 태어나는 아이에게 검은 피부가 나타날까 걱정하고, 단 한시도 백인 행세를 그만둘 수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말했다. "'패싱'은 정말 알 수 없다니까. 우리는 패싱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용서하잖아요. 경멸하면서 동시에 감탄하고요. 묘한 혐오감을 느끼면서 패싱을 피하지만 그걸 보호하기도 하죠."
"살아남아서 번성하고자 하는 종족 본능이지."
"말도 안 돼! 생물학적 일반론으로 모든 것이 설명될 수는 없어요."     p.110

 

이 작품은 1920년대 할렘 르네상스 대표 작가, 넬라 라슨의 작품으로 올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동명의 영화로 개봉했고, 넷플릭스에서도 방영될 예정이다. 제목인 ‘패싱’은 백인과 유사한 신체적 특징을 지닌 흑인들이 자신의 흑인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 행세하는 것을 뜻한다. 만약 당신이 흑인이라면,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백인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피부색이 밝다면 어떨까. 그래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백인 행세를 할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흑과 백이라는 인종 간의 경계에 서 있다면, 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여기, 익숙하고 정다운 것들과 모두 단절한 채 위태로운 승부를 거는 여성과 자신의 정체성을 버려가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전혀 없는 여성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백인 피부를 지닌 흑인 여성이다. 백인 전용 호텔이나 헤어숍을 이용할 때, 그저 상대가 자신을 백인이라 착각하고 보여주는 호의를 받아들이는 정도의 방식으로 패싱을 하는 것과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흑인에 대한 혐오와 무지로 가득 찬 백인 남성과 결혼해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단 한시도 백인 행세를 그만둘 수 없는 나날을 보내느라 숨이 막혔던 여성은 어느 날 우연히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나게 되고, 다시 흑인 지역 할렘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가진 것들을 포기할 생각도 없다. 두 여성의 욕망과 불안이 점차 쌓여서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파국으로 치닫게 될 때 짧은 탄성을 내지르게 된다. 표지 이미지만큼이나 아름답고 섬세하며 매혹적인 작품이다. 경계를 넘어보고 싶다는 유혹을 느껴본 적이 있는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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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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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그리운 부석사' 중에서

 

1973년부터 2021년까지, 정호승의 시인의 50년을 담고 있는 275편의 대표작을 한 권에 담은 시선집이다. 데뷔작인 <첨성대>를 비롯해 널리 사랑받은 <수선화에게>, <산산조각>, 오늘의 시인을 보여주는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당신을 찾아서> 등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시집을 전혀 읽지 않는 이들도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로 시작되는 <수선화에게>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교과서에도 시가 실려 있는 국민 시인이기도 한 그는 그 동안 천 편이 넘는 시를 발표해왔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쉽게 읽히는 시들을 써온 시인이라, 50년이라는 긴 시간의 의미가 더 남다르게 느껴진다.

 

특히나 이 시선집은 275편의 시들을 발표 순서대로 배열해 두었기 때문에, 한 편씩 읽는 것만으로 정호승 시인의 시 세계를 한눈에 만날 수 있다. 혹시 시집이 아직 어렵게 느껴진다면 권말에 실린 김승희 시인과 이숭원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이해를 도와줄 것이다. 이 책은 2014년 출간된 동명의 시집의 개정증보판이지만, 130편 이상의 시가 교체되거나 새로 수록되었다. 그러니 정호승 시인의 시들을 좋아했던 독자들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의미있는 시선집이다.

 

 

 

문 없는 문을 연다
이제 문을 열고 문밖으로 나가야 한다
문 안에 있을 때는 늘 열려 있던 문이
문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갑자기 쾅 닫히고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문 없는 문의 문고리를 당긴다
문은 열리지 않는다                      -'문 없는 문' 중에서

 

정호승 시인의 작품을 절절한 사랑에 대해, 그리고 마음을 비우고 인생을 관조하게 하는 서정시들로 기억했는데, 이번에 만난 시집에서는 조금 더 시간의 폭이 넓어서 그런지 무게감이 느끼지는 묵직한 시들도 많았다. 암울한 현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거나, 정치적 억압 등 시대상을 그리고 있는 시들이 인상적이었다. 시인은 서두에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누구나 시가 가득 들어 있다. 그 시를 내가 대신해서 쓸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는 쓴 사람의 것이 아니고 읽는 사람의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이 아직도 시를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시를 조금 편하게 대해도 된다고, 시는 쉽게 읽어도 되는 거라고 말해주는 초대장처럼 들렸다. 난해성과 다의성으로 다소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여타의 시들에 비해 그의 작품들이 친근하게 읽히는 이유도 바로 이런데 있을 것이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바닥은 보이지 않지만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바닥까지 걸어가야만/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로 시작되는 <바닥에 대하여>라는 마음에 남았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는 말이 뭉클했기 때문이다.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면 되는데, 그 마음 먹기가 참 쉽지 않다. 바닥의 바닥까지 가보고 다시 굳세게 일어선 사람이라면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을 것이다. 누구나 절망의 끝에서, 암담한 심정으로 포기하고 싶을 때, 이 시를 읽어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시가 담담하지만 뚝심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줄테니 말이다. 위로와 응원이 필요한 당신에게, 별을 바라보고 인간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정호승의 시들을 추천한다. 맑고, 깊고, 단단한 시인의 목소리가 희망을 보여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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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호세 홈스 그림, 김수진 옮김, 스티그 라르손 원작, 실뱅 룅베르그 각색 / 책세상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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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는 전체 10부작으로 기획되었지만, 6부로 완성되었다. 스티그 라르손이 3부작을 집필해고, 그의 사후에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이어 3부작을 완성했다. 이번에 그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 프랑스 시나리오 작가 실뱅 룅베르그의 각색, 마블 코믹스에서 화려한 일러스트를 선보였던 호세 홈스의 그림을 통해 그래픽 노블로 새롭게 탄생했다.

 

원작이 무려 688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었던 터라 이번 기회에 그래픽 노블 버전으로 시작해봐도 좋을 것 같다. 영화 같은 편집과 군더더기 없는 스토리 전개로 누구라도 쉽게 스티그 라르손의 세계에 들어가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픽 노블 버전을 만나면서 '밀레니엄' 시리즈의 압도적인 주인공이자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인 리스베트가 어떻게 그려질 지 매우 궁금했다. 리스베트는 신장 154, 몸무게 42키로, 거식증 환자처럼 삐쩍 마른 몸매로 코와 눈썹에 피어싱을 하고, 용문신을 한데다 짧게 커트한 머리는 새카맣게 염색하고 다닌다.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어떤 종류의 고등 교육도 받은 적이 없지만, 사진 기억력을 가지고 있고, 컴퓨터에 관한 천재적이며, 전설적인 해커로 통한다. 오토바이와 컴퓨터에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한번 받은 모욕은 절대 잊지 않는다.

 

'밀레니엄' 시리즈는 이미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기에, 어느 정도는 영상화된 이미지에 부합되는 캐릭터로 표현된 것 같다. 그리고 호세 홈스의 그림이라 마블 코믹스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있기도 한데, 그래서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야기는 잡지사 '밀레니엄'의 기자 미카엘이 부패한 재벌을 폭로해 각종 소송에 시작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결국 잡지사의 존폐 여부에서 '밀레니엄'을 나오게 되는데, 마침 그에게 재벌 총수가 44년 전에 발생한 실종사건을 재조사할 것을 의뢰하게 된다. 자신을 궁지에 몰아 넣은 부패 재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다는 말에 그 제안을 수락한 미카엘은 조사에 착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천재 해커 리스베트와 함께 재벌 가문에 숨겨진 엄청난 비밀과 마주하게 된다.

 

원작이 기득권 세력들의 탐욕에 대해 고발하고 응징하는 사회파 추리 소설로서 묵직한 한 방을 보여주었다면, 그래픽 노블 버전에서는 조금 더 대중적인 느낌으로 풀어내어 영화 같은 분위기로 만들어진 것 같다.

 

 

스티그 라르손의 원작을 워낙 좋아했기에, 그래픽 노블 버전도 계속 시리즈로 출간이 될 지 궁금해진다. 차갑고 음울한 노르딕 누아르와 대중적인 할리우드 영화 사이에서 접점을 찾은 듯한 작품이라 그래픽 노블 버전으로도 다음 이야기를 계속 만나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기존에 만들어졌던 영화 외에 현재 시리즈의 히로인인 리스베트를 내세운 TV 시리즈가 제작될 예정에 있다고 하니, TV 버전의 리스베트는 또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해진다.

 

혹시 아직까지 밀레니엄 시리즈를 읽지 않았다면,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말아야 할만한 이유가 생긴 것 같다. 나는 '밀레니엄' 시리즈만큼 뛰어나고 완성도 있으면서도, 재미있고, 스릴 넘치고, 도전적이고, 매혹적인 작품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엄청난 분량 때문에 선뜻 소설을 시작하지 못했다면, 그래픽 노블 버전으로 조금 더 쉽게 그 엄청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래픽 노블의 매력에 빠졌다면, 스티그 라르손의 원작 소설을 찾아 읽게 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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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8-11 14: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그림체에서 느껴지는 이 힙함! 영화에서도 캐릭터가 선명했는데 주인공 모습 넘 멋진데요.

피오나 2021-08-13 18:51   좋아요 0 | URL
워낙 독보적인 캐릭터긴 하죠.ㅋㅋ
마블 작품을 했던 작가의 작품이라.. 마블 코믹스 느낌도 나고 원작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괜찮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