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지기들
에마 스토넥스 지음, 오숙은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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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을 에워싼 이 바다가 사람에게 헛것을 보게 만든다. 주임이 말해줬다... 사막의 신기루, 바다에서도 똑같은 신기루가 나타난다. 당신이 믿지 못할 온갖 색깔들. 물보라와 소용돌이, 수면 위에서 훨훨 날아다니다가 사라지는 형체들. 평평한 바다에서도 물은 잘게 쪼개지고 부서지며, 검은색을 띠는가 하면 밤새 바깥에 내놓은 쓰레기 봉지처럼 떨면서 다가온다. 당신은 하늘에 구멍을 내고 그 구멍에 손가락을 찔러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만져볼 수 있을 것 같다... 날마다 바다와 함께 살다 보면, 바다는 당신 안에 무엇이 있든 그것을 꺼내어 비춰준다.       p.205

 

바다 한가운데의 등대에 남자 셋뿐이다. 거기에 특별한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냥 세 명의 남자와 바다가 전부다. 사방 수 킬로미터 내에는 바다, 바다, 그저 바다밖에 없다. 외로움, 고립감, 단조로움이 함께 하는 그 생활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 바로 등대원의 삶이었다. 네 명의 남자가 교대로 세 명씩 8주간 등대에서 일을 하고, 4주간 집으로 가서 휴가를 보내는 교대 근무를 반복해 왔다. 그 날은 지긋지긋한 폭풍우 때문에 며칠이나 배를 띄우지 못하고 있다가, 겨우 날씨가 풀려 교대할 등대원을 데리고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바다 한가운데 솟아 있는 타워 등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 있어야 할 등대원 세 명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 빠져나간 징후도, 도주한 흔적도 없고, 등대원들이 어디론가 떠났음을 암시할 만한 단서도 보이지 않았다. 출입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두 개의 벽시계는 같은 시각에 멈춰 있었으며, 식탁에는 식사를 앞둔 듯 식기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주임 등대원의 기상 일지에는 폭풍이 타워를 맴돌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그날 하늘은 맑았다. 이곳에 있던 세 남자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어떤 기이한 운명이 이 불운한 세 남자에게 닥쳤던 것일까.

 

 

 

가보지 않은 길이 수없이 많아요. 만약에 내가 아서를 만나지 않았다면? 만약에 패딩턴 역의 매표소 줄에 서 있던 나에게 그이가 인사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그이가 등대 관리소에 취직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우리가 휴가를 가지 않았다면, 또는 그 여름 별장이 지어지지 않았다면, 또는 그 남자가 월요일에 출근하기로 결심해서 돈을 더 많이 벌고, 그래서 여기가 아닌 외국에, 투산의 언덕배기에 작고 예쁜 집을 지었다면? 만약 내가 그날 목욕을 하지 않았다면?         p.382

 

1900년 스코틀랜드 앞바다에 있는 엘런모어 섬에서 등대지기 세 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건이 있었다. 이 작품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등대원들이 사라진 미스터리와 감춰진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타워 등대에서의 삶에 대한 일화와 경험 가운데 일부는 실제 등대원들의 회상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작가의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이다. 1972년에 등대원 세 명이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나고, 20년 뒤인 1992년에 해양 미스터리에 감춰진 진실을 밝히러 나선 모험소설가가 등대원의 아내들과 연인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식으로 교차 구성이 되어 있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각각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어, 전체 사건의 퍼즐을 맞춰 가는 과정 내내 긴장감 넘치는 몰입감을 안겨 준다.

 

대부분의 범죄 소설에서 피해자의 가족, 친구, 주변인물들을 지배하는 것은 '회한'이라는 감정일 것이다. 시간이 그대로 박제되어 머릿속에서 '만약'이라는 단어를 지울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때 왼쪽으로 가지 말고, 오른쪽으로 갔더라면 이라는 선택에 대한 후회, 다시는 되돌릴 수 없지만, 다시 한번 시간의 끝을 잡고 돌아가고 싶은 회한의 선택들. 하지만 과거로 되돌아간다고 한들, 나라는 인간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결국 내가 하는 선택은 같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생에서 하는 수많은 결정들로 인해, 결국 우리의 미래가 달라진다는 것, 그러니 모든 이야기에는 한 가지 이상의 측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세 남자가 고립된 등대에서 느끼는 생각과 감정의 변화,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털어 놓는 진실과 거짓말이 안겨주는 충격이 파도처럼 읽는 이를 뒤덮는 작품이다. 책을 읽는 내내 파도가 솟구치고, 바닷물이 뱃머리를 들이받고 부서져 내리는 장면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했다. 그 속에 엷은 안개와 함께 위엄 있게 서 있는 고독한 등대 속에서 벌어진 미스터리 속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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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선 열차와 사라진 아이들
디파 아나파라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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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된 거라면, 우리가 사건을 해결하면 되잖아." 내가 말한다. "<경찰 순찰대>를 보면 실종자를 찾는 방법이 다 나오거든. 먼저......"
"어쩌면 정령이 데려갔을 수도 있어." 목에 건 닳아빠진 검은 줄 목걸이에 달린 금색 타위즈를 만지면서 파이즈가 말한다. 그 부적이 파이즈를 사악한 눈과 못된 정령들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준다.
"정령이 어디 있다고 그래. 아기들도 안 믿겠다." 파리가 말한다.     p.36

 

쓰레기장과 높다란 장벽을 사이에 두고 신도시와 마주 보는 빈민가에 사는 아홉살 소년 자이. 작은 양철 지붕 집들이 마구 뒤섞여 있는 이곳에선 공중화장실에도 돈을 내야 사용이 가능하다. 경찰들은 지저분한 마을을 통째로 밀어버리겠다고 벼르고 있었고, 그들을 다 쫓아내는 날이 언제 찾아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자이와 같은 반 친구인 바하두르가 실종된다. 바하두르의 아빠는 최악의 주정뱅이였고, 엄마는 일하느라 일주일 정도 집을 비운 터라, 아이가 사라진 지 벌써 5일째였는데 이제야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이다. 바하두르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누군가에게 납치된 것일까, 아니면 정령들이 데려간 걸까.

 

<경찰 순찰대>와 <범죄의 도시> 같은 드라마를 좋아하는 자이는 바하두르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확신한다. 수백 편의 드마라를 봤고, 탐정들이 나쁜 놈을 어떻게 잡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자이는 가장 친한 두 친구 파리와 파이즈를 조사원으로 고용하고 탐정이 되어 실종된 친구를 찾기로 한다. 자이 탐정단, 일명 ‘보라선 정령 순찰대’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빈민가의 아이들은 계속해서 실종된다. 마을 사람들은 혹시라도 자신의 아이가 납치될까 봐 마음을 졸이고, 사건의 실마리는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오늘은 바하두르와 다른 아이들이 사라지기 전의 어느 날 같다. 내가 탐정도 아니고 찻집 종업원도 아니었을 때의 어떤 하루 같다. 좋은 날, 어쩌면 가장 좋은 날이다. 탐정이 되는 건 너무 힘들다. 어쩌면 나는 탐정이 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자수스 자이는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이쯤에서 은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커서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다. 엄마는 내가 받아 온 성적표를 볼 때마다, 파리는 회계사나 지방공무원이 될 거고 나는 파리의 하인이 될 거라고 말한다.        p.283~284

 

'아이들에 관한, 오직 그 아이들만을 위한 이야기'라고 작가가 말했듯이, 이 작품은 빈민가 아이들의 유쾌함과 당당함이 페이지마다 묻어나는 작품이다. '보라선 정령 순찰대'의 멤버인 자이와 파리, 파이즈가 각각 성격이 달라 귀여운 매력을 발산한다. 자이는 공부는 잘하지 못하지만, 수사 드라마를 수백 편 본 애청자로 그렇게 쌓은 수사력을 적극 활용한다. 파리는 늘 도서관 책을 끼고 사는 지적인 소녀로 팀내에서 지식 부족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해준다. 파이즈는 팀의 행동대장격으로 정령에 대한 많은 지식으로 수사에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수업을 빼먹고 보라선 열차를 타기도 하고, 값비싼 보라선 전철 푯값때문에 시장의 찻집에서 일을 하고, 찻집 종업원이라는 신분은 유령시장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며 유령시장과 빈민가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파고드는 자이 탐정단의 활약은 시리즈로 이어져도 좋을 만큼 흥미로웠다.

 

2021년 에드거 상 수상작으로 디파 아나파라는 데뷔작인 이 작품으로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을 아우르는 영미 문단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인도 출신 영국 작가인 디파 아나파라가 뭄바이와 델리 등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던 당시의 경험과 인도에서 나고 자란 기억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하루에 180명이나 되는 어린이가 실종되고 있으며, 이런 사건은 유괴범이 체포되거나, 혹은 잔혹한 범행이 세간에 알려져야만 비로소 뉴스에 나온다고 한다. 언론은 범인들에게만 관심을 쏟는데 반해, 디파 아나파라는 사라진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빈곤 가정의 실종된 아이들이 통계수치로 전락하지 않도록, 숫자 뒤에 숨겨진 아이들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인도의 빈민가라는 이국적이고 낯선 풍경을 실제 그 거리를 걷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어, 인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도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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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류 인구
엘리자베스 문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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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아는 그 모든 상념으로부터 물러나 공구창고 안의 시원한 새벽 그늘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이곳에 있기로, 떠나지 않기로 했다. 갑자기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마치 추락하고 있는 것처럼, 발밑의 땅이 사라지고 행성의 중심부까지 떨어질 것처럼. 기쁨인가, 공포인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심장이 뛸 때마다 그의 피가 뼈와 근육에 똑같은 메시지가 전달된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떠나지 않을 것이다.      p.28

 

40년이라는 세월은 누군가에게는 평생이고, 누군가에게는 그 이상이다. 행성 콜로니 3245.12는 지구를 떠나 인류가 40년째 거주하고 있는 행성이다. 그러던 어느 날, 콜로니 거주를 관리하는 컴퍼니가 사업권 상실을 이유로 주민들에게 이주 계획을 발표한다. 컴퍼니 대리인들은 주민들에게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아도 된다고, 모든 것이 제공될 거라고 말했지만, 이주 경험이 있는 오필리아는 짐을 가져가려면 이주 준비에 30일 이상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필리아는 콜로니 정착 초기부터 이곳에서 남편과 자식들의 죽음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아이를 키우며 살아온 것이다. 컴퍼니는 이제 칠순인 오필리아가 생산성이 없다는 이유로 이주 비용을 개별적으로 부담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식적인 직업 없이 정원과 집을 가꾸고 요리를 거의 도맡아 한다는 이유로 쓸모없다는 취급을 당하면서 오필리아는 분노가 치민다.

 

이미 떠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그녀의 다짐은 굳건해졌고, 아들 부부에게 말한다. 내가 남으면 너희가 비용을 부담할 필요도 없고, 어차피 난 극저온 탱크에서 견디지 못할 거라고. 여기 남아 있겠다고 말이다. 오필리아는 그 어떤 요구도, 충고도, 폭력도 가해지지 않는 혼자만의 세상, 자유를 꿈꾼다. 결국 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혼자 남게 된 오필리아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텅 빈 행성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방해도 없고 성난 목소리도 없고, 그것은 그만두고 이것을 하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곳에 살아남은 생명체가 자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100여 개체의 아주 큰 갈색 동물,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동물들이 등장한 것이다. 버려진 마을에서 먹을 만큼만 정원 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살려던 오필리아의 계획은 그렇게 달라진다. 그런데 지난 40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괴동물들이 대체 왜 오필리아에게 접근한 것일까. 혼자 남겨진 70대 노인은 그들과 어떻게 공존하게 될까.

 

 

 

외로움이 돌처럼 무겁게 오필리아를 내리눌렀다. 억지로 정원을 돌보고 억지로 소와 양을 살피러 가면서 간신히 하루하루 버텼다. 정신을 차려보면, 하던 일을 멈추고 얼어붙어 입을 헤벌린 채 들릴 리 없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아들과 며느리와 그가 거의 평생 동안 알고 지낸 이들이 떠났을 때는 이렇지 않았으면서. 그때 그는 자유롭다고 느꼈다... 이제 오필리아는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좁은 장소에 갇힌 것 같았다.     p.106

 

정말 오랜 만에 출간된 엘리자베스 문의 신작이다. 그녀의 작품은 <어둠의 속도>이 2007년에 국내에 출간된 이후로 소식이 없었는데, 이번에 개정판과 신작이 함께 출간되어 너무 반가웠다. 네뷸러 상 최우수 장편상을 수상한 <어둠의 속도>만큼이나 이 작품 역시 세계 주요 SF문학상인 로커스상, 휴고상,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상 최종 후보작으로 오르며 화제였던 작품이다. 특히나 '외계인과 인간 여성 노인'이라는 존재의 만남이라는 설정으로 70대 노인의 행성 생존기를 그리고 있어 굉장히 색다르면서도,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엘리자베스 문은 그 동안 장애를 '다름'이 아니라 '결핍'으로 보는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회가 정한 쓸모와 무쓸모의 경계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 왔다. <어둠의 속도>에서 자폐인의 일인칭 시점으로 섬세하게 이야기를 그려냈다면, <잔류 인구>에서는 70대 여성 노인을 등장시켜 사회가 정한 기준과 시선을 속시원하게 부숴 버린다. 보통 외계생명체가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첫 만남의 대상을 노인 여성으로 설정하는 경우란 흔치 않다. 그것도 사회로부터 가치없고, 쓸모없다는 이유로 버려지다시피 했던 존재로 말이다. 오필리아는 과학자나 인류학자들도 어려워했을 일을 거뜬해 해낸다. 외계 생명체와의 만남을 돌봄능력과 인내심등을 활용해 배려하고, 인내하며 소통하고, 더 나아가 그들만의 '공동체'를 꾸려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야기가 후반부에 이르렀을 때 오필리아가 다시 찾아온 사람들과 외계 생명체들과의 사이에서 일종의 다리 역할을 해주는 장면이 있는데, 어리석은 그들에게 현명한 진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어 굉장히 뭉클했다. 무지로 인해 외계생명체들을 공격하려는 이들에게, 단호하게 그들이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설득하는 모습은 70대 노인이 아니라 마치 여전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동안 만나본 적 없던, 아주 특별한 SF소설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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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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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는 속도가 없어. 어둠이란 빛이 없는 공간일 뿐이야.” 에릭이 말한다.
“만약 누가 중력이 1 이상인 세상에서 피자를 먹으면 어떻게 될까?” 린다가 묻는다.
“몰라.” 데일이 걱정스런 말투로 대답한다.
“무지(無知)의 속도야.” 린다가 말한다.
나는 잠깐 어리둥절했다가 이해한다. “무지는 지(知)보다 빨리 확산하지.” 린다가 씩 웃고 고개를 꾸벅인다. “그러니 어둠의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빠를지 몰라. 빛이 있는 곳에 늘 어둠이 있어야 한다면, 어둠이 빛보다 먼저 나아가야지.”     p.22

 

2004년 네뷸러 상 최우수 장편상 수상작으로 국내에는 2007년에 출간되었다가, 이번에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개정판이 나왔다. 제목인 '어둠의 속도'는 엘리자베스 문이 자폐인 자신의 아들과 나누었던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날 아들이 '빛의 속도가 1초에 30만 킬로미터라면, 어둠의 속도는 얼마'냐는 질문을 한 것이다. '어둠에는 속도가 없다'고 대답한 그녀에게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더 빠를 수도 있잖아요. 먼저 존재했으니까요.' 라고. 이 작품의 주인공인 루 애런데일 역시 어둠의 속도에 대해서 고민한다. 자폐인의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 놀라운 작품의 세심함과 깊이는 실제로 자폐증을 수십 년간 바로 옆에서 지켜 보아온 시간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자폐를 비롯한 모든 신체적 장애를 완전히 치료하는 것이 가능해진 근미래이다. 하지만 해당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 이미 성인된 사람들은 그 상태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 장애인으로, 자폐인으로, 사람들이 '비정상'이라고 부르는 상태로 말이다. 장애를 '다름'이 아니라 '결핍'으로 보는 시선때문에 그들은 정상화 수술을 통해 '정상'이 될 지, 혹은 '비정상'으로 남을 지 선택해야만 한다.

 

 

 

“나 자신이 누구인가는 저에게 중요합니다.” 내가 말한다.
“그러니까, 자폐증을 앓는 게 좋다고요?” 의사의 목소리에 꾸중하는 듯한 어조가 섞인다. 그는 나 같은 사람이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나는 나 자신이기를 좋아합니다. 자폐증은 나 자신의 한 부분입니다. 전부가 아닙니다.” 나는 내 말이 사실이기를, 내가 내 진단명 이상이기를 바란다.       p.394

 

루는 전원 자폐인으로 구성된 한 거대기업의 특수분과 ‘A 부서’에서 근무 중이다. 검색 알고리즘과 패턴 분석에 뛰어난 그들의 특수한 능력으로 인해 생산성 면에서는 뛰어 났지만, 정상인들과는 다른 그들을 위해 특별 복지혜택을 제공하고 있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상사도 있었다. 새로운 상사는 사내 연구소에서 새로 개발 중인 ‘정상화 수술’을 통해서 그들이 정상이 된다면 특별 복지혜택을 제공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A 부서 직원 전원은 정상화 수술 강요를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인권이 있었고, 치료받도록 강요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물론 상사는 병들고 손상된 상태로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과연 기술의 발전은 질병과 장애를 가진 이들을 구원하는 것일까.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자폐증이나 그외 모든 장애를 완전히 뿌리 뽑기를 원하는 것일까. 자폐증은 의료 전문가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도록 치료하거나 해결해야 하는 결핍인 것일가. 이들은 혼란에 빠진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행복하다고, 정상이 되고 싶지 않다고, 이대로 잘 살고 있는데, 왜 바꿔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자폐가 사라지더라도 과연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을 건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이 작품은 경계 바깥에 선 소수자의 시선으로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내면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느끼는 루의 시점으로 그려지는 이야기는 자폐인을 동정이 아니라 공감하고 다름에 대해 이해하도록 만들어 준다. 정상’은 정체성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이 작품은 신체적 장애가 사회적 장애로 이어지는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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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더 이상 살찌지 않는 식단 - 과학으로 증명해낸 탄수화물.지방.단백질 황금 밸런스
이지원.김형미 지음 / 북폴리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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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는 몸의 시스템이 바뀌는 나이다. 사춘기 이후 우리 몸은 생애 최고의 시기인 20~30대를 지나 40대가 되면서 본격적인 노화에 접어든다. 가장 큰 변화는 성호르몬과 신체활동량의 감소로 인해 근육 및 근력이 저하되고 생체 효소의 활성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p.37

 

우리 몸의 시스템은 40대 이후로 확연하게 달라진다고 한다. 성호르몬과 신체활동량이 줄어들면서 근육 및 근력이 저하되고 생체 효소의 활성도 떨어짐에 따라 다양한 생리적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야금야금 체중이 증가하고, 체중 조절도 젊을 때처럼 쉽지 않다. 뱃살이 두둑해지고 허리둘레가 늘어난다. 근육이 줄어들기 때문에 팔다리가 가늘어진다. 이러한 변화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점점 더 많은 질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으니, 지금 40대라면 운동화 끈을 다시 매어야 할 시점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뭐부터 바꿔야 할까.

 

 

이 책은 '음식'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매일 먹는 음식만큼 직접적으로 우리 몸에 영향을 주고 지속적으로 자극하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오랜 임상 연구를 통해 가장 효율적이고 건강한 다이어트 식단이 무엇인지 찾아냈고, 40대 이후의 올바른 식단으로 '지중해 식단'에 주목했다.

 

지중해식은 그리스, 이탈리아 등 지중해 연안에 사는 사람들의 식습관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장수 인구가 많고 만성질환의 유병률이 낮은 이 지역의 식사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효과가 인정되어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탄수화물 40%, 지방 40%를 섭취하는 지중해식은 면역력을 높여주고, 수명까지 연장해준다고 하니 궁금했다.

 

 

40대는 단순히 몸무게를 줄이거나 외모를 가꾸는 것이 아니라 건강 관리 차원에서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 지중해 식단은 단순히 칼로리를 줄여서 체중 감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만으로 동반되는 당뇨병, 이상지질혈증, 대사증후군, 지방간을 개선하고 혈관 기능을 강화해 심혈관 질환에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가장 추천할 만하다.      p.116

 

이 책은 40대가 되면 식단을 왜 바꿔야 하는지, 왜 지중해 식단이 가장 적합한지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고, 집에서도 간단하게 요리할 수 있는 '한국형 지중해 식단'의 레시피도 소개하고 있다. 지중해 식단의 영양소 구성, 지중해 식단에 자주 사용되는 식품, 매일 지중해 식단 쉽게 따라 하기 등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어 낯설지만, 어렵지는 않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실제 일상에서 적용할 수 있어야 그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지중해 식단은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한식 식재료로 만드는 지중해 식단에 대한 부분이었다. 지중해에서만 나는 특별한 식재료를 사용해야 한다면 그야말로 그림의 떡에 불과할테니 말이다. 지중해 식단 피라미드에 맞춰 우리나라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식재료들을 자세하게 알려주고, 지중해식 조리법에 대해서도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에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웬만한 요리책 부럽지 않을 정도의 레시피를 제공하고 있다. 한식의 두부선을 지중해식 재료로 재해석한 요리부터 시작해 한치구이샐러드, 꽈리고추오징어튀김, 장어테린, 새우장올리브김밥, 어묵밀푀유 등 다양한 레시피를 담고 있어 당장이라도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지금 마흔 즈음, 30대 중반 이후의 나이라면 혹은 의학적으로 가장 효과가 좋은 다이어트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오늘보다 내일이 더욱 젊어지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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